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마산의 기독교 지도자 이승규 장로
    마산문창교회(혹은 제일문창교회)는 마산지역 최초의 기독교회이자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마산지역 거점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목사였던 한석진을 비롯하여 후에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고신의 지도자 한상동과 송상석, 이금도 목사 등이 시무했던 교회였다. 이 교회는 마산에서 사역했던 미국북장로교회의 시릴 로스(노세영)와 호주장로교회의 앤드류 아담스(손안로) 두 선교사에 의해 1901년과 1902년 시작된 교회가 1903년 3월 19일 통합되어 구마산(舊馬山)교회, 마산포교회, 마산교회, 그리고 상남동교회 등으로 불리다가 1919년 새로운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지역 이름을 따서 문창(文昌)교회로 불리게 된다. 물론 크고 작은 시련이 없지 않았으나 형식상 50년간 평화를 누리던 이 교회는 백리언 목사 부임 이후 내분이 일어나 1951년 결국 문창교회와 제일문창교회로 분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문창교회 설립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이승규(李承奎, 1860-1922)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병직과 김주은 아들로 186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들 가족이 천주교를 신봉한다하여 종중(宗中)에서 축출 당하게 되자 밤중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 지방으로 향해 순례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래에 정착했다. 이승규가 6살 때였다. 이곳에서 이승규는 김영유(金永柔)와 혼인하였고, 한약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근면했던 그는 명의라는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그가 불혹의 40살이 되었을 때, “이전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며 재산을 모았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 살며 남을 위해 재물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곳을 찾다가 부모를 모시고 경상남도 마산으로 이거하여 상남동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이승규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의 어머니 김주은(金主恩)은 호주 선교사 앤드류 아담스(손안로)를 통해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김주은의 인도로 아들 승규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이승규는 호주 선교사 손안로를 도와 전도에 협력하여 마산지방 첫 교회인 마산포교회를 성호리에 설립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 그를 문창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교사와 더불어 마산포교회당에서 작은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마산지방 첫 근대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승규는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자신의 재물을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납하였다. 그의 아들이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인데, 이은상은 젊은 날을 회고하면서, “구마산역에서 북마산역으로 뚫린 큰 길이 전부 우리집 마당이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이승규는 부유한 재력가였다. 그는 용하다는 한의사였고 지역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꺼이 헌신했다. 마산포교회를 설립하고 예배처소로 한옥을 구입할 때도 이승규가 감당했다. 그런데 마산포교회의 첫 장로로 피임된 이는 의외의 인물 최경호였다. 그는 1912년 3월 6일 대구 남문내교회에서 모인 제2회 경상도노회에서 문답을 받고 3월 17일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래서 마산포교회가 당회를 구성하게 된다. 손안로 목사가 당회장이 되었고 당회원은 손안로의 동료 선교사였던 왓슨(왕대선) 목사, 그리고 최경호 장로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14년 1월 18일 이승규는 두 번째 장로가 된다. 제일문창교회 120년사를 쓰면서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교회의 설립자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던 이승규가 첫 장로가 되지 못했을까? 당회록을 보면 처음으로 장로로 피택된 이는 생각지도 못한 ‘이경중’이라는 인물이었다. 교회기록을 보면 여러 인물들이 거명되기 마련인데 이경중은 처음 언급되는 인물이고 그 이후 교회기록에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당회록 등 교회 기록에 단한 번 등장하는 이경중, 그가 어떻게 피택 장로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장립되지 못했을까? 그는 왜 교회 기록에서 다시 언급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타지로 옮겨 간 것인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으나 분명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든 중 송상석 목사의 ‘법정소송과 종교재판’이라는 책을 읽던 중 ‘이경중’은 ‘이승규’의 별명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는 언급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단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창교회 당회록에서 이승규라는 공식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일부의 사람만 알고 있던 이경중이라는 별명으로 기재했을까? 이승규는 아들을 불신혼인하게 하여 6개 월 간 책벌을 받았고 그 일로 장로 장립을 받지 못한 것이다. 영예롭지 못한 일이기에 당회록은 의도적으로 ‘이승규’라고 기록하지 않고 ‘이경중’이라는 별명을 기록한 것이다. 6개월간의 책벌기간이 경과한 후 손안로 선교사는 그의 해벌을 노회에 보고하였으나 노회원들은 “더 기다려주기를 가결하여” 장로 장립은 다시 미루어졌고, 최경호 보다 2년 후 장립을 받게 된 것이다. 당회 기록을 보면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당시 교회는 불신 결혼은 성도들이 피해야 할 중한 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교회의 법은 지키면서도 교회는 치리 받은 사람도 보호해 주려는 애정어린 배려를 볼 수 있다. 셋째, 이승규는 치리에 복종하고 인내하였고 비록 후배 보다 늦게 임직을 받았으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그의 믿음의 여정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아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3-06
  • [서임중칼럼] 오늘 하루도 나는 살아 있다
