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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천국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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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등산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제 아내와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푸르른 신록의 숲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들이키며, 시원한 바람을 맞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제 아내가 “천국이 이것보다 더 좋을까?”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나무가 있는데, 우리는 살아서도 천국, 죽어서도 천국, 영원한 천국을 살고 있으니, 지금 이것도 천국을 누리는 것이고, 죽어서는 더 좋은 천국을 누리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천국 같았던 기쁨도 몇 시간이 지나자 육체의 상황에 따라 변했습니다. 하산길에 아내의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무릎이 아프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아내는 “지옥이 이것보다 더 괴로울까?”라고 말을 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함께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도와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동행했습니다. 나의 무릎이 아프지 않다고 아픈 아내를 뒤로 내버려 두고 빨리 내려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릎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이 제 아내이고, 제 아들과 딸의 엄마이고 우리는 가족이니까요. 하지만 가족이 아닌 무심한 등산객들은 저와 제 아내를 추월하여 앞서서 내려갔습니다. 그분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들도 빨리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까요.
육체의 상태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이지만 천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평생을 지옥처럼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분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함께 안타까워하며 동행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니까요. 뇌출혈로 편마비 상태가 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어르신의 가족이 여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70대 노부부가 휠체어를 밀면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부만 왔으면 너무 힘들어서 여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족은 사위와 딸이 함께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센 젊은 사위가 장인어른을 도우며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가족은 천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동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동행하는 삶이 천국을 누리는 삶이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파하며 함께 울기도 하시고, 우리의 지옥 같은 삶이 천국 같은 삶이 될 수 있도록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천국을 누리는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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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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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삼상 1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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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leader-지도자)는 리더(Reader-읽는 자)여야 한다.”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이 말을 신앙적인 언어로 바꾸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 겸손한 마음입니다.(17절)
사울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작게 여길 때 – 겸손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사울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9절을 보면,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좋은 것을 남겼다고 했지만, 사실은 값지고 좋은 ‘전리품’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승리는 내가 한 것이라는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2>12절을 보면,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흔적이 아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아말렉을 이기게 하셨는데, 사울은 자기가 이긴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겸손을 잃으면 하나님의 은혜도 잃게 됩니다. 겸손은 자아를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나의 나 됨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2. 순종의 제사입니다.(22절)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말씀이 일치하는 삶이 있는 순종의 예배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어떤 제물을 가져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순종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순종할 마음 없이 거저 습관적인 종교생활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종교적 형식만 갖추고 의식적으로 예배할 때, 그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고백이 일치하기를 원하십니다. 순종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듣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진정한 회개입니다.(30절)
