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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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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구멍이 없다.”고 했다. 하루의 단추도, 한해의 단추, 인생의 단추도 그렇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한다. 2023년도 한해의 첫 단추를 잘 끼워 살아간다면 마지막 단추를 끼우면서 행복한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간다. 이런 경우는 죄악에서 죄악으로 가는 사람이다. 소돔성의 사람들, 노아 때의 사람들, 육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이는 죄악에서 빛 되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오른편 강도,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생활하다가 자기주의로 타락하는 사람이다. 사울왕, 엘리 제사장, 웃시야, 가룟유다가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빛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믿음의 길, 그 믿음을 생활로 이어가는 신앙생활의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다윗, 사무엘, 다니엘, 모세, 바울이 그들이다.
빛에서 빛으로 가는 길,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시편37편에서는 그 삶을 아름답게 교훈한다. 그것은 먼저 불평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 것이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말씀 때문에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당해도 단 한마디도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고 기도했다. 불평대신에 감사한 조건을 찾았고 투기대신 기도했다. 그것이 인생의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고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그 날 감사함으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평과 투기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뼈를 마르게 하는 독소임을 성경은 교훈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배고픈 날보다는 배부른 날이 더 많다. 추운 날보다는 따뜻한 날이 더 많고, 미워할 것보다는 사랑할 것이 더 많고, 안 되는 것보다는 되는 것이 더 많고, 아픈 날보다는 건강한 날이 더 많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불평하거나 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거기서 선행이 실천된다. 선행이 무엇일까? 성경적 관점의 선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한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다. 이것은 나의 목회 철학이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의 고령에 포항중앙교회에 오셔서 주일 설교를 하시고 나에게 안수 기도를 해 주셨다. 전율이 일어나는 기도였는데 “서목사님은 말씀사역을 하면서 녹슬어 사용하지 못하는 목사가 아니라 닳아서 사용할 수 없는 선행의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다. 그러기에 은퇴 9년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한해 70여 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사경회 강사로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한 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모진 풍상을 견디면서 자라야 한다. 자식을 양육하기 위하여 어머니의 수고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희생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선을 행하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걸음이다. 아무리 좋은 고급승용차도 가만 세워두면 부식되고 망가지면서 사용되지 못한다. 부엌의 칼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보기 싫지만 계속 사용하면 날이 서고 유용하게 사용된다. 건강도 재능도 물질도 그렇게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삶으로 사용될 때 아름답게 빛을 발하게 된다.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총이란 쏘아보지 않은 자에게 맡기면 오발탄이 된다. 옷도 입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면 입을 줄 모른다. 화장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자에게 주면 어떻게 쓸 줄 모른다. 돈도 사용할 줄 모르는 자에게 주면 그 돈은 재앙을 불러온다. 능력도 사용할 줄 아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직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귀한 은사를 받고 어둠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라가 그랬고, 발람이 그랬고, 아히도벨이 그랬고, 가룟유다가 그랬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지 않고 빛에서 빛으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정욕에 이 기쁨을 빼앗기고, 안목의 정욕에 빼앗기고, 이생의 자랑에 빼앗긴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가르친다. 즉 내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맡김은 믿음 없이는 안 된다. 사위 못 믿는데 딸 시집 보내는 부모님 있는가? 선생님 못 믿는데 자식 학교 보내는 부모님 있는가? 목사 못 믿는데 그 목사 설교하는 교회 가는 교인 있는가? 은행을 믿지 못하는데 돈 맡길 수 있는가? 즉 믿음 있어야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는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5)” 이것이 정답이다.
