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4(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성공칼럼] 기도-비밀스런 사랑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기도를 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신 혹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를 한다. 우상에도 내적 우상과 외적 우상이 있다. 외적 우상은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절하면서 자신의 원함을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수천수만의 신들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비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가족 화목, 건강, 직장, 승진, 시험 합격, 사업 등등 육체와 세상에 대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천지신명에게 빌든, 돌과 나무에게 빌든, 조상에게 빌든, 물 떠놓고 빌든 대상만 다르지 속 모습은 자기사랑이며 세상 사랑이며 신을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내적 우상은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양과 사랑과 선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외적 우상숭배자와 똑같은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우상 숭배적 기도는 거래이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도는 삶이며 생명의 호흡이며 가슴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가 삶이 되고 생명의 호흡이 되고 은밀한 사랑이 되려면 기도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나의 육체적인 것을 원하는 기도가 은밀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기도이어야 한다. 사랑이란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줄까? 그 필요를 위해 기도하다보면 내게 있는 것을 주게 되고 또 없으면 도울 방법과 지혜가 생기게 된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속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일어나게 되면서 은밀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은 은밀한 기도는 받아들이는 기도이다. 삶이란 현재를 받아들여서 넘어가든지, 현재와 거부하며 충돌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삶을 잘 잘 살고 싶어 하면서 삶을 피하고 거부하고 충돌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삶은 받아들여서 넘어가야 한다. 12년 전 날개영성하우스를 건축하다가 부도가 나서 공사가 중단되고 콘크리트 벽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처럼 두려움과 원망 속에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애원을 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이런 기도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나도 이 막막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런 태도를 갖고 한참을 기도하는데 가슴에 기쁨이 생기고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평안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어떻게 건축을 마무리할까하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교인 중에 한 분과 연결이 되어 건축 후에 융자를 해서 건축비를 주기로 하고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삶이란 어떤 일이든지 받아들여 넘어가면 삶은 사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어지는 은밀한 기도는 관상기도이다. 이 기도는 보고 듣는 기도이다. 보는 것을 통해서는 눈이 밝아지고 깨달음이 일어나는 자기성찰과 관계된 것이며, 듣는다는 것은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행동과 관계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온갖 잡다한 생각과 함께 자기 욕심과 관계된 두려움과 원망과 화 등의 어두운 생각 등이 떠오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내가 사랑과 선을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각들이 잠잠해지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무엇으로 사랑하고 어떤 말과 행동으로 선을 행할지 묻고 듣는 시간이 찾아온다. 이때부터가 은밀한 사랑의 기도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생명이며 사상과 진리는 생명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냥 비어있는 그릇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번 여름에도 아내를 도와 여름수련회로 찾아오는 수천 명 분의 설걷이를 하게 되었다. 지난 주 설걷이를 하면서 나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내 가슴에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과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같았다. 주님은 생명이시며 사랑과 선의 원천이시며 주님은 사랑과 선 안에 거하시며 예수께서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하신 천국도 사랑과 선 안에 있는 것이다. 매순간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랑을 하고,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를 찾아 행동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7-23
  • [은혜의 말씀]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에4:13~17)