사무엘이 책망할 때, 사울은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 자신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21절) 변명으로 일관할 뿐 전혀 회개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왕을 버렸다고 할 때’ 30절을 보면, ‘자기가 범죄 하였지만 지금은 자기의 죄를 사하고, 자기와 함께 제사하러 올라가 달라고 간청하지요.’ ‘자기 체면’ 때문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사무엘을 붙잡고 늘어진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나를 ‘왕 대접’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 했을 때 멋진 변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참된 회개는 범한 모든 죄를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겔18: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다하여 죄를 고백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를 범한 후, 하나님을 향해 회개의 문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진정한 회개의 문을 활짝 여시고 죄에서 돌이켜, 진실한 믿음의 길로 달려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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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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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평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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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국교회의 부흥과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노래하거나 말할 때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백두에서 한라까지”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작은 1907년 평양을 기점으로 전국의 교회로 확산된 평양대부흥운동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 연합집회로 모였던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역사가 나타났다.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선교사, 지도자, 성도들의 변화와 헌신으로 부흥의 불길과 성령의 파도는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에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 운동의 모델이 되었고, 나아가 한국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을 말할 때 그 역사의 현장과 시작점이 된 평양과 1907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코로나 19가 지나간 한국교회는 위기의 상황을 넘어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증가했고, 예배 의식은 약화 되었고, 순종과 헌신과 봉사의 열정은 식어졌다. 세상과 국가 공동체는 할 수만 있으면 쾌락과 방종 그리고 타락과 무신론의 문화를 파종하기에 여념이 없다. 황금만능과 자기 중심주의적인 삶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잠식하고 있으며, 철저하게 현실에 안주한 의식은 다음세대를 점점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어른 세대는 복음화율이 20%, 젊은 세대는 10%, 청소년 세대는 미전도종족인 3~5%, 유치원은 1~2%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산에 소재한 1830여 교회 중, 주일 예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가 상당수다. 청년회가 없는 교회가 절반을 상회하고,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부지기수다. 교단을 초월해서 신학교는 정원미달이 고정화되고, 젊은 신학생보다는 중년의 신학생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저출산의 문제는 세상보다 교회 안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반인들의 출산율이 0.74:1이라면 교회 청년들은 0.62:1이다. 이슬람은 자녀가 알라의 축복이라고 교육함으로 한 가정에서 약 8명의 자녀를 출산하고 있다. 이슬람은 자녀 출산을 통해 2050년까지 지구 인구의 절반을 무슬림화 하겠다는 계획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열패감과 좌절 그리고 절망과 탄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을 허비해야 할까?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자리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의 자리로 함께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믿음의 사람은 정말로 위대하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했고, 엘리야는 비가 없던 땅에 비를 오게 했고, 바울은 성경과 교회를 남겼고,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9월 8일 해운대성령대집회는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웃교회가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 교회 차례다. 그러므로 부산에 성령의 파도와 바람과 물결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나와 우리 교회를 위함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만 있었으면 멸망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와 의인 10명이 대등의 관계에 있었다. 하나님은 오늘, 부산과 한국교회를 살릴 의인을 찾으신다. 그 찾으시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모두가 홍보대사, 후원자, 함께 백사장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개교회의 사역은 그다음 주에 해도 된다. 해운대성령대집회는 10년만에 이루어지는 연합집회이며 공동체적 기도의 현장이다. 이를 통해 반드시 부산과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 부흥의 바람, 부산대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부흥의 표현과 성령 임재의 역사성이 바뀌기를 바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평양까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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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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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신학자 구두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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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한 저명한 신학자 구두인(具斗仁, Charles Goodwin, 1913-1997) 박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려신학대학에 입학한 이후인 1972년 혹은 1973년경으로 생각된다. 부산의 보수동 고서점에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논단’ 7집(1962. 10)을 샀는데, 거기에 실린 구두인의 “희랍어와 한국어 발음의 비교”라는 글을 대하게 되었다. 그 때는 희랍어를 공부하기 이전이었음으로 글 내용을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서양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희랍어 본래대로 발음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짧은 논문이었지만 영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희랍어와 나전어 한글과 중국어까지 비교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신학논단’ 11집(1972. 6)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히랍어 어려운 말”(γλώσσαι ελληνικαι)이라는 한글로 쓴 논문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희랍어 몇몇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원의를 바르게 전달하는가를 취급하고 있었다. 