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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개천용 성탄절
    2022년 대학수능시험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관한 논란에 관한 법원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수험생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대상으로 제기한 정답결정취소소송에서 법원은 원고승소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평가원은 해당 문항을 ‘정답 없음’으로 정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험생 일부가 동 문제를 직접 번역해서 세계적인 권위자에게 보냈고, 이 분야의 석학 중 한 사람인 스탠포드 대학의 조나단 프리처드(Jonathan Pritchard) 교수가 이에 반응하여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문구를 남겨서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단유전학, 대학입학시험, 수학적 역설(paradox), 법원의 가처분명령.. 이 문제가 우리 과학자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웠다.. 고등학교 시험에서 이렇게 어려운(hard) 문제가 출제된다는 점이 매우 놀랍고 인상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토록 범세계적으로 똑똑해졌나 싶어서 뿌듯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대학교수마저 고개를 흔들 정도의 문제가 도대체 왜 대입시험에 나오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알고 보니 해당 과목은 의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선택하기 때문에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그처럼 터무니없이 어려운 문제들이 곧잘 출제되곤 한답니다. 하지만 다른 과목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인기 동영상 가운데 ‘한국 수능영어 풀어보기’라는 계정을 찾아보십시오. 영국인이나 미국인 학생들은 물론 성인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들마저 쩔쩔매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문의 수준이 높아지는 일은 대단히 고무적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정과 형평’은 어느 정도 지켜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서는 집중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은 물론 고교 교과 내용을 넘어서는 수준의 학습을 어느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최근 공개된 한국장학재단 자료에 따르면 전국 39개교 의대 신입생 중 80.6%가 국가장학금 수혜대상에서 제외되는 소득 상위 20%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로스쿨’로 알려진 법학전문대학원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말합니다. “개천에서 나는 용(개천용)은 이제 없다!” 바야흐로 대선이라고 하는 광풍이 휘몰아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개천용”이 뜨거운 화두(話頭)가 되었습니다. 야권의 대통령 후보 선거전에 나왔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서민 자제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게 스펙사회를 실력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로스쿨, 의학전문대학원, 국립외교원 등 음서제도를 폐지하고 사법시험 등 고시도 부활시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당사자 자신이 바로 전형적인 “개천용”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과감한 선언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는 현재 여당 대통령 후보도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합니다. 안동 화전민 가정 출신인 그는 ‘흙수저 비주류’를 자칭하며 더 많은 “개천용”들이 우리 사회에서 배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각에서는 “개천용”을 ‘철 지난 감성팔이’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타당한 측면이 있는 지적입니다. 국민의 대표는 철저하게 비전과 정책 위주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개천용처럼 이 땅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도 마땅히 주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규모 있는 교회일수록 개천용 출신을 지도자로 받들 수는 없을까요? 보잘 것 없는 개천들만 골라가며 살펴서 그곳으로부터 숱한 인재들을 키워내는 일에 전력을 쏟을 수는 없는 걸까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가 되고 높은 줄 알았던 자는 낮은 자임을 퍼뜩 깨닫는 그런 교회들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권정생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니다. 벌써 기독교는 망해버렸고 죽어버렸다. 지금 우리가 거대하게 지어놓고 모이고 있는 교회는 망한 교회, 죽은 교회다. 오직 물질과 현실의 성공만이 있는 썩은 교회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요즘 교회는 주가로 치면 바닥을 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낮아지지 못하니 주께서 강제적으로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다시 비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와 함께 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낮은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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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목회자칼럼] 행복한 성도