    참으로 세월이 유수(流水)같다. 엊그제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 같은데 벌써 2월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매섭게 추운 것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권의 찬바람이 국민들 가슴을 더욱 시리게 했고 국제정세와 맞물려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의 정책부재로 인한 난방비의 인상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서민들의 버거운 삶은 고드름이 되었다. 매일처럼 들려오는 여의도 1번지의 그 잘난 분들의 언행은 우리의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앗아가는 올 겨울 한파에 혹한의 부채질을 더한다. 내 마음도 그랬다. 삼성병원 암병동을 출입하는 것이 3년째다. 그곳을 출입할 때에도 언제나처럼 입으로는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솔직히 내가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들은 참 시린 날들이다. 그럼에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은 엎드림의 시간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이 큰 까닭이리라. 그래서인가, 감사한 것은 3개월마다 출입하던 검진 간격이 6개월로 늦춰진 것이다. 암병동 복도를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본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아픈 사람들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 만큼의 미소만 머금고 걷는다.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와 진료실을 출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어느 날 40대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초췌한 얼굴로 다가와 곁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곁에 앉으며 “몇 차례 지나면서 뵈었는데 어르신은 얼굴에 늘 미소가 있는 걸로 보아 환자는 아닌 것 같고 다른 누가 아프신가요?” 하고 묻는다. 아내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목사님인데 뇌신경 암으로 진료 받으러 다니고 있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 말을 듣자 흠칫 놀라며 “어떡해...” 한마디를 삼키듯 내뱉는 그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맺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의 아픈 이야기를 듣자 눈시울이 젖는 사람이니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분을 내 곁에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에 가만히 휴대폰을 열어 성경 한 구절을 보여주면서 직접 읽으라고 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22:17).”는 말씀이다. 나는 목사로서 매일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내 마음의 즐거움을 찾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킨다고 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님이 그분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김희목 님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잠에서 깨어나니 당신이 있어 기쁩니다. 아침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요즈음 내가 자주 읊조리는 시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당신이 있어 기쁨’의 의미는 내게 있어 아내에게만 한정하였는데 요즘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아침 태양의 찬란히 빛남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을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서 멈추어 뒤를 돌아보니 솔로몬의 고백이 묵상된다. 앞을 보니 바울사도의 걸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살아있으니 앞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통감(通鑑)의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지나온 역사를 거울로 볼 수 있는 혜안(慧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靈眼)과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주님처럼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이 탐진치(貪瞋痴)가 아닌 너의 유익을 위한 나의 삶이 되리라. 아들 같은 목사님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사임종용을 받았다는데 그 이유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냥 싫으니 사임하라는 것이란다. 아는 곳도 갈 곳도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기한은 다가오니 목회는 고사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단다. 나는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묻지를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커피 머신으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내려왔다. 마시지 않는 차를 앞에 두고 침묵만 흐른다. 그러다가 내가 살아온 날들, 내가 오늘도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태복음 8:20절을 펴 놓고 같이 읽자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결국 그는 탁자 위에 엎디어 흐느꼈다. 바라보는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여기를 바라보시는 주님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무릎을 꿇은 아들 같은 목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눈물이 흘러 목사의 머리에 떨어졌다. 기도를 끝내고 품에 안아주며 내가 한 말은 “이것까지 참으라.”였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렸을 때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2개월 후 그 목사를 그 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 목사가 떠난 이후 촛대가 옮겨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머 한편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짐승을 지으실 때 사람을 위하여 일하게 하시며 또 수명도 정해 주셨다. 소를 만드시고 60년만 살아라 하시니 소는 30년만 살겠다고 했다. 개를 만드시고 수명을 30년을 명하셨는데 개는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원숭이를 만드시고 너도 30년만 살아라 하시니 개처럼 15년만 살겠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신 후 25년만 살아라 하셨다. 그러자 사람은 하나님께 소가 버린 30년, 개가 버린 15년, 원숭이가 버린 15년을 자기에게 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25세까지는 그냥 사람으로 살고, 그후 55세까지는 소처럼 일을 하며 살고, 그후 70세까지는 퇴직 후 개처럼 집 지킴이로 살고, 그후 85세까지는 손자들 앞에서 원숭이처럼 재롱을 떨면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유머일 뿐이지만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될 수도 있는 수긍이 되는 유머가 아닌가.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읊조린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 오늘, 지금 이 하루도 나는 살아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3-02-10
