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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배신의 정치
    요즈음 뜬금없이 여의도 발 ‘배신의 정치’가 무더운 날씨보다 더 핫하게 국민의 일상을 달군다. 너나없이 모이면 배신에 관한 이야기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 가운데서 회자하는 말이다. 당권을 가지려는 후보들이야 무슨 말을 안 하겠는가만 그래도 후보들은 상대방 공략의 수단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드는 듯한 말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배신은 인간사에 더 없는 추한 용어다. 배신의 몰락은 역사가 정의한다. 우리 정치사에서도 배신의 정치 종말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어쩌면 국민의힘 당원들은 듣고 보노라면 이맛살 찌푸리게 하는 말일 것이다. 배신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정치권의 막판 어법이다. 더더욱 한솥밥을 먹으면서 선거가 끝나면 다시 함께 한 밥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들어야 할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런 말은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생각으로 삼켜야지 입으로 내뱉으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된다. 하기야 우리 정치사에서 20세기 최고 정치지도자 ‘윈스턴 처칠’ 같은 정제된 어법을 사용하는 지도자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여의도 1번지는 난장판이다. 국민은 정책대결을 원하고 품격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성경에서 배신의 정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있다. 구약에서는 아히도벨이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의 아이콘이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정책보좌관이었다. 그의 모략은 가히 신적인 것으로 취급받는 뛰어난 모사(謀士)였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 반란의 주모자가 되어 다윗을 배신하고, 자신의 모략으로 압살롬을 세우려 하다가 실패하게 되므로 고향 성읍으로 돌아가 목매어 자살한 성경 최초의 고의적 자살의 주인공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하나로 재정책무를 맡을 정도로 신뢰를 받는 제자였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되어져가는 상황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의리를 버리고 은 30에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고 후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목매어 죽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를 판자 가룟 유다’로 기록되었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배반한 죄인이자 악마의 하수인,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린다. 배신 정치의 몰락을 역사에 거울처럼 남겼다. 대한민국의 배신 아이콘은 이완용이다. 조선왕조 말기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이완용은 친미파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소련이 국제정세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러시아어를 익혀 친소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노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우리나라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는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매국노라고 말한다. 배신(背信)이 무엇인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믿음과 의리를 저버림이다. 배신의 정치가 회자하는 여의도 1번지의 소위 선량(選良)들에게 묻고 싶었다. 국회의원 선서를 한 그 내용을 지키고 있는가?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이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파편 같은 말이지만 “사심의 정치가 배신의 정치” “차별화와 배신은 종이 한 장 차이” “배신의 정치는 성공하지 못한다.” “배신 말아야 할 대상은 국민” 등 당권 후보들의 배신의 정의를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위한 사심(私心)의 수사(修辭)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나무 한 그루를 간과하지 않고 언제나 숲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성찰을 통해 배신 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생각한다. 국민은 그런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다. 모세가 그랬다. 다윗과 사도바울이 그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본이 되었다. 혜안(慧眼)이 있어야 통관(通觀)이 되고 통감(通鑑)의 지혜를 갖게 된다. 조급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다 보면 낭패를 보기 쉽다. 어느 날 은퇴를 앞둔 후배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한 마디로 배신의 상처를 안고 치유할 수 없는 상황에 성직을 내려놓으려 하는 아픈 상담이 시작되었다. 그 목사님 손을 내 손으로 감싸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 다 아시면서도 생애 마지막 만찬석까지 가셨는데 목사는 거기까지는 가야 목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나를 바라보는 목사님의 얼굴은 지칠 대로 지친 아픔이 서려 있는 표정이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이 목사를 지치게 하는가?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나는 잘 표출하지 않았던 나의 삶 한 부분을 들려주었다. 은퇴 10년이 된 오늘도 나는 뇌신경암과 투병하면서도 한 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초교파적으로 말씀 사역을 하면서 포항중앙교회 원로 목사로 오늘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와 중앙교회 성도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여정에서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하고 슬프고 치욕적인 아픔을 당하기도 한다. 