맡기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이다.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심령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성공이다. 축복이고 기쁨이고 영광이다. 2023년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샴마, 여호와 닛시가 현재진행형이 되는 평행감축의 한해, 빛에서 빛으로 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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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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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평등 속에 감춰진 발톱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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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영훈 이재훈 고명진 이찬수 목사님 등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에 동참하셨다. 나는 이분들의 용감한 행동에 적극 찬성한다. 아니, 추앙한다. 필자도 참가하려고 했으나 일정이 분주한 데다 반동성애 운동을 앞서 시작했기에 굳이 가지 않아도 좋겠다는 주변 조언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누가 먼저 하고 나중에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구나 힘을 모아 적극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1인 시위에 참여하길 원했고 혼자 가는 것보다 17개 광역시·도 목사님들과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분들을 예찬한다. 과거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처하고 차별금지법을 막는 데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주셨다. 엊그제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십수 년 전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님과 길원평 교수님으로부터 동성애와 안티 기독교 세력의 실체와 전략을 알게 되면서 시작했던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공적 사역의 궤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왜 이렇게 차별금지법을 저지하려고 하는가. 나는 북유럽을 방문했을 때 차별금지법의 폐해를 직접 목격했다.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들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놓고 기독교계가 후회하고 탄식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북유럽에서조차도 차별금지법 처벌 예외 조항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런데 왜 국내 일부 정치인은 전 세계적으로 사회문화적 병리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인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부당한 차별을 없애는 데는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어 개별적 차별금지법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또는 평등법안이 내세우는 ‘차별 없는 세상의 구현’이라는 구호 속에 감추고 있는 무서운 발톱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는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진리를 흐리는 사이비·이단 합법화,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합법화라는 ‘파괴적 이빨’이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한다는 미명 아래 더 많은 절대다수 사람의 인권을 제한하고 수많은 역차별을 초래할 수 있는 독소조항을 품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모든 국민을 차별 대상으로 만들고 국민의 생활 영역 전체를 차별 사유로 규정해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 수 있다. 또 모든 국민을 감시자와 고발자로 만들고 심판자와 범죄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더 많은 국민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의 폐해를 알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문화전 사상전 여론전을 펼쳐야 한다. 여론조사를 할 때도 국민에게 이 사실을 똑바로 알려야 한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도 소수자들은 얼마든지 보호받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다수 국민을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역차별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뜻있는 국민은 모두 이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길이 끝난 것 같아도 우리가 새길을 열어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특정 종교 관점을 넘어 국가의 미래, 국민과 다음세대의 안위와 평안,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위한 것이다. 올해에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저지를 위한 1인 시위는 계속돼야 한다. 아니, 한국교회와 국민 모두 힘을 모아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새길을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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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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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아직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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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조무래기 시절 짓궂은 친구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 준다면서 달걀귀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썼고, 여자애들은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건 정말 두려운 게 아닙니다. 이십여 년 전에 80리터 배낭에 침구와 먹거리를 싸서 메고 혼자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영양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해서 봉화, 현풍을 거쳐 정선을 지나 평창 오대산을 넘어 강원도 양양을 거쳐 속초까지 갔습니다. 8월 무더위에 가다가 쉬고, 밥을 해 먹고, 한잠 자고, 또 걷고, 지치면 1인용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평창 오대산 아래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질 때여서 등산객들이 하산하는 시간이었지만, 저는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밤새 쉬지 않고 오대산을 넘어 다음날 새벽 4시경에 도로에 도착했습니다. 피곤이 몰려와 잘 곳을 찾았는데, 새벽 어둠 속에서 희끗한 건물이 보였습니다. 폐교된 초등학교였는데, 운동장에 사람 키 이상의 풀이 자라 있었습니다. 대충 정리하고 텐트를 쳤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 화장실에서 나왔다는 달걀귀신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대산을 한밤에 홀로 걸어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본문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교만했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대신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도 세상을 떠난 마당에 사울은 영적으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이 대군을 일으켜 침공했습니다. 사울의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다. 사무엘상 28장 5절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길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침묵하셨습니다. 아무 답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28장 6절입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자 어쩔 수 없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가난, 질병, 외로움, 실패에 대한 불안감, 정치 사회적 갈등, 전쟁 위협 등이 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자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기도 했으나 무익했고,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을 막다가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그의 시신마저 벳산 성벽에 매달리는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지금 형편이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지만 않으신다면 아직 괜찮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살던 남 왕국 유다의 악한 현실에 깊이 좌절했습니다. 