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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EBE 그리고 케플러-452b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훈택 교수가 신약 수업 시간에 외계생명체가 있는지 성경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는 가운데 교수님의 답변은 만일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도 선교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손 들까 망설였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고 내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미확인비행물체’라는 뜻의 ‘유에프오’(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 미국입니다. 미 공군 조사단장인 에드워드 J. 러펠트(Edward J. Ruppelt)가 그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47년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웰(Roswell)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추락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히 그 속에 타고 있었다는 외계의 생명체에 쏠렸습니다.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이티’(E.T., Extra Terrestrial)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외계의 지적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10년 후인 1993년 미국 폭스 TV는 야심찬 기획물 ‘엑스 파일’(X-files)을 내보냅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과학지식에 의해 쭈글쭈글하고 못생겼던 E.T.는 외계의 생물학적 존재 ‘EBE’(Extraterrestrial Biological Entity)로 명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낯선 방문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아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천체가 지구 외에 또 존재할까 하는 궁금증으로 발전합니다. 이번에도 영화가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2012년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2014년 ‘인터스텔라(Inter-stella)’가 그러합니다. 전자는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Where are they from)를, 후자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to?)라는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론적인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2011년 2월 19일 미국항공우주국(NASA) 케플러 우주망원경 프로젝트 책임자인 윌리엄 보루키(William Borucki) 박사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회의에서 은하계에 500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며, 이 중 최소 5억 개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골디록스 존(Goldilocks Zone)’에 해당한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15년 7월 23일 역시 같은 연구팀은 지구로부터 1,400광년 떨어진 항성 ‘케플러-452’와 그 주변을 공전하는 ‘케플러-452b’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항성(恒星) 케플러-452는 태양과 비슷한 온도에 10% 더 길고 20% 더 밝으며, 행성(行星) 케플러-452b는 지구보다 1.6배 길지만 공전주기는 368일로 거의 같고 무엇보다도 지구-태양 간 거리와 비슷하게 공전하고 있다 합니다. 문제는 현재 과학기술 수준으로 이 별까지 가는데 2,580만 년이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별들을 너무나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욥기와 아모스가 거론하는(욥 9:9, 38:31; 암 5:8) 묘성(昴星)과 삼성(三星)이 그러합니다. 겨울철 남쪽 하늘 황소자리에서 관측되는 7개의 별을 일찍부터 ‘묘성’으로, 역시 겨울철 별자리인 오리온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쌍둥이 같은 별을 ‘삼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묘성은 실은 수천 개의 별들이 뭉쳐 있는 성단(星團)이요, 삼성은 실은 서로 일직선상에 없는 전혀 무관한 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라고 표현합니다. 현대과학을 앞서가는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알면 알수록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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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은혜의 말씀] 절반의 감사 (합3:16~19)
    절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유태인들이 강한 이유는 절기를 잘 지켜서 그렇다고 봅니다. 절기라고 하는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그때에 가정교육이 이루어지고 만남과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설날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다 모이고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명절, 절기를 지키면서 문화가 만들어지고 가정의 대화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절기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갑니다. 유태인들의 절기는 특별히 ‘맥추절이다’ ‘유월절이다’ 할 때 그 절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곡식을 추수해서 감사하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역사적인 사건을, 위기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최고의 감사가 있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예표를, 미리 앞서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상징하는 것이 절기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 하박국서를 통해서 이 맥추절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주제가 간단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것들이 득세하고, 왜 세상의 불법이 판을 치고 정의로운 사람, 공의로운 사람은 늘 고난을 당하느냐?