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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똑바로, 거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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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시간과 공간속에 살고 있지만 속마음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살고 있다. 이 말은 내 속이 죽음 후의 세계까지 이어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삶은 연속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의 삶과 죽음 후의 삶이 차원이 다를 수는 있지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향해 살고 있지만 속은 반대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똑바로, 어떤 사람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살아간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머리가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은 똑바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머리가 땅을 향해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속은 짐승인 것이다. 사람의 머리가 하늘을 향해 있고 발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속이나 마음, 태도를 하늘에 두고 살아야 사람이며 머리를 땅을 향해 사는 짐승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모습이 이어져서 천국이 만들어지고 지옥도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걱정하고 한숨을 쉬면서 땅이 꺼져라 하고 살아가는 사람,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높아지려고 싸우는 사람, 이 땅에서의 소유와 권력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 사람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겉모습은 하늘을 향해 있다고 해도 속은 땅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하더라도 삶을 받아들여 당당하게 살면서 정직함을 잃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면서 소유와 지위와 권력을 얻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얻은 후에도 에고를 드러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선한 일을 위한 수단으로 알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소유와 에고와 지위에 매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음식에 대해서도 몸에 유익한 것과 좋은 것을 주려는 마음은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지만 돈 때문에 사람이 먹으면 해로운 음식을 어쩔 수 없다면서 주는 것은 거꾸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순간 자신의 삶이 하늘을 향해 있는지, 거꾸로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긴장하면 사람은 생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머리는 금세 땅을 향하고 허리는 굽어지고 눈은 아래를 향하면서 빛을 잃게 된다. 이 때 허리를 펴고 천천히 배로 호흡하면 땅을 향했던 눈과 허리는 정 자세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두려움과 긴장과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보게 된다. 그러면 눈은 밝아지고 힘이 생겨나면서 나의 삶은 하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차를 쓸 일이 있어서 수련회 때 새벽에 아내를 날개영성하우스에 태워주었다. 집에 도착했는데 아내가 두부를 우리 집 냉장고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한 끼에 필요한 재료만 해도 수 십 가지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갖다 주고 웃으면서 수고하라고 말했다. 아침 식사가 다 끝난 후에 아내는 ‘아까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톡을 보내 왔다. 나는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내가 있어서 다행이지. 두 번이 뭐야, 이 백 번 씩 두 번이라도 할 수 있지^^’라고 답장을 보냈다. 아내는 ‘감동’이라고 답을 했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만나든 자신의 속마음에 늘 밝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나 사건을 대할 때 어떤 일이 있거나 자신이 옳고 정당하더라도 두려움과 음행과 거짓과 폭력과 무시함과 분노와 시기와 원망과 지배욕과 원수 갚으려는 복수심 등 그 어떤 것도 내 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좋은 것, 선한 것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이며 또 인간이 마음대로 살도록 내어버려두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권리이다. 그리고는 먼 후일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대로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인 것이다. 내가 똑바로 살고 있는지 거꾸로 살고 있는지는 자신만이 확연히 알 것이며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깨어있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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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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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마음 지키기(잠언 4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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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뭐든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예민한지 모릅니다. 사람이 병이 생기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병이 시작되고, 행복 하는 것도 마음 판에서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성공도 모든 것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성경말씀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가꾸고 마음을 잘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열어 이심전심 마음이 통하고, 공감대가 형성되고, 소통이 되고, 마음을 서로 나누기 까지가 마음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받은 마음 닫힌 마음, 마음의 쓴 뿌리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정상적인 반응을 못하고 역기능적인 반응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닫힌 사람, 마음이 우울한 사람, 마음이 삐딱한 사람, 마음이 어두운 사람하고는 대화가 잘 안 되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은 성경에 보면 온유한 자가 이 땅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말랑말랑한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어디가든지 잘 어울리지만 마음이 강팍하고 마음이 어두운사람, 마음이 좁은 사람은 아무래도 상대하기가 거북한 것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예방주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찬송이고 두 번째는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짜증을 내기 보다는 찬송을 부르는 습관이 중요하고, 찬송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찬송입니다. 