    주께로부터 부름 받고, 사랑받고, 쓰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가 소명자, 은총자, 사명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시대가 요청하고 내면의 절규가 있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 선뜻 응답하는 자는 존귀하게 쓰임 받는다. 바울의 옥중 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성도의 특징은 기쁨이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천재도 이길 수가 없다. 믿음이 역사하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의 수고가 많은 사람은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 아이돌 그룹에서는 센터가 중요한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 신앙생활의 쓰리 센터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삼겹줄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온몸이 강건한 것이 삼중축복이다. 별세하신 조용기목사는 폐병, 심장병 등으로 6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지만 성경 속에서 3중 축복, 4차원의 영성, 5중 복음, 7대 사역을 발견하고 체계화 시켜서 세계적인 사역을 일으켰다. 모든 것의 시작은 소명감에서부터이다. 내가 설치는 것은 별 영향력이 없지만 주께서 부르실 때는 역사가 달라진다.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일은 곧 사그라지고 말지만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일은 반드시 승리하고, 반드시 복을 받는다. 주께서는 지구촌 70억 인구 중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 나를 부르신다. 펭귄 무리가 많고 생긴 것이 비슷하지만 어미와 새끼는 그 부르짖는 소리로 서로를 알아본다. 주께서 나를 부르시고 부탁하신 일, 콜링이 천직이고, 직업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할 때에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불러서 사명을 주셨다.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가 이스라엘의 사울왕, 다윗왕을 기름 부어 세웠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치유와 회복이 되었다. 큰 잔치 입구에서 초청자 명단을 확인하는데 내 이름이 없다면 얼마냐 부끄럽겠는가. 천국 입구에 섰을 때 그 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된다.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더디 믿는 종은 한 데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이사야는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가? 하나님의 본심을 알겠는가? 주님의 부르심에 누가 선뜻 대답할 것인가? 차든지 뜨겁든지 반응하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내가 열심히 할 때는 금방 한계가 온다. 주께서 부탁하실 때는 감당할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돕는 자도 붙여주신다. 세상의 부름과 허망한 인기에 현혹되지 마라. 허무한 것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마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 사탄의 미끼이다. 하늘의 소리를 경청하라. 지혜는 경청에서 온다.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 노래 실력은 청음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경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듣는 귀가 발달되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을 조석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할 때에 그 소리를 유달리 민감하게 들은 사람은 다윗뿐이었다. 소명자가 사명자가 된다. 주께서는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나를 부르신다. 내가 시작한 일은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주께서 부르시고, 주께서 부탁하신 일은 아파도 해야 되고, 싫어도 해야 되고, 힘들어도 해야 된다. 소명자가 수명자다. 주의 일을 할 동안에는 망할 틈도, 죽을 틈도 없다. 거침없이 담대하게 나아간다. 일을 하는 중에 일 머리가 생기고, 일을 하는 중에 깨닫게 된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가속도가 붙고, 탄력성이 생긴다. 은혜위에 은혜, 빈익빈 부익부가 나타난다. 사명자는 필드, 현장에 서면 설레임이 생긴다. 주께 부름 받은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는 자가 아니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사명은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이고, 사랑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다가 죽어도 좋다’이다. 어릴때부터 사명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가 않는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고인 물은 썩는다. 주께서 주신 축복을 흘려 보내는 자가 축복의 통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서 천당에 끌고 가서 알바 시키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해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구별 되이 부르셨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이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받고 산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에 세상의 짝퉁 사랑을 버리고 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소명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이고,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고, 은총 받는 귀염둥이, 예쁜 둥이 우리자기이다. 나는 소명자인가? 나는 사랑받는 자인가? 나는 쓰임 받는 자인가? 나는 사명자인가? 나는 행복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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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아동복리회(CCF)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 이하 CCF)는 ‘중화아동기금’(China Children's Fund) 라는 이름으로 1938년 10월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비분파적 비영리 구호단체로 시작되었다. 클라크(J. Calvitt Clarke)라는 장로교 목회자와 나글 (Dr Nagle)이라는 중국 출신 감리교 선교사가 한 이발소에서 대화하던 중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국 난민들과 중국의 굶주린 아이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클라크 목사는 중국 아동들을 위한 기금을 모우는 재단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 일이 결실을 맺어 1938년 10월 6일 ‘중화아동기금’이라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CCF의 시작이었다. 