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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고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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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일면식 없었던 분이 보내신 저서를 한 권 받았습니다. “욥이 물었다, 내게 왜 이러세요? 강정훈 지음.” 신앙 유무를 불문하고 고난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욥, 과연 저자 역시 신학생 시절부터 만나 동고동락했던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후 기나 긴 아픔의 시간을 겪어야 했더군요. 고통의 승화를 논할 수 있겠으나, 사실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이 고스란히 책의 제목에 녹아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부쩍 각광 받는 ‘죽음학(Thanatology)’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말기 암 환자 육백 명을 관찰한 뒤 사람들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변화되는 다섯 단계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첫 단계가 ‘부정(否定)’으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말도 안 돼!’라면 그 다음이 바로 ‘분노’ 곧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였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타협’과 ‘우울’과 ‘수용’의 단계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원초적인 반응이 초기 두 단계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거나 특히 독실한 신앙을 견지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면 오히려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유대인 랍비이기도 한 해롤드 쿠쉬너(Harold S. Kushner)가 아들을 14년 만에 잃고 스스로 상처 입은 종교인임을 자처하면서 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를 보십시오. 이러한 문제를 신학적으로 규명해보려 애썼던 옥스퍼드의 루이스(C. S. Louis, 1898-1963) 교수 또한 먼저 심대한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일평생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인을 잃고 그가 남긴 글(A Grief Observed)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주여, 이것이 당신의 진짜 조건입니까? 제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그녀를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괘념치 않을 때에만 H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H”는 그의 아내를 상징합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서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분노와 원망 섞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이 이들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결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끝을 알지 못하겠는 감염 사태 속에서 최근 두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안식』의 저자인 마르바 던(Marva J. Dawn, 1948-2021)입니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암에서 장애까지 인간의 연약한 굴레들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고통의 극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분을 보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고통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숭고한 인내와 견고한 믿음이 어떠한가를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또 한 분은 차동엽 신부입니다. 서울공대를 졸업한 수재로 학식과 강연이 대단한 분이셨지요. 장차 한국의 추기경이 될 수도 있었던 인물인데 겨우 60대 초반에 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깝습니다.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았던 그는 『믿음 희망 사랑』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1초까지 우리의 삼색 촛불은 타고 있어야 한다!” 흔들릴지언정 꺼지지는 않는, 고통 속에 더 아름답게 타오르는, 그런 믿음과 소망의 촛불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도 은은하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고통의 문제를 다시 논하는 까닭은 이런저런 일들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에는 상대적인 무게가 아니라 절대적인 질량만 존재합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우주제일입니다. 극복하기는커녕 위로하기에도 벅찬 것이 또한 고통입니다. “아내가 떠난 이십 수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을 빙자해서 청중들에게 눈물을 유도하여 은혜를 짜내는 설교가 될까봐 말을 아꼈다.. 이제는 입을 열고 싶다.. 이 책은 간증집이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 세월이 오래 흘러가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많이 아프세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요?’ 하는 조심스런 목소리다. 아픈 사람에게는 아픈 사람, 아팠던 사람의 말이 위로가 된다. 동병상련이다.”(강정훈, 9) 그 말이 나에게는 적잖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루이스와 던 그리고 차 신부 또한 훌륭한 위로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글 역시 고통 중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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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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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아름다운 소식(왕하 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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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성에 극심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아람 왕 벤하닷과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바닥난 성내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엘리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7:1) 하나님의 말씀이 내일은 기적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실 때 놀라운 은혜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기근과 굶주림으로 사람을 삶아먹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사마리아성의 상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요?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알지 못한 채, 인간의 욕심과 욕망,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지마는 끝내 공허함과, 굶주림, 채우지 못하는 쾌락 앞에,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습니다. 내일이면 사마리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마리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성안은 굶주림과 기근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지만, 이 네 명의 나환자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보고 체험하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쁨을 거저 가서 보고,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그 은혜를 전할 수 있습니다.