    오늘 성경말씀 에스더서는 한 고아가 왕후의 자리에 오르고 왕의 눈에 들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민족을 구원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잡혀가 있는 포로시대가 배경이지만 ‘최악에서 최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 백성들을 영원히 보호하시기 위해 한 사람 에스더를 쓰십니다. 또한 에스더는 부모 없이 자랐지만 기도해서 나라를, 민족을 구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도와 신앙입니다. 사람은 스펙이나 상황, 배경,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원망하고 배경과 조건을 탓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에스더 4장 13절 말씀에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한 두 사람만 조심해도 되었을 일이 한 사람의 부주의와 실수로 온 나라가 혼란하고 불안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고 살아도 주 위해 사는 삶의 가치관이 바뀌어 버립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자랑 하던 사람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처럼 산꼭대기에 기도의 굴을 만들어 항상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아시고 내게 복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공동체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괜찮다고 했습니다(로마서 9장 2절 말씀). 대한민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1.5%일 때가 있었습니다. 2%가 부족한 1.5%때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송재 서재필, 백범 김구 그분들이 믿음을 지켰던 때 말입니다. 그때는 ‘예수 믿는 사람=애국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병원 짓고. 고아원 짓고, 신문사 만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대보다 대한민국에 성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운명공동체입니다. 나라가 잘 되어야 교회가 있고 직장이 있고 백성이 있고 가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축을 옮겨야 됩니다. 이기적인데서 이타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공동체적으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데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달라져야 됩니다. 조국과 민족을 품고 열방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4장 14절 말씀에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라고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밤낮 삼일을 금식(에스더4:16)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갈 때 순간을 쓰임받기 위해 평생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필요충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을 찾으시고 준비된 자가 쓰임 받습니다. 주님 부르실 그때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를 위해 기도로 준비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부모 없이 자란 에스더도 가문의 영광이 되고 나라의 왕후가 되고 민족의 구원 투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먼저 다른 것은 못 해도 “기도의 시간이라도 메우자! 기도의 분량을 채우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8 말씀)라고 기도 했듯이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기도할 때 인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분의 기도의 자리를 뺏기지 마십시오. 그 기도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때 울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보좌를 움직이셔서 이 나라 역사를 이 땅을 얼마든지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한 사람 내가 기도의 자리에서 에스더처럼 기도하여 축복권을 당기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5-07-23
  • [가정칼럼] 예약된 행복 없다.
    한 사람이 이발을 하기 위해 이발소를 찾았다. 그런데 거기 이런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현금, 내일은 공짜” 공짜로 이발을 하고 싶었던 그는 하루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다음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일찌감치 이발소를 찾아보았더니 역시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오늘은 현금, 내일은 공짜” 그래서 내일 다시 나가 보기로 했다. 다음날이었다. 여전히 거기에는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은 투덜거리면서 “또 내일이란 말이지” 그리고는 또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증상을 가진 바이러스를 뭐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빈둥빈둥 바이러스 한다. 그 증상이 이렇다. 제작지: 지옥 발견 장소: any time, any where 기억 장소: 그 모양 그 꼴형 감염 방법: 기생형 감염 증상: ① 의욕 상실 ② 만사태평 ③ 비디오가게 아저씨와 친밀 ④ 늦은 기상 ⑤ 실천되지 않은 수많은 계획 감염결과: ① 열등감, 패배감 ② 자기 자책 ③ 때로 비만증상 전도자는 이른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6:10-11) 빈둥거리다 많은 것을 놓치고 뒤늦게 가슴을 쥐어뜯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지옥은 다른 게 아니라 ‘껄껄껄’이라고 한다. “진즉 선택할 걸” “진즉 행동에 옮겨 놓을 걸” “진즉 나서 볼 걸” 그래서 바보는 항상 결심한 한다. ‘화해해야지’ 하면서 화해를 미루고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그러면서 또 미룬다. 그러다가 정작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고 없을 때 땅을 치지만 소용이 없다. 더 이상 예약된 행복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미룬다. 내가 오늘 헛되이 보내버린 하루가 어제 죽어갔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는 것을 모른다.