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1(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가정칼럼] 실버문화가 바뀌고 있다.
    노후의 생활양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자식농사가 최고의 노후설계]라는 얘기가 옛말이 된 대신 능력 있을 때 저축을 하고 은퇴 후에는 부부끼리 지내는 새로운 노후설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제2의 청춘을 즐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무덤에 갈 때까지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노령 층에 확산되고 있는 것. 사업자금을 대 주거나 집을 사 주려고 자식에게 일찌감치 재산을 넘겨줬다가 최소한의 노후생활 기반마저 잃어버리고 후회하는 노인들이 늘면서 상속은 최대한 늦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다. [내 돈이 자식 돈이고 자식 돈이 내 돈]이라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퇴직금을 받기 보다는 연금생활을 하면서 자식과 따로 살겠다는 것이 50, 60대의 지배적인 생각이고 노후를 대비해 국민연금이나 노후보장보험 등에 가입하는 40, 50대도 크게 늘었다. 1. 독립선언을 해라. '내 나이 예순 다섯, 이제 내 맘대로 살 때도 됐지.' 진즉에 남편과 자식에게서 독립선언을 했어야 하는데 후회가 돼.'라는 분들이 많다. 노년의 삶은 부록이 아니다. 노년의 삶은 새로운 준비의 시기다. 그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발목을 잡으면 한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해 주는 부역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부모에게도 일종의 책임이 있다. 희생만이 능사가 아니다. 노년은 할 일이 없는 방학기간이 아니다.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삶이 있듯 내게도 내 인생의 있음을 말해라. <엄마가 뿔났다>(KBS II)에서 김혜자는 당당히 안식휴가를 받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인생의 주권선언(?)이 필요하다. 2. 부부의 사랑에도 공짜는 없다 좋지 않았던 부부 사이가 나이 들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지는 법은 없다. 먹고사느라고, 아이들 기르느라고 소진된 사랑의 에너지를 보충해야 할 때다. 공짜 밥은 없다. 자식중심에서 부부중심으로 빨리 전환해야 노년이 복되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매달리다 보면 부부관계는 또 뒷전으로 밀려난다. 서먹서먹한 부부관계가 자식들에게 좋은 유산일 수 없다. 로맨스 그레이란 말이 있잖은가 말이다. 분홍빛 데이트도 즐겨라. 실제 로멘스 그레이가 노화를 늦춘다. 3. 사는 재미를 찾아라. ‘고전무용도 하고 합창단, 산악회까지 하느라 아주 바빠 죽겠어.’ ‘그래도 이렇게 다니니까 생기가 있어서 좋아.’ 한결같이 그들이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재밌다는 걸 애들 키울 때는 몰랐어.’ 사는 재미는 많다. 찾아 다녀라. "윗세대만 해도 사람들 시선 때문에 놀 수도, 놀데도 없어서 몰래 무도장 같은 데 가고 그랬지. 지금은 그렇지 않아. 뭐든 배우면서 놀고 싶어. 배우는 게 그렇게 재밌어. 욕심이 생겨. 따라잡기 어렵지만 그래도 남는 게 있는 것 같아. 건강만 따라준다면 꾸준히 배우고 즐기면서 나를 위해 살고 싶어." 얼마나 흥미 있는 고백인가 말이다. 노화를 늦추기 위한 행동전략에는 이런 것도 있다. 가족 등 제한된 인간관계를 피하라. 즐길 수 있는 놀이 활동을 찾아라. 호기심 새로운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라. 새로운 집단 활동에 가입하라. 공부, 창조적인 사고들을 지속하라. 실버문화, 내가 바꾸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6-26
  • [시사칼럼] 찰스톤의 용서
    한국의 젊은 선교사가 아프리카 한 부족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먼저 그 마을 족장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족장님,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족장이 잘라 말했습니다. “소용없소!” 한국의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왜요? 어째서 소용없다는 거죠?” 그러자 족장 왈,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미국 사람들이 벌써 다 점령해버렸을 거요!”(『유머 복음』) 지난 6월 17일 밤, 미국 동남부 사우스캐롤라니아 주 찰스톤(Charlston) 소재 이매뉴얼아프리칸감리교회(Emanuel AME Church)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9명의 기독교인들이 총기 난사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클레멘타 핑크니(Clementa Pinckeny) 담임목사를 비롯해 87세, 70세의 사촌자매, 20대의 대학생 등 수요일에도 교회를 나올 정도로 신실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검거된 범인은 뜻밖에도 딜런 루프(Dylann Roof)라는 앳된 청년이었는데(21세), 조사 결과 심각한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원래 이곳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이용해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경영하던 남북전쟁 당시 대표적인 ‘남부’ 지방으로, 아직도 주 의회 등 몇몇 공공장소에 당시 노예제도를 찬성하던 13개 주의 연합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The Confederate Battle Flag)’를 사용하고 있다 하니, 21세기의 젊은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젖은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습니다. 한편 이 지역을 바이블벨트(Bible Belt)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주로 미국 내 앵글로 아메리칸 계열의 보수주의 기독교 세력권을 의미하지만, 핍박과 설움 속에서 노예 해방과 인권 운동을 주도하며 풀뿌리처럼 자란 아프리칸 아메리칸 교회들을 포함해야 더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이 두 세력은 오랜 세월 동안 반목과 질시만을 거듭해 왔을 뿐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참사로 예수 안에서 연합 운동(‘Charlestonunited’)이 펼쳐지고 있으며, 나아가 미국 전체를 용서와 치유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법률의 관례에 따라 열린 루프의 보석재판법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날 화상대화를 통해 피해자 가족들은 루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생자 에델 랜스(Ethel Lance, 70세)의 딸 나딘 콜리어(Nadine Collier)의 목소리입니다. “다시는 어머니를 안을 수 없지만 당신을 용서한다. 