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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회계] 교회 내부통제제도의 구축과 운영
    내부통제제도(internal control system)란 한 조직이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회계적 오류나 부정 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절차로써, 교회회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두 사람 이상이 상호 견제 속에 업무를 분담하고, 또 실무상 내부적으로 필요한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을 때 효과가 배가 되어, 교회 사역이 더욱 원활하게 움직여 갈수 있다는 점이다. 본 칼럼의 목적은 교회회계 집행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실무사항들을 내부통제제도의 관점에서 매뉴얼을 정리, 제시하는 데에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회계업무의 분담과 부서 간 구분이다. 회계장부기록자와 재정집행자는 2명이상으로 하여 상호 견제 속에 업무를 추진하도록 한다. 현금은 도난, 분실, 횡령 등 다양한 위험요소를 지닌 자산이므로 사고 예방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회계부서는 교회규모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부서를 적절히 분장해 위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편성한다. 예를 들어 전체를 관할하는 경상부서를 중심으로 건축부, 선교부, 전도부, 장학부등으로 나눔이 바람직하다. 즉 업무는 부서별로 나누어 집행하고, 재무제표는 경상부서에서 통합하여 작성하도록 한다. 둘째, 헌금계수와 수입관리이다. 주일 오전예배 후 재정부원(위 편성시 약10명)은 정해진 장소에서 헌금을 계수하고 십일조, 감사, 건축, 선교, 전도, 장학, 구제, 절기, 주일헌금 등의 금액을 확인한 후, 온라인 헌금과 합산(새벽기도회 등 모든 주중헌금 포함)하여 부서별 수입을 기록한다. 기록은 전산회계 프로그램이나 엑셀 등을 사용한다. 또한 헌금수입은 전액 월요일 오전 중으로 금융기관에 입금하고, 가능한 한 교회가 법인등록을 하여 모든 부서통장이 체계적이며 투명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한다. 법인등록이 어려운 교회는 재정부장 또는 회계담당자의 책임하에 공인인증을 개설, 관리한다. 셋째, 지출의 신청, 결재와 집행이다. 회계담당자는 사례비와 같이 매주 발생하는 고정비용을 포함해, 교육기관 등 각 부서에서 신청한 지출항목을 주일 오전 중으로 집계, 집행에 필요한 전표를 작성한다. 전표는 오후예배 후 회계담당자, 재정부장, 담임목사의 순으로 사인을 하여 최종결제가 이루어지며, 이때 주별 수입과 지출을 모두 표시한 주간 보고서가 동시에 작성된다. 결제가 완료되면 회계담당자는 주일저녁, 인터넷을 통해 각 기관과 거래처에 신청된 금액을 온라인 송금하여 회계업무를 종료한다. 즉 교회의 수입과 지출 관리는 모두 온라인 형태로 이루어져 감사자료를 확보하고,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시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주일 현금거래는 외부강사 사례비 지급 등을 제외, 가급적 피하도록 한다. 전기료, 인터넷, 수도광열비와 같은 제세공과금은 자동이체를 하는 것이 편리하다. 넷째, 예산 및 결산과의 관계이다. 교회는 매년 11월30일을 회계년도 결산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재정부는 12월 첫째 주 예산심의 기초소위원회, 둘째 주 예결산위원회, 셋째 주 제직회 및 공동의회를 통해 예결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를 하여야 한다. 또한 이때 편성된 예산은 다음연도 수입?지출 집행의 중요 기준점이 된다. 즉 예산과 비교해 각 헌금의 수입목표 달성률을 분기별로 확인하고, 지출내역 및 부서의 재정신청이 예산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 자료가 된다. 또한 재정부는 교회시설을 관리하는 관리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여, 건축, 사택, 차량운반구, 방송음향시설 등 교회 재산의 구입과 폐기처분, 감가상각 등의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효율적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다섯째, 감사와 공시, 보고체제이다. 감사는 11월말 결산 후, 경상부서부터 교육기관까지 교회의 재정후원을 모든 기관과 부서를 대상으로 ①장부상의 현금예금과 기말 통장잔액 일치, ②재무제표 작성과 회계장부 표시, ③재정집행과 지출, ④영수증과 감사증거 자료의 적정성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내부통제제도 체제를 갖춘다(제8회 칼럼 “교회 회계감사의 방법과 절차”참조). 공시와 보고는 재무제표와 주요 회계자료에 관한 정보를 교회 이해관계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당일 외에도 희망 시 관련 자료를 열람(최소 3년)할 수 있도록 비치할 필요가 있다. 다음호는 교회와 세금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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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시사칼럼] 우리의 성지(聖地)는 어디인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聖地)로 불렸습니다. 크고 굵직한 시국 사건 때면 으레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천주교(天主敎)는 국내외 언론과 통신에 수없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었습니다. 만일 경제적으로 환산한다면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누린 셈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 천주교 신자는 인구 비율로는 1985년 4.6%에서 1995년 6.6% 그리고 2005년 10.9%, 숫자로는 20년 동안 186만 명에서 515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통계청 인구센서스 자료). 물론 정치적 요인이 천주교 급성장의 절대유일의 원인은 아니겠습니다만, 이미지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민주화를 거치면서 명동성당이라는 상징이 쌓은 강력한 이미지가 천주교 부흥의 중요한 열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을 정점으로 명동성당은 서서히 정치적 도피처의 역할을 지양(止揚)해 왔습니다. 대신 불교의 조계사가 그 후임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각종 파업을 주도하고 쫓기던 노조원들이 숨어든 곳이 조계사였으며 최근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쫓기고 있는 인사들이 피신한 곳도 역시 조계사입니다. 한 때는 “산사에 찾아온 짐승도 쫓지 않고 먹이를 주는 게 불교 정신”임을 강조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조계사를 ‘현대판 소도(蘇塗)’로 비유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원효대사의 ‘화쟁(和諍)’ 사상을 강조하고 나왔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인한 사회 갈등을 화해하고 소통하는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겁니다. 