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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아직도 사용할 수 있다
    새해가 밝았다. 나라 안팎은 혼돈 그 자체다. 무안공항 사고로 올해는 새해맞이 행사도 대부분 취소되고 179명의 귀한 생명의 사망뉴스 보도를 통해 새해벽두부터 아프고 슬픈 소식에 마음이 우울하다. 그렇게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핵폭탄이 헌법재판소에서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인가에 온 국민은 좌불안석인데 광화문과 여의도에서는 밤낮없이 찬반 시위로 홍역을 앓고 있다. 국태민안의 보루가 되어야 할 여의도 1번지는 어느 하루도 삼류정치의 쌈박질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프다.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늙어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의 줄을 놓지 않고 쉬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025년도 그렇게 하루하루 열리고 닫힌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도 말씀 사역자로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송구영신 예배로 시작한 2025년 새해 첫날은 감림산기도원에서 신년 축복 성회로 시작되었다. 대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들을 보면서 울컥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새해 첫날에 기도원에 올라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젖은 눈을 보면서 내 마음이 젖었다. 성도들의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는 기도 소리에 거룩한 소름이 돋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기에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림처럼 그려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2025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고 선포했다. 젊은 청년이 조용히 다가와 “목사님 저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돼요?” 한다. 23세의 손자 같은 청년이다. 조용히 내 품에 안아주니 품에 안겨 헉헉거리면서 울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목사님 대한민국이 아파요.” 순간 천둥소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귀도 마음도 가슴도 먹먹했다. 그 언젠가 TV 연속극에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할말을 잃은 나는 “그래, 기도하자.”라는 한마디 밖에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니 지금도 내 영혼은 그 청년의 젖은 목소리에 아픔이 가시지 않는다. 몇 년 전 시골교회 목사님이 부흥회 강사 초청을 하셨다. 일정이 나오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전화로 내게 들려주는 한마디에 내 마음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우리 교회 78세 할머니가 서목사님 방송 설교를 듣고 제게 찾아와 ‘죽기 전에 그분 설교를 직접 한번 듣고 천국 갔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한 시간도 좋으니 허락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리저리 일정 조정하여 주일 1일 집회를 약속하고 갔다.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13명이 예배를 드렸다. 강사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연로하신 성도님들의 눈은 주님을 바라보는 혈루증 여인을 느끼게 했다. 많이 울었다. 그 1일 집회만큼 은혜와 감동을 마음에 담은 집회는 없다고 지금도 고백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국을 더 먹겠다고 하였더니 아내는 국자에 국을 떠 국그릇에 보충해 주었다. 그런데 국자는 신혼 시절에 샀던 것으로 손잡이가 휘어져 있는 것이었고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니 닳아 있었다. “여보, 인제 그만 사용하고 새것으로 바꾸지.”라는 무심코 하는 말에 아내는 “아직은 더 쓸 수 있잖아요.”라는 대답을 했다. 그 순간 뭔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고 손잡이가 휘어진 국자를 통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비단 국자뿐이 아니다. 성도님들이 선물로 주신 좋은 것들도 많지만 목사관에는 신구 문화가 공존되어 있는 살림살이들이다. 버리자니 사연도 있거니와 아깝고, 사용하자니 불편한 것들이 어디 국자 하나뿐이겠는가? 손잡이가 부러진 국자를 보면서 인생도 목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계륵’(鷄肋)의 교훈과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깨우침을 다시금 생각했다. ‘鷄肋’이란 말은 쓸모는 별로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의 비유로 사용되는 용어로서 진서(晉書) 유령전(劉伶傳)과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晉)나라 초기에 죽림칠현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만취가 되어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유령이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보시다시피 계륵(鷄肋, 닭갈비란 뜻)처럼 빈약한 몸이라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방이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서 계륵이 상용되었다. 他山之石이란 다른 산의 거친 쓸모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서 이 말은 쓸모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돌(石)을 소인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에 비유할 때 군자도 소인에 의하여 수양과 학덕(學德)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를 때 타산지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면서 강자에게 굽실거리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졸부의 삶을 엮어 갈 것이 아니라 작은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지닐 때 그 삶을 더욱 넓고 깊고 고고(高高)해지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부러진 국자 같은 상황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이를 소중히 사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우리의 삶에 있을 때 그 삶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내 나이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한해 60여 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한다. 불편한 잠자리와 음식, 교통수단 어느 것 하나 여의찮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의 고령에 포항중앙교회 주일설교를 인도하신 후 안수기도 해 주실 때 “서목사님은 녹슬어 못 쓰는 목사가 아니고 닳아서 못 쓰는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응답이 오늘 나의 삶이 되고 있다. 