  • [성서연구] 마하나임
    야곱은 형님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좋게 말하면 축복을 사모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인간적 위계로 살아간 잘못된 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은 것은 형님의 복을 가로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가 더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로 야곱은 형님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했고, 20년을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얻었고, 짐승 떼를 얻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형님 에서와 조우하는 일이었습니다. 20년 후 외삼촌의 집을 떠나 돌아올 때 그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을 가다가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사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천사>라고도 번역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본 것은 야곱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한둘이 아니었고,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이들을 본 후에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그 의미가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운 형님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으로 갈 때도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들판에서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은혜의 사다리를 내려보내시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리면서 그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외삼촌의 집에서 무사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도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도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늘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로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군대>라는 뜻입니다. 마하나임은 군대, 진영을 의미하는 마하네의 쌍수로서 둘을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본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두 군대의 진영을 보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고, 한 군대는 그의 앞을 인도하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뒤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을 알았을 때 라반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길을 재촉하여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야곱을 덮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라반에게 경고하셔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1장 24절을 보면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다말이 겁탈당한 일로 세겜 남자들을 죽인 후 야곱이 그곳을 도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 군대는 그의 뒤를 지키셨던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를 막아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과거의 죄는 무섭습니다. 학교 폭력을 저지른 오래전 일 때문에 인생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를 씻어 다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뒤를 지키는 군대가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군대는 야곱의 앞을 인도하셨습니다. 무장 군인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의 마음의 분노를 녹이셨고, 에서와 야곱이 사랑으로 포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원수를 격파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길 소원합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두 군대가 앞뒤를 지키는 가운데 강건한 삶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주여, 저희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보호하옵소서.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3-02-10
  • [시사칼럼] 감성을 장착한 인공지능, 인간을 능가할 것인가?
    얼마 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샘 올트먼(Sam 미스무)과 공동으로 설립한 <오픈 AI>에서 공개한 신제품(?) 하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정식 명칭은 “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줄여서 ‘챗GPT’)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잡담하는 로봇’(챗봇, chat-bot) 혹은 ‘생성 AI’ 즉 생성 능력이 있는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말입니다. 작년 12월 1일 공개된 이후 고작 두 달 만에 사용자가 천만 명을 돌파하면서 구글(Google)의 자리마저 위협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챗봇”은 질문이나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자료나 지식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기존의 검색엔진과 달리, 이름의 뜻 그대로 ‘생성적 사전 학습 수행’ 능력을 발휘하여 관련된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요 답안지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준마저 능가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의 맥 혁신경영연구소는 최근 ‘챗GPT가 와튼 MBA를 수료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챗GPT가 필수 교과목인 ‘운영관리’ 기말시험에 응시하여 ‘B-’에서 ‘B’ 학점 사이를 받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상당히 준수한 성적입니다. 경영 실력이 이 정도라면 로스쿨은 어떨까요? 