이런 글을 대하면서 구두인 교수는 고전어에 박식한 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가 예일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수득했다는 사실과 그가 성공회 신부로서 선교사 신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는 신약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였다. 신약은 말할 것도 없지만 히브리어나 구약에도 박식했고 교회사나 예전, 교리 등에도, 심지어는 교회음악에도 깊은 식견을 지닌 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구두인 교수를 늘 마음에 두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미국 코넷티컷주 하트포트에서 1913년 5월 5일 출생했다. 1931년 성 바울신학교를 거쳐 1935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하여 옥스퍼드에서 수학했다. 1939년에는 미국켐브리지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사제서품을 받고 10여 년 간 성공회 신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60년 예일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한성공회의 요청으로 1960년 9월 교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성미가엘신학원(현 성공회대학교)에서 교수하는 한편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79년까지 연세대학교 신학대학과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고전어, 성경원전 강독, 신약학 등을 가르쳤다. 이 기간 중에 구약 강좌가 필요하면 구약을 가르치고, 교회 음악 교수가 없을 때는 교회 음악도 가르치는 만능 교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은퇴한 이후에는 성공회 부산교구 휘하의 부산 수영의 성공회 수양관에서 생활했다. 성공회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으나 그는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가 부산에 살고 있기에 대학자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장로교인인 내가 성공회 신부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든 중 교회연합회가 주최한 세미나가 성공회수양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구두인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1984년 혹은 1985년이었을 것이다. 당시 성공회수양관은 부산시 해운대구 우2동 1072-55번지에 있었는데 주변에 밭이 있었고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수양과 건물에 주택이 붙어 있었는데 그곳이 구두인 신부의 거처이자 서제였다. 당시 관리인에게 면담을 청했는데 마침 구 신부님이 미천한 신학도를 기꺼이 만나 주었다. 키도 크고 건장했으나 어깨가 완전히 굽어 있었다. 일생동안 공부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신으로 살다보니 그의 이웃이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그는 고양이 한 마리와 가족처럼 살고 있었다. 그날 구두인 박사는 나를 맞아주었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나는 그에게 서재(書齋)를 한번 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기꺼이 나를 서재로 안내했다. 책으로 가득찬 한 벽면 책장 위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커틴을 제치자 값진 고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16세기 간행된 책들이 있었고 성공회 관련 고문헌들, 그리고 한국에서의 성공회 시원에 관한 문서들, 곧 영국인 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의 문서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그가 프랑스 파리의 외방전교회 샤를르 달레 신부(par Ch. Dallet)가 쓴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를 가리키며 이 책을 아느냐고 물었다. 1980년 역간된 안응렬 최석우 신부의 역본은 알고 있었지만 1874년의 불어판 원본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3권으로 구성된 호화 양장본이었다. 내가 소장하고 싶은 그의 고서들이 나를 유혹했다. 이런 고서들 외에도 금영 측우기(測雨器)는 아니었으나 측우대(測雨臺) 같은 것도 있었다. 책장을 커튼으로 가린 것은 햇빛에 책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7년 전인 1990년 ‘성공회의 특징’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쓴 이가 대천덕 신부였다. 이 책에 쓴 구두인 신부의 한마디는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내가 속한 교파를 가장 좋은 교파로 여기면서도 다른 교파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하고, 다른 교파의 가르침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혹은 우리는 “다른 교파에 대해 존경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존중해야 한다.”는 등이다.
그는 1997년 6월 28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8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의 보물 같은 책의 행방이었다. 후에 들으니 성공회대학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생을 살았던 성공회수양관은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 이곳에는 송원파크빌라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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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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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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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인연(因緣)이 있다. 그것이 선연(善緣)이든 악연(惡緣)이든 다를 바 없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악연은 빨리 잊고 선연은 곱씹으면서 살아간다.
나에게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선연(善緣)이 있다. 그것이 나의 오늘을 있게 한 토양(土壤)이었다. 그래서 인연을 들숨과 날숨으로 내 삶을 호흡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 어느 관계도 하나님의 섭리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 없기에 인연은 내 삶의 들숨과 날숨이 되어 오늘을 살게 한다. 사계절처럼 오고 가는 인연을 굳이 악연을 붙잡고 헐떡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연을 붙잡고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움처럼 삶을 다듬어 가는 사람도 있다.
5월이 되면 더욱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일상이 그래야 하지만 그래도 5월은 더욱 부모님이 생각나고 스승과의 인연이 생각나고 친구와의 인연이 생각난다.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삶에서도 자식을 위한 부모의 본능적인 양육은 평생 곱씹어도 모자랄 사랑이다. 오늘의 내 자리매김을 생각할수록 스승의 가르침은 내 삶의 영양소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짓게 해 주는 친구는 삶의 활력소다.
