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4(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성서연구] 성탄 특집
    <특집>이란 신문이나 잡지, 방송 따위에서 특정한 내용이나 대상에 중점을 두고 하는 편집 혹은 그런 편집물을 말합니다. 며칠 전 한국기독신문에서 평신도성서연구 원고를 부탁하시면서 <이번 신문은 성탄 특집>이라고 하셨습니다. 12월의 성탄의 달이므로, 신문사는 성탄 특집 기사를 싣는 게 당연하겠습니다. 그런데 성탄 특집은 신문사에서만 준비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성탄 특집을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목회자는 성탄에 맞춘 설교를 준비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모든 설교가 다 부담되지만, 특히 절기 설교는 더 힘이 듭니다. 그 이유는 신앙 연조가 깊은 성도들은 주보에 실린 설교 본문과 제목만 보면 설교의 내용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성탄절 설교는 그 내용이 이미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설교자는 성탄 설교를 여러 차례 해야 합니다. 올해는 성탄절이 주일이어서 설교 부담이 한 번 줄었다고 하겠습니다. 보통은 성탄절 직전 주일에 성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12월 24일 성탄 이브에 찬양예배를 드리면 그때도 성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리고 성탄절 당일에도 성탄을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러니 내용을 이미 짐작하고 계시는 성도들을 앞에 두고 성탄절 설교를 집중적으로 해야 하니, 설교자는 매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에 이루어지는 집중 설교 역시 성탄 특집인 셈입니다. 거기다가 성탄 감사헌금을 드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행사를 벌이는 등, 요즘 교회마다 성탄 특집을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그런데 특집의 이면을 생각해 보셨나요? 특집이 나올 때는 온통 그 주제에 집중합니다. 12월에 교회와 성도들마다 성탄하신 예수님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탄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주제에 대해서 완전히 침묵 모드로 들어갑니다. 특집은 화려하지만, 특집이 끝나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는 12월에 성탄을 집중적으로 말하고, 12월 25일이 지나면 언제 성탄절이 있었냐는 듯이 전혀 성탄절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성탄 트리가 교회 뜰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성탄절의 잔상이 남지만, 트리마저 철거하고 나면, 성탄은 사라집니다. 열한 달은 기다려야 다시 성탄을 말하게 되고, 그때 다시 우리는 성탄 특집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질 것입니다. 이제 이런 우리 모습을 좀 바꾸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1998년에 개봉된 <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가 있습니다. 한석규가 초원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 역을, 심은하가 주차단속요원으로 일하는 다림의 역을 맡아 잔잔한 사랑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수채화 같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마음을 끕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이었고, 정원이 죽어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눈이 쌓인 12월이었습니다.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무더운 8월이 오래 남길 바라는 12월의 크리스마스로 덮이면서 관중의 마음에 여운으로 남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제목을 우리 삶에 옮겼으면 합니다. 8월에도 생각하는 크리스마스, 어떻습니까? 저는 연중 성탄절 찬양을 듣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습니다. 아이들이 <웬 캐롤?>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성탄 특집으로 분주한 12월에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제 삶에 탄생하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 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천여 년 전, 특정 상황에 탄생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헤롯 왕 때라는 시간을 2022년으로, 유대 베들레헴을 온갖 갈등으로 복잡한 대한민국으로 바꾸면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탄생하여 오고 계신 중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예수님을 <오시는 하나님, The Coming God>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도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일이 아닌 이유는 365일을 성탄일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매일 탄생하시는 예수님을 매일 맞이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12-25
  • [소강석칼럼] 본질이 아니면 우상
    최근 안준배 목사가 ‘한국문학 속의 우상과 구원’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기독교와 관계된 소설들을 평론한 것이다. 제도권에서 보면 삐딱한 시각으로 쓴 소설들이다. 발표 당시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들은 본질과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본질과 근원 그리고 원형 속에만 구원이 있고 제도화 정형화 화석화된 종교의 틀 안에는 우상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순교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순교 문제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다가 교단이 나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한 사태가 소설가 김은국에게는 일부 제도권 교회들이 순교를 우상처럼 여기고 있다고 보여진 것이다. 김은국은 ‘순교자’라는 소설에서 순교적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신 목사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거기에는 구원도 없다는 예언자적 선포를 했다. 이범선의 ‘피해자’ 역시 제도권으로 전락한 기독교와 교회를 희화화했다. 주인공 최요한은 독실한 장로의 아들로 자란다. 아버지 최 장로는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아들과 똑같이 사랑한다. 그런데 최요한이 자라 고아인 양명숙을 좋아하게 되자, 최 장로는 양명숙이 고아이기에 안 된다며 결혼을 반대한다. 