2. 나만 누리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환자들은 이런 아름다운 소식을 자신들만 누리고 침묵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소식-복음을 전하지 않는 침묵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나 혼자만 누리고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한 구원에서 남을 위한 구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지금도 지옥을 향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길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 이 생명의 복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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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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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이런 사람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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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가 만사다.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지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쓸 데가 없다.
누가복음 1장에는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의 여덟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신년벽두에 이런 사람으로 나타났으면 좋겠다.
사도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배워서 남주자. 벌어서 섬기자.
첫째, 세례요한은 사무엘처럼 부모님의 기도 응답으로 태어났다.
세례요한의 부모인 스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기도하였기에 주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셔서 아들 세례요한을 주셨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신앙적이냐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된다. 새벽기도 끝나는 날 내 인생도 끝난다.
둘째, 세례요한은 이삭처럼 남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에도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님께서 가까이 올 때 기뻐 뛰어 놀았다. 남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사람, 해피 바이러스가 되어야 된다. 옛말에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이 난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 가슴에 한이 맺히게 하지 말고 흥을 돋우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성도의 특징은 기쁨이 샘솟듯 하고, 은사를 불일 듯 하고, 청춘이 독수리 날개침 같이 하고, 사슴의 발같이 높은 곳으로 인도 받는 것이다.
셋째, 세례요한은 주 앞에서 큰 자였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가 세례요한이다. 크리스찬은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 신전인격이 중요하다. 창세기부터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다. 사람들의 평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아야 되는 것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고,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큰 은혜를 받았으니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흘려보내는 통 큰 대인이 되어야 된다.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넷째, 세례요한은 나실인처럼 구별된 자였다.
구약성경에 나실인들은 엄마 모태로부터 구별되이 자랐다. 포도주나 독주를 금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고 성결이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 거룩의 뜻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깨끗하고, 정결하고, 순수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별되고,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저것 주워 모은 혼합주의이다. 성도는 다른 사람 어찌 하든지 나는 주의 군사가 되어야 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된다.
다섯째,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은 자였다.
성경에 존귀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세와 능력을 받고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가 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고, 피차 복종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녀들이 순종한다.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였다. 성령을 소멸하고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다.
여섯째,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한 사람이었다.
주께서는 성도가 복음을 잘 전하도록 건강도, 물질도, 시간도 주신다. 지상 대 명령이 복음전도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 전도가 주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다. 전도 목표를 설정하고 이름을 적고 작정 기도하면 모든 한계를 뛰어 넘고 기적의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일곱째,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한 자였다.
엘리야가 등장하는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그의 소개가 디셉 사람 엘리야가 전부이다. 엘리야는 스펙도 없고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바알과 앗세라 거짓 선지자들을 일당백 하였으며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간절히 기도해서 불로 응답받은 사람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다. 엘리야는 엘리사라는 후계자를 잘 세웠다. 엘리야가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라면 엘리사는 구약에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선지자이다.
여덟째,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한 자였다.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한 삶을 살았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쓸데가 없다. 성도는 부름 받고, 사랑받고, 쓰임 받는 자이다. 쓰임 받을 동안에는 죽을 틈도 없다. 주께서 부르실 때 준비된 사람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선뜻 대답할 수가 있다.
