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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위드 코로나 – 기다림과 능력
    영어로 with(위드)는 ‘함께’ 라는 의미입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열리면, 감기처럼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코로나의 좋은 점 혹은 나쁜 점들을 다 가지고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with(위드) ‘함께’ 간다고 할 때, 좋은 것만 함께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점과 더불어 나쁜 점 또한 함께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질병’과 함께 살아가고, 자녀와 함께 살다 보면 즐거운 점도 있지만 힘든 점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한쪽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양쪽을 다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은 이런 모든 면을 안고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능력’을 삼손처럼 힘이 강한 이미지,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성공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서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하면서 능력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드 코로나를 생각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아마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위드 세상’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함께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살면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존재,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입니다. 어떤 무리들은 “세상이 너무 타락해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 우리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곳에서 깨끗한 공동체를 세워나가자”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기독교 사상과 배치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꿈꿔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위드 패밀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가족이라는 선택할 수 없는 공동체 속에 묶였습니다. 사춘기 자녀들도, 그 모습을 안고 함께 살아야 하고, 반면에 부모의 약한 점이 보이더라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사회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인내, 헌신, 양보’ 등의 가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위드 공동체’입니다. 학교, 교회, 친구들 집단 등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떨어져서 살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에 함께 있다 보면 좋은 점도 있지만 약점도 드러나고, 개인이 참고 인내해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내가 싫다고 무작정 공동체를 떠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함께 성숙해 나갈 때 사랑과 인내의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나무를 보면 여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잎의 색이 변하며 곧 시들해집니다. 겨울에는 이 시들해진 잎이 떨어져 곧 나무가 죽을 것만 같지만 봄이 되면 이내 새순이 피고 다시 새 잎이 풍성하게 영글어 갑니다. 나무의 사계와 동일하게 ‘함께’ 한다는 것은 이 시간을 보내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나무의 열매만을 보고 그 열매 뒤에 감추어진 나무의 오랜 인내의 시간은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의미를 알고 버려지는 시간이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며 열매를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먼저, 세상이 교회를 볼 때 ‘다름’이 없으면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합니다. 백신이 없던 지난해 코로나 감염이 두려움으로 밀려올 때,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똑같이 두려워하고 겁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육체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감염을 조심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감염 자체에 함몰되어 일상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조심하되 두려워말고, 타인에게 피해는 주지 않되 당당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함께 어우르며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열리며 뒤따라 온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공적 마스크 공급부터 시작해, 거리두기 단계 조절, 백신 수급 문제 등 주요 사항이 있을 때마다 정치권을 비롯한 국민들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물론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포용하는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흑백논리로 나뉘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아우르며 더 나은 제3의 해결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시대에 ‘함께’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이 넓고 깊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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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부산기독교이야기]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2
