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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조기발견 어려운 췌장암’ 예방엔 복부 CT검사 추가가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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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췌장암을 진단받고 치료를 받으셨거나 혹은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체 종양 발생의 3위가 췌장암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2030년에는 미국 전체 암발생의 1위가 췌장암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통계에 따르면 췌장에 발생하는 낭종성 질환은 최근 10년 간 10배 가량 유병율의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췌장의 본래 기능은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하는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중요한 외분비 기관이면서 인슐린 등의 호르몬을 분비하는 내분비 기관입니다. 따라서 단백질 및 지방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서구식 식습관이 보급되면서 본인의 췌장 분비 기능보다 많은 양의 췌장액을 만들어내고 분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췌장 외분비 세포의 손상이 발생합니다. 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췌장관에 이상세포가 발생하는 것이 췌장암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췌장암의 조기 발견이 매우 어려운데 있습니다. 실제 췌장암을 수술이 가능한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는 20% 미만이며 일단 증상이 발생하면 대부분 이미 수술이 불가능한 진행성 종양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췌장의 위치가 복부 내 아주 깊숙히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검진으로 시행하는 상하부 내시경 검사나 복부 초음파로는 췌장 전체를 살펴보는데 제한이 많습니다. 하지만 초음파 내시경을 활용하게 되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초음파 내시경은 내시경 끝에 초음파 기구가 연결된 형태로 식도 위를 지나 십이지장에 진입하게 되면 복부 초음파에서 관찰이 어려운 췌장, 담도, 담낭 등 중요한 장기들을 바로 근처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높은 해상도를 가지고 확대 등이 가능하여 선명하게 관찰함으로서 작은 췌장의 병변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진단 기구 입니다.
췌장암의 경우는 진단 당시에 수술이 가능한 환자는 전체의 약 20%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80%는 진행성 췌장암이나 전이성 췌장암 단계로 항암치료 밖에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진행성 췌장암의 경우 진단 후 6개월 이내 사망하는 경우가 많으나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내과적인 치료를 병행하여 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수명 연장을 가져오는 것을 목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기간을 살더라도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 끊임없는 통증과 폐쇄에 의한 담관염 등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면서 오랜 병원 생활을 하게 되는 것에 반하여 적절한 항암치료 및 필요 시 내시경적 역행 담췌관 조영술 등을 이용한 배액 치료를 하는 경우 다른 만성질환 처럼 주기적으로 외래에 내원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기 때문에 상당히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최근 항암치료 약제의 발전과 투여하는 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약물 치료만으로도 상당히 높은 치료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경계성 단계의 환자의 경우 수술 전 먼저 항암제 투여하여 미세 전이 등을 제거한 후 수술을 진행하게 되면 완치율이 상당히 향상되며 수술의 성적이 개선되는 것이 최근 10년 이내에 많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췌담도 질환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50세 이후에는 국가 검진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췌장암 검진을 위한 복부 CT가 필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한번 이상 복부 CT를 시행하여 복부 초음파에서 맹점으로 되어있는 췌장 체부 미부 및 담도계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부산 경남지역은 타지역에 비하여 민물회 섭취의 병력이 높은 빈도를 보여 간 디스토마의 유병율이 높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B형 C형 간염이 간암의 1급 발암 인자인 것처럼 간 디스토마는 WHO에서 담도암의 1급 인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민물회 생식은 피해야 하며 간 디스토마는 몸 속에 들어온 후 수 십년 간 생존하면서 담도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과거 생식한 병력이 있다면 반드시 병원에 방문하여 간디스토마 기생충약을 먹어야 합니다. 1일 복용으로 충분한 제거 효과를 볼 수 있어 담도암 예방으로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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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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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까칠한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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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5경 마지막 신명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흔히 축복이라고 하면 꽃길을 걷게 되고 뭔가 달달한 어떤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신명기에 나타나는 축복은 여간 까칠한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고 고생하지 않고 대박을 얻으려는 생각이 많다.
신명기에 나타나는 축복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디테일한 조건이 붙은 축복을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는 기원, 출애굽기는 구원,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법도, 민수기는 훈련, 신명기는 축복에 대한 말씀이다.
