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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세례 요한을 생각하며(마태복음 11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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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미 그의 출생과 사역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초기에 투옥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은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라고 기록함으로써 요한의 투옥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투옥 상태로 지내던 요한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보여줍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낸 이유는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님에 대해 혼란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태도는 매우 충격적인데, 그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오실 메시아임을 증거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께 대한 요한의 기대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사이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마카루스 감옥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감옥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로마와 헤롯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한 일을 시작하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세상이 바뀌고, 자신은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각한 일을 하고 계시다면 무슨 소문이라도 들려와야 할 텐데, 그리고 세상이 소란스러워야 할 텐데, 세상은 너무도 조용했고, 감옥에도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메시아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제자들을 보내 질문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4-5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고 계신 메시아 사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의 일은 성경이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제자들의 보고를 들은 요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헤롯이 제수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판했고, 그로 인해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값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요한이 헤롯의 부정한 결혼을 비판한 것을 보면 그는 사회 현안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요한이 예수님께서 사회 현안보다 개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는 등의 일을 하시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예수님께로 로마와 헤롯의 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을 감옥에서 구출하길 기대했다면, 예수님께 대한 원망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사역을 전해들은 후, 자신이 기대하는 일보다 더 본질적인 사역을 하신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길 기대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대한민국 사회에 개입하셔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여러 분야에 구체적인 일을 행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예수님께서 우리 사회를 방치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히틀러를 끌어내리려고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본 훼퍼 목사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이런 갈등을 생각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맞추려 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예수님께 맞춰야 하겠다는 것과, 예수님께는 모든 것에 대한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구원하시길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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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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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길이 아니어도 가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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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코로나의 폭풍에 부러진 갈대들이 보이시나요. 꺼져가는 등불 아래서 흐느껴 우는 남루 한 영혼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신가요. 차가운 달빛에 길 잃고 쓰러진 겨울의 들판, 갈대들의 신 음소리가 아우성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의 밤은 절망과 우울, 분노와 회의의 검은 사신들을 보내어 도시의 성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아니, 영혼의 화원들을 짓이기며 찔레와 엉겅퀴로 가득한 폐허의 도성으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주여, 언제까지 입니까? 어느 때에야 햇살 눈부신 아침이 오는 것입니까? 아직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적의 밤, 여전히 코로나의 어둠은 자욱하고 한국교회는 찢기고 상하여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반기독교적 악법을 막아내기에도 점점 힘겹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한 채 분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 연합하지 못하고 기존의 성만 수성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길이 없다고 말하면서 성 밖을 나서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 그 길을 가면 가시에 찔리고 엉겅퀴에 상하고 목마름에 쓰러질 것이라고 말하며 아예 길을 나서려고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나 길이 아니어도 가야 할 길이 있고 길이어도 가지 않아야 할 길이 있습니다. 