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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가나안 보다 중요한 것, 말씀(여호수아 8장 30-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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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꿈에 그리던 낙원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신 이래로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지상 낙원에서 살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교회가 예배당을 이전하여 아름답게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새 예배당으로 옮겨가는 것을 가리켜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광야나 가나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두 귀하였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본질은 <거기가 광야인가 가나안인가>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본질이며, 하나님이야말로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이 행복을 보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 가나안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참된 행복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있음을 명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 앞에 서게 하셨던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에발산에 제단을 쌓게 하셨고, 그 돌들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모아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의 말씀을, 에발산에서는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셨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그들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사방으로 뻗어 나갈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서둘러 남은 땅을 정복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멈추어 말씀 앞에 서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가나안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서 살아갈 원리를 깨닫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 하드웨어라면 말씀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깡통과 다를 바 없듯이, 말씀 없는 가나안은 결코 행복의 동산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느라 흥분하고 있을 때, 가나안을 얻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말씀 앞에 겸손하게 서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백 삼십 년 만에 애굽을 벗어나 흥분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시내산에서 말씀 앞에 서게 하셨던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말씀이 없다면 애굽을 벗어나 자유를 얻어도 그 자유 때문에 망할 것이고, 아무리 가나안을 얻어도 가나안의 풍요속에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삶에 도취되어 말씀을 잊었고, 우상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가나안은 그들에게 행복의 땅이기는 커녕,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차례로 멸망함으로써 멸망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 되고 있습니까? 지금 성공하고 있는 중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잠시 멈추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을 배제한 채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선남선녀가 만나 이루어진 가정도, 잘 꾸미고 개업한 사업장도, 웅장한 새 교회당을 소유란 교회도 말씀 위에 세워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인간적 수단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정작 말씀을 붙잡는 데는 게으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말씀, 그 안에 모든 지혜와 복과 생명과 승리가 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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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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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찌 이런 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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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관련된 얘기 중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의외로 많아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가 많은 중 진짜 상식을 벗어나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가끔 있다. 어찌 그런 일이 있는지 생각할수록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실례를 몇가지 든다.
필자가 한번은 여전도회 헌신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인도는 여전도회 회장(집사)이 맡아 진행했다. 성경을 봉독할 시간인데 회장이 설교본문의 첫 절을 읽고 마지막 절을 읽고 두절만 읽고 “이제 강사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 해주시겠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강사가 강단에 서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설교본문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하고 다시 봉독한 후에 설교를 시작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예배시간마다 봐온 일일텐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그 회장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지 안색도 변하지 않고 교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봤다.
한 곳에서는 목사가 장로 가정에 심방을 갔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목사가 “성경은 요한계시록 14장 1절~5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그랬다. 장로 부인(권사)이 성경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장로 부인이 말하기를 “이상하네, 내 성경에는 어째서 요한계시록이 없지” 그랬다. 그 권사는 요한계시록을 구약에서 찾으려고 했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장로 부인이 요한계시록이 구약에 있는지 신약에 있는지 그것도 몰랐으니 말이 되는가. 이건 뜬소문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얘기다.
또 한곳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권사가 목사로부터 공예배 기도인도 부탁을 받았다. 기도문 없이 인도할 자신이 없어 기도문을 작성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말은 누구나 마지막에 으례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 기도를 인도하는 시간에 떨리면서 기록한대로 기도문을 다 읽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말은 하지 않고 기도를 마쳤다. 회중의 공기가 이상했다. 그때 목사가 재빨리 그 권사 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하고 회중이 “아멘” 했다. 어느 한 고교 교사가 처음으로 기도를 인도하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했는데도 한사람도 아멘을 하지 않았다. 짧아서 그런가하여 다시 되풀이 했는데도 아멘을 하지 않는다. 기도를 포기하고 “왜 다른 이의 기도엔 아멘을 하고 내 기도엔 아멘을 해 주지 않느냐” 그랬다. 그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바로 배워야 하지 않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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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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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우리가 극복해야 할 다섯가지 적(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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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남과의 싸움이요 셋째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선물로 주신 아름답고 소중한 자연을 「싸움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썩 좋은 발상은 아니다. 물론 더위, 추위, 가뭄, 홍수 등을 극복해내는 일이 여간 만만치 않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플라톤이 인생을 <자기와의 싸움>으로 이애하고 있는 것은 옳은 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아라!」고 하였다. 우리는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5). 과연 그 누구도 자신을 변명할 수 없도록 우리의 정곡을 찔러 주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런 솔직한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해주면 말은 맞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으며 다 같이 불완전하면서 남을 향해 충고하고 책망하기란 여간해서는 용기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급적이면 선생이 되지 말라!」 고 충고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1~2).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가지고서 서로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가지고 논(論)하면 그나마도 우리는 승복을 하고 겸손히 그 교훈을 따르고자 하는 일말의 선한 양심이 있음을 알고 있다. 오늘은 먼저 내 안에 숨어 있는 <다섯가지 적>을 드러내고자 한다.
