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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칼럼]“소 목사의 휴민트(HUMINT)”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써주는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학교에서 교회 개척학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교회 개척학이라는 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강남에 있는 광림교회에서 세계적인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를 초청하여 교회 개척과 성장론을 강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 수업을 빠지고 2박 3일 동안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할 지역부터 선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욕구 진단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서 전도도 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지역교회를 탐방하여 성공하는 목회자와 실패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거나 그 이유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만 그 교회 목사님을 1대1로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 100여 명에 가까운 목회자를 만났고 수백 개의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목회자를 못 만나고 주일 공예배에 참석하지 못해도 몇 주간의 주보를 보고 휴민트 작업을 하였습니다. 휴민트(HUMINT)란 사람(Human)과 정보(Intelligence)를 합성한 말로 사람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뜻합니다. 제가 보니까 성공하는 목회자와 교회는 설교부터 다르고 예배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아니, 예배에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고 설교에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 몰라도 설교도 그저 그렇고 예배 분위기도 그저 그런 걸 보았습니다. 설교를 유심히 들으려고 하는데도 제 귀에 도대체 들려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개인적으로 만날래야 만날 수가 없었지만, 역시 대형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다르고 설교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중에서 딱 한 분을 뵐 수가 있었는데 고 옥한흠 목사님이었습니다. 저희 신학교 동기 처제가 옥한흠 목사님의 비서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몇 사람들과 함께 옥 목사님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수요일이면 사랑의교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그 후로도 옥 목사님은 가끔 뵐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옥 목사님은 부지런한 독서광이자 설교 준비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준비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맨땅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좀 부흥하고 있나요?” “예. 많이 부흥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몇백 명은 모이고 있습니다. 그 후 저는 분당으로 교회를 신축해서 당시로서 개척 성공 신화를 이룬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비서를 시켜서 제 설교 테이프를 구해다가 들으셨다고 합니다. 뒤늦게 안 용어이지만 이 역시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의 휴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들어봤겠습니까? 그리고 개척 이후에도 정말 부흥하는 교회를 탐방하고 목사님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린 잠정 결론은 역시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성령 충만한 영성, 살아있는 설교, 그리고 성도를 향한 태도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니 개척 목회자로서는 최대형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대형교회 목회자로만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한국교회 공교회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교회 생태계를 위협하는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광화문이나 여의도에 가서 집회를 하기보다는 전략적 휴민트를 통하여 해당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하고 이해를 시켰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을 할 때도 휴민트를 통한 코로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무조건 현장 예배만 강행한 것이 아니라 루터와 칼빈처럼 소수의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쿼런틴 시스템(격리 제도), 요즘 말로 하면 화상 줌이나 온라인 예배 등으로 이원화 전략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잠시만 찬란한 바보가 됩시다. 잠시만 허들링 처치가 되게 합시다. 그러면 국민들은 한국교회를 고맙게 생각할 것이고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는 더 신앙적 갈망이 생기고 교회를 영혼의 토포필리아로 생각하여 교회는 회복 탄력성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그런 어두운 면도 보도를 하였지만 찬란한 바보, 허들링 처치를 더 인상 깊게 보도 하였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휴민트’라는 영화를 봤는데 저의 지나온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휴민트 영화가 액션을 넘어 인간을 통한 정보, 신뢰, 인간애를 보여 주었듯이 저도 끊임없는 영적 휴민트를 통하여 제 자신을 발전시키고 성도들을 섬기며 새에덴교회를 굳게 지키며 더 부흥시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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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성서연구]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creatio ex nihilo)입니다. 한자로 <유>는 <있을 유>로서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자가 붙으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유의미, 有意味>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유리, 有利>는 말은 <이익이 있다>는 뜻이지요. <있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입니다. <있음>의 반대는 <없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상태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없던 곳에 빛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없음보다 있음이 아름답습니다. 없음은 슬픔입니다. 집은 있는데,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이 텅 빈 방, 살림살이는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집은 허전합니다. 