당연히 조계사는 지금 국내외 언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조계사 내부에서 신도회가 반발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마저도 비중 있는 기사로 다루어지는 형편입니다. 팩트(fact)는 쉽게 사라지고 이미지(image)는 끈질기게 잔존합니다. 첫인상이 나쁘면 두고두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인색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동성당이, 조계사가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금방 잊습니다. 대신 ‘민주화의 성지’, ‘불교 정신’, ‘화쟁과 화해’와 같은 이미지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작년 4월 실시한 한국 갤럽의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호감 가는 종교’로 불교 25%, 천주교 18%, 기독교가 10%였습니다. 10년 전인 2004년에는 불교 37%, 천주교 17%, 개신교 12%였습니다. 민주화의 성지는 사라졌어도 천주교는 여전히 약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불교계는 10년 간 잃어버린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작금의 조계사를 상징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이미지 전략을 세우고 실제로 이미지 구축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간 외국인 승려를 부각시킨다든지 청년 멘토를 자처하는 젊은 학승(學僧)들을 중용한다든지 하는 인적 이미지 작업과 템플 스테이(temple stay)를 중심으로 하는 물적 이미지 작업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지(聖地)는 어디 있습니까?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했을 때 빚진 자 원통한 자 소외된 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삼상 22:1-10). 좁은 이스라엘 땅에 도피성을 여섯 개나 예비했던 것도 같은 취지였습니다(수 20:1-9). 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교회 중 몇 개가 있다고 자랑하는 한국 교회입니다. 그럴싸한 외양에 아름다운 부대시설을 갖춘 교회가 즐비한 21세기 한국 교계입니다. 그런데 왜 쫓기는 자, 피난하는 자들이 교회를 찾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입니까? 성지(聖地)와 화해(和解)와 피난처(避難處)는커녕 왜 이토록 부정적인 이미지만 잔뜩 득템하고 있을까요? 바야흐로 이미지 전쟁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이미지 전략을 따로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십자가 주님의 희생과 겸손의 모습으로 돌아가 정작 잃어버린 우리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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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성경인물탐구] 베드로의 신앙과 성품(5)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사랑을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한때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나 예수 부활 후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하고 헌신적인 신앙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아 예수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할 때에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질 경우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세력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며, 자신들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복음 증거자들을 협박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막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생명을 건 순교의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과거의 연약한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예수의 부활하심 속에서 영생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소유할 때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한 신앙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복음 증거자들의 신앙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서신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자신을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으뜸이 되고 싶어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도 자신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시하다가 예수께 책망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에도 베드로는 칼을 들어 말고의 귀를 자름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지켜보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자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한없이 약한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에 자신의 교만했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겸손해질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본래의 교만한 성품을 꺾고 겸손하여질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을 받고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예수의 수제자라는 이유로 교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큰 사명이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는 겸손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을 때만이 사람이 본질적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은 죄악성이 억제되고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만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겸손한 자아의식은 모든 복음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것이 복음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겸손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낮아지심으로 본이 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사랑하심같이 예수의 양들을 사랑하여 헌신적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를 따라 복음 사역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헌신이 기반이 되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 세상 모든 만민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함으로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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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은혜의 말씀] 보물찾기 (요 14:6)