1. 욕망이라는 적이다. 우리는 생래적으로, 출생하면서 ‘본능적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에덴동산에서 우리 조상 아담이 <욕망의 포로>가 돼버렸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포로가 돼버렸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 또한 <욕망의 포로>가 돼버렸다. 이것을 <욕망의 전차>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전차는 방향도 모른 채 좌충우돌 하면서 세상을 소란케 하면서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이지만 날마다 아니 순간순간마다 <욕망이라고 하는 무서운 유혹>에 직면하면서 살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로마서 7장 18절이 주는 말씀을 들어보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대부분의 욕망은 우리를 <심각한 파멸>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욕망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힘든 환경 때문에 고통당하기도 하지만 <자기 내면의 죄와 욕망> 때문에 혼돈에 빠지고 크게 고통 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로 시험(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불의하고 타락하고 위험한 이 욕망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소원을 가져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본능으로서의 욕망’도 있으나 동시에 ‘거룩한 소원’도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거룩한 소원 쪽으로 우리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소원을 도와주신다(빌2:13). 우리의 성향이 사악한 쪽으로 쉽게 경사되지만 ‘거룩한 소원’쪽으로 열망하면 그 쪽으로 우리의 성향(性)이 발전한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너희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한다. 그리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자주 자주 <절제의 은혜>를 성령님께 간구해야 한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일컬어 사람의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하지 않는가!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질 뿐이다.
우리가 이 위험한 욕망을 줄이려면 우리의 마음속을 고상하고 신령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 심령 속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적인 갈급함이 내재되어있다. 이 갈급함의 빈 자리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채우면 된다. 시편 39편 7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읽어보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실 때 우리 영혼은 한없는 평강을 누리면서 만족함을 얻는다(롬14:17, 시4:7, 말3:17)(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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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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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굴화리와 천상리는 남울산노회 지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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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회분립 청원서에 대하여 노회분립의 원칙은 하회의 고유한 특권자인 노회가 분립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면 상회의 고유한 특권자인 총회는 그 청원서를 접수하여 분립허락을 결의하고 분립위원을 보내어 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에 기록된 “① 분립할 노회의 명칭 ② 분립할 노회의 경계 ③ 분립할 노회의 조직교회와 미조직교회의 명부 ④ 분립할 노회 경내의 목사 수 ⑤ 분립할 노회 경내의 장로 수 ⑥ 분립할 노회 경내의 전도사 수 ⑦ 분립할 노회 경내의 교인 수”대로 분립노회를 조직하고 총회의 임원선거 직전에 보고하는 것이 법리이다(교회 법률 상식 pp.410-416, 제25회 총회 회의록 p.71 정치 제22장 제1조 2항 참조). 그런데 울산노회의 노회분립청원서의 첨부서류는 엉뚱하게도 “제52회 울산노회 정기회의록(2)” 뿐이다. 그 회의록에 노회 분립에 관한 내용은 “노회분립위원은 각 시찰회 목사 1인 장로 1인 노회장 15인으로 하다.”라는 결의 내용과 각 시찰의 목사와 장로의 명부 14인을 기록한 것뿐이다. 이와 같은 노회분립청원서는 총회가 접수해도 안 되고 노회분립을 허락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총회는 울산노회의 이런 서류를 접수하여 노회를 분립 처리하였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4. 울산노회 분립위원회의 분립보고서에 대하여 제91회 총회보고서 p.1114에 울산노회 상황보고 주요 결의 사항에 “노회분립하기로 결의하다. ◎ 분립기준 - 태화강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기로 하다. ◎ 노회명 -울산노회 (북쪽) 울산남노회 (남쪽)”이라는 보고서는 태화강을 경계선으로 한다는 상황을 보고한 것인데 총회가 받음으로 노회분립 경계는 태화강인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제92회 총회보고서 p.819에 “울산노회 분립위원회 보고” 제3차 회의의 결의사항 ①에 “총회분립위원회에 일임하여 문제가 된 태화강 남쪽의 양산시찰은 (가칭)울산남노회 소속으로 함이 지역 노회의 특성상 합일되므로 선포하고 이를 수용하기로 하고 합의 각서하니 (잔류측) 울산노회에서 5명 분립측 (가칭)울산남노회에서 5명이 합의 각서 서명을 하다.”라는 보고에 대하여 제92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2007) p.59에 “울산노회 분립위원회 위원장 최재우 씨의 울산노회와 울산남노회의 분립보고(보고서 p.818-820)는 받기로 하다.”라고 총회가 받음으로 종결되었다. 5. 결론 노회분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리적 기준은 노회가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이다. 그런데 울산노회의 분립 건은 노회분립청원서의 표지만 갖추었지 청원서의 내용은 “분립하자”는 결의와 “분립위원 15인의 명단만 기록된 노회 회의록”뿐이므로 사실상 하회의 고유한 특권인 노회분립청원서도 없이 상회인 총회의 허락으로만 노회를 분립한 꼴이 되었으니 불법분립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합법이든 불법이든 노회를 분립한지 8년이나 지난 현실에서 8년 전의 노회 불법분립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성은 그 시효가 이미 지나버렸다(권징 제116조).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당면한 노회를 분립할 당시에 분립 경계에 대하여 질의 자가 보내온 서류에 근거하여 법적으로 “시찰별 중심인가? 태화강 중심인가?”의 법리만 정리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 노회분립에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하회의 노회분립청원서가 표지만 갖추어져 있고 분립청원내용이 없으므로 부득불 분립 전의 울산노회의 촬요와 분립위원회의 총회보고서로 판단할 수박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분립 전의 제53회의 울산노회 촬요에 “노회 분립 기준”은“태화강 중심으로 하여 노회 명칭은“울산노회(북쪽), 울산남노회(남쪽)으로” 결의한 내용(촬요 p.50)과 같은 내용으로 제91회 총회보고서 p.1114에 울산노회 상황보고를 촬요대로 보고하여 총회가 수용하였으며, 제92회 총회 시에 울산노회 분립위원회가 보고하기를 “문제가 된 태화강 남쪽의 양산시찰은 (가칭)울산남노회 소속으로 함”등을 보고하니 총회가 유인물대로 받기로 가결하였다. 