    달라스 보랜에 이어 1952년 5월 말 한국과 부산을 방문한 이가 바일러(J. N. Byler)였는데, 그는 MCC본부의 구제사역 책임자이자 극동지역 책임자였다. 그는 10일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MCC의 한국에서의 독자적인 사역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남한 인구 2천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 피난민이거나 전쟁 중 부상당한 이들 혹은 다른 이유의 극빈자들이었다. 전쟁 과부는 30만 명에 달했고, 전쟁 중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13세 이하의 자녀가 51만7천명에 달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는 2만5천6백 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호받지 못하는 나병 환자는 약 5만 명에 달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을 돕는 일은 시급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체적인 선교활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민간구제기관의 여러 인사들, 그리고 피난민 수용소와 고아원, 어린이집, 보육원, 병원 등을 방문했다. 그리고 MCC는 한국에서 독자적인 구호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인식했고 여러 계획을 추천했다. 이후 MCC는 인접한 일본에 있는 바일러의 후임 극동지역 책임자인 데일 네블을 여러 차례 파송하여 현지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검토하게 했다. 네블(Dale Allen Nebel, 1916-2005)이 처음 한국 부산으로 온 때는 1952년 11월 16일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MCC 사역의 가능성을 검토하게 했다. 처음 그는 MCC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일했는데, 이 때 여기서 보렌을 만난 일이 있다. 중국에서의 사역을 마친 네블은 필리핀으로 가서 1949년 2월까지 일했다. 그 후 귀국하여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그가 36세가 되던 1952년 바일러에 이어 일본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한국 등 극동지역 MCC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일단 홍콩으로 가 재정적인 이유로 홍콩의 MCC사무실을 폐쇄하고 극동지역 사무실을 일본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 8월 일본 나가노 현의 카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리는 선교사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여 부산에서 일하던 부르스 헌트(한부선), 존 해밀턴(함일돈) 선교사 등을 만나 한국에 대한 정보와 한국에서의 MCC의 구제 사역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때의 정보를 기초로 MCC본부 구제사역 책임자인 J. N. 바일러에게 한국 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1952년 11월 16일 부산으로 왔다. 그의 임무는 MCC 한국사무소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UNKRA에서 사역하던 보랜과 함께 사무실과 주거지로 사용할 건물 한 동을 매입했다. 그 외 여러 시설과 사람들을 만나고 12월 4일 일본 오사카의 MCC 극동본부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보낸 기간은 2주간이었다. 그는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제기관으로는 UNKRA(유엔한국부흥위원단),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CWS, CARE, YMCA, YWCA, CCF SCF(어린이 구호연맹) 등과 같은 외국 자선기관이라고 했다. 이 때(1952. 12월 말) MCC 본부는 의류 12톤과 비누 3톤을 한미구제단(American Relief for Korea)을 통해서 한국으로 보냈고, 이 물자는 UNCACK에서 인수하여 전쟁피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네블은 1953년 1월 30일 두 번째 부산을 방문했다. 이 때에는 10일간 체류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3월 6일 미국 MCC본부가 파송한 데일 위버(Dale Weaver) 선교사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왔다. 이제까지는 한국에서의 구호사역을 위한 준비와 탐색의 기간이었지만 위버의 내한으로 공식적으로 한국에서의 MCC 사역의 시작이었다. 네블은 4월 3일까지 한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인 5월 4일에는 네 번째 한국을 방문했고 한 달 후인 6월 5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해 6월 25일 다시 한국으로 왔는데, 일주일간 체류하고 7월 1일 돌아갔다. 이런 일련의 한국 방문은 MCC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이런 방문을 통해 MCC의 한국사역에 대한 몇 가지 제안과 조언을 했는데, 의료선교도 제안했으나 후일 구제사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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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10-01
  • [의학칼럼]이유 모를 안면통증, 삼차신경통(1)
    수년 전 50대 중반 남자분이 초췌한 모습으로 병원을 방문하였다. 이분은 오랫동안 오른쪽 얼굴의 뺨이 칼로 도려내듯이 아팠고 칫솔질을 하면 너무 통증이 심해서 자주 양치질을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치과를 여러 군데를 방문해서 발치를 포함해 여러 가지 치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갈수록 너무 심해져 지인의 소개로 병원을 찾아오셨다고 하였다.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필자는 삼차신경통이 강력히 의심되어 관련된 정밀검사와 약물치료를 하였고, 이후 증상의 호전이 없어 수술 치료를 하였다. 수술 후 다행히 중년 남성의 통증은 완전히 소멸하여 일상생활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중년 남성의 사연이 남다르지 않아 삼차 신경통의 증상과 치료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삼차신경통’이란 신체 부위에서 얼굴과 이마의 통증과 온도 감각을 뇌로 전달하는 삼차신경이 병적인 변화가 발생하여 이상 통증이 발생하는 질병을 말한다. 여성의 경우 연간 인구 10만 명당 5.7명 꼴로 발생하고 남성의 경우 2.7명이 해당한다. 그리고 50~60대의 중년층에서 흔하다. 삼차 신경통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특발성’이 많으며, 특발성의 경우 삼차신경의 신경 뿌리가 주위 뇌혈관에 의해 압박을 받거나 원인 불명으로 신경 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경 보호막(수초)의 손상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자극이 심한 통증으로 잘 못 전달되는 현상이다. 그 이외 외상, 대상포진, 축농증, 종양, 턱관절 장애, 편두통 등의 원인이 되는 ‘이차성’의 경우 삼차 신경통 환자의 10% 이하를 차지한다. 