연합의 길은 아무리 멀고 험해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이고 분열의 길은 아무리 편하고 좋아보여도 가지 말아야 할 길입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분열의 길을 선택했고 성을 쌓은 채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는 그 성문을 열고 나와 비록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연합의 길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이 길을 열기 위하여 지금까지 온 몸으로 부닥치며 걸어왔습니다. 분열하기는 너무나 쉬웠지만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이토록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도 포기하고 싶고 의문과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지쳐 쓰려지고 잠 못 드는 불면의 밤 을 지새울 때도 많았습니다. 만약에 저 개인적인 업적이나 공적에 대한 사욕 때문에 여는 길이라면 당장에 멈추게 해 달라고 눈물의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렸습니까? 그때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부정적인 시그널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드온처럼 다시 한 번 감히 여쭙습니다. 이것마저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포기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가야할 길이라고 명령하시면 길이 없어도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 외롭고 고독한 황야에서 차가운 이슬에 젖고, 별빛에 기대어 잠드는 밤을 보낼지라도, 저는 한국교회 연합의 새 길을 열기 위하여 기꺼이 그 길을 가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주님이 인도하셨고, 성령님의 부축 없이는 단 한 발자국 도 걸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따라 제가 더 지쳐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때로는 심장이 조이고 숨 쉬기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는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막, 한국교회 연합이라는 호가 출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그 어떠한 풍랑과 파도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역사의 새 길을 열어가게 하옵소서. 다른 생각과 다른 주장들도 마침내 어둔 밤을 비추는 별빛이 되게 하시고 흐린 별이라 하더라도 아침의 태양으로 떠오르게 하소서. 한국교회가 하나 되면 코로나의 잔인한 겨울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코로나를 아웃시키고 풀잎이 돋아나는 봄의 들녘에서 흩어진 갈대 들이 붉은 심장의 꽃으로 다시 만나는 환희의 계절이 다가오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다시 한 번 간구합니다. 저희 스스로 차갑게 손 놓아 버린 분열의 밤을 쫓아내버리고 다시 하나 되는 눈부신 아침이 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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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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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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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기나 긴 추석 연휴였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올해도 작년과 같이 종전과는 조금은 다른 명절을 보냈습니다. 이전만 해도 해외여행 떠나는 분들이 많았지만 이젠 그나마 기약 없는 얘기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어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분이나 직위를 가진 분들은 이번 추석에도 꼼짝없이 방콕하면서 밀렸던 드라마나 겨를이 없어 미처 읽지 못했던 대하소설 정주행을 시작했다가 자유로운 졸음과 평화로운 단잠에 빠져들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디 못 가서, 재미있는 거리들이 줄어서, 용돈 많이 못 받아서, 섭섭하기 짝이 없는 명절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특히나 이런 순간일수록, 더 사무치는 단어가 있지요. 바로 “가족”입니다. 이번 추석 기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맘때면 얼마나 더 아련할까요? 그렇지 않더라도 명절이 되면 왠지 고향 생각 절로 나고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유독 그립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추석 전날 어떤 권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얼마 전 사랑하는 남편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셨기 때문에 그 이후로 처음 맞는 명절이 얼마나 쓸쓸하실까 해서였는데, 계속 통화 중이라 다음 날에야 가까스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오래 하셨어요, 물으니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그렇게 전화들을 했다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본받으면 그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 어서 어서 수화기를 드십시오!
그런데 한 20년 후가 되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질 전망입니다.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2043년을 정점으로 한국의 가구 숫자가 감소하기 시작하는데, 2045년이 되면 총 2,200여만 가구 중(2020년 현재 2,150만 가구) 1인 가구가 809만으로 전체의 36.3%, 2인 가구가 21.2%, 이 둘을 합치면 즉 자녀가 없는 가구 혹은 가족이 전체의 57.5% 비율을 차지하고,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가족은 15% 남짓 될 거라고 합니다. 이미 “가족” 개념 자체가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도 있습니다. 편부모가족, 이혼자가족, 재혼자가족이 늘어갈 뿐 아니라, 비혼자가족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결혼을 하고서도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 소위 ‘딩크족’이라고 하는 부부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은 1987년에 이미 가족해체, 저출산, 다원화와 이주민 증가 및 이로 인한 초국적 결혼의 증대 현상이『위험사회』한 요소가 될 거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소중합니다. 시인 정호승은 “가족은 희망이다”라고 썼습니다. 노정혜는 “가족은 자석이다”라고 했고, 이기철은 “가족은 네 켤레의 신발이다”라고 했으며, 용혜원은 “하늘 아래 행복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은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시편 128편의 기자는 가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가족은 언제 들어도 싫지 않은 엄마의 잔소리입니다. 가족은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아랫목에 묻어두었던 따뜻한 밥과 같습니다. 가족은 나를 지탱하는 마지막 울타리입니다. 가족은 언약으로 시작해서 생명으로 이루어지고 희생으로 유지되는 곳,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의 연합과 교통을 닮은 것, ‘가장 기초적인 교회’입니다(김은혜).
