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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6, 밥 피얼스, 하워드 마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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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을 구제하고 선교했던 밥 피얼스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좀 더 정리해 두고자 한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한국의 전쟁 실상과 참담한 현실을 보고 전쟁 피난민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집단 학살된 후 방치된 기독교인들, 고아들과 과부들, 버려진 아이들의 딱한 현실을 보고하면서 “이 글이 독자들에게 공분과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가 목격한 피난민의 고통과 처참한 참상을 보고 구호단체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것이 1950년 9월 22일 조직된 월드비전(World vision)이었다. 이 조직은 그 이후 가장 큰 기독교 구제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보고서 작성 외에도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첫 번째 영상이 ‘38선’(The 38th Parallel)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한 영화였다. 두 번째 영상이 1952년 제작된 ‘불꽃’(The Flame)인데, “시대를 초월한 한국 전쟁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독교 영상물”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기록 영화였다. 피얼스는 이 영상을 미국 전역의 교회나 기독교 기관에서 상영하고 피난민들과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미국 전역에서 후원자를 얻게 되었고 월드 비전의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전쟁 이후 월드비전은 한국의 많은 고아원을 지원하고 고아들을 위해 후원의 손길을 보냈다.
구호활동을 전개한 또 한 사람이 하워드 마펫(Howard Moffett, 1917-2013)이었다. 초대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 1864-1939)의 4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여 17세까지 한국에서 성장은 하워드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1948년 31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해군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봉사했다. 그는 이미 군 복무를 마쳤으나 다시 군 복무를 자원한 것이다. 9.28 서울 수복에는 평양까지 가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인데, 의료 분야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아스피린, 페니실린 등 의약품을 제공하고 피난민을 구호했다. 의료 활동은 난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요청이었기에 그는 이런 필요에 응답한 것이다. 또 하워드는 의료 활동 외에도 교육·사회봉사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전쟁 이후 고아와 난민, 전쟁미망인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1953년 9월 제대 후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1956년 재내한하여 대구 동산병원에서 일했다. 1959년에는 동산병원장에 취임하여 일하는 등 학교법인 계명기독대학 이사장,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협동의료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45년간 한국에서 봉사했다. 불과 60병상이던 동산병원을 1000여 병상의 대형 의료원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하워드였다. 그는 2013년 6월 2일, 97세 나이로 미국 산타 바바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유언에 따라 아내 마가렛 마펫 여사와 함께 그해 9월 25일 계명대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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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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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선한 사마리아인이여 여인인지 확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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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에서 한 여성이 쓰러졌는데,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남자들 아무도 선뜻 도와주려 나서지를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반 언론들까지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고, 요즘 민감한 주제인 ‘페미-반페미 논쟁’으로 격화될 조짐까지 보였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괜히 나섰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니 그럴 수 있다’는 말부터 ‘남성이 여성을 꼭 도와야 하나’는 의견까지 등장했는가 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일종의 여혐(女嫌)이다’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초 신고자가 “사람이 쓰러졌는데 남녀가 어디 있나요, 남녀 가릴 것 없이 시민들이 쓰러진 분을 도왔습니다”라며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글을 재차 올려서 웃픈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만, “(선정적인 제목까지 쓰면서) 언론이 더 남녀 분쟁을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그의 마지막 언급은 개운치 않는 또 다른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빈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른바 ‘젠더 갈등(Gender Trouble, Judith Butler)’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여당의 유력한 여성 정치인은 자신을 ‘반페미니스트’라고 비판한 목소리에 대해 “내가 문제 삼은 건 남성 배제적 ‘페미의 극단화’를 경계하는 것이고 독선적이고 혐오적으로 오해 받는 페미 현상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반박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격적인 ‘30대 기수론’을 현실화시켜버린 야당의 젊은 대표는 일부 당내 대선 주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여가부(여성가족부) 폐지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갈등 속 폭풍의 눈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상 ‘이대남(20대 남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그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당권을 장악한 이력 탓인지 당내 안팎으로 다음과 같은 반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당의 내부 견제가 ‘이대녀(20대 여자)’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서울신문 김균미).