찬송이 흘러가면서 사람들 마음에 심금을 울리고 사람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찬송과 감사 이 두 가지가 우리 마음의 알통을 키우는 예방주사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성령 충만을 받기 전에 사도들이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기도하기 전에 가장먼저 하는 일이 사도행전 1장 14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님이 임하고, 초대교회가 탄생이 됩니다. 제일먼저 하는 것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통해야 됩니다.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보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부부가 마음이 하나로 흘러가야지 두 마음은 안 됩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버려야 될 마음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의심 하지 말라’ 의처증, 의부 증 이게 제일 고약한 병입니다. 사람이 의심이 일어나는 게 아주 고약한 병입니다. ‘두마음을 품지 말라’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으로 나가라.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마음이 갈라지면 안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버려야 될 마음이 ‘의심, 두마음, 욕심’이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낫는다고 하십니다.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잘 지켜서 승리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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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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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발렌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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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입니다.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고백하는 날이었다지만 요즘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여자들이 가까운 남자들에게 초콜릿을 그냥 주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일 년에 팔리는 초콜릿의 1/3 가까운 양이 발렌타인데이를 전후한 2월 한 달 동안 판매된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초콜릿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519년입니다. 멕시코의 아스텍 문명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몬테수마의 궁정에서 호코아틀(xocoatl)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코코넛 음료를 맛보고 이를 스페인에 들여옵니다. 이후 약간 쓴 맛을 달게 만들어서 계피와 바닐라로 향을 낸 초콜릿 음료는 뜨겁게 해서 마셨으며, 프랑스에 소개되기 전까지 거의 100년 동안 스페인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귀했던 초콜릿은 19세기까지도 주로 약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809년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위해 스위스의 어린 소년 슈사드(Suchard)는 약재상에 초콜릿을 사러 갔다가 너무 비싼 가격에 깜짝 놀라 스스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초콜릿 제조법을 배웠고, 그 결과 오늘날 널리 대중화된 밀크 초콜릿의 원조로 불리는 슈사드 회사가 탄생했다고도 합니다. 발렌타인데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3세기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68-270) 황제 때 순교한 발렌티누스(Valentinus) 기원설입니다. 원래 로마 군인은 미혼의 남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복무연한을 마치면 결혼하여 정착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발렌티누스는 바로 이 군인들의 혼인을 집례하다가 2월 14일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발렌티누스의 순교일이 사랑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의 묘약으로도 알려진 초콜릿이 19세기 들어 서구에서 대중화되면서 초콜릿 발렌타인이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1936년 일본 고베의 한 제과업체가 초콜릿 판촉용으로 발렌타인데이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1960년 모리나가(森永製菓) 제과가 이 날에 초콜릿을 이용한 여성들의 사랑고백캠페인을 벌이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일 케이서베이(ksurvey)가 남녀 26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80.3%가 발렌타인데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막상 14일이 되면 이들 대부분이 기발한 상술에 넘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이 날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를 정확하게 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1910년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려순(旅順)에 설치된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날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직접 만드신 수의 한 벌과 편지를 옥중에 있는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로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그러므로 이 날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큼은, 초콜릿의 날이 아니라 순교의 날이라 불러야 합당합니다. 발렌티누스도 순교했고, 안중근 의사도 순교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순교의 동력은 사랑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사랑의 날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이들이 사모하고 앙망했던 주님은 초콜릿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선혈(鮮血)과 생명을 사랑하는 죄인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하자면, 진정한 발렌타인의 정신을 되찾아 줍시다. 아울러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날이 되게 합시다. 