이상과 같이 울산노회의 결의와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내용과 분립위원회의 총회 보고 내용이 일치하게 태화강을 경계로 북쪽은 울산노회로 남쪽은 울산남노회로 하는 노회경계를 결의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울산노회가 주장한 시찰별 중심으로 노회경계를 결의한 증빙할만한 근거서류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굴화리와 천상리는 법리적으로 남울산노회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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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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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믿음으로 살리라(2) -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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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산다는 말에는 믿을 만한 진리가 있어야 하며 진리를 알아보고 믿기까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먼저, 믿음은 무조건 생기지 않는다. 믿을 만해야 믿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사기일 수 있으며 맞더라도 내 자유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때도 상대방이 믿을 만한 말과 믿을 만한 행동과 믿을만한 실력과 믿을 만한 인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가능하다.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까지 가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믿기만 하면 그 즉시 다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말을 알아듣는 어린 아이에게 “너 믿기만 하면 금세 힘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어른이 된다. 믿을래?” 그러면 이 아이는 손해될 것이 없기에 “예, 믿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 금세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 수 있는가? 감나무 씨앗이 믿는다고 금세 큰 나무가 되어 감이 주렁주렁 열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무엇인가에 열매가 생기려면 씨를 뿌리고 어려움을 겪어내며 땀과 노력을 기울이며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법칙이다. 이 하나님의 법칙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가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고 지배력을 갖기 위해 세상의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에고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건과 힘든 환경 속에서 상처를 받아 거짓된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죄책감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좀 더 힘이 있으면 화를 내며 원망하고 비난하며 증오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마음의 상처를 청소하고 치료하는 상담이라는 세계를 들어간다. 이 심리적 치유의 단계는 감정적 노폐물을 제거해서 밝고 맑은 본래의 감정을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수많은 마음의 존재와 화해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과정을 거치면 다시 에고가 없어지는 '본래 나‘를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며, 내가 기쁨이며, 내가 자유인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나로 살면서 돈을 벌고, 건물을 사고,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하며 자신의 삶을 살게 되게 된다. 여기까지 최선의 삶을 살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절망감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육체에 관계된 것이기에 아무리 부유해져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 후의 삶. 내 영혼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영적 진리를 찾기 시작하는데 까지 오게 된다. 여기부터는 사람의 의지로 갈 수 없는 길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를 믿어야 하는가? 또 그 영적진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내 영혼을 살리는 영적진리는 영적인 눈이 떠지고 하나님께서 안에서부터 빛을 비추셔야 가능한 것이다. 영적진리를 알아보는 눈은 삶에서 진리를 선택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워하고 비난하고 소유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찌 영적인 진리를 알아보겠는가? 삶에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다. 선을 선택할 것인가? 악을 선택할 것인가? 성공을 추구하는 당신의 눈에 늘 실패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 괜찮게 보이는가? 미련하게 보이는가? 지배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시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고마운 말로 받아들이는가? 화가 나는가?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1억 원이 생긴다면 당신은 거짓을 택할 것인가? 1억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지배욕과 거짓을 옹호하는 쪽을 선택하면 결코 영적진리를 알아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을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과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오랫동안 이 과정을 반복할 때 더 명확한 진리를 알아보고 점점 더 믿음으로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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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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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초대교회의 지도자 베드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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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내 양을 치라'는 분부를 받고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함께 초대교회의 선교 사역을 주도하였으며 베드로 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다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절기 