그리고 당신 영혼에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은 나를, 또한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신다. 그래서 나도 당신을 용서한다(God forgives you, and I forgive you).” 총기 사고의 생존자인 동시에 숨진 티완자 샌더스(Tywanza Sanders, 26세)의 어머니인 팰리시아 샌더스(Felicia Sander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요일 밤 성경공부 시간에 너를 두 손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 중 몇을 죽였다. 내 몸 살점 하나하나가 다 아프다(Every fiber in my body hurts). 티완자는 내 아들이었고, 내 영웅이었다. 하지만 성경공부 시간에 말한 것처럼, 우리는 너를 즐거워했다(As we say in the Bible study, we enjoyed you). 하나님께서 네게 자비를 베푸시기를(may God have mercy on you)..”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할지니라”(마 18:21~22). 오 주여, 아멘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6-26
  • [서임중 칼럼] 유언비어(流言蜚語)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후 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삶의 자리를 불편하고 좌절케 한 것이 유언비어였다. 천안함 사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광우병 소고기 파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로 국민생활이 불안하고 불편스러웠다. 지나고 나면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과에 허탈감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한다. 메르스 질병이 확산되면서 가장 화가 나고 불편스러운 것이 역시 유언비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는 내용이 연일 뉴스에 보도가 되고 경찰에서는 철저하게 유언비어 단속을 한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국민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유언비어는 메르스 질병보다 그 확산 속도가 더 빠르고 멈추지 않는다. 유언비어는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소문에 의하여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람들 사이에 연쇄 반응적으로 퍼지는, 말 그대로 유언(流言)이고 비어(蜚語)다. 그 전달경로가 일정하지 않고 내용도 당면의 상황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지만 보통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유언비어다. 허위제보와 유언비어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지만 허위제보는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으로 유언비어와는 구별이 된다. G. W. 알포트와 L. 포스트만은 유언비어 전달의 강도는 그 내용의 중요성과 모호한 상황의 곱에 비례한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질병 확산 같은 정치적 혼란과 재해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불만이 팽배할 때, 유언비어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불평과 불만을 어떤 대상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파괴적 의도로 만들어진다. 특히 괴담이나 악담 같은 경우는 빠르게 전파되어 그것이 하나의 설(說)이 되면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혼란에 처하게 된다. 명심보감에 ‘經目之事 恐未皆眞 背後之言 豈足深信’(경목지사 공미개진 배후지언 기족심신)이란 말이 있다. ‘눈으로 직접 본 일도 참된 일일까 하고 두려워하는데, 등 뒤에서 하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그럴듯한 유언비어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도 자신의 인격과 삶이 손상당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유언비어는 언어폭력이 되고 인격말살의 죄악이다. 그런 말을 날조하고 조작하여 퍼뜨리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양심이 화인 맞고 인격이 부서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인격과 도덕적 가치가 확립된 사람은 그와 같이 확인도 안 된 것을 사실인양 퍼뜨리는 말을 믿고 함께 춤을 추지 않는다. 한 때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식품을 수입한다는 등의 괴담이 인터넷과 SNS 등으로 급속히 확산돼 국민 불안이 커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때도 있었다. 소고기 파동을 겪었고, 천안함 사건을 겪었고, 세월호 사고를 겪었고, 지금은 메르스 질병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정서가 카오스현상이다. 이 상황에 메르스 질병과 관련된 유언비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 유언비어가 확산되는 곳은 언제나 진실이 어둠속에서 신음을 한다. 그 사이에 유언비어는 거리를 활보한다. ‘카더라’와 ‘찌라시’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 스스로 유언비어에 동화(同化) 되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나고 나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없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현실에 동류(同流)되어 간다. 한(漢)나라 때 성품이 곧고 너그러운 직불의(直不疑)란 사람이 있었다. 직불의가 시종으로 문제(기원전 180~157)를 섬길 때의 일이다. 