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대적들이 흥왕하는 것을 이렇게 허락하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할 때 이유 없는 환란 때문에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나쁜 사람들은 잘 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도전 하는 것이 하박국서입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결론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에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그런 환난의 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게 아니고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합3:17) 없으며, 못하며가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무에 열매는 없고, 외양간에 소는 없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18절에 가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절「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오늘 절대감사, 선불감사, 평생감사, 무조건감사, 감사할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은 조건적인 사람이고 그리 아니해도 일단감사, 평생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happy day로 흘러갈 것입니다. 조건 따지고 상황 따져서 하는 사람은 늘 일희일비하고, 마음의 조울증을 겪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의 원천이고 내 최고의 백그라운드, 내 최고의 후원처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같은 시험을 지나고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헤쳐 나가면서 비로소 노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민거리가, 기도제목이, 근심거리가, 간증거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반의 타작도 안 되는, 건더기가 없는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할 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감당을 하고, 감수하기 때문에 그 삶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님 밑에 있는 자녀들은 행복한 것이고, 이 시대의 고난을 돌파하고 pass of 해서 절반의 감사일지라도 오히려 그때야 말로 내게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오는 때입니다. 느낌을 아니까, 고통의 맛을 아니까, 쓴맛을 겪어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맥추절에 일 년의 절반을 지나면서, 성도들의 마인드가, 성도들의 스피릿이, 성도들의 스타일이 새로워져서, 불평과 원망과 짜증의 삶을 청산하고, 환난과 빚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것들을 통과한 후 승승장구해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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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교회법률상식] 총회 유령 위원회가 노회에 하달한 유령 공문
    [질의] 최근 합동 교단 내 언론지인 크리스천포커스 38호 8면에 총회로부터 황해노회장 앞으로 “황해노회 동산교회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기상천외한 공문이 하달되었다는 특집 기사를 보았습니다. 게재된 공문의 내용을 보내드리오니 검토하시고 법적으로 합당한 공문인지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S노회 K장로)(합동 S노회 K장로) [답] 필자에게 알려온 공문의 내용을 검토한 후 총회장과 총회 서기에게 전화상으로 확인한바 권원 없는 유령 위원회가 유령 공문을 노회에 하달한 것 같아 보인다. 공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서번호 본부 제99-1167호(2015.7.9.) 수신 : 황해노회장, 제목: 황해노회 동산교회에 관한 건, 내용: 제99회 총회 특별재판국 보고는 잠재하고 제98회 재판국 판결문 보고대로 처리하기로 결의하였기에 통보하오니 이행하여 주시고 그 결과를 2015년 8월 17일까지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첨 : 제98회 총회재판국 판결문 사본 1부 끝. 하단 발신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관인) 총회장 백남선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 위원장 박무용”으로 하여 실인은 없고 총회 관인만 찍힌 공문이 황해노회 노회장에게 하달되었다고 한다. 이에 필자는 공문에 기록된 결의 내용과 위원회 조직에 대하여 총회장과 총회 서기에게 직접 전화로 확인한바 총회장 명의로 하달된 결의내용에 대하여 총회장은 “결의한 사실을 모른다”라고 답하였고, 총회 서기는 “그런 위원회를 조직한 일이 없다”는 답을 받고 보니 유령 위원회가 유령 공문을 총회장의 명의를 도용하여 총회 산하의 노회에 하달한 것으로 대명천지에 이런 날벼락과 같은 사건이 또 어디 있겠는가? 1. 유령 위원회의 허상(虛想) 총회 규칙 제27조 단항에 “당석에서 제안하는 안건은 … 개회 후 48시간 내에 제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총회 서기가 작년 제99회 총회 회기 중 “긴급동의안은 법정기한인 수요일 오후 2시까지 제출해 달라”는 광고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산교회 관련건의 긴급동의안은 법정기한이 이미 지나버린 수요일 오후 4시 20분에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회 마지막 날 파회를 목전에 두고 서기가 “긴급 동의안이 있습니다!”라고 총회장에게 여러 번 제의하였고, 총대 석에서도 “긴급 동의안이요!”라고 항의가 있었으나 회장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서기가 8건의 긴급동의안 서류를 사회하는 총회장에게 올렸는데도 회장은 그 서류를 총회에 상정하지 않고 밀쳐 버림으로 모든 긴급 동의안은 자동으로 폐기된 서류라고 서기는 말했다. 문제는 총회 임원회가 총회를 파회한 후에 법리상으로 총회 회기 중에 이미 폐기된 긴급동의안을 임원회가 위임받은 잔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 법정시간 내에 접수된 “H목사 조사처리의 건”은 기각 결의하고, ? 