나아가 그들이 사랑했던 우리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사무치도록 가슴에 새기는 그런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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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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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영화 '명량'(여호수아 1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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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상영되었던 영화 <명량>은 이순신장군 역을 맡았던 최민식이란 배우가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첨단 기법을 동원한 장대한 장면들을 제외한다면 작품성 자체는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 영화평론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였습니다. 아마 익숙한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명량>은 한국영화 사상 충격에 가까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역대 박스오피스 1위로서 총 누적관객수가 17,613,702명이나 됩니다. 국민의 1/3이 이 영화를 본 셈입니다. 정말 대단한 호응이었습니다. 이처럼 국민들이 이 영화에 대해 열광한 이유에 대해 많은 분들이 <믿을만한 지도자가 없는 현실에서 이순신장군 같은 지도자를 갈망하는 마음의 표출>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이순신장군 같은 헌신적이면서도 애국적이고 선이 굵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어 경제를 일으키고, 통일을 이루어낼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은 좁은 지면에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영화 <명량>이 내걸었던 이순신장군의 한 마디는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란 말이었는데, 아마 작년 한 해 동안 국민들의 가슴에 가장 깊게 다가온 말들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말은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그 소망을 현실로 이루어내어 수십 배에 달하는 적을 물리쳤습니다. 2015년을 시작한 우리의 현실은 <겨우 열두 척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국민 기업 삼성이 흔들리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장기침체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실업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앞장서서 이런 문제를 타개해야 할 정치권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극적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 땅 입구라고 할 요단강 근처 모압 땅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하셨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죽었으니 가나안을 향해 나가는 일이 중단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세가 죽었으니 여호수아가 일어서서 백성을 이끌고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가나안으로 향하는 대장정의 절망적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출발점으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망을 디디고 일어섰고, 백성을 독려하여 용기를 북돋우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열두 척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망을 <아직 열두 척이나 있다>는 소망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저런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은 게 많다>고 말하면서 벌떡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우리 국민은 근면하고 성실합니다. 그리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회들이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작은 소망의 불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소망의 횃불을 높이 들길 기대해봅니다. 강단에서 소망을 외치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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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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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흐뭇한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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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면그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게 돼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밤에 어느 노부부가 미국 필라델피아 한 호텔을 찾았다. 그런데 주말이라 방이 없었다. 젊은 호텔직원이 여기저기 다른 호텔에 전화를 해봤지만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부부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뻑 비에 젖은 외투며 손에 든 여행용 가방이 더욱 무거워 보였다. 호텔직원은 노부부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내몰수는 없었다. “손님, 빈 객실이 없고 비도 오고 자정이 넘었으니 괜찮으시면 누추하지만 제 방이라도 쓰시겠습니까?” 호텔 직원은 기꺼이 자기 방을 손님에게 드리는 친절을 베풀었다. 노부부는 그 직원 덕분에 그날 밤을 편히 쉴 수 있었다. 다음 날 노부부는 젊은 직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청년은 참 친절한 분이군요. 일급호텔 사장이 되어도 되겠소” 직원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저의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어 방문하신다면 그때는 꼭 좋은 방을 드리겠습니다” 그랬다. 그로부터 2년 후 이 젊은 직원 앞으로 한 통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그 안에는 호텔개관식 초대장과 뉴욕행 왕복 비행기 표와 다음과 같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2년 전, 비바람이 몰아치던 늦은 밤 아내와 함께 젊은이의 방에서 자고 갔던 사람이요. 그때 베풀어준 당신의 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여기 뉴욕에서 아주 크고 좋은 호텔을 지어 놓고 청년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개관식에 참석하고 이 호텔을 맡아 경영해 주세요” 이런 내용이었다. 가서 호텔을 둘러보니 으리으리했다. 대충 둘러본 후 개관식장에 가서 보니 총지배인 자리에 ‘조지 볼트’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순간 놀랐지만 나 외에도 같은 이름이 있겠지 하고 앉지 않았다. 그때 초대장을 보낸 노부부가 다가와서 “그 자리는 바로 당신의 자리입니다”하며 앉으라고 권했다. 그 노부부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회장 부부였다. 이 청년은 “접시닦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이 청년이 바로 1,900개의 객실을 갖춘 월도프 아스토리아 뉴욕 호텔의 사장이 된 조지 볼트(George Boldt)이다. 얼마나 흐뭇한 얘기인가. 조지 볼트는 친절을 베풀고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뉴욕뿐만 아니라 각 휴양지에도 체인점을 두고 있다. 