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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꿈엔들 잊힐 리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 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시인 정지용이 쓴 <향수> 가운데 일부입니다. ‘충남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시인이 태어난 생가가 있던 곳인데, 이제는 그 주소명이 ‘충남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시인의 향수는 고즈넉한 이 마을에 고스란히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다닌 휘문고보가 위치했던 서울의 궁궐 서편(원서동)에서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다녔다던 도시샤(同志社)대학이 위치한 교토에서도, 시인은 게으른 듯 지즐대는 고향마을을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살았던가 봅니다. 오랫동안 잊혔던 시인 정지용과 그의 시가 세상 속에 꽃망울 터지듯 툭하고 등장한 때는 1989년입니다. 테너 박인수 씨와 가수 이동원 씨가 60년 이상의 세월을 묻혀 있던 동명의 가곡을 새롭게 편곡해서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가요계는 물론 문학계와 일반 세상까지 발칵 뒤집혔습니다. 클래식을 하는 동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곳은 약간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요 한국 성악계의 얼굴과도 같았던 테너 박인수는 대중가요를 부르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그는 꿋꿋하게 가는 곳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이 노래를 기꺼이 불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클래식과 가요는 물론 국악까지 조화를 이루어, 전통과 현대를 한데 어우르며 전 세계가 극찬하는 한국 음악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출발점에 있던 박인수 씨가 지난 2월 28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수>의 파트너였던 가수 이동원 씨는 그보다 열세 살 아래였으나 지난 2021년 11월 14일 먼저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그토록 자주 불렀던 노래의 배경과 너무나 흡사한 지리산 자락 한 마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향수에서 이동원 씨가 담당했던 파트의 노랫말들입니다. 그는 1951년 전쟁통에 부산의 전포동, 유난히 별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달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학교는 서울에 있는 보성고보를 다녔지만 그 역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릴 적 도란도란 살았던 동네가 일평생 눈에 선하지 않았을까요?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옛 마을의 호젓한 굽이길 혹은 도시의 하늘 아래 어느 골목길 또는 낯선 땅을 가로지르는 강가에서 머물렀던 하숙방 어쩌면 달도 별도 곱기만 하던 동네 그 비슷한 어디쯤의 기억을 우리는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돈도 벌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건너간 일본 땅 나고야(名古屋, なごや)에서 종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녹슨 군용기를 닦고 페인트칠을 하는 중노동을 감당하며 하릴없이 눈물짓던 열네 살 양금덕 소녀에게도 고향 마을 정든 집 그리운 부모형제가 꿈엔들 잊힐 리 있었을까요? 지난 삼십 년 동안 싸우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양관순’이라 불리는 올해 나이 아흔 다섯의 이 할머니를 포함해서 생존하는 몇 분 되지 않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탄식과 한숨과 절망의 시간들을 어찌 돈으로 환산해서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남화태도(사할린 남부)로 끌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채 죽는 날까지 ‘전남 나주군 세지면 오봉리’ 그 따뜻한 이름 속에 남겨두었던 아내와 갓난아기를 그리워하며 살았었을 김오남 씨 같은 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지용과 박인수와 이동원은 이제 다 떠나고 그 아련한 노래만이 남았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떠난 사람들, 지금도 향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도 이 노래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신령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영원한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간 이들이 먼저 가 기다리는 그곳,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문득 한 발 더 가까운 곳으로 느껴지는 그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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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은혜의말씀] 부활의 증인(눅 24:1-12)
    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기뻐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여인들이 전해주는 부활의 소식을 믿지를 않습니다. 부활만 안 믿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원래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 제자들이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난 것입니다. 부활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삶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 삶에 위대한 목표가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람들을 살려내라고 주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제자들의 삶에 분명한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목표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숨이 넘어가는 순간 내딛는 한 발자국은 한 사람은 천국이고, 한 사람은 지옥이고, 천지차이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기만 하면 그 운명의 한 발자국은 극복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옮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러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 간절한 소원을 안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것은 단순히 크리스천의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갖가지 문제로 영과 육신이 부서져서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그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둘째, 삶에 놀라운 능력이 생겼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만 하면 필요한 능력은 얼마든지 공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다가 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가 뭐라고 하지요?