삼차 신경통이 의심되는 사례의 중년 환자도 필자는 ‘특발성’과 ‘이차성’을 감별하고 향후 치료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일반 두개골 X선 검사, 뇌 MRI 및 근전도 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삼차 신경통’이 의심되어 뇌 MRI 검사할 때는 삼차신경과 다른 뇌신경을 정밀히 분석하기 위해 일반 촬영기법뿐만 아니라 ‘조영제 투약 검사와 FIESTA 검사’를 추가로 반드시 해야만 삼차 신경통을 정확히 확진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필자도 외부 병원에서 뇌 MRI 기본 검사를 하고 진료실을 찾아온 환자들의 대다수가 삼차 신경통의 원인과 진단을 놓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필자에게도 진료를 보면서 정밀 MRI 검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통해 좋은 결과를 이끌 수 있었다. 우선 삼차신경통의 해결을 위해서는 의심 증상을 꼭 알고 전문의의 진료와 정밀검사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여야 한다. 삼차신경통 의심증상 ⑴ 발작적으로 전기 쇼크나 송곳과 같은 예리하고 찌르는 듯한 통증 ⑵ 이러한 발작적인 통증은 수초에서 수 분간 지속하고 여러 번 반복될 경우 ⑶ 통증이 얼굴의 오른쪽 또는 왼쪽 중 한쪽 편에서 특정한 이마, 눈, 볼, 및 턱에만 국한될 경우 ⑷ 얼굴의 감각은 정상이고, 그리고 ⑸ 세수, 이닦기, 식사, 대화할 때 통증이 유발되는 경우 삼차신경통 환자는 위와 같은 통증으로 인해 삶의 질과 영양 상태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제한이 많아 우울증을 자주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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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역사바로알기]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문제 제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6월 21일 복음병원 설립 7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70년의 역사!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6월 21일은 복음병원 설립일이 아니다. 설립일이 아닌데도 어떻게 이 날을 설립일로 계속 지키고 있을까? 이미 이와 관련된 글을 몇몇 언론에 기고했으나 일부 미비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추가로 확인된 새로운 자료들을 수정보완하여 다시 기고한다. 아시다시피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고신대학, 고려신학대원과 함께 고신교단의 중추기관이다. 이 ‘복음병원’(1961. 8. 7)의 전신은 ‘복음의원’(1951.12.23)이었고 그 복음의원의 전신은 ‘복음진료소’(1951. 1. 15)였다. 그렇다면 ‘복음진료소’는 누가 언제 설립했을까? 당연히 전영창 선생이 1951. 1.15일 차봉덕 의사를 초빙, 제 3영도교회 별관(창고)에서 설립했다. 미국서 모금해 준 5,000불(seed money)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복지구호단체)와 '복음진료소'(의료기관)를 동시에 설립 개원했다. 그러나 연혁이나 각종 기록에는 전영창 대신 장기려 박사를 설립자로, 초대원장으로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도 장기려 박사를 복음병원 설립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장기려 본인은 복음병원은 자신이 설립하지 않았으며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라고 몇 번이나 밝혔었다. 그런데도 고신이나 복음병원은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 장기려 박사가 설립자가 되고 초대원장이 되면 정체성이나 병원 선전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잘못된 역사를 그냥 덮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다 복음병원의 역사가 이같이 왜곡되었을까? 어쩌다 설립자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이 복음병원 역사에서 지워졌을까? 연구 동기 필자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교단의 목사인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신학은 좋은데 생활은 왜 부족한가라는 문제의식을 늘 가지고 목회현장에 있다가, 복지목회로 전환하여 섬기던 중 교단 내 사회복지 활성화를 위해 손종기, 김세중 목사와 함께 ‘고신전국사회복지협의회’(2012. 4.30)를 조직,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출범하였다. 고신전국사회복지협의회는 기존 교단총회 상설기구인 사회복지위원회 소속 전문위원들로 활동하면서 몇 차례 모임을 가지다가 교단 내 사회복지시설장 및 직원들, 담임목사들에 대한 기독교사회복지 전반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1회 고신기독교사회복지세미나'(2014. 4.28~29, 경주 코오롱호텔)를 개최했다. 이때 필자는 2년 동안 고신총회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으로서 교단 내 사회복지 역사 및 현황에 대한 연구조사를 한 후 ‘고신교단의 사회복지역사 소고’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이때 조사연구한 결과 평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신은 결코 사회복지사역에 무관심했거나 소홀했던 교단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초창기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이 잘 조화된 교단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이약신 목사의 희망의집’, ‘조수옥 전도사의 인애원’, ‘전영창 선생의 복음진료소’(복음병원)...............그런데 여기에서 뭔가 이상했고, 막혔다. 이미 수많은 기록들에서 '전영창'이 지워지고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복음병원 연혁에서부터 각종 저서들, 기록들에서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가 설립했고 초대원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전영창 선생은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고신을 떠나야만 했을까? 본 고는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기 간 조사연구 한 결과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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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시사칼럼]진보적 보수와 보수적 진보 그리고 개혁보수신앙