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롭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지혜자는 미리 깨닫고 어리석은 자는 나중에야 깨닫는다. 지혜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어리석은 자는 시간을 끌며 산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짐하자.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라./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른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라./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해라./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지는 않는다./ 사랑의 말이 있거든 지금 하라./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라./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 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지어라./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불러라./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다. /나의 노래를 지금 불러라./ 너무 늦어서 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한다.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인생이란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놓치지 말자. 가정이야말로 ‘지금’이란 시간으로 쌓아 올려진 성(城)과 같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7-23
  • [목회자칼럼] 두이레통곡기도회
    두이레통곡기도회 지난 6월 22일(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설 때에 문정순 권사(엘림중보기도사역팀 사역장)가 담임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남과 북의 상황을 바라볼 때에 간절히 기도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이야기와 함께,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님”-16절지 앞뒤를 깨알같이 가득 쓴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내용에는 우리 교회, 재건교회, 한국교회, 우리나라의 총체적 위기들, 92명으로 구성된 엘림중보기도팀 중심으로 다니엘의 ‘세이레기도회’(단10장)를 6월 29일(월)부터 21일 동안 갖고 싶다는 바램, 부르짖을 기도제목들, 그리고 교회적인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교회 지도자로서 늘 동일한 위기감과 영적 부담을 가져오던 차라 공감이 갔고 다니엘의 세이레기도회 제안이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권사님, 기도해 봅시다. 당회와 상의해서 가능한 기도회를 갖도록 하지요.” 나는 그날 전화로 당회의 동의를 얻고, 효율적인 기도회를 위해서 묵상에 들어갔다. 단10:2~3,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이레=일주일, 혹은 7년) 기도회의 명칭, 주제, 25가지 기도제목-의견을 제시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명칭: ‘두이레통곡기도회’(Two Weeks Crying Prayer Meeting) / 주제: “살려 주시옵소서!” / 기간: 6월 29일(월)~7월 11일(토), 밤 8시, 2층 중고등부실 / 주관: 엘림중보기도사역팀 / 주된 기도제목: “남녘땅 대한민국을 살려 주시옵소서, 북녘땅 어둠의 땅을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전국재건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마산재건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나의 가정, 우리 지체들의 가정을 살려 주옵소서. 제대로 쓰임 받는 성도, 가정,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배이든, 기도회이든 영적 분위기가 있고 나름대로 느끼기 마련인데 금번의 ‘두이레통곡기도회’, 비록 준비기간은 짧았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회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밤 뜨겁게 간절하게 진행되는 “찬양/20분-말씀/10분-통성기도/40분”, 참석자 모두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금번의 ‘두이레통성기도회’는 마산재건교회 설립 이래 가장 긴 기도회로 기억될 것이다. 담임목사로서 받은 은혜가 커서 온 성도와 함께 그 은혜를 마무리할 필요성을 느껴 주일오전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그리고 설교말미에 온 성도가 함께 한 목소리로 “살려 주시옵소서!” 간절히 부르짖는 통성기도회를 가졌다. 필요적절한 시기에 “두이레통성기도회”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은 ‘엘림중보기도사역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지난 주일 오전예배에서 나눈 ‘25가지 기도제목을 요약한 기도문’을 소개한다. 그래서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길 소망한다. 1. 남녘땅, 북녘땅, 한국교회의 죄악들을 회개하며 부르짖자! “오, 주여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남녘땅 대한민국을 살려 주시옵소서! 북녘땅, 어둠의 땅을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위정자들의 죄악, 백성들의 우상승배, 이기주의, 성공주의, 동성애, 사회 분열을 용서하옵소서. 북녘땅의 세습독재정권, 폭정, 무력도발, 핵위협, 인권탄압, 굶주림, 정치수용서의 죄악을 용서하옵소서. 세상을 닮아가는 교회의 세속화, 교회지도자들의 죄악, 교회영향력의 상실, 교회침체, 주일성수와 다음세대의 위기를 용서하옵소서” 2. 우리의 가정과 마산재건교회를 위해 간절히 부르짖자! “오, 주여!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을 살려 주옵소서. 