호텔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성경에도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고 있다.(엡 4:32)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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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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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행복바이블(創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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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福記 1장태초에 하나님이 행복을 창조하시니라. 세상은 혼란하고 공허하며 불행이 깊음 위에 있더라.하나님이 이르시되 기쁨이 있으라 하매 기쁨이 있었고 기쁨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미소와 웃음을 나누사 미소를 기쁨의 꽃이라 부르시고 웃음을 기쁨의 열매라 부르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불만 가운데 불평과 감사로 나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불평을 지옥이라 하시고 감사를 마음의 천국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꿈이 있으라 하매 꿈이 있었더라. 꿈이 각양 열매를 맺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르시되 위로가 있으라 하매 위로가 있었더라. 남을 위해 흐르는 눈물을 공감이라 부르고 자신을 위해 흐르는 눈물을 애통이라 하였으니 성장의 동력이 되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하나님이 두 손이 있으라 하매 돌봄이 있었더라. 자신을 위해 쓰는 손을 아름다움이라 하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한 손을 선행이라 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주시며 행복하고 또 행복하라고 이르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셨으나 행복하지 아니한 인간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시니라. 이에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 차리는 것"이라 하시고 행복을 사람의 눈앞에 두시고 사람의 가슴에 새겨 주셨더라.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創福記 2장행복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행복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므로 안식에서 행복을 완성하시고 가정은 곧 안식처가 되었더라.여호와 하나님이 행복을 창조하신 때에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열 명의 남자친구가 아닌 한 명의 아내를 허락하셨더라. 한 명의 아내에게서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은 열 명의 남자친구에게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음이라.여호와 하나님이 한 명의 아내를 인도했을 때 기쁨의 시가 터져 나왔더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배우자에 대한 고백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되었더라. 그러므로 아내를 슬프게 하는 자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자라.모든 사람이 결혼을 통해 행복에 이르게 하였더라. 이러므로 모든 육체가 부모의 그늘과 상처와 역기능, 쓴 뿌리로 부터 벗어나 '치유'를 경험케 하시고 그 아내와 하나 되어 '지지'받으며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를 경험케 하셨더라. 그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럼 없는 친밀감으로 '상호성장'과 함께 행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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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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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헌법을 짓밟고 장로회 정치를 포기한 합동총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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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 탈퇴는 곧 교단탈퇴라는 것이 장로회 총회의 헌법 규정-동일 교단노회 탈퇴한 교회, 동일 교단노회로 이적가입 불가
제99회 총회 결의 및 요람(2014) p.86에 “전남제일노회장 나종갑 씨가 헌의한 광주중앙교회 일부 교인과 채규현, 진수금, 이병욱, 김혁 씨의 타 노회 불법 가입 철회 조치의 건은 광주중앙교회가 이적절차 없이 남광주노회로 간 것도 불법이고, 전남제일노회가 원인무효 된 채규현 목사를 재판한 것도 불법이므로 행정사항은 잠재하고 광주중앙교회를 남광주노회로 이적하는 것만 허락하고 양측이 원만히 화해하도록 가결하다.”로 되어 있다. 이것이 과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의결한 총회회의결의란 말인가? 초등학교 어린이 회의에서 어린 초등학생들조차도 이렇게 회의하고 이런 식으로 결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1. 교단 관할을 배척하고 탈퇴한 자를 두둔하는 총회 거두절미하고 필자가 알고 있는 바 채규현 씨는 전남제일노회를 탈퇴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공동의회에서 탈퇴 결의”를 한 후 언론에 공고까지 하였으니 총회 헌법 정치 제8장 제2조 2항의 규정에 의하면 노회 탈퇴는 곧 교단 탈퇴이므로 노회와 총회의 관할을 배척하고 이미 합동교단을 떠난 자이다. 그런데 총회는 왜? 교단을 배척하고 떠난 죄를 물어 노회가 책벌하여 세례교인에 불과한 최규현 씨를 “남광주노회로 이적하는 것을 허락”하는 결의까지 하고 두호하며 끼고 도는지 묻고 싶다. 채규현 씨는 교단 관할을 배척하고 전남제일노회를 탈퇴했으니 결코 남광주노회에 가입할 수는 없고 오직 합동교단 외에 타 교단 노회에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을 총회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정치 제8장 제2조(치리회의 관할과 성질) 2항에 “각 치리회는 각립한 개체가 아니요 서로 연합한 것이니 어떤 회에서 어떤 일을 처결하든지 그 결정은 법대로 대표된 치리회로 행사하게 하는 것인즉 전국 교회의 결정이 된다.”고 규정하였다. 이 조문의 의미는 전국 지교회의 당회, 노회, 총회는 각립한 개체가 아니라 서로가 연계된 하나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어떤 노회가 A씨를 목사로 임직하면 전국의 교회와 노회와 총회도 A씨를 자기가 임직한 것처럼 여기어 A씨를 목사로 인정하고, 또 어떤 노회가 B목사를 면직 시벌하면 그 노회에서만 면직된 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교회와 노회와 총회 역시도 자기가 시벌한 것으로 여기어 B씨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국문학적으로도 법조문의 문맥이 그렇게 의미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 100년 역사의 정치 현장에서도 한결같이 그렇게 시행해 온 전통이다. 따라서 C교회가 자기의 소속 노회를 탈퇴하면 전국 노회들도 자기 노회를 탈퇴한 것으로 여기고, 총회 역시도 C교회가 총회를 탈퇴한 것으로 여기어 C교회는 그 교단 소속 교회가 아니라고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회와 교단의 관할을 배척하고 본 교단을 탈퇴한 채규현 씨는 전남제일노회가 제명출교로 책벌한 자로서, 스스로 탈퇴했으니 이미 본 교단을 떠난 자이고, 출교된 자이니 교인도 아닌데, 총회는 왜? 그를 여전히 합동교단의 목사인 것처럼 붙잡고 두둔하면서 총회와 노회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총회여! 