    ‘기본소득’을 아시나요?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 혹은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뜨거운 개념입니다. 조짐은 사실 2012년 대선 당시 벌써 싹텄습니다. 한국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는 ‘노인기초연금’ 카드를 당시 진보 성향의 야당이 포퓰리즘 논쟁을 의식하여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보수 정당을 자처하던 집권 여당에서 전격적으로 수용하면서 파문이 일었습니다. 사회 복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정치적 수렴(收斂)은 이미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1950년 노동당 정부의 게이츠켈 재무장관은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무상을 원칙으로 하던 복지서비스 일부를 유상으로 전환하는 등 정책 변환을 주도하면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참패하는데, 이어서 들어선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 버틀러는 놀랍게도 노동당의 개혁 기조를 그대로 받아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둘의 이름을 합쳐서 ‘미스터 버츠켈’이라 불렀고 여기서 유래한 말이 ‘버츠켈리즘(Butskellism)’인데, 대처리즘이 등장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보수-진보의 타협과 합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는 양립불가능한 관계가 아닙니다. 일찍이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데일리(1804-1881)는 노동계급의 선거권 확대 등 일련의 사회개혁정책들을 주도했기에 ‘진보적 보수주의자(progressive conservative)’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보수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어본다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 기둥으로 첫째,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 체계가 사회와 인간의 양심을 지배한다는 믿음, 둘째, 다양성의 확산과 인간 존재의 신비에 느끼는 애정, 셋째, 문명화된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질서와 위계를 요구한다는 확신, 넷째, 자유와 재산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신념, 다섯째, 관습과 오래된 규범 및 일반화된 지혜를 향한 신뢰, 여섯째, 급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중한 변화야말로 사회를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정서, 이렇게 여섯을 들었습니다(『보수의 정신』, 65-66). 하지만 전술한 사례들은 이러한 보수주의 터전 위에서도 얼마든지 진보적인 사고 내지 정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에서는 ‘보수적 진보주의자(conservative progressive)’가 나타난 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니 블레어 전 총리입니다. 노동당 출신인 그는 전임자였던 보수당 정권 마거릿 대처의 노선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블레처리즘(Blacherism)’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만, 거기에는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료하고 안정 속에 성장이라는 중용과 포용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선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경우 사전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진보를 여전히 주창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보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사실은 보수적 진보주의의 길을 자신도 모르는 채 걷고 있는 지도 모르고, 좌파라 비판 받는 많은 경우도 역시 기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삼파(三波)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재난지원금, 출산지원대책, 공공의료에 관한 논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대상이나 지급 금액에 관해서만 의견이 갈릴 뿐, 그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실익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신학(神學)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생경한 개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보수개혁신앙’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떻게 신앙이 보수이면서 동시에 개혁일 수가 있을까요? 보수적 개혁이거나 혹은 개혁적 보수가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 동등가치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나 과학이 아니라 신이나 신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지 않으며,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Abhandlung, 6, 7). 오늘날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괴델 역시 “증명할 수 없지만 참인 명제가 존재하며, 따라서 진리는 명제를 초월한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incompleteness theorem, 1). 그리스도야말로 말(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며, 명제를 넘어선 진리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세상도 진보적 보수니 보수적 진보니 하는 판국에, 교회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편을 가르거나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고 진지한 대화가 아니라 무모한 독백만 일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나 세상이나 무슨 주의(主義)가 아니라 오직 주(主)만 드러나고 높아지기를, 폭풍 같은 현실을 잠잠하게 하실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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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성서연구]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한복음 1장 13절)