하나님은 있게 하십니다. 반면에 사탄은 있는 것을 없게 합니다. 하나님은 채워 주시고, 사탄은 있던 것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아버지 재산을 받아 집을 나간 탕자에게 재산을 준 분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게 한 것은 그를 타락의 영으로 이끈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어서 고통 받는 곳에 있게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것을 가지고 와서 채웁니다. 있게 합니다.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이런 사람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영에 끌리는 사람은 있어도 없다고 말합니다. 있는 것도 없게 합니다. <없을 겁니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낙망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부정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 명은 없는 것만 말했습니다. 적들처럼 강하지도 못하고, 신체가 우람하지도 못하다면서, 없는 것을 부각시켜 백성을 낙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컵에 물이 절반쯤 있을 때, 말하는 법이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이 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없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다>고 하면서 있는 것에 눈길을 줍니다. 목회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목회자에게 고마운 사람은 있는 것을 말씀하는 이들입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꼬마들이 많습니다. 열정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큰 힘이 됩니다. 교회에 긍정의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면서,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하는 성령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조란 <있게 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우리도 있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을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살림을 부수고, 가족을 구타하는 가정에서 불우하게 사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담임인 <앨리스 팔머>는 어린이들에게 <각자의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기>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가난한 소녀 때문에 밤새 그런 숙제를 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다음날 어린이들은 예쁜 인형, 장난감 등을 가지고 와서 자랑했습니다. 가난한 소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가져올 물건은 없어요. 그러나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팔을 베고 자는 동생의 금발이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소녀를 칭찬했습니다. <평생 네 주변에서 잘 찾아보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것 찾아내며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소녀는 큰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없는 것에 슬퍼하지 않고, 있는 것을 찾으며 산 결과였습니다.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이 봄에 겨울 동안에 텅 비었던 산하를 다시 푸름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있게 하시는 성령님 안에서, 있게 하는 사람으로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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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성경적 경영안개론] ① 서문
    ‘성경적 경영학개론(Principles of Biblical Business Administration; P-BBA)’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시작한다. 월1회, 1년을 목표로 연재를 이어갔으면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환경이 정상화되었다. 그럼에도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AI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은 물론, 많은 크리스천 경영자들이 이윤 극대화와 무한 경쟁이란 세속적 가치관 속에서 여전히 신앙과 현실의 긴장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경영학이란 무엇일까? 본 칼럼은 기업의 목적과 인간의 가치, 그리고 재화의 흐름을 성경 원리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탐구하는 학문적·실천적 체계로 정의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는 그리스도인이 기업경영을 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체계화하였다. 첫째, 경영은 단순히 부를 창출하는 과정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행하는 소명으로, 이윤 극대화의 경제적 가치를 넘어 신앙적 가치를 통합한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경영(Glorifying God)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시장을 통해 새로운 기업가치를 창출한다. 셋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 경영(Service to Neighbors)으로, 구성원을 생산의 수단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체로 대우하고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경영을 한다. 넷째, 성화의 경영(Sanctification in Business)으로 경영자가 경험하는 고민과 의사결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 역할을 한다. 다섯째, 청지기적 사명(Stewardship)의 실천 경영으로 위탁된 자원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관리하여 사회 유익과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 즉 패커는 기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절대 주권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제시한 종교개혁자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과 일치하는 기업경영론을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상은 앞으로 본 칼럼이 개혁 신앙의 토대위에 글을 집필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근간이 될 것이다. 본 칼럼은 ‘경영학원론’과는 다른 ‘경영학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경영에 대한 지식을 자세히 전달하는 것보다, 일련의 경영학의 큰 흐름속에서 이를 기독교 신앙과 연결한 신학적 통찰의 제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필자가 지금의 대학 경영학부에 재직한지 28년이 되어 간다. 