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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판단으로부터 자유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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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사역 중에 육체적 고통과 함께 많은 마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그러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을 머물며 말씀을 전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바울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에게 비난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정말 충성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 즉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로 자각하고 충성했습니다. 여기 <일꾼>이라고 번역된 <휘페레타스>는 <아래서 노 젓는 자>란 의미입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노예선에서 노 젓는 노예들이 나오지요. 그들은 쉴 새 없이 노를 저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래서 노 젓는 자로서 평생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파당이 있었습니다. 아볼로파가 있었는데, 아볼로는 바울에게서 배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아볼로는 바울의 손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이어 고린도교회의 2대 목회자가 되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바울보다 아볼로에게 기운 것이었습니다. 바울로서는 인간적으로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게바파, 즉 베드로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치명적 핸디캡은 한때 핍박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도처럼 일찍 주님의 부르심을 입지 못한 것, 그리하여 핍박자로 산 것을 마음 아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게바파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야말로 최고의 지도자요, 바울은 핍박자 출신으로 그가 전한 복음도 신뢰할 수 없다고 비난할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또 그리스도파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바울도 할 말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파가 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바울을 비난하면서 그리스도파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바울에 대한 비난과 파당은 바울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매우 초연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절을 <쉬운성경>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판단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판단을 받든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심지어 나 스스로도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참 부러운 모습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들의 말에 너무 민감합니다. 좋게 말해주면 교만해지고, 나쁘게 말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인생의 고통은 다른 이들의 평판에 민감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칭찬하면 교만해지고, 악플이 달리면 심지어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역자들도 이런 올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평판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이런 올무에 우리를 가둘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평가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최종 판단입니다.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시면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이 주는 한 표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며, 그 자리에 앉게 했어도, 주님께서 꾸짖으신다면, 그건 무익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노를 저어 배를 앞으로 가게 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충성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를 기다렸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늘 코람 데오의 마음으로, 주님께만 귀 기울이면서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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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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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길고양의 눈빛이 지금도 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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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영광에 있는 ‘청아’라 고 하는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로 왔습니다. 그런데 호텔 주차장에서 내리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를 보고 무섭지도 않은지 도망가지도 않고 오히려 애처롭게 울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뜻 보니까 암고양이인데 새끼를 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호텔의 정문 불빛에 반사되어 고양이의 눈빛과 제 눈빛이 마주친 것입니 다. 그런 고양이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구걸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도 고양이가 배가 고픈 것 같았습니다. 아니, 배 속에 있는 새끼를 위해서 모성애가 발동하여 어떻게든 먹이를 구하려고 밤거리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호텔 숙소로 들어가는 저와 마주친 것입니다. 원래 길고양이는 사람을 만나면 무서워서 도망을 가는데 어떻게 안 도망가고 오히려 야옹, 야옹하며 다가온단 말입니까? 그래서 고양이에게 줄 게 있나 보았더니 마침 한정식집에서 다음날 아침에 먹으라고 준 갈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갈비를 주니까 그냥 “땡큐, 땡큐, 굿, 굿” 하는 듯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배 속의 새끼를 위해서 더욱더 간절하게 뼈까지 쪽쪽 빨아 먹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너무나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보니까 “갈비를 몇 개만 줘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플라스틱 통에 있는 갈비를 더 주었습니다. 수행하는 비서들이 “목사님 드실 것은 남겨 놓으세요”라고 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어 버렸습니다. 제가 갈비를 줄 때마다 고양이가 구애를 하는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고양이를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많이 먹고 새끼들 낳아 잘 키우거라.” 그러자 고양이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주인에게 버림을 받아 본 적이 있지요. 그러나 정말 제가 사람을 잘 봤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따뜻한 정을 줄 거라고 짐작했죠. 제 감이 옳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플라스틱 통에 든 갈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니까 고양이가 다 먹은 후에 포만감을 즐기듯이 감사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와 처음으로 마주쳤던 눈빛은 애절하고 간절했는데 먹이를 먹고 난 후에는 만족하고 고맙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정권사님이나 집사람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애완용 개나 고양이의 털이 빠져 날리면 건강에 안 좋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애완용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싶은 애정의 대상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더 그렇지만,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다 하더라도 이기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지 않은 정말 순수한 애정을 주고 싶은 대상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요즘은 애완용 개보다는 고양이로 많이 바뀌어 간다고 합니다. 그날 밤, 저는 제가 키우는 반려묘는 아니었지만 고양이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어 줬습니다. 