    <냉수 마시고도 이 쑤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빈속을 냉수로 채웠는데도 남들 앞에서는 마치 고기라도 먹은 듯이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빈털터리 신세를 들키지 않으려는 심정이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나쁘게 보면 위선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존심 때문이라면 어떨까요? 위선이라고 비난하기엔 좀 숙연해지지 않나요? 오래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 식당에서 노부부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아내가 먹는 동안 남편은 바라보기만 하더랍니다. 같이 먹지 않는 이유는 곧 밝혀졌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식사를 마친 다음에 남편이 아내의 틀니를 끼우고 식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습을 아내는 지켜보았겠지요. 가난해서 부부 모두가 틀니를 할 형편이 못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니, 틀니를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오랜 세월의 사랑이 두 사람의 치아 구조까지 닮게 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부부의 틀니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부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키고 싶은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삶을 버티게 해 주는 마지막 존엄성, 그것이 자존심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유는 천차만별입니다. 가난 때문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자인데도 비극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부자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만, 공통점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배후에는 버틸 수 있는 자존감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삶을 지탱하도록 해 주는 최소한의 자존심, 혹은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오늘 지구촌에서 사람답게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한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힘들어했었지요.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을 보면서 우리 형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깊이 절망하고 좌절한 이들이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한 박탈감이 심합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위축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교세가 많이 줄었습니다. 부흥이란 흥분된 목표를 가슴에 품고 목회자가 된 많은 이들이 위축되어 가는 교회 현실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이런 우리를 버티게 해 주는 마지막 자존감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가장 근원적인 자존감의 이유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13절은 놀랍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사람의 뜻과 사람의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낳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를 죽일 수 없고, 세상이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흔들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외칠 것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다>란 외침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질병, 가난, 실패, 상처들이 우리를 흔들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상,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낳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최후의 자존감을 붙잡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겨나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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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서임중 칼럼]父子之情의 牧會
    ‘이치(理致)’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를 뜻한다. 동의어로는 ‘도리(道理)’ 또는 ‘법칙(法則)’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이치에 어긋나는 언행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들 하는데, 이는 곧 도리와 법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논어(論語) 제4편, 이인편(里仁篇) 제 13장에는 예의와 겸양으로 다스림의 이치를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何’라고 설명하고, 14장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과 그에 맞는 행동이치를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관계이치를 설명하는데 하나를 가지고 세상 이치를 꿰뚫는 것을 교훈한다. 오늘날과 같이 관계이치가 파괴되어가는 이 시대에 참으로 주목할 만한 교훈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이다. 공자가 증자에게 자신의 道는 ‘一以貫之’라고 했다. 공자가 나간 후 문하생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忠恕일 뿐이다”고 대답을 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관계이치를 공자는 이것이 자신의 道라고 일깨웠던 것이다. 공자의 도는 仁으로 일관한다. 공자의 仁의 기본 의미는 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애는 충서(忠恕)로써, 忠은 中+心 즉 마음의 중심으로 마음다운 마음이고, 恕는 如+心 즉 같은 마음으로 진정한 용서는 마음이 하나 됨이다. 이것이 진정한 愛人이요 仁이라고 갈파했다. 내 평생의 삶에도 기본 철학과 목회의 기본 이치가 있다. 첫째가 만남이고 둘째는 나눔이며 셋째가 관계이다. 만남의 내용에는 善緣과 惡緣이 있다. 그러기에 좋은 만남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여정에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나눔은 축복이다. 있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없거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어찌 축복이라 하겠는가. 그런데 나눌 수 있는 마음도 있고 요건까지 함께 갖추고 있다면 이 어찌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로 얽혀 살아간다. 