가족의 개념 자체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 따르면 현재 국민 10명 중 7명이 혼인·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데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가족입니다. 대면(contact)이든 비대면(untact)이든 항상 가족과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ontact family).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시되 너무 슬퍼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한 소중한 추억을 한 아름 안고 그러하기에 더욱 풍성한 나날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 한 가지, 꼭 기억하세요.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바로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내 평생 가장 중요한 시간은 내 가족과 함께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행복한 인생들을 사십시오, 행복한 가족들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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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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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예수님의 살과 피(요 6: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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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자주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51절을 보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으라”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53절에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쟁반에 담겨진 떡처럼 먹을 수 있는 물질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식인종도 아니고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니요? 자,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을 찢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그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친히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 흘리시면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 흘리신 주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내가 이 사실을 믿습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감격하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믿음입니다.
2.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56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거하게 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하나의 지식이나 철학, 사상이 아닙니다. 진정한 진리는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보고 감상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내 안에 살과 피가 되어 예수님과 연합, 하나 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녹아져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내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면, 주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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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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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복음병원 설립시 시대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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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적 상황
복음병원이 설립될 당시인 1951년 1월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1950. 6.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삼팔선이 무너지고 서울도 함락,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고 조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었다. 1951. 1. 4 후퇴를 통해 수백만명의 피난민들이 남쪽을 향해 내려왔고 그 최종 집결지가 부산이었다.
피난민들은 길거리나 산언덕, 심지어는 남의 집 마당에까지 천막 또는 판자로 움막을 지어 생활을 했다. 초량과 좌천동, 감천동, 영도 산자락에는 대규모 판자촌, 천막촌이 형성되어 당시 부산 인구(30만명)가 갑자기 80만~10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산이 참전국들의 주요 수송항구로서 미군의 군수품들이 도착, 분배되는 항구도시였고 각종 물자와 먹을거리,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많은 전상자들이 부산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
전영창은 바로 이런 때 1951년 1월 9일 미국 수송기를 타고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했다.
2) 교단적 상황
1950년대 초반은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고신교단 태동기였다. 고신교단은 1946. 6. 23일 진해 하기신학강좌 개최와 1946. 9. 20일 부산 금성중학교에서의 고려신학교 개교, 1952.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총노회(6회)로 개최되면서 고신교단이 정식출범 되었다.
전영창이 미국서 귀국한 1951년 1월은 신사참배자들과 한상동을 중심한 출옥성도들 간에 신사참배문제와 고려신학교 인가 문제 등으로 첨예한 대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6.25피난시절인 1951. 5.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36회 총회에서도 계속 고려신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하고 노회에서도 총회에서도 출옥성도들이 배척을 당하자 결국 1952.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가 열려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고신이 공식적인 출범을 하였다.
전영창은 아직 고신교단이 형성도 되기 전에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서 무엇이든 자신의 할 일을 찾기 위해 귀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귀국후 병원을 설립하는 일로 한상동, 차봉덕, 장기려 등과 함께 하던 중 1년 9개월 후 고신교단이 출범할 때 자연스럽게 고신교단에 소속이 되었다.
3) 전영창의 귀국과 복음진료소 개설
전영창은 1947년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1년 수학후 웨스튼 신학대학교로 옮겨 수학, 졸업)로 건국이후 유학생 1호로 출국하여 신학을 공부하다가 1950. 6. 25 전쟁소식을 듣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려 귀국을 결심하자 교수들과 학우들이 극구 만류하다가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했다.
계속 귀국을 애원하는 전영창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자 학교는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1월 초에 전영창을 위한 졸업식을 거행해 주고 교수들과 학우들이 모금해 준 5,000불을 가지고 1951.1.9일 미국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했다.