계획된 사랑도 아니고, 예정된 사랑도 아니었지만 그날 저녁에 마주친 길고양이의 간절한 눈빛을 통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배 속에 밴 새끼를 먹여 살리기 위한 모성애로 가득한 길고양이를 사랑했다는 것도 보람이 있지만, 정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찮은 미물이지만 저를 알아보고 잠시나마 의지했던 고양이가 고마웠고 생명 사랑의 마음을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길고양이의 눈빛이 아련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하찮은 미물도 자기 배 속에 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음식을 달라 고 구걸을 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과 사랑을 쏟으 셨는지 모릅니다. 그 어버이의 은혜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어버이의 은혜를 무조건 추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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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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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유에프오(U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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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인 5월 17일 미국 의회에서는 1970년 이래 50년 만에 이른바 ‘유에프오(UFO)’라고 불리는 ‘미확인비행물체’ 관련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해 미국 국방부를 비롯한 일련의 정보기관들이 이 문제에 관한 분석보고서를 제출한데 따른 후속조치였다고 합니다. 청문회는 그간의 조사 상황을 들으면서 새로운 영상도 공개했는데, 각각 삼각형과 원형 모양의 비행 물체를 가리키는 정식 명칭이 ‘미확인 비행 현상’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미확인 비행 물체(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라는 말에 익숙했었는데, 현재 미군은 ‘미확인 비행 현상(Unidentified Aerial Phenomena, UAP)’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작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부터 기산해도 군용기에서만 관측된 미확인 비행 현상(UAP) 중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례가 144건이라 했는데, 미 정보국 당국자는 새롭게 구성된 태스크포스 조사 결과 총 400개로 그 수치가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이 외계로부터 온 물체들 때문에 일어났는지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유에프오(UFO) 관련 논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미확인 비행 현상이 어느 때보다 많이 관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전부터 관련된 이야기들이 적잖았습니다. 6.25 전쟁 기간 중 미군들이 UFO를 보았다거나, 1976년 청와대 상공에 나타난 미확인 비행 물체들에 한국군이 집중 사격을 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분야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진 하나가 1995년 경기도의 어느 시골집에서 찍혔습니다. 평범한 시골의 가을을 취재하기 위해 한 농가를 찾은 문화일보 기자가 곡식을 타고 있는 노부부를 촬영한 사진 위쪽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UFO의 선명한 형체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전 세계 전문업체로부터 조작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이 사진 속 물체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2011년 5월 5일에도 어린이날을 맞아 한 가족이 놀이공원 하는 길에 우연히 서울 도심 한복판의 빌딩 위를 날고 있는 비행체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2021년 10월에는 김해비행장에서 한 영상제작자가 UFO를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UFO는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이들은 과연 외계로부터 날아온 물체들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신자들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광명체들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창 1:14-19). 뿐만 아니라 욥기서 38장 31절은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묘성”은 오늘날 ‘플레이아데스 성단’(Pleiades star cluster) 곧 ‘떨기별’로 부르는데, “묶을 수 있으며”라는 구절이 절묘하게 들어맞습니다. “삼성”은 오리온 별자리의 허리띠로 불리는 세 별을 가리키는데 육안으로는 일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구로부터 각각 800광년, 1200광년, 2000광년 떨어져 있다고 하니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 또한 현대 과학과 잘 어울립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수많은 별자리들 존재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욥 9:9, 38:32), 현재 인간이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신비한 별 곧 ‘블랙홀’의 존재를 연상하게 만드는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계 6:12, 14) 같은 구절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수많은 별 중에 외계생명체가 살고 있는 별도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UFO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유독 교인들이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인정하자니 왠지 신앙에 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교회에서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이 하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저도 이 문제 때문에 혼자서 고민하고 씨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는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갔는데, 수업시간에 지금은 작고하신 한 교수님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시는 거였습니다. ‘만일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해주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가 품고 있던 나만의 해답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전도해야 합니다.’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만, 더 좋은 대답이 있나요? 하나님께서 우주를 포함한 만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안에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는 전무하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습니다. 오직 이 한 가지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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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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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사명자에게도 시련이 오는가? (출5: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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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형 아론을 만나 드디어 바로 앞에 섭니다. 그런데, 바로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바로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노동을 더 무겁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차디찬 거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순종했는데,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고난과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하는 시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1.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15, 21절)
그들은 고통이 더해지고 자신들이 끌려가 매질을 당하자, 바로에게 찾아갑니다. 그리고 바로의 선처를 구합니다. 나아가, 모세와 아론에게 자기들이 바로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했다고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바로의 눈치를 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온 간데없고,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믿음이란 상황에 대한 반응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세상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할 줄 믿습니다.