제대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가정의 복음화, 가정의 화목, 건강, 생업, 교회사랑, 주일성수, 교회헌신, 자녀들의 믿음, 교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믿음의 결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 마산재건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제대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배의 부흥, 교회사역들의 활성화, 다음세대의 부흥, 넉넉한 교회재정, 온전한 교회헌당, 교회지도자들(목회자, 장로, 권사, 안수집사)성령충만하여 존경받는 지도자 되게 하옵소서” 3. 감사의 기도! “오, 주여! 감사드리나이다. 7월 5일-전교인출석주일, 본당을 가득 채워 주심을 감사드리나이다. 빈자리가 채워지고, 계속 성장하고, 주일성수 신앙으로 무장받게 하옵소서. 두이레통곡기도회-살려주옵소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리나이다. 우리의 두손이 기도하는 거룩한 손이 되게 하옵소서. 자신과 교회와 교단과 한국교회와 민족을 위해 늘 기도하는 성도와 교회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이 민족을 축복하사, 사방에 복을 흘려 보내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7-23
  • [시사칼럼] 교회여 테르모필레에 서라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 왕이 된 크세르크세스(Xerxes, B. C. 485~465, 성경의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 1:1)는 10년 전 선왕(先王)의 치욕스런 패배를 되갚아주기 위해 528만 대군을 이끌고 노도(怒濤)처럼 그리스로 진격했습니다(Herodotus, Historiai).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파죽지세로 마케도니아를 경략한 170만 페르시아 육군은 기원전 480년 여름,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 협곡에 도착합니다. 남쪽으로 산맥이, 북쪽으로 바다가 버티고 선 넓이 15m, 길이 7.2km의 좁은 통로를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Leonidas)와 그가 이끄는 정예부대 300명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3일 간의 총력을 기울인 전투에서도 페르시아 군은 이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에피알데스(Ephialtes)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더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들은 왕을 포함하여 전원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지만, 결과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그리스가 승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015년 여름 현재, 교회는 또 하나의 테르모필레 협곡에 서 있습니다. 2월 2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간통제가 한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6월 16일 미합중국 연방대법원은 동성애 결혼을 막는 주법이 미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해프닝이 아니라 이미 무너진 성도덕(sexual morality)의 하한선을 실증하는 사건입니다. 미국 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등 파워엘리트(power elite)들이 환영 의사를 밝혔습니다. 스타벅스, 구글, 맥도날드 등도 앞 다투어 지지 의사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특히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기업들이기 때문에 그 실질적인 여파나 영향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당장 이러한 기류에 편승하여 성소수자들이 주관하는 퀴어 축제(Queer festival)가 큰 논란 속에 지난 달 28일 서울광장에서, 그리고 이달 5일에는 대구 동성로에서 열렸습니다. 아직은 반대 여론이 우세하지만 퀴어 축제가 처음 열렸던 2,000년과 비교하면 성소수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증가일로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헌절로 기억하는 지난 17일, 이슬람 2대 축제 중 하나인 ‘이드 알 피트르’를 맞아 1,000여 명의 무슬림(Muslim)이 김해 구도심에 모였습니다. 라마단이 끝난 다음 날 모여서 이슬람 식 집회를 열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행사가 한국 땅에서 이제는 이렇게 버젓이 열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날 이들이 모인 장소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김해중앙교회 건물이 서 있던 터였습니다. 한 술 더 떠 지역 뉴스의 한 기자는 이 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무슬림들은 모두 밝은 표정으로 예배를 드렸다. 임시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부르고 무슬림을 모으는 육성의 외침인 ‘아잔’이 낮고 평온하게 울려 퍼졌다. 차분한 아잔 덕분에 공터는 진짜 이슬람 사원이 된 듯 경건한 분위기가 흘렀다.” 현재 이슬람의 팽창은 두렵기까지 합니다. 영국의 데이빗 캐머런(David Cameron, 1966~) 총리는 20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퇴치를 위한 5개년 계획을 발표할 정도입니다. 우리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 정서를 틈타 이슬람 세력이 어느새 우리 문턱 앞까지 진출해 있습니다. ‘테르모필레’라는 말은 뜨거운 물이 분출되는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2,500년 전 여름, 300명밖에 되지 않는 스파르타 용사들의 펄펄 끓는 열정은 수천 배에 달하는 대적들의 발을 묶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숫자가 아니라 집중력이다”라고 썼습니다(김종춘,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그런데 결코 만만치 않은 현대 사회의 이러한 대적들 앞에서 한국 교회는 혹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계 3:15)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으로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향력 없는 허수(虛數)의 다수(多數)가 아니라 집중력 있는 실수(實數)의 소수(小數) 교회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교회여, 이제 다시 테르모필레에 서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7-23