함께 살고 있는 동료 한 사람이 휴가로 고향에 갈 때 잘못해서 동료의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주인은 자기의 금이 없어진 것을 알고 직불의가 훔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그 사실을 안 직불의는 훔친 것은 틀림없이 자기라고 말하고는 사죄하며 금을 사서 반환해 놓았다. 그런 얼마 뒤에 동료가 고향에서 돌아와 잘못 가져간 금을 반환시켰다. 직불의를 의심했던 주인은 자기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했다. 그 뒤부터 직불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평판이 돌았다. 그 일 때문에 문제의 눈에 들어 태중대부(궁궐의 고문)까지 승진하게 됐다. 그 무렵의 일이다.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사람이 그를 모함했다. “직불의는 공무 처리가 뛰어나고 모습이 준수하지만 흠이 있습니다. 그가 그의 형수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시지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직불의를 아끼는 한 사람이 직불의를 찾아가 시중에 나도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직불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개의치 않았다. 직불의를 모함하고 폄훼하는 유언비어는 세상에 창궐한데 직불의는 여전히 자기소임을 성실히 감당해 나갔다. 나중에야 그 소문이 유언비어였음이 드러났다. 직불의에게는 형(兄)이 없었던 것이다. 금(金)이 변하지 않듯 진실은 영원하고, 진실은 변명하지 않으며, 진실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 이치이다. 다만, 그렇게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온갖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겪어야 하지만, 결국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15-06-26
  • [성서연구]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장 1절)
    메르스로 인해 온 국민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언론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하고, SNS는 불안감을 키우는 데 더 큰 책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에 들어 정말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그 심각성으로 따진다면 메르스보다 심각한 것들이 많습니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의하면 지난 해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가 4,762명이었습니다. 이는 매일 13명꼴로 사망한 셈입니다. 또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통계에 의하면 2005년 ~ 2008년 사이에 계절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연평균 2,369명으로서, 매일 6-7명이 사망한 셈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공기를 통해서 많이 감염되는 결핵도 매우 심각합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의 허대석 교수는 지난 6월 8일자 메디컬 타임즈에 실린 글에서 2013년 한 해에 결핵으로 진단 받은 사람이 총 36,089명이며, 그 해에 무려 2,466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매일 100여명이 결핵에 감염되고, 매일 6-7명이 사망한 숫자입니다. 폐렴은 이보다 더 심각해서 2013년 한 해 동안 폐렴 사망자는 모두 10,800명으로서 매일 약 3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자동차를 이용하고 온갖 행사와 모임이 열려 왔습니다. 사실 앞의 예들과 비교해 보면 메르스로 인한 피해는 오히려 낮은 수준입니다. 지난 5월 11일 메르스 환자가 처음 발생한 후 6월 19일 오전 기준으로 확진자가 166명, 검사 진행 중인 사람이 199명, 사망자 24명이었습니다. 확진자는 하루에 4명꼴이며, 사망자는 이틀에 한 명꼴입니다. 피해가 훨씬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메르스에 대해서는 지나친 불안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심지어 예배 참석도 꺼리는 행태는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침착해야 합니다. 보건당국의 안내에 따라 손을 깨끗이 자주 씻고, 씻지 않은 손으로는 눈이나 귀, 코를 만지지 않고, 기침을 할 때는 손수건이나 손으로 입을 가리는 예의를 지킨다면 메르스는 퇴치될 수 있습니다.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메르스에 대한 불안이 초래할 정치경제적 혼란과 침체 등 그 이후의 상황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성경 이사야 40장 1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이 주어질 때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한 후였습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백성들은 깊은 절망에 떨어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을 불안하게 하는 말이 아닌,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메르스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18일 세계보건기구(WHO)의 <마거릿 찬> 사무총장은 “한국의 메르스 바이러스가 감염력이 강한 방향으로 변이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히면서, ”한국의 메르스 초기 대응은 늦었지만 그 이후 세계 최고 수준의 역학 조사를 벌였고, 세계에 한국만큼 메르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더구나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궁극적 위로와 치료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이 난국을 조속히 벗어나길 기도합니다. 메르스 불안 바이러스보다 격려와 위로 바이러스가 더 빨리 확산되길 기대합니다. 대한민국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라 생각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06-26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 (1)