비슷한 시기의 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챗GPT는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치러 진 로스쿨시험마저 거뜬히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렵기로 소문난 의사 시험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의료 스타트업인 앤서블헬스 연구진은 챗GPT가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에 응시한 결과 모든 시험에서 50% 이상의 정확도를 보이며 합격가능한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이상 매일경제 2023월 1월 26일 기사에서 발췌). 물론 아직까지는 언어의 문제점이라든지 여러 가지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모델은 ‘GPT-3.5’ 버전으로서, 향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GPT-4.0’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286에서 시작했던 컴퓨터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 컴퓨터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인공지능이니, 앞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진화할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장은수는 한 칼럼(챗GPT와 창의성)에서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프레히트의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열린책들 펴냄)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데,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대화 잘하고, 공감 잘하고, 자주 고마움을 표하고, 어려울 때 흔쾌히 도우라”는 식의 다소 지루하게 들리는 답을 내놓았다고 하면서, “틀리지는 않지만 흥미롭지도 않다. 사랑을 잘하려면 무수히 변하는 상황에서 연인의 감정과 기분, 생각과 뜻을 살펴 그때그때 눈치껏 잘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피곤하며, 진정한 모든 관계는 사적이다.”라고 썼습니다. 로고스(logos)는 몰라도 인간적인 파토스(pathos)는 어림도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종교적인 분야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역시 편집자 발 기사에서 “챗봇은 연구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며, 웅변까지도 할 수 있겠지만, 설교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러셀 무어, 1월 26일). 마음은 물론 영성은 절대로 갖출 수 없을 거라는 확신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떨까요? 지난 신년 첫 날 뉴욕주 햄튼 유대교회당에서 조시 프랭클린이라는 랍비가 메시지를 전한 후 감동을 받았다는 청중들에게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챗봇이 작성한 설교문을 읽었노라고 밝혀서 충격을 선사한 바 있습니다. 최근 챗봇이 썼다는 “선임장로님의 장례식 설교문”은 어떻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많은 것을 바친 사랑하는 선임장로님의 삶과 유산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지만 그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영향을 기억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그를 기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교회 건축에 헌신했고, 사람들이 예배와 공동체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 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최승현). 솔직히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수자보호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지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무분별한 조롱과 악의적인 댓글 그리고 ‘카더라’ 통신과 ‘아니면 말고’ 식의 논설이 난무하는 인간의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는 챗봇이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지경에 있다고 우리는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3-02-10
  • [교회와세금] 종교인소득 과세의 실무적 영향
    2018년부터 시행된 종교인 과세 소득세법령이 적용된 지 5년이 지났다. 종교인소득 과세는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종사자의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기타소득과 근로소득 중 선택하여 세금을 납부하고, 연말정산을 통해 부족 부분은 추가 납부하거나 환급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또 이로서 종교인소득이 투명하게 전산화되며 종교단체나 종교인이 부담해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이 달라지고, 근로가족 장려금 수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목회자 소득에 대한 과세가 법률로 정해짐에 따라 교회가 부담해야 할 사례비와 급여항목 체계가 달라지고, 목회자의 보험료와 국민연금, 근로가족장려금 등 수혜금액에도 변화가 생겨난 셈이다. 교회와 세금, 오늘은 제9회 칼럼으로 종교인소득 과세가 교회의 실무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 또한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인소득은 소득세법상 “기타소득”으로 분류하고, 원천징수를 하거나 과세표준확정신고를 하는 경우 해당소득을 “근로소득”으로 선택할 수 있다(소득세법 제21조3항). 과세대상 소득은 종교활동과 관련하여 받은 생활비, 상여금, 격려금 등 매월 또는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수당 등을 포함하며, 비과세소득을 차감한다. 비과세소득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 항목으로 학자금(본인), 식사(월10만원 이하), 실비변상적 성질 지급액(일직료, 여비 등 20만원 이하), 출산보육수당(10만원 이하), 사택제공이익 등이 포함된다. 과세표준은 과세기간에 받은 지급액에서 비과세소득과 필요경비 또는 근로소득공제, 소득공제, 세액을 차감하여 계산한다. 둘째, 종교인소득 과세 납부와 관련하며 다음과 같이 원천징수세액을 계산하고 신고한다. ①소득지급액- ②필요경비 = ③소득금액 - ④기본공제 - ⑤연금소득공제 = ⑥과세표준 × 세율(종교인소득원천징수세율 20%) = ⑦산출세액 - ⑧세액공제* = ⑨결정세액 ÷ 12개월 *세액공제: 총지급액 7천만 원 이하인자는 총지급액의 2.3%(초과자는 정액 161만원)+산출세액의 10%(90만 원 한도)=종교인이 일반인보다 기부금 등의 지출액이 높은 수준을 감안하여 산정 셋째, 종교인소득이 투명하게 신고되며, 교회 목회자도 근로·자녀장려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근로장려금은 근로소득이 적은 경우 이를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부부합산 총소득이 단독가구 2천만원, 홀벌이 가구 3천만원, 맞벌이 가구 3600만원 미만이며, 가구원 전원의 재산합계액이 2억원 미만의 경우 신청이 가능하다 (조세특례제한법 제100조). 