실력 있는 사람은 “ㄲ”시리즈 여덟 가지가 있다. 꿈, 꾀, 끼, 깡, 끈, 꼴, 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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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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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에서의 신학교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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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부산에서의 신학교육은 어떻했을까? 부산에는 1946년 9월 20일 개교한 고려신학교가 있었다. 고려신학교는 부산진 좌천동 일신여학교 교사에서 시작되었으나 약 5개월 후인 1947년 3월 5일은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 삼일유치원으로 이전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 두 달 전인 1946년 7월 30일 초량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하여 있었는데, 해방 후 다시 선교지로 돌아온 호주선교부가 일신여학교 교실 사용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였다. 즉 한상동 목사와 호주선교부 대표 안다손 (George Anderson) 선교사간에 문제가 있어 한상동 목사는 일신여학교 건물에서 나와야 했고, 마땅한 교사가 없어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이전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40일 후인 4월 19일에는 부산시 광복동 12가 7번지 적산 건물로 이전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광복동에서 용두산공원(당시 우남공원)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이었다. 따라서 전쟁기 고려신학교는 광복동 1가 7번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학생 수는 70여명에 달했다. 그렇다면 다른 신학교육기관은 없었을까? 전쟁기 서울의 대학이 부산에서 수업하거나 부산 분교를 운영하였고, 1951년 5월 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법’을 공포하여 전시연합대학을 운영하게 했다. 이런 경우는 세계교육사상 유례가 없는 전시 하에서의 교육 제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에 있는 신학교는 어떻게 신학교육을 계속했을까?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오게 되자 부산에서 임시교사를 설치하고 신학교육을 시행하였는데, 한신대학의 경우도 부산에서 전시학교를 운영하였다. 1940년 개교한 조선신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951년 4월 28일에는 한국신학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으로 인가를 받게 된다. 이 조선 신학교는 전쟁이 발발하아 임시 휴교하였으나, 1951년 3월 부산에서 다시 개강하게 된다. 이 일 주도한 이가 정대위 교수였다. 당시 학교 관계자들은 부산이나 제주도로 피난 중이었는데, 그는 항서교회 종탑 방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었다. 후에 경동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강원룡 목사도 정대위 교수와 같이 항서교회 종탑방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남부민동의 항남교회에서 신학교육을 재개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항남교회 권남선 담임목사는 일본 아오야먀(靑山學院) 출신으로 김재준 보다 2년 선배였다. 이런 관계로 항남교회 옆의 공한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원룡의 회고록에 의하면 거제도에서 피난하고 있던 김재준 목사를 찾아가 부산으로 돌아와 다시 신학교를 시작하자고 했을 때 김재준은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자 중의 한사람이었고 조선신학교를 많이 후원했던 진정률 장로가 거제도에 살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유학했던 정대위 교수는 영어가 능통했고 한국전에 참가한 캐나다 군부대로 찾아가 그들이 쓰고 버리는 목재 탄환상자들을 대량으로 얻어와 임시교사를 짓고 사택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김재준 목사를 찾아가 신학교육을 위해 부산으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하엿고, 이렇게 하여 교수들이 모이고 신학교육을 재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대위 교수는 학장으로, 최윤관은 부산의 상이군인정신요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교수하고 있었고, 김정준은 교수로 동참했으나 1951년 8월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임마누엘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52년 3월에는 서남동, 이장식 교수와 전경연 박사가 교수로 취임하였다. 강사로는 안희국, 강원룡, 김종대, 서창제, 지동식, 최거덕, 한철하 등이 강사였다.
피난지에서 첫 졸업식은 1951년 7월 18일 거행된 제10회 졸업식이었다. 학부 15명과 전문부 32명을 배출하였다. 학생수가 늘어나자 미군과 교섭하여 목재와 나무상자를 얻어와 강당 겸 강의실도 세우고 신학교육을 시행했는데, 이곳이 남부민동 22번지였다. 1952년 4월 26일에는 함태영 목사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대한민국 심계원장 출신인데, 저명한 법률가였다.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 동자동 켐퍼스로 돌아간 때는 1953년 8월이었다. 그래서 한국신학대학은 2년 5개월, 곧 5학기 동안 부산에서 신학교육을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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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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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기쁨의 절반은 유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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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고의 염원은 가나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모세를 따라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은 가나안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을 조망하게 하신 후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의 나이 일백 이십 세였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구별하셔서 모세 대신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시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하셨습니다. 모세 때 홍해를 가르고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다면, 여호수아는 요단강의 물이 멈춰서서 건너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얻었고, 요단강 동쪽과 서쪽에 기업을 분배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사후에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가나안을 얻었을 때 이스라엘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 우리 땅이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었고, 애초부터 가나안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절반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얻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을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가나안을 얻은 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면, 그때는 충분히 기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가나안의 삶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답게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원수처럼 살 것인지, 이것이 아직 남아 있는 과제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하고, 말씀을 따나 악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들은 가나안에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나안은 그 자체로는 복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애굽이나, 광야에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서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축복의 땅에서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을 얻었을 때는 절반만 기뻐해야 했습니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겸손히 기쁨을 뒤로 미뤄야 마땅했습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지요. 저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그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지요. 그때 가서 기뻐해야지요>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절반의 기쁨은 뒤로 남겨두었어야 합니다.
