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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찌 이런 나라가 …
    영예로운건 하나같이 꼴찌이고 영예롭지 않은건 단연 1등인 나라 세상에 나라가 많다보니 이런 나라도 저런 나라도 있을 수 있지만 북한과 같은 나라가 또 있겠는가. 이미 알려진대로 북한은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EIU에서 발표한 2014년 전세계 민주화지수를 보면 167개국 중 167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또 북한은 2015년 헤리티지 재단이 발표한 경제자유화지수를 보면 178개 국가 중 178위로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 자유가 없는 나라로 꼽혔다. 그뿐아니라 2015년 프리덤하우스는 각국의 언론자유를 조사했는데 199개국 중 199위로 북한은 ‘최악 중 최악의 언론탄압국’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5년 오픈도어즈가 발표한 세계기독교박해지수를 보면 북한은 2002년부터 13년간 연속 1위를 차지하여 세계최악의 기독교탄압국임이 밝혀졌다. 또 있다. EU에서는 2006년 전 세계민주의 지수를 처음 발표한 이후 2008년, 2010년, 2011년, 2012년, 그리고 2014년 여섯차례 발표했는데 북한은 여섯번 모두 167개국 중 167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 기관에서는 조사대상국가들을 민주주의 수준에 따라 ‘완전 민주국가’ ‘불완전 민주국가’ ‘민주, 독재 혼합국가’ 그리고 ‘독재국가’ 이렇게 4등급으로 분류하였으며, 북한을 전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발표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명예로운 것은 하나같이 모두 꼴찌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은 단연 1위이다. 한가지 더 밝히고 싶은 것은 종교전문 사이트 어드히런츠닷컴은 2007년 김일성 주체사상을 세계 10대 종교 중 하나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종교의 3요소는 교주, 교리, 교인인데 김일성 주체 사상교의 교주는 김일성과 김정일이고 교리는 김일성 주체사상이고 교인은 북한 주민이라고 발표했다. 북한 정권은 3대 세습 독재체제이며 김일성 일가 신격화, 우상화체제이다. 북한에는 3,200개의 영생탑이 있다. 영생탑에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쓰여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죽지 않았다. 북한 인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 이렇게 믿는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두가지 생명이 있다. 하나는 생물학적 생명이고 또 하나는 사회정치적 생명인데 이것은 영원하여 김일성 수령을 통해서 인민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즉 김일성 수령을 통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부분 때문에 주체사상은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 2011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에도 노동신문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영생하실 것이다” 그랬다. 이것이 북한의 실상인데도 아직도 종북좌파가 적지 않다고 하니 이해가 안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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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시사칼럼] 붕어빵 아이들
    지난 1월 25일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글 하나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주의 한 거리에서 간암에 걸린 엄마를 대신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오빠를 곁에서 보살피면서 붕어빵을 굽고 있는 중학교 여학생 이야기였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시민들의 온정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SNS에 올린 글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확인 결과 붕어빵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연은 좀 달랐습니다. 간염이나 우울증 증세 등으로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부모를 둔 네 가정의 아이들을 교회가 돌보면서 자활할 수 있도록 붕어빵 포장마차를 지원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아동 학대’를 이유로 당국에 민원을 내는 사람들이 생겼고 결국 단속요원들이 철거 계고장까지 발부했다가 또 다른 시민들의 항의로 일단 철거는 보류되었다고 합니다. 켈로그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이자 세계적인 마케팅 대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그의 책 『다른 자본주의(Confronting Capitalism)』(더난, 2015)에서 자본주의가 직면한 14가지 문제를 적시했습니다. 첫 번째부터 순서대로 쓰면, ‘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소득불평등, 파괴의 씨앗’, ‘수렁에 빠진 노동자들’, ‘자동화에 일자리를 빼앗기다’, ‘이익은 기업이 비용은 사회가!’ 등입니다. 서두에 소개한 붕어빵 아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이 아이들과 그 가정들은 그토록 가난해야 합니까? 확실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답 하나는, 가난이 이 아이들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에 모순이나 결함이 있는 걸까요? 코틀러 교수는 바로 이러한 모색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자본주의는 가능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를 꿈꾼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하는 일종의 대안들이 바로 ‘온정적(Compassionate) 자본주의’, ‘포용적(Inclusive) 자본주의’, ‘인도적(Humane) 자본주의’, ‘건강한(Healthy) 자본주의’, 그리고 ‘깨어 있는(Conscious) 자본주의’ 들입니다.