이 사실을 안 양명숙은 상처를 받고 요정의 마담이 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최요한을 다시 만난 양명숙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요한은 영원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양명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때 모두 양명숙을 정죄한다. 최요한은 양명숙을 변호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그녀를 죽인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아니,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입니다.” 결국 율법과 형식으로 찌들어 있는 제도권의 교회가 양명숙을 죽였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안 목사는 당시 소설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본질과 원형, 근원을 찾아가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원래 시(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보면 말씀 언(言) 자에 관청 시(寺) 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곧 기독교적 표현으로 하면 성전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시인은 신탁을 받아 왕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므로 시가 아무리 서정성과 심미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예언자적 메시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안준배 목사는 먼저 윤동주 시인의 저항성을 넘어 평화의 이상 세계를 갈망하는 예언적 요소를 소개했다. 그리고 김현승의 시를 논했고 김현승에 이어 필자의 시를 평론했다. 필자도 시의 예언성을 알기 때문에 심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시에 예언성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은 끊임없이 본향과 본질을 향해 돌아가는 아드 폰테스(ad fontes) 운동을 한 것이다. 그 본향과 본질을 붙잡는 곳에 진정한 구원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도권 안에 머물거나 그것만을 붙잡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우상 속에 머무를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항상 끊임없이 아드 폰테스, 신앙의 본질,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지 않고 오늘의 교회가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우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우리 안의 우상을 허물 때 한국교회 연합과 세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2-12-25
  • [시사칼럼] 메시아
    열사(熱砂)의 땅 카타르에서 열린 제22회 월드컵에는 처음부터 이변이 속출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강력한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를 개막전에서 2대 1로 격파한 경기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며칠 후 아르헨티나는 경시할 수 없는 건넛마을의 호적수 멕시코와 일전을 치렀습니다. 이 경기에서마저 패배한다면 예선 탈락이라는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었던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한 골과 도움 하나로 맹활약을 펼친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의 활약으로 이겼습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습니다. “메시, 메시아가 되다”(중앙일보, 11. 28). 십여 년 전부터 이 선수는 유럽무대에 진출해서 소속팀을 우승시키고 최고선수상을 휩쓸면서 그 이름을 빗대어 “축구 메시아”라 불렸고 “메시가 곧 축구다”라거나 심지어 “메시는 예수와 축구를 하며 놀고 있다”(마라도나)는 말까지 듣곤 했습니다(시사인, 2010. 6. 10).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사상초유로 성탄절이 있는 12월까지 진행되는 바람에 “메시아”라는 말이 더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사실 “메시아”라는 말의 용례는 운동경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메시아”는 한 세기 동안 군림하고 있는 인기 유행어에 해당합니다. 일찍이 독일의 유대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2)은 “(…) 행복의 관념 속에는 구원의 관념이 포기할 수 없게끔 함께 공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약한 메시아적 힘(schwache messianische Kraft)이 부여되어 있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에서)라며 “메시아”라는 관념을 차용합니다. 이후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 것”(le messianique sans messianisme)으로 자신의 사상을 차별화해서 발표합니다. 신적인 간섭 내지 개입이 역사적 필연일 수는 없지만 메시아적 힘(운동)만은 수긍한다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역시 “메시아적 도래” 혹은 “메시아적 세계”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뜻밖에도 성경의 바울서신에서 그 근거를 도출하는 그의 사상을 “메시아 없는 메시아니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한보희). 사도 바울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던 모로코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lain Badiou) 또한 비슷한 메시아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메시아”라는 인상적인 개념을 불교계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불교의 미륵(彌勒)이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다’는 주장을 들어보셨습니까? “미륵”(彌勒)은 미륵보살이라고도 하고 미륵불이라고도 하는데,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도래한다는 존재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메시아와 그 지위와 역할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게다가 단어 자체도 본래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자비나 우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 ‘미트라’(Mitra)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마이트레야’(Maitrya)가 파생되었고, 이를 한자어로 번역하면 “미륵”이지만 히브리어로 번역하면서 “메시아”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42). 