축복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덩어리가 아니고 상당히 엄중한 조건이 따르는 약속이다.
축복 같은 저주가 있고, 저주 같은 축복이 있다.
양날의 검처럼 축복과 저주는 함께 붙어있다. 순종과 해석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지키고 불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라는 것이다. 사람이 전신이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고 간이나 콩팥, 허파, 어느 한 곳만 아파도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그래서 전인건강이 중요하다.
한국 사람의 몸에 좋지 않은 한 가지 충이 있는데 해충, 요충, 편충이 아니라 대충대충이다. 일을 할 때에 대충대충, 설렁설렁, 얼렁뚱땅 하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지 마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킬 때에 비로소 강성해질 것이다. 제품을 사면 제품 사용 설명서가 따라온다. 매뉴얼을 잘 지킬 때 제대로 작동이 되는 것이다. 보험 계약을 할 때 약관을 살펴보고 약관을 지킬 때 보험이 나오지 약관을 어기면 보험을 탈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적당하게 지키면서 복은 거창하게 받으려는 생각은 게으른 욕심쟁이의 생각일 뿐이다. 성경을 덮어놓고 살지 말고 펴놓고 살아야 된다. 인생 사용설명서, 성경말씀을 모두 지킬 때 복을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주문을 디테일하게 받는다. 음료수, 찬 것 혹은 따뜻한 것, 고기의 굽기, 샐러드 안에 빼야 될 것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만들어 준다.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하기 때문에 귀찮아도 꼼꼼하게 주문을 받고 주문대로 음식을 내어 놓아야 한다.
둘째, 건너가야 복을 받는다. 옴짝달싹을 안하고 당최 움직이지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꿈도 꾸지 마라.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가 복을 받는다. 소극적인 것은 비극적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 건너가야 되는 것이다. 건너간다는 것은 소풍을 가거나 여행을 다니는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불사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을 마무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되는 것이다. 요단강에 두 발을 담글 때 비로소 강물이 멈추었다. 건너간다는 것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거인 족속인 네피림, 목이 길어서 장대 같은 아낙 자손이 그 시대의 최고의 병기인 철병거를 가지고 버티고 있었기에 상당히 어려운 전쟁을 치러야 되는 것이다. 건너간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체력의 한계, 물질의 한계, 기질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한계를 뛰어 넘어 무한도전 해야 된다. 가면 있고 안 가면 없다. 하면 되고 안하면 안 된다. 유월절은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것이다.
셋째, 건너가서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지 말고 완전히 차지하라. 승리의 깃발을 꽂기까지 끝장을 보라. 찰떡의 유래는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골병이 들어 골이 빈 상태에서 찰떡을 먹여서 골을 채운다는 말이 있다. 최후 승리의 깃발을 꽂아라. 빈 깡통이 시끄럽다. 그릇을 빌려서라도 채워야 된다.
신앙생활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된다. 성령 충만 없이 사역하는 것은 비극이다.
넷째, 나의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될 축복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물려주어야 될 풍성한 축복을 받아야 된다.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였다. 후손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된다.
다섯째, 평지를 쉽게 가려고 하지마라.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할 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의 특징은 산지이기 때문에 일교차가 심하고 이슬이 생기고 풀이 자라고 양이 살아서 그 젖을 짜는 것이다. 성경에는 산 위에 마을이 있다. 높은 곳이 군사적으로 안전하고 헐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서 산지에서 샘으로 터져 나오고 산지에는 심한 일교차 때문에 이슬방울이 맺히고 그것을 통하여 잎이 자라고 양이 그 잎사귀를 따 먹으면서 젖을 만들고 사람들은 젖을 짜는 것이다. 꿀은 대추야자에서 나오는 꿀처럼 단 열매를 말한다.