이러한 움직임들과 관련하여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원래는 나사와 나사 사이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약간의 틈을 의미합니다. 기어나 톱니바퀴가 진행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흐름을 더 매끄럽게 만들어 주지만, 반대 방향으로 가려하면 오히려 심한 소음과 마모 등으로 흐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는 공학적 단어입니다. 그런데 199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Susan Faludi)는 이를 당시 불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대중적 역풍을 상징하는 사회공학적 개념으로 썼습니다. 지금 야당 대표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의 공공연한 반페미적 발언과 태도를 일각에서 ‘백래시 운동’의 일환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상기의 과정을 넘어서 이 단어가 갑자기 정치공학적 개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흔히들 거론하는 몇 가지 이론들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백소영), 이 문제가 더 이상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논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지하고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모색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분야의 고전인『가부장제의 창조』(거다 러너)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는 남자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여자가 만들었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아마도 대부분의 생활 토기들은 여인들이 만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성의 공헌들이 은폐되거나 사라지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역사가 정말 오래 되었겠구나”, 이런 견해를 피력합니다. 읽다 보니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 준 강도 만난 이웃은 남자였을까요? 여인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요?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비유나 상징이었을 터, 그렇다면 그 이후 역사의 현장에서 숱하게 나타났던 연약한 이웃에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퍼뜩 떠오른 재미있는 단상(斷想)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라면 한 마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워있는 그 사람이 여인인지 확인해 보았습니까?’ 선행도 신중하게,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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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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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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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성경 중에서도 참 소중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이 우리에게 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권세 있는 말씀으로 교훈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엄청난 사건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격한 것을 여기 요한복음에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요한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합니까? 그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입니다. 아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과 인생들 사이에 최대의 문제는, 소통.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방편을 마련하셔도 그걸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5절)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 14절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이제 조금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 말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18절)
인간은 죄에 빠져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낱낱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운 분인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길을 마련해놓으셨는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참된 중보자가 되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딤전 2:5)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중보자를 필요로 합니다. 중보자의 제일 되는 조건은, 인생의 문제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이해하는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히 4:15)
셋째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마 20:28)
인생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히 9:22) 피를 흘려 죗값을 치러야 사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늘의 권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요 1:12) 이제는 예수님만을 굳게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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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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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메타버스 함께 승차하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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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덴교회는 올해로 15년째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였습니다. 초청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한 흑인 노병인 레리 래딕분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2007년도에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재단에서 주는 국제평화상을 받기 위하여 L.A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전야제를 하는데 한 흑인 노병이 저에게 다가와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총을 맞은 흉터를 보여주면서 “자신은 한국전 참전용사인데 한국을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엎드려 큰절을 하며 “제가 반드시 어르신을 초청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혼자 오지 말고 친구들도 함께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대여섯 명 정도가 함께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40명이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분 덕택에 미국 참전용사 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에티오피아, 태국, 필리핀 참전용사들까지, 미국에 가서 섬긴 인서비스까지 합치면 우리가 섬긴 분이 5000여명이 됩니다. 사실 10년 정도 되었을 때, 끝낼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노병들이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더구나 역사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웨버 대령과의 만남을 통해서 참전용사 행사를 계속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강원도 원주전투에서 폭탄을 맞고 두 다리를 잃고 팔도 한쪽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한국전 회상의 유리벽을 세워서 유리벽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처음에 10만 불이 넘게 후원을 하였고 그 후로도 몇 만 불을 몇 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전에 참여했다가 수류탄에 맞아 팔다리를 잃었으면 우리나라를 원망하고 듣기도 싫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웨버 대령을 보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분 댁을 찾아갔을 때 “소 목사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살아있는 한 끝까지 이 일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일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 일을 신명으로 알고 성대를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다 바쳐서 감당하시는 김종대 장로님께 도전을 받고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세계 최초로 화상 줌 초청 행사를 했습니다. 올해는 메타버스를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추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세계를 의미합니다. 그 메타버스 안에서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하여 90대 노병들을 20대의 젊은 시절의 이미지와 영상으로 복원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왜 돈 들어가게 그런 것을 하느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 교회가 젊은 교회요 창조적인 교회요 앞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창조적 발상 때문에 우리 교회는 지난 목사장로기도회 때 한국교회 최초로 진단키드를 했고 역사적인 갈라 콘서트도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전통, 의식, 제도 이런 것만 붙잡는 올드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질은 생명처럼 붙잡되, 여러 가지 소통의 방법과 공감, 참여시키는 것은 창조적 플랫폼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코로나 상황 중에서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얼마든지 소통의 방법이 있고 창의적인 길이 있다는 것을 교회가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창의적 발상을 통해서 이번에도 중단하지 않고 더 새롭게 하게 된 것입니다. 