(행 3:6)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는 곳에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부활의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며 사십시오! 오늘 이 특별한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위에 계신 만왕의 왕 되신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골짜기에서 부활의 주님이 주신 능력을 붙드는 자는, 담대하게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함으로 기쁨과 감사와 기적이 있는 여러분의 삶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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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교회와세금] 교회와 세금 칼럼, 최종 마무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부활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산 소망이다. 교회 재정과 세금에 관한 실무를 돕기 위해 그동안 10회에 걸쳐 칼럼을 연재해 왔다. 또 오늘이 그 마지막회이다. 교회가 납부해야 할 세금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실무자로서 주의 깊게 보아할 점이 무엇일까? 우리나라 세법은 국세(14개)와 지방세(11개)로 총 25개 세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동안의 내용을 총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득세와 법인세는 일정 과세기간 발생한 소득에 대해 납부하는 세금으로, 현행세법은 예배 중 성도들이 낸 헌금이나 헌물에 대해서는 부과하지 않는다. 단 이 경우 교회는 국세기본법(제13조)에 따라 설립시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고유번호등록증을 교부받아야 하며, 교회가 고유목적을 넘어 수익사업을 할 경우 법인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둘째, 부가가치세(VAT)는 재화나 용역이 생산・제공되는 단계에서 창출된 부가가치에 대해 부과하는 소비과세로서, 그 거래액의 10%를 납부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비영리법인으로 고유목적을 위해 재화를 취득한 경우 매입세액의 부가가치세를 납부해야 하며, 공급 매출세액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됨으로 환급이 적용되지 않는다. 셋째, 취득세는 자산을 매매 교환 증여 등으로 취득한 경우 납부하는 지방세로, 표준세율이 주택은 1~3%, 주택외부동산은 2.3~4%, 기타 2~7%이다. 그리고 교회는 고유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토지와 건물부동산 등은 취득세가 면제된다. 단 이 경우에도 해당자산은 3년 이상 고유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하며, 만약 다른 용도로 사용을 변경하는 경우 소급하여 취득세가 부과될 수 있다. 넷째, 종합부동산세는 주택 및 토지 등 부동산의 공시가격의 합계액이 일정기준을 초과하는 경우 부과하는 세금으로, 교회가 소유하는 예배당과 담임목사 주택은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면제된다. 그리고 부목사 사택과 선교관은 교회 재산으로 간주되어 재산세와 같은 개념으로 종합부동산세의 납부가 요구될 수 있으나, 종부세법 8조2항2호, 시행령4조에 따르면 사원용주택(국민주택규모이하 또는 공시가격 3억원이하)은 종합부동산 합산에서 제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다섯째, 재산세는 토지, 건축물, 주택 등 부동산 등의 소유에 대해 부과하는 지방세로서, 취득세 및 법인세와 동일하게 고유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보유하는 경우 면세가 된다. 단 사택의 경우 담임목사가 거주하는 사택(1건)은 재산세가 면세되나, 기타 부목사 등의 사택은 과세 대상이 되고, 교회 사찰 관리인이 부속 건물에서 관리를 위해 거주하는 경우도 고유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 재산세가 부과될 수 있다. 여섯째, 자동차세는 자동차의 소유와 주행에 대해 과세하는 지방세로서, 교회가 차량을 구입하면 취득세와 등록세, 부가가치세를 납부한다. 또 소유 운행시에는 자동차세와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마지막 일곱째는 종교인소득 과세로,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종사자의 소득에 대해 기타소득과 근로소득 중 선택하여 세금을 납부하고, 원천징수와 연말정산을 적용하는 제도이다. 종교인소득이 전산화되며, 교회 목회자도 소득이 적은 경우 근로·자녀장려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4대보험(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도 보다 투명하게 적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한 선한 행실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충전소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세금 또한 국가적 질서를 존중하여 모범이 되어 납부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국가는 교회 고유의 목적활동에 대해 지금까지 그 공익적 기능을 인정하여 왔듯이, 앞으로도 순기능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신앙의 자유와 활동을 존중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를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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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목회자칼럼] 밀알의 부활