아울러 그동안 로고스경영학회 학술지 <로고스경영연구> 편집위원장 3년 업무를 마치고, 올해부터 학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본 칼럼은 2002년에 설립된 로고스경영학회의 논문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또 기독경영연구원(KOCAM)의 축적된 이슈와 한국기독인실업인회(CBMC)의 활동을 포함한 경영사례도 반영할 예정이다. 주요 참고문헌은 리처드 츄닝(Richard Chewning)의 <기업경영과 성경적 원리>, 스콧 레이(Scott B. Rae)와 켄만 웡(Ken Man-Wong)의 <비즈니스 윤리와 지속가능 경영>, 개혁주의학술원의 <칼빈과 사회> 등이 있다. 이 칼럼의 논리는 영리 목적의 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와 가정, 사회 그리고 교회 등 신앙생활의 주체가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양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 경영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함께 칼럼을 출발해 갔으면 한다. *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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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시사칼럼]봄동비빔밥과 라캉의 욕망론
    한동안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 열풍이 불더니 이제는 ‘봄동비빔밥’이 대유행입니다. 최근 썸트렌드(Sometrend)의 빅데이터 집계 결과 지난달 13일부터 한 달 동안 ‘봄동비빔밥’ 언급량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540% 이상 치솟았다고 합니다(세계일보). 구글트렌드 검색 추이에서도 동일한 검색어의 관심도가 한 달 사이에 15에서 100으로 최고치를 찍었답니다(한국경제신문). 검색은 구매를 촉발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가격도 올라 불과 1주 만에 32% 상승했고 전년 대비로는 78% 올랐답니다(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호들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동 대란’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쫀쿠’에 열광하며 ‘두쫀쿠 지도’를 제작하고 ‘두케팅’이란 신조어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가히 ‘두쫀쿠 신드롬’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봄동 기차로 갈아탄 느낌입니다. 어느 전문 매거진은 ‘두쫀쿠→봄동비빔밥’의 갑작스런 환승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했습니다(푸슬레터). 우선 낮은 레시피 장벽입니다. 봄동도 결국 배추인지라 누구에게나 겉절이로 무쳐내는 일이 낯설거나 어렵지가 않고 모양을 꾸미거나 참기름을 제외하면 특별한 첨가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단번에 일반 가정의 식탁을 휘어잡는 장악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두쫀쿠는 점점 가격이 올라 나중에는 한 알이 만원에 육박하는 미친 인플레를 보여주었는데, 봄동은 아무리 올랐다지만 3~4천 원이면 4인 가정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반전의 가성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지도까지 나올 정도로 구매하기 어렵던 두쫀쿠와 달리 인근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접근성 또한 봄동의 돌풍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도 봄동비빔밥을 여러 번 맛있게 먹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둘은 비록 확연히 다른 먹을거리지만 순식간에 국민 음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들 열풍은 일종의 루틴을 따르는데, 일단 셀럽들이 소개하여 화제가 되고 이후 인플루언서들이 가세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요즘 용어로 정의한다면 ‘알고리즘에 의한 따라하기’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경을 인용하면서(요일 2:16)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간주하고, “내게 네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면,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고백록 3권). 그런데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나요? 현대의 욕망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자크 라캉은 욕망의 개념에 관해 ‘전염’(프로이트)이나 ‘모방’(르네 지라르)을 넘어서 아예 ‘주체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동 먹고 싶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서 식욕을 느꼈을 텐데, 그렇다면 타자의 욕망이 나(주체)의 욕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라캉 식의 ‘욕망의 전이’나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첫째, 무기력과 약점이나 죄의식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욕망은 감염역이 강합니다. 집단적으로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릇된 애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혹은 극우나 극좌 같은 편향된 사상에 물들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l'homme désire le désir de l'Autre)는 라캉의 명제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향한 경쟁심과 시기·질투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욕망이 분쟁의 불씨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셋째, 주체의 요구와 타자의 요구가 딱 맞아떨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넷째,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싸르트르가 ‘타자의 눈은 지옥’이라(닫힌 방) 말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전통적 신학은 이런 욕망을 ‘뒤틀린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신의 은총에서 구했습니다. 타인의 욕망은 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타인의 신앙도 결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건강에도 좋은 제철음식인 봄동비빔밥은 맛있게 드시되, 누구에게나 혹은 무엇에게든 나의 정체성을 뺏기지 말고, 특히 자기 신앙을 지키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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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교회건축칼럼]미래 교회공간의 모습