2. 그러나 모세는 어떻습니까?(22절)
모세는 이 문제로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와야 합니다. 칼리쉬(Kalisch)라는 신학자는,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전능자의 뜻을 알고자 분투, 노력하는 경건한 영혼의 몸부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시 146:5)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있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하십니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께 마음을 토해 놓는 우리 사직동의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모세가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23절) 모세는 이 시련을 통하여 이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1. 이러한 시련은 예견된 것이라는 것입니다.(4:21)
다시 말씀드리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의 시련과, 세상의 미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시련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 가운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2. 이러한 시련은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입니다.(6:1)
하나님의 강한 손을 바로와 온 애굽에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 상황을 더욱 악화되도록 섭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련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나타내기 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직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 시련 앞에서도 당당하며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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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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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칼럼]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갱신과 회복을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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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냈다. 주님의 고난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생각하면서 어쩐지 모를 송구함과 민망함이 밀려오는 이유는 뭘까?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은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복음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작금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리라. 이러한 까닭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보다는 다시금 주의 마음에 못을 박는 참담함을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송구한 마음이다. 혹여 사순절이 나와 상관이 있는 절기라면 한번 깊은 묵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연유가 있겠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예배의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으로 진단하고 싶다. 이러한 판단은 그저 개인의 주관적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바다. 다년간 대학원에서 예배음악의 실제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얻게 된 결론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 해야 할 일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성경 말씀 앞에 서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정말 개인이, 가족이, 교회공동체가 생명력 있는 예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이 사회를 향한 선한 영향력을 다시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배와 찬양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다르지 않고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예배를 찬양으로 찬양을 예배로 바꿔 이해하면 되겠다.
예배는 피조물인 만물이, 인간이 창조주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예이자 의식이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을 향하여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사야서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1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인 치신 이유가 우리로 당신의 찬송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늘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정하여 다른 지파처럼 어떤 분깃도 주지 않고, 어떤 일을 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수종 드는 일에 전념토록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예배하는 일을 귀하고 중히 여겼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아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되 신령과 진정을 다 하여 드려야 하는데 외형적으로 잘 준비하여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거부하신 기사가 성경에는 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유념 또 유념해야 한다.
특별히 단체로 드리는 예배는 개인뿐 아니라 전체가 마음을 합하여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을 부어주신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예배는, 찬양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거기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하나 이것이 현실과 현장 속에서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위로나 은혜, 나아가 능력을 힘입지 못하게 되므로 세상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행하지도,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따라서 예배가 살아나야 하겠다는 것이다.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예배와 그 가운데 행해지는 찬양이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에 적합하여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 영광을 경험한 자만이 삶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어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칭송케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이것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고 복음 선포의 적극적인 표현이며 그 결과로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자 찬양이다.
문제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 속에서 영적 혼돈과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성경학자가 말한 것처럼 믿는 자들이 가장 성경을 멀리하고 믿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경성해야 한다.