여섯째, 옛적 애굽 땅과 같지 않다. 이제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때 비로소 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코로나 이전의 수월했던 시절을 추억하지 마라. 코로나 이후는 산 너머 산이요 산 너머 똥밭이요 산 너머 지뢰밭이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야 되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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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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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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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구제사역과 고아와 극빈자 자녀들을 위한 직업학교 교육을 소개했는데, 세 번째 사역은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자활교육이었다. 6.25 전쟁 기간 중 약 30만 명의 과부가 생겨났는데 이들의 자활을 위한 직업교육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MCC는 1954년 8월 우선 대구 지역에서 직업교육이 필요한 과부들에게 바느질 혹은 재봉틀을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했는데 이를 과부프로젝트(Widows project)라고 불렀다. 실제적으로 재봉틀을 이용하여 바느질을 가르쳤음으로 바느질 프로젝트(Sewing project)로 불리기도 했다. MCC는 대구 시내에 한미재봉소라는 이름의 교육장을 설치하고 주위의 추천을 받아 우선 30명의 과부를 대상으로 재봉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전쟁과부들이었지만 일부는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고 생활을 꾸려가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이들이 교육 받는 동안에는 호구대책이 없었음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이 재봉소에 필요한 물품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MCC가 지원해 주었고, 재봉틀 교육을 통해 생산된 물품들은 이를 필요로 하는 고아원이나 영세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었다. 일정기간 교육이 끝나면 졸업생들이 자신의 재봉틀을 구입하도록 지원하여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활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다.
넷째는 지역사회 후원 프로젝트(Community Service project)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1960년 12월 시작되었는데, 농민들을 위한 농업교육 중심이었고 이를 통해 농민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기술학교가 위치한 경상북도 경산에서 시작되었는데, 학교 내에 농촌지도소를 설치하고 이를 거점으로 인근의 10여개 마을 선정하여 농촌생활을 지도했다. 종자 개량, 비료 사용법, 병충해 방지대책, 곡식재배, 축산기술 교육 등을 실시하였고, 이에 더하여 공중위생, 건강, 영양 섭취 등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또 부녀자들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요리법, 부엌개선 작업, 가족계획 등에 대해 지도하고 지역 사회 개발에 힘썼다. 이런 농촌 사회 지원 프로그램은 3가지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한국의 현실에서 도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지만 농촌사회는 낙후되었다. 둘째, 농천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도자 양성이 시급하지만 이런 지도자가 양성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농촌 사회 지도자는 희생과 봉사 정신에 기초해야 하는데 이는 기독교정신에 기초한 기관에서야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셋째, 농촌사회의 발전 없이는 진정한 도시 및 국가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 그래서 MCC는 지역사회 후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초 이 프로그램을 운용했던 농촌지도소장은 경산교회 출신인 정주경 씨였는데 후일 목사가 되었다.
다섯째는 가족 및 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이었다. 이를 Family Child Assistance program이라고 불렀는데, 1962년에 시작되었다. MCC는 전쟁 직후 대구에 우유보급소(Milk box)를 설치하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공급한 바 있다. 또 구호사역의 일환으로 빈곤층 가정에 식량이나 피복을 제공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단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보다 발전된 가정 회복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이것이 가족 및 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이었다. 아동보호 수용시절에 수용된 아이들은 해방 직후 3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6.25전쟁 당시는 24,945명으로 증가되었고, 1960년에는 62,697명에 달했다. 전쟁기보다 증가된 것은 전쟁고아들만이 아니라 극심한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MCC는 가족공동체 회복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여 깨어진 가정을 다시 세워주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가정보다 더 좋은 수용시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로 하여금 수용시설이 아닌 자신의 가정집에서 살면서 가족 간의 유대감과 연대감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용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시되었음으로 생활비 지원, 식량제공, 교육비 보조, 의료비 지원, 그리고 사업지원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때로는 주택 건축을 후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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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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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추수감사절을 맞으며(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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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로 살면서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목사답지 못할 때가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목사를 신뢰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다를 거야>라고 기대합니다. 강단에서 외칠 때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목사가 부족 투성이라는 것을 아실까요? 목사가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몰라서 신뢰한다면 미안한 일이고, 알면서도 사랑하신다면 성도님들이 정말 귀하지요.