    예수님의 모습은 한 알의 밀알과 비슷하다. 한 톨의 밀알은 별 것 아니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싹이 나고 자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되었다. 농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고 마침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하였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겨자씨 한 톨은 작고 볼품없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닮았다. 씨앗이 소중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이지만 그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겨우내 북풍한설을 맞아도, 앙상한 모습으로 버티고, 봄철이 오고 밭에 갖다 심은 씨앗은 마침내 발아하고, 잎이 나고, 자라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지옥이 죄의 값인 죽음의 종착지라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생명의 결과이다. 도적, 사탄, 마귀, 귀신은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풍성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생명운동, 살리는 운동을 해야 된다. 죽은 것을 관리하는 사역이 아니라 역동적인 새 생명의 사역을 해야 된다. 죽은 물고기는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폭포수를 역류해서 치고 올라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이다. 씨앗은 간수하고 보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씨앗이 그대로 있으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까워도 끝까지 보관하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흩어서 뿌리고 심어야 된다. 봄철이 다가왔다. 씨를 뿌리는 계절이다.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씨를 뿌리면 어느 것이 더 잘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파종해야 된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파종할 때를 놓치면 1년 농사가 곤란하다. 씨를 뿌리는 자는 너무 편하게 농사 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된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 씨를 뿌리는 자의 컨디션이 좋지 않고, 환경이 좋지 않아도,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뿌리면 마침내 기쁨으로 추수할 때가 온다. 고난주간이 지나야 부활주일이 온다. 춥고 지리한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바람이 불어오고 봄 눈 녹듯이 겨우내 얼어 있던 것이 녹아 내리고 만물이 약동하며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게 된다. 아침이 되면 긴 밤의 어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혹독한 추위도 훈풍이 봄바람으로 불어오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새싹은 비록 여리고 약하지만 단단한 대지를 뚫고 싹을 낸다. 신앙생활은 춘하추동을 지나는 농사와 비슷하다. 농사는 사시사철 할 일이 따로 있다. 한 겨울에는 추위를 견뎌내야 되고 봄철에는 부지런히 씨를 뿌려야 된다. 한 여름이 오면 태풍이 오고, 기근이 오고, 홍수가 나고, 땡볕이 쏟아져도 농부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적극, 담대, 낭만, 진취, 발전, 소망을 가지고 나선다. 심는 이가 있고 물주는 이가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생사화복,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농부는 성장 본능을 믿고 씨를 뿌린다. 아기가 태어나면 자라고, 식물을 심어놓으면 반드시 성장한다. 씨앗은 작지만, 추수의 풍성함을 바라보고 씨를 심는다. 춘하추동을 지나며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을 맞지만 강인한 생명력과 승부근성을 가지고 마침내 결실한다. 아주 작고 초라한 씨앗이지만,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다. 울창한 숲도 한 톨의 씨앗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씨앗을 심어서 큰 숲을 만드는 운동을 해야 된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는 연한 순과 같았지만, 생명의 본체시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이 되셨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을 때에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대에 희생과 섬김의 리더십이 선한영향력을 미친다. 그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체휼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죄악으로 죽을 우리를 살리시고 천국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가 떨어짐으로 우리가 올라가고, 그가 썩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저 낮은 곳을 향하여 긍휼사역을 펼쳐야 된다. 잡초 근성을 가진 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자란다. 풀뿌리 사역은 미세한 뿌리들이 사방으로 뿌리를 뻗어서 수분을 빨아들이고 박토에서도 생존을 한다. 묵은 땅을 기경하여 옥토를 만들어 좋은 땅에 알곡을 심어서 가라지를 신경 쓰지 말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나의 마음 밭을 잘 가꾸어서 주인 닮은 정원을 만들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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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한국 기독교와 공산주의
    최근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 중인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북한 공작금 수수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모 목사와 10여 차례 통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목사는 북한공작원 리광진과 접촉했는데, 2015년 4월 쿠알라룸프르에서 미화 1만8900달러의 공작금을 받았고, 또 다른 목사와 함께 북한 공작원과 회합, 통신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한 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12월 기소되어 2017년 징역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앞의 모 목사는 북한 공작금 관련 기소가 늦어져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3. 1. 25). 이런 친북 공산주의자는 한국교회에서 여러 차례 출몰한 일이 있다. 조선 공산당은 1918년 6월 25일 러시아의 하바로프스코에서 조직되었고, 1819년 4월 25일에는 해삼위(海參崴)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는데, 그 책임자가 이동휘(李東輝, 1873-1935)였는데,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였고 감리교회 전도사였다. 