그 옛날 우리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한 것을 다시금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대하고, 향하는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지? 진심으로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구원받은 백성으로 진실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며 찬양하고 있는지?
예배자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배하고 찬양하되 지, 정, 의 이 세 가지가 균형 잡힌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단체가 드리는 예배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말씀의 기초 아래 선교, 전도, 영적 교육을 위하여 적절한 변화를 준 예배와 찬양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 필요하나 때와 장소가 구별되어야 함은 물론 이 역시 하나님과 말씀 중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인간적인 것은 배제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고 이를 뛰어넘으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이성으로, 감성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 즉 이성의 틀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진실함으로 드려지는 개인, 가족, 공적 예배를 통하여 주님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의 도가 이 땅 가운데 흘러넘쳐 충만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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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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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혹시, 부모 자격증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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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주일 등을 보내며 교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새롭게 여깁니다.
이번 글은 35년 동안 ‘십대의벗’이란 청소년교육센터에서 부모와 청소년들을 상담, 교육해 온 청소년 사역자인 저자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초보운전 부모들, 자녀와 소통이 안되어 답답한 분들, 부모교육과 다음세대에 관심있는 분들, 믿음의 유산을 자녀에게 꼭 잘 물려주고 싶은 부모들>에게 전하는 ‘가정의 달, 부모 자격증’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사실, 저도 결혼이 뭔지,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고 결혼하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잘 키우고 싶었지만 어떻게 키우는 것이 잘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 채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문제이고,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아이가 어릴 때는 부부도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참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역한다고 온종일 교회서 시간을 보내고 자정 무렵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육아로 인해 녹초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내가 조금 힘을 내서 아내의 마음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며, 위로해줘야 하는데 나도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 내 감정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아내와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매일 싸우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자녀들은 어떨까요? 이때 자녀들은 그 순간순간을 눈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모아서 머릿속에 자신의 앨범을 만듭니다.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시킨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쌓여갑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길어지면 결국 자녀들은 부정적 자아상이 형성되어 삶의 태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자녀의 어린 시절 부모의 관계 및 갈등이 이렇게 큰 영향이 있다는 것을 부모로서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다 키우고 난 뒤에 깨달았는지... 후회도 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음을 알고 부모로서 성숙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자격증’을 얻으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첫째, 자녀의 마음을 얻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한다고 부모 역할 다 했다며 자녀의 마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자녀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감정을 만질 줄 알아야 하며, 생각을 읽어줘야 합니다. 어쩌면 부모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의 마음속에 부모가 던진 수많은 화살이 박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때로는 자녀 옆에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발, 내 옆에서 조용히 있어 주세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이 말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자녀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속도보다 자녀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전문적인 대화와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사랑을 담아 잔소리, 훈육을 하지만 그 말이 자녀에게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 전에 양치를 해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가 있습니다.
1. <명령형, 강요형의 부모> “이, 꼭 닦고 자” / 2. <논리형 부모> “이 상하면 너만 고생한다” / 3. <설교형, 훈계형> “밥 먹고 나면 양치질해야 해. 지금 당장” / 4. <비난형, 비판형> “입에서 냄새 나면 누가 너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겠니?” / 5. <거부형, 반대형> “양치 하기 싫으면 저리가” / 6. <조롱형, 욕설형> “양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데...”