부러지고 닳아버린 국자 같은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 “아직은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감사함으로 다음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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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성서연구] 하나님의 영이 계십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반갑게 인사하면서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볍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정치 사회적 혼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해지, 그 뒤를 이어 나온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 권한 대행인 총리의 탄핵, 그리고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을 내란 세력으로 규정하여 체포하려는 시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현직 대통령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집중되어 경호처와 대치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로 나가는 것은 정말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야당 지도자는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남북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고, 북한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침체 국면을 벗지 못하고,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과 맞서야 하는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이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소망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본문은 창조 전의 상태를 말씀합니다. 첫째, 혼돈입니다. 카오스, 즉 무질서의 상태였습니다. 둘째, 공허였습니다.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였습니다. 셋째, 흑암이었습니다. 캄캄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중첩된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모든 것을 놀랍게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에 질서를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는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에는 ‘질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정교한 질서의 메카니즘입니다. 일 년 사시가, 계절의 변화, 밤과 낮의 뒤바뀜, 파종하여 추수하기까지의 자연의 응답이 정교합니다. 산천초목이 정확히 때를 알고 반응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공허를 채우셔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창조 세계는 가득 채워진 충만의 세계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어디에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공허한 세상을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우셨으나, 부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은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빛을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가 빛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순간,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마니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의 악을 몰아내기 원했으나, 마니교 지도자인 파우스트는 빛이 있으면 어둠이 당연히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실망하여 마니교를 떠나 회의론에 빠졌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 안에서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빛이 밝혀지는 순간, 어둠은 사라진다는 일원론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영혼에 밝혀지는 순간, 어둠은 물러갑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혼돈도 물러가고, 공허도 채워지고, 흑암도 빛으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 상황을 타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면,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운동과 같은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근원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한국교회가 질서를 갖길 원합니다.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길 원합니다. 모든 성도가 그 앞에 무릎 꿇길 원합니다. 우리의 공허와 부족을 성령께서 채우시길 원합니다. 예배당의 빈 공허함을 성도들로 채워주시길 빕니다. 우리 안의 어둠이 물러가고 기쁨과 감사의 빛으로 충만하길 원합니다. 주여, 주의 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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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시사칼럼] 새해에는 카나리아처럼
    어떤 신년 조찬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짧은 인사말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습니다. ‘카나리아’라는 새에 관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무척 유명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 광부들이 작업할 때면 이 카나리아를 데리고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공기나 호흡에 무척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카나리아가 어떤 새인지 찾아보았더니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사가 자랑하는 캐릭터인 ‘트위티(Tweety)’의 실제 모델이었습니다. 크기는 15cm 내외로 수명은 12~15년 정도이며, 사람 손에 길러진 지가 400년이 넘는답니다. 분당 호흡수가 60~80회요(사람은 12~20회) 심장 박동수는 분당 300회에서 많게는 1,000회까지라(사람은 60~100회), 폐에서 기체 교환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므로 인해 호흡 효율이 100%(사람은 30%) 가까운 생명체입니다. 대기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금방 반응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광부들이 애지중지했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카나리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고 혼탁한지 알게 해 주는 척도(尺度) 역할을 감당하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이미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 14)고 하셨습니다. 어딘가 혹은 무언가에 뿌려져서 그곳 혹은 그것의 부패와 변질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온통 캄캄한 어둠뿐인 어딘가 혹은 무언가를 비추어서 그곳 혹은 그것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존재라는 의미겠지요. 카나리아는 광부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때로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역시 세상을 대해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은 어떨까요? 예수께서는 이어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자들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는 제사장도 있었고 레위인도 등장합니다. 지도자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권력자였던 헤롯이 아무리 악독한 일을 자행해도 그러면 안 된다고 용감하게 외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참된 경건이 실종되었어도 자복하고 통회하며 회개를 부르짖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거룩해야 하는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자들에 당당하게 맞서서 그 불의한 권세에 도전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말씀 듣기를 사모하거나 말씀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특히 발달한 과학은 성경의 가치를 폄하하고 경시하는 경향과 풍조를 양산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중하게 열정을 쏟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건이 사라지는 오늘날 교회가 맞이한 가장 두려운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나요? 