그때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해삼위라고 불렀다. 1917년 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해삼위로 건너간 그는 볼셰비키에 가담한 전력이 있고, 7월 초에는 ‘독일 제국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케렌스키 임시정부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된 일도 있다. 1919년 8월 말 중국 상해로 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는데,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충돌했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김구에게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김구는 이를 제3국가에 의탁하는 것으로 보아 거절했다고 한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코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렸는데,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大會)라고도 불리는 이 회의는 코민테른 국제회의였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된 회의였다. 이 회의에 한국인으로는 김규식, 김단야, 나용균, 박헌영, 여운형, 이동휘, 임원근 등이 참석했는데, 김규식과 여운형(1886-1947)은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교인이었고, 여운형은 승동교회 출신이었다. 특히 여운형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고, 1911년부터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한 일도 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기독교신앙과 무신론 공산주의가 어떻게 병립할 수 있을까? 양자 중 어느 하나에 철wj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일성(金日成)과 김일성의 가계가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은 서북지방에서 이름난 장로교장로인 강돈욱의 사위였고, 장인의 도움으로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기독교신자였다. 그가 자식들에게도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을 것이다. 강돈욱은 평양의 하리교회가 1905년 설립한 창덕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김일성이 창덕학교에서 2년 간 수학 할 때 손자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姜盤石, 1892-1932)은 칠곡교회에 출석하며 성장한 교회의 장로의 딸이었고, 오빠 강진석은 장로교 목사였다. 김일성을 도와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당 당수, 그리고 기독교회를 탄압했던 어용조직 ‘기독교도연맹’ 위원장을 지낸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의 6촌이었다. 강양욱은 후(後)평양신학교 3회로 1943년 신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은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했고 만주에서는 감리교 손정도(孫貞道, 1882-1931) 목사의 북산교회에 출석하며 손정도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막역한 사이였다. 손정도 목사가 선교사 신분으로 길림에서 일할 때 김일성은 2년 여 동안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김일성이 투옥되었을 때는 손정도 목사가 뇌물을 제공하고 김일성을 출옥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유언(流言)의 사실 여부는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 일정 기간 적을 두었던 것은 분명하다. 북한측 기록에 의하면, 손정도 목사의 예배당은 김일성의 공산주의 교육의 전용 집회소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회고록(1992)에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와 3년간 교류했고, 자식처럼 보살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멸절시킨 희대의 독재자가 되었다. 김일성은 1929년 17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기독교적 가정 배경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1925년 서울 소공동의 아서원(雅敍園)이라는 중국식당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고, 1926년 5월 길림성 영고탑(寧古塔)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문을 열면서 만주 한인사회에 공산혁명의 기운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퍼져 나갔고 곧 국내에도 공산주의 운동이 서서히 지경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도 가담하게 된다. 그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알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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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3-04-05
  • [소강석칼럼] 바보가 될 바에는 더 큰 바보가 되라
    류시화 시인이 쓴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밀림 속에서 모든 동물들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당나귀가 풀의 색깔을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당나귀가 자기 혼자 “풀이 파란색”이라고 소근 거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예 모든 동물들 앞에서 풀의 색깔이 파란색이라고 소리쳐 대는 것입니다. 이때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풀은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더 소리를 높였습니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니까!” 그러자 동물들이 덩달아 편 가르기를 하였습니다. ‘초록색파’와 ‘파란색파’로, 혹은 호랑이파와 당나귀파로 나뉜 것이죠. 호랑이는 포식동물의 왕답게 으르렁대기 시작했고 당나귀는 분수를 모르고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니까!” 누군가의 중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밀림의 왕 사자를 초청하여 판결을 부탁하자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도 동의를 하였습니다. 왜냐면 사자는 고양이과 동물로서 당연히 자기편이 되어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당나귀의 주장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주장도 잘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사자는 당나귀의 말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말이죠. 판결 후에 호랑이가 사자에게 으르렁대며 “왜 그따위 판결을 하느냐”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너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오판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른발로 사자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자가 지혜롭게 말을 했습니다. “어이, 호랑이.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숲의 제왕이 되어가지고 저 하찮은 당나귀와 논쟁을 벌이다니. 