그러나 그 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보다 지고한 관계는 없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목회 이치이다. 30여년의 목회를 마무리하고 은퇴를 하면서 포항중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후임 목사님은 내가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로 기도 중에 택하였고, 성도들의 만장일치로 청빙청원을 받아 위임목사로 奉職하고 있다. 돌아보니 벌써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원로목사로, 또 위임목사로 7년을 하루같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父子之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잠깐 어둠의 세력에 카오스 현상을 경험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聖域의 이치를 통해 비온 뒤 땅이 더욱 굳어지는 자연이치와 같이 교회는 더더욱 평행감축의 행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담임목사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선임과 행정을 맡은 두 분 부목사님들과 장로님, 권사님들과 함께였다. 이유는 나도 잊고 지나쳐버린 원로목사 생일을 기억하여 찾아온 것이다. 꽃다발과 케익에 금일봉까지 우리 내외 품에 안겨주며 축하하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해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그 마음과 섬김 받는 내 마음이 忠과 恕로 어우러졌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그렇게 챙겨주시는 관계는 父子之情의 관계다. 공자가 증자에게 吾道 一以貫之를 일깨웠을 때 부차적 설명을 따로 하지는 않았음에도 증자는 문하생들에게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공자의 가르침을 헤아려 설명했는데, 이는 말없이도 많은 것을 일깨우고 말없이도 많은 것을 깨닫는 忠恕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원로목사인 나와 후배 담임목사는 마음 중심으로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삶을 연주하며 사역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의 이치인가 생각하며 감사한 중에 더욱 감사할 뿐이다. 은퇴를 하면서 후임 목사님에게 2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는, ‘원로목사’는 은퇴 후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사역 기간을 귀히 여겨 교회에서 예를 갖추어 우대하는 것일 뿐, 목회에서는 은퇴이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묻지 않는 한 절대로 목회와 연관하여 단 한마디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원로목사와 담임목사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忠과 恕를 통한 진정한 愛의 관계로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의 忠은 마음다운 마음, 즉 거짓 없는 마음이며, 恕는 헤아리고 깨닫고 밝게 하는 이치로써 같은(如) 마음(心으)으로 지고한 관계이치를 뜻하는 것이며, 愛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보혈로 맺어지는 십자가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나는 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이 녹슬지 않고 닳아서 사용하지 못할 때까지 聖役으로 사용하시라고 축복하며 안수기도를 해 주셨던 故방지일 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지금도 나는 매주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게 전국을 다니며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이치가 忠恕(마음을 다한 하나됨의 관계)로 연주될 때는 교회가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그 관계가 怨誤(원망과 잘못된 관계)로 연주되면 교회는 카오스 현상을 벗어날 수 없고 벌판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나는 참으로 복에 복을 받은 사람이다. 시편 92:14~15절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의 축복 메시지인 말씀을 옷 입고 평행감축을 노래할 수 있음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父子之情의 관계이치가 忠恕로 연주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희의 삶을 사는 오늘도 주야로 기도하는 것은 오로지 아비의 마음으로 아들 같은 담임목사님의 목회가 平幸感祝이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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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은혜의 말씀]일어나 걸어라(요 5:1-9)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오신 예수님은 양문을 지나 가까이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 못에는 한 번씩 밑바닥으로부터 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젓고 가는 것이라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끓어오를 때 제일 먼저 뛰어들면 무슨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에는 전국에서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베데스다는 긍휼,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뜻과는 다르게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 수많은 병자들 틈에서 홀로 누워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며 고개 숙인 38년 된 한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능력의 말씀이 그에게 선포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절)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자 성령의 능력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병자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신음하는 우리들, 또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는 육체의 연약함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던 것처럼 나의 문제도 예수님 안에서 깨끗하게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38년 된 병자는 구원받을 만한 무슨 조건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편에서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찾아오셔서 값없이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이요 사랑입니다. 