하박국 1장 2~4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남 왕국 유다를 징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또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하박국은 매우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형편이 절대 절망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아직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박국 2장 1절을 보면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박국 2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우리의 소망은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만 한다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라도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과의 통로가 막히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답을 주신다면 다른 두려움들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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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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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호모 코로나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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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번 달 말 즈음하여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될 예정이라 합니다. 길고도 길었던 코로나 기간이 공식적인 종료를 앞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 시대에 이미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용어 중 하나가 바로 ‘호모 코로나쿠스(Homo Coronacus)’입니다. 본래 ‘호모(Homo)’는 ‘인간’이란 의미의 라틴어에 해당합니다.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요새는 ‘코로나 사피엔스’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런 용어들을 언어유희의 산물로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실제로 우리 일상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고, 어쩌면 후세 사가들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갈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대면이나 온라인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호모 코로나쿠스란 바로 엠지(MZ)세대를 일컫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일간지는 이들의 습성으로 “학교에 꼭 가야 하나 라고 생각한다(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삶도 멋지다(인간관계에 구속되지 않는다)”, “남의 인식은 신경 쓰지 않는다(타인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다)”를 들었습니다(중앙, 22. 4. 19). 타인이나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감지됩니다. 파장은 실로 놀랍습니다.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던 각종 관행들 이를테면 결혼이나 장례나 돌잔치 등의 간소화가 이루어졌고, 직장의 회식 문화에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려 수준이던 결혼이나 출산율 또한 계속해서 급전직하(急轉直下)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철저하게 개인화 · 파편화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형태의 ‘호모 솔로엔시스(Homo Soloensis)’의 출현입니다.
호모 코로나쿠스의 특징 중 또 하나는 ‘호모 논-로쿠엔스(Homo Non-loquens)’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7년 데이빗 프라이가 쓴 『호모 로쿠엔스』라는 저서를 통해 대중화된 이 개념은 그러나 이제 획기적인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언어의 기반은 소통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차츰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엠지세대는 더합니다. “청소년들과 대화를 해 보면 일단 그 목소리에 놀란다. 청춘의 패기가 느껴지기는커녕 모기 소리처럼 다 기어 들어간다. 어린애처럼 하이톤으로 앵알앵알하는 경우도 많다. 변성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이다. 성대결절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장이 없어진 탓이다. 하루 종일 주고받는 단어도 불과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이젠 카톡이 대신한다.”(호모 큐라스, 고미숙, 2015) 이제 등장하는 호모 코로나쿠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날 때부터 마스크를 착용한 아이들은 아예 호흡이나 폐활량에서부터 피해를 입고 있다니 말입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으로도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어떤 정당과 정책으로도 잡을 수 없었던 치솟는 집값이 하락세를 거듭하는 현상을 보십시오. 여파는 젊은 세대를 뒤흔듭니다. 코로나 세대들은 ‘호모 디스컨텐트(Homo Discontent)’나 ‘호모 두비타스(Homo Dubitas)’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자는 불만(不滿)형 인간을, 후자는 의심(疑心)형 인간을 의미합니다. 물론 양자의 개념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불안도 커진다고 한 바 있고, 국내에도 양자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다루는 시각이 존재합니다(선봉란, 박규철).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양산되는 불만과 의심은 그 양상이 다릅니다. 현상을 타개하고 발전을 지향하자는 긍정적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적 인간은 좀처럼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분노하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그렇다면 호모 코로나쿠스가 지향해야 할 인간형은 무엇일까요? 앞선 논의를 참고한다면, 결국 우리는 고립을 넘어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형 인간 즉 ‘호모 커넥투스(Homo Connectus)’(최민자, 2020)나 타인과 교류하고 소통하기 위한 공감형 인간 즉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haticus)’(최배근, 2020) 혹은 지나친 개인주의를 초월해서 선한 사회를 만들어갈 공동체 인간 즉 ‘호모 코뮤니타스(Homo Communitas)’(유장춘, 2022)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코로나가 가져 온 폐해를 치유하고 나서야 합니다. 교회는 더 심각합니다. 학교나 직장을 나가지 않으려하는데 교회를 가겠습니까? 친구나 가족관계마저 파편화되는 마당에 ‘코이노니아’가 가능은 할까요? 이후로 교회의 현장성과 공동체적 속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리라 전망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 교통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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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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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에베소교회 (계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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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세운 교회이며, 디모데가 잠시 사역을 했고, 요한이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특히 에베소는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 이단이 침투하기 쉬웠고, 영지주의 이단의 본거지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단사상과 투쟁해야 했고, 진리를 위해 싸우느라 성도들의 마음은 점점 냉냉해지고, 교회 안에 사랑까지 식어지게 되었습니다.