각종 우상이 오직 하나님만 송축하고 경배하는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무속이 판을 치고 사이비 신앙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세상입니다. 거짓의 영들이 횡행하며 거짓 선지자 같은 무리들이 미쳐 날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사이비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의와 공법 대신 불의와 무법이 강물 같이 흐르고 공정과 상식 대신 불공정과 몰상식이 폭포수 같이 밀려와도 대항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습니까? 옛날 광부들이 탄광에 들어갔을 때 카나리아가 울지 않으면 뛰쳐나와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가스가 발생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울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의 숱한 영혼들이 영적 생명을 잃지 않겠습니까? 만일 교회가 피리를 불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그대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새해에는 정말 그리스도인라면 신령한 카나리아가 되어 세상을 깨우는 노래를 부릅시다. 신령한 카나리아가 되어 수많은 영혼이 깨어나도록 실컷 울어줍시다. 그래서 사람들의 진짜 목숨을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정말 예뻐하고 사랑하는 그런 성도의 모습을 되찾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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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은혜의말씀] 자족하는 마음 (빌립보서 4:10~14)
    성경에 나오는 한 시대에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역설적인 삶을 산 경우가 많다. 다윗이 10년을 피난생활하며 지은 시편에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것저것 없는 것 천지인데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옥중 서신에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면서도 크게 기뻐하였다. 처자식도 없고 집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궁핍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어떤 괴로움도 감당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고 초청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가 자기 일을 돕도록 하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였다. 마리아는 좋은 편, 말씀 듣는 것을 선택하여 칭찬받았지만 마르다는 일을 많이 하고도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여러 가지를 하면서 분주, 복잡한 가운데 원망하는 것보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해야 한다(눅10:39~42). 마음을 여러 가지로 갈라치기 하지 말고 중요한 한 가지에 집중하라. 삶의 우선순위를 잘 택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이 더하여진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3~34). 우선순위를 놓치고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급하다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교통정리가 안 된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지나간 과거를 곱씹지 마라. 한 날의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도 족한 줄로 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요셉은 어릴 때 엄마가 죽고 열 명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갔지만 배신감에 치를 떨고 대인기피증, 피해망상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 주인이 볼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 애굽의 바로왕은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것을 보았다. 모두에게 버림받았지만 주님의 강력한 임재와 은총을 받아서 용모가 아름답게 되고 예수님을 가장 닮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으니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한이 맺히지 않고 흥이 일어났다. 고통의 때를 지난 후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스트레스, 내면의 상처, 트라우마 이런 것들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어려울 때, 힘들 때 말씀의 인도를 받아 잘 지나가면 이후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때가 차면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노후대책은 밑 빠진 독, 터진 웅덩이를 파서 물질을 쌓아 놓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요셉이 7년 대기근을 잘 지난 것이 아니라 7년 대풍년 때 흥청망청 하지 않아서 대기근의 고비를 잘 넘긴 것이다. 받은 선물 가지고 속상해 하지 말고 선물을 주신 이를 기억하라. 없는 것 때문에 열등감, 패배감에 빠지지 말고, 있는 것 때문에 자만하며 시건방을 떨지 마라.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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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좌파 공산주의자가 된 이재복 목사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 중인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북한 공작금 수수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모 목사와 10여 차례 통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모 목사는 북한공작원 리광진과 접촉했는데, 2015년 4월 쿠알라룸프르에서 미화 1만8900달러의 공작금을 받았고, 또 다른 B목사와 함께 북한 공작원과 회합, 통신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3대 세습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B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12월 기소되어 2017년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앞의 모 목사는 북한 공작금 관련 기소가 늦어져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3. 1. 25). 이와 같은 기독교계의 공산주의자는 일제하에서부터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 난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도 적지 않았다. 남로당을 지지하거나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경우가 그것이다. 해방 이후 남로당의 파괴 공작은 엄청났다. 1946년의 대구 철도의 10월 항쟁, 1947년 3월 제주도4.3사건, 1948년 8월의 여수14연대 반란사건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박헌영은 신변위협 때문에 황해도 해주로 가서 은거하였고, 지령으로 이런 사건을 조종했다. 이 조종을 받아 남한에서 이 사건을 수행한 이가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李載馥, 1903-1949)이었다. 그런데 그는,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출신의 목사였다. 그는 이재봉(李再鳳)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한 목사였다.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마산 재건교회 지도자 주상수, 반공목사 박병훈과 동기였다. 박윤식에 의하면, 이재복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597번지에서 이유업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하던 중 도일하여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공부했다. 