    지금의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의 속도가 너무 급격하여 자고일어나면 세계곳곳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으며 국내의 사정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교회공간은 어떻게 진화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는 것도 교회성장과 복음의 확장성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미래교회공간의 핵심키워드는 하이브리드(Hybrid)와 메타버스(Metaverse)를 지적한다. 물리적인 현실공간과 디지털 가상공간이 합성되어지면 예배는 지금의 영상예배보다 더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메타버스내에서는 신구약이 결합되어지고 세계가 하나의장소로 압축되어지며 시공간을 초월하게 한다. 이런 기술은 다양한 직업군을 만들어내고 성도의 예배환경도 변화시킬것이다. 건물에 모여 집합예배드리는 형식도 있지만 반대로 흩어져서 삶의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흩어지는 교회도 생겨날 수 있으며 카페, 공유오피스 가정과 같은 일상교회가 새로운 형태의 교회로 등장할 수도 있을것이다. 라이프스타일 중심의 신앙이 고착화되어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게되며 이 현상은 팬테믹을 겪으면서 심화되어있다. 미래는 탈권위 세대가 주도적인 계층이 되어지므로 기존의 수직적 구조의교회형태는 사라질 것이다. 일방향적 설교나 성경공부가 쌍방향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 평신도 교역자의 역할과 교회내 전문가들이 더 적극적인 사역자로서 활동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내 나눔과 소통의 공간이 본당비율보다 더 크게 자리잡을 것이며 지역 사회와 연합되어지는 범위도 더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이 변화를 소극적으로 대처할 때 교회고립의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된다. 시대의 다양한 네트워크는 교회가 주일하루 사용되는 지금의 비기능적이고 비효율적인 공간구조는 생존할 수가 없게 된다. 주중 비어있는 공간을 주민과 지역사회의 공간 셰어링으로 바뀌어야한다. 많은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공간을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인식하여 개방에 소극적이다. 이것은 미래시대의 교회에서는 공동화로 직결되어진다. AI와 성도의 신앙은 목회의 주요수단으로 자리잡게되며 교회성장과 복음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너무 익숙치 않은 과제이나 현실은 더 익숙해질 것을 요구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계신다. 이것이 유비쿼터스이다. 유비쿼터스는 편재성, 비가시성 유동성 실시간성을 뜻한다. 어디서든 네트워크가 상존하는 이 개념은 인간과 하나님이 소통하고 하나님의임재를 믿는 성도의 신앙과 맥을 같이하는 개념이다. 기술이 기술로서 파편화되는 이질적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현대 기술이 너무 가까이 와있다.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일어나서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는 것을 현대 기술은 디스토피아로 귀결시키는 개념이라면 성경의 디지털은 생명으로 복귀는 내용이다. 매래 교회공간은 장소성에 한계지움 받지 않고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공간으로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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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목회자칼럼]누구를,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목회자로서 걱정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왜 교계와 교회 공동체에는 비난과 정죄와 다툼과 분열이 많은지? 한동안 우리는 이념과 정치에 대한 개인적 나침반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편을 가르고, 아주 어설픈 백정의 칼날로 서로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정죄했다. 지금도 그 마녀사냥과 같은 정죄와 비난은 멈추지 않고 있다. 교회 밖에서 그리고 불신자들이 가하는 비난과 박해와 비판도 감당하기 힘이 드는데, 힘을 합쳐서 함께 대응하여도 현실의 상황을 타개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비전을 이루기가 버거운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난과 정죄와 분열은 우리에게 더 큰 아픔과 좌절을 가져다준다. 한국 교계와 교단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부산 교계를 둘러보아도, 정죄와 분열과 싸움의 도는 멈출 생각이 없이 오히려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다. 모두가 다 의인이고, 정의의 심판자다. 옛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는데 오늘 우리 교계와 교회의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정죄와 비난의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부흥과 성숙을 위한 흥정은 사라져 간다. 기독 언론들과 미디어에 실리는 뉴스와 교계의 소식 그리고 유튜브에 하루가 멀다 않고 업로드되는 각종의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은 교회와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데 거의, 아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회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교회와 기독교는 결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상이나 공동체로 인식되게 했다. 외부에서 볼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비난과 다툼으로 인해 기독교는 이미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회의 악이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과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존재하는, 일어난, 존재하지 않는, 일어나지도 않는 일들을 추측과 상상으로 혹은 사실에 완벽함을 더하여 더욱 적나라하게 교회의 문제와 고통을 기사화했다.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교회나 교계에 다툼과 분규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거의 불문율처럼 ‘교사모’(교회를 사랑하는 모임)와 ‘교개위’(교회개혁위원회)가 만들어진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의 재물 되기까지 투쟁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악마화한다. 기도와 성경 말씀까지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도구화한다. 서로의 비난으로 말미암아 한쪽은 사탄의 자식이 되고, 한쪽은 마귀의 노예가 된다.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헌신짝처럼 버린다. 악마를 잡기 위해서는 더 큰 악마가 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괴물이라고 정의한 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들 자신은 더 큰 괴물이 되어 간다.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신들은 모른다. 정말 그들이 가진 생각과 행동의 중심이 하나님일까?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감당하는 것일까? 정죄와 비난과 투쟁의 산물로, 믿음이 연약한 어떤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아직 영글지 않은 믿음을 가진 어떤 이들은 아예 예수를 떠난다. 이들의 영혼에 대해 책임지는 투쟁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혼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아버지는 아직도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교회는 만물 위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지체들이라고.