    신앙생활도 질문과 응답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선뜻 대답하고, 질문과 응답이 신앙생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생 사람을 찾습니다. 짝지를 찾아서,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여러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임자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찾아서 헤매고 사람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하지만 사람 때문에 우리가 상처를 받고 사람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 하는데, 늘 길을 묻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이 산이 아니네, 아까 저 산 인가보다.’ 그게 인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보물 찾듯이 찾아가고 무언가를 위해서 나가지만, 성경은 허물과 티가 없는 영웅들이 아니고 별별 인간들이 다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가 되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만남과 만짐과 만듦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임자를 만난 것이고,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부활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터치해주시고 만져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형되어지고 빚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모셔드리고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하고 친해져야 됩니다. 주님과의 친밀감, 연합이 되는 게 성도의 목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 진리의 말씀이 한 구절 와 닿으면 병이 뚝 떨어지고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고, 그래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를 만났으니, 진리를 알았으니 후회도 없고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천하에 어떤 자리를 꿰 찰지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것입니까? 예수님 따라가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생명을 얻습니다. 부활, 부활신앙, 많은 병자들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부활신앙 하나가지고 나갑니다.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다’라는 그 한마디를 붙들고 사망, 흑암, 어두움, 죽음, 무덤의 권세를 파해 이기고, 나는 알았네, 나는 보았네, 나는 찾았네, 이렇게 살아가니까 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존재도 그렇게 말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내가 길이다. 내가 문이다. 내가 선한 목자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다.’ 하십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어떻게 보면 서글프고 시대에 뒤 떨어지는 것 같고, 왕따 당하는 것 같고, 멋도 없고 맛도 없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에 ‘내가 진리다.’하십니다. 길을 찾아 방황하지 마세요. 진리를 찾아 기웃거리지 마세요. 세상에 어떤 것도 일리는 있지만 진리가 아닌 게 많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부활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은 누구신가?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찾아가고 주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했으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길을 찾은 것이고, 진리를 얻은 것이고, 생명을 확보한 것이고, 이 부분에서 틀림이 없기에, 이 말 듣고 이리가고 저 말 듣고 저리가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풍조에 휩쓸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 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 한분, 예수님만으로 필요충분 완전한 삶을 살아드리고, 주를 따라가는 주를 사랑하는 주와 닮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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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성공칼럼] 옷 속에 사랑이
    사람들은 수많은 종류의 고통스러운 옷을 입고 살아간다. 즉 병이라는 옷,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옷, ‘못 생겼다’라는 옷, 장애라는 옷 등이다. 이 옷 속에 ‘본래의 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본래의 나는 보지 못하고 육체라는 옷만 본다. 사람들은 옷만 보고 옷으로 상대방을 대우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장애라는 옷을 어떻게 볼까? 모두 다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을 어둡게 만드는 옷,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게 만드는 옷,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옷,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은 옷, 본인과 주변의 가족을 눈물 나게 만드는 옷, 무시와 제외로 인해 낮은 자존감을 갖게 만드는 옷, 나를 열등하고 약하게 만들어 의존하게 만드는 옷이라 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장애라는 옷은 엉망이 되며, 장애인의 마음은 두렵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우울함과 답답함 속에 살아간다. 