마흔이 넘어 목사로 임직받은 후 어느 날 집에 오신 엄마에게 “엄마 젖 먹고 싶다.” 할 때 “야야 징그럽다.” 하시면서도 마흔이 된 자식에게 젖을 물리시고 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목사 한다고 얼마나 고생 많겠나” 하시면서 눈물짓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이 젖 때문에 5남매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하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때 말없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셨던 어머니였다. 그 엄마 마음으로 나는 평생 교인들에게 젖먹이는 모심목회(母心牧會)를 했다.
우리 부부를 약혼주례 결혼주례 하신 고 김기수 목사님은 내 목회의 토양(土壤)이었다. 목사님이 소천하시는 그 해까지 3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에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여 목사님을 찾아 축복기도를 받는 것이 결혼기념일 행사였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스승의 가르침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목회의 정도(正道)로 정행(正行)을 했다.
얼마 전, 정장복 총장님의 부음(訃音)을 받았을 때 믿기지 않았다. 지난해도 어김없이 내외분을 모시고 식사하시면서 “나 죽기 전 고향교회 부흥회 한 번 인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올 4월에 일정을 약속하고 함께 고향교회를 방문하리라 기뻐하시면서 친히 점심을 사 주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르신이 마지막 부탁하신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기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광주로 가서, 광주에서 마중 나온 목사님 차를 타고 2시간 완도로 가서, 완도에서 다시 1시간 배를 타고 청산도에 도착하여 3일 동안 자비량 집회를 인도했다. 평생 신언전달자(神言傳達者)를 가르치신 스승님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설교의 정의입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교훈을 받고자 진언(眞言)할 때 기뻐하시면서 “청출어람 청어람이로다” 하시면서 “그래도 설교는 <신언전달(神言傳達)>이다”라고 파안대소하셨다. 그 가르침 때문에 강단에 설 때마다 그 말씀을 되새김질했다. 이제 총장님은 천국 가시고 그 가르침이 내 목양의 토양(土壤)이 된다.
일본에 하시모토 다카오 장로님이 계신다. 나에게는 더 없는 친구다. 부인 요시애 다카오 장로님의 지극한 내조로 장로임직을 받고 선한일에 부하고 교회를 세우는 야긴과 보아스처럼 성직을 수행하시는 분이다. 친구의 인연을 맺어온 지 20여 년이 되었다. 나의 삶은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2등 하기 싫은 마음가짐으로 평생 살아왔는데 하시모토 장로님 내외분에게는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2등의 삶으로 오늘도 우정(友情)을 맺고 살아간다. 아름다운 인연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시적인 마음이 근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보여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때로는 언어로 때로는 삶으로 때로는 물질로 가시화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고 말은 생각의 표현이다. 사랑은 묻어둘 수 없고 묻히는 것 또한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연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제 고희의 마지막 날들을 계수하면서 다시금 인연(因緣)을 생각한다. 인간사 어찌 선연(善緣)만 있으랴. 살아가노라면 악연(惡緣)도 맺어지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이치라면 오늘을 살아가면서 진정 축복받은 삶이란 악연도 선연으로 바꾸는 삶이리라. 그것이 어이 마음대로 되겠는가만 그래도 섬김과 나눔과 베풂으로 살아가노라면 아름다운 인연이 엮어지리라. 고희의 삶을 살면서 잠간 멈추고 뒤돌아보면서 나와 인연을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회고해 본다. 인연의 여정에서 경애(敬愛)는 고사하고 왜곡과 망각과 배신이 명확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삶을 통해 둥글게 다듬어 내면서 나는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아간다.