1. 우리 주님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지 다 알고 계시며, 그들을 칭찬하십니다.(2,3절)
악한 자들과, 거짓사도에 대항하여 진리를 지킨 수고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핍박과 고난을 참고 견딘 인내를 아시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알다’라는 원어는 지식적 이해가 아니라, 신적 통찰력–모든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신앙의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모든 행위를 놓치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를 위한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고전 15:58) 새해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수고와 헌신이 하늘에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2.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4절)
에베소 교회가 개척된 지 40여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자 교회는 안정되고, 기반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숙원사업이었던 예배당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어졌습니다. 이제는 금식하며 기도할 절박한 기도제목도 없어 보였습니다. 차츰 모임은 형식화되고 은혜가 없어졌습니다. 가슴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하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며,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그 첫 사랑이 있습니까?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은혜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타성과 형식에 젖기 쉽습니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말씀을 듣는 감격이 없습니다. 벅찬 감격의 찬송이 없습니다. 그저, 종교 생활에만 만족하는 자리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우리 교회를 향해 무슨 책망을 하실까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셔야 합니다.(5절)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첫 사랑을 잃어버리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이러면 안 되는데,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행동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3. 첫 사랑을 회복한 자–이기는 자에게 주님이 약속한 축복이 있습니다.(7절)
새해, 우리 교회가 주님이 말씀하신 첫 사랑으로 돌아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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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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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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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듯 2022년도는 흘러간 과거가 되었고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변함없는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올해는 전과 다르게 뿌듯함으로 가득찬 한해이기를 늘 그래왔듯 기원해 본다. 지난 시간들을 반성하며 새로워지기 또한 원한다. 보다 치밀한 계획들을 세우고 실천할 것을 결단도 한다. 지난하게 반복하며 실패를 경험하였지만 이처럼 다시 계획을 세우고 잘해보기를 작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부질없는 짓인냥 부정적인 모습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인내로 우리네 인간들에게 주신 큰 은혜요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단원들에게 자주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노래에는 가사가 있고 그 가사는 아름다운 시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시성 넘치는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느끼며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하며 말이다. 아름다운 의미를 담은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하노라면 마치 내 자신이 시인이라도 된 듯 시의 바다 속을 헤엄치며 그 내면의 깊음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러한 수준의 연주라면 어찌 청중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지 않겠느냐고 단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다.
세상의 노래도 이러할진대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담은 노래가 아닌가? 말씀을 기초로 한 작시자의 삶과 삶 가운데 경험한 주님의 터치와 흔적을 담아 노래한 이 찬양이 우리의 마음에 닿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심어린 고백으로 노래되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은혜의 자리를 경험하게 되고 듣는 이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나아가 우리의 찬양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그분에게 드려질 것이다.