그러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면 오히려 기독교의 메시아 개념이 불교의 미륵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합니다. 하기야 주지스님이 누가 교회에 가서 이야기하고 오겠는가 하니 모두가 쭈뼛거리는 상황 속에서 동자승 하나가 손을 들고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유머도 있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의 앞부분부터 등장하는 ‘기름 붓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마쉬아흐’인데, 메시아라는 말은 이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등장 시기는 불교의 미륵 사상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기원전 5, 6세기 인물로 알려진 반면, 기름부음은 그보다 천 년 이전의 야곱(창 35:14)이나 모세의 시대에 이미 등장하고 있고(출 30:26),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인 제사장(출 30:30)이나 왕(삼상 10:1; 삼하 2:4)의 출현 또한 마찬가지로 불교의 미륵에 비해 훨씬 앞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메시아”는 신령한 기름부음을 받을 자로 인류의 구원자요 대속자로 오실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그 표적을 이사야서(9:6)를 비롯해서 수많은 책들이 점점 더 또렷하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렘 23장, 겔 34장, 암 9장, 미 5장 등). 바로 그 진정한 메시아가 이 땅에 나신 성탄의 달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지양합니다. “메시아적 세계”가 아니라 ‘메시아의 세계’를 수긍합니다. 이단에서 곧잘 도용(盜用)하듯 예수 이외에 그 누구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월드컵 우승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도탄에 빠진 이 세상 속에 참된 “평화”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메시에겐 미안하지만, 오직 메시아 예수 만세!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12-25
  • [은혜의말씀] 기도 :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킵니다!(출 32:7~14)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모든 죄를 싫어하시지만, 그중에도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영적 음란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진노하십니다.(10절) 모두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십니다. 모세를 조상으로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도, 모세에게 나를 말려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오버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심으로, 모세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시고, 마치 그의 기도 때문에 참으시는 것처럼 하시면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14절)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모세의 기도는 과연 어떤 기도였습니까? 1. 언약을 붙드는 기도였습니다.(13절)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약속입니다. 그 언약이 다윗으로, 그리고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는 것이 신약입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드리는 기도는 강력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잘났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늘 연약하고 범죄 하였지만, 우리를 향한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드심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님들은 자기 생각, 자기 고집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자신을 드리는 기도였습니다.(32절) 모세는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자기 생명을 죄인을 위한 제물로 기꺼이 바치고자 합니다. 죄인과 한 운명이 되려는 뜨거운 마음, 이것이 중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세의 간구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의 기도를 보면서 한 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리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진멸 당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살립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생들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간절히 중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그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12-25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1
    작은 시골마을에 조그마한 개척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해 몇 차례는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즐거움의 가장 큰 이유는 맛있는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어서 일거다. 다음으로 성탄절의 뜻도 의미도 잘 모르면서 재밌게, 힘차게, 열심히 불렀던 탄일종, 동방박사 세 사람이란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기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인데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함께 어울리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던 거 같다. 예를 들어 탁구치고, 성경퀴즈, 성경 찾기, 찬송가 찾기 등이 즐거웠지만 특별히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당시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연합활동이 있었는데 대림절기가 되면 그동안 준비하고 연습한 연합찬양의 밤을 가졌는데 그 감동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가을을 노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미처 덜 준비가 된 우리의 몸은 적응을 위한 적지 않은 고통을 격기도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은 인정도, 사정도 없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연초에 계획하고 꿈꾸었던 일들을 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곧 다가올 새해를 기대하는 열정을 새롭게 주시는 주님을 인하여 감사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는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을 어떻게 맞고 보내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해마다 달랐다는 느낌이다. 