슬프고 아파서 숨이 막힐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배신이라는 단어를 내 입에 단 한 번도 올리지 않고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여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분명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사도바울이 그토록 배신을 당하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오늘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중심에는 포항중앙교회에 대한 나의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할 원로목사로서의 절체절명의 사명 때문이다. 네가 배신했다고 나도 배신하는 삶은 똑같은 배신의 몰락자가 된다. 어쩌면 화나고 속상한 아픔이 더 많을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 한 가지를 붙잡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것이 믿음의 정도(正道)를 정행(正行)하는 것이다. 새로운 결단의 각오를 하고 일어서는 목사를 내 품에 안아주면서 눈도 젖고 마음도 젖어 들었다. 아름다움은 我에 접미사 ‘답다’의 합성어다. ‘나’다울 때 아름다운 것이다. 추하다는 것은 酉(닭유-술병을 뜻함)와 鬼(귀신귀-가면을 뜻함)의 합성어 醜(추할 추)다. 술병을 들고 가면을 쓰고 헛소리하면서 비틀거린다는 뜻이다. 백합은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꽃이지만 썩으면 극심한 악취를 내는 꽃이다. 국민은 아름다운 지도자를 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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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성서연구] 무엇을 나타낼 것인가
    사회생활은 남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과정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악수하고 인사하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 과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 명함입니다. 가능한 대로 명함에 많은 것을 적어 자신을 나타냅니다. 명함이 없는 저는 종종 명함을 원하는 이를 만나면 죄송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함을 건네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단순히 말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마음도 섞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이런 마음은 옳은 것일까요? 모세는 나타낼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애굽의 궁궐에서 사십 년을 보냈으니, 자신을 소개할 만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학벌도 최고였을 것입니다. 여러 기관에서 일도 했을 것입니다. 군대 경력도 뛰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왔을 때, 그는 이런 내용을 백성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만 말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강에서 건져져서 공주의 아들이 된 신비롭기까지 한 일, 애굽 궁궐에서의 일을 말했다면 훨씬 더 백성들은 그를 신뢰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만 했습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모세와 함께하신다는 것만 나타내셨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면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애굽 궁궐에서 배운 것 때문이라는 말씀 따위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친구처럼 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즉 모세가 특별한 것은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특별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위대한 모세로 보였던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이 광채가 났는데, 그 광채를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그 광채가 하나님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나타내려 합니다. 모세가 숨긴 것을 우리는 드러내려 합니다. 가문, 학벌, 재산, 지식, 경력, 지위 등으로 우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나타내야 할 것은 그게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나타내길 원했습니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예수님의 생명을 보길 소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졌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바울도 기꺼이 죽음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에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믿음으로 살게 하는 복음의 직분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빛이 모세의 얼굴에 배어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가진 모세의 얼굴에도 광채가 났다면, 어찌 복음을 가진 성도의 얼굴에 빛이 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7~8절입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성도의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 생명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새 우리는 자기도취에 빠진 인본주의자가 되곤 합니다. 이제 우리의 추한 모습을 감추고, 주님의 광채만 나타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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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시사칼럼] 탄핵과 성경