새해의 바램은 우리가 드릴 찬양 혹은 찬송의 노랫말을 자주 묵상하고 기도로 마음에 새기며 그것이 내 삶의 고백이요 헌신의 내용이 되기까지 성숙함으로 나아가 우리 모두 진정한 찬양(예배)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찬양(예배)을 통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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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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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틈 속에서 숨을 쉬는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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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우연히 바라본 아스팔트 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고 생명은 꽁꽁 얼어버린 것만 같은 추운 날씨에 따뜻한 온기를 품은 보랏빛 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스팔트 위 차가운 시멘트로 뒤덮인 벽돌과 벽돌 사이 그 작은 틈 속에서 생명이 꿈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작고 작은 틈 속에서 약하게만 보이는 꽃이 강인한 생명을 갖고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약하게 보이는 식물이라도 강한 생명력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력은 어떨까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거대한 생명력이 숨쉬고 있을 것입니다. 이 생명력이라는 것이 때로는 환한 빛 속에서 찬란하게 잉태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스팔트 위에서 본 보랏빛 꽃처럼 좁은 틈과 틈 사이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빠르게 달리고 지나 그 속도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 생명은 땅 속에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숨을 쉬고 있습니다. 세상은 틈이 생기고 균형이 깨지면 곧 망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오히려 생명력은 허물어진 틈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습니다. 빈틈은 상대방의 공격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 안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나의 약함이 오히려 주님을 의지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 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아등바등하며 지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생명을 주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용납하지는 않았습니다. 틈과 흠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을 용납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흠과 틈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을 사모합니다. 흠과 틈이 있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로 섬기고 있는 나는, 성도의 흠과 틈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여기지 못할 잘못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겨울 캠프를 섬기면서 흠이 많아 보이는 아이들, 틈이 많아 보이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흠과 틈이 많은 저 아이들의 깊은 내면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청소년들 안에 있는 생명이 보이는 순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말씀을 계속해서 전했고, 기도회를 통해 아이들의 틈 속에 있는 생명이 발현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긍휼과 은혜로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청소년 캠프뿐만 아니라 장년들을 위한 세미에서도 고통의 틈이 많고, 아픔의 흠이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깊은 틈과 거친 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바로 “나”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틈과 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해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가 받은 용납과 사랑은 내가 하는 사랑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자주, 쉽게, 그 사랑을 잊으며 다른 사람 용납하기를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공동체, 자녀 심지어 배우자까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제, 2023년 1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용납하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100만큼의 틈을 용납 받았으니, 다른 사람의 10만큼의 틈을 용납하며 생명을 살리는 자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2023년을 마무리 할 때는, 내 속에 ‘사랑의 흔적’ ‘용납의 흔적’이 자리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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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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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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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에 시무할 때였다. 예배가 시작되고 나서 10여분 지났을 때 조만식 장로가 터벅터벅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예배를 인도하던 주기철 목사는 모범을 보여야 할 시무장로가 예배시간에 지각을 했으니 덕이 안 된다며 ‘조 장로님은 뒤에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때 조만식 장로는 묵묵히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위에 대한 확인 없이 설교자들에 의해 유통되었고, 이것저것 살을 붙어 이야기는 보다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그가 예배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은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잠시 대화하다 보니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다며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였고, 설교가 끝난 후 주기철 목사는 다시 조만식 장로에게 ‘ 앞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살을 붙였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 나온 조 장로는 울먹거리면서 기도했다며 기도내용까지 첨가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하던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교인들이 함께 통회 자복하는 기도회로 번졌고, 교회 부흥의 시발이 되었다며 기발하게 각색을 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조만식 장로, 주기철 목사, 그리고 산정현교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한 사람이 장기려 박사였다. 그래서 그에게 회자되고 있는 이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장기려 박사는 한마디로 단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 같지도 않는 말이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할 가치조차 없는 허구라는 의미였다. 누군가에 의해 꾸며낸 이 이야기는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의 인격을 모독하고 있고, 올곧은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깨웠던 산정현교회를 모욕하고 있다. 주기철 목사가 우리민족의 큰 어른에게 그처럼 무례하게 대하는 무지한 목사가 아니었고, 조만식 장로는 예배시간을 놓치는 그런 규모 없는 장로가 아니었다.