논쟁을 벌이려면 적어도 자네보다 훨씬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해하지. 자네는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을 했어. 이미 호랑이다움을 잃어버렸고 소중한 시간과 기운을 낭비한 채 오히려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네...” 저도 어릴 때부터 우김질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한번 우기면 그것이 잘못된 주장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우김질을 했던 기질이 있었습니다. 개척교회 때는 물론, 중형교회가 되었을 때도 스티븐 코비의 주장대로 “언제나 주도적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 주도적 의미를 아전인수격으로 생각을 했던 면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제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연합사역과 공적사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좋은 일을 하면서도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공교회를 위하여 옳은 일을 하면서도 불필요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안에 있는 호랑이 본성이 발동하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가 극심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방역 당국과 예배 퍼센티지를 협상하는 것을 신사참배로 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든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목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며 격려비를 지원하는 것을 두고 차마 입에 담기에도 창피스러운 프레임으로 공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제 안에 있는 호랑이의 입을 다물도록 하였습니다. 제 스스로 말을 했죠. “기왕 바보가 될 바에야 더 큰 바보가 되자. 그리고 논쟁을 하려면 너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능력 있고, 지혜 있는 현자와 하자.” 어떻게 풀이 파란색이란 말입니까? 당나귀의 주장은 말도 안 되죠. 풀은 당연히 초록색이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호랑이답게 놀아야 했습니다. 당나귀와 논쟁을 하는 그 순간부터 호랑이는 호랑이의 자존심과 체면을 구겨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격을 받을 때 많은 분들이 저를 충동질 하였습니다. “소 목사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나서서 대리 고발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안의 호랑이가 으르렁대려고 했습니다. 아니, 제가 나서서 법적조치를 하면 당연히 실형을 받게 할 수 있죠. 그러나 저는 저 다움과 한국교회 진정한 리더 다움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보다 훨씬 능력이 있고 지식이 넘치는 현자들을 찾아 토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분들의 글을 읽고, 그런 분들과 만나 말씀을 듣고 때로는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만이 걸어가는 바보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제 앞에 골드오션(Gold Ocean)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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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성서연구] 거룩한 3D 업종
    흔히 <3D 업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터넷의 설명을 참조하면 3D란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으로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을 의미한다고 되어있습니다. EBS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극한직업이 바로 이 3D 업종을 다루는 프로그램이지요. 교회에서의 3D 업종은 무엇일까요? 교회 안의 여러 봉사 중에도 사람들이 회피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새벽의 주차 봉사, 주방 봉사, 청소 봉사 등이 여기 해당할 것입니다. 요즘엔 전도사와 목사 직분이 3D 업종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신학대학교 입학생이 급감하고 있습니다. 모 교단은 신학대학원 정원이 100명인데, 50명만 입학했고, 그중에는 안수를 받지 못하는 여성이 20명이라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2030년에는 교회수보다 목회자 수가 적어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또 신학교에 다니는 이들 중에는 교회에서 교사나 교육전도사 사역을 하지 않는 이가 많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르바이트가 더 소득이 많고, 교회학교 부장이나 교사들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제게 배운 사람이 목회를 중단하고 다른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시달리기 싫어서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회가 쉽지 않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명까지 저버린 채로 편하려고 하니, 정말 걱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3D 업종인 셈입니다. 걱정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최근 들어 교회마다 항존 직분을 맡으려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맡아 달라고 따라 다녀야 할 판입니다. 이 모두가 편하게 믿으려는 생각이지요. 힘든 것을 피하고 편하게 살려는 마음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낳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의 우려되는 경향과 일맥상통합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편안하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삶의 열매는 힘든 일을 할 때 얻어집니다. 오히려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에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3D 업종 중 하나는 <엄마> 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근무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몇 달, 몇 년만 하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해야 합니다. 