우리도 2022년을 출발하면서 여러 가지 목표를 세웁니다. 우리에게도 가나안이 있습니다. 모두 가나안에 도착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도착할 때 절반만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기뻐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겸손합시다. 절반만 기뻐하고 나머지는 두려움과 겸손으로 남겨둡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언젠가 온전한 기쁨을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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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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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진짜 신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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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의 검은 안개가 자욱한 중에도 동해의 붉은 태양은 장엄한 몸짓으로 솟구치고 황홀한 태양의 눈동자로 다시 새해의 첫 아침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의 찬란한 일출과 함께 절망과 비난, 혼란과 분열의 비가(悲歌)를 그치고 다시 하늘 순례자의 발걸음으로 신발끈을 동여매며 가슴 벅찬 희망과 부흥의 행진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2년여 동안 이어지는 코로나의 광야길에서 얼마나 상처받고 힘든 싸움을 해야 했습니까?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 애를 태우며 부흥을 사모해야 합니다.
저 역시 코로나 상황에서 얼마나 많이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릅니다. 그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다 어느 날, 하나님을 향한 순명과 애간장을 녹일 때, 제가 서 있는 자리가 위대한 메시지 자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먼저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냉담과 방치와 습관이 체질화가 되고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게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벧전5:8-9) 그러므로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 능동적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일찍이 짐 콜린스는 ‘Good to Great’라는 책에서 많은 기업과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좋게 여기고 만족하며 그 너머의 위대한 삶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아무리 지금이 좋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더 발전하도록 도전하고 변화해야지 위대한 세계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 콜린스는 이런 유명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Good is the enemy of Great.”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오늘 우리의 삶도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 이 상태로 변하기도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하면 반드시 신앙이 정형화되고 화석화 되고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이든 사람이든 간에 스스로 모험의 세계에 도전하며 변화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강하고 위대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했지만,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변하는 자가 살아남고, 살아남는 자가 강하고 위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스스로 애를 태우며 가슴 속에 갈증을 일으켜야 합니다. 도전 정신이 없으면 애간장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기존 매뉴얼과 형식에 맞추어 성실하게 사역하는 것과 애를 태우며 갈증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제가 한국교회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드는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연합기관 통합을 위해서 정말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통합을 하자고 하면서도 실무적으로 들어가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반대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더 애간장을 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예배 회복을 위해서 얼마나 조바심을 가져야 했습니까? 성탄절과 송구영신예배, 신년축복성회 때 얼마나 투혼을 발휘했습니까? 그런데 그 위기 속에서도 애간장을 태우는 초비상 사역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이뤘는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능동적 창의력을 갖는 시각과 마인드를 일으켜야 합니다. 현재가 좋다고 안주하는 순간 쇠퇴하게 됩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고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패스파인더만이 길을 열고 창의적 선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은 사랑입니다. 코로나 때는 방법이 아니라 가치 중심으로 가야 됩니다. 가치 중심으로 가야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치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그냥 자기 생각과 방법을 앞세우니까 서로를 공격하고 내부 총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위기는 3년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3년 차는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살아남더라도 후유증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2022년은 우리의 진짜 실력이 나타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진짜 실력이 있는 개인, 공동체, 기업은 더 두드러지게 성장하고 그렇지 못한 개인, 공동체, 기업은 도태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이제, 진짜 우리의 실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능동적 도전과 애간장, 말씀의 임재와 사랑의 능력으로 다시 포스트 팬데믹을 선도하는 센터 처치, 센터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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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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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향후 한국사회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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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유의미한 역사적 출발로 평가 받음직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언가 대대적으로 달라지리라는 예측은 많으나 그 변화의 폭과 깊이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이런 개념 혹은 가치가 득세하겠다는 일반적 추정은 가능합니다. 먼저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2-2004)가 말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를 주목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은 일종의 초인(超人)을 갈망합니다. 정도령 사상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급격하게 비종교화 · 탈정치화가 진행 중인 지금, 위기에 빠진 많은 인생들이 메시아 아닌 메시아를 고대합니다. 이 나라가 나아갈 향방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대선(大選)을 앞두고 있습니다만, 선거권자들이 더 이상 ‘브이아이피(VIP)’ 즉 후보자들의 비전(vision)과 정체성(identity)과 정책(policy)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각별히 주의하고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보편적 시민이, 신화적 인간이 아니라 신(神)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신(新)경제학’이 대두할 개연성이 높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주류경제학은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최전방 미국의 경제를 되살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2008년 리먼 사태). 