1939년 12월 27일에는 모금한 기금 중 1만3천 달러를 중국 광동지역 고아들과 링난대학에 보냈고, 1940년 8월 21일에는 다시 1천 달러를 중국아동복지위원회에 보냈다. 이 구호사업이 확장되어 1941년에는 중국의 29개 고아원을, 1944년에는 중국의 45개 고아원을 도왔는데 이 해에만 26만3천 달러를 후원했다고 한다. 1946년 6월과 7월 클라크 목사는 밀스 목사(Verent Russell Mills)와 함께 중국을 방문하고 21개 고아원을 둘러보면서 중국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클라크는 중국 특히 광동지역 고아들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펼쳤으나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되고 중국의 반기독교 정책 때문에 1950년 9월 말 이후로는 중국의 고아들을 더 이상 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46개 고아원과 고아원에 수용된 5천여 명의 아동들, 그리고 2백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아동구호단체 명칭도 동일한 영어 이니셜을 사용하여 1951년 2월 6일자로 기독교아동복리회(CCF)로 변경되었다. 그 후 CCF는 홍콩, 대만, 마카오에 새로운 시설을 설립하고 구호 사업을 계속하였고, 이 사역은 말레시아, 미얀마, 인도 필리핀으로 확대되는데, 한국에서의 사역은 1948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아동복리회’라고 해서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도움을 베푼 것은 아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구별 없고, 종교나 국적 인종적 차별 없이 도움을 베풀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2002년 6월에는 여러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는 아동후원단체가 국제적인 연락망(network)을 구성하였고, 2009년 7월 1일에는 기독교아동복리회는 국제어린이재단(Child Fund International)로 개칭되어 오늘이 이르고 있다. 당시 31개 국가에서 1,300만명 이상의 어린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그렇다면 CCF는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사역하게 되었을까? CCF해외사업본부 홍콩사무소 책임자였던 밀즈 목사는 1948년 10월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3개 고아원, 곧 서울의 구세군 후생원, 구세군 혜천원, 그리고 절제소녀관(후에 연세사회복지관으로 개칭되었다)을 돕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CCF의 한국에서의 사역의 시작이었다. 이들 세 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은 약 400여명에 달했다. 곧 이어 구세군 후생학원과 안양기독보육원을 후원하였는데 이들 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은 대부분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월남한 사람들의 자녀이거나 월남하던 중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안양기독보육원은 오긍선 박사가 운영하던 아동보호시설이었다. 오긍선 박사는 한국인 처음으로 경성보육원을 설립했는데, 1930년대 안양시 만안구 안양2동으로 옮기면서 안양기독보육원으로 개칭한 아동보호시설이었다. 밀즈는 CCF의 초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중일전쟁(1937. 7. 7- 1945. 9. 3) 당시 죽어가던 수많은 어린이들의 실상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하게 위해 노력하여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바로 그의 노력으로 한국에서도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클라크, 버본 켐프(Verbon E. Kemp)에 이어 1970년 CCF의 제3대 총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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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12-17
  • [은혜의말씀] 근심을 이기는 비결(3)-성령님 (요 14:16-18)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말씀하십니다. (요 16:7)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면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성령께서 제자들의 근심이 깊어질 때 예수님이 해주신 것처럼 그들과 함께 해주시고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성령님을 말하지만 성령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1)성령님을 하나님께 속한 하나의 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을 능력이나 힘, 기적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은 그동안 없다가 오순절날 이 땅에 임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고전 12:3)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내 속에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왜 근심을 이기는 비결입니까? 1.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6, 17, 18절)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인데, 그 뜻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오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돕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내주’라고 합니다. 나아가 성경은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고전 3:16) 또, 한번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령의 내주로 구원받은 백성은, 천국 가는 순간까지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17, 26절)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세상에 오시는 이유에 대해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바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2)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가능합니다. 성도 여러분, 평강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로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하늘 평안을 누리면, 우리의 모든 근심은 물러가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걱정스러웠던 일도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그렇게 무거웠던 십자가도 가벼워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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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소강석칼럼] 청춘은 단풍 들지 않는다