    현재 대한민국의 최고 현안은 “탄핵”입니다. 화제성에서나 대중성에서나 필적할만한 소재가 전무합니다. 다양성이라는 요건도 충족하였습니다. 비록 자진 사퇴하여 무산되고 말았지만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향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상정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고, 야당대표를 수사하던 검사 4명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 해도 압권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움직임입니다. 지난 달 20일에 국회의 국민동의청원 누리집에 대통령탄핵청원이 올라왔고, 공개된 지 사흘 만에 5만이 넘는 동의가 이어지며 결국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뜨거운 7월을 들어서자마자 그 숫자가 100만을 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탄핵안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가치관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여기서 탄핵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 의사를 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탄핵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고,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탄핵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탄핵제도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기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편추방제도, 키케로의 탄핵 연설), 근대적 의미의 탄핵은 14세기 말 영국의 에드워드 3세(1327-1377) 시대에 발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권영성, 헌법학원론(2002), 855). 주로 고위공직자들의 비행과 부정을 통제하기 위해 법제화된 이후 영국에서는 1805년 멜빌(Melville) 사건(하원 가결, 상원 부결)에 이르기까지 70여 건에 달하는 탄핵소추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헌법 시행 이후 20건 가까이 탄핵소추가 이루어져서 유죄의 결정으로 파면 당한 공직자도 4명이나 있었고, 특히 1868년 앤드류 존슨과 1974년의 리처드 닉슨, 그리고 1998년의 빌 클린튼과 2019년과 2021년의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절차도 진행되었는데 국회에서 소추안이 가결되기 직전 사퇴한 닉슨을 제외하고 세 명에 대한 탄핵안은 하원에서는 가결되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는 전례를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5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원(오늘날 국회)의 결의로 탄핵되어 면직되는 일이 있었고,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었으며, 20016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은 최종적으로 인용되어 대통령이 현직에서 또 다시 파면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탄핵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기구 간에 힘의 균형과 권력의 견제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제도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그리고 성경에서 탄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박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 공안검사 출신으로 보수 성향이면서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안창호 재판관이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 성경을 인용하여 교회를 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그는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 행사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신뢰와 국민 안전을 제고하여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다(이사야 32장 16절-17절 참조). 따라서 정경유착 등 정치적 폐습과 이전투구의 소모적 정쟁을 조장해 온 제왕적 대통령제는 협치와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 공유형 분권제로 전환하는 권력 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라는 표현과 함께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아모스 5장 24절), 성경 말씀이다. 불법과 불의를 버리고 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라 하여 성경 구절이 두 번이나 등장하는 보충의견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의와 공의”(사 32:16-17)와 “공법과 정의”(암 5:24)라는 개념과 그 가치는 헌법에서도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중요시하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유래를 따질 것 같으면 성경에서 헌법으로 흘러갔다고 해야 하고, 또한 포섭과 적용의 범위도 더 넓다고 해야 합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비록 현행법으로 다스리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가 법으로는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탄핵이 가능하다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 또한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의와 불순종으로 일관하던 그를 향해 다윗을 비롯한 신하들은 행동을 개시하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탄핵하시고(삼상 15:23)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시지 않았습니까?(삼상 16:12) 그러므로 악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이 땅의 권세들이여, 설령 실정법의 심판을 모면한다 하더라도 절대자의 탄핵만은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돌이켜 공정한 방식과 절차에 따라 선과 정의를 이 땅 가운데 물 흐르듯 해주기를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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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은혜의말씀] 종말론적 삶 (고린도후서 6:1~2)