도시샤라는 교명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만든 결사체’라는 뜻인데, 이 학교의 교훈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였다. 정대위 윤성범 김태묵 서남동 등 많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했고, 시인 윤동주나 정지용도 이 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재복의 수학 기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 공부한 한국인들과 교우했을 것이다. 1943년에는 평양 출신 공지길을 만나 혼인했다. 공지길은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가 교토에서 산파 공부를 하던 중 이재복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체류하던 이재복은 해방을 앞두고 귀국하여 영천읍내의 영천교회(지금의 영천제일교회)에서 8개월 간(1945. 2.15-10.14)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후 좌익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인민당에 입당하였고, 경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군사부장에 오르게 된다. 박헌영(1900~1956)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대구 10.1폭동 이후에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지하로 잠적했고, 이후 제주4.3 사건, 여수 14연대(반란)사건까지 주도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49년 12월 18일 새벽 3시경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 377번지에서 체포되었다. 이곳은 그의 세 번째 부인 집이었다. 당시 남로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은신처 확보를 위해 본 부인 외에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재복은 박영근(朴永根), 오일서(吳一緖), 이근민(李根民), 이일도(李一道) 등과 같은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가명이나 은폐가 이재복의 굴절된 삶의 방식을 반영한다. 여기서도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거짓, 기만, 은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가정을 파괴하거나 가족관계까지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김창룡은 그에게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겠느냐”며 끝내 전향을 거부하였고, 1949년 5월 26일 서울 인근 수색에서 총살당했다. 김창룡은 이재복이 전직 목사인 점을 감안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 남한의 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당신이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는 것이다”라고 설득하자 일주일간 버티던 그는 500여 명의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명단 제공에 의해 군 내부의 공산당원 제거로 6.25 전쟁 초기에 군부 내의 봉기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남침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삼일동안 서울에 체류한 것은 봉기를 기대한 것이었으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삼일이 남한과 유엔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호기가 된 것이다. 봉기의 불발로 격분한 김일성은 결국 박헌영을 언더우드와 접선한 미제 간첩으로 몰아 총살한 것이다. 이때가 1956년 7월 19일이었다. 이때 감리교의 현순(玄楯) 목사 딸 현 엘리스는 박헌영의 애인으로 북한 외무성에 근무했으나 박헌영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재복이 좌익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그의 내면에 기독교와 공산주의, 양자의 충돌이 없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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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1-10
  • [목회자칼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시골에 땅을 샀습니다. 한 평에 150만원을 주고 사서 조그마한 공장을 짓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너무 기대하고 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땅이 한 평에 100만원도 안 하는 땅인데 나는 150만원이나 주고 땅을 샀던 것입니다. 옆집에서 저에게 하는 말이 “아이고 도시 양반. 속아서 땅을 샀구먼?” 그때 저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작은 회사이지만 이 땅이 저희 회사에 정말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정말 저는 잘 샀다고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땅을 살 때 사용가치로 보았지, 교환가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땅에서 회사의 일이 너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와 글을 읽는 여러분은 교환가치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이 땅을 교환가치로만 볼 때는 비싼 땅이지만, 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필요한 땅, 사용하기에 너무 좋은 땅인 것이죠. 아니, 한 평에 200만원을 달라고 해도 저였다면 오케이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환가치로 나의 인생을 보면 나이가 들었을 때 ‘열심히 살았는데 집 한 채밖에, 아니 집 한 채도 없는 인생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무릎뼈가 닳고 허리가 아플 지경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의 인생은 과연 몇 점일까?’하고 허무함을 느끼며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가치로 인생을 볼 때는 ‘얼마나 멋지고 최선을 다한 인생인가? 얼마나 열심히 사용했으면 더 쓰이지 못할 만큼 사용한, 멋진 노인의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을, 교회 어르신들을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요? 저희 교회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근면성이 얼마나 사용가치 있는가?’, 지금도 창조적인 생각으로 ‘놀면 뭐하나’, ‘쉬엄쉬엄 일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일거리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해주니 고맙지’. 이와 같은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반면 저희 교회 청년들에게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내 값어치가 한 달 200만원 밖에 안되나요?’,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250만원이라니? 회사 다닐 맛이 안 나요’. 젊은이들에게는 이 부분에서 갈등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교환가치의 관점으로만 인생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는지요. 나의 갈등은 인생을 사용가치로 볼 때 나오는가요? 교환가치로 볼 때 나오는가요? 여기에는 객관적인 생각과 주관적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치관도 객관적 가치관, 주관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꼭 가치 평가를 일반적인 평가로, 일반적인 잣대로,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요? 몇 년 전에 기억에 남는 폐업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배를 드려달라고 요청을 하신 장로님, 권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목사님, 이제까지 많은 개업 예배를 드려 오셨지만 폐업 예배를 드리러 오신 적은 없으시죠? 