    저는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때 당시 저의 모교는 전라북도에서 떠오르는 명문학교였습니다. 우리 동문들 중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유명 법조인,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창생들이 졸업 40주년 기념 행사를 하는데, 축사자 두 명을 선정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탤런트 김응수씨 이고 또 한 사람은 저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토요일입니다. 그날 오후에 최남수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의정부광명교회에서 고등학교 동창이 장로 장립을 받는데 저에게 예배 설교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 가게 되면 설교 끝나고 바로 군산으로 가야 합니다. 또 다음날 이 주일인데, 토요일 오후에 군산을 다녀 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데 저에게 동문회 축사를 미리 써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는 게 무리수인데도 40 년 전 까까머리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낸 축사를 써서 보냈는데 일부만 소개 하겠습니다. “(상략)... 모교 2학년 시절,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할 때 저는 사감 선생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냥 예쁜 여학생들 만나러 간 것이죠.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목사가 되어 버렸네요. 목사도 그냥 목사가 아니라 맨손으로 개척해서 대형교회를 이룬 목사요, 교단의 총회장,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표회장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상에서부터 각국의 많은 정상들을 만나봤는데, 결국 인생이란 다 바람처럼, 강물처럼 지나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인생을 계절로 비유한다면 가을의 어디쯤에 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권우열씨가 쓴 ‘청춘일 때는 단풍 들지 않는다’는 책처럼 우리의 마음이 청춘으로 있는 한, 우리 삶의 잎사귀는 언제나 햇빛 찬란한 푸른 잎사귀로 빛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체는 분명히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될 때가 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님을 만나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서 저는 영생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친구요, 동문으로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제가 만난 예수님을 믿고 함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온 천하에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문들이여, 100세 시대라는데, 이 땅에서도 건강 장수하시고 천국에서 영원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친구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그날, 친구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까 벌써 가슴이 설렙니다. 저는 목회 하느라 한 번도 동창 모임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재경동문회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모임을 꼭 금요일 저녁에 하니 철야기도 때문에 못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도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저의 작년 사진과 지금 사진을 보면 4-5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작년의 동영상과 사진을 보면 진짜 40후반이나 50초반 같습니다. 진짜 1년 만에 폭삭 늙어 버렸습니다. 왜 늙었냐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예배 회복, 반기독교 악법 저지, 생태계 보호, 연합사역 등을 하느라 제 힘과 에너지를 너무 쏟아 버린 것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서재에서 교회 본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낙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네 모양이나 내 모양이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으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권우열씨가 쓴 ‘청춘일 때는 단풍 들지 않는다’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맞아, 지금도 내 마음은 영원한 청춘이다. 광주신학교를 다니던 때의 청춘, 백암교회를 개척하던 청춘은 아직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니, 고등학교를 다니던 까까머리 소년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저는 누가 봐도 인생의 계절로 보면 가을이고 나무 잎사귀로 보면 낙엽은 아니지만 단풍 초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까까머리 청소년, 광주신학교와 백암교회, 가락동 개척시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풍의 질주를 하던 청춘은 내 안에 빛바랜 추억의 앨범이 아닌 여전히 눈부신 동영상으로 쉬지 않고 비춰지고 있습니다. 청춘은 단풍 들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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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성서연구]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결혼 문제였습니다. 