  • [성서연구] 연평해전 후기(에베소서 6장 10-17절)
    <연평해전>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관객수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평해전이 있은 후 십 수 년이 지난 이제야 영화를 통해 그 날의 비극을 접하게 되었는 바, 너무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연평해전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9년 6월 북한 고속정들이 계속 북방한계선을 넘어 도발하던 중, 6월 15일 오전 8시 45분경 북한 경비정 7척이 우리 해군 고속정에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우리 해군도 충돌공격을 가하였고, 이 와중에서 북한이 먼저 사격을 가해옴에 따라 우리도 즉각 대응사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되어 도주하였습니다. 반면에 우리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흔히 이것을 제1차 연평해전이라고 합니다. 제2차 연평해전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나라와 터키의 3,4위전 경기가 열리던 6월 29일에 발발하였습니다. 이 날 북한은 다시 북방한계선을 침범했고, 이날 오전 북한 경비정들은 10시 25분부터 우리 해군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전은 31분간 진행되었는데, 북한 군함은 대파된 채 도주하였습니다. 제2 연평해전으로 우리 해군은 참수리 357호가 예인 중 침몰했고,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를 낳았습니다. 북한군은 약 30여 명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평해전으로 이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소극적인 교전수칙 때문이었습니다. 햇볕정책으로 북한의 문을 열려고 노력하던 당시 정부는 전쟁을 염려하여 상대방이 먼저 발포하기 전에는 절대 발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병사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그러나 연평해전을 계기로 교전규칙을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 개념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북한의 북방한계선 침범 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쏠 때까지 기다리는 소극적 대응으로는 적을 막을 수 없고 아군의 피해가 커진다는 것을 체험한 결과입니다. 종종 경기를 해설하는 이들이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입니다. 적이 쏠 때까지 기다려서는 적을 능률적으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과 신앙의 영역에서도 선제공격이 중요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쉴 새 없이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성경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서는 영적 싸움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입어야 할 것들을 말씀합니다. 그 중에는 방어와 수비를 위한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에는 사탄을 선제공격할 무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의 검입니다. 6장 7절을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공격할 수 있는 예리한 검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 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보다 더 예리하고 강력한 무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적을 이기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사단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말씀의 검으로 공격하십시오. 적극적 대응으로 영적 승리를 거두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07-23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동성혼, ‘강 건너 불’ 아니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하는 결혼은 짐승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악습 동성혼은 말이 안된다. 짐승도 짝짓기를 암컷끼리 혹은 수컷끼리 하는 경우가 없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동성끼리 부부가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럼에도 동성애와 동성혼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이다. 이 악습은 더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37개 주에서 동성간 결혼법이 통과되었고, 지난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혼도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상, 하원에서도 동성애 지지세력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까지 공개적으로 동성혼을 찬성하고 동성애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동성혼 합법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법안 통과는 오늘 내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졌고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닌가. 대통령이 취임할 때에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나라인데도 동성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외에도 20개국이 동성혼을 합법화했다. 최근에 아일랜드도 동성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되었고 지난 5월 15일 룩셈부르크에서는 베델총리가 남자 연인과 동성간 결혼식을 거행했다. 