시작은 한 흑인 노병과의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은 새에덴교회의 브랜드를 만들고 메타버스 처치를 만들게 된 셈이죠. 그리고 이러한 창의적 도전과 변화를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벤치마킹도 하면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함께 메타버스에 승차하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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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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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무엇으로 이길 것인가(고린도후서 10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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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 목회자가 찾아와 조언을 구했습니다. 들어보니 목회 현장에 늘 있는 갈등의 문제였습니다. 목회자와 사사건건 맞서는 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제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을 말씀해 드렸습니다. 이런 주제는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싸우면서 억지로 뜻한 바를 관철함으로써 얻는 이익보다 뒤로 미루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할 때 평안을 얻습니다. 사탄은 평화를 깨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책략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힘들었던 것은 바울 사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께서 오랜 시간을 바쳐 최선의 헌신으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은 핍박자였으므로 예수님의 사도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에까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직접 가기도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최소 네 번의 편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만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 역시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바울은 본문 3절에서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입고 육정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육체적 방법으로 싸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싸웠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웠습니다. 본문 4-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바울 사도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립니다. 그 단적인 예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여리고성보다 더 견고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립니다. 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듭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 이론입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옳음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론들을 동원합니다. 회의를 하는 중에 생각과 이론들이 충돌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분란이 일어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굴복시키고 사로잡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후배 목사님에게 드린 조언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또 하나의 생각과 이론을 보태어 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생각과 이론으로 충돌하지 말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면 결국에는 사람의 생각과 이론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만 남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것처럼 보인 것들도 나중에는 이루어지고, 또 그 과정도 평안하게 흘러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람은 늘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요즘 세상도 시끄럽고 교회도 시끄럽습니다. 생각과 이론들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평안한 승리를 얻길 원합니다. 고요히 머리 숙여 주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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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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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과잉 사회에서 따뜻한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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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구마를 싫어한다. 어릴 때, 부모님이 흰 쌀밥 대신에 고구마를 자주 주어서 평생 먹을 고구마를 그 때 다 먹은 것 같아 지금은 고구마 줄기, 고구마 잎 등 고구마와 관련된 음식은 즐겨 먹지 않는다.
시골에 살았던 우리는 뭐든지 부족했다. 쌀밥은 물론이고 지금은 어린 아이들이 흔하게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 하나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넘쳐난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는 이야기’와 ‘많이 먹음으로 인해 살빼는 이야기’ 뿐인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가 넘쳐나고, 유튜브를 통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설교를 맞춤식으로 들을 수도 있다.
물질뿐만 아니라 의지도 넘쳐나는 시대이다. “할 수 있다”는 무한 긍정의 붐이 일어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마치 ‘실패한 사람’ ‘능력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며 내재성의 넘침으로 자기 중심성이 극에 달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할 수 없어”가 아니라 “할 수 있어”라는 긍정 과잉으로 발생되는 문제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울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를 통해 “긍정의 과잉은 우울을 부른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과 해서는 안되는 것을 전부 할 수 있음으로 바꾸는데 오는 증상 중 하나가 우울증”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는 결핍의 시대를 빠른 속도로 지나 과잉 사회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과잉 사회의 부작용들이 무한 경쟁, 우울과 같은 현상들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무한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또한, “할 수 있다”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척척 해내는 초인이 아니다. 한계를 가진 존재에게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듯 몰아붙이면 결국 남는 것은 탈진과 절망뿐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과잉 능력, 과잉 긍정 등으로 흘러가면 인간에게 부여된 존엄성마저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계가 있는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가 과잉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먼저, 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체면을 걸 듯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어”라는 무한 긍정을 자극하면 결국 제 풀에 지치고 말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는 달리, 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짜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타인 역시 나와 같이 한계를 가진 사람임을 인정할 때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존중하게 된다. 그럴 때 “저 사람도 혼자 다 할 수 없으니 나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라는 긍휼한 마음이 생기고, 함께 할 수 있는 따뜻함이 전해진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이 시기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치킨집 사장님 이야기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을 준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시민들이 나서서 일부러 그 치킨집에 주문했다는 소식. 그래서 그 치킨집 사장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경쟁과 과잉 사회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 이야기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몇 해 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난다. 모두가 살리지 못한다고 말할 때,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김사부는 “내 구역에서는 하나밖에 없어.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고 말했다.