어쩌면 고통스런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추하고 더러운 옷일 수 있다. 이 깨끗하지 못한 옷을 입고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것처럼 힘겹게 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육체의 옷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입는 것이다. 부모와 주변의 나쁜 환경과 사건을 통해 타의로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1961년도에 전기도 안 들어오고 호롱불을 의지하며 사는 시골에서 아버지는 군대 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나를 키우시다가 9개월 되었을 때 소아마비라는 병에 걸렸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병인지, 어떻게 할 바를 몰라 치료시기를 놓쳐서 왼쪽 다리가 그만 마비가 되고 말았다. 1961년 가을에 주님께서 나에게 장애라는 옷을 입히신 것이다. 주님께서 장애라는 옷을 입히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 장애라는 옷 안에 주님사랑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주님의 사랑이 이 옷 안에 있는 것이다. 추하고 더러운 옷, 사람들로부터 거절 받는 옷,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서 서럽고 답답한 이 옷 속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육체의 고통스런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은 마음에 있다. 육체의 옷은 보통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바꾸려고 해야 한다. 마음을 바꾸려면 먼저 옷은 옷이고, 나는 나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옷을 입고 살고 있다. 보기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사람들보기에 부끄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옷일 뿐이다. 옷보다 옷 속에 있는 내가 중요한 것이다. 옷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옷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옷 속에 있는 내가 옷을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왕이면 왕의 옷이 되는 것이고, 내가 도적이면 도적의 옷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멋지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도적이면 그는 도적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장애라는 옷 속에 주님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보라. 그러면 내가 지금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예수를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내 속에 주님사랑 즉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옷으로 알 때는 장애라는 옷 때문에 당연히 두렵고 슬프고 거절당하고 못하는 것이 많다. 그러면 삶이 고통스럽고 망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내 삶은 망가지기는커녕 기쁘고 감사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의 연속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내 속에 거하시는 주님사랑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수많은 종류의 옷을 입고 산다. 그 옷 속에 주님사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랑이 그 옷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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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교회법률상식]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의 상반된 우선기준
    -세상재판의 교회정관우선은 교회재판의 헌법우선에 상충된 모순-법원도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교회정관보다 교회헌법 우선해야 초대교회 시에는 교회 내부 사건으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교회 내부사건으로 세상 법정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교회 내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비록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세상 직업이 법조인들로 구성된 기독교화해중재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그 현실을 입증하고 있어 교회로서는 심히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은 교회 내부의 사건으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전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의 사건을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야만 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교회가 불법 재판을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세상 법원이 교회재판에서 교회헌법을 우선하는 것과는 달리 단체 자치 규정인 교회정관을 우선하는 상충된 모순 때문이다. 1. 총회재판국의 불법재판 현실 상세한 내역은 생략하고 교회재판의 최종심인 총회재판국의 불법재판 결과 세상법정의 판단을 받은 최근의 사건들을 열거하면 제97회 총회재판국의 광주중앙교회 사건과 목동제자교회 사건과 제98회 총회재판국의 광명 동산교회 사건으로 세상법정에서 수십 건의 재판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중에 광명 동산교회의 사건은 24번이나 세상법정의 판단을 받았고 지금도 세상법정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으니 예사롭지 않는 일이다. 2. 교회재판과 세상 재판의 상충된 법적용의 우선기준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하여 세상법정에서는 교회 내부의 재판 사건이나 교리에 관한 사건은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 하겠으나 행정 절차상의 문제는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하면서 교회 재판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 등에 대하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관련하여 교회재판의 법률 우선기준으로 “교회 정관은 노회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 규칙은 총회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총회 규칙은 교회 헌법을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우선의 원칙에 반하여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의 상위법인 교회헌법보다 최하위법인 교회 정관을 우선하여 판결하므로 교회 헌법을 우선하는 교회재판에서 패소한 자들이 교회 재판에 불복하고 교회 헌법보다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서 법원이 교회 재판의 판결을 번복하는 판결로 인하여 발생한 갈등의 악순환을 치유할 길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려되는 현실로 분당 W교회가 교회 헌법에 위임목사의 시무기간에 대하여 “담임한 교회를 만70세까지 시무한다”(정치 제4장 제4조 1항)는 규정에 반하여 “위임목사는 6년마다 1차씩 공동의회에서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계속 시무한다”는 교회 정관을 만들어 이미 2회나 공동의회를 하여 계속 시무를 하고 있는 일이다. 