부총리 역시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1978년 호주에서 시작된 동성애 축제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매김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지고 퍼레이드까지 하고 있다. 2007년 10월 1일 법무부 인권국에서 동성애차별금지법을 발의하고 의견수렴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동성애 합법화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동성애 차별법안에 따르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경우 고발하면 2년 이하의 징역, 일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법무부에서는 2013년에 동성애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기독교와 시민들의 반대로 법을 제정하지 못했다. 동성애와 동성혼이 세계적인 추세이긴하나 우리 한국만이라도 기필코 막아야하고 한국이 동성혼 반대 분위기를 전 세계에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동성혼은 성경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레 18:22, 고전 6:3, 롬 1:24~27) 뿐만아니라 동성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사 부부가 되게 하셨다. 동성혼은 순리가 아니고 역리이다. 또 한가지는 동성혼은 에이즈를 확산시킨다. 어느 면으로 보든지 동성애와 동성혼은 막아야할 악습이다. 한국교회는 이 악습을 막아내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7-23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5)
    잠언 27:17에 이런 말씀이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탈진 상태에 빠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누구일까? 부모? 아내? 자녀? 형제? 스승? 상담사? 의사? ... 물론 다들 소중한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다.그러나 성경이 확증하고 있는 바처럼 인간관계에서 〈친구〉만큼 좋은 것은 없다.옛 어른들 말에 「부모 팔아서 친구를 산다」고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정하게 성장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부모님보다도 ‘친구’가 더 필요하다. 친구란 “가장 가까운 사이 /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 / 어떤 어려운 문제(부탁)도 들어주고 도와 줄 수 있는 사이 /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 / 전쟁터에서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이 / 외롭고 힘들 때 만나고 싶고 전화하고 싶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 / 내게 있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기꺼이 주고 싶은 사이 ... ” 이다.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 나의 친구’ 라고 말씀하신다(사41:8, 대하 20:7, 약2:23, 창18:17). 그러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도 ‘친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친구)이 필요하신 것이다.이 얼마나 놀라우면서도 기분 좋은 현상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고 ‘나의 벗 나의 친구’ 라고 하시니 지켜보는 우리들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온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믿음의 후손-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롬4:11,12).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래, 너희들도 나의 〈벗〉 이다” 라고 말씀해 주실 가능성이 아주 크다.신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좋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시고 제자들은 〈학생〉이라는 도식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요 15:11~15)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요13:1), 보호하시고(요14:18),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다(눅22:32, 요20:19, 21:15). 그리고 여전히 사명을 맡기셨다(요21:15, 행1:8).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부께 제자들을 이 험난한 땅에서 보전(保全)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셨다(요17:15). 그리고 성령께도 제자들을 잘 도와주고 지켜 줄 것을 당부 하셨다(요16:7). 그리고 자기 자신도 친히 제자들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마28:20).〈친구〉란 이러한 것이다. 끝까지 함께해주고 할 수 있는 바는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다 동원하여 사랑하고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이이다. 이 모든 것을 조금도 귀찮게 여기거나 억지로가 아니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베풀어 준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7-09
  • [교회법률상식] 위험천만한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의 발상(1)
    -상비부와 특별위원회, 총회가 위탁하지 않은 사건 처리 못해-정치부 상설화는 소수집단이 꿈꾸는 위헌적 독재정치의 꼼수 기독신문 제2015호(2015.6.24.) p.2에 “총회기구혁신안 나왔다”라는 머리기사의 “정치부 상설화로 헌의안 심의 강화”라는 소제목으로 “정치부에 5-6개의 분야별 상설소위원회를 설치해서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정치부는 이 안들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총회실행위원회에서 심의하므로 가을의 본 총회에서 이를 내외에 수백 건의 헌의안을 급하게 처리하는 일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특별위원회는 거의 폐지되게 된다. 즉 올해와 같은 경우 총회정치부 관련 헌의에 대해 구성된 특위만 27개인데, 이 특위의 임무가 정치부 산하 분과들로 분산되는 것이다. 정치부 내에 설치가 가능한 분과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제1분과위 : 헌법, 규칙적용 유권해석, 제2분과위 : 기구, 제도설치 연구, 제3분과위 : 기구, 제도운영 개선, 제4분과위 : 노회행정 조정, 제5분과위 : 불법, 분쟁 조사처리”라는 기사내용과 “한국교회 교류협력위원회, 세계교회 교류협력위원회, 통일준비위원회와 같은 상설위원회는 상비부 산하가 아니라 상설위원회로서 활동하게 한다는 것이다.”