김광규님의 아름다운 글의 표현이 생각난다. 경애(敬愛)를, 빗속을 걸어가는 법이라 했다. 그러면서 ‘사랑은 기꺼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길이며, 사람에게 젖어 드는 일’라고 했다. 이 얼마나 깊은 사고(思考)의 표현인가.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살맛 나는 인연으로 하루를 엮어가면서 내가 후일 천국에 이른 후 나의 후학들이 나와의 인연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하면서 오늘도 선연(善緣)의 삶을 기도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첫 구절을 마음 깊이 읊조린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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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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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시간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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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 개봉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전 시카고대학 교수인 노먼 맥클레인(1902~1990)이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1976년에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영화는 그다지 큰 흥행은 하지 못했습니다. 1900년대 초,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인 리버런드 맥클레인은 아내와 아들 노만과 폴과 함께 몬타주 강가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강에서 플라이낚시를 즐기며 삽니다. 신중하고 지적인 노만과 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폴은 어린 시절부터 기질이 다릅니다. 영화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족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후에 작은아들 폴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가족은 슬픔에 잠깁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노먼은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과 함께 흐른 가족사를 회상하며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인생도 시간과 함께 흐릅니다. 인생은 시간과 함께 그 모습이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그 후 청년, 중장년을 거쳐 하류인 노년기를 맞습니다. 그후엔 바다라고 할 하나님의 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바쁘게 살면서 시간의 흐름을 잊기 쉽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깨닫고 반응하는 데 인생의 지혜가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90:12).
우선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시간의 포착이 중요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종종 보일 때가 있습니다. 주일 1부 예배부터 찬양 예배까지 드리는 동안에 강단 꽃을 통해 시간을 느낍니다. 1부 예배 때는 봉오리였던 꽃이 3부 예배 즈음엔 약간 벌어지더니, 5부 예배 시간에는 상당히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수요기도회 즈음에 활짝 피어있던 꽃은 금요기도회 때면 이미 시들어갑니다. 꽃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봅니다. 시간의 포착은 경건한 긴장을 가져옵니다. 그 흐름은 언젠가 우리를 마지막 시간 앞에 세울 것입니다. 인생의 유한함과 그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스쳐 가는 순간이 눈물겹도록 귀합니다. 다윗은 시편 144편 4절에서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같으니이다>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이 그림자를 <새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새가 날아가면서 남기는 그림자는 얼마나 순간적일까요? 인생이 그렇다는 말이겠습니다.
또 시간은 해석을 요구합니다. 눈을 떠서 새벽임을 알았다면, 그다음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즉 새벽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벽은 새로운 날이 되었으니, 일어나라고 속삭입니다. 이게 해석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도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면 시간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청년일 때, 중년일 때, 노년일 때,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인생의 내용은 결정됩니다.
지난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영혼의 갈등이 심하던 어느 날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노래 가사는 <들어서 읽으라, 들어서 읽으라, tole lege! tole lege!>는 것이었고, 그는 충동적으로 집에 들어가 펼쳐진 책을 들어 읽었는데, 그 말씀이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깊은 영혼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024년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가늠해 볼 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을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는 것, 그리고 해석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결국에는 인생을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행동을 촉구합니다. 깰 때가 되었다는 해석을 얻었다면, 이젠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아름다운 결단과 행동은 시간을 빛나게 만들 것이고, 인생도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는 날로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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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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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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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식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냄새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고, 다른 짐승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 사람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이처럼 냄새라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성도로서 우리를 나타내는 냄새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을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5절)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본래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악취를 풍기는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엡 2:4,5) 죄의 냄새, 사망의 냄새로 가득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의의 냄새, 생명의 냄새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은 생각을 해도 의로운 생각, 말을 해도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향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14절)
바울은 각 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바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도록 세우신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 안에서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제 이일을 통하여 사망의 냄새에 찌들려 살던 그들에게 생명의 향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선물해야 합니다. 향기는 숨어있거나 감춰져 있으면 안 됩니다. 널리 뿌려지고 퍼져야 향기 자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복음의 꿀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향기를 찾으십니다. 모양만 있다고 신자가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 있고, 예수의 향기가 있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 땅에 만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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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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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라인 사태와 디지털 국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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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자국 내 외국기업 혹은 다국적기업의 자원 독점 및 수탈을 막기 위해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국유화 조치를 감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1974년 베네수엘라는 50년 간 부여했던 미국철강회사들의 철광채광권을 국유화한다면서 국내 외국기업은 소유주식의 80%를 베네수엘라 투자가들에게 매각하여 국영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대단한 저항과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국가의 주권적 행위인지라 국제사회에서 뚜렷한 해결책과 원만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시장자본주의가 범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가던 국유화조치가 최근 들어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이전 세기와 사뭇 다른 점은 동일한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이론적 배경으로 내세우면서 과거에 그렇지 않았던 국가들이나 지금은 경제대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 역시 유사한 조치를 감행하는 현상에 있습니다.