제가 젊은 담임목사였을 때,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교회 마당에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꼭 알아야 해서 그런데요, .....이란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지요?>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은 아주 귀에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금방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버무렸습니다. <생각이 날 듯 한데 떠오르지 않네요. 제가 알아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조금 후에 바로 필요해서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성경 전부를 다 외우는 것도 아니니 – 외우는 분도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 변명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뻔히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실제로는 모를 때입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길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부분은 스물네 시간 기도하듯이 기도에 힘쓰라는 격려로 이해하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알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것은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부분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겠지요.
11월의 갈등을 아시나요? 11월에는 추수감사주일이 있어서 모든 목사님이 감사를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면서 설교하는 것일까요? 설교하는 것, 현재의 사역지, 둘러싸고 있는 성도들, 가정 등에 대해 감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목사인 나는 감사하지 못하지만, 성도들이라도 감사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일까요?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찌푸린 얼굴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면서 원망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정말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행복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무슨 노하우가 있습니까? 강단에서 얼굴을 벌겋게 되도록 열을 올리면서 <항상 기뻐하세요>라고 강단을 치며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11월이 다가오면 제대로 감사하지도 못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고, 진실한 기쁨을 알지도 못하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참 불편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11월의 고뇌>입니다.
이제부터 진지한 고민을 해 봅시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진정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강요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력한다고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지만, 서로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감정은 우러나야 합니다. 기쁨도 감사도 우러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말씀했는데, 그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성령님께서 마음을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면 우리는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성령님 안에서 감사하는 11월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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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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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한국교회여,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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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넷플릭스 TV 부문 시청률 1위에 오를 정도로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실업자, 신용불량자, 소매치기, 조직폭력배,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여성 출소자, 시한부 환자 등 돈에 쫓겨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는 절박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총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1번부터 456번까지 참가자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등 총 6개의 게임을 통과해야 합니다. 최후의 승자만이 456억 원을 받게 되고,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은 총에 맞아 죽습니다. 영화는 너무나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엽기적인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영화는 자본이라고 하는 맘몬의 신에 영혼마저 빼앗겨 버린 채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여주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드라마를 본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너무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설정하여 보기 불편하더라는 것입니다. 데스 게임에 참가한 244번 참가자는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다가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을 밀어 죽인 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합니다. 240번 참가자 지영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면서,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인 아버지를 자신이 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아버지가 목사였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혐오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지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탐심, 생존 본능을 들추어내고자하는 의도라면, 왜 굳이 기독교인만을 특정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국내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들의 눈에 기독교의 모습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었을 지를 생각하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 현대사회는 극한의 생존 서바이벌 게임에 함몰되어 영혼마저 빼앗긴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비극의 데스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 중에 과반수만 반대를 해도 언제든지 게임을 멈추고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가자들은 거액의 상금에 눈이 멀어 끝까지 멈추지 못하고 죽음의 질주를 합니다.
그 죽음의 질주 끝에 최후 승자는 고향 후배 상호를 제친 성기훈이었습니다. 그는 456억의 우승 상금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를 만납니다. 그 설계자 역시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징어 게임을 만든 이유는 오로지 심심해서, 재미로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기훈에게 인간을 신뢰하느냐고 물으며 또 다른 노숙자 게임을 제안하더니 갑자기 병상에서 죽고 맙니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표출 시키고 말았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오징어 게임에 나타나는 탐심과 증오, 분노의 표출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 세계의 유일한 희망의 출구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잃어버린 채,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한국교회에 그래도 다시 한 번 구조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평론적 해석도 해 보았습니다. 이 오징어 게임을 본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제발,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달라고, 부디 데스 게임에 몸을 맡긴 채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손을 잡아 구원해 달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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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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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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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산등선을 따라 억새가 은빛 물결을 이루며 일렁거린다. 밤에는 선명하게 빛나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땅에서 반짝이는 별인 억새가 만발하는 요즘이다.” 어떤 기자분이 쓴 글 중 일부입니다. “낮에는 땅에서 반짝이는 별”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그 곳에는 낮에도 ‘억새의 은하수’가 펼쳐져 있겠습니다, 요즘 황매산을 가을에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하던데 이런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경남 산청과 합천을 잇는 해발 1,113미터의 이 산 정상에 서면 합천호,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이 다 보인다 해서 영남의 금강산이라고도 부른다는 이 산은 본래 봄철에 철쭉으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하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길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그 동안 적실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일상이 회복되었을 내년에는 억새든 철쭉이든 꼭 그 길 한 번 밟아보리라, 다짐해 보았습니다.