사회적으로도 너무나 달라져 적응이 쉽지 않을 정도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제한적이었던 교회공동체내의 활동이 다시금 시작되는 분위기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옛날이 회상될 때가 많다. 예컨대 요즘은 보기 힘든 새벽송의 추억이다. 성탄 이브에는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예배와 음악회가 진행되고 이어서 게임도 하며 밤을 지새우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빛을 쫒아 새벽을 깨우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온 누리에 알리는 것이다. 비록 아름다운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우리 중심에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담아 구원의 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리고 온 세상에 이 놀라운 주의 사랑을 노래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는 복된 성탄의 계절이기를 소망해 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12-25
  • [목회자칼럼] 유토피아와 성탄절
    하늘에서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아담한 집의 창문 사이로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가족 중 막내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더니 보란 듯이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다음주는 드디어 크리스마스에요. 제가 1년 동안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죠?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해요. 그리고, 예수님 제가 올해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은요...” 5살 어린이가 바라는 성탄절의 참 모습은 예수님이 자기가 바라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1년 동안 꼬박 12월을 기다린 것도 성탄절이 되면 생일, 어린이날과 마찬가지로 떳떳하게 하나님께 선물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 올 것이라 믿으며 그 선물을 받는 크리스마스가 5살 어린이에게는 최고의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막내의 기도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아이의 아빠는 달력을 보며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승진발표일’이라고 적힌 것을 봅니다. 1년의 마지막 승진 발표가 있는 날이 하필 크리스마스 다음날입니다. 아빠는 오래전부터 승진을 준비하고 원했는데, 하필 그 날이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혹시, 예수님의 생일을 맞아 나를 위해 승진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26일에 승진이 된다면, 이 아빠에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자, 그 곳이 곧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성탄절을 꿈꾸고 있나요? 5살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이 어떤 선물을 주실까?’ 기대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 아이의 아빠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수님이 승진을 시켜주시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있나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가 되면 뭔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뭔가를 주시지 않을까? 이왕이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걸로, 가능하면 돈이 좀 되는 걸로...” 어렸을 때,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집에 들어오는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린 맛있는 간식들이 더 반가웠던 것처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사실만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나를 위해 가지고 왔으면 하는 것들로 기대하며 반기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어지럽고 힘든 세상, 경쟁과 다툼 속에 참 평화와 평안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내 마음 속에서 충만히 이뤄질 때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어디든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많이 소유해야지 유토피아가 이뤄질 것이라 말하고, 더 높은, 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지 유토피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밟고 일어나야지 유토피아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참 평안’을 맛보기만 하면 그곳이 유토피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알 리도, 알 수도 없는 비밀이자, 기쁨인 셈입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한국교회가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오히려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을 쌓은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2022년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실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 예수님의 탄생 그 사실 만으로 기뻐하며 그 속에서 참 의미를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는 도피적 유토피아 대신 무너진 사회와 정의를 회복하는 재건 유토피아를 2023년에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2023년에는 내실이 든든한 한국교회, 거품보다는 알맹이가 있는 한국교회로 성숙하기를 소망해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12-20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이상에서 6.25 전쟁당시의 부산지방 상황과 기독교계의 활동, 기독교계의 전도 및 구제활동, 기독교 병원의 설립과 의료활동 등 전쟁기 상황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제 2년여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 곧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이 어떠했던 것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수행자들(군인) 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행위주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인데, 전쟁에서 우연하게 죽었다고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었다. 1차 대전 당시 8백만 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1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최악의 소모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제2차 대전에서는 7천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민간인이 4천만 명이었다. 