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부는 강하고 급한 바람과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성령이 무리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는데, 제자들의 방언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기 자신들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증거 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자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그러한 현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베드로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종말적 사건, 즉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속의 성취 결과로 이루어졌음도 밝혔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며,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들로 예언하신 메시야였으며,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심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해석은 성령 충만을 받음으로써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함을 입음으로써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과 경륜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임한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한 가지는 예수께서 행하시던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행할 수 없는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은 베드로의 영적 능력을 의지하여 치유 받으려고 몰려왔습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에게 온 자들은 모두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병 고침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영적인 치유와 구원을 육체의 구원과 치유로 나타내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행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그와 같이 큰 역사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육신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 사역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됨으로써 사단의 세력이 약화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됨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은사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할 뿐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아야 함을 아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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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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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사사시대의 구원역사 (삿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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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를 통하여서 그 시대의 어떤 닮은꼴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고, 그 시대가 사람을 낳고 사람이 시대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대와 역사, 인물을 통해서 배워야 됩니다. 역사는 반복 되는데 오늘 성경에 나타나는 이 사사시대가 대한민국 교회와 흡사합니다. 사사시대는 아주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구원의 감격을 망각한 시대, 신앙의 첫사랑이 식은 시대여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그때그때 14명의 사사가 나타나면서 그저 한 사사는 몇 년짜리, 한 사사는 6년짜리, 한 사사는 20년짜리 등 때에 따라 선지자 사사를 세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가는 아주 혼란한 시대였고, 믿음대로 이름대로 직분대로 살지 못하던 시대가 이 사사시대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면 왜 사람의 가슴에 애정이 식어가고 열정이 약해질까요? 그것이 사사시대의 제일 고민이었습니다. 사사시대의 혼란함과 어려운 상황을 보면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사사시대의 가장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이런 말씀입니다. “또, 또, 또,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범죄하고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가정에도 자녀들이 태어나고 다음 세대가 나타나는데 다음세대에 신앙의 전승이 잘 안되면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신앙을 가지는 엉뚱한 세대가 태어나서 신앙이 천대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계승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은 무엇이고 저주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환란은 벗어나게 하옵시고 고통의 때는 감해 주옵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야성을 유지하고 들판에서 광야에서 빈들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고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해야 합니다. 내가 도시 한 복판에 살아가면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아주 모던하게 살아가면서도, 첫사랑을 회복하고, 풀뿌리 근성, 야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헝그리 정신을 간직하고, 도전의식·위기의식·비전을, 개척과 개척정신, 도전정신, 모험정신, 창의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나가야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사사시대와 같이 방분하게 급속도로 마음이 약해져 갑니다. 상처를 받고 시험이 드는 데는 아주 예민한데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하나님 앞에 끈기 있게 엎드려서 나가는 부분은 자꾸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와 한국교회가 비슷하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혼란 할수록, 이 시대가 어려울수록 성도들은 더 주님의 품을 파고들어야 됩니다. 