사실 가을의 상징으로는 단풍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늦가을 무렵 우리는 결단코 낙엽을 무시하고 지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낙엽 밟는 소리,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버석버석? 사각사각? 그렇게 마음 하나 가득 낙엽이 쌓이다보니 문득 호기심이 하나 생겼습니다. ‘봄철 아름답게 피어서 찬란하게 만발한 꽃길을 걷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가을철 처연한 아름다움을 뿜으며 떨어지는 낙엽을 부러 밟으며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그리고 낙엽을 보면서, 활짝 피었을 때 자기 모습과 언젠가는 분분히 떠나고 말 인생의 진면목을 투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꽃길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프랑스 시인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의 말처럼 “발로 밟으면 영혼처럼 우는” 낙엽 길을 걷고 있습니까?(Les feuilles mortes) 아니, 그 동안 당신은 꽃길만 사뿐히 밟으며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이리 저리 떨어진 낙엽 가득한 여정을 주로 걸어오셨습니까?
예수전도단 설립자로 지금도 생존해 있는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삶에서 뒤를 돌아보면 항상 꽃길인데, 앞을 보면 항상 낭떠러지였습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표현이 아닌가요? “꽃길만 걷게 해 줄래”라는 노랫말이 유명해진 까닭은, 누구나 그런 인생을 사모하지만 실상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이어지는 그 길은 결국 낭떠러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오늘부터는 우리,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기를 바랍니다. 막상 낭떠러지 같아 보이는 그 길이, 돌아보면 결국은 꽃길이었다는 고백을 로렌 커닝햄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가 운이 좋고 남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주의 도우심을 받고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신자였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테니, 우리도 그와 같다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찬송가 191장 3절입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찬송가 430장 역시 3절입니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어떤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동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당신이 나아갈 길은 항상, 꽃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그런 길에는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더해지겠지요. 내년 봄이면 눈이 시리도록 피어날 철쭉을 보러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내년 가을이면 들판 가득 찬란히 빛나는 억새별을 보러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오다가다 살짝 신청해 주세요, 설렌 가슴에 담아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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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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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근심을 이기는 비결(1)-믿음(요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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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하다’라는 성경 원어는 ‘타라소’인데 이것은 ‘마음을 뒤흔들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마음이 사방으로 나뉘어져 아예 마음을 확 뒤집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노라면,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요. 이렇게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근심을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근심하는 마음이 가득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은 자꾸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됩니다. 좋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 근심을 이기는 비결로, 믿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1절)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으시고, 죽을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논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씀하시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근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하늘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요 14:27)
2. 천국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2절)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곳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가슴 아픈 이별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계 21:4) 우리 신앙에서 천국 소망만큼 우리를 흥분시키고 뜨겁게 만드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슴에 안고 씨름하는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 끝이라면, 우리는 염려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에 불과합니다.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3.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 거처를 마련하신 후,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의심 많고 잘 믿지 않는 우리를 위해, 천국행만큼은 우리 주님께서 확실하게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갈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이 분리되는 순간, 천군 천사들이 와서 우리의 영을 감싸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땅에서 눈을 감으면 저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만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뵈면서, 그 주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면서, 해같이 빛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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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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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고신대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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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25 전쟁과 귀국, 경남구제회 설립
그는 1951. 1. 9일 미국 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렸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지부 구제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미국의 교회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영창을 한국으로 보내면서 전란중인 한국에 구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서둘러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미국의 지부격인 대한민국 경남지역 총무직에 임명하였다.(김은식, ‘장기려-우리 곁을 살다간 성자’ 봄나무 2006, 60쪽)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지부 총무로서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을 만나 지속적인 구호품 획득과 분배를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 내 구제위원회 설치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설함과 동시에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만든 이유는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교계의 요청 때문이었다. 귀국당시 미국교계는 한국 원조를 위한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한국지부 총무(한국 대표자)로 이미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던 것은 6.25전쟁으로 공산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었고 남은 지역이 경남(부산시와 분리하기 전)뿐이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미국지부였던 셈이다.