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으나 너희 맘대로 뽑지 말고 알곡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참으라고, 한 가지만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접근하고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타종교에는 문제나 비리나 가라지가 없을까? 왜 그들은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노출하지 않고 힘들고 어렵지만, 자정의 노력과 개혁의 일들을 이루어갈까? 왜 그들은 노출된 공간에서 서로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을까? 아마도 서로가 그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인식하거나, 그들이 가진 종교의 아름다움과 이미지를 훼손하고 싶지 않거나, 이미 타락한 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묵인하거나,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그 무엇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행하고 있는 비난과 정죄와 다툼과 분열은 정말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자신이 하나님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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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아우구스티누스와 국가 권력(2)
    어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 출애굽기 32:26-28절에서 이교도나 비신앙적 집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경찰력 사용이 가능하다는 암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는 레위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해한 내용인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본문을 세속 행정관(magistrate)인 모세에 의해 지시된 학살행위로 해석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경찰력 행사를 지지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입장은 후세에 위험한 유산이 되었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에 근거한 경우에’라고 한정하였으나, 후일 이단박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국가권력의 폭력행사의 전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사상은 4세기 카르타고와 그 주변 도시에서 분리주의자들이었던 도나티스트와의 대결에서 형성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향인 누미디아(Numidia)는 도나티스트들의 거점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도나티스트들이 주도적인 집단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는 히포(Hippo)는 기존의 교회인 가톨릭이 도리어 소수 집단이었을 만큼 도나티스트들의 세력이 우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과 대립하였고, 논쟁하게 된다. 도나티스트들은 탄압을 받았고, 탄압받던 자기들이야 말로 의로운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도나티스트들은 박해하는 자가 아니라 박해받는 자라는 점에서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를 계승하는 의로운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난(박해 받음)이 기독교적 의의 표식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과정에서 배태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 ‘강제권 이론’(Compelle intrare), 곧 이단척력에서의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한 것이다. 물론 5세기 당시는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분리된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황제는 신앙의 문제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하고 무엇이 정통신앙인가를 선포하고 이단을 불법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또 이단들에 대한 벌금, 재산몰수, 고문, 사형 등의 형벌 부과가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비 가톨릭(non-Catholics)에 대한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인정한 첫 신학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예수를 대적하던 바울이 예수에 의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듯이(행9:1-9), 이단들에게 매를 아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또 예수를 부인했던 바울이 육체적 징벌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앞을 보게 되었듯이, 이단들도 이런 징벌을 통해 회심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단 징벌에 있어서 경찰력의 동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한 것은 교회의 대적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가권력의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바르지 못한 신앙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영원한 형벌을 받기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 실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이 실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요구하였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이미 411년에 행한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단자들을 산 울타리에서 끌어오고, 가시덤불에서 멀리하게 하라. 그들은 산울타리에 박힌 채 강요당하기를(cogi) 원치 않고, “우리가 원할 때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들어오라고 강요하라”고 말씀하셨다. 밖에서는 강제를 사용하라. 그들이 한번 안에 들어오면 자유가 나타날 것이다(게리 윌스, 187).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강제권이란 마치 억지로라도 학교에 가도록 하는 법은 결국 학교에서 자유롭게 배우게 되어 아동에게 유익을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바른 신앙을 향해 나아가도록 강제될 수(compellerenter)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런 선의에 근거한 주장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단징벌에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후일 가톨릭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제권 사상은 후일 교회사에서 거듭 대두되었고, 이단 척결의 정당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얀 후스를 비롯한 중세교회의 탄압, 16세기 제세례파에 대한 탄압의 근거였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제권 이론은 불행한 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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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6-02-27
  • [교회법특강]장로교회 는 어디서 왔을까?