저희가 35년간 세탁업을 했는데 이제 힘도 없고 해서 폐업을 하고자 합니다. 오셔서 예배 인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가고 말고요.”라고 답하고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바깥에 손님이 옷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잠깐 인사를 주고받으시는데, “이제 폐업하신다면서요?” “네. 그동안 저희 가게를 이용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네. 이제 저희들이 불편해서 어떡하죠?”라며 대화를 나누는 정다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이 노부부는 건강하게, 재미있게 사용가치를 잘 사용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저 기억이 제게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가치관 때문에 불행합니까? 아니면 사용가치 때문에 행복합니까? 누구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네” 하고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사용가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 아닐까요? 늦게 선교에 눈을 떴다며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선교에 열정을 쏟고 계신 집사님, 맡은 교회 식당 봉사를 그 연약한 중에도 웃으면서 감당하시는 권사님, 말없이 뒤에서 기도하면서 격려해주시는 여전도회 집사님. 너무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올 한 해는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의 자녀에게 너무 고맙고, 나의 가족에게 너무 사랑하고, 우리 교인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 지금까지 사용가치로 봐주시고 사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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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교회법 특강] 교회법(法)은 세상 법(法)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정치’ ‘교회질서’라는 말은 흔히 ‘교회법’으로도 불린다. 한국교회 초창기는 ‘규칙’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법이라는 말이 권위와 순종을 전제하기에 민주주의 시대에는 맞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교회는 법과 질서보다 은혜와 사랑이 지배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의 권위를 변호하기 위할 뿐, 세상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이런 용어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를 구시대 유물이라며 이 시대에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의 법은 역사나 문화의 요청에 따라 개념이 변천하지만, 교회의 법은 시대 변천에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해야 한다. ‘교회법’이란 무엇일까? ‘교회’와 ‘법’이라는 말의 합성어다. 많은 사람이 이 합성을 모순이라고 여겼다. 독일의 법학자이자 교회법학자인 루돌프 쇰(1841-1917)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이 어울리지 않는 합성을 비판한 이유는 교회의 본질은 영적이나, 법의 본질은 세상적이기에 법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본질과 상충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으로 부패하면서 교회 안에 법과 질서가 서서히 들어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의 법과 질서는 성경적이지 않고 교회가 부패함으로 나중에 도입된 것이며 현시대에 뒤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법’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 오해이다. ‘교회법’이라고 할 때 ‘법’은 법 이전에 ‘권리’를 가리킨다. 신자는 누구나 교회에서 법적 관계, 법적 질서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 이 ‘법’(권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義)라는 ‘특별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義)의 은혜를 받은 의인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 은혜로 회복된 의와 화평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로마서 5장 1절이 이 권리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신칭의의 은혜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 이웃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신자의 권리는 그의 범죄에 의해서도 박탈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질서를 통해 화평을 이루시는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이 점에서 세상 법과 교회법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세상의 법과 질서도 ‘의’(정의)를 말하지만 정죄와 형벌을 목표로 한다. 반면 교회의 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화평을 누리게 하는 목표를 가진다. 교회법은 법이나 규정, 시벌(施罰)을 넘어 회개와 용서, 화평이 그 목표다. 교회법의 목적은 목사가 설교하는 화평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당회는 결코 이혼을 권할 수 없다. 도리어 화평과 희생과 자기부인을 권해야 한다. 모든 교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최종 목적은 화평이다. 시벌의 목적도 회개하여 용서받고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화평할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범죄한 자를 고소(고발)할 때에 먼저 '권고'에서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다. 교회에 있는 모든 직분의 봉사 역시 바로 이 목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와 성례 시행, 나아가 장로의 다스림과 심방, 집사의 구제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있으며, 노회의 시찰(視察) 역시 회중이 누려야 할 화평의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선사받은 화평의 권리를 보장하는 목적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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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성서연구]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기까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일은 즉흥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오래 준비하시고, 가장 큰 사랑이 담은 최고의 선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한 최적의 때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때가 최적기였던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우선 세계 언어인 헬라어가 있어서 언어의 장벽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발달된 육상, 해상 교통로를 이용하여 전도자들이 빨리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이룩한 평화, 소위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인해 복음 전도자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회당을 세우고 살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방인들이 쉽게 복음을 이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적절할 때 탄생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정말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미가서 5장 2절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스가랴 9장 9절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이사야 53장 5절은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을 조금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프로젝트를 추진하시는 가운데 사람들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소위 예수님의 족보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 시작한 족보는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에 이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탄생까지 이어오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역할은 <낳고>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아서 다음 세대로 이어갔습니다. 