혹시, 여러분은 위에서 열거한 6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가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랑과 수용의 언어가 아닌 명령, 논리, 설교, 비난 등의 대화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넷째, 쉬지 않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면허증을 장롱에 오랫동안 묻어 두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끄집어내서 실전에서 써먹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를 어느 정도 길렀다고 배움을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배움은, 특히 부모와 관련된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쉬지 않고 배워야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말씀과 예배를 통한 부모 면허증을 획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에너지의 힘은 엔진에 있듯 우리 자녀의 힘은 말씀과 예배에 있습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 좋지만,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부모들이 끊임없이 자녀들을 독려하고, 말씀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먼저 말씀과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예배의 부모 면허증’ 이제 한 번 따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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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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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한상동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강단 아래에서 인사하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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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부산에서 체류하는 기간 이승만은 주로 미8군 교회당으로 가 예배를 드렸으나, 감리교도였던 그는 보수감리교회당에서 예배드린 일도 있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예배드린 일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한 가지 정리해 둘 것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화(戰禍)에 지친 피난민들을 만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양성봉 경남지사의 건의에 따라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인 29일 주일 낮 예배 때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양성봉 장로는 이 교회 시무 장로였기에 대통령을 초량교회로 모시고 온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난을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이날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 1절에서 9절까지 긴 본문을 읽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이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한상동 목사가 즐겨 봉독하던 본문이었다. 이 본문을 읽은 후 한상동 목사는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때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며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설교 후 3장 찬송을 불렀다. “이 천지간 만물들아 복 주시는 주 여호와 전능 성부성자 성령 찬송하고 찬송하세.”라는 가사였다. 이어 담임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폐했다.
예배를 폐한 후 이 대통령은 담임목사의 안내를 따라 인사하게 되었는데, 그가 강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한상동 목사는 ‘아래 강단에서 인사하십시오.’라고 하여 대통령은 강단에 서지 못하고 강단 아래에서 인사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 일을 두고 한상동 목사는 대통령이라 할찌라도 강단에 세우지 않았던, 그래서 강단의 권위를 지켰던 목사로 널리 회자 되었다. 이 일은 한상동 목사의 미담으로 알려져 부흥사들의 예화로 원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일까? 이 점을 심각한 왜곡으로 본 이가 초량교회 김성태(金性太) 장로였다. 1905년 7월 29일 경남 충무의 문화동 80번지에서 출생하신 김성태 장로는 교회 인근의 부산 초량동 824번지로 이주하셨고, 1947년 2월 25일에는 일신여학교 출신인 구소명(具小命) 여사와 혼인했다. 그의 가족은 오랫동안 초량교회에 출석했는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초량교회 예배 참석시의 목격자였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한상동 목사는 종전과 같이 하나님의 장중에 든 군의 필승을 역설, 강조하였고, 이날 부른 찬송가는 필승과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삼천만 겨레의 우렁찬 합창곡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상동 목사가 강단에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강단에 서지 않고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말한다. 한상동 목사는 이 대통령에게 강단에서 인사하도록 말했으나 이 대통령이 강단은 목회자가 서는 곳인데 감히 내가 설 수 없다며 사양하고 스스로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증언한다. 도서출판 광야를 운영하던 최수경 사장은 ‘한상동 목사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책을 편집하면서 『초량교회 80년사』를 집필했던 김성태 장로의 한상동 목사 관련 글을 전재(轉載)하기 위해 1986년 초에 김성태 장로를 만났을 때 그가 이 점을 증언한 것이다. 그는 최수경 사장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이 대통령은 미8군 군인교회 예배에 참석하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종종 우리교회에 오셨지요.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6.25 동란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아 통회와 승리를 구하는 애끓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이 대통령께서 예배가 끝나고 자기 심중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한 목사님은 강대상에 이 대통령을 모시려고 하셨지요. 이때 대통령은,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 감히 설 수 없다’고 사양하여, 강단 아래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강단에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왜곡된 사실입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목격자인 김성태 장로의 증언은 신뢰할 만하고, 그의 영애인 김성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 장로는 소천하기까지 기억력이 흐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태 장로는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일생동안 가르쳤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신앙과 학자적 양심으로 사실을 증언함으로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소한 일화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진실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로마인들은 “진실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veritas)라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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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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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작은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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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무엇부터 담임사역을 시작할까 생각하면서 첫 심방을 교회 성도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영세민 아파트 거주 가정부터 심방을 시작했다. 