자녀장려금은 저소득 가구의 자녀양육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것으로, 18세 미만 부양자녀가 있고, 부부합산 총급여액이 4000만원 미만인 경우 자녀 1명당 최대 7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넷째, 종교인소득이 전산화되며, 4대보험(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납부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4대보험은 국가의 책임하에 질병, 노령, 실업 등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일정 이상의 소득 보장을 위하여 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기타소득의 경우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근로소득의 경우 4개 모두를 납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보수월액에 6.46%의 건강보험료율을 곱하여 산정하고, 후자는 추가로 주택, 차량 등 재산을 반영하여 산출한다.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기준소득월액에 연금보험료 9%(교회 부담 4.5%, 본인 부담 4.5%)를 곱하여 산출된다. 아울러 퇴직연금 지급을 의해 금융기관에 예치하는 경우, 퇴직기여제도를 선택해 퇴직금 운용에 대한 리스크를 종교인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 교회는 지출을 비용으로 처리하면 되나, 퇴직급여제도를 선택해 운용 리스크를 교회가 부담하는 경우 퇴직급여부채와 이를 위해 적립한 퇴직연금자산을 관리하고 회계장부인 재무제표에 표시하여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2-10
  • [은혜의말씀] 서머나교회(계2:8~11)
    서머나란 ‘몰약’이란 뜻인데,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 유명한 무역 도시였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로마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어 로마로부터 온갖 혜택을 누리며 부유하게 살던 도시였습니다. 서머나에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은 교회입니다. 자, 이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8절) 우리 예수님은 태초에도 계셨으며 역사의 마지막에도 계셔서, 우리 인생들의 걸음을 주관하며 다스리시는 주권자시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영원토록 살아계신 생명의 주이십니다. 두 번째, 서머나 교회를 향한 칭찬의 말씀입니다.(9절) 서머나는 예로부터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습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를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또, 황제 숭배가 모든 사회의 각 분야에 스며들어, 황제 숭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장사를 하거나 직업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서머나 교인들은 심한 핍박뿐만 아니라, 옥에 갇히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너무나 어려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같은 동족의 비방이었습니다. 전통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 배척하고, 박해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유대인들 때문에 자기들이 누리는 지위와 혜택을 빼앗길까봐 위기의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마나 교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한 죄 때문에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생명을 빼앗겼습니다.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서머나 교회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안다. 내가 너의 환난과 궁핍을 다 안다. 그러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보시는 것은 물질적인 부요가 아니라 금보다 귀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통장 잔고로 자신의 부요함을 자랑할지 몰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부요함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요, 네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고후 6:10) 여러분, 코로나로 경제적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믿음만은 부유해야 합니다. 진짜 궁핍은 물질의 궁핍이 아니라, 영적인 궁핍이며 말씀의 궁핍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해도, 오직 주님만 섬겼던 위대한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믿음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믿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두려워말라 네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고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오히려 죽도록 충성해라” ‘충(忠)’이란 한자를 보면 ‘가운데[中] 마음[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옛말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이라 했습니다.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축복이 있습니다.(10,11절) ‘생명의 관’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승리자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 승리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을 주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육신의 사망 후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과 유황으로 타는 구덩이에 들어가 영원히 당하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가서, 하나님 주시는 모든 영광을 유업을 받는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직 주님께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천국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하는 여러분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3-02-10