본래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위하여 독신으로 사는 자가 있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2절을 보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자란 복음에 전념하기 위하여 결혼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데,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전념하고 싶은데, 이미 결혼을 한 경우입니다. 바울은 이런 경우에 굳이 결혼 상태를 변경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26-27절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15절은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게 될 때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바울의 충고는 종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종의 신분으로 주님을 믿은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지만, 굳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종도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유인이기 때문이요, 자유인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21-22절입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이처럼 바울은 성도가 굳이 자신의 상황을 변경시키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라고 충고합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종인 상태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종으로 살아가고, 자유인의 상태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결혼한 상태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그대로 살고, 미혼인 상태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미혼으로 살아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바울은 굳이 상황을 바꾸려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은 금방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7장 31절 끝에 보면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외형, 환경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굳이 그 상황을 바꾸는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고, 현 상태 그대로 지내면서, 거기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의 부족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삶의 중심을 현실에 두지 않고 영원에 두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결혼여부, 종인지 자유인인지 여부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마음을 영원에 두면 현실에 매이지 않고 초연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29-30절은 멋진 삶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런 삶은 결핍에도 웃고,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풍요 속에서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와중에서 이런 삶이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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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시사칼럼] 오미크론
    ‘이제는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부터 많은 이들이 소위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운운하면서 털어놓던 푸념입니다. 그런데 다시 격리나 봉쇄 조치를 준비하는 국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월 2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B.1.1.529)를 ‘우려 변이’(variant of concern)로 분류하고 ‘오미크론 바이러스’로 명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존의 바이러스보다 전파력도 강하면서 기존의 백신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해서 전 세계가 바짝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이 바이러스는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미, 남미를 가리지 않고 전 방위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새 달 들어 한국에서도 아프리카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그 자취와 흔적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미크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오미크론’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로 이어지는 그리스 알파벳 중 15번째 문자입니다. 변종이 나올 때마다 철자 순서대로 이름을 붙여서 마지막 등장한 이름이 12번째의 ‘뮤 바이러스’였는데, 이번에는 두 철자를 건너뛰고 바로 ‘오미크론’이 되었습니다. 13번째 ‘뉴(N)’는 영어의 ‘뉴(new)’로 오해할까봐 지나갔다 하고, 14번째 ‘크시(Xi)’는 중국의 일인자 시진핑(Xi Jinping, 習近平)의 이름 앞 글자와 같아 건너뛰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자체가 중국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사자들이 펄쩍 뛰고 그 말만 나오면 광분하다시피 반응을 보이니 아마도 세계보건기구에서 몸을 사린 듯합니다. 평소 늘 대국을 자처하는 나라니 ‘크시 바이러스’쯤 대범하게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오미크론(omicron)’이란 말은 본래 ‘작은 오(O)’라는 뜻입니다. ‘미크론’은 요즘도 사용하는 ‘마이크로(micro)’라는 말과 어원이 같지요. 그렇다면 ‘큰 오(O)’도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 문자 마지막 철자에 해당하는 ‘오메가(omega)’가 바로 ‘커다란 오’입니다. ‘메가(mega)’ 또한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쓰입니다(메가마트, 메가스터디). 이렇게 오미크론에서 오메가까지 탐색하다가 결국 ‘예수’를 떠올렸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예언한 바 있는데(사 44:6), 예수께서는 동일한 취지로 친히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계 22:13). 