은혜는 나는 아무 한 것이 없는데도 주님이 그저 값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둘째,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아픔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6절 보세요.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세상에는 38년 된 병자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우리 주님은 그 아픔을 다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다 아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 고백하면서 매달리면 됩니다. 주님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셋째,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소망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꼭 한 가지 물으신 게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이 질문을 던지시면서 소망의 불꽃이 사그라진 그에게 작은 불씨를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소망의 끈을 붙드는 것, 그것이 모든 치유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베데스다를 바라보지 마세요. 온전하신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시고, 능력의 주님 의지해서 기어코 일어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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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목회자 칼럼]도도한 신앙인
    요즘 젊은 세대 언어로 “까도남”이라고 있다. ‘까칠한 도시 남자’를 줄여 이르는 말로, 성격이 까다롭고 쌀쌀맞은 분위기의 세련된 젊은 남자를 말한다. 사람들은 까칠한 사람을 싫어한다. 그런데 원만하고 성질 좋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능하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똑똑하면서도 따뜻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좋지만 그렇게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드물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기보다는 뱀같이 간사하고 비둘기같이 멍청하기가 쉽다. 일을 할 때마다 까칠을 떨고 예민하게 굴면 자신의 마음도 불편해진다. 세월이 지나면서 까칠함은 디테일이었고 예민한 것은 철두철미한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었다. 온유의 뜻은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가 길들여져서 명마, 준마가 된 상태라고 한다. 사역 현장,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대충대충,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 당장은 원만하지만 일은 되는 게 없다. 그래서 스케일과 디테일, 철저함과 따뜻함,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면서 까칠하고 도도한 사람이 더 신뢰가 된다. 신앙 세계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도도하고 까칠하고 시건방진 사람이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한다. 오늘은 도도한 크리스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윗물은 더러워도 네가 샘의 근원이 되면 된다. 일을 못하는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원망, 핑계, 변명, 이유가 많다는 것이다. 일을 못하는 사람이 연장을 나무라는 법이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남을 탓하고, 희생양을 찾고, 변명 거리를 찾아서 이유를 갖다 붙였다. 아브라함은 아빠 찬스를 쓸 게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윗물은 더러워도 조상 탓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 윗물은 더러워도 네가 깊은 산속 옹달샘이 되면 물 근원이 되어서 물길따라, 꽃길따라 실개천이 도랑이 되고 시내를 이루고 천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되는 것이다. 샘은 자정능력이 있다. 흙탕물도 흘려보내며 이파리도 떠내려 보내고 맑아진다. 흘러가면서 주변의 산천초목을 유익하게 한다. 아브라함 한 사람이 강의 뿌리가 되고 원천이 되고 근원이 되었다. 일꾼은 어떤 경우에서도 환경, 배경, 조건을 탓해서는 안된다. 부흥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갈 바를 알지 못하여도 주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가면 된다. 아브라함은 75세 영감님 때에 익숙한 곳, 정든 곳인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여도 주께서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떠났다. 멋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자기가 계획한 것보다도 뜻밖에 주께서 강권적으로 인도하신 것이 좋게 되었다. 아브라함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개척정신, 도전정신, 모험정신, 창의정신이 충만했다. 그것이 청춘이다. 사업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하는 모험이다. 위기가 기회이다. 부담이 안되는 것은 사명도 아니다. 막연한 미래가 두서도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주께서 이루실 기이한 축복으로 인한 설레임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어도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사람들은 안전 위주의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바라고 나아가면 실제 상황이 된다. 인생은 안전판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도전하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뻥이 심하다. 당장 보기에는 헛소리하는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꿈꾼대로, 소원대로, 말한대로, 심은대로, 믿음대로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라도 빵실하게 기도라도 거창하게 소원이라도 앗사라게 가져야 된다. 꿈은 이루어지고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다툴 때에 롯은 눈에 보기에 여호와의 동산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고 마침내 타락하고 망했다. 