만일 이와 같은 교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한국 교회의 위임목사의 만70세까지의 시무에 관한 교회 헌법 규정은 휴지조각이 되고 각 교회마다 지각변동이 발생할 것은 예고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 S교회의 정관은 교회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의 “장로 과반수와 목사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는 규정에 반하여 비록 단서 조항이기는 하나 “일반 결의는 치리장로 2분의1 이상의 출석과 출석 회원 3분의2 이상의 찬성, 당회장과 치리장로 3분의2 이상의 출석과 출석회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결의한다”는 교회 정관에 스스로 부딪쳐서 당회가 특정 안건을 결의하여 시행할 수 없게 된 부끄러운 현실이다. 3. 결론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에 관련하여 교회재판은 교회 헌법 우선의 원칙을 적용함에 반하여 세상 재판에서는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판결로 인하여 발생하는 교회 재판과 세상 재판의 갈등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에 대하여는 정교분리의 원칙과 국가에서도 헌법재판소가 최상위 법정임을 감안하여 법원에서도 교회 재판에서와 같이 교회 정관보다 교회의 상위법인 교회 헌법을 우선으로 적용하여 일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또한 각 지교회는 교회법을 우선하여 잘 지켜야 함은 물론 교회헌법에 상충되는 교회 정관의 제정을 자제하고 이미 교회헌법과 상충된 교회의 정관을 해 교회와 전국 교회의 평안을 위하여 수정하고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전국 교회가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교회 내부 사건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서 세상의 판단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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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소강석 칼럼] 꽃은 길 위에 피지 않는다
    어린 시절 동네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길을 내고 청소만 한 것이 아니라, 길가에 코스모스 꽃씨를 뿌렸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볼 수 있었다. 가을이면 맑고 높은 하늘 아래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처럼 우리의 마음과 삶이 눈부신 황금빛 축복으로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꽃은 길 위에 피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코스모스 씨를 길 위에 뿌린다 할지라도 길에서는 자랄 수도 없고 꽃이 필 수도 없다. 반면 길가에는 누가 씨를 뿌리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심겨져서 꽃을 피운다. 황무한 들판이나 버려진 땅이라도 거기에 꽃씨가 뿌려지고 가을꽃을 피우는 모습을 볼 때는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그렇다. 꽃이 피는 땅은 아스팔트나 신작로 같은 도로가 아니다. 버려진 땅과 황무지요, 폐허에서 핀다. 거기에서 백합, 장미, 데이지도 피고 수많은 들꽃들이 피지 않는가? 우리의 삶도 잘 닦여지고 이미 포장된 길에서는 꽃을 피우고 싶어도 피울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도로이고 길일 뿐이다. 이미 도로화된 삶, 포장되어 있는 삶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인생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대로 아름다운 향기 나는 꽃을 피울 수가 없다. 정말 그 사람은 인생의 화려함, 향기로운 인생의 맛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실패와 좌절의 광야를 걸어가고 있을 때 꽃을 피울 수 있다. 나의 인생도 버려진 폐허의 삶이었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집에서 모진 매를 맞고 쫓겨났다. 그때부터 나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폐허를 걷는 것만 같았다. 광야의 밤은 힘들고 외로웠으며 폐허의 오후는 거칠고 목말랐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았다. 왜냐면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로 씨를 뿌리고 또 뿌렸다. 젊음의 야성과 패기를 다 바쳐서 사명의 길을 걷고 걸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인생의 폐허 위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한창 인생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만약에 나의 인생이 이미 잘 닦여진 길과 같은 인생이거나,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화원과 같은 인생이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 정도의 성취와 꿈에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폐허의 인생이었다.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버려진 흙 무더기였다. 그래서 지금은 더 높은 꿈과 이상을 가진 눈부신 인생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고, 폐허 같은 인생이라고 비탄할 그때가 꽃을 피울 수 있는 시점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그때가 다시 한 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오히려 그 꽃을 만발하게 할 기회인 것이다. 실패하였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패배와 좌절을 넘어서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희망의 꽃을 피워야 한다. 소망을 볼 수 없는 곳에서 소망을 바라보고,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없는 곳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것이 칠흑 같은 밤을 지나서 밝아오는 새벽 여명의 찬란함이고, 절망을 넘어선 진정한 소망이 아니겠는가? 