  • [목회자칼럼] 가정의 신비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기관이다. 교회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서 가정을 만드셨다. 가정 사용 설명서가 성경이다. 사랑과 행복의 매뉴얼이 성경 속에 들어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다. 가정은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최고의 학교요 병원이요 훈련소이다. 가정은 관계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족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엡5장에서 하나님은 가정의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설명한다. 눅15장에서 아버지와 큰아들과 둘째는 상속권과 아비의 사랑을 가르쳐준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신다. 주님은 딸 바보처럼 예루살렘을 딸이라 하고 시온을 처녀 딸 시온이라고 불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축복은 가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브라함은 늦도록 자식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백세에 아들을 낳아 약속 성취를 보았다.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은, 바다의 모래 같은 자녀를 얻었다. 이삭은 약해 빠져서 상속자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작은 자를 통하여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게 이어간다. 야곱은 사기꾼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사랑꾼이 되었다. 라헬을 사랑해서 칠년을 수일같이 보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요셉을 향한 사랑은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 끔찍했다. 요셉은 버림받은 아이, 잊혀진 자식이었지만 가정을 일으켰고, 민족을 이루었고, 이방 제국을 먹여 살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면 수 천대까지 복을 받는 명가가 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죄를 짓는 자는, 삼사대에 망하는 막장이 된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남편과 아내, 부부관계를 얘기하다가 이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였다. 부부간에 사랑과 존경이 있듯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사랑과 순종이 있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가정에 찬양과 경배가 있어야 되고, 교회에 사랑과 존경이 있어야 된다. 가장은 가정의 제사장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불신가정에 파송 받은 가정 선교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여인 라합이나 룻을 통해 택한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 성공과 행복을 쫓아가다보면 반드시 타락하게 된다. 그러나 성공이 아니라 성결, 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감당하면 행복과 성공과 축복은 저절로 따라온다. ④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을 통해 가정을 새롭게 해야 된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가정이 구원받아야 된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본심을 찾는다. 성경 속에서 길을 찾고 답을 구하고 약을 얻고 복을 받는다. 성경 안에 사랑과 행복의 원리가 들어 있다. 자녀들의 기도제목을 물어보라.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가족들이 기도제목을 공유하는 것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화이다. 가족 간에 기도의 끈으로 하나 될 때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한다. 가정에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탄, 마귀, 귀신이 떠나간다.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이던, 한 달에 한번이라도 가족들이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려라. 그것이 최고의 대화시간이다. 가정 예배를 한 번도 안 드린 가정도 없지만 계속해서 드리는 가정도 드물다. 가정 예배가 회복되어야 된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입술에서 그치지 말고 손과 발로 섬기라. 부모가 믿음의 본을 보이기보다 섬김의 자리로 자녀들을 이끌어보라. 나눔과 봉사활동을 통해 오픈 마인드가 되어서 열린 사람이 되고, 은사가 개발되어 남들을 섬길 수 있고, 만남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 가족이 함께 가는 선교여행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고 답을 얻게 된다. 가족사진을 찍듯이 가족이 함께하는 말기찬섬의 자리가 있어야 된다. 내리사랑, 올리효도가 이루어진다. 가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곳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 성자 예수님의 희생적인 십자가 사랑, 말 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서도 나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 가난하고 무식한 옛 부모님의 굳센 믿음이 오늘의 대한민국 역사를 만들었다. 요한삼서에 보면 삼중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녀들이 진리 안에 행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성장이 답답하고 느려도 소망을 버리지 않고 오랜 세월 인내하는 가운데 자녀들이 마침내 어른이 된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 자식들이 애를 먹일 때도 소망을 가지고 자녀들이 잘 되기를 눈물로 기도하게 된다. 가정은 아버지의 수고, 어머니의 희생으로 세워진다. 가정은 아버지의 엄격함과 어머니의 자상함으로 만들어진다. 엄친슬하에서 반듯한 자녀가 나오며 엄마의 자상한 손길로 건강한 자녀가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굽은 가지가 선산을 지킨다. 문제를 문제 삼지 말고 기도제목으로 삼으면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된다. ⑥ 문제 자녀는 없고 문제 부모가 있다. 모든 정신병의 진원지가 가정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해체하는 악법은 철폐되어야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 가정을 행복하게 / 교회를 건강하게 / 세상을 아릅답게 의지하여, 깊은 데로 나아갑시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3-02-10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신편찬송가와 춘원 이광수
    한국에서의 찬송가의 역사는 길고도 복잡하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후 첫 10년간은 공식적인 찬송가가 출판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예배 때 어떻게 노래하고 찬송했을까? 임시로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사용되던 찬송가 ‘주 예수 아이워’(耶穌愛我我知道)를 부르기도 했고, 배재학당 같은 학교에서는 영어찬송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찬송가가 편찬되었는데, 그것이 1892년의 ‘찬미가’였다. 북감리교 선교부의 존스와 로스와일러가 편찬한 총30장으로 구성된 감리교 전용 찬송가였다. 2년 후에는 언더우드가 편찬한 ‘찬양가’가 출판되었는데 총 117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듬해에는 북장로교의 그래함 리와 기포드 부인이 편찬한 ‘찬셩시’가 출판되어 서북지방 장로교회가 애용했다. 1899년에는 지금의 침례교로 발전하는 동아기독교가 ‘복음찬미’를 편찬했고, 1903년에는 성공회의 ‘셩회숑가’가, 1907년에는 성결교로 발전하는 동양선교회가 ‘복음가’(1907)를 출판하게 된다. 융희2년인 1908년에는 윤치호가 15곡으로 구성된 ‘찬미가’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지금의 애국가가 4절까지 실려 있다. 