고당(古堂) 조만식(1883-1950) 장로는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인물이자 규모 있고 절제된 삶을 사셨던 민족지도자였다. 평생 한복을 입고 다니며 국산품애용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라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신 어른이셨다. 1905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고, 6월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했다. 1911년에는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는데, 이때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 그는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는데, 이때 주기철은 학생이었다. 조만식은 3·1운동에 가담한 일로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만세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했고, 1945년 11월에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공노선을 걸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1904년 경부터 한정교의 권유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데, 1906년 산정현교회로 분리될 때 이 교회로 옮겨갔고, 1921년에는 집사가 되었다. 당시 강규찬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2년 12월 그의 나이 39세 때 장로가 되었다. 집사가 된지 1년 만에 장로가 된 것은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해 웅천 출신인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조만식 문하의 오산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한 학기 수학한 후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를 거쳐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5년간 일하고 1936년 10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39세 때였다. 당시 산정현교회 장로는 조만식을 비롯하여 김동원, 김찬두, 박정익, 변홍삼, 오윤선, 최정서 등 한국교회와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당시 주기철 목사는 엘리트 목사였고, 어른을 존경하고 존중할 줄 아는 목사였다. 예배 시간 늦었다고 14살이나 많은 어른 장로에게 서서 예배 드리라고 말할 만큼 무례한 목사가 아니었다. 조만식 장로는 주일 아침 사람을 만난다고 예배시간을 어기는 그런 허술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신앙과 애국이라는 두 영토에 굳게 서서 싸웠고, 소련군 사령부에 끌려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평양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이들은 예의범절을 소중하게 여기며 서로를 존중했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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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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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끝에서 보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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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3일 우리나라와 포르투갈의 월드컵 예선 3차전이 있었는데, 우리가 2대 1로 승리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2대 0으로 승리했지만, 골득실에 밀려 탈락했고, 우리가 16강에 진출했습니다.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에 우루과이 선수들은 주저앉았고, 우리 선수들을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포르투갈 선수들은 끝났고, 우리에게는 다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4장 4절에 <때가 차매>란 구절이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시간의 충만이 오다>란 뜻입니다. 마치 경기 종료 휘슬 소리가 울리는 순간과 같습니다. 이기고 있는 팀은 휘슬 소리에 기뻐하지만, 지는 팀은 낙심합니다. 휘슬 소리가 어떤 이에게는 절망으로, 어떤 이에게는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본문의 <때가 차매>도 그러한 순간입니다.
세상의 휘슬 소리는 종말의 선언입니다.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슬픕니다. 그렇다면 소망과 기쁨의 휘슬 소리는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휘슬 소리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못 박힌 행악자의 인생은 십자가 위에서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꿈도, 욕망도, 열정도, 분노도 거친 한 모금의 호흡과 함께 끝날 상황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이 이 사람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끝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소리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호소하는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행악자에게 낙원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을 시작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종말은 시작으로 바뀝니다. 주님은 처음이요, 시작이요, 알파이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의 삶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열매가 없었고,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가 호소했습니다. 한 해만 더 기회를 주면 두루 파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잘 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찍혀나가야 할 끝에서 한 해 더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은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우리 인생의 끝인 죽음은 부활 생명이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끝난 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이 멎는 그 순간, 우리는 천국의 공기를 호흡하게 될 것입니다.