그 5,000불로 무엇을 할까 기도하던 중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한 것과 항생제 등 의약품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노르웨이인 넬슨의 제안을 받고 1951. 1. 15일 제 3영도교회 창고에서 차봉덕 원장을 초빙하여 복음진료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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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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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위드 코로나 – 기다림과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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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with(위드)는 ‘함께’ 라는 의미입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열리면, 감기처럼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코로나의 좋은 점 혹은 나쁜 점들을 다 가지고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with(위드) ‘함께’ 간다고 할 때, 좋은 것만 함께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점과 더불어 나쁜 점 또한 함께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질병’과 함께 살아가고, 자녀와 함께 살다 보면 즐거운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한쪽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양쪽을 다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은 이런 모든 면을 안고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능력’을 삼손처럼 힘이 강한 이미지,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성공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서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하면서 능력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드 코로나를 생각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아마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위드 세상’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함께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살면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존재,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입니다. 어떤 무리들은 “세상이 너무 타락해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 우리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곳에서 깨끗한 공동체를 세워나가자”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기독교 사상과 배치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꿈꿔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위드 패밀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가족이라는 선택할 수 없는 공동체 속에 묶였습니다. 사춘기 자녀들도, 그 모습을 안고 함께 살아야 하고, 반면에 부모의 약한 점이 보이더라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사회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인내, 헌신, 양보’ 등의 가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위드 공동체’입니다. 학교, 교회, 친구들 집단 등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떨어져서 살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에 함께 있다 보면 좋은 점도 있지만 약점도 드러나고, 개인이 참고 인내해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내가 싫다고 무작정 공동체를 떠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함께 성숙해 나갈 때 사랑과 인내의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나무를 보면 여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잎의 색이 변하며 곧 시들해집니다. 겨울에는 이 시들해진 잎이 떨어져 곧 나무가 죽을 것만 같지만 봄이 되면 이내 새순이 피고 다시 새 잎이 풍성하게 영글어 갑니다. 나무의 사계와 동일하게 ‘함께’ 한다는 것은 이 시간을 보내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나무의 열매만을 보고 그 열매 뒤에 감추어진 나무의 오랜 인내의 시간은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의미를 알고 버려지는 시간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며 열매를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먼저, 세상이 교회를 볼 때 ‘다름’이 없으면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합니다. 백신이 없던 지난해 코로나 감염이 두려움으로 밀려올 때,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똑같이 두려워하고 겁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육체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감염을 조심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감염 자체에 함몰되어 일상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조심하되 두려워말고, 타인에게 피해는 주지 않되 당당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함께 어우르며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열리며 뒤따라 온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공적 마스크 공급부터 시작해, 거리두기 단계 조절, 백신 수급 문제 등 주요 사항이 있을 때마다 정치권을 비롯한 국민들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물론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포용하는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흑백논리로 나뉘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아우르며 더 나은 제3의 해결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시대에 ‘함께’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이 넓고 깊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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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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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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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보랜에 이어 1952년 5월 말 한국과 부산을 방문한 이가 바일러(J. N. Byler)였는데, 그는 MCC본부의 구제사역 책임자이자 극동지역 책임자였다. 그는 10일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MCC의 한국에서의 독자적인 사역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남한 인구 2천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 피난민이거나 전쟁 중 부상당한 이들 혹은 다른 이유의 극빈자들이었다. 전쟁 과부는 30만 명에 달했고, 전쟁 중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13세 이하의 자녀가 51만7천명에 달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는 2만5천6백 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호받지 못하는 나병 환자는 약 5만 명에 달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을 돕는 일은 시급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체적인 선교활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민간구제기관의 여러 인사들, 그리고 피난민 수용소와 고아원, 어린이집, 보육원, 병원 등을 방문했다. 그리고 MCC는 한국에서 독자적인 구호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인식했고 여러 계획을 추천했다.
이후 MCC는 인접한 일본에 있는 바일러의 후임 극동지역 책임자인 데일 네블을 여러 차례 파송하여 현지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검토하게 했다. 네블(Dale Allen Nebel, 1916-2005)이 처음 한국 부산으로 온 때는 1952년 11월 16일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MCC 사역의 가능성을 검토하게 했다. 처음 그는 MCC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일했는데, 이 때 여기서 보렌을 만난 일이 있다. 중국에서의 사역을 마친 네블은 필리핀으로 가서 1949년 2월까지 일했다. 그 후 귀국하여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그가 36세가 되던 1952년 바일러에 이어 일본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한국 등 극동지역 MCC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일단 홍콩으로 가 재정적인 이유로 홍콩의 MCC사무실을 폐쇄하고 극동지역 사무실을 일본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 8월 일본 나가노 현의 카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리는 선교사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여 부산에서 일하던 부르스 헌트(한부선), 존 해밀턴(함일돈) 선교사 등을 만나 한국에 대한 정보와 한국에서의 MCC의 구제 사역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때의 정보를 기초로 MCC본부 구제사역 책임자인 J. N. 바일러에게 한국 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1952년 11월 16일 부산으로 왔다. 그의 임무는 MCC 한국사무소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UNKRA에서 사역하던 보랜과 함께 사무실과 주거지로 사용할 건물 한 동을 매입했다. 그 외 여러 시설과 사람들을 만나고 12월 4일 일본 오사카의 MCC 극동본부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보낸 기간은 2주간이었다. 그는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제기관으로는 UNKRA(유엔한국부흥위원단),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CWS, CARE, YMCA, YWCA, CCF SCF(어린이 구호연맹) 등과 같은 외국 자선기관이라고 했다.