    이제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 내가 한국인이란 것이 자랑스러워 1960년대 한국(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절반 수준이었다. 120개 독립국가 중 북한은 40위인데 한국은 10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최빈국가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한국보다 더 잘 살았다. 그러다가 1976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2배로, 3배로, 4배로, 10배로, 20배로, 근 30배로,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소득의 격차가 생겼다. 눈여겨볼 것은 북한은 1970년대나 지금이나 국민소득이 거의 같다는 점이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 후 새로 탄생했거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나라가 85개국인데 이 85개국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는 유일하게 한국뿐이다. 이건 놀라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이 한때 “한국의 삼성, LG, 포스코, 현대가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온다”고 경계하더니 지금은 자기들이 뒤지니까 “한국의 이 회사들을 어떻게해서든 따라잡자. 더 밀리면 안된다” 이렇게 구호가 바뀌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국을 연구하는 박사급 인사 3,000명이 한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자기들은 대국이고 한국은 별볼일 없는 변방 소국으로 생각해 왔다. 그렇게 보던 한국을 이젠 기를 쓰고 배우려고 한다니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한국은 이젠 더이상 후진국이 아니고 개도국도 아니다. 이미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오랫동안 외국의 원조를 받아 겨우 연명해 오던 우리나라가 이젠 빈곤한 나라를 지원하는 DAC 국가로 변모하였다. 한국의 국력과 순위를 보면 국토의 크기는 미국의 한 주에 비할 정도로 작은 나라이지만 GDP(국내총생산규모)는 세계 10위 규모의 경제대국이다. 조선산업은 세계 1위, 철강과 자동차산업은 세계 5위, 반도체 생산은 세계 1위, 인터넷 기술도 세계 1위, 휴대폰 기술도 세계 1위, 교육열도 세계 1위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순 없고, 종합국력이 세계 9위이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 한국을 “미꾸라지 용된 나라”라고 했다. 전날에 우리나라는 농업국이면서도 식량도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였고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였는데 이젠 어느 사이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이건 전날 상상도, 예측도 못했던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국인이란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 한국이 어떻게 이토록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는가.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다.(신명기 8:11~18)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6-25
  • [목회자 칼럼] 모스크바 방문기
    주후 2015년 5월 18일, 유럽 고신 총회의 초청을 받아 장로 부총회장과 함께 난생 처음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었다. 소련, 모스크바, 크레믈린, KGB ... 이러한 단어들이 익숙하게 먼저 떠올려지는 땅이었으며, 비록 지금은 ‘러시아’ 라는 이름으로 바뀌긴 했지만 우리들에겐 여전히 무겁고 어두운 인상으로 다가오는 나라임은 어찌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막상 발을 직접 디디며 보고 배운 느낌은 먼저 모스크바까지의 거리가 5천 킬로 정도 밖에 안되는 비행거리와, 10시간 남짓하는 비행시간은 의외로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때,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던 공산주의의 종주국(宗主國)의 심장부인 모스크바로, 색상도 선명한 대한항공을 타고 찾아가게 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은 몽고의 고비사막인 듯한 상공을 지나치니 어느덧 러시아 대평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계속되는 평지, 습지, 호수들을 내려다보면서, 우리 조상들은 작은 땅,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어떻게 러시아 사람들은 저 광활한 대륙을 다 차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가지게 된다. 모스크바 공항에는 장로님이 마중 나와 주셨다. 구 소련말에 용감하게 입성하여 정착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대한 독립군을 대하는 것 같이 엄숙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러시아 선교사인 황상호 목사님과 함께 모스크바 장로교회의 설립 멤버로서 얼마나 긴장하고 수고를 많이 했을까하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과 가정위에 크게 칭찬과 축복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제29회 유럽고신총회 개회예배에서는 마 16:15-19의 말씀으로 (교회, 이 땅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교회는 1. 주님이 친히 세우셨으므로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2. 주님께서는 마귀의 세력(음부, 죄, 사망, 지옥)을 제압하는 권세를 우리 교회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3. 주님께서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교회에 맡기셨다. (마 16:19, 28:18-20, 롬 1:16, 10:8-17) 교회는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고국을 떠나 낯선 유럽땅에서 선교사로, 목회자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용기와 확신과 꿈을 나누어주고 싶은 열망으로 복음을 증거하였다. 