그러나 동시에 “나는 오미크론이요 오메가니라”고도 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세계에서부터 가장 큰 세계까지, 즉 원자와 미립자 차원부터 우주와 초우주의 차원까지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원자와 우주는 닮았습니다. 원자 전체 질량의 99퍼센트인 원자핵은 부피로는 전체의 1백조 분의 1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원자 속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우주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더 작은 입자 곧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존재가 1897-1919-1932년 차례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작은 입자도 존재하지 않을까, 예측한대로 1968년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더 작은 입자를 발견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Finnegan’s Wake)에서 따와 붙인 이름이 ‘쿼크’입니다. 지금도 계속 발견되는 아원자 입자의 크기는 10⁻²⁶(m), 우주 전체는 10²⁷(m), 사람의 크기는 정확하게 그 중간인 10⁰(m), 이를 우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에는 1조 톤을 네 번 곱한 만큼의 물질이 있고, 1조를 여섯 번 곱하고 거기에 백 만을 곱한 만큼의 원소가 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원자나 우주만 그러하겠습니까? 우리 삶의 오미크론 곧 작고 소소해 보이는 영역에도 주가 계시고, 우리 삶의 오메가 곧 크고 원대해 보이는 영역에도 주가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오미크론부터 오메가까지를 다 감찰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미크론 같아 보이는 일들조차 주를 위해 살고, 오메가 같아 보이는 일들까지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해서 결코 당황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미크론에서 오메가까지 결국 다 주 예수 안에 있으며, 그분은 오미크론 같은 존재인 나와 오늘 이 순간에도 동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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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역사바로알기]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4) 복음진료소 원장으로 초빙. 1948년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에 취업했던 차봉덕은 1950년 봄에 부산 초량동 어느 2층집을 임대하여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업했다. 몇 달 후에 6. 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51년 1월 9일에 귀국한 전영창이 초량의 차산부인과에 근무하던 차봉덕을 몇번이나 찾아와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복음진료소 원장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박희천목사의 부인-차진실 사모의 증언> 이때는 전영창이, 외삼촌이 근무하던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UN CAC)를 찾아가 노르웨이 출신의 구호담당 책임자인 의사 넬슨을 만나 항생제 등 구호의약품 조달문제로 상의를 하던 중 차라리 병원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의약품을 지원하겠다는 넬슨의 조언을 듣고 병원설립을 위한 의사를 급히 찾던 때였다. 이에 차봉덕은 “너는 예수 믿고 결혼하지 말고 의사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 주고 섬겨라” 는 이북에 계신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고 운영하던 차산부인과를 미련 없이 접고 전영창을 따라 1951. 1. 15일 영도로 와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진료를 시작한 것이 ‘복음진료소’였다. 이때 그녀는 초량 차산부인과에서 사용하던 분만기계 등 산부인과 관련 의료기자재를 다 가지고 가서 진료를 했었다<차진실사모, 맹숙희 간호사 증언> 전영창이 차봉덕 원장과 함께 복음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할 때 전영창은 매일 의약품 50인분을 받아와서 차봉덕 원장의 환자진료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부대에서 강냉이와 밀가루를 지원받아 가마솥에 끓여서 전재민들을 열심히 구호하고 있었다. 이때 죽을 먹기 위해서 선 줄이 200미터나 되었다.<전영창의 아들 전성은증언> 5) 장기려박사 취임으로 사임 초대원장 차봉덕에서 불과 6개월 만에 장기려 박사로 원장이 바뀌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가벼운 일반 환자들은 산부인과 의사인 차봉덕 원장이 진료할 수 있었지만 외상환자나 수술환자는 진료가 불가했다. 6.25전쟁으로 전상을 입은 외과 환자들의 진료를 위해서는 외과의사가 필요했다. 이에 전영창 선생은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고, 마침 외과진료와 수술이 가능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아 1951. 6. 21일 전영창이 한상동의 안내로 김상도 목사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진료소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기려 박사가 제3육군병원을 사직하고 1951. 7. 2일자로 복음진료소로 부임해 왔다. 이에 차봉덕은 초량으로 다시 와서 차산부인과를 개업하고 4명의 조카들을 거두어 삼일교회(한상동 목사)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6) 차봉덕의 늦은 결혼 피난 온 4명의 조카를 거두어 양육과 교육, 그리고 전영창과의 복음진료소 개원과 차산부인과 개원 등으로 정작 자신은 결혼도 못하고 지내다가 같은 외과의사인 황영갑과 1958년 늦은 결혼을 했다. 남편 황영갑은 중국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하얼빈의대 졸업, 신의주 방직공장 병원장, 6.25때 인민군 후방 군의관으로 참전, 북한의 후퇴 때 탈영을 하여 미 8군 의무관,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6.25때 북한에 징집될 때(1950. 9월) 6세, 3세. 1세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부인을 포함 전 가족이 사망하자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하였다. 