한국교회도 목회 생태계가 깨져 버리고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폐허를 일구면 된다. 황무지도 개간하면 된다. 눈물로 꽃씨를 뿌리면 된다. 그럴 때 목회 생태계는 얼마든지 다시 복원될 수 있다. 이젠 우리의 삶이 황무지일수록 꽃씨를 뿌려야 한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폐허가 되어도 꽃씨를 뿌릴 때이다. 폐허 위에서 피어나는 그 꽃, 황혼 빛에 물드는 꽃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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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성서연구] 겸허함에 담긴 은총, 샬롬!(시편 131편 1-3편)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을 역임한 고 김영삼 대통령께서 서거하셔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국가장 후 그 분의 공과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는 것을 언론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우 과에 의해 가려져 있던 공이 많이 부각되고 있는 듯합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후세의 평가를 고려한다면 누구나 공로를 많이 남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많은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고대 사회일수록 거대한 건축물은 통치자의 업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2대 왕인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 이전에 없던 것을 신축한다면 더욱 높게 평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자 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왕의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자 하는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했을 때, 나단 선지자는 매우 칭찬하면서 다윗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나단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아 주변 열강의 억압에서 벗어나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을 함으로써 그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건축의 기회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의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되었지만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섭섭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였고,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설계, 건축 자재 준비, 성전 건축 이후 성전을 운영하는 모든 내용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의 명예는 아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런 그의 수용적 태도는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기보다는 그의 평소의 신앙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시편 131편은 다윗의 신앙 인격이 잘 반영된 시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는 큰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왕들이 큰일을 해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과 상반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그의 겸손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모름지기 위대한 일은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한 모든 것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성전 건축 또한 하나님의 결정에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런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자 그의 영혼은 고요하고 평온하였습니다. 마치 젖 뗀 아기가 엄마 품에 있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실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업적을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큰일을 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러다보니 그들의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늘 분주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를 얻지 못합니다. 이런 이들은 무엇인가를 이룬다고 해도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소서. 전 단지 아버지의 종일뿐입니다. 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아버지의 평강이 제 마음을 가득히 채우게 하옵소서.> 피곤한 싸구려 업적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평안 가운데 거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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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장례식 유감(有感)
    4개 종교의식 진행은 당치 않아 고인의 종교에 따라 한가지만 해야 지난 11월 26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이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국가장으로 거행되었다. 필자는 식순 중 종교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서 유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고인이 기독교 장로이고 유족이 모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으레히 기독교의식으로 진행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켜보니 종교의식을 기독교의식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4개 종교 인사들이 차례로 나가서 의식을 진행하지 않는가. 불교 승려들은 목탁을 치면서 불경을 낭송하고 천주교 신부들은 무엇을 흔들면서 의식을 진행하는데 참 어이가 없었다. 고인이 기독교인이면 기독교 의식만 진행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종교의식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종교의식은 고인의 종교에 따라 기독교인이면 기독교 의식으로, 불교신도라면 불교 의식으로 진행하면 되지 않는가. 