곡은 올드랭사인에 맞쳐 부르게 되어 있었다. 이해에 구세군의 ‘구세군가’가 출판된다. 특히 1908년에는 장, 감합동으로 ‘찬숑가’기 발간되는데, 1920년까지 275,000부가 보급되었다고 한다. 좁은 지면에서 찬송가 발간사를 다 나열할 수 없고 한 가지 뒷이야기가 무성했던 찬송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신편 찬송가’였다. 1935년 11월 7일에 발간된 이 찬송가에는 400곡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장로교 독단으로 흘려 장감 연합을 이루지 못했고, 예수교서회가 아닌 장로교 종교교육부가 편찬한 것은 상업적인 이유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찬송가 편찬을 둘러싸고 노출된 지역적 대결도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신편찬송가 중에는 비 기독교신자의 번역시(가사)가 있다는 점이 논란을 야기했다. 경남노회는 만일 비기독교인이 집필한 부분이 있다면 찬송가 발매를 중지해야 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왕삼은 ‘기독신보’(1936. 1.1)에 기고한 글에서 찬송가 편집과정이 비신앙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장로교의 논객이었던 김인서도 비신앙인이 번역과 작시에 관여한 점을 문제시했다. 그 비신앙인이라는 다름 아닌 이광수였다. 찬송가 번역진 중에는 춘원 이광수 외에도 이단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이용도계의 전영택, 노산 이은상도 들어 있었다. 이은상은 마산의 기독교 지도자 이승규 장로의 아들이었으나 불교적 시문을 많이 남긴 문인이었다. 크게 문제시된 인물이 이광수였는데, 그가 번안하거나 손질한 곡이 18편 수록되었다. ‘온천하 만물 우러러’(14), ‘새 아침이 밝아오니’(37), ‘나를 위해 성자 예수’(51), ‘예루살렘 내 복된 집’(241), ‘저 높고 푸른 하늘에’(271), ‘주 안에 있는 나에게’(291), ‘주 예수 귀한 말씀이’(311), ‘주님 찾아오셨네’(317), ‘저 높은 곳을 행하여’(333),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337), ‘이 몸의 소망 무엔가’(341), ‘이 세상 풍파심하고’(364), ‘내 기도하는 한시간’(365),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374) ‘하나님의 진리등대’(377), ‘물건너 생명줄 던지어라’(378), ‘주 예수안에 동서나’(383),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389) 등이 그것이다. 구왕삼은, “입으로 술을 먹는 이이며 또 담배를 피우는 이”로서, 이 신편 찬송가는 “술과 담배의 독취(毒醉) 속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아마도 신편 찬송가 편집진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춘원에게 자연스럽고도 유려한 가사를 만들도록 부탁했을 것이지만 이미 출판된 이후였다. 춘원이 손질한 대표적인 가사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쥬 예수 뿐일세”이데, 춘원이 쓴 가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구왕삼 같은 이는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춘원의 가사는 지금 찬송가에 10여곡 이상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논란이 일었으나 비신앙인이었던 춘원이 기독교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지금까지 애창되는 감동적인 가사를 남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2-10
  • [서임중 칼럼]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라
    시성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구멍이 없다.”고 했다. 하루의 단추도, 한해의 단추, 인생의 단추도 그렇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한다. 2023년도 한해의 첫 단추를 잘 끼워 살아간다면 마지막 단추를 끼우면서 행복한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간다. 이런 경우는 죄악에서 죄악으로 가는 사람이다. 소돔성의 사람들, 노아 때의 사람들, 육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이는 죄악에서 빛 되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오른편 강도,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생활하다가 자기주의로 타락하는 사람이다. 사울왕, 엘리 제사장, 웃시야, 가룟유다가 그들이다. 어떤 사람은 빛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믿음의 길, 그 믿음을 생활로 이어가는 신앙생활의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다윗, 사무엘, 다니엘, 모세, 바울이 그들이다. 빛에서 빛으로 가는 길, 그 삶이 어떤 삶인가? 시편37편에서는 그 삶을 아름답게 교훈한다. 그것은 먼저 불평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 것이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말씀 때문에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당해도 단 한마디도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고 기도했다. 불평대신에 감사한 조건을 찾았고 투기대신 기도했다. 그것이 인생의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고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그 날 감사함으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평과 투기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뼈를 마르게 하는 독소임을 성경은 교훈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배고픈 날보다는 배부른 날이 더 많다. 추운 날보다는 따뜻한 날이 더 많고, 미워할 것보다는 사랑할 것이 더 많고, 안 되는 것보다는 되는 것이 더 많고, 아픈 날보다는 건강한 날이 더 많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불평하거나 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거기서 선행이 실천된다. 선행이 무엇일까? 성경적 관점의 선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한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다. 이것은 나의 목회 철학이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의 고령에 포항중앙교회에 오셔서 주일 설교를 하시고 나에게 안수 기도를 해 주셨다. 전율이 일어나는 기도였는데 “서목사님은 말씀사역을 하면서 녹슬어 사용하지 못하는 목사가 아니라 닳아서 사용할 수 없는 선행의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다. 그러기에 은퇴 9년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한해 70여 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사경회 강사로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한 알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모진 풍상을 견디면서 자라야 한다. 자식을 양육하기 위하여 어머니의 수고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희생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선을 행하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걸음이다. 