법정시간이 지나서야 접수된 황해노회 동산교회 관련 건인 “특별재판국 설치 조사처리의 건”은 상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 서기는 “긴급동의안은 폐기된 것이니 취급할 수 없다”고 강력히 항의했으나 총회장과 부총회장이 중심이 되어 밀어붙이기 식으로 상정하여 결국은 “3인을 보내어 화해를 한번 권면해 보라”고 결의한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에는 “화해조정위원회”(위원장: 부총회장 박무용 목사, 위원: 부총회장 이호영 장로, 회계 서병호 장로)라는 이름으로 3인 모두가 위원장 서기 회계의 위원회 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 총회 서기의 답변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야말로 가히 유령 위원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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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성공칼럼] 영원한 결합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삼백 번 가까이 나오고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도 많이 나온다. 이 언약은 구원 즉 하나님과 결합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결합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 가족, 공동체, 하나 됨, 평화로운 사회, 함께 있고 싶다, 좋은 관계 등의 말은 모두가 결합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건물을 지은 후 수 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튼튼하다는 말은 그만큼 결합이 잘 되었다는 말이다. 찬사 중의 찬사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나 건물과의 관계나 그 결합이 오랫동안 혹은 영원하기 위해서는 결합할 수 있는 접착제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혈연 혹은 종교적 신념으로, 돈으로, 학연, 지연으로 결속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결합이 될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특히 가정에서 자기애, 자기 지배욕, 자기 우선, 걱정, 근심, 분노, 짜증, 무시, 큰 소리, 욕, 도박, 술, 여자, 자기 욕심,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부나 가정의 결합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돈이나 권력, 성공을 추구하는 것도 잠깐 접착력이 있을 뿐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옳지 않는 일이나 악을 행하면 거짓과 악은 접착제가 아니기에 결국은 깨어지는 것이다.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면 영원한 접착제인 사랑과 진리와 선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부부가 결혼 할 때 상대방의 조건에 끌려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본가 편을 들고 매일 늦게 들어오고 일과 관련된 행사는 다 참여했다. 쉬는 날은 피곤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자기 취미 생활만 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편이 아닌 것이 불만이었지만 가정 일만 많이 했고 존중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재미를 느껴서 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렇게 25년을 보내다 보니 각 방을 사용한 세월도 오래되고 이 부부 사이에 접착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혼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접착력이 없어 함께 살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 부부가 다시 함께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부부가 결합할 수 있는 접착제가 있어야 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하자. 그럼 이 사람들이 결합한 것일까? 아니다. 이 권력자에게 모여들어서 무언가 얻으려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자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결합이라고 할 수 없다. 내 목표와 돈과 권력을 원하고 있는 한 이들이 결합하는 것은 잠시 동안인 것이다. 부자가 돈과 권력이 없어지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을 때는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은 접착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람을 만나는데 돈보고 만나거나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만난다면 나는 이미 하나님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접착제는 사랑과 진리와 선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며, 진리는 사랑과 선을 이루기 위한 길이며, 선은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해주고 유익을 주긴 하는데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닌 상대를 이용하는 자기사랑이기에 언젠가는 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먹을 것과 돈을 주면서 진리 없이 사람들을 이용해 조직을 만들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 섞인 충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가르침은 그 속에 선함이 없는 진리이기에 언젠가는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 시작점이다. 이 사랑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방법, 노하우, 사상, 진리가 나오고 사랑과 선을 증명하는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의 삶을 살면서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어야 하며, 방법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나의 행동은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이며 진정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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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가정칼럼] 아내와 주방! 쿵짝이 맞다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경쾌한 리듬의 레게 음악. 저 멀리 자메이카의 전통음악이 대중음악으로 정착하면서 중요한 음악 장르가 된 레게는 뜨거운 햇빛 아래 총총 땋은 헤어스타일, 알록달록 패션까지 갖춘 이들이 쿵짝 쿵짝 리듬에 맞춰 노래하여 경쾌함을 준다. 그래서 레게를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라고 하나 보다. 이 레게 리듬이 경쾌한 이유는 2박자 계열이기 때문에 쿵짝 쿵짝 리듬과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가나 쿵짝이 잘 맞아야 하나보다. 주부들의 전용 공간인 주방에서도 이 쿵짝이 필요하다. 