모스크바 장로 교회에서의 주일 예배는 ‘행복’ 그 자체였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보면서 러시아는 더 이상 공산주의 소련이 아니고, 서구 유럽풍의 문명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명의 기초와 정신은 단연코 우리 기독교 정신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치적인 자유만 한 단계 더 성숙되면 우리들 자유 세계와 더불어 밝고 건강한 인류문명의 발전대열에 능히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상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는 것 하나를 여행중 발견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인민의 복지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모스크바의 대표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정교회 건물을 수영장으로 개조해 버렸다. 그러나 60여년 만에 민주주의 회복의 선구자격인 전 대통령 옐친에 의해 교회당으로 원상복구를 시작하였으며, 공사 20년만에 본래의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건물을 보면서 러시아의 ‘회복과 희망’을 확신하고 싶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한 때 기독교가 왕성함으로써 찬란한 기독교의 부흥을 꽃 피웠던 이 땅, 러시아에 70년 만에 밝은 태양, 의로운 해를 비춰주고 계시므로, 러시아 교회가 전열을 재 정비하여 세계 선교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6-11
  • [교회법률상식] 시무정년 만료 후에 연장 시무는 할 수 없어
    [질의] 1. 예를 들어 8월15일이 생일인 장로가 2015년 8월 15일이면 만70세가 되고 장로 시무기간이 19년 10개월이 되어 20년 시무에는 2개월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원로장로 추대를 위하여 2015년 연말까지 연장시무를 하여 20년 이상 시무하게 한 후 원로장로로 추대할 수 있는지요? 2. 노회가 총회 총대를 투표하여 선택하였으나 노회를 폐회한 후 장로 총대 1인이 사퇴를 하였고 장로 부총대 2인도 모두 사퇴를 하였습니다. 장로 총대 1인과 부총대를 선출하는 방법은 법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합동 D장로) [답] 질의자가 합동측 장로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만70세 시무 정년의 의미 만70세 시무 정년의 의미는 만70세가 되면 시무기간이 종료되므로 만70세가 지나면 더 이상 시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만70세 익일부터는 은퇴의식 등과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당회나 제직회에 참석할 수 없고 어떤 공직도 받을 수 없다. 이에 관하여 만70세까지(교회정치 제3장 제2조, 제3조)에서 만70세의 의미는, 71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이다. 그 이유는 만1세는 출생 후 365일째인 두 번째 생일 전날이 만1세이기 때문이다(교회법률상식 pp.220-226 참조). 그런데 총회는 제93회 총회가 만70세에 대한 해석을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1년 동안이라고 잘못 해석(제93회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 p.70 참조)하여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2. 장로 20년 시무를 위한 연장 시무에 대하여 질의자의 질의 내용에 만70세까지의 장로 시무기간이 19년 10개월인 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한 조건인 20년 이상의 시무기간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시무정년이 종료된 만70세 이후에 연장시무 운운함은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사안으로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천부당만부당한 불법이다. 그러므로 만70세에 장로 시무기간이 19년 10개월인 자는 원로장로로 추대하는 방법이 없다. 법은 단 하루만 미달되어도 추천할 수 없는 것이 현행 헌법의 법리이다. 3. 총회 총대 결원의 보선에 대하여 정치 제12장 제2조(총회 조직)에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하는 목사와 장로로서 조직하되 목사와 장로는 그 수를 서로 같게 하고 총대는 각 노회 지방의 매 7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씩 파송하되 노회가 투표하여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송달하고 차점 순으로 부총대 몇 사람을 정해 둔다.”고 하였고, 정치 제22장 제1조에 “총회 총대는 총회 전 정기노회에서 선택할 것인데 총회 개회 6개월 이상을 격하여 택하지 못 한다.”고 하였으며, 동 제2조(총대 교체)에 “총회 원 총대가 출석하였다가 자기 임의로 부총대와 교체하지 못할 것이나 부득이한 때에는 총회의 허락으로 부총대와 교체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총회 총대 선택에 관한 규정은 ① 정기노회에서 선택할 것 ② 목사와 장로 수를 같게 할 것 ③ 총회 개회 6개월 전에는 택하지 말 것 ④ 총회 개회 2개월 전에 총대와 부총대 명단을 총회 서기에게 제출할 것 ⑤ 총회에 출석한 후에 부총대와 교체는 경우는 총회의 허락을 받을 것 등의 규정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질의자의 노회는 정기노회를 마친 후 장로 총대 중 1인이 사퇴를 하였고 장로 부총대 2인 모두도 사퇴를 하였으나 총회에 총대를 보고하기 이전이요, 총대보고는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 해야 하고 부총대 몇 사람도 보고해야 함이 헌법의 규정이다. 그러므로 부득불 “임원선거는 정기노회에서 선거” 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임원 중 결원이 있을 때는 임시노회에서 보궐선거”를 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처럼 “결원된 총대와 부총대 선거” 역시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장로 총대 1인을 선택하는 선거를 하여 총대 1인을 선정하고 차점 순으로 부총대 2인을 선정하여 총회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노회의 총대 보고를 하는 것이 법리이다. 여기에서 혹 임시노회는 3건 이상 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임시노회는 단 한 건만 있어도 목사 3인, 장로 3인이 청원하되 일시와 장소까지 정하여 노회 소집청원서를 제출하면 회장은 반드시 그 시간 그 장소에 노회를 소집해야 한다(정치 제10장 제9조). 혹자는 임원회가 총대와 부총대를 선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노회가 임원회에 위임하지 아니한 사안이므로 불가하며 노회가 투표로 선택하는 것이 법리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6-11