라는 기사내용은 경악을 금치 못할 충격적인 대형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이유인즉 “정치부 및 특별위원회의 상설화는 헌법을 무시하고 민주적인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는 일부 소수의 집단적 독재정치를 구상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헌법을 무시하는 것은 곧 성경을 어기는 행위로서(교회 법률상식 pp.608-612 참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인본주의적 정치체제에 다름 아니다. 1. 치리회와 상비부 정치 제8장제1조(정치의 필요)에 “교회를 치리함에는 명백한 정치와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전14:40). 정당한 사리와 성경 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한즉 교회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다(행15:6).”라고 하여 치리권은 치리회에만 있도록 한 것이 성경과 교회 헌법이 정한 진리요 법리이다. 그런데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는 성경과 교회 헌법의 근본인 장로회 정치의 대원리를 배격하고 치리회인 총회만 처리할 수 있는 노회가 상정한 모든 안건들을 “정치부 상설화로 …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자는 내용이다.”라고 하였고 “이렇게 되면 … 사실상 특별위원회는 거의 폐지되게 된다(올해에 구성된 27개의 특별위원회와 같은 경우 등).”라고 하였으니, 총회가 처결하는 사안과 특별위원회에 맡겨 처리할 사안들을 정치부가 도맡아 하게하는 위험천만한 비성경적 위헌적 소수집단을 구성하여 정치부가 총회위에 앉아서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제정한 교회 헌법은 “치리권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부가 위원회 심사의 원칙을 무시하고 총회 헌법을 어기며 총회의 위탁도 받지 아니하고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도록”(정치 제12장 제4조 위반) 할 수 있으며, 정치 제12장 제5조(총회 권한) 제1항에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고”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부가 총회의 위탁도 받지 이니 하고“헌법, 규칙 적용 유권 해석”까지 하게할 수 있으며, 동 제3항에 규정한 헌법 조항을 무시하고 “불법 분쟁조사처리권”을 총회의 위탁 없이 정치부가 시행할 수 있도록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혁신위원회의 구상은 장로교 정치의 근본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시행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을 폐기하며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부가 총회의 옥상옥이 되어 독재정치를 해보겠다는 잠꼬대 같은 발상으로 여겨진다. 이는 총회가 장로회정치를 포기하고 혁신위의 구상대로 헌법을 개정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계속)
    • 오피니언
    • 칼럼
    2015-07-09
  • [성경인물탐구] 관용의 사람 요셉(8)
    요셉은 관용의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무 죄도 없이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고에게 팔려 애굽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형들에게 미움과 분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려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판 일로 인해 마음에 불안을 품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은 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인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야곱이 죽자 마음속에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죽었으므로 요셉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야곱이 죽기 전에 형들을 용서할 것을 요셉에게 유언하였다고 전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들을 때에 울며 형들에게 두려워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형들이 자신을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하셨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알았기에 형들의 악행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을 때 어떠한 일도 관용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지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 아비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셔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습니다. 요셉은 장수의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고하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 곧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들을 권고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자신의 유골을 메고 가져가겠다는 약속을 하게했습니다. 요셉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이루어졌고, 요셉의 뼈는 세겜에 장사되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애굽의 총리였지만 그 땅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언약하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고 그 언약 성취에 소망을 둡니다. 요셉이 가졌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서 구원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7-0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