주부들 사이에서 영식님, 일식씨, 이식군, 삼식세끼 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밖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남편에게는 영식님이라는 존칭을 써주고, 하루 한 끼 먹는 남편에겐 일식씨, 두 끼를 먹을 땐 이식군, 하루 세 끼 집에서 다 챙겨먹는 남편을 향해 삼식 새끼(?)라고 부른다는 것. 그만큼 가사의 부담감을 표현한 이야기일터, 예전의 우리 어머니께서 어찌 된 게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넋두리와도 통한다. 주부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따져보면 40대 주부들의 경우 하루 평균 12시간 16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루의 반 이상을 집안일에 사용한다고 했을 때 수면, 식사 시간 등을 빼면 자신만의 시간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뿐인가. 잠을 자면서도 가족들의 출입에 늘 신경을 써야 하고 잠깐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가족들의 호출에 정신이 분산된다. 말하자면 24시간 대기조다. 바로 이런 과도한 가사 노동에 쿵짝이 필요하다. 레게 리듬에서 쿵과 짝은 액센트가 다르다. 쿵을 여리게, 짝을 세게 하는 엇박자가 더욱 리드미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부들의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집중적으로 노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쿵이 있다면, 노동에서 해방되는 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들에게도 출퇴근 시간이 필요하다. 출퇴근은 여러모로 가정을 리드미컬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우선 과도한 가사노동시간을 적정한 선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출퇴근의 개념을 통해 아내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가사노동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좋지 않은 감정들의 노출을 줄여줄 수 있다. 당연히 가정도 좋아질 것이다. 실제 어떤 주부는 본인 스스로가 출퇴근 시간을 정해서 가족에게 당당하게 동의를 구하고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아내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독한 마음으로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아침에 출근해서 보면 밤새 폭탄을 맞을 것 같이 되어있어 울화통이 치민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출퇴근 시간을 지켜가다보니 오히려 근무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등 즐기면서 일할 수 있었고, 퇴근 후 개인 시간에는 취미생활도 시작하여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가장 기분 좋은 변화는 자녀들이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닮고 싶어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내에게 출퇴근 시간을 준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훌륭한 직장을 선물하는 것과도 같다. 그로 인해 주부의 공간이 리드미컬한 경쾌한 작업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나라 남편들이 선진국 남편들에 비하면 주방일을 도와주는 게 턱도 없이 모자라다는 기사에 고개만 끄덕일 것이 아니라, 우울하게만 바뀌어가는 부엌에 새로운 리듬, 경쾌한 리듬을 불어넣을 선물이 필요하다. 주부에게 가정은 직장이다. 직장에는 근무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환경이 열악할수록 자신의 일에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직장 내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방에서 아내가 마음껏 일하며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주방서재를 마련해 주는 것은 주부를 놀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주방은 정말 다양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식탁을 조금 밀어내고 아담한 책장을 들여놓으면 될 일이다. 식탁은 책상 대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또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오디오가 있으면 예술과 문학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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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목회자칼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교회
    제가 영국에서 ANCC신학대학을 다닐 때 한 학기 초청강사로 오신 인도의 대학신앙운동가 찬다 필라 목사(당시 인도IVF총무), 지금도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늘상 입는 옷은 회색 계통의 인도 전통복장, 신발은 늘 샌들이고, 강의 때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씀을 전하시는지 늘 감동이요 도전!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를 본적이 없지만 그런 이미지를 풍기는 분이셨다. 한번은 내가 기거하는 기숙사방에서 우리 동양인 학생(일본, 파키스탄, 홍콩, 말레이지아)들이 찬다 필라 목사님을 초청해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그 분이 주신 말씀이 바로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To this you were called, because Christ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follow in his steps) 그때 들은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왜 여러분을 이 신학대학으로 부르셨지요? 왜 여러분을 목회자의 길로, 선교사의 길로 부르셨지요? 왜 오늘 이런 특별한 만남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지요? 그것은 주님이 걸어가신 길, 특별히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나는 그때 받은 감동과 도전이 가슴에 새겨져 있어서 1989년 7월에 마산재건교회의 청빙을 받고 그 다음해인 1990년도 교회 표어로 삼았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교회”, 그리고 내 명함을 만들 때 명함 위쪽에다 작은 글씨로 한글과 영문으로 이렇게 적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교회. The church who follows in His steps”-벧전2:21- 그런 가운데 언젠가 그와 비슷한 도전을 준 책이 있었다. 미국인 목사인 찰스 쉘돈이 쓴 종교소설인데, 그분 역시 그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벧전2:21! 그 말씀에서 도전받아 받은 은혜를 소설화 시킨 것인데 책의 제목을, <In His Steps>. 