이 때(1952. 12월 말) MCC 본부는 의류 12톤과 비누 3톤을 한미구제단(American Relief for Korea)을 통해서 한국으로 보냈고, 이 물자는 UNCACK에서 인수하여 전쟁피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네블은 1953년 1월 30일 두 번째 부산을 방문했다. 이 때에는 10일간 체류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3월 6일 미국 MCC본부가 파송한 데일 위버(Dale Weaver) 선교사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왔다. 이제까지는 한국에서의 구호사역을 위한 준비와 탐색의 기간이었지만 위버의 내한으로 공식적으로 한국에서의 MCC 사역의 시작이었다. 네블은 4월 3일까지 한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인 5월 4일에는 네 번째 한국을 방문했고 한 달 후인 6월 5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해 6월 25일 다시 한국으로 왔는데, 일주일간 체류하고 7월 1일 돌아갔다. 이런 일련의 한국 방문은 MCC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이런 방문을 통해 MCC의 한국사역에 대한 몇 가지 제안과 조언을 했는데, 의료선교도 제안했으나 후일 구제사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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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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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이유 모를 안면통증, 삼차신경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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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50대 중반 남자분이 초췌한 모습으로 병원을 방문하였다. 이분은 오랫동안 오른쪽 얼굴의 뺨이 칼로 도려내듯이 아팠고 칫솔질을 하면 너무 통증이 심해서 자주 양치질을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치과를 여러 군데를 방문해서 발치를 포함해 여러 가지 치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갈수록 너무 심해져 지인의 소개로 병원을 찾아오셨다고 하였다.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필자는 삼차신경통이 강력히 의심되어 관련된 정밀검사와 약물치료를 하였고, 이후 증상의 호전이 없어 수술 치료를 하였다. 수술 후 다행히 중년 남성의 통증은 완전히 소멸하여 일상생활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중년 남성의 사연이 남다르지 않아 삼차 신경통의 증상과 치료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삼차신경통’이란 신체 부위에서 얼굴과 이마의 통증과 온도 감각을 뇌로 전달하는 삼차신경이 병적인 변화가 발생하여 이상 통증이 발생하는 질병을 말한다. 여성의 경우 연간 인구 10만 명당 5.7명 꼴로 발생하고 남성의 경우 2.7명이 해당한다. 그리고 50~60대의 중년층에서 흔하다.
삼차 신경통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특발성’이 많으며, 특발성의 경우 삼차신경의 신경 뿌리가 주위 뇌혈관에 의해 압박을 받거나 원인 불명으로 신경 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경 보호막(수초)의 손상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자극이 심한 통증으로 잘 못 전달되는 현상이다.
그 이외 외상, 대상포진, 축농증, 종양, 턱관절 장애, 편두통 등의 원인이 되는 ‘이차성’의 경우 삼차 신경통 환자의 10% 이하를 차지한다.