그 시간들 가운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10평이 안 되는 방 한 칸에 대여섯 식구가 사는데 가장(家長)이 지체장애인이라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한 가정을 심방할 때면 으레 준비한 찬송가와 성경본문으로 시작을 하지만 이 심방은 형식을 깨고 먼저 그 한 가정 한 가정을 통해 30 여분 가량 이야기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들의 아픔을 듣고 나누며 함께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돌아온 날이면 늦은 밤까지 기도실에서 침묵으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작한 목회 사역 1호가 사랑의 주일이었다. 1년 중 다섯 번째 주일이 있는 주일을 ‘사랑의 주일’로 명명하고 특별헌금을 하여 소외계층을 돕는 사역으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2호 사역이 장애인 초청주일이었다. 포항시내 여러 장애인단체와 연결하여 매년 4월 셋째주일에 1천여 명의 장애인을 초청하여 함께 하는 위로와 희망의 날이었다. 이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함께’라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역 중 하나다. 이어서 세계선교위원회를 발족하여 44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16개 국가에 협력선교를 하며, 국내 선교의 일환으로 9개 교회를 개척설립하고, 택시 타기 주일, 천사운동, 합동결혼식, 동호인선교회, 사랑의 순교현장, 목회자 세미나, 장학위원회, 노인대학, 여성대학, 100여 곳 미자립교회 후원, 중앙장터, 재활용센터, 만나의 집, 중앙도서관, 월간목회 보내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영세가정 후원, 다문화가정 후원, 청소년 공부방, 선한이웃 진료소, 엘림복지재단 설립 운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회 문화선교 연구소를 건립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던 중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업의 중심은 ‘작은 자’였다. ‘작은 자’란 누구인가?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 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비교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곧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성경은 어디서도 비교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그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창세기 1:1절의 창조가 ‘빠라’ 곧 무에서 유의 개념이고, 창1:21절의 창조가 개조창조이며, 창1:27절의 인간 창조가 모방창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진장의 가치성과 유일한 독특성이 인간 창조, 곧 ‘야차르’의 내용이다. 곧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유일한 독특성을 지닌 것이다.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은 나의 상(想)이 상(像)을 만들어 낸 인식의 차이다. 즉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내 인식이 상대방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물은 흰색인데 파란 안경으로 보면 파랗고 빨간 안경으로 보면 빨간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여기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개념이 성립되고 그리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이다. 즉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삶이 연주되는 것이다.
4월을 보내면서 포항중앙교회 장애인 주일 설교를 하고 귀가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장애인 초청 주일’ 행사는 하지 못했지만 성도님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의 관계는 잊어도 잃어도 안 됨을 역설했다. 아직도 곳곳에서 장애인들을 비교법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정신적 장애인이 되는 것인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상이 누구이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셨다. 첫째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를 열 처녀 비유로 깨우쳤고, 둘째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로 달란트 비유를 하셨으며, 셋째는 심판에 대한 비유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셨다. 그 말씀의 절정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면서 ‘작은 자’를 사랑하고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교훈하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와 불순종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양으로, 불순종한 사람을 염소로 비유했다. 그리고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분류를 하고 오른쪽에 축복을 왼쪽에 저주를 선언하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목마를 때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내가 벗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함께 해준 사람들과 외면한 사람들을 분류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셨다. 오른편 사람들이나 왼편 사람들이 공히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결정적인 말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지 아니한 것이, 나에게 한 것,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작은 자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현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현재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다.” 그 사람이 작은 자다. ‘헤밍웨이’는 선에 대하여 “뒷맛이 좋은 것”이라고 갈파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뒷맛 좋은 삶을 사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작은 자가 누구인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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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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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역사의 흐름을 인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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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여호야김 왕 4년에 향후 세계 판도를 바꿀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부터 562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그는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여 대제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 후 그는 갈대아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에서는 알았을까요? 어쩌면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주변 국가들에 새로운 왕의 즉위를 알리고 축하 사절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어쩌면 나중에서야 알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죽은 후 전선에 나가 있는 느부갓네살이 서둘러 돌아와서 불과 3주 후에 즉위한 것을 보면 주변 국가들에 알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느부갓네살의 즉위를 알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새로운 왕의 즉위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발생한 사건 자체 보다 그 사건이 가진 의미, 그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잘 분석하여 대처하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백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 대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백인들에게 내어준 채 초라하게 전락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주변 나라에 왕이 바뀌었는가 보다>라고 안연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하고 대처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 새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고, 나라를 유린하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 즉위하던 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그의 즉위가 가져올 파장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이것은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무심하지 말고 대처할 것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역사는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고도 재미있습니다. 