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일본 디플레이션의 진실』(2016)의 저자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그는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2015)라는 책에서 오늘날 인류가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를 향하고 있다는 스웨덴 환경운동가 헬라나 호지(Helena Norberg Hodge)의 말을 인용하면서, 울창한 삼림에 널려있는 나무 조각을 이용해 펠릿(pellet)이라는 연료를 개발하거나 친환경 스토브를 만들고, 나아가 CLT(cross laminated timber)라 불리는 고강도 목재를 개량해서 고층 빌딩을 건설하며, 농가의 버려진 집들이나 자가소비하고 남은 작물을 재활용하고 공유하는 일본 산촌(山村)의 현장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이산(里山) 자본주의’라고 부르면서,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때와 같이 자본주의가 그 기능을 상실할 경우 보완해 줄 수 있는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동화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전주의 붕어빵 아이들을 돌봐준 것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 식의 온정적 자본주의도 아니요,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 식의 ‘이산(里山) 자본주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기업 무를 자를 두며,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교회가 불쌍한 아이들을 품었습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오히려 세상은 교회의 아동 학대를 말하고 교회의 착취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언제 어디서나 교회는 항상 세상의 피난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능을 감당하는 교회의 모습마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교회가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이 그만큼 썩어버렸기 때문일까요? 붕어빵 속에 진짜 붕어 없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진짜 그리스도가 없다고들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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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목회자칼럼] 내 안에 숨어있는 5가지 적(敵)
    ①욕망 ②의심 ③불평 ④교만 ⑤두려움 겸손할 줄 모르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은 그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우상숭배와 불평과 교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교만을 싫어하실 뿐 아니라 교만하면 내가 망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인간에게 <교만으로 나아가도록>끝없이 부추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부추김에 가장 취약하다. 잠언 16장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장 12절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교만>은 인간을 패망으로 이끌어간다. 우선 성경 안에서 그 실례(實例)를 찾아보자. 이집트의 바로(왕)를 생각해보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자신이 소중한 인간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중한 인간>이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하게 학대한다. 인간으로서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노동으로 몰고 간다. 이스라엘의 조상 중 한 사람이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애굽을 7년 대흉년으로부터 구해낼 뿐 아니라 애굽 국민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그 아름도운 역사를 전혀 기억하지 아니한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이 『背恩忘德』(배은망덕)이라는 것을 이집트의 왕 바로가 아주 잘 보여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신다. 교만한 마음을 반성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自由)를 허용하라고 충고하고 권면한다. 이 충고는 인간 모세의 충고가 아니고 실은 <하나님의 명령>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는 번번이 약속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기만한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 땅에 차례로 내리게 된다. ‘열 가지 재앙’이라 했으니 바로(왕)가 하나님의 명령(권면/충고)을 열 번이나 무시하고 비웃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약속한 바’를 열 번이나 번복하였다는 뜻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집트 전역에 열 가지 재앙이 차례대로 내리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던가? 피·개구리·이·파리·악질·독종·우박·메뚜기·흑암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이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에 대하여 출애굽기 12:29~30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 이었더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 열 가지 재앙을 차례로 거듭 겪으면서 이집트 나라는 초토화 되었다.그러고도 바로(왕)는 겸손 할 줄 모른다. 여전히 교만하다. 그는 이집트군의 정예 군대를 이끌고 출애굽하여 이미 상당한 거리로 벗어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뒤를 추격하였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걸어서 건너갔다. 하나님께서 홍해물의 위, 아래를 막으시면서 강바닥에 길을 내어 주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다. 겸손할 줄 모르고 끝까지 교만에 갇혀 있던 바로(왕)와 이집트 정예 군대는 이스라엘의 뒤를 추격하다가 홍해에서 몰살당하였다. 통치자 한 사람의 끝없는 교만 때문에 이집트 전 국민들 집집마다 장남이 죽어 나가고 모든 가축의 초태생(初胎生)이 죽어 나갔다. 집집마다 시신을 치우고 장례를 치루느라고 애굽의 땅과 하늘에는 ‘통곡 소리’가 뒤 덮였다. 교만의 폐단은 이렇게 무섭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너무 교양 많고(?) 지체 높은(?) 사람이 될려고 하지 말고 〈원초적이고 순전한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 자신이 너무 고상하고 대단하다고 착각하면 점점 교만해질 위험성이 크다. 그리되면 무어보다 ‘은혜’를 못 받는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못 받으면 숨이 막혀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다. 하늘로서 내려오는 은혜(heavenly grace)이다. 주일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다. 예배시간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다. 신자는 은혜를 못 받으면 살 수가 없다. 숨이 막힌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강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참으로 바라신다. 그래서 우리더러 겸손하게 살라고 하신다(미가6:8, 벧전5:5). 때로는 고난을 경험시켜가면서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시 119:6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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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교회회계] 교회회계 : 결론/마무리