피로사회, 우울사회, 절망사회, 위협사회라고 부르는 지금, 우리에게 시골의사 김사부의 따뜻함과 정체성이 필요하다.
이 마음과 이 정신으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양식을 붙들고 살아갈 때 과잉 사회를 넘어 따뜻함이 살아있는 사회,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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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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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간이식으로 새로운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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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은 해독작용, 대사 작용과 호르몬 분해 등에 관여하며 묵묵히 일하는 장기이지만, 침묵의 장기라고 불리는 간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망가지기 전까지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진단시기가 늦어져서 치료의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간염은 간질환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며 만성화된 간염은 간 경변을 일으킨다.
간 경변은 만성적으로 간이 섬유화되어 딱딱해지는 질병으로 과거에는 B형, C형 간염바이러스로 인한 발병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알코올 섭취로 인한 간 경변이 발생한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또한 유전적 대사 질환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질환이 지속되면 식도정맥류, 간암, 간성혼수 등으로 발전되어 간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간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간경화, 간암, 급성 간부전등으로 간가능이 완전히 상실된 경우에는 간이식이 필요하다. 간이식은 간암, 간염, 선천성대사질환 등 거의 모든 간 질환의 치료에 적용할 수 있다. 특히 간암의 경우 간경변증과 간암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치료방법이다. 건강한 정상인의 간 일부분을 수술로 떼어내서 간 질환 환자에게 이식해 주는 생체 부분 간이식과 뇌사자에게서 전간을 받는 뇌사자 전간이식으로 나눌 수 있다.
뇌사자 전체의 간 이식은 수혜자의 간을 제거한 자리에 뇌사자의 간 전체를 떼어 이식하는 수술방법으로 생체 기증자와 수혜자의 이식 가능여부와 장기기증 대기로 인해 수술 일정 확정까지의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생체 간이식 수술을 많이 하는데, 주로 건강한 간의 수혜자는 직계 가족이나 친척으로부터 간을 공여 받는다.
간의 뛰어난 재생력으로 건강한 성인의 경우 70%까지 떼어내더라도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고 2~3주내 수술 전 크기 70%, 1년 이내 수술 전과 비슷한 크기로 재생된다. 수혜자와 기증자가 거의 동시에 수술을 진행하는데 수혜자의 손상된 간을 적출하고 건강한 기증자의 좌 또는 우측 간을 필요한 만큼 이식하는 방법으로 적출 수술 외 간에 붙어있는 지방을 제거하고 이식받을 환자에 맞춰 다듬는 과정, 간문맥과 간정맥을 이어서 혈액순환을 개통시키는 작업등 10시간 이상의 대수술이다.