먼저 새천년 시대에 접어들면서 전격적으로 실시된 중남미 일대의 국유화 조치를 살펴보겠습니다. 2006년 5월 1일 볼리비아 정부는 석유 · 가스 산업을 국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을 발표합니다. 2009년 5월 8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 역시 마라카이보 호수 유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60여 개의 국내외 석유서비스기업 자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2012년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또한 자국 내 최대 다국적에너지기업인 YFP 국유화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쟁 중인 러시아 정부가 이와 관련하여 깜짝 놀랄만한 발언들을 쏟아내어 화제입니다. 지난 4월 12일 러시아 하원이 자국 내 외국인투자회사의 국유화와 관련된 법안을 발의하여 심의 중에 있고 조만간 그 입법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법률신문 5. 16). 한 때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이자 최고의 산업국이던 러시아가 이런 조치를 발표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러시아만이 아닙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중국도 최근 몇 년 간 상당히 주목할 만한 비정상적인 경제적 조치들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화학적, 전기적 특성을 띠어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첨단 장치에 필수적인 17종 원소를 통칭하는 “희토류(稀土類, Rare Earth Resources)”라는 말이 최근 수년 간 엄청나게 회자되지 않았습니까?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중국이 2010년부터 희토류를 일종의 ‘자원 무기(Resource Weapon)’로 만들어서 우호적인 국가에만 수출하고 대립하거나 자신들을 제재하는 나라들에는 수출을 금지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자원민족주의는 석유나 가스 등 자원에 국한되었고 주로 국유화조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희토류뿐만 아니라 니켈이나 리튬 같은 자원으로 대상이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상 또한 생산량 제한이나 선별적 수출과 같이 다양화되고 있어 문제입니다. 특히 화석연료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그 중요성이 급증하고 있는 탄소중립 필수자원의 공급망을 관리하는 방식(SCM, Supply Chain Management)을 활용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더욱 문제가 복잡해지고 커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에 상기한 자원민족주의의 신종 형태로 등장하여, 우리나라가 거기 엮여서 그 자체로도 문제인데다 이를 둘러싼 국론조차 대립하고 분열되어 더욱 심각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메신저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온라인서비스 ‘라인’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일종의 국유화 시도가 그러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른바 ‘플랫폼 데이터 규제’ 조치가 미국이나 유럽연합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 내에서 중국 산 ‘틱톡’ 앱의 퇴출 방안과 이에 대항하여 중국이 취한 자국 내 미국 동종 플랫폼의 사용 금지 조치 등에 국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 정부는 개인 정보 유출을 이유로 한국 기업 네이버에 라인야후 지분을 매각하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굴종외교라며 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고 반면 반일몰이라며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앞으로 ‘디지털 국유화(Digital Nationalization)’ 내지는 ‘온라인 자원무기화(Online Resource Weaponization)’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을까 우려합니다. 영토나 주권을 배경으로 하던 시대와는 그 결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경도 없고 장벽도 없는 인터넷 세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옳지 못합니다. 부디 이번 사태로 인해 디지털 세상의 자유와 정의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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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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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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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한다는 착각, 내가 서툴다는 착각, 내가 소중하지 않다는 착각, 내가 이쁘다는 착각’