  • [성공칼럼] 비움=채움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려고 하는가?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고 무겁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숫자의 노예로 살아간다. 숫자가 없으면 두려워하고, 숫자가 많아지면 욕심이 생기며, 숫자가 최고치에 달하면 지배욕에 불타게 된다. 예를 들어, 통장의 돈이 없으면 두려워하고, 통장의 돈이 늘면 욕심이 생겨서 더 많아지기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통장의 돈이 아주 많아지면 그 숫자만큼 자신이 높아진 것으로 착각하여 으스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지배욕을 나타내는 것이다. 돈 뿐만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교인의 숫자가 없으면 두려워하고, 숫자가 많아지면 더욱 많게 하려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해서 거대해지면 권력을 행사하며 지배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마음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사랑에서 나온 본성과 사람을 이용하는 정욕이기에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한 자연에서 마음을 비우면서 쉬기를 원한다. 그러면 잠시 동안은 행복함과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잠시 편안할 뿐이다. 쉬고 난 후에는 또 자기 사랑을 위해서 돈과 권력과 사람이라는 숫자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자기 사랑을 위해서 신성한 것을 이용하고 사람을 이용하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의 목적은 자신의 숫자인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비워도 자연에서 쉬어도 평안은 없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악으로 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쉼을 얻고 기쁨이 넘치기 위해서는 숫자와 자기 사랑에서 나온 두려움과 욕심과 지배욕을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해와 비를 주시고 가족, 친구, 수도 없이 많은 것을 주셨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이렇게 지금까지 나에게 주신 것을 찾고 찾으면 그 속에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이 일어나면서 주님의 사랑이 생기게 된다. 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고 찾아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마음은 가벼워지고 행복해지고 밝아지면서 마음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목적은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진리이며 지혜이며 사상이며 신념이다. 이 사랑과 진리를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과 선이란 전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상대방을 이용하는 태도는 선이 아니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교육이란 명목으로 부모가 자녀를 이용하는 것이나 공부라는 이름으로 선생이 제자를 이용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목사가 교인을 이용하는 것이나 좋은 명분을 내세워 국민들을 이용하는 정치가나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쉴 수 있는 길은 돈 버는 것, 일하는 것, 고민하는 것을 잠시 멈추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채우며, 자신의 몸과 소유로 선을 행하려는 목적을 마음에 품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할 때 마음은 비워지고 또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선이란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나보다는 상대방이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인가? 쉼과 채움을 모두 얻기 위해 나보다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6-11
  • [은혜의 말씀] 아이야의 축복(창 37:1~5)
    오늘 분문의 말씀은 요셉에 대한 말씀이지만 소개할 때 아버지 야곱부터 얘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믿음, 야곱의 믿음 3대를 지나가면서 그 집안의 내력이, 히스토리가, 그 집안의 흐름이 생긴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가정이라는 게 여러분 한 사람의 존재로 이루어 진 게 아니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시댁, 친정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구조 속에서 가정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오늘 선택하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하지만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손자에게, 아들에게 반드시 내려간다는 겁니다. 여기 창세기 37장에 아이야의 축복을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은 조상 중에 아무런 믿는 사람이 없어도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내려갈 때 아브라함이 왜 복을 받았는가 보면 포기의 축복을 누렸다고 봅니다. 아브라함 혼자 75세에 늦게 시작을 했지만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 익숙한 곳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저는 가정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많은 순간 포기의 축복, 내려놓음의 자유, 지는 것의 이기는 법을 알아야 된다고 봅니다. 부부지간에 이겨먹으려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지는 것이 이기는 겁니다. 집안의 평안을 위해 남자들이 포기의 축복을 누리면 집안이 화평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포기하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생계수단을 포기하고 주를 따라갔기 때문에 위대한 겁니다. 