무슨 이유로 고인과는 상관이 없는 여러 종교의 의식을 진행한단 말인가.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국가장을 치룰 때에는 고인의 종교와는 상관없이 4개 종교의식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은 임종을 앞두고 “나의 장례식에서는 기독교의식만 진행하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유족은 유언을 근거로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면 기독교의식으로만 진행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기독교인의 장례식에 기독교의식 외에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의 종교의식을 진행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천부당 만부당’이라는 말은 이럴 때에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한가지 더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목사의 기도이다. 지난 날의 경우를 보면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때에 K목사는 “하나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에게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고 천주교 신부는 “하나님 주의 종 전 노무현 대통령에게 은혜를 베푸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때 필자는 TV로 그 광경을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찼던 것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고인이 기독신자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고인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헌법 예배기준을 보면 장례식에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을 밝혀 놓았다. 거기 보면 절대로 삼가야할 것은 돌아가신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고인에 대해 소망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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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목회자칼럼]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몇 년 전 교회를 중심으로 상영했던 <창의 끝>은 짐 엘리엇(Jim Elliot, 휘튼대학수석졸업)선교사의 순교사건을 담은 영화이다. 1956년 1월 8일 주일아침에 남미 에콰도로 아마존 정글지역에 사는 아우카 부족을 선교하러 갔다가 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짐 엘리엇 선교사와 동료 4명의 순교사건은 당시 전 미국인들을 슬픔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것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 사건 이후 선교사들의 젊은 아내들은 슬픔을 멈추고 간호학 등을 공부하고 남편들이 희생된 곳을 찾아가 산파사역, 치료사역, 새로운 농사법을 가르쳐 주면서 그 부족들을 섬겼다. 2년 가까이 사역하면서 아우카 부족의 언어를 배운 후 본국으로 나오려 할 때에, “부인들, 당신들은 뭐가 모자라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합니까?” 추장의 물음에,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벳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백인 선교사의 아내들입니다. 우리 남편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하나님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지만 당신들이 그들을 죽였으므로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남편들이 해주고자 하는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지난 2년 동안 당신들의 말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그 순교사건에 버금가는 사건이 5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했다. 기독교 자선단체인 “IAM”(국제지원단)소속 의료진 10명이 카불에서 260km 떨어진 마을의 초청으로 의료봉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탈레반에 의해 숲속으로 끌려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우리는 의료봉사단이요!” 부르짖음에도 탈레반은 의료팀을 한 줄로 세우고 한명씩 총을 쏴 살해했다. 그때의 선량한 의료진들의 공포감, 두려움은 어떠했을까? 미국인 6명, 영국인 1명, 독일인 1명, 그리고 2명의 아프가니스탄 통역인이 죽임을 당했다. 신문보도 중에 사역팀 리더인 미국인 안과의사 톰 리틀(Tom Little, 62세)은 30여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 해왔고, 영국인 외과의사 캐런 우(36세)는 결혼을 2주 앞둔 자매여서 우리의 슬픔을 더했다. 사건이 보도된 날,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톰 리틀의 부인인 리비 여사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뒤를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 일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파송교회인 뉴욕의 로우던 빌 컴뮤니티교회의 스탠 키 목사는 사건발생 첫 주일 설교에서 이런 말씀으로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만 복음과 함께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톰과 그의 가족은 분명 복음과 함께 살았습니다.” 위험천만한 A국 나라로 다시금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외교부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는 박00 선교사, 과거 그분께 받은 선교편지를 보았다. 그의 편지에서... 꾸짖는 투로 나무라는 외교부 직원의 말, “의사선생님, 왜 꼭 그렇게 위험한 A국으로 들어가려고 합니까?” 편지에 적힌 자신을 향한, 우리를 향한 박 선교사의 고백은 이러했다. “글쎄요, 내 자신을 잘 모를 때도 많지만 지금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그 분께서 주신 마음이고, 이 마음은 A국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이 있는 그 땅을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 아,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그런 헌신이 가능할까? 그런 순교가 가능할까? 박00 선교사의 고백에서 대답을 찾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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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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