    필자는 5년째 교회에서 회계업무를 맡아 왔다. 또 대학에서 15년 넘게 회계학을 강의하였다. 교회회계는 돈의 흐름을 결산ㆍ보고한다는 점에서 기업회계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사용하는 복식부기를 교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식부기는 현금주의 개념에 따라 수입ㆍ지출의 표시와 예산이 잘 집행되어졌는가를 검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자산ㆍ부채의 관리는 물론 교회 재산가치에 미치는 흐름을 장부에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그동안 12회에 걸쳐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방법과 절차에 대해 설명하여 왔다. 본회는 그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복식부기 교회회계의 원리(accounting cycle)는 다음 6단계로 구분해 적용하라! 교회가 복식부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①먼저 회계장부에 표시될 거래를 식별하여 기존의 수입ㆍ지출 내용을 자산, 부채, 자본(순자산), 수익, 비용으로 분류 변경한다. ② 식별된 내용은 분개(journal)를 통해 회계장부에 기록한다. T자계정을 만들어 차변(Debit)에는 자산?비용의 증가, 대변(Credit)에는 부채ㆍ자본ㆍ수익의 증가를 표시하고, 감소시에는 그 반대로 표시한다. ③또 날짜별로 표시된 분개내용은 계정별로 집계하여 전기(posting)해 총계정원장을 작성한다. ④그리고 기말시점에 발생주의 기준에 따라 추가적인 수정분개 작업을 한다. 즉 유형자산을 감가상각하는 회계처리 등을 한다. ⑤수정분개후에는 복식부기의 핵심인 재무상태표와 운영성과표를 작성한다. 재무상태표에는 자산과 부채, 순자산을 표시하고,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는 형식으로 표시한다. ⑥마지막으로 총계정원장에 표시된 각 계정을 마감하고, 다음 회계연도를 준비한다. 2. 자금수지계산서를 운용성과표로 대체해 작성하고, 수익ㆍ비용의 영향을 구분해 표시하라 복식부기 도입시는 수입ㆍ지출을 중심으로 표시하던 기존의 자금수지계산서를 운용성과표로 대체해 작성한다. 즉 수익?비용을 경상항목과 자본항목으로 구분하여 운용성과표를 작성하되, 수입ㆍ지출의 발생 원인과 경제적 효과가 당해연도에 귀속되면 경상지출과 경상수입으로, 차기이후에 영향을 미치면 자본지출과 자본수입으로 각각 구분하여 표시한다. 즉 사례비는 지출효과가 당해에 귀속되므로 경상지출로 하고, 건물구입을 위한 지출은 장기간 영향을 미치므로 자본지출로 한다. 그리고 기말에는 발생주의 개념에 따라 추가적으로 수정분개를 한다. 감가상각비와 손상차손, 공정가치의 적용이 그 예이다.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여 표시하고, 그 잔액을 재무상태표의 순자산 항목에 반영한다. 3. 경제적 효익이 장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산ㆍ부채로 관리, 재무상태표에 표시하라. 재무상태표는 교회의 자산ㆍ부채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표시한 것으로, 교회재정의 재무적 건정성과 투명성 확보, 효율적 재산관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다. 즉 교회에서 발생한 수입ㆍ지출항목은 운용성과표에 표시하되, 그 발생원인과 경제적 효과가 장기에 영향을 미치는 항목은 반드시 자산과 부채로 구분해 표시하여야 한다. 또한 자산중 퇴직급여기금과 같이 사용이 제한된 예금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과 구분하여 표시한다. 그리고 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잔액으로 교회 설립시 기본금을 포함, 각종적립금과 차기이월잉여금으로 표시할 수 있다. 4. 회계감사와 내부통제제도를 구축하고 재무제표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라. 회계감사(auditing)는 재무제표가 회계기준에 맞추어 적정하게 표시되었는가를 검증하기위한 위한 것으로, 매년말 감사를 선임해 진행한다. 감사내용은 (1)장부상의 현금예금과 통장잔액이 일치하고, (2)재무제표와 회계장부의 표시가 적정한가, (3)재정의 수입지출이 적정히 집행되었는가, (4)영수증과 감사증거 자료를 중점적으로 체크한다. 감사결과는 적정의견, 한정의견, 부적정의견, 의견거절 4개로 분류해 감사의견을 표시한다. 또한 내부통제제도(internal control system)란 회계적 오류나 부정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절차로서, 두 사람 이상이 상호 견제속에 업무를 분담하고 필요한 매뉴얼에 따라 진행할 때 교회 사역이 더욱 원활하게 움직여 갈수 있다. 작년 12월에 종교인 과세문제와 관련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교회회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아져 있다. 또한 201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을 발표해 예산규모가 10억원 이상인 교회에게 복식부기를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필자는 10억원이 아닌 5억원의 수준으로 낮추어 교회가 가능한 한 복식부기를 모두 적용했으면 한다. 또 그런 의미에서 본 칼럼을 통해 구체적인 복식부기 적용방법을 실무적 관점에서 설명하여 왔다. 물론 규모가 작은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에게 복식부기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교회회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시대에 와 있음은 분명하다. 교회지도자의 교회회계에 대한 바른 인식과 개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단 또는 도시 성시화 차원에서 복식부기와 교회회계 발전을 위해 일조해 갈 것을 다짐해 본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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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은혜의 말씀]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장 15~17절)