자녀를 결혼시킨 후에도 마치 애프터 서비스를 하듯이, 자녀의 삶을 돌보고, 손주를 봐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다지 대접받지도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이 땅의 무수한 엄마들이 늙은 어머니가 되시기까지 최선을 다하셨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가정이 유지되고, 사회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세상에서 최악의 3D 업종은 <메시아 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이 직분을 맡기셔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메시아 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추하고, 가장 위험한 직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으셨고, 미움 당하셨으며, 마지막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D 업종인 메시아 직을 감당하신 덕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고 이중표 목사님께서 교회 계단을 내려가시는데, 청소를 맡은 여집사님이 계단에 앉아 목사님이 뒤에서 듣는 줄도 모른 채 팔자타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집사님을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님, 계단 청소는 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섬김이요, 이 계단으로 예수님이 오르내리신다고 생각하면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집사님은 귀한 일을 맡으셨어요> 그 후 이분은 생각을 바꾸어 기쁨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본문 2절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사명을 다합시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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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시사칼럼] 흐르는 강물처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데리고 철새도래지로 유명했던 을숙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도 없을 때여서 택시를 타고 갔는데 도착해보니 참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아내가 무척 실망하는 바람에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원인이 되었을 낙동강 하구언 수문을 작년 이맘 때 35년 만에 상시 개방하기로 했고, 이제 일 년의 시간이 흘러 생태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유역본부 부산권지사가 22일 공개한 지난 1년간 생태 모니터링 결과를 보면 일단 하굿둑 상류의 회유(回遊)성 어류 분포 범위가 확대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연어는 무려 70km 이상 강을 거슬러 올라가 창녕함안보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부산일보 2. 22). 어찌 물고기뿐이겠습니까? 막혔던 강물이 바다를 만나고 바다는 잠시라도 강물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둘은 또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이제 신혼부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철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재첩과 장어니 농어가 돌아오고 생태계가 다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물은 참으로 신비한 피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기야 창조주께서 만드신 것들 중에 경이롭지 않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겠습니까마는, 물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고 특별합니다. 그 특별함을 눈치 챈 사람들이 일찍부터 물을 논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가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 주장하면서 서양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도 바로 이 ‘물’을 묘사하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상선약수’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그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물이라도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막히면 악이 되는 이치를 우리는 배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1992년 개봉되어 명배우 브래드 피트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만, 지금까지도 이 영화가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낚시를 소재로 찍은 그 아름다운 강물과 자연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의미 때문입니다. 극중 아버지 맥클레인은 목사입니다. 하지만 두 아들 노만과 폴은 개성도 다르고 인생의 여정도 달라집니다. 안정적인 큰 아들과 달리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던 폴은 잠시 막혀버린 물처럼 방황하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아들 장례식에서 아버지 목사님의 말씀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요.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한 순간, 도우려 하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고 하는 것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쓸쓸함과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기억들을 하나로 합쳐서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의 메시지를 두 차례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한 번은 사마리아 우물 가 여인을 통해서인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었고, 또 한 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물은 타는 목마름을 잠시 해갈하는 그런 정도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물은 변질되거나 부패하는 그런 종류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결코 고이거나 막히는 법 없이 그를 믿는 자를 뚫고서 흘러내려, 언제나 땅을 좋게 하고 더러움을 씻어 내리고 모든 것을 이롭게 하지만 결코 다투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의 물이요 생명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존재들이 명멸합니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일들이 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심령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면, 모든 것은 결국 그 안에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막혀버렸을지도 모르는 우리 안의 물줄기 혹은 사람들 사이의 수로가 주 안에서 시원하게 뚫리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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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은혜의말씀] 광야에서 배우는 교훈(신 8:2-3)