나치독일이 일으킨 독소전 당시 소련의 20대 남성 70%(1,400만 명)가 전사했다. 스탈린의 학살이 2천만 명, 마오쩌뚱의 학살 4천만 명에 달했다. 6.25전쟁은 3년 1개월 2일 간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재산피해는 그만두고 인적 피해를 보면, 한국 및 UN군 피해자가 776,360(사망 전사 부상 실종)명, 북한 및 중공군 피해자 1,773,600(북한군: 801,000명, 중공군: 972,600명)명이었고, 민간인 피해(사망 학살 부상 실종)는 2,540,968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피난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말한다면 군인 40만, 민간인 약 2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난 5,600년 동안 1만 4천5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약 35억 명이 전쟁의 와중에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무기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인권모독, 인권유린이 자행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독일의 위험사회학자 율리히 베커(Ulich Backer)는 현대의 재난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재난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둘째, 재난의 범위가 대규모적이며, 셋째, 재난의 고통이 무한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재난의 아픔을 안고 70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기독교 일각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은 거부하거나 피해야 하며 무저항 비폭력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런 입장을 기독교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라고 부른다. 그런가하면, 전쟁을 불가피하게 하는 방어적 전쟁이나 정당한 동기와 원인을 지닌 경우에는 전쟁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정당전쟁론(Just war), 혹은 전쟁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성전론(The Crusade)도 있고 미국의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현실적 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느 것이든 완전한 주장일 수 없지만 그래도 평화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에 근접한, 그래서 지상의 평화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평화주의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기꺼이 평화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화주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평화주의 원칙을 난처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 비전의 윤리는 고상한 가치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인내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12-20
  • [서임중칼럼] 光水風의 교훈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종교를 따라 증산도에 심취했었다. 태을주, 오주, 절후주, 운장주, 갱생주, 칠성경, 진법주, 개벽주, 천지불주를 다 암송하면서 주문을 낮밤으로 외웠다. 이것이 상제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류가 相生과 福樂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나가는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교의 經典에 심취되어 한 때 성철, 법정스님의 저서를 탐독했다. 그럼에도 내 삶의 환경은 상생과 복락의 체득은커녕 느낌조차 없는 가난과 질고의 세월이었다. 이런 삶을 이겨내지 못하고 삶을 포기할 즈음에 알지도 못하는 힘에 이끌려 교회로 갔고 처음 예배당에 앉았을 때 그토록 추구하던 상생과 복락을 무의식적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흔 살에 목사가 되어 오늘도 목사의 길을 행보한다. 그 옛날 상생과 복락과 더불어 사는 삶을 교회를 통하여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체득했기에 내가 교회를 통해 체득한 그 기쁨을 전하는 복음의 삶이 나의 삶의 전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相生의 아름다움이 아닌 相剋 相衝의 어둠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느낀다. 무엇인지 모를 濁함으로 영혼이 숨을 쉬지 못하는 영적 고통이 심령폐부까지 밀려들기도 한다.얼마 전 원주 구룡산 중턱에 눈이 부시는 것보다는 마음이 더 부시는 뮤지엄 산(SAN)을 다녀왔다. 일본 건축의 철학자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의 작품이다. 2013년에 개장한 뮤지엄 SAN(Space, Art, Nature)은 자연과 예술이 있는 공간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 <SAN>이다. 그리고 우리 말 ‘산(山)’이기도 하다. 빛과 물과 바람의 건축가로 알려진 ‘안도’의 교회 작품으로는 오사카의 <빛의 교회>, 홋카이도의 <물의 교회>, 고베의 <바람의 교회>가 있다. 한국에도 ‘안도’의 작품이 몇 개 있지만 특히 제주도 <글라스 하우스>가 있다. 오래 전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공간 글라스 하우스의 <민트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원주에 세워진 해발 275m에 걸터앉은 뮤지엄 <산>에는 빛, 물, 바람을 재료로 쓰는 안도의 건축 철학이 담겨 있다. 웰컴센터에서 시작해 플라워가든, 워터가든, 본관, 스톤가든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자연과 하나 된 미술관, 오솔길 지형을 그대로 살린 미술관, 7만여 평의 부지가 자연에 안긴 거대한 작품이 <산>이다. 그 <산>에서 삶을 묵상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이다. 