삼차 신경통이 의심되는 사례의 중년 환자도 필자는 ‘특발성’과 ‘이차성’을 감별하고 향후 치료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일반 두개골 X선 검사, 뇌 MRI 및 근전도 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삼차 신경통’이 의심되어 뇌 MRI 검사할 때는 삼차신경과 다른 뇌신경을 정밀히 분석하기 위해 일반 촬영기법뿐만 아니라 ‘조영제 투약 검사와 FIESTA 검사’를 추가로 반드시 해야만 삼차 신경통을 정확히 확진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필자도 외부 병원에서 뇌 MRI 기본 검사를 하고 진료실을 찾아온 환자들의 대다수가 삼차 신경통의 원인과 진단을 놓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필자에게도 진료를 보면서 정밀 MRI 검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통해 좋은 결과를 이끌 수 있었다.
우선 삼차신경통의 해결을 위해서는 의심 증상을 꼭 알고 전문의의 진료와 정밀검사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여야 한다.
삼차신경통 의심증상
⑴ 발작적으로 전기 쇼크나 송곳과 같은 예리하고 찌르는 듯한 통증
⑵ 이러한 발작적인 통증은 수초에서 수 분간 지속하고 여러 번 반복될 경우
⑶ 통증이 얼굴의 오른쪽 또는 왼쪽 중 한쪽 편에서 특정한 이마, 눈, 볼, 및 턱에만 국한될 경우
⑷ 얼굴의 감각은 정상이고, 그리고
⑸ 세수, 이닦기, 식사, 대화할 때 통증이 유발되는 경우
삼차신경통 환자는 위와 같은 통증으로 인해 삶의 질과 영양 상태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제한이 많아 우울증을 자주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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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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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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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제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6월 21일 복음병원 설립 7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70년의 역사!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6월 21일은 복음병원 설립일이 아니다. 설립일이 아닌데도 어떻게 이 날을 설립일로 계속 지키고 있을까? 이미 이와 관련된 글을 몇몇 언론에 기고했으나 일부 미비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추가로 확인된 새로운 자료들을 수정보완하여 다시 기고한다.
아시다시피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고신대학, 고려신학대원과 함께 고신교단의 중추기관이다. 이 ‘복음병원’(1961. 8. 7)의 전신은 ‘복음의원’(1951.12.23)이었고 그 복음의원의 전신은 ‘복음진료소’(1951. 1. 15)였다. 그렇다면 ‘복음진료소’는 누가 언제 설립했을까?
당연히 전영창 선생이 1951. 1.15일 차봉덕 의사를 초빙, 제 3영도교회 별관(창고)에서 설립했다. 미국서 모금해 준 5,000불(seed money)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복지구호단체)와 '복음진료소'(의료기관)를 동시에 설립 개원했다.
그러나 연혁이나 각종 기록에는 전영창 대신 장기려 박사를 설립자로, 초대원장으로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도 장기려 박사를 복음병원 설립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장기려 본인은 복음병원은 자신이 설립하지 않았으며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라고 몇 번이나 밝혔었다. 그런데도 고신이나 복음병원은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 장기려 박사가 설립자가 되고 초대원장이 되면 정체성이나 병원 선전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잘못된 역사를 그냥 덮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다 복음병원의 역사가 이같이 왜곡되었을까? 어쩌다 설립자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이 복음병원 역사에서 지워졌을까?
연구 동기
필자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교단의 목사인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신학은 좋은데 생활은 왜 부족한가라는 문제의식을 늘 가지고 목회현장에 있다가, 복지목회로 전환하여 섬기던 중 교단 내 사회복지 활성화를 위해 손종기, 김세중 목사와 함께 ‘고신전국사회복지협의회’(2012. 4.30)를 조직,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출범하였다.
고신전국사회복지협의회는 기존 교단총회 상설기구인 사회복지위원회 소속 전문위원들로 활동하면서 몇 차례 모임을 가지다가 교단 내 사회복지시설장 및 직원들, 담임목사들에 대한 기독교사회복지 전반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1회 고신기독교사회복지세미나'(2014. 4.28~29, 경주 코오롱호텔)를 개최했다.
이때 필자는 2년 동안 고신총회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으로서 교단 내 사회복지 역사 및 현황에 대한 연구조사를 한 후 ‘고신교단의 사회복지역사 소고’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이때 조사연구한 결과 평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신은 결코 사회복지사역에 무관심했거나 소홀했던 교단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초창기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이 잘 조화된 교단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이약신 목사의 희망의집’, ‘조수옥 전도사의 인애원’, ‘전영창 선생의 복음진료소’(복음병원)...............그런데 여기에서 뭔가 이상했고, 막혔다.