‘인생은 착각의 역사다’는 말이 있듯 사람은 알게 모르게 많은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 중 하나가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무심하게 대하는 내 모습을 본다. 항상 내 옆에 있기에 편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아내, 오랜 시간 한 교회를 섬기며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동역자들과 교인들. 편한 친구들과 동생들. 모두 익숙한 사람들이기에 잘 안다고 여겼는데, 문득 생각하니 나 중심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크라테스 형님이 “너 자신을 알라”고 했으니, 익숙함으로 인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첫째, 마음 속 우월감, 열등감을 돌아보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란 언제 생길까? 나의 정체성이 약해질 때,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시선이 나에게서 타인으로 옮겨간다. 그러면서 내게 있는 좋은 점들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들에 시선이 멈추며 생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월감, 열등감이 물밀 듯 밀려오는 시점이다. 분명, 나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녀인데, 그 정체성은 사라지고 비교의 함정에 빠진게 된다. 토끼가 거북이와 비교할 때 빠르지, 기린과 비교하면 빠르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적인 비교에 빠지만 착각의 늪에 헤매고 만다.
둘째,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보자.
나는 장년부 사역도 하지만, 오래 전부터 청소년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 38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한다고 청소년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과연 나는 청소년을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혹시, 내가 오랫동안 청소년 사역을 해왔기에 청소년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고민, 아픔, 갈등, 내면의 생각을 깊게 알고 있기는 한건지 나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본다.
셋째, 나의 내면을 자세히 보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에 나의 내면을 자세하게 볼 여유가 없다. 마음을 잡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나의 자아를 특정할 수 없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조차 일관성있지 않는 모습, 나와 타인을 수용하지 못해 요동치는 내 마음.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실제로 나의 내면을 직면하면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착각 속에 살고 있구나”라는 사실 뿐이다.
넷째, 내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자.
예수님의 제자라면 삶 속에서 예수님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말로는 믿음, 사랑, 소망, 섬김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행동으로는 철저하게 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 타인과 관계할 때, 어떤 일에 진행할 때, 예수님의 생각이, 성경적 생각이 먼저 떠올라야 하는데 오늘도 나는 내 생각이 무의식으로 흘러나온다. 익숙함에 착각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로 말이다.
살다보면,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익숙함에서 오는 착각들, 나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더 늦기 전에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착각을 멈춘 후에, 내가 존재적으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죄인인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우리가 은혜스럽게 부르는 이 찬양의 가사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자.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란 이 표현이 삶으로 동의가 되는지. 내 삶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아픔과 꺾임이 있는지 자문해보자.