    베드로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마지막으로 심방하십니다. 실패한 베드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버린 베드로, 물고기 잡으러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밥부터 챙겨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오셔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먹이는 것입니다. 친해지기 전에는 가르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급하고 바쁘다고 일부터 해버리면 충돌과 상처가 일어나기 때문에 충분히 친해지고 난 뒤에 일을 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이 무슨 말 일까요? 아직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에 불가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집중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인격적으로 배은망덕하고 실패한 사람이고, 사업적으로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빈털터리 인생이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집중해 나가는 것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철저히 일대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고 옆에 눈치코치 영향을 받는 삶이기 때문에 이렇게 접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랑에 실패를 하면 안 됩니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되고 나중사랑을 우리가 감당해야 됩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한테 배반을 당하고 실망을 할 때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제는 주님의 일을 하고 사명자의 길을 가라. 베드로 네 양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을 지금 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은 첫째, 네 것 아니고 하나님의 것. 둘째, 철딱서니 없는 말썽꾸러기 같은 그런 미숙한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챙겨주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결론이 21절 22절에 "너는 나를 따르라." 베드로야 너는 한눈팔지 말고 딴 짓하지 말고 시선 집중해서 중심을 잡고 나를 따르라. 헛된 마음 버리고 쓸데없는 자랑하지 말고 사명자의 길을 가라. 사명자가 사명을 가지면 죽어도 좋아. 네 양떼가 아니고 주님의 어린양을 붙들고 먹이고 돌봐라. 하나님은 쓰임 받고 주의 일을 할 동안에는 힘도 건강도 지혜도 믿음도 물질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름 받아 변화된 베드로가 사도행전 넘어가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사람의 말을 들을까, 하나님의 말을 들을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변화된 베드로가 설교 할 때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여 돌아옵니다. 그런 많은 상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고 오직 베드로 한 사람에게 집중해 가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주님 한 분에게 집중해서 세월이 갈수록 성숙의 변화의 주인공이 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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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성공칼럼]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사람은 가장 바깥에 육체가 있다. 또 육체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마음이 있다. 마음은 생각과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 사람의 실체인 영이 있다. 이 영이 겉사람과 속사람의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은 생명이 아니라 그릇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그릇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담으면 죽은 영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담으면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다. 육체와 마음과 영과 생명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안에 있으며 생명을 싸고 있는 덮개가 있다. 사람의 행동은 손과 발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손, 발에 힘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도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있는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수십 년을 살다가도 영혼이 떠나면 육신은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의 생명도 사람의 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에 주님의 생명이 없으면 영은 지옥을 향하게 되는 것이며, 사람이 영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을 담으면 그 영은 살아있는 영이 되어 천국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의 생명이 있어야 모든 삶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위기란 의미는 교인 숫자가 줄고 교회의 재정이 충분하지 않기에 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위기는 사람들의 중심에 주님사랑과 이웃사랑보다는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이 잘 마무리된 후에 “주님께서 도우셨고 함께 애쓴 분들 덕분”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내가 잘나고 내가 한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또, 나를 알아주지 않거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나보다 상대방이 더 잘하면 발끈하고, 돈이 있으면 더 소유하기를 원하고 돈이 없으면 걱정하고 자신이 상대방보다 많이 알고 힘이 있으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아래로 본다면 이것은 그 속에 주님사랑보다 자기사랑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속이 생명으로 가득하려면 자기사랑이 주님사랑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에 있는 한 고귀한 영적 진리를 만나도 그것은 지저분한 그릇에 귀한 음식을 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의 중심에 주님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자신 속에 주님사랑이 자리 잡는 것을 방해하는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거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육체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음식은 섭취하고 몸을 망가뜨리는 음식은 거절해야 한다. 