그래서 등장한 책이 『시민경제학(Economia Civile』(Zamagni, Bruni)이었고, 공감이나 사회성에 바탕을 둔 이를테면 ‘공유경제’와 같은 새로운 요소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최근 일어난 요소수 대란 사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방서 앞에 밤낮으로 익명의 기부자들이 줄지어 나타난 곳이 어디였습니까? 한국이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멈추어버린 세계경제는 앞으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할 것이 분명합니다. 미국연방준비위원회는 계속해서 금리인상의 카드를 꺼내들고 있고, 일본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의 우려 속에서도 엔화를 찍어내는 행로를 포기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기존의 경제학이 닥쳐올 경제적 혼돈에 창조적 질서를 부여할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은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최근 등장한 신종 코인(BTC)이나 신종 토큰(NFT)을 보십시오. 마치 기업이나 집단에 맞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다윗의 물맷돌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사회 분야에 있어서는 당분간 ‘공정(Fairness)’이 계속해서 뜨거운 감자로 남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2030세대가 치중하는 ‘공정’은 지난날의 ‘정의’나 ‘공평’과도 다른 개념입니다. 다음세대 내부 갈등의 도화선인 페미니즘 논쟁도 이와 관련이 깊습니다. 여성을 향한 사회적 차별보다는 그 격차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일방적 혜택에 더 크게 분노하는 ‘이대남(이십대 남자)’들이 많습니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시책에 대해 그와 무관한 직종에 있는 청춘들마저 격렬하게 반대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의’를 위한 명분이라도 ‘공정’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뜻입니다. 라캉(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자면 전형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인데, 또 하나의 현대적 추세인 공감이나 이타성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다가오는 두 차례의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이들 세대를 모른 채 할 수도 없는 실정이라, 당분간 우리 사회는 구조적 모순이나 제도적 차별보다는 개인의 복리나 분배적 정의에 영점(零點)을 맞추리라 예상합니다. 교회의 균형자적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문화 분야에 있어서는 ‘포스트 한류(post-Hallyu)’를 준비해야 합니다. 백범 김 구 선생께서 꿈꾸던 문화강국의 비전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우리는 현재 참으로 감격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영화감독 봉준호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했지만, 이 말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소위 ‘국뽕’ 혹은 나아가 ‘문화제국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면 왜 이제야 한류가 세상을 강타하고 있습니까? 그 표현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세계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라는 백범의 말과(1947, ‘내가 원하는 나라’),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기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가장 가까운 우리의 보편적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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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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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예수님의 기도(요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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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 가셔서 40일을 금식 기도하시며 그 시작을 알리셨고, 또 공생애를 마치실 때도 역시 기도로 끝을 맺고 계십니다. 확실히 기도는 우리 신앙의 시작이요 끝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지요. 이 중요한 기도생활 여러분은 성공하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면서, 다시 기도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17장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기도가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1절)
생의 마지막 순간, 예수님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도의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지금 십자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걸 좀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흡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해 주소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4절) 곧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순종하기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까?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원이 가득해야 할 줄 믿습니다.(고전 10:31)
두 번째, 우리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20절)
중보기도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말하지요. 지금 예수님은 예수님이 떠난 다음에 남게 될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중보하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보전과 하나됨 입니다.(11절)
1)보전
보전한다는 것은 온전하게 잘 지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제자들을 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깨어있고 보호되기를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위해 하늘보좌에서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8:33,34)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우리를 초청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중보기도 해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2)하나 됨
여기서 ‘우리’란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생긴 것이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한 분이며,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한 성령을 모시고 사는 한 형제인줄 믿습니다. 성령님은 연합과일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와 하나됨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개인과 가정과 직장에 분열의 영이 떠나가고 사랑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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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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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작년 그리고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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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어제의 마지막과 오늘의 시작, 12월 31일 밤12시와 1월 1일 새벽0시는 무엇이 다를까? 12월 31일에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1월 1일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저 멀리 있는 동해나, 저 높은 곳의 산을 오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똑같은 해인데 과연 무엇이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도 다른 것일까?