5) 복음진료소 설립(초대원장 차봉덕)
도착하자마자 불과 1주일 만에 경남구제회를 만들고 동시에 복음진료소를 개설했다는 것은 전영창이 얼마나 그 당시 상황을 엄중하게 보았고 바쁘게 일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서 모금해 온 구호기금 5,000불로 처음에는 항생제를 구입하여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부산에 상주하고 있던 노르웨이 구호담당 책임자인 넬슨을 만났다. 그런데 넬슨은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조그마한 의원이라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즉시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난 의사가 차봉덕이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전영창, 34세)는 미국교회의 요청으로 설립했고, ‘복음진료소’(원장 차봉덕)는 한국의 필요 때문에 개원한 것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는 의료복지사업을 하기위한 사회복지법인체와 같은 것이고, ‘복음진료소’는 그 사회복지법인체의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의료기관인 셈이었다.
전영창은 귀국 후 단 1주일여 만에 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고 복지기관과 의료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전영창이 내걸었던 복음병원 원훈은 <1. 치료하는 병원, 2. 전도하는 병원, 3. 교육하는 병원>이었다. 이는 훗날 지금의 고신의료원(치료), 원목실(전도), 의과대학(교육)으로 잘 발전해 왔음을 볼 때 전영창의 설립비전과 꿈이 얼마나 크고 정확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6) 장기려 박사 초빙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된 복음진료소는 밀려드는 환자들로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로는 외상환자들 치료나 수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를 만나 외과의사의 필요성을 의논했고, 마침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부임해 와 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았다.
1951. 6. 21일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님을 모시고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장기려를 찾아가 복음진료소 사정을 말씀 드리고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장기려는 흔쾌히 수락했고 6월 30일 사직을 하고 1941. 7. 3일 복음진료소로 부임 했다. 이때부터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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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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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속도인가 방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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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갈등했다. 그리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 하면 사람이 변할 줄 알았다. 해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저 방법으로 변화를 유도했다. 그렇게 저 방법도 아닌 모양이다. 새로운 방법으로 해보면 어떨까? 선택과 번복,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청소년을 향한 사역이 벌써 햇수로 35년째이다.
“35년 동안 하고 있지만 이 사역이 나에게 맞는 것일까?” 여전히 물음표이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갈등과 고민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데 왜 빨리 변하지 않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울까?” “더 많은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덧 바른 방향보다 속도에 조급해하며 갈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쯤되니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청소년들도 35년을 하고 보니 철이 들어 성인으로 자기의 역할을 하나씩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속도, 양, 수준만큼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모두 변화되어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은 일하고 계셨다.
“내가 주님보다 앞서 있었구나. 내가 성령보다 앞서 나갔구나. 내가 조급했구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서야 깨닫는다. 참 미련한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둘째, 아기를 낳고 기뻐하며 그렇게 좋아하고, 배밀이 할 때 아장아장 걸을 때는 또 얼마나 귀여워했나?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니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 자녀가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다시 자신의 부모와 같은 상황이 되면 그 때 자기의 모습을 알게 될까?
신앙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는데, 육적 자아가 자라고 자기 철학이 생기면서 신앙의 성장에서 반항기가 올 때, 옆에서 보고 찾고 기다려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아버지는 잘도 견디어 주고, 잘도 참아 주며,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나는 어떤가?
셋째, 양이냐? 질이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 쉬운가?
모든 목회자들이 성도의 양적 부흥과 질적 성장을 함께 바란다. 둘 다 건강하게 성장하며 든든한 교회를 세우길 원한다. 나도 이 둘의 조화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질적 성장이 안 되어서 고민일까? 아니면 양적 성장이 안 되어서 더 갈등하는 것일까?
부모님들은 자녀가 키와 몸이 자라기를 원할까? 아니면 공부, 성적, 인격도 모두 다 자라길 원할까? 분명 겉으로는 둘 다 조화롭게 자라길 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은 자녀가 성경적 세계관으로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란다고 하지만, 막상 반에서 성적이 하위권 이거나, 대학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이 안되어 집에서 놀고 있을 때, 부모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교회의 질적 성장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양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넷째, 그래서 지금도 나는 두 나라에서 갈등한다.