포기하지 못하고 끝가지 하는 것은 집착·아집 입니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가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불편한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고, 남편이 못하는걸 아내가 하고, 아내가 안 되는 걸 남편이 하고, 부부가 그렇게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면 미운 정 고운정이 들면서 세월이 지나면 좋은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이야의 축복이라는 건 대부분 약점이 강점되고, 쓴물이 단물 되고, 안 좋은 것이 좋게 바뀌어 갑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 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가정 문제가 한방에 해결 되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어떤 어려움이든지 복합 다중 적이고 간단하게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신바람 나는 직장 삼위일체가 되어야합니다. 성경적인 가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가정은 교회처럼, 교회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가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오직예수, 순수 복음, 진리 파수, 생활의 순결이 있어야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주님만 드러나야 되지 인간냄새가 나고 사람이 큰소리치는 건 부질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가정은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어야 하고, 가정엔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에 인생후반전에 그렇게 처절하고, 고독하고, 인신매매가 되고, 절절하게 혼자 끌려가고, 팔려가는 세월을 살아도 눈도 깜짝 안합니다. 이미 부유하고 사랑의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사랑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 요셉의 마음에 철철 흘러넘칠 만큼 풍성한자였기 때문에 요셉의 인생에 구김살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 예배하는 가정, 거룩한 가정 복 있는 가정 쓰임 받는 가정, 천대까지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는 가정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5-06-11
  • [성경인물탐구] 야곱의 축복받는 요셉(7)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 여생의 마지막을 보내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으로 그 아들들을 불러 모이게 하고 그들 각자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셉에 대하여는 축복의 예언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이며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예언했는데, 이는 요셉에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나옴을 의미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서도 리더십을 지닌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활 쏘는 자가 요셉을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요셉이 어려운 위기에 처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자손을 도우실 것이요, 복을 주시되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 임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복을 포함하고 있는 축복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 언약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에게 임한 임마누엘의 축복으로서 모든 성도가 추구하여야 할 궁극적인 축복의 내용입니다. 요셉은 그 신앙과 인격에 있어서 흠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외에 요셉과 같이 완벽한 인격과 신앙의 소유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과 성품은 모든 성도의 본보기가 됩니다. 요셉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만나게 되었을 때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이와 같이 눈물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순수함을 나타냅니다. 요셉의 순수한 마음은 그의 소년기의 행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셉은 순수하였기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온다는 계산을 했다면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와 불의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보여주신 계시를 형제들에게 고함으로써 시기와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이 형들보다 자신이 높아져서 형들이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와 같은 계시를 발설하여 어려움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요셉은 계시의 내용을 형들에게 말하여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기까지의 미움을 샀습니다. 요셉은 오랜 기간 동안 인생 풍파를 많이 겪었음에도 그와 같은 순수한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동생을 보았을 때 울음을 참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수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순수하고 풍성한 감정으로 신앙을 표현하게 됩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은 풍부한 감정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많은 시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6-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