아브라함은 선택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권이 중요했기에 좌우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것이 최고이기에 조카에게 양보할 수 있었다. 조카 롯이 떠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보이는 것을 다 주겠다 하고 종과 횡을 행하여 보라 네 발로 밟는 곳을 다 주겠다며 그야말로 사통팔달의 복을 주었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이다. 아브라함 집안은 기도 응답이 늦기로 유명하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고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 100세가 되도록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전에 죽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환갑이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아들을 낳았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처가살이만 20년을 살며 칠년을 수일같이 보냈다.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돌아간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드는 것이다. 크리스찬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고, 기다리고,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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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부산기독교이야기]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
    메노나이트교회(Mennonite)는 16세기 종교개혁기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화란에서 시작된 재세례파 그룹의 교회인데, 화란 외에도 스위스 남부독일 등지에서 일어났고, 점차 은밀하게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평화주의에 입각하여 전쟁과 군복무를 반대하여 국가와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신교의 자유를 찾아 프러시아, 남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로 그리고 1780년대 이후에는 미국으로, 1870년대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디든 자신들을 받아주는 곳이면 기꺼이 이주하였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집단적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든 중 우크라이나의 메노나이트교도들이 기근으로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메노나이트교회와 그리스도 형제교회(Brethren in Christ), 아미쉬(Amish) 등 북미의 15개 교단 의 34명의 대표들이 1920년 9월 27일 미국 시카고에 모여 러시아 전역에 사는 굶주린 이들을 구호하기 위한 후원연합체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오늘 MCC라고 부르는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ennonite Central Committee)였다. MCC의 3대 사역은 구제, 봉사, 평화사역인데, 본부는 미국의 경우 펜실베니아주의 애크론에, 캐나다는 매니토바 중 위니펙에 있다. 메노나이트교도들은 신명기 14:29절,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는 말씀을 구호의 지침으로 받아드렸는데, MCC는 이 정신에 따라 1920년 조직 이후 세계도처의 핍절한 이들에게 구호사업을 전개하여 왔다. 1920년에서 25년 어간에는 우크라이나의 기근상태에 있는 이들을 후원했으나 그 후에는 파라과이, 프랑스, 폴란드 등 도처의 메노나이트 공동체에 도움을 베풀었고, 6.25 전쟁 중에는 한국에서 구호사업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자 MCC는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준비했고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입국을 신청하여 1950년 10월 MCC 요원 한 사람을 부산으로 보내 피난민 구호에 대한 기초 자료를 조사하게 했다. 이 조사에 근거하여 1952년 10월 27일 첫 MCC 요원이 내한했는데, 그가 달라스 보란(Dallas C. Voran, 1920-2002)이었다. 그는 부산으로 입국한 이후 1953년 3월까지 1년 6개월 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피난민 구호와 봉사 사업에 관여하였다. 메노나이트계의 벧엘대학(1938-1943) 출신인 그는 1946년 MCC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어 ‘세계교회 봉사회’(CWS) 소속으로 4년간 난민구호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든 중 한국에 전쟁이 발발하자 MCC 본부는 달라스 보란을 영입하고 그를 한국에 파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51년 9월 동경으로 와서 기다리던 중 입국 허락을 받고 10월 27일 입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MCC가 한국에서의 활동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The 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휘하에서 일하게 된다. 이때부터 1971년까지 2년 간 MCC 요원 75명이 한국에서 일했다. 이들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하여 구호, 교육, 재건 사업을 전개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대구(경산)와 부산지역에서 구제사업, 교육 사업, 가족-어린이 프로그램, 전쟁 과부들을 위한 재봉교육, 그리고 농촌개선 및 지원 사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이 사역을 주도한 조직이 MCC였다. 참고로 부연하면 MCC는 1995년부터는 북한을 돕기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고, 2018년 4월부터 2019년 3월까지 1년간 북한에 14만 4천 개의 고기 통조림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전 세계에 지원한 고기통조림 67만899개의 20%를 차지했다. 메노나이트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그가 동족이던 타국인이든, 아군이든 적군이든 구별하지 않았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풀었다. 이런 정신으로 6.25 전쟁기 한국에서 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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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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