이 사사 저 사사가 나타나지만 내 삶을 온전히 주장하시고 다스리시고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야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감격을, 구원의 감격을, 첫사랑의 감동을 유지하면서, 주님 앞에서 예쁘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고 이 시대에 쓰임 받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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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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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회계] 소규모&개척교회의 재정과 회계 : 단식부기의 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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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박사과정 재학 중 도쿄의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담임목사님께서 불쑥 회계에 관한 질문을 해 오셨다. 당황한 기색으로 재무상태를 설명했지만,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목사님은 매주 당장 들어오는 헌금수입과 지출을 어떻게 관리하고, 회계장부에 표시할 것인가가 궁금했는데, 엉뚱하게 재무상태에서 답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본 칼럼(제1-8회)은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구체적인 적용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안)'에 따라 적어도 1년 예산규모가 10억원이상의 교회는 복식부기에 따른 운영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작성하도록 하고, 그에 필요한 매뉴얼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모든 교회에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적용하는 것이 아직 시기상조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개척교회는 물론, 상당수의 소규모교회가 복식부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 이를 이해할 만한 회계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제9회 칼럼은 복식부기의 적용은 계속해서 확대해 가되, 개척교회와 예산규모 2억원 미만의 소규모교회에게는 현실을 감안하여 예외적으로 단식부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회계처리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즉 소규모교회에게는 단식부기에 의한 운영성과표(자금수지계산서)의 작성을 인정하되, 다음과 같이 별도로 자산과 부채의 변화를 표시한 재산목록을 작성하고 교회 내부적으로 감사를 실시할 것을 추천한다.
첫째, 단식부기에 기초한 운영성과표는 차변과 대변 분개의 구분없이, 현금의 수입과 지출을 흐름을 집계하여 표시한다. 즉 [전기이월+수입=지출+차기이월]의 형식으로 발생주의가 아닌 현금주의 관점에서 작성한다. 특히 전년도에 세운 예산과 결산을 비교해, 교회 재정이 계획에 맞추어 적정하게 운영 집행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둘째, 교회 개척초기에 투하된 자산과 부채 금액을 재산목록에 작성하고, 또 매년말 결산시점에 전년대비 자산과 부채의 증감을 표시하여, 교회의 재산가치가 어떻게 변동되었는가를 나타내도록 한다. 즉 [자산=부채+순자산]의 형식으로 재산목록을 작성해, 효율적인 재정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정과 형편에 맞추어 감사인을 선임해 내부적으로 감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회계감사를 실시한다.
단식부기의 장점은 적용이 간단하다는 점에 있다. 회계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적용이 가능한 특징이 있다. 또 최근에는 다양한 전산회계 교회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어, 비용이 발생하기는 하나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 대부분의 전산 교회회계 프로그램이 단식부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입과 지출을 집계한 결산은 가능하나, 복식부기에서 제시한 자산부채의 관리, 공정가치 도입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다. 복식부기의 적용이 어려운 소규모교회에게는 단식부기 사용이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부기의 지속적인 확대는 필요하다. 또 이를 위해서는 차변/대변 복식부기의 구조와 회계처리절차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회계교육이 요청되며, 또 교단과 노회, 성시화 단체등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다음호는 교회회계와 관련한 내부통제제도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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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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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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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인도에서 라마누잔(Sriniv?sa Ramanujan, 1887~1920)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총명했던 소년은 15세 우연히 친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기초 결과 개요(A Synopsis of Elementary Results in Pure and Applied Mathematics)』라는 책 안에 있는 6천 개 가까운 정리를 독학으로 증명해 내었습니다. 이 노트 때문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중에는 마드라스 우체국 회계과에 근무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캐임브리지 대학의 촉망 받는 교수 하디(Godfrey Harold Hardy, 1877~1947)는 그를 초청해 같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놀라운 수학적 결과물들을 내놓았고 라마누잔은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일평생 수학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라마누잔은 향수병과 결핵병으로 32세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라마누잔이 죽은 지 2년 후인 1922년, 서울에서 또 한 명의 수학 천재가 태어났습니다. 성장하여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25세의 청년 이임학(1922~2005)은 공교롭게도 하디(G. H. Hardy)가 사망한 해인 1947년 남대문시장에서 우연히 미군이 버리고 간 미국 수학학회지 한 권을 발견합니다. 