한국어로 번역된 책에는 소설의 제목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미국의 레이몬드시에 100명 가량의 성도들이 모이는 제일교회에서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헨리 맥스웰 목사와 몇몇 자원하는 성도들이 엄숙하게 서약을 한다. “앞으로 1년동안 그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어보면서 살아가자”, 서약한 성도들 중에는 그 지역의 신문사 발행인 노만 사장, 유명한 오페라가수인 레이첼 여성도,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버지니아 성도 등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지역신문인 '레이몬드 데일리 뉴스' 신문사를 경영하는 노만 성도, “예수님이시라면 우리 신문사를 어떻게 경영하실까?”, 그 물음 앞에 담배, 술 광고 등을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음란한 기사들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주일엔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광고 수입은 급속히 줄어들면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케 되었다. 유명 오페라가수인 레이첼 성도의 경우는 당대 최고의 합창단의 입단을 거절하고 빈민가의 텐트집회에서 찬양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데 종래에 갖지 못한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버지니아 성도의 경우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물음 앞에 예사롭게 즐기던 화려한 파티 출입을 삼가하게 되었고 대신에 전도사업, 구제사업에 헌신하면서 신문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만 사장의 신문사를 후원하면서 받은 물질을 멋지게 사용함으로 종래에 느끼지 못한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지난 1년 동안의 삶의 경험에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인관계, 사업, 직장에서 어려움, 불이익, 불편한 관계, 고난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그 힘든 시기를 믿음으로 잘 극복해 나간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든 믿음의 자녀들을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이요, 교회는 역동적으로 성장할 것이요,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그리스도의 발자취를 힘써 따라가는 개인의 삶과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 시대의 '아름다운 교회, 은혜로운 교회, 화목한 교회, 건강한 교회, 권세 있는 교회'로 꾸준히 성장해 나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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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공로만 있고 과실이 없는 이가 있는가 이승만 건국대통령으로 예우해야해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인 김동길은 그의 칼럼에서 “이승만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이었던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명예교수인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필자도 그 책을 읽고 보관하고 있거니와 두께가 578페이지에 달하는 큰 책이다. 이승만은 나이 서른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그리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다. 그는 1941년 미국에서 ‘일본의 가면을 벗기다’라는 책을 썼다. 이승만은 그 책에서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지 넉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이 이승만 박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비범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10일 총선에 서울 동대문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되고 계속된 회의에서 재석의원 198명 중 188표로 국회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두달 뒤 7월 24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 부통령 선거에서 180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취임식은 7월 24일에 거행하고 정부수립선포식은 8월 15일에 거행했다. 장면 박사의 비서였던 최서면은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탁월한 정치가였습니다. 그에게 잘못한 것도 있었으나 공(功)과 과(過)는 7:3으로 봅니다” 그랬다. 조선일보 논설주간 양상훈은 그의 칼럼에서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의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의 공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거인이 이룬 공은 외면하고 과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건국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줄 모르는 것을 보면 매우 통탄스럽다”고 했다. 그도 자라면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만 듣다가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나이 쉰이 넘어서라고 실토했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공은 덮어 놓고 과만 문제 삼고 있다. 건국대통령이라고 칭하기 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공만 있고 과가 없는 이가 어디 있는가. 그에게 다소 과가 있었기로니 실제로 그가 건국에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건국대통령으로 예우해 드리는 것이 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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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은혜의 말씀] 오직 성령 예수증인 (행 1:8)