그리고 빛과 어둠, 땅과 물을 나누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 하시면서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창세기 1장이 마무리 된다. 빛과 물과 바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이다.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만 원주 <SAN>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보았다.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로 인해 단절의 담이 무너지고 수직으로 하나님과 수평으로 인간과의 관계가 이어졌다. 그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사랑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그 삶 자체가 오늘의 천국이다. 역설하면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이 멈추고 단절된다면 하나님과의 이어짐도 단절된다. 하나님과 단절 되는 사람은 사람과의 이어짐도 멈춘다. 그것이 오늘의 지옥이다. 빛과 물과 공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양과 질량은 다르지만 속성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은 따뜻해서 사랑으로 표현한다. 빛은 차별 없이 모든 곳을 비춘다. 그래서 진정한 평등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겸손으로 표현한다. 上善若水가 그래서 명언이다. 물의 흐름에는 삶의 지혜가 담겨있고 그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공기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그런데 빛은 지하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은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한다. 바람은 막힌 곳을 지날 수 없다. 빛은 생명을 주지만 빛이 가열되면 火가 된다. 화가 이르는 곳에는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은 만물의 생명을 살리지만 물이 濷이되면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바람은 濁함을 정화하지만 颱가 되면 모든 것을 휩쓸어 초토화 시킨다. 그래서 過猶不及이 명언이 된다. 나는 목사로서 사람을 많이 만난다. 목사이기에 예수 믿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 道를 통해 빛처럼 사랑으로, 물처럼 겸손하게, 바람처럼 淨化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종종 火와 濷과 颱의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이르는 곳곳마다 水魔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火魔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颱風이 휘몰아치고 지난 것처럼 폐허가 되는 것을 본다. 그들의 삶은 한 마디로 貪瞋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그 자체다. 불가에서는 이를 三毒이라 했고, 탐진치를 벗어남이 열반이요 해탈이라고 가르쳤다. 삶의 이치가 다를 바 있겠는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연주하는 자연의 이치 光水風의 교훈을 통해 내려놓음, 낮아짐, 물러섬, 그리고 때로는 멈춤의 삶을 사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2-11-25
  • [성서연구] 말세에 들어야 할 예언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 <말세>, 세상의 끝이란 규정합니다. 세상 끝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마태복음 24장 3절에 이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의 답은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우선 대결과 갈등이 심화되어 민족과 나라가 서로 대적합니다. 대결과 갈등은 개인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기근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있을 것이라 하셨고, 이에 더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말세의 모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을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말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선 말세란 영적이고 실존적 개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세란 주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로 정해진 게 아닙니다. 예컨대 1899년까지는 말세가 아니었고, 1900년부터 말세였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말세는 모든 시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였던 하박국, 황충을 비롯한 메뚜기 류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된 고통을 경험한 선지자 요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시대를 살았던 사도들은 모두 그들의 시대를 말세라고 여겼습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사도들이 방언했을 때,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한 데 대한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서 2장 28~32절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첫째로, 현재의 형편이 아무리 좋아도 그 다음에 올 말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28절의 첫 단어는 <그 후에>입니다. 무엇의 후일까요? 요엘 시대에 메뚜기 류의 습격으로 황폐하게 되는 고통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고통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엘 2장 24~25절을 보면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28절의 <그 후에>는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좋은 때 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할 때 <말세에>란 단어를 추가하여 인용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가 말세입니다.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그 후에 말세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풍요롭고 평화로워도 우리는 늘 그 다음에 올 말세에 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미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말세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세상이 끝나는 일뿐인데,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마치 임종하는 사람에게 십 년 후를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끝 그 후에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세상이 끝난 후에 시작될 다음 세상, 즉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예언을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뿐이지요. 그래서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와 성도가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본다면 그 초점은 구원에 맞춰져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성도는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11-25