해의 무게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둥근 원이 더 커진 것도 아니며 하물며 해의 주변에 새로운 물체가 생겨 변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바로 12월 31일과 1월 1일, 단지 시간 차이이고, 이 하루의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 알지 못하든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1월 첫 주, 내 삶의 변화를 이끄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첫째, 의미가 무엇인가? 의미는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생각의 결과이고 철학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고생이 기쁨으로, 고난이 견딜 수 있는 훈련의 과정으로 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의미가 없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내가 없어지며 모든 에너지를 자녀에게 쏟아 부어야 하는 고난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의미가 부여되면 어떠한가? 나에게 허락된 최고의 선물, 기쁨이 바로 자녀이고, 삶의 이유가 자녀 양육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을 더 확장시켜 오늘 내 삶의 행복과 기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으니 하루가 왔다고 해서 그냥 저냥 하루를 보내면 의미있는 삶을 살아내기 힘들다. 어제 죽은 누군가에게 오늘은 꼭 살고 싶은 하루였을 것이니, 이 하루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에 따라 행복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둘째, 의미는 누가 만드는가?
내 삶의 의미는 당연히 나 자신이 만든다. 내가 겪은 일이 어떤 이유 때문에 왔으며, 이 일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란 힘들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 나 중심으로 살다보면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숨어 있다. 사실,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내 의지와 힘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를 만드신 분, 내 삶을 이끄는 분의 도움이 없이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겉으로 봐서는 내 삶의 의미를 내가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지속시키는 것은 내가 아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말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삶이 주어진 것은 창조주에 의한 섭리이고 뜻이자 의미로운 사건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회가 만만치 않아 삶에 의미를 갖기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많았다. 행복, 감사, 기쁨은 나와 먼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았다. “나는 여수룬, 행복자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가 인생의 종점인지 알기에 오늘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미가 무엇이고, 누가 의미를 만드는 것인지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살리는 일이다. 오래 전에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드라마의 명대사 중 하나는 김사부가 후배 의사에게 “의사는 돈, 명예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라고 말한 장면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육을 치료하는 의사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자들,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성도는 개인의 삶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사회를 살리는 사람들이다.
작년과 다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올해도 작은 촛불처럼 나를 태워 청소년을 살리고, 청년을 살리고, 장년들을 살리려고 기도하고 있다.
비록 이 일이 쉽지 않지만, 의미있는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기에 다시 힘차게 한 걸음 내딛는다.
여러분도 다시 한 번 의미를 생각해보자.