복음의원 초창기 시절 농어촌 무료진료 전담의사로 지원해서 장기려와 함께 무의촌 진료를 나갔고 이때 차봉덕에 대해서 조금은 알았겠지만, 차봉덕이 장기려 박사에게 바톤을 넘기고 초량으로 와서 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함으로 떨어져 지내다가 황영갑의 절친이자 중, 고, 대학 선배인 신영희 의사의 중매로 1958년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어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차봉덕의 나이 38세때이다. 이듬해 큰 딸 황은경(59년생), 은성(61년생), 은희(64년생) 세 딸을 차례로 낳았다. 7) 동두천 이거와 진주 복음병원 차봉덕이 1948년 부산으로 와서 10여년을 살다가 황영갑과 결혼 후 부산을 떠나 동두천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남편 황영갑의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가 결혼했을 때에 나는 빈털터리요, 집사람도 개업할 돈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두 사람이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이때 큰 조카 차진실은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전도사와 막 결혼(1957.1.17)하여 독립한 이듬해였다. 그때 마침 동두천에 살던 황근옥 선생이 아무 차용증서도 받지 않고 50만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어 병원개업을 해 보라해서 동두천에서 개업을 했는데 병원이 크게 번성하여 주변에 땅도 많이 사게 되고 일 년 만에 황근옥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 드리고 이자도 넉넉히 계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진주에서 부름이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원했던 진주 배돈 병원 후신으로 1955년 8월 15일에 설립된 진주복음병원의 초대원장 한규상(부산 복음병원 내과과장 출신)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자 제2대 원장으로 황영갑을 초빙했고 1959. 9.10일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황영갑은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부인 차봉덕은 진주 우체국 근처에 ‘차봉덕 의원’을 개원하여 진주 최초 부부의사로 병원 일에 힘쓰며 진주교회(전 봉래동교회, 옥봉교회)장로(1961년 장립)로, 차봉덕은 여전도회 회장 직을 맡아 14년 동안 교회를 지사충성하였다. 1972.5.14일 차봉덕은 남편을 따라 진주로 온지 14년 만에 경영하던 두 병원을 폐원 정리하고 진주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이는 남편 황영갑이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서울 논현동에서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의사직과 장로직, 여전도회장직을 그만두고 평생 복음을 위한 목회자로 결단하였다. 차봉덕이 남편의 목회를 위해 진주에서 서울로 떠날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진주교회 조헌국장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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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목회자칼럼] 보복소비
    “지난 주 홈쇼핑에서 (코로나가 끝나면 사용할 수 있는)베트남 여행 패키지를 판매했는데 매진되었습니다” 뉴스에서 들리는 홈쇼핑 여행 완판 소식은 코로나 때 문에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소비로 나타난 대표적인 예시이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1-2 시간 줄을 서는 풍경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이는 맛집 소식은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며 거리낌 없이 식당을 이용하는 음식 소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위드 코로나로 인해 2년 만에 단계적으로 일상을 회복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보복소비’이다. 보복소비란 외부요인에 의해 억눌렸던 소비가 보상심리에 따라 한꺼번에 분출되는 현상으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소비가 급감했다가 위드 코로나가 되면서 갑자기 확 느는 것을 말한다. 이커머스 업체가 발표한 11월 행사 기간 판매 증감률에 따르면, 현재 우리 사회는 보복소비로 인해 11월 매출이 올 초에 비해 적게는 40배 많게는 70배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었던 소비욕구가 완화된 코로나 단계에 맞춰 한꺼번에 터졌다고 볼 수 있다. 약 2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하고 싶었던 것을 절제하던 삶에서 위드 코로나 전환으로 인해 자유로워 진 것은 좋지만, 무분별한 보복소비의 형태를 비롯한 지금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람직한 것인지 방향은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보복심리 현상으로 코로나19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자발적’이었는지, 아니면 ‘수동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자발적 참여의 특징 중 하나는 억눌리는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기쁨과 헌신의 자세로 섬기기에 마음에 눌림이 없는데, 수동적이거나 타의로 섬기는 사람들은 불만과 불평이 마음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은 처음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일이 끝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도출되는 법이다. 우리가 2년 동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거리두기’ ‘집합금지’ 등 방역 조치들에 기꺼이 협조했지만, 이 협조가 ‘자발적’이었는지 ‘수동적’이었는지 보복소비 현상으로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2년 동안 마음에 억눌러져 있는 감정들, 억압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의식 속에 소비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19로 인한 눌림이 이번 현상을 시작으로 조금씩 발생할 텐데 이를 사회는, 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보듬어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둘째, 절제의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를 살리기 위함이다. 보복소비 현상을 보며 우리는 역설적으로 절제의 필요성을 느낀다. 한쪽으로 쏠린 생각, 행동 등에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이 절제이다. 보복소비 현상이 오래 가면 이 또한경제에 또 다른 문제점들을 야기 시킬 것이다. 