    인생에 중요한 세 가지는 ①지금 ②여기 ③당신이다. 금은 세 가지가 있는데 소금, 황금, 지금이다. 소금은 간을 맞추고 맛을 내고, 황금은 변하지 않으며 비싸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금 중에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바로 오늘 현실에 충실한 것이 가장 지혜롭다. 순간이 시간이 되고, 시간이 세월이 되고, 세월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인생이라는 시간여행에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기억을 쌓아가면서 오래오래, 길게 지낸 사람은 그 시간이 추억이고, 행복이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과 아픈 기억을 남기면서 오랜 시간을 버틴 사람은, 그 시간이 상처가 되고 내면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사탄 마귀는 시간차 공격을 한다. 성도가 잠시 막간이라도 방심할 때는 어김없이 빈틈을 파고 든다. 호시탐탐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광명한 천사처럼 화장을 하고 분장을 하고 치장을 하고 환장을 하고 덤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셨다. 미루고 연기하는 것이 가장 현대적인 죄악이라고 한다. 게을러 터져서 미루다 보면 결국은 거짓말하고, 변명하고 핑계를 대고 결국은 죄를 짓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에 보자는 사람 안 무섭고 다음에 잘 해준다는 사람 별 볼 일 없다고 한다. 성경의 달란트비유에서 주인에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칭찬 받은 이유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인생은 풀과 꽃같이 시들고 마르고, 아침안개와 같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때를 분별하며 살아가라. 인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당신 중에 여기이다. 바로 필드, 현장이 중요하다. 선교현장에 가면 거기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현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생생한 성령의 역사가 있다. 기도의 현장, 사역의 현장을 확보하라, 확대하라, 확신하라. 모세의 호렙산, 세례 요한의 광야가 현장이다. 탁상공론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장에 가야 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위치선정이 탁월하다.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지금 여기, 어려운 골짜기, 징글징글한 현실, 현장을 떠나지 마라. 현장이 혼란하고, 신통찮다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한다. 고약한 현장, 징글징글한 현장을 뚫고 나가면 그때 노하우가 생기고,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시험을 감당케 해주시고, 자신감이 붙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이 쌓이는 것이다. 죄인의 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는 가지도 말고, 서지도 말고, 복 있는 자리를 찾아서 기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 축복의 자리를 지킴으로 복의 길목을 지키게 된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그 땅 가운데 그 사람을 들어 쓰신다. 오늘이라 일컫는 지금 하루를 은혜의 때, 절정의 날로 삼아서 베스티스트, 모스티스트한 삶을 이 땅에 건설하고 주인 닮은 정원을 조성하고 아름다운 신망애인 공동체를 만들어라. 세 번째는 당신이 소중하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 다 복을 받아도 내가 망한다면 의미가 없다. 우선순위에서 예수님이 첫 번째(Jesus first), 다른 이웃은 두 번째(Other second), 당신은 세 번째(You third)일 때 기쁨(Joy)이 찾아온다. 이 사람 말을 듣고 이리가고, 저 사람 말을 듣고 저리가고, 다른 사람들 말 때문에 내 마음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다. 마음을 챙겨서, 마음을 다하여서 오직 주만 따라가리라.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아시고, 나의 집안을 아시고, 나의 체질을 아시고, 내게 맞춤형, 주문제작형, 기능성 복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주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당신이 딛고 서 있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바로 당신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붙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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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목회자칼럼] 효율지상주의에 물든 나의 사고 방식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다.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이 기업의 생존 전략이자 경영 철학이다. ‘효율성’이라는 단어는 기업의 경영을 밝게 하고, 미래를 준비한는 핵심 가치이다. 기업 경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효율성’을 그대로 가정으로 데려 와보자. 가정의 목적이 이윤이 될 수 있을까? 적은 비용을 투자해서 큰 수익을 남기는 것이 자녀를 양육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너도나도 가성비를 중심으로 한 효율성을 따질 때, 가정에서도 가성비가 좋은 관계, 가성비가 좋은 양육, 가성비가 좋은 부부사이가 가능할까?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면, 이 아기에게는 온통 소비하는 일만 발생한다. 경제적 소비, 정서적 소비, 심리적 소비 등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한마디로 밑지는 장사다. 그러나 아이는 온 가족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조건없는 기쁨, 무한한 사랑, 경외로운 생명을 선물한다. 이건 효율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효율을 넘어선 가족 관계, 사랑의 가치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물질만능주의가 사회 속에 자리잡으면서 어느덧 효율지상주의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다. 