2022년,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성령으로 교회를 살리는 이 일에 새 의미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2022년 12월 31일에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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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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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아동복리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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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F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6.25전쟁기 보다 구체화된다. 전쟁기 고아들이 급증하자 구호는 절실해 졌고 CCF는 이런 현실에 부응하게 된다. 당시에는 전쟁고아들도 있었지만 버려지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을 알게 된 밀즈 목사는 CCF 클라크총재로부터 일단 5천명d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 받았고, 이 약속을 가지고 1950년 9월 한국으로 왔고, 9. 28 서을 수복 때 서울에 입성한 최초의 민간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CCF한국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은 아펜젤러(H. P. Appenzeller), 휘치(George A. Fitch), 레인(Harold Lane), 아담스(Edward Adams),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목사, 그리고 오긍선, 이용설 박사였다. 위원장은 사우어(史越, Charles A. Sauer, 1891-1972) 목사였다. 1921년 미국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그는 영변, 공주 등지에서 일했고 1941년 3월 강제로 한국을 떠났으나 1949년 재내한 하여 교회 복구사업에 헌신했는데, 그의 아들 로버트 사우어(史路德, Robert G. Sauer, 1925-?) 또한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초대 지부장은 알렌 시틀러(Arlene Sitler), 실행 총무는 노진박(盧鎭璞)) 이었다. 첫 사무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이자 CCF한국위원회 위원인 레인의 동구 좌천동의 사택이었는데(1951. 4- 1953. 3), 후에는 동구 초량동 프랑스영사관이 있던 건너편 건물이었다(1953.3-1954.5). 서울 수복 후에는 사무실이 서울 정동 구세군 본영으로 이전하였다.
CCF 한국위원회는 아동보호시설의 CCF 지원 대상 기관 가입업무를 시작하였고, 부산의 아동보호시설인 새들원, 박애원, 영아보호시설인 애린원, 순천의 인애원, 대구의 대구육아원 등을 CCF후원시설로 받아 들였고 이런 후원 시설은 점차 확대되었다. 부산의 새들원은 안음전 여사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CCF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다. 이 무렵 부산에는 순교한 목사들의 유족과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한 미실회((美實會)가 설립되었는데, 부녀자 복지사업의 효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미실회는 부산 범천동 가야산 아래 미실회 건물이 있었고, 순교자 유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미실회 설립과 운영 또한 CCF의 지원을 받았다. 1953년에는 김응상 나판수 은영기 한정교 홍성유 원장 등 당시 37개 CCF가입시설 원장들을 CCF한국지부와 업무협의를 위한 의도로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를 구성하였다. 이런 가운데 피 지원 기관이 확대되어 1955년에는 74개 시설로 증가되었고, 지원받는 아동수는 9,078명에 이르렀다. 1958년에는 77개 시설, 10,696명이 수혜 대상자였다.
그런데 CCF의 지원시설의 확대, 사무실의 서울 이전 등과 더불어 아동복지 전문학자인 헨리 티즌(Henry Tieszen)의 내한을 계기로 보다 조직화되고 체계화 되었다. 아동들의 생계를 위한 시혜에 머물지 않고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시행하게 되었다. 헨리 티즌은 메노나이트계 인물로서 아동학 관련 전문 학자였고 후일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CCF의 부산에서의 할동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부산 동래 새들원을 특별히 지원했는데, 동래에 토지 10,400평 건물 515.228평 그리고 대청동의 토지 152평, 건물 258.97평을 증여했다. 또 송도의 맹인아동들을 위한 시설인 라이트하우스에 토지 736평, 건물 251.79을 증여했다. 특히 CCF는 부산 송도에 아동병원을 건립했다. CCF는 처음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을 시급한 과제로 여겼으나 아동들의 의료 문제 해결 또한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그래서 1955년 1우얼 부산 서구 초장동 3-43번지에 부산보건원(Pusan Health Home)을 설립하여 아동의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설이 부족하여 1957년 7월에는 서구 아미동 2의 126번지의 건물을 매입하고 보건원을 이전하였으나 시설 부족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서구 암남동 18번지의 대지 약4천 평을 매입하여 1964년 2월 병원 신축을 시작하였고 그해 11월3일 총건평 449평의 현대식건물을 완성했다. 75명의 아동이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이것이 부산아동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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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