전에 고유가로 인해 세계가 몸살을 앓을 때, 이로 인해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뜻밖에도 일자리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기계로 하던 일 중 일부가 기계를 가동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동원하는 경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역사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 땅의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미칠 파장이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잘 대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모든 역사가 그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유다를 위협할 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소용돌이치는 역사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간절히 의지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아울러 세계사적 흐름을 깊이 인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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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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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세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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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버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세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한 군데가 세습 문제 때문에 얼마나 큰 물의(物議)를 빚고 있는지를 목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 작업장에서 큰 사고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동종의 크고 작은 사고가 수십 · 수백 번 이미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1 : 29 : 300)’은 산업재해 분야의 고전이지만 인간사회의 여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독 그 교회만 세습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계 전반에 걸쳐 아름답지 못한 세습이 만연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반사회는 과연 “세습”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교회에서조차 세습이 문제가 되는 시대라면(1:), 이미 그 사회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습 현상이 많은 영역에서(29 : 300) 횡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최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선(人選)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각료 후보자들 하마평이 오르내리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실들이 있지요. 바로 ‘자녀’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의사 출신의 한 인사는 자질 논란도 일었지만 결정적으로 자녀의 이례적인 의대 편입 및 자신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인턴 과정을 거친 점 등이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외교부 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역시 한 자녀가 이중국적을 가진 채로 특례입학을 했다는 문제 등이 불거져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 역시 슬하의 아들과 딸이 ‘아빠 찬스’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인턴 활동을 하거나 아예 취직의 기회를 얻지 않았나 하는 거센 의구심에 직면했습니다. 이러니 앞서 유사한 문제로 실각하거나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들킨 죄’밖에 없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유사한 사례들을 전수(全數) 조사해 보자는 파격적이지만 메아리 없는 제안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영국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2014)에서 이미 현 시대를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 시대로 규정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세습사회’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한국도 얼마 전 한 잡지에 “우리는 ‘세습사회’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김정헌, 2020. 2). 그렇다면 어떤 “세습”일까요? “한편에서는 부모가 사교육, 인맥, 문화자본 등을 통해 자식에게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주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손쉬운 계층의 대물림이 심화되고 있다.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바야흐로 ‘상속의 시간’ 곧 ‘부동산 세습사회’가 다가오고 있다.”(안선희, 2020. 10) 현대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습은 이와 같이 전(全)방위적입니다. 사회 계층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일대학교의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는 “엘리트 세습”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귀족주의(A New Aristocracy)가 중산층을 붕괴시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반면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국은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세습하려 한다는 견해도 등장했습니다(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세습”이 무조건 악하다는 명제는 항상 옳지만은 않습니다. “3대 째”라는 말만 검색해도 “3대 째 금하칠보 장인”, “3대 째 화살 만드는 가족” 등 “세습(?)”을 칭송하는 많은 기사를 찾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4대 째 한지 명인”, “4대 째 나침반 장인” 그리고 “5대 째 옹기 장인”은 어떻습니까? 이런 세습은 재산과 권세가 아니라 가난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타인이나 공동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런 세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세습”이 있었습니다. 귀족사회였으니 계층의 세습은 당연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고넬료(Cornelius)”(행 10:1)나 “글라우디오(Claudius)”(행 11:28, 23:26)는 당대 최고의 로마 귀족 가문들이었습니다. 계층뿐만 아니라 신분을 세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직전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라고 하지 않았던가요?(요 18:13) 하지만 예수께서 질책하셨던 세습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도 세습을 하셨습니다. 요셉 대신 목수로서 가계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습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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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