    사도행전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한 그 행적을 기록한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책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역사는 살아 움직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어떤 간섭, 하나님의 주관을 찾아보는데 특별히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된 복음사역이 사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확장 되어 나가는가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고 또 성령행전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많이 나타난 곳이기 때문에 성령행전이라고 하는데 오늘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렇게 시작 됩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 여러 방법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살아보지만 진정한 효과가 있고 최고의 교사는 성령님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힘으로 능으로 돈으로 말로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월이 흘러갈수록 성령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비로소 감동하시고, 성령님만이 우리를 온전히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그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파워풀한 힘을 가져서 자기 내면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웃을 바라보고 땅 끝까지 퍼져나가는 삶 이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내 증인 되리라”고 하십니다. 증인은 자기 자랑 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어떻게 실현하느냐가 아니고, 듣고 본대로 전달하는 것이 증인이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어디를 가도 예수 향기가 나고, 예수 냄새가 나고, 예수 흔적이 나타나고, 예수님 자랑을 하고, 예수님을 높여야합니다. 모든 건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 마음의 움직임이 오직 성령님의 그 어떤 흐름을 마음 흘러가는 대로 두지 말고, 기분 가는 데로 두지 말고,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오는 힘을 얻어야지 다른 힘은 헛심에 불과하고 다른 힘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을 받고 난 뒤에 내 삶의 반경 전 영역에서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내 삶이 영향력 있게 나가야 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가서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과 다윗 왕 사이에 그 임무교대가 될 때 결정적인 것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서 성신을 거두고 나니 사람이 이상해져버립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에게 가고,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패가망신의 길을 갑니다. 다윗은 들판의 목동에 불과 했지만 사무엘이 기름 꿀 병을 가져다가 기름 부어준 그날 이후로 의의 영에 큰 감동을 받은 다윗은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성경을 볼 때 그 성령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도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임할 때 성령님이 우리 속에 감동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비로소 그 사람이 헛심을 쓰지 않게 되고,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열매가 나타날 때 그 사람이 비로소 멋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들의 삶이 SOLA LIFE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은혜 쪽으로 흘러가고 그 가운데 집중해서,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권세와 능력을 부어주실 때는 그 힘을 가지고 사역을, 삶을 감당하되 내 문제를 벗어나서 이웃 바라보고 이제는 좀 더 기도의 반경을 넓혀서 열방을 품어야 된다는 겁니다.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나 사람들이 볼 때나 참 대단하다 칭찬 듣고, 오직 예수, 오직 성령의 길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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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성경인물탐구]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1)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활동한 시기는 AD.27년경에서부터 AD. 60년경으로 약 30여 년간입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가 당신의 공생애 활동을 펼치기 전 기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황제 네로가 대 박해를 가할 때까지 유대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름이 개명되기 전까지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어부 요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자신이나 형제 안드레는 모두 가업을 따라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으며(참조, 마 4:18),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동업종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눅 5:10). 베드로는 '고기 잡는 집'이란 의미를 지닌 벳새다지방에서 살았습니다(참조, 요 1:44). 그리고 훗날에는 가버나움 지방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기혼자였습니다(참조, 마 8:5, 14). 본래 학문이 높지 못했고 어부 출신이었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 인생이 바뀌었습니다(참조, 행 4:13). 시몬에서 게바로 이름이 바뀐 것만큼이나 그의 인생은 폭과 질에 있어 차원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다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따라 나섰으며(참조, 마 4:18),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여 스승을 메시야로 정확히 이해한 개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참조, 마 16:16).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인정을 받아 변화 산 사건을 목격하는 등 총애를 받기도 했습니다(참조, 벧후 1:16-18). 또한 그리스도와의 대담 중, 용서에 관한 진리를 직접 묻고 듣기도 할 만큼 친근한 제자로서의 위치를 가졌었습니다(참조, 마 18:21). 