소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절제가 필요한 원인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셋째, 지금 예수님이라면 이런 시대적 변화 앞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예수님 시대에도 사회적 흐름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주도하기도 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 행위를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으셨다. 변함없는 복음을 가지고 변하는 세상 속에 스스로 기준이 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관심이 오직 세상의 흔들림에 집중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믿음을 붙들고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 방향에 맞게 걸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보복소비와 함께 ‘현재 우리의 자세’ ‘절제의 필요성’ ‘예수님의 기준’을 잘 생각해 위드 코로나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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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6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의 여섯째 활동은 ‘기독교아동보호교육’(CCT: Christian Child care Training)이었다. 메노나이트교회는 근본적으로 약자들, 소수자들,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집단 혹은 국가 지원을 최우선 순위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아동 보호와 구제를 중요한 사업으로 전개한 바 있다. 미망인들을 위한 구제 사역, 봉제나 재봉틀 교육도 이런 차원의 사업이었다. 인간의 생명, 인간의 가치는 가장 존중되어야 하고 가중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 MCC사역 방향이었기 때문에 식량과 피복 제공을 구제사역의 기본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가족 및 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이 직접적으로 구호의 대상인 어린아이들을 위한 사역이라고 한다면, 지금 말하는 기독교아동보호 교육은 아동 보호기관에서 일하는 보모들과 봉사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난 1963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그 동안은 전쟁 피해자들의 구호가 시급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물적 구호 혹은 지원(material aid)에 치중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장기적인 아동보호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아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아동보호시설에서 일하는 보모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그리고 부산 지방에서 일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했고 후에는 교육이 필요한 이들에게 개방되었다. 매년 두 차례 교육 과정이 개설되었는데, 교육은 MCC의 지원을 받는 3사람의 책임자들의 해 수행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강사들이 교육에 참여하였다. 이 프로그램 운영 담당자의 인건비 등 기본 예산은 MCC가 지원했지만 아동보호시설을 지원하는 월드비전(World vision), 기독교아동복리회(CCF: Christian Childrens' Fund), 컴패이션(Compassion),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 그리고 한미재단(American-Korean Foundation) 등이 운영기금을 출연했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3개월간 이루어졌는데, 전반기 6주는 주로 강의로 이루어졌고, 후반 6주는 대구 대성원(어린이 보육원)에서의 실습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동 보호 교육 프로그램을 종료되는 1968년까지 202명의 보모들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이수한 이들에게는 정부가 보모 자격증을 수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교욱 받은 이들은 자신의 근무지에서 수용 아동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배우고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한 것이다.(이 점에 대한 중요한 문헌으로는 MCC, "Christian Child care Training, Plans for training 1967" Folder 18, Box IIB5가 있다) 이 훈련 프로그램의 실제적인 관리자 혹은 운영자가 헬렌 티센(Helen Tieszen)이었다. 1954년에서 1957년까지 MCC요원으로 일한 바 있는 그는 1961년부터 1970년까지 다시 한국에서 일하면서 이 사역을 주도하였고, 후에는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아동학과 교수로 활동하며 아동 교육, 아동 복지 등을 가르쳤다. 헬렌 티센은 미국의 대표적인 아동학 관련 저널인 Children에 ‘한국의 장애아의 놀이행동’(Play Behavior in deprived Korean Children, 4/1(Jan-Feb., 1957), ‘한국의 아동복지를 위한 기술적 지원’(Techical Assistance for Child Welfare in Korea, 4/4, July-August, 1958), 그리고 한국가정경제학보(Journal of the Korean Home Economics Association, 1979;17(3)에는 ‘한국의 미취학 아동의 사회행동’(Children's Social Behavior in a Korean Preschool)과 같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상 몇 회에 걸쳐 소개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는 전화(戰禍)의 와중에 있던 한국과 부산 대구에서 그리고 전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구호사역을 감당하였는데, 사역을 시작한 1951년부터 한국에서 사역을 종료한 1971년까지 20년간 75명의 메노나이트 요원들이 한국에서 일했다. 이들은 각종 구호활동, 고아나 극빈아동을 위한 직업교육, 전쟁 과부들을 위한 직업교육, 아동복지사업, 그리고 농촌지도사업을 전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섬김과 봉사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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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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