이미 수많은 기록들에서 '전영창'이 지워지고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복음병원 연혁에서부터 각종 저서들, 기록들에서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가 설립했고 초대원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전영창 선생은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고신을 떠나야만 했을까? 본 고는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기 간 조사연구 한 결과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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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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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진보적 보수와 보수적 진보 그리고 개혁보수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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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아시나요?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 혹은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뜨거운 개념입니다. 조짐은 사실 2012년 대선 당시 벌써 싹텄습니다. 한국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는 ‘노인기초연금’ 카드를 당시 진보 성향의 야당이 포퓰리즘 논쟁을 의식하여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보수 정당을 자처하던 집권 여당에서 전격적으로 수용하면서 파문이 일었습니다. 사회 복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정치적 수렴(收斂)은 이미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1950년 노동당 정부의 게이츠켈 재무장관은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무상을 원칙으로 하던 복지서비스 일부를 유상으로 전환하는 등 정책 변환을 주도하면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참패하는데, 이어서 들어선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 버틀러는 놀랍게도 노동당의 개혁 기조를 그대로 받아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둘의 이름을 합쳐서 ‘미스터 버츠켈’이라 불렀고 여기서 유래한 말이 ‘버츠켈리즘(Butskellism)’인데, 대처리즘이 등장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보수-진보의 타협과 합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는 양립불가능한 관계가 아닙니다. 일찍이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데일리(1804-1881)는 노동계급의 선거권 확대 등 일련의 사회개혁정책들을 주도했기에 ‘진보적 보수주의자(progressive conservative)’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보수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어본다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 기둥으로 첫째,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 체계가 사회와 인간의 양심을 지배한다는 믿음, 둘째, 다양성의 확산과 인간 존재의 신비에 느끼는 애정, 셋째, 문명화된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질서와 위계를 요구한다는 확신, 넷째, 자유와 재산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신념, 다섯째, 관습과 오래된 규범 및 일반화된 지혜를 향한 신뢰, 여섯째, 급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중한 변화야말로 사회를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정서, 이렇게 여섯을 들었습니다(『보수의 정신』, 65-66). 하지만 전술한 사례들은 이러한 보수주의 터전 위에서도 얼마든지 진보적인 사고 내지 정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에서는 ‘보수적 진보주의자(conservative progressive)’가 나타난 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니 블레어 전 총리입니다. 노동당 출신인 그는 전임자였던 보수당 정권 마거릿 대처의 노선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블레처리즘(Blacherism)’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만, 거기에는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료하고 안정 속에 성장이라는 중용과 포용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선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경우 사전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진보를 여전히 주창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보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사실은 보수적 진보주의의 길을 자신도 모르는 채 걷고 있는 지도 모르고, 좌파라 비판 받는 많은 경우도 역시 기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삼파(三波)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재난지원금, 출산지원대책, 공공의료에 관한 논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대상이나 지급 금액에 관해서만 의견이 갈릴 뿐, 그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실익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신학(神學)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생경한 개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보수개혁신앙’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떻게 신앙이 보수이면서 동시에 개혁일 수가 있을까요? 보수적 개혁이거나 혹은 개혁적 보수가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 동등가치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나 과학이 아니라 신이나 신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지 않으며,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Abhandlung, 6, 7). 오늘날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괴델 역시 “증명할 수 없지만 참인 명제가 존재하며, 따라서 진리는 명제를 초월한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incompleteness theorem, 1). 그리스도야말로 말(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며, 명제를 넘어선 진리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세상도 진보적 보수니 보수적 진보니 하는 판국에, 교회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편을 가르거나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고 진지한 대화가 아니라 무모한 독백만 일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나 세상이나 무슨 주의(主義)가 아니라 오직 주(主)만 드러나고 높아지기를, 폭풍 같은 현실을 잠잠하게 하실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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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