이와 같이 난이도가 높은 수술인 간이식수술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는것이 보통이었다. 최근 부산에서도 좋은 수술 성적과 많은 경험을 쌓았고 간 기증자 수술을 복강경이나 로봇수술로도 시도할 만큼 경쟁력도 갖추었다. 간이식 수술 이후 환자들은 지속적으로 약을 먹고 관리를 해야하며, 필요에 따라서 적극적인 상담과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거주 지역에서 케어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
침묵의 장기라는 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과음은 금물이다. 또한 비만으로 인해 나쁜 지방이 축적될 수 있기 때문에 평소 꾸준한 유산소 운동으로 적정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평소 충분한 관리에도 불구하고 몸이 붓거나 황달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즉시 병원을 찾아 주치의와 상의하여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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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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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예수님의 자유(마태복음 8장 23-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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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후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하면서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날 우리가 배 위에 있었다면 더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일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예수님의 권능을 목도했음에도 놀랐는데, 그런 경험이 없던 우리가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목도했다면 정말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도, 존재도 놀라운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예수님으로 인하여 많이 놀라면 놀랄수록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마음도 더 간절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제가 그 배위에 있었다면 조금 다른 이유 때문에 놀랐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상황에 대응하시는 태도에 대한 놀라움입니다. 큰 놀이 일어나고 물결이 배에 덮이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가 요동하고 금방이라도 파도에 삼켜질 것 같은 상황에서 주무시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유달리 민감해서 작은 소리에도 금방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에 빠집니다. 풍랑 속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평화가 부럽습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거센 풍랑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차별금지법, 한국교회를 향한 공격, 강대국 틈새에서의 고통,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 다양한 방향에서 파도가 덮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하게 멀미를 하면서, 균형을 잃고 넘어진 지 오래입니다.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뒹굴면서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평안히 쉬고 잘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 저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대로 계셨던 것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는 작은 능력만 있어도 그것을 과시하면서 현실을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가난하던 사람이 돈을 조금 벌면 금방 집을 사고, 가재도구를 최고급으로 갖추고, 멋진 승용차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계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이 일어나도, 잔잔해져도 어디서나 평안하셨습니다. 풍랑이 일어도 좋고, 잔잔해도 좋다고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도 평안하셨습니다. 환경과 조건은 예수님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주인이셨고,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신다면 그저 늘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바라보실 것 같습니다. 우리처럼 안달하면서 냄비처럼 행동하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자유를 누리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이 더워져서 예배 때 땀이 흘러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것을 느껴도 굳이 닦아내지 않고 조용히 있습니다. 냉방 온도를 낮추라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날이 추워져서 손이 식어 와도 손을 비비면서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조용히 기다립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에서 이런 신앙을 말했습니다. 빈궁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부요하다고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가볍게 떠올라 허공을 날 수 있는 표표한 가벼움과 함께 어떠한 물결에도 요동하지 않는 육중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바다가 잔잔하든지, 파도가 심하든지 상관없이 거기서 평안히 잠들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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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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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절망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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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세계적인 <영혼의 맑은소리를 내는 시인> 송명희 씨가 있다면, 일본에는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씨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그는 홍역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1937년에 출생하여 목사님으로부터 성경책을 선물 받고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18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라는 명저를 세상에 남겼으며, 47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그 분의 시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은 <삶>이라는 시다.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의 장풀꽃은 닭의 장풀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나는 이 시를 읊조릴 때마다 눈시울을 적신다. 가슴이 젖어든다. 겐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로운 섭리를 짧은 시 한 편으로 리얼하게 표현했다. 비교원리가 아니라 창조원리를 그림 그리듯 한 편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망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송명희 시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원망이나 불평이 아닌 감사가 일상의 찬송이 되는 것이다. 믿음 있는 자는 결코 절망할 이유가 없다.