세상과 교회, 과연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교회에서도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배우고 공부할수록 세상은 교회의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데, 성경 중심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쉽지 않다. 이건 평신도나 목회자나 다 똑같은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갈등하며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주님, 바른 분별력을 주옵소서! 성령님이 내 속에서 새 영으로 역사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를 주옵소서”
끝나지 않는 갈등, 멈출 수 없는 사역 속에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물으며 방향을 결정하고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갈등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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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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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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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MCC의 조직과 한국에서의 사역의 시원, 초기 사역자들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전쟁기 MCC의 초기 사역이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항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구제 사역이었다. MCC의 대표적인 활동이 구제활동인데, 이는 사역의 최우선 순위였다. 인간의 가치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메모나이트 정신에 따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어 생존하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사역이었고, 이것이 바로 식량지원이었다. 지원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있기 때문에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에는 79톤의 구호물자를 보냈는데, 우유와 식품이 중심이었고 그 외 의류 성탄절 선물꾸러미 등이었다. 이들이 지원 대상은 부산이나 경남지방 뿐만 아니라 서울 인근, 인천과 수원, 38도선 이북의 화천, 그리고 울릉도 등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MCCC가 세계교회 봉사회(CWS)와 동역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량 지원 외에도 소고기 통조림 등을 공급하고 부산과 대구 등지에 우유급식소를 설치하고 어린 아이들의 건강과 위생을 지켜 주었다. 구호통조림 통에는 ‘Food for Relief,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넣어 무상 공급이라는 점을 알리고, 이를 판매하거나 되팔아서도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무상 구호 식량을 판매하여 특정인이 사유화하지 못 하게하기 위한 조처였다.
둘째, 직업교육이었다. MCC는 고아들의 자립갱생을 위해 직업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1953년 5월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천동의 78에이커(약 9만5천평)의 땅과 거기 부속된 27채의 건물을 구입했다. 47에이커의 땅은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구입하였고, 논과 밭과 언덕이 있는 31에이커는 한국정부로부터 임대한 것이다. 이 토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업실습장인 농도원(農道園)이었으나 해방 이후 한국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이 학교 사업은 MCC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이곳에서 남자 고아들을 위한 중등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살아갈 수 있게 구상한 것이다.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구성했는데, 초기 사역자인 위버 선교사를 비롯하여 경상북도 도지사, 경상북도의회 의장, 경북대학교 총장 고병간 박사, 사회사업가협회장인 이영식 목사, 대구동산병원 부원장 황용운 박사,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로버트 콜스(L. Robert Kohls, 1928-2006) 선교사 등 8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가 1953년 10월 개교한 메노나이트실업중고등학교였다. 일차적으로 전쟁고아들을 위한 학교였음으로, 학교는 무상교육만이 아니라 의류와 숙식을 제공하는 기숙학교로 출발했다. 첫해에 14명의 고아가 입학했고, 학교교육은 1971년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고, 그 후 학교는 폐쇄되었다. 한국은 급속도로 산업가 이루어지고 삶의 환경이 개선되자 MCC는 더 시급한 도움이 요청되는 월남으로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첫 교장 콜스는 한국이름 고을수(高乙秀)로 불렸는데, 1953년 10월 내한하여 1956년 3월까지 2년 6개월간 교장으로 재직했다. 오하이오주 달라스카운티 출신인 그는 드레이크 대학(Drake University)에서 1년간 수료하고 제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28일 징집 서류를 제출했고, 1945년 12월 31일 입대하였는데 전후 1946년 한국에 주둔했다. 한때 대구 동촌의 K2공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후 드레이크대학에 복학하였고, 1949년 6월 17일에는 노르마 차펠(Norma Glee Chappell)과 혼인했다. 대학 졸업 후 3년 교사로 일했고, 메노나이트교인은 아니었으나 어려운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내한한 것이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는데, 메노나이트교회와 더불어 평화교회를 지행했음으로 그를 교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일 『한국식으로 사고하기 Learning to Think Korean』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런 문서를 보면 그는 매우 지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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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