책 속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막스 초른(Max August Zorn, 1906~1993)의 논문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초른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한 부분을 풀어서 보내자 미국 학회가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인연으로 결국 미주(美州)로 건너간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딴 리군이론(Lee Group Theory)을 정립하는 등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인’으로, 그리고 10월 말 언론이 그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할 때까지 라마누잔 스토리에 맞먹는 그의 기화(奇話)는 오랜 세월 초야에 묻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임학이 ‘리군이론’을 완성하기 직전인 1966년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장차 수학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그리고리 페렐만(Grigori Y. Perelman)이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발군의 수학적 재능을 보여 스탠포드나 프린스턴 등 유수의 대학들이 교수로 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향의 수학연구소(Steklove Institute of Mathematics)에 남아 연구하던 그는 2002년 11월 36세의 나이에 한 인터넷 저널에 논문을 하나 올림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에 등장한 그 논문은 오랫동안 수학 7대 난제 중 하나로 불린 푸앵카레 추측(Poincare conjecture)을 증명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보여준 페렐만의 행적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상금 100만 달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유럽학회상으로부터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상을 거부하고 학술원 추대마저 거절하며 철저히 은둔자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도 고향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노모(老母)의 연금으로 생활하며 우주의 충돌이론 연구에 여념이 없다고 합니다. 21세기에 수학이 주식이나 통계 심지어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 뒤안길에는 이처럼 그저 수학이 좋아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학을 연구한 많은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도 이럴진대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성경 속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썼습니다(히 11:38). 이들이 흘린 땀과 피 위에 교회는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세속적 명성과 영광뿐 아니라 교회에서마저 이름을 내려 하고 영예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느덧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많은 것을 가졌으나 주 이외에는 배설물로 여겼던(빌 3:8) 사도의 고요한 외침이 이 가을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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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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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산이 허락한 자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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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천왕봉을 한 번 정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에 천왕봉을 등정할 기회가 있었다. 해발 1653m인 장터목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천왕봉 1915m를 향해 가서 일출을 보는 코스였다. 천왕봉은 남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너무 기대가 되고 설렜다. 마침내 천왕봉 등정이 시작되었다. 가을 지리산은 참 아름다웠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지리산은 가을 풍경을 물씬물씬 자아내며 만추의 정경을 그려주고 있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가을숲 나무들의 모습이 나의 남은 여생을 연상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잠시 이런 시상에 잠기기도 했다. “초봄부터 그리도 사랑을 속삭이더니 / 가을엔 벌써 늙었다고 수줍음을 타네요 참 아름답게도 늙었어요 / 나는 그래도 늙어가는 그대들이 좋아 / 그대들과 함께 늙고 싶어 / 나는 지리산에 살어리랏다.” 마침내 장터목에 도착 했다. 1653m 고지를 4시간 동안 오른 것이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천왕봉을 오른다고 생각하니 저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몸은 피곤하고 노곤하지만 천왕봉을 정복한다는 게 꿈 같았다. 그렇게 잠을 설치는 중에 산악인 엄홍길님의 말이 생각났다. “산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고 산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다.”그 분의 말에 의하면 천왕봉이라는 정상이 내게 허락해야 나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찌 산이 내게 허락을 하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엄홍길님의 문학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겸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높은 산은 자기의 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허락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시를 쓸 때 산은 하나님의 품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이미지화할 때가 많이 있다.“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이렇게 볼 때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단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왕봉을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새벽에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마침내 천왕봉에 발자국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출을 알리는 여명의 빛이 한동안 비취더니 마침내 붉은 태양이 둥근 쟁반의 모습으로 저 동쪽에서 떠올랐다. 차마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계속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간순간 눈을 감으며 새에덴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새에덴 성도들의 가슴에도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아침에 희망차게 떠오르게 하옵소서. 어두운 가슴일수록 더 솟구치는 의지와 희망으로 떠오르게 하옵소서.” 나의 가슴은 호렙산 부흥회가 연속되었다. 사진을 찍고 산청 쪽으로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급경사인 돌길인데다가 젊었을 때 눈구덩이에서 너무 오래 무릎을 꿇었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무릎 꿇을 때 고통스러웠던 십자인대와 그 속 힘줄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그럴수록 더 깊이 깨달아졌던 것은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천왕봉이란 정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아니, 내 인생의 어떠한 고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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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