그러나 그 역시 인간으로의 약한 면모를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께 청하여 물 위를 걷다가 믿음이 부족하여 실족하는가 하면(참조, 마 14:18-21),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시에는 그의 제자 됨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나약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참조, 막 14:54-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오를 철저히 회개한 베드로는 이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전도 활동을 왕성히 전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 부활의 주님을 확인하였고 승천하시는 그리스도를 목격한 이후, 오순절 성령 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이전의 나약한 인간 모습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수제자로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참조, 행 3:3-8), 이방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는 등(참조, 행 10:1-43)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사역을 다하였다(참조, 행 5:3-10). 전설에 의하면, 그는 AD. 60년경 네로의 대박해시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는 성격이 급한 인물이었습니다. 사고에 있어 신중하지 못하고 실수가 많아 그리스도로부터 잦은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참조, 요 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 중 한 명이었는데 베드로는 성격만큼이나 순종에 즉각적이었고, 자신의 과오를 즉시 깨달아 회개할 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참조, 마 2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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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성공칼럼] 사람 속의 사람
    창세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실제 사람의 생명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며 사람의 몸은 그 혼을 담는 그릇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혼이 떠나면 그 몸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 사람은 혼이 사람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이시며 사람의 몸은 생명을 담는 그릇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자신의 혼을 소중히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혼과 사람의 몸을 배분할 수 없는 것처럼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사람에게는 사람의 혼을 담는 그릇인 몸이 있다. 사람의 몸은 선한 일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심장과 폐와 온갖 내장과 여러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든 신체기관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협력하여 몸이 살도록 존재한다. 그리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도 잘게 부서져서 기꺼이 모든 영양분을 내어주며 희생하고 있다. 몸이 그러한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삼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몸이 되어야 혼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만약 몸으로 악한 일을 한다면 이미 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기에 죽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람의 혼이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혼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을 담을 수 없는 것같이, 내 혼이 깨끗하지 않으면 사람의 몸도 선한 일을 할 수 없을뿐더러 그 생명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선이며, 기쁨이며 자유이며 진리이며 빛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본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것, 미워하는 것, 화내는 것, 욕심 부리는 것, 원망하는 것, 비난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분당을 짓는 것, 지배욕을 불태우는 것 등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러운 그릇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회개나 M.P.M 훈련에서 만나게 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생명이 아니라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명을 담는 그릇임을 안 이후에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아래로 어두움을 향해 내려갈 수도 있고 사랑과 선을 행함으로 위로 하늘을 향해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강의와 설교를 들으면 가슴에 자유와 행복이 생기면서 바르게 살고 싶어진다. 종교와 교육과 도덕과 상담 등을 통해서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릇에 생명을 담기 위해서는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하며 깨끗하지 않으면 생명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의 혼은 생명을 수용하는 그릇인데 그릇이 아무리 깨끗하고 뛰어나도 그릇일 뿐이다. 그릇이 생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무엇이 생명인가! 나인가? 조상인가? 찬란한 해와 은은한 달빛, 광활하고 장엄한 자연인가? 아니면 자연에서 발견하는 진리인가?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에서 나온 피조물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도 있고, 사람의 혼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은 선한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하며,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기쁨과 빛과 진리로 채워지도록 해야 하며, 사람이며 신이신 주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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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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