  • [시사칼럼] 아재상법(我在上法)
    ‘신필(神筆)’로 불렸던 홍콩의 김용이 쓴 「신조협려」에 보면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절벽 아래로 투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여주인공이 벌의 날개에 “아재곡저(我在谷底)”라는 글씨를 써서 날려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나는 골짜기 아래(바닥)에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중국 명문 가문 출신으로 “명보(明報)”를 창간한 탁월한 언론인이었던 저자(본명 사량용)가 신문의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중소설을 연재하면서 느꼈던 남다른 소회를 담아 살짝 흘려보내는 고백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이 문구를 떠올린 이유는, 최근 이와는 반대로 “아재상법(我在上法)” 곧 ‘나는 법 위에 있다’는 대담무쌍한 선언을 노골적으로 쏟아내는 듯 행동하는 무리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바로 서울 성북구 소재 사랑제일교회 사건에서입니다. 합법적인 재개발지역에 포함된 이 교회는 보상 문제로 조합 측과 다투다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최종적으로 패소하고 말았지만 몇 차례의 명도집행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방해하여 마침내 조합 측의 굴복을 이끌어 냈습니다. 양측이 협의보상금 500억과 대체 부지에 합의하여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교회의 자칭 목사는 “그래, 나는 대법원 위에 있어”라는 망발을 공공연하게 내뱉기에 이르렀습니다. ‘직접적 아재상법’입니다. 물론 법이라 해서 모두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때로 악법에 대해 혹은 자의적인 해석과 집행에 대해 분연하게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더군다나 ‘프로테스탄트’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신앙도 법치주의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법치주의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아재상법”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예수님보다 자신이 위에 있다(我在上主) 여기지는 않겠지요? 두 번째도 서초동 소재의 한 교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한국교회사상 가장 많은 돈을 들여 건축했다는 이 교회는 세상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본당을 지하에 두고 아동시설 등을 만들어 기부하는 등의 행보를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최대규모의 예배당 일부가 공용공간을 침범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코 고의로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결국 공공도로 점용허가를 내준 구청에 대해 주민소송이 제기되었고, 지난 2019년 10월 17일 대법원은 교회 측의 도로점용은 불법이므로 원상회복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법으로 건축된 예배당 일부를 헐어서 공공도로부분을 반환하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곧바로 집행정지 및 행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합니다. 예배당 헌당식에 참가했던 해당 지역 구청장은 “영원히 예배당의 점용허가를 해드리겠다”는 말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영적제사장법이 세상법보다 우위에 있다”, 평소 교회 측에서 자주 언급해 왔던 신묘한 화법입니다. ‘간접적 아재상법’입니다. 세 번째는 서울 강동구 소재의 초대형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소속 교단은 수년 전 목회자세습금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교계를 넘어 세상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교회는 부자세습을 시도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법을 무시하고 이루어진 일이라 더욱 반발이 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단 재판부가 세습무효판결을 내렸으나 총회는 화해수습이라는 명목으로 재차 탈법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세상법정에서 대표자지위의 존재 여부를 둘러싸고 엇갈린 판결이 오가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설립자 목사는 빈궁과 가난을 벗 삼았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마을 형의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에 훗날 큰 선물을 하면서 “주님께 바치나이다, 2003. 11. 30. 작은 종 드림”이라고 수줍게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단의 법 위에, 교단의 재판 위에 서 있습니다. 말은 안 해도 ‘묵시적 아재상법’입니다.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이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6. 16).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 자신만은 법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들 교회가 무슨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곧잘 법을 경시하며 유월하니 말입니다. 전술한 “아재곡저”는 원래 “아재절정곡저” 즉 ‘나는 절정곡 아래에 있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소설 속 골짜기가 하필 “절정곡(絶頂谷)”입니다. 높은 절정과 낮은 골짜기의 합성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 내려놓고 쓴 글 때문에 김용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다 갔습니다. 그는 한 때 기독교계열의 학교를 다녔다 합니다. “아재상법”이 아니라 “아재곡저”야말로 예수께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도 깨달았던 것일까요?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11-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