아무리 좋은 고급승용차도 가만 세워두면 부식되고 망가지면서 사용되지 못한다. 부엌의 칼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보기 싫지만 계속 사용하면 날이 서고 유용하게 사용된다. 건강도 재능도 물질도 그렇게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삶으로 사용될 때 아름답게 빛을 발하게 된다.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총이란 쏘아보지 않은 자에게 맡기면 오발탄이 된다. 옷도 입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면 입을 줄 모른다. 화장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자에게 주면 어떻게 쓸 줄 모른다. 돈도 사용할 줄 모르는 자에게 주면 그 돈은 재앙을 불러온다. 능력도 사용할 줄 아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직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귀한 은사를 받고 어둠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라가 그랬고, 발람이 그랬고, 아히도벨이 그랬고, 가룟유다가 그랬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지 않고 빛에서 빛으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정욕에 이 기쁨을 빼앗기고, 안목의 정욕에 빼앗기고, 이생의 자랑에 빼앗긴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가르친다. 즉 내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맡김은 믿음 없이는 안 된다. 사위 못 믿는데 딸 시집 보내는 부모님 있는가? 선생님 못 믿는데 자식 학교 보내는 부모님 있는가? 목사 못 믿는데 그 목사 설교하는 교회 가는 교인 있는가? 은행을 믿지 못하는데 돈 맡길 수 있는가? 즉 믿음 있어야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는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5)” 이것이 정답이다. 맡기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이다.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심령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성공이다. 축복이고 기쁨이고 영광이다. 2023년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샴마, 여호와 닛시가 현재진행형이 되는 평행감축의 한해, 빛에서 빛으로 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3-01-30
  • [소강석칼럼] 평등 속에 감춰진 발톱을 아는가
    최근 이영훈 이재훈 고명진 이찬수 목사님 등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에 동참하셨다. 나는 이분들의 용감한 행동에 적극 찬성한다. 아니, 추앙한다. 필자도 참가하려고 했으나 일정이 분주한 데다 반동성애 운동을 앞서 시작했기에 굳이 가지 않아도 좋겠다는 주변 조언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누가 먼저 하고 나중에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구나 힘을 모아 적극 동참해야 한다.’ 그래서 1인 시위에 참여하길 원했고 혼자 가는 것보다 17개 광역시·도 목사님들과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분들을 예찬한다. 과거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처하고 차별금지법을 막는 데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주셨다. 엊그제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십수 년 전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님과 길원평 교수님으로부터 동성애와 안티 기독교 세력의 실체와 전략을 알게 되면서 시작했던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공적 사역의 궤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왜 이렇게 차별금지법을 저지하려고 하는가. 나는 북유럽을 방문했을 때 차별금지법의 폐해를 직접 목격했다. 서유럽이나 북유럽 국가들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놓고 기독교계가 후회하고 탄식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북유럽에서조차도 차별금지법 처벌 예외 조항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런데 왜 국내 일부 정치인은 전 세계적으로 사회문화적 병리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인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부당한 차별을 없애는 데는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어 개별적 차별금지법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또는 평등법안이 내세우는 ‘차별 없는 세상의 구현’이라는 구호 속에 감추고 있는 무서운 발톱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는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진리를 흐리는 사이비·이단 합법화,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합법화라는 ‘파괴적 이빨’이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한다는 미명 아래 더 많은 절대다수 사람의 인권을 제한하고 수많은 역차별을 초래할 수 있는 독소조항을 품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모든 국민을 차별 대상으로 만들고 국민의 생활 영역 전체를 차별 사유로 규정해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 수 있다. 또 모든 국민을 감시자와 고발자로 만들고 심판자와 범죄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더 많은 국민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의 폐해를 알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문화전 사상전 여론전을 펼쳐야 한다. 여론조사를 할 때도 국민에게 이 사실을 똑바로 알려야 한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도 소수자들은 얼마든지 보호받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다수 국민을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역차별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뜻있는 국민은 모두 이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길이 끝난 것 같아도 우리가 새길을 열어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특정 종교 관점을 넘어 국가의 미래, 국민과 다음세대의 안위와 평안,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위한 것이다. 올해에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저지를 위한 1인 시위는 계속돼야 한다. 아니, 한국교회와 국민 모두 힘을 모아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새길을 열어가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3-01-2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