    지금 장로교회의 교회정치는 어디서 왔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부터 약 500년 전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을 통해 완성되었다. 개신교회의 교회정치는 중세시대 교회(로마천주교회)의 교회정치, 특히 직분론을 배경으로 나왔다. 로마천주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직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감독(주교), 장로(사제), 집사. 주교(감독)는 한 군데 지역에 매이지 않고 지역을 초월한 영적 지도자이다. ‘장로’ 혹은 사제는 원칙적으로 특정 지역에 매인 개신교의 목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신부로 임직한 성직자는 목사처럼 모든 성례를 시행할 수 있으나 해당 교구의 돌봄에는 책임이 없다. 집사는 주교를 보조하는 직분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신부가 되기 위해 거치는 직분이다. 따라서 로마천주교회 교회 조직의 첫째 특징은 아주 ‘계급적’이다. 감독, 사제, 집사 이 세 직분에 근거해서 서열제도(hierarchy)가 발전했다. 주교(감독)는 자기 지역에 있는 모든 사제에게 권한을 행사하고, 대주교는 여러 교구를 관할하며, 교황은 세계교회의 머리가 된다. 둘째 특징은 ‘성직자 중심’이다. 직분자는 모두 성직자다. 따라서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평신도’는 전적으로 이들 성직자에게 매여 있다. 성직자들은 모두 전임 사역자다. 여기서는 평신도 직분자, 일반 교인 중에서 선출된 교회적인 직분을 가진 이가 없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중세교회(로마천주교회)의 성직자 중심, 서열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생긴 개신교회의 지역교회에서는 세 직분자 중에 우선 복음을 설교하는 말씀의 사역자, 설교자, 목사라 불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개신교회의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1526년부터 최초 개신교회의 교회정치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데 특히 독일과 스위스에서 그러했다. 당시 수십 개의 자세한 내용을 갖춘 교회정치가 있었다. 이것들은 종교개혁 이후 첫 10년 기간 교회 생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일과 스위스 대부분 교회는 종교개혁가 루터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군주와 시의회가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역교회들의 교회 생활은 ‘교회위원회’의 손에 있었다. 이 기관은 그 지역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운영위원회 격이었다. ‘교회위원회’는 신학자 소수와 법률가 소수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군주를 대신하여 군주가 관할하는 지역에 있는 교회를 운영하고 법과 규정을 제정하고, 또 항소 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목사 중에 탁월한 목사가 그 지역의 ‘감독’(슈퍼인텐던트)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교회위원회와 지역성직자 사이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슈퍼인텐던트는 보조하는 이들과 함께 모든 교회를 시찰하여 어려운 문제에 답을 주고 또 목사들에게 질서를 요구하는 일을 했다. 또 1-2년마다 그 지역의 성직자, 법률가와 함께 모이는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런데 이들, 독일과 스위스 지역 대부분 개신교회의 교회정치에는 한계가 있었다. 목사 외에는 다른 직분이 세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1540년까지 독일 지역의 교회정치들을 보면 몇몇 교회에 장로와 집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 루터의 영향이 미친 지역에서는 1540년 이후엔 이마저 다 사라진다. 루타는 장로의 명예는 회복했으나 정작 장로를 교회에 세우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들 교회에는 ‘교회위원회’ ‘슈퍼인텐던트’ ‘목사’ ‘집사’(몇몇 지역에만)만 있게 되었다. 교회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장로나 당회가 아니라 슈퍼인텐던트와 접촉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생긴 교회라 할지라도 스위스 일부와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독일 북부 지역의 교회들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교회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음에서 이를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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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특강
    2026-02-27
  • [은혜의말씀]절대적 안정감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 그래서 남을 탓하거나, 밖에서 답을 찾거나, 돌려막기를 해서는 노답이다. 변화무쌍하고 돌발변수가 많고 모든 것이 급변하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도무지 요동치지 않는 안정감이 있는 사람이다. 교통사고가 날 때는 전방주시 태만, 안전거리 미확보, 휴대폰을 본다거나 무엇인가 엉뚱한 데에 혼이 빠져 있을 때 사고가 난다. 애정결핍, 정서불안, 주의산만 할 때는 외로운 늑대가 되고 사회 부적응 환자가 되고 고독사에 이르고 만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청년처럼 덤볐다가는 다치기가 쉽다. 인생은 천천히 평온하게, 서서평해야 된다. 안정감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가? 아기로 태어날 때부터 울지도 않는 천하장사 같은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들은 철이 없고 미숙하나 산전수전 겪어가면서 산수를 배운다. 예수님처럼 키와 지혜가 자라나매 하나님과 사람에게 점점 사랑스러워져 가시더라. 건강한 사람은 편식하지 않고 균형 잡힌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식탐이 없으니 과식하지 않고, 일 욕심이 없으니 과로하지 않고, 성공 욕심을 부리며 과속하지 않는다. 서두르면 사고가 나고, 성급하면 후회하게 되고, 조급하면 실수하기 쉽다. 밸런스, 균형이 건강이고 지혜이고 아름다움이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람이 잘생긴 사람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자기를 돌아보면서 이웃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라.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미덕이 있고,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다. 아굴의 기도에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매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사도바울은 가난한 데나 부한 데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회복탄력성이 남다른 요셉은 허리가 잘 돌아갔다. 적응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지만, 머슴살이를 할 때나 감옥살이를 할 때나 총리로서 대국을 다스릴 때도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형통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이후에 대권을 이어받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하신 말씀대로 행하였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주 말씀이 선포되고 지금은 모세의 때와 같이 언약이 성취되고 지금은 다윗의 때와 같이 예배가 회복되네”라는 찬양의 가사가 있다.