교단을 탈퇴한 채규현 씨는 따르는 교인들이 3분의2가 되지 못하므로 대법원 판례에 의하여 재산은 한 푼도 요구하지 못하고 교회당에서 퇴거해야 함을 정녕 모르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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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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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감옥생활을 한 요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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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젊고 용모가 준수한 자였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 역할을 열심히 감당하던 중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흑심을 품고 그를 유혹한 사건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처가 동침하기를 청할 때 하나님 앞에 득죄할 수 없다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집요하게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요셉은 그녀와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동침하기를 요구하자 요셉은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 대한 괘씸한 생각에서 요셉이 자신을 겁간코자 했다고 말하며 그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요셉은 젊은 나이에 타지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으므로 유혹에 넘어갈 소지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여인의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경건 의식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은밀히 행한 범죄는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디발 아내의 요구에 응하면 생활이 더 편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신실한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시며 어려움 중에서도 구원하여 승리케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의 경건한 신앙은 모든 성도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무기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인하여 오히려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죄를 피하다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법은 공의를 거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핍박받는 것이 비일비재한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악인으로서 세상에서 안일하게 사는 것보다는 의인으로서 옥에 갇히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더불어 범죄 하였더라면 옥에 갇히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는 징벌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징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었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백주에 다윗의 첩들이 압살롬에게 강간당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는 자로서 천국이 저의 소유가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선을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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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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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근원은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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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생긴 일이다. 내가 자동차에 다가가면 자동차가 반가운 소리를 내면서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다른 가족이 다가가면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내가 같이 가서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면 문은 열리지만 당신이 가면 문을 열리지 않는다!”면서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자동차 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내 주머니 속 ‘리모컨’ 덕분이었다. 문을 여는 해결책이 주머니에 숨어겨있어서 보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우리는 내 능력의 비결이 딴 곳에 있는데 그것을 내가 한 것인 양, 내 것인 양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모습은 삶에서 경계해야 하는 성품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법칙 중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 후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모양대로 만드시고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최고의 선물과 자유를 주셔서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이 자신이 지닌 생명을 유지하고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만 잊으면 그 때부터 죽음인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은 내 속에 들어와 생명이 되어 있지만 그것을 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나 됨은 누군가의 덕분인데 내가 잘 나서 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의 속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집에서 아내가 명절이 되어서 며칠을 고생해서 소불고기, 닭 매운찜, 자연산 회, 신선한 샐러드 등의 산해진미로 상을 차려 놓았다 하자. 그리고 아버지가 상에 둘러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 모든 음식을 누가 만들었지?” 아이들은 모두 “엄마가 했어요!” 그 대답을 하는 순간 아이들의 마음에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일어난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했다. 내가 내 돈으로, 내 실력으로, 허리가 아프면서도 며칠을 고생해서 내가 한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 순간 아내는 ‘생명의 근원’을 잊은 것이 된다. 아내의 말이 맞는 말이다. 아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수고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한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내(음식을 만든 사람) 자신이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리석음과 두려움이 그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는 그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할 때 어리석음은 무엇인가를 의존하고 숭배하게 만든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자연을 숭배하게 되고 심지어는 동물이나 돌과 그림, 부적을 만들어 숭배한다. 