더구나 자녀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낳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1장 12절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는데, 주전 597년에 바벨론의 2차 침략이 있었고, 그때 불과 십팔 세이던 여호야긴 왕이 폐위되어 끌려가고, 숙부인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이 12절의 <여고냐>입니다. 그는 왕위를 잃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스알디엘을 낳았습니다. 요즘도 여러 어려움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나라가 멸망하는 와중에, 포로가 된 사람이 자녀를 낳아 다음 세대로 이어갔다는 것은 정말 끈질긴 집념을 보여줍니다. 그 <낳고>가 없었다면,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는데, 스룹바벨은 바사의 고레스 왕이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 백성의 인솔자인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은 <집념어린 이어감>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싸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매우 어려운 신앙 환경을 맞고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이 점점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가 온통 혼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오늘 낳아야 할 것을 낳아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믿음의 열매를 낳아야 합니다. 우리 대에서 끊어지면 안 됩니다. <낳고, 또 낳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싸움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 시대의 몫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우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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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소강석칼럼]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
    지난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탈진을 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갑자기 박순애 전도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박순애 전도사님과 친한 윤동현 목사님에게 올해 안에 집회가 가능할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내년까지 집회 일정이 다 차 있지만 어느 한 교회를 잘 설득해서 다음으로 연기하면 12월 첫 주에 우리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일찍 11월 중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날짜가 그렇게밖에 안 된다고 하니 저도 잠시 고민을 하였습니다. 12월부터는 저의 일정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거든요. 교회와 교회 밖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교역자정책수련회와 성탄절 행사를 하고 나면 곧바로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부흥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쉽게 결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다가오는 확고한 감동과 거룩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를 한다고 했더니 제 측근에 있는 몇몇 동역자들이 “또 해요? 같은 간증일 텐데요.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면 순종해야지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을 들었지만 제가 다시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아니야, 간증이 반복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 프레임으로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하실 거야. 더 깊은 간증과 새로운 영적 언어로 말씀을 전해주실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부터 은혜 받아야 돼. 많은 신도시 교회들은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우리 교회는 시대 흐름보다 중요한 게 은혜야.” 그리고는 제가 담임목사의 권한으로 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상 하고 다니는 간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간증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분은 시대에 편승하고 조류를 타는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역행하고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적인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한순간, 한순간의 간증과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대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속 시원하게 다 전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일예배에는 담임목사로서 그런 극한적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심령부흥회를 열어서 담임목사는 하지 못하는 회개의 말씀, 헌신과 사명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개척 초창기에 심령부흥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 부흥 보다는 심령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직접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의 두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제 자신이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회를 열게 되었는데, 새로운 깊이의 간증과 말씀을 저에게만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무학으로 자라난 산골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영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영혼의 문장을 이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피곤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목이 상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분은 집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저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 보면 말씀의 초점이 흐려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집회 기간 동안에 전화 한통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발 뒤꿈치에 화상을 입었는데도 엎드려서 저도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가시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꼭 짜놓고 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 가서도 최선을 다하셨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윤동현 목사님에 의하면 셋째 날은 얼마나 기도를 쏟아 부었는지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오셔서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전도사님, 살살 하세요. 