그리고 선은 행하되 악을 행하는 일은 거절해야 할 것이다. 또 마음을 밝게 유지하기 위해 걱정하고 화가 나고 우울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태도가 만들어질 때 주님사랑을 담을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체가 건강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어 마음이 밝아질 때 드디어 육체도 마음도 아닌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된다. 이 본래의 나는 태어난 적도 죽음도 없으며, 고향도, 부모도, 나이도 없다. 나이가 없다는 말은 나이 때문에 갈등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만나면 아이처럼,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이처럼, 노인을 만나면 노인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될 때 이제야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에 자기사랑과 세상사랑은 사라지고 주님사랑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반을 온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주님사랑을 중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서 진리대로 사는 이웃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 때 어두운 삶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 천국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은 여기에,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자신의 삶을 건강한 육체에서 밝은 마음으로, 더 나아가 주님사랑을 담는 그릇으로 안으로, 안으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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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성경인물탐구] 형제를 전도한 안드레(2)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약 6개월 정도 먼저 출생하였지만 그의 사역은 일찍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레위 족속에 속하여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인 세례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자신의 위치와 직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의 메시지에 대한 권위와 사백 년 만에 듣는 선지자의 모습에 메시아를 고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막 1:2) 세례요한의 추종자가 많았습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마 3:5)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그와 함께 다니던 안드레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다니심을 본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고 증거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저 분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밝혀주었습니다. 율법의 역할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몽학 선생인 것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었습니다. 자신의 스승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드레는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아버지의 아들로 세례요한은 증거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지금까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그의 사역을 도왔던 안드레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메시아임을 알고 나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스승 세례요한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인간의 모든 죄를 도말하실 구주이신 것을 알고 주님을 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통해 결단과 지식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지식이 없으면 헛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지식이 있어도 결단이 없으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나서는 즉시 결단을 내리고 그분을 쫓은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결단하는 용기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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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교회법률상식] 총회 임원회 노회에 목사 시벌지시 어불성설(1)