어떤 이는 귀신을 숭배하며 힘 있는 모든 것은 다 숭배한다. 결국 마지막에는 돈을 숭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근원을 아는 존재는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어떤 존재로부터도 숭배 받는 것을 거절한다. 누군가 천사의 능력 때문에 천사를 숭배하려고 하면 그 천사는 거절할 것이다. 왜냐면 내 능력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창조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와 동물과 자연의 모든 만물이 그렇다. 자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며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좋아하고 부축이고 강요한다. 도리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자신을 알아달라고 투정하고 심지어는 위협하고 죽이려고도 한다. 그 속에 근본적으로 근원을 무시하는 사단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살면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기꺼이 수고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공과 자유의 근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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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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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예수의 좋은 병사(디모데후서 2장1절~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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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와 강함은 대조적인 말입니다. 은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개념이라면 강함은 그 반대되는 센 개념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감당하고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능력은 내 속에서 자가 발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겁니다. ‘은혜 가운데서 강하다’는 이 개념이 크리스천이 누릴 수 있는 파워풀(powerful)한 삶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은혜 가운데서 강한 사람이 되어서 현실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오늘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원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갖는 겁니다. 2장 1절에 ‘내 아들아’라고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디모데를 부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 엄마의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봐야 어른이 됩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온갖 경험을 다 하게 되면서 비로소 부모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둘째 원리는 ‘내가 할 수 있다’라는 철없던 시절의 생각을 버리고 ‘나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나의 나됨은 주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너희들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3중 축복을 말합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카리스(헬라어로 은혜)가 내려오고 내려와서 카리스마(charisma)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와서 개인의 인격이 변화되고, 복 있는 사람, 사랑받은 사람의 독특한 특성이 나타나고 카리스마와 향기가 나타날 때 강하게 되는 겁니다. 2절 말씀에는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라’고 합니다. 은혜의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훼방자였던 자가 다메섹동산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고 디모데는 또 다른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는 제자훈련의 정식 원리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복중의 복은 인복입니다. 좋은 사람, 충성된 사람을 붙여주시는 것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셋째 은혜 속에 강한 원리는 교육시킨다고 잔소리나 충고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야 하며 직접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변화가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원리가 은혜 속에서 강함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은혜 가운데 강한 세 사람을 소개합니다. 3절에 ‘예수의 좋은 용사’, 5절에 ‘경기하는 자’, 6절에 ‘수고하는 농부’를 소개합니다. 이 세 사람의 특징은 교육과 훈련을 반복적으로 하는 자들입니다. 먼저 좋은 병사는 고난을 주와 함께 받는 것이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군인은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격리되어 특수사회에 갇혀서 통제를 받는 곳입니다. 명령에 의해 행하는 곳입니다. 군인의 신분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엄격한 훈련을 거치고 난 후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입니다. 은혜 가운데 강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경기하는 자, 선수입니다. 선수는 법대로 하는 것이 가장 은혜로운 겁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쓰임 받고 지키고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성경 전체의 원리입니다. 말씀중심, 교회중심, 하나님중심입니다.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실격처리가 됩니다. 우리는 선수입니다.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선수입니다. 운동선수는 엄격하게 훈련을 하고 관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농부입니다. 일꾼이고 전문가입니다. 무엇을 맡기든지 감당하라는 겁니다. 하다보면 반복과 훈련, 교육을 통해 프로가 되어 잘하게 되는 겁니다. 묘목시절을 거치지 않은 거목은 없습니다. 유치한 아이시절을 거치지 않은 어른은 없습니다. 농부의 마음을 가지고 선수의 프로정신을 가지고 군인정신을 가져 험한 세상을 이기며 나가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군인처럼, 선수처럼 훈련받고 농부처럼 사시사철 성실히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강한 용사 정병이 되어서 이 시대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이 한해를 믿음으로 은혜 가운데 강한자로 감당하고도 남는, 은혜에 은혜를, 갑절의 영감을, 칠 배의 권능을, 백배의 결실을 맺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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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