사랑하는 동역자, 성도님들과 이같은 고민, 갈등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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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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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대구와 거제도에서 봉사한 존 시블리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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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선교사 존 로슨 시블리(John Rawson Sibley, 1926-2012)는 최근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는 대구 동산병원(1961-68)에서 그리고 거제도(1969-1977)에서 8년간 의료사업을 펼쳤던 인물이지만 거제도 주민조차도 그의 봉사를 모르고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부산 늘빛교회 시무장로였던 정태산 의사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그의 봉사를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앞선 시대의 봉사자를 기억하는 것은 후대 사람의 도덕이기도 하다.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에는 ‘전사불망 후사사야’(前事不忘 後事師也), 곧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일의 스승이라’고 했는데 시블리의 헌신은 오늘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존 시블리는 1926년 10월 7일 미국 뉴저지주 메일플우드에서 노만 시블리(Norman Sibley)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3년 앰허스트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인 1945년 2월 육군에 입대하여 일본에서 복무하였다. 이때 만난 의료선교사 토핑(Dr Topping) 여사의 영향으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48년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만난 진 버틀러(손진희, Jean Lee Butler, 1926-?)와 그해 7월 2일 혼인했다. 부인은 교육학을 전공한 영어교사였다. 시블리는 의학 공부를 위해 노스웨스턴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리과 2년, 일반외과학 4년의 수련의 과정을 이수하고, 1960년 부인과 함께 미국북장로교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961년 대구지부로 배속되어 대구동산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게 된다. 마펫 원장의 안식년 기간에는 원장 서리로 일했다. 동산병원에서 일하는 한편 대구 한센병 전문병원인 애락원에서 외과진료를 병행했다. 특히 그는 병원신축이 필요하다고 보아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벌려 애락원에 3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는데, 국내에서 유일한 정형외과 수술관이 되었다. 이 애락원이 1968년에는 대구애락보건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시블리는 정형외과 김익동 과장과 더불어 한센병 환자 수술을 시행했는데, 한센병의 이차 증상으로 오는 안면 마비 환자에게 근전이술과 안면 현수 고정술, 또 눈썹이 사라진 자리에 두피 머리카락을 이식하는 수술을 시행하는 등 한센병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1963년 동산병원의 이철 외과 과장이 3년간 미국 연수를 가고 없을 때는 다른 의료선교사인 존 해밀턴 다우슨(John Hamilton Dawson)과 함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미국의 선진 의료기술을 전수하였다. 1964년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성형외과 및 일반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이수하는 등 의료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다시 내한한 1969년에는 거제도로 가서 의료활동을 재개하였다. 그가 거제도로 간 것은 그곳의 의료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시블리 의사는 세계교회협의회 산하 기독교의료위원회(CMC)에서 ‘거제지역사회보건시범사업’(Jojedo Community Health and Development Pilot Project) 승인을 받아 거제군 하청면 실전리에서 시범사업을 위해 ‘거제건강원’이라는 기관을 개설하고 전통적인 병원 중심의 의료가 아닌 예방 등 더 넓은 의미의 지역사회 보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거제 주민들은 이곳을 ‘실전병원’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시블리 의사는 우리나라 공중보건 역사상 중요한 ‘지역사회의학’을 도입한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시블리는 치료의학의 한계점을 발견하고 차츰 병원 중심의 치료의학으로부터 지역사회 보건교육 및 일차보건의료접근법을 활용한 지역사회의학을 개척한 것이다. 이것은 저비용 고효율의 1차 의료보건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제도에서 첫 사역은 대구동산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한 고수자, 김정남, 문태임, 유시영 등 네 간호사가 동참하였다. 유승흠 의사도 약 1년간 시블리 의사와 동역했다. 그 후 시블리 의사는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에게 자신의 의료사업을 도울 한국인 의사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때 장기려 박사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복음병원 내과에서 일하던 정태산 의사를 천거하였다. 그래서 정태산 의사가 거제도로 가서 시블리 의사와 같이 오랜 기간 동역하였다. 시블리 선교사는 거제도에서 8년간 일했는데 ‘섬 주민을 돌보는 선교사’라는 제목으로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거제도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1977년 51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거제도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보건학에 대한 논문으로 1979년 하바드대학교로부터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에는 태국의 피난민 켐프에서 보건사업을 전개하였다. 1981년에는 다시 내한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지역사회의학 교수로 활동했다. 1983년에는 네팔로 가서 의료선교사로 3년간 봉사했다. 의료선교사직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에서 의사와 교수로 활동하고 2012년 6월 24일 8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거제도 주민들은 시블리의 공적을 기념하여 공적기념비를 세웠다. 슬하에 4자녀를 두었는데, 차남 노만(손용만, Norman Sibley)는 마삼락 박사와 더불어 1982년 한국이 풍물 사진을 엮어 First Encounters라는 영문 책을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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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