    [질의] 저는 미조직교회를 시무하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S목사입니다. 총회가 사설 언론사에 관계된 헌의 안에 대하여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위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로부터 S목사가 소속한 서울강남노회에 “S목사를 기소하여 재판하고 2016년 1월 10일까지 보고하라”는 공문이 하달되었습니다. 서울강남노회는 총회에 기간 연장 요청과 S목사를 기소하기 위한 죄상이 무엇인가를 질의한 결과 총회본부 제100-402호(2016.1.8.) “질의 요청에 대한 회신”으로 시행 기간 연장은 요청에 의하여 2016년 2월 29일로 허락하는 내용과 함께 S목사의 죄상에 대하여 “1) 노회 허락 없는 기관목사 시무 사칭 2) 담임목사 직무 해태 3) 총회와 산하 교회의 연합과 화합 저해하는 분열 행위” 등이라는 공문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박무용, 서기 이승희 명의로 서울강남노회 노회장에게 회신하였습니다. ? 총회 임원회가 S목사를 기소하여 재판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노회에 하달하는 것이 합법인지와 ? 위의 3가지 죄상으로 치리회가 재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헌법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S목사) [답]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어 질의 내용의 문장에 따라 질의 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총회의 헌법으로 답한다. 1. 총회가 위임한 임원회의 안건 처리 한계 총회가 필요에 따라 헌의 안을 임원회 또는 상비부나 특별위원회에 위탁 처리케 하는 것은 당연한 처리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임을 받은 총회 임원회가 미조직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S목사에 대하여 S목사가 소속한 서울강남노회에 노회가 기소하여 재판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하달한 것은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본회인 총회가 위탁한 업무 처리 한계를 뛰어넘은 월권이요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행위이다. 총회 임원회는 총회로부터 위탁받은 사안을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토의한 후 합의 결정하고 차기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의 최종 결의를 기다리는 예비 심의를 위한 일개 위원회에 불과하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는 총회가 맡기지도 아니한 지나친 월권을 행사함으로써 S목사와 서울강남노회를 매우 곤혹스럽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총회 임원회가 언제 “S목사를 서울강남노회에 기소하여 재판하고 보고토록 하라”는 사안을 총회로부터 위임 받았는가? 총회 임원회는 반드시 이에 대한 답변을 명확히 해야 한다. 혹 총회가 “사설 언론사에 관계된 헌의 안에 대하여 임원회에 맡겨 조사 처리케 하되 조사 과정에서 범죄 사실이 드러날 경우 임원 중에 기소위원을 선정하여 범죄 당사자를 해 치리회에 기소하고 원고가 되어 해 치리회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다.”라고 임원회에 기소권과 재판 지시권을 위탁하는 분명한 명시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위임 사안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총회가 위탁하지도 아니한 ‘기소, 재판, 보고’ 운운하면서 위원회에 불과한 임원회가 가당치도 않게 치리회인 노회에 공문을 하달하는 것은 위헌적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부언컨대 질의자의 질의 내용이나 필자의 기억에도 제100회 총회에 관계된 언론 등 모든 자료를 살펴본 결과, 총회가 “사설 언론사에 대한 헌의에 관련하여 S목사가 소속한 서울강남노회에 S목사를 기소하여 재판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사안을 총회가 임원회에 맡긴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게 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임원회가 총회장의 명의를 도용하여 서울강남노회에 공문을 하달하여 ‘기소, 재판, 보고’ 운운한 문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총회장과 총회서기의 명의와 총회 직인으로 총회 산하 노회에 하달하는 모든 공문은 총회가 결의하고 총회 회의록에 기록된 사안을 공시 또는 시행 지시할 경우에만 국한될 뿐이요 총회 임원회나 재판국을 포함한 모든 상비부 및 특별위원회가 총회의 위탁을 받은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총회장과 서기의 명의로 노회에 지시 공문을 하달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불법 범죄 행위라는 것을 총회 사무국과 사무 행정 담당자들은 극히 명심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 그동안 이와 같은 총회 사무 행정의 흠결로 여러 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혼란과 고통과 시련을 겪어온 사건들이 부지기수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한국기독신문 제754~755호 참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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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소강석 칼럼] 변화하는 자에게 희망은 온다
    2016년 새해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절실한 희망은 바로 ‘변화’ 를 통해서 온다.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야 하고 스스로 오랫동안 지켜왔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국내외 급변하는 상황에 발맞추어 변화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과거의 아집과 무사 안일한 자세로 서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독단과 화석화된 전통에만 매달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스펜서 존스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보면 스니퍼와 스커리라는 두 마리의 생쥐가 나온다. 그들은 두뇌구조는 단순하였지만 부지런히 주위의 변화를 체크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선다. 반면 헴과 허라는 두 사람은 현재에 안주하다 치즈창고가 텅 비자 깜짝 놀라며 누가 내 치즈를 옮겨버렸냐며 불평만 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변화를 거부한다. 아직도 예전의 반복적 습관과 안일한 성공에만 취해있다. 그래서 치즈가 많았던 그 시절이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상황과 환경이 변화하였는데도 그들은 변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서지도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기만 한다. 결국엔 허 혼자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서지만 거기에는 이미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치즈를 찾아 나섰던 스니퍼와 스커리가 먼저 와 있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주변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고 변화를 추구해나간다면 어떤 위기든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란다면 헴과 같이 다시는 치즈를 맛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희망은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신앙은 정체되어 생명력을 잃고 만다. 