아쉬움이 많은 2022년도가 끝나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2022년도의 끝을 2023년의 시작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비록 후회가 많더라도 새로운 용기로 2023년을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세 가지 결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묵은 것들, 우리를 패배하게 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단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아멘.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와 단절해야 합니다. 둘째, 이어나가야 할 것은 계속 이어나가야 합니다. 선수들이 질 때도 국가대표인 것처럼, 잘 살지 못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했을 뿐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축복을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새로운 시작을 위해 새로운 것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길 원합니다.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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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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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토끼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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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Australia)의 ‘150년 전쟁’ 혹은 ‘회색 전쟁’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토끼” 때문에 벌어진 전쟁 같은 실화입니다. 1859년 거대한 미지의 대륙에 정착한 토마스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고향인 영국이 그리워 사냥용 토끼 24마리를 들여왔는데 이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가공할만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토끼들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농작물을 비롯한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토끼들을 없애기로 결심했고, 1870년 무렵엔 200만 마리 이상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동이라도 막아보고자 1900년대에는 3,000km 넘는 울타리를 쳤건만 이 또한 곧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가 되자 토끼의 숫자는 100억 마리에 육박합니다. 이후 정부는 여우를 비롯한 천적도 동원해 보았고, 독극물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생물학자 파스퇴르까지 나서서 바이러스를 활용한 퇴치법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도 2~3억 마리 이상의 토끼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합니다.(『인간의 흑역사』(2019), 『재난 인류』(2022))
토끼의 번식력과 생존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바로 그 “토끼”의 해 곧 ‘계묘(癸卯)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토끼는 동양에서 열두 종(種)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불릴 정도로 친숙할 뿐 아니라, 속담이나 격언에도 토끼가 등장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다 놓친다”거나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한다” 그리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나 “토의 간”(별주부전) 같은 익숙한 표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반면 서양의 중세시대에 토끼는 의외로 악당이나 불한당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생긴 모양 때문에 회색토끼(hare)가 주로 그러했는데, 반대로 다산의 특성이나 온순한 이미지 덕분에 에덴동산이나 성모 같은 다수의 성화(聖畵)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부활을 상징하는 동물로도 쓰였습니다.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가 1479년 완성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치에 있는 지붕 위에 두 마리 토끼가 보입니다.
그러나 뭐니 해도 토끼와 기독교 관계의 백미는 성경 속 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6, 신 14:7 참고)가 그러하고 여기서도 “새김질”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사실 토끼는 소나 양처럼 위가 서너 개라 소화를 위해서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ruminant)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토끼가 “새김질”을 한다고 했습니다. 생물학적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토끼가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을 보고 여타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라는 견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성경은 고대인이 쓴 비과학적 기록이며 오류투성이의 문서일 뿐입니다. 그런데 1972년 독일의 동물학자 그리지멕(Grizimek) 박사가 편찬한 동물백과사전에는 토끼를 ‘유사되새김질(pseudo-rumination)’을 하는 반추동물의 일종으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1880년대부터 이미 토끼가 비타민이 풍부한 특수한 물질(씨코트로프, caecotroph)을 밤이나 새벽에 내놓고 이를 다시 새김질해서 소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현대과학이 19세기에 와서야 밝힌 사실을 3,500년 전에 기록한 ‘성경무오성’의 승리라고 찬사를 바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토끼가 “새김질”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새김질”은 ‘묵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한글성경이 침묵할 묵(黙)과 생각할 상(想)을 써서 번역한 이 말의 원어는 ‘하가’로 비둘기소리나 사람이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모습을 가리키는 의성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알려져 버린 일부 구절을 제외하고(시 1:2; 수 1:8 등) 해당 단어를 대부분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로 바꿨습니다(시 49:3, 119:97 등). 작은 소리로 읊조리려면 당연히 우물거리는 입 모양이 되겠지요(삼상 1:13). 일종의 “새김질”에 해당합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의미의 새김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의 새김질은 필요합니다. 질긴 풀이나 고기를 되새김질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꿀 같은 하나님 말씀을 되새김질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길이고 빛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토끼의 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습니다. 올해야말로 제대로 “새김질”을 하는 원년이 되도록 목표를 정합시다. 주야로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우물거리면서 읊조리고 소화시킵시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 건강과 성숙을 얻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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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