목도 아끼셔야지요.” “예, 그러겠습니다.” 해놓고 또 올라가서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적당하게 기도하고 끝내고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여 베스트 원, 넘버 원이 되는 게 아니라 온리 원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간증 앞에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니라고 손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유레카의 감탄을 할 뿐이죠. 우리가 그런 삶을 못 산 것이 부끄러울 뿐이죠. 다만 아쉬운 것은 유튜브로 방송을 못 보내서 더 많은 분이 듣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부터 도전을 받아 온리 원의 신년축복성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의 성회가 온리 원이었다면, 제가 하는 신년축복성회는 온리 원 중의 온리 원의 집회가 될 것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려서 누구도 받지 못하는 최고도의 축복, 아니, 온리 원의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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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4-12-23
  • [시사칼럼] 성탄의 광장
    한 겨울 새벽시장은 너무 추웠습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러 방학 때면 이따금 새벽에 자갈치시장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간 겨울들은 왜 그다지 추웠을까요? 발끝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고 귓불이 떨어져나간 건 아닌지 쓰윽 만져볼 때쯤이면 시장 상인들은 커다란 드럼통에 모닥불을 지폈습니다. 따로 부를 필요도 없이, 어느 샌가 하나둘씩 불앞에 모여듭니다. 사위(四圍)를 온통 다 삼켜버릴 기세의 어둠을 하나둘씩 갈라져 나오는 빛들이 살라버리고 ‘따닥따다닥’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가 어둠을 가로지르는 노랫소리처럼 들리면 동태같이 얼어붙은 몸이 녹아들면서 마음도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지피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언 손과 발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 우리 마음과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모닥불은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요? 본래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탄’이 요즘같이 많이 언급되기도 처음입니다. 언제나 돌아오기 마련인 ‘성탄(聖誕)’의 계절에 ‘탄핵(彈劾)’이라는 정치적 사건 때문에 곳곳에서 ‘탄성(歎聲)’이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탄(感歎)’하는 소리들이 있는가 하면 ‘탄식(歎息)’하는 소리들도 적잖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결의가 이루어진 12월 14일을 전후하여 전자는 주로 여의도 일대에서, 후자는 주로 광화문 일대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헌법 제1조 제1항) 모든 국민에게는 양심의 자유(헌법 제19조)와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헌법 제21조 제1항)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의도든 광화문이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고 나아가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들을 자제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 평가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상호간에 존중하고 관용하며 이해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모두가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습니까? 함께 아름답고 성숙하며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절을 전후해서 광장마다 사람들로 넘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인파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금번 성탄의 광장들은 탄핵을 둘러싸고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가득 채우리라 예상합니다. 진리가 항상 다수의 편에 서 있다는 역사의 필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연하게 일어서는 소수가 언제나 진리라는 가설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통계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드러낼 뿐 가치와 평가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전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탄전야의 대한민국을 잠간 묘사해 보겠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조사해 발표한 ‘대통령 탄핵 찬성 여부’ 여론조사 결과 찬성은 76.1%, 반대는 21.9%였습니다(중앙일보 12월 11일). 데일리안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한 조사 결과는 찬성이 73.6%, 반대가 22.2% 나왔습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결과는 찬성이 73.6%, 반대가 24%였다고 합니다(매일경제). 물론 표본조사에 불과합니다만, 이런 통계들은 대체로 70% 넘는 국민이 탄핵을 찬성하고 30% 가까운 국민이 탄핵을 반대한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런 자료들이 탄핵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정당한 판단은 신과 역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광장에서는 탄성만 울리지 않았습니다. 광장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했는데, 광장마다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도 달랐습니다. 여의도 일대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빅뱅의 ‘삐딱하게’ 같은 K-팝이 울려 퍼진 반면, 광화문 일대에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노래들이 울려 퍼졌습니다. 광장에서 들어 올린 기물도 달랐는데, 알록달록한 아이돌 응원봉이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반면 알록달록한 태극기와 성조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여의도 일대는 갑자기 광장의 주축 세력으로 등장한 20대와 30대 여성들을 포함해서 엠지(MZ)세대가 주력이라면, 광화문 일대는 최근 ‘노노(NoNo)족’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우파(右派)유튜브족’이라 부를 수도 있는 60대와 70대가 주력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여의도 광장에서는 풍자용 캐럴이 불렸다면 광화문 광장에서는 원래 캐럴이 불렸다는 차이도 있네요.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탄핵에 대한 ‘전국담임목사 대상 긴급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67.2%가 찬성이고 28.8%가 반대였습니다(국민일보 12월 12일). 하지만 60대와 7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제 교회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자, 그렇다면, 여의도로 상징되는 새로운 광장세대는 향후 교회로 찾아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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