나도 숨을 쉴 수 없도록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처절한 아픔과 외로움, 모해와 거짓과 수모의 비통스러운 터널을 통과할 때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고, 겐조의 <삶>의 시 한 편이 나의 삶이 되었으며, 송명희의 <공평하신 하나님>이 내 삶의 노래가 되었다. 어떤 상황에 이를지라도 주 안에서는 절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 가정의 아픔의 한 부분이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으로 아브라함은 뼈를 깎는 아픔을 삭이며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냄으로 봉합한다. 이 사건을 바울은 은혜와 율법의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내쫓긴 자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아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뜨거운 사막, 햇볕만 내려 쬐는 광야, 마실 물도 없고 나무 그늘도 없는 곳! 살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없는 광야에서 하갈은 어린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죽 부대에 담은 물 한 통만을 들고 헤매었다. 결국 물도 다 떨어지고 이제는 살 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하갈은 어린 아들을 떨기나무 작은 그늘 아래 앉혀 놓고 떨어져 나와 통곡을 한다. 그것은 쫓겨난 자의 울음소리요 광야에 퍼지는 궁핍한 자의 울음소리며 무력하고 소망 없는 자의 울음소리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생광야 어디서든 들리는 울음소리다. 왜 쫓겨났는지, 왜 광야에서 기갈하고 기근에 울어야 하는지, 왜 광야 길에서 절망해야 하는지의 신학적 조명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울음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울음소리는 하갈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오늘의 인생 광야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창21:7)” 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막 같은 인생 여정에서 절망과 고통의 울음을 터뜨릴 때 그 울음소리에 세상의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며 그 고통의 소리에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갈의 사건을 통하여 정리해 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 곁에는 해답도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심으로 샘물을 보고 그 물을 마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샘물을 마시고 영적 은혜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사건이 복음을 교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갈의 광야길은 그리스도를 떠난 자의 삶의 여정이다. 광야에서의 하갈의 울음소리는 그리스도 없는 삶의 절망이다. 그런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소리도 항상 듣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울음소리에 응답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절망할 이유가 없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백부장도 하인의 죽을 병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고, 귀신들린 딸을 치료하기 위해 주님을 찾았던 가나안 여인도 절망하지 않았다. 사노라면 걷잡을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억울하고 속상하여 잠도 오지 않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릴 경우도 있다. 교회생활도 싫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홀로 있고 싶을 때도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 이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 이름 앞에 우리의 마지막 생명을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 은혜 받은 성도의 삶이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는 절망할 수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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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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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신학과 동행하는 추격자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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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와 바이러스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3월, 신앙의 거장 한 분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 물리학자요 성직자였던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2021)입니다. 처음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리물리학을 가르쳤으나 50대 초반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나중에 다시 학계로 돌아와 케임브리지의 퀸즈칼리지 학장을 역임하며 과학 최고의 권위인 왕립학회 회원 자격을 얻은 동시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분의 최근 작품들 즉『양자물리학과 기독교신학』(2009),『과학으로 신학하기』(2015), 그리고『성서와 만나다』(2015)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발달한 문명에서는 더 이상 기독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거나 과학의 영역에서 신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항간의 속설들이 어렴풋이 내면의 자아에 끼치던 영향력을 붕괴시키는 충격파가 그 책들로부터 뿜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을 ‘이유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고, 과학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실재를 이해하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과학자인 동시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구론’을 주창한 맬더스(Thomas Malthus, 1766-1834) 역시 영국왕립학회 회원이었으나 본직은 목사였고,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파에 속한 성직자로 훗날 수도원장이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활동하던 당시 과학은 오늘날 관점으로 볼 때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이십 세기 접어들면서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DNA 구조를 발견하는 등 과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신학은 점차 뒤안길로 밀려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와중에 과학 분과에서도 최첨단에 서 있었던 폴킹혼의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 생애와 업적이 대대적으로 기념되었겠지만, 과학과 미생물의 치열한 전투 한 복판에서 마지막 순간조차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그 덕분에 영국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먼저 개발되는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요?
한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학자-신학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1953)입니다. 옥스퍼드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교제하던 중 회심하여 같은 대학에서 신학박사가 되었고, 현재는 런던대학교 킹즈칼리지 학장으로서 종교와 과학 그리고 교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원래 논문의 주제였던 ‘칭의(稱義, justification)’ 이론으로부터『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와 같은 교회사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고 있지만 그의 성취는 이 한 마디, 바로 ‘과학적 신학(A Scientific Theology)’에 응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저 또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은 과학이다!’ ‘성육신과 십자가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교리다!’ 그런데 맥그래스는 ‘신학적 과학(A Theological Science)’의 가능성을 살짝 열어두면서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기독교는 과학적 서사를 풍요롭게 한다.”(『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296)
우연과 해체의 개념이 판을 치던 현대과학계에서 거장 중의 거장 아인쉬타인은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사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파했던 하이젠베르크도 성경을 좋아하고 삶의 신앙을 강조했다고 하고, 무신론자로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을 압도했다는 평가의 주인공 비트겐쉬타인 역시 의외로 신앙을 견지했다지 않습니까? 철학이든 과학이든 인간과 우주를 초월하는 ‘실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바로 그곳에 신앙이 자리하고 신학이 존재하는 영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바이러스의 역습 사건도 마찬가지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제나 자연이 먼저 도전장을 던져왔고, 인류는 가진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고투를 벌이고 해결책을 만들어내었고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아무리 거센 도전이라도 결코 멸망하지 않고 버티고 견뎌서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믿음이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런 추격들이 가능했겠습니까? 이번에도 그런 아름다운 동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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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