불경기로 인해 생활이 더 각박해지고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위축되고 후퇴해서는 안 된다. 이럴수록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모이기를 힘쓰고 더 기도하고 더 헌신하는 쪽으로 변화해야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하여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가 헴과 허처럼 외부세계의 도전과 변화에 둔감하여 안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2016년은 그야말로 한국교회가 모든 분열과 다툼을 그치고 연합과 일치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 2016년 새해를 맞이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다시 내딛는다면 희망을 향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엔 모든 환경도 호전되고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여태 “내힘들다, 내힘들다”하며 한숨만 내쉬며 불평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다들힘내” 라는 말이 된다. 다들 힘을 내자.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자. 절망에 쌓여 있는 사회 속에 희망의 확신을 심어주자.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추구하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가장 큰 위기는 가장 큰 축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깊은 절망이 아니라 거대한 희망 앞에 서 있다. 우리 모두 2016년을 변화와 희망의 해로 만들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에게 찬란한 희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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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성서연구]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에베소서 4장 17-24절)
    새해가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예컨대 <아무리 화가 나도 말하기 전에 3초쯤 기다리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어떤 일에든 불가능은 없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먼 미래의 더 큰 이익을 추구하자>, <늘 같은 방식으로 하지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자>, <마음을 비우자> 등의 생각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특별한 환경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 예가 불교의 템플 스테이입니다. 일상을 떠나 조용한 산사에 몸을 담고 며칠 동안 마음 다스리기를 합니다.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산사 처마 아래의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명상이나 심리학적인 수련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마음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마음 다스리기만으로 변화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마음보다 더 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잘 말씀합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마음>이란 헬라어로 <누스>를 말하는데, ‘생각,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mind입니다. 그 다음 18절에는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마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 즉 정서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새 사람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는 23절에는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했는데, 여기 <심령>이란 헬라어로 <프뉴마 투 누스>라고 되어 있고, 이것은 <마음의 영>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 of mind>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의 배후에는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마음을 움직이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나 정서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이 변해야 비로소 새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영혼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심령을 새롭게 하여>란 능동적 표현 대신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수동형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심리학적 방법이나 명상으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마음의 일부를 다스릴 뿐입니다. 마음의 근본인 영혼을 새롭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뿐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때 새롭게 되고, 영혼이 새롭게 되어야 마음과 정서가 새롭게 되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말과 행동이 이루어져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새 사람이 되고자 하십니까? 그래서 마음 다스리기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그 보다 중요한 기도를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마음 다스리기나 명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영혼에 임할 것입니다. 2016년에는 우리 모두 새 사람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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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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