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바로 그 사람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평안을 주신다.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잔잔하게 하시고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기이한 복을 주시니 그를 찬송할지로다. 무슨 말을 들어도 상처받지 않고 무슨 일을 당해도 시험 들지 않는 절대 안정감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성경의 구원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오랜 시간 다듬고 만들어 가신다. 그 와중에 별일을 다 겪지만 늘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면 절대로 안 망하고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요동하지 않는 절대 안정감을 누릴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속 실력, 내공은 주님이 다듬으시는 중에 쌓인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며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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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6-02-10
  • [성서연구]그들 중에 있습니까?
    저는 매일 <말씀산책>이란 제목으로 5분 남짓한 영상을 찍습니다. 영락교회 홈페이지에도 있고, 유투브에도 있습니다. 제가 짧은 영상을 찍게 된 것은 코로나19로 교회 문이 닫혀 성도들이 대면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어 느끼는 영적 공허함을 메우는 차원에서 2020년 3월 1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119대작전>, <한친구운동> <오이코스 말씀묵상> 등 제목을 바꿔가면서 계속했습니다. 작년부터는 <말씀산책>이란 이름으로 하루에 성경 한 장씩 진행합니다. 한 장에서 한 구절을 택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례로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찍고 있는데, 현재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시편 중 제4권의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99편에 왔을 때였습니다. 6절 말씀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전에도 이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만,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제사장 중에 있고, 사무엘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 중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 말씀이 제 가슴을 강하게 때렸습니다. 이 말씀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목사들 중에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저는 목사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목사입니다. 서울노회 소속 목사입니다. 영락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서울노회 회의록에 제 이름이 있습니다. 영락교회 주보와 요람 등에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열람하면 거기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저를 목사라 부릅니다. 저는 목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목사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목사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사들 중에 있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1982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 해 말부터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고, 전임전도사, 부목사, 담임목사로 오늘까지 살고 있으니, 사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긴 세월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사역에서 은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사역한 것을 성역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온 세월을 성역이라 부른다면, 저는 사양할 것 같습니다. 아니 사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성역이라 하려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했어야 하는데, 저는 그동안 저를 위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십 년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위해 일한 시간보다 저를 위해 산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도 성공한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저를 위한 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목사가 되도록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 하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영락교회는 신학대학원 3년 동안 장학금과 책값과 기숙사비와 용돈까지 주셨습니다. 많은 성도가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기숙사에서 춥지 않도록 포근한 담요를 사 주신 분도 계십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부족한 저를 많은 성도들이 돕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실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난 네가 이런 목사가 되길 바란 게 아니다. 넌 내가 기대한 사역을 하지도 않았고, 네 됨됨이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넌 내가 사랑하는 목사들 명단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하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목사들 중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참 두렵고 민망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 중에> 계십니까? <그들 중에> 있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하겠습니다. 우리 생애가 끝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들 중에 있길 원합니다. 그들 중에 있기 위해 남은 삶을 더 깊은 믿음으로 바르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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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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