    광야는 나지막한 언덕들이 끝없이 펼쳐진 ‘빈들’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참 조용한 곳입니다. 가끔 바람 소리, 새 소리 들이 간간이 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광야에 기가 막힌, 축복의 비밀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고 하는데, 미(어떤 장소, 곳), 다바르(말씀)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과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한 빈들에서,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장소’입니다.(신 8:16)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겸손함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2절)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광야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선택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붙들게 되는 ‘훈련의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주장과 내 생각은 내려놓음으로 겸손하게 되고,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이 광야를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부서지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이 꼭 붙들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신뢰 입니다. 광야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걷게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광야를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뭐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너무나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고독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득한 은혜의 장소로 고백하게 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임을 알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3절) 광야는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과만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서면, 우리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해 집니다. 우리는 떡을 먹야 사는 줄 압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줄 압니다. 힘이 있어야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싶으셔서 그러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시려고 광야를 걷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광야의 조용한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시 46:10) 그러므로, 이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장소였고,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와 같은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마 4: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으로 살아 갑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광야의 고요함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광야의 축복을 누리시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 말씀의 생명의 물을 흘려 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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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3
    처음 기독신문에 글을 올릴 때가 작년 사순절 기간이었는데 한해가 흘러 다시 사순절 기간을 맞았다. 시간은 참으로 무정하게 지나간다.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매년 맞이하면서도 늘 올해는 좀 더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참 의미를 곱씹으며 다시금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원한다. 나를 전부라도 태워 님의 시린 손 녹여 줄 따스한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움으로 충혈된 눈 파랗게 비비며 님의 추운 겨울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님께서 걸어가실 가파른 길 위에 누워, 눈보다 더 하얀 사랑이 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시카고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읽은 ‘연탄길’이라는 책머리에 걸려있었던 시이다. 그냥 읽으면 느껴지는 것이기에 부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거 같다. 시어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 그저 뭉클함이 가슴 저편으로부터 미어저 옴을 느낀다.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노래해 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원의 주로 오신 주의 뜻이 실천되는 사순절이자 올 한해가 되기를 말이다. 찬양대 연습을 하면서 가끔 하는 이야기인데 신앙적으로 우리는 크게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그래서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고 때론 자격지심이 되어 자신을 괴롭게 할 때가 왕왕 있는 것 같다. 주변 가까이에서 또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고, 진심으로 격려하고 나누기를 즐거워한다면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우리의 공동체들이 이러한 마음들을 모으고 묶어서 주께 드린다면 이것이 진정한 예배요 찬양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시간들이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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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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