이 일이 경제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되냐, 되지 않느냐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버린 것이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나의 재능, 직업으로 인한 사회의 기여도 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연봉, 휴가 등을 고려하는 풍조, 가정을 섬기고 돌보아야 할 언약 공동체로 보는 것이 아닌 기능적인 부분만 하고 살아가는 현상 등이 모두 효율지상주의에 갇힌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그러나 여기, 효율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효율적인 측면으로 따지자면 평생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완전 말도 안되는 선택이다.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이익될 것이 하나도 없는 행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이게 바로 최고의 효율, 사랑이라는 것을 마치 온 몸으로 보여주듯 말이다. 성경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가 인생 최고의 효율이자 가치인 사랑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독교 사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효율지상주의에서 최고로 꼽는 검사와 의사들의 갈등이 종종 드러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검사와 의사의 민낯을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고 있는 그들을 선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효율지상주의에 찌들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내가 먼저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돈을 낭비하고 마음대로 살다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를 포함한 온 공동체가 송아지를 잡으며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 주 내용이다. 세상의 논리라면 효율성이 전혀 없지만, 성경의 논리로 힘든 사람을 품고 내가 먼저 나누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것이 바로 효율지상주의를 넘어 한걸음 나아가야 할 실천이다. 둘째, 기쁨에 이어 잔치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가진 것을 내어놓고 이웃과 함께 잔치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살아있는 사회이다. 내가 내어놓아야 할 잔치 비용이 아까워 기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는 상태. 이런 모습은 어쩌면 하나님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음을 개혁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회, 함께 나누며 기뻐하고 잔치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셋째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선한 일’을 ‘함께’하지 않는다. 주로 이익이 되는 일을 혼자 한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내는 언약 공동체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하며, 내가 먼저 낮아지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세상에 불고 있는 맹목적인 경쟁의 광풍에 저항하며 함께 선한 일을 하는 관계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품는 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되돌아보자. 우리 공동체는 과연 ‘교회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효율을 추구하는 집단인지, 아니면 진정 형제 자매가 하나가 되어 ‘사랑’이라는 가치를 살아내는 언약 공동체인지 말이다. 이 언약 공동체를 내가 먼저 세워나가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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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6.25 전쟁기 부산에서의 교회
    6.25전쟁기 부산지방의 기독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부산에서 기독교회는 1892년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혹 1893년) 설립이후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는데, 1896년에는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1904년에는 엄궁교회(현 은혜로교회)와 하단교회, 1905년에는 항서교회, 수안교회, 금성교회, 기장교회, 구포교회가 설립되고, 이어 두구동교회(1906, 소실됨), 대연교회(1907), 초읍교회(1909), 사상교회(1909), 상애원교회(감만동, 1910) 등이 설립된다. 또 수영교회(1919), 부전교회(1932), 남부민정교회(현 항남교회, 1936), 해운대교회(1937) 등이 설립된다. 이렇게 되어 1940년 당시 부산 지역의 장로교회는 23개 처였고, 다른 교파 교회로는 부산성공회(대청동, 1903), 수정동성결교회(1918. 4), 온천중앙성결교회(1918. 9) 그리고 구세군부산중앙교회(1935) 등 몇 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당시 부산지역 인구는 28만 정도였고 30-35개의 교회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여러 교회가 설립되는데, 은혜교회(현 새부산진교회, 1946), 성산교회(1947), 성경교회(현 충일교회, 1948), 거제교회(1948), 거성교회(1948), 온천교회(1948), 항도교회(1948), 복음교회(현 신평로교회, 1949), 부민교회(1949), 부산남교회(1949), 제2영도교회(1949), 제3영도교회(1949), 서문교회(1950) 등이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교회당을 접수하여 시작된 교회도 있었다. 그것이 광복교회(1945. 11)와 부산중앙교회(1945. 12)였다. 일제 통치기 부산에서 일본인 교회가 가장 많았을 때는 7개 교회가 있었는데, 해방 당시 대표적인 두 일본인 교회가 광복교회와 부산중앙교회로 개편된 것이다. 전자는 윤인구 목사에 의해, 후자는 노진현 목사에 의해서였다. 해방 후 부산에는 여러 교회가 신설되는데, 1949년에는 장로교회만 31개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중 19개 교회는 부산부에, 12개 교회는 동래부에 소재하고 있었다. 해방 이전까지 부산지방 교회는 교파적으로 볼 때 장로교 중심이었고, 해방 이전 부산에는 성공회 1개처, 구세군 2개처, 성결교회 2개 처뿐이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부산에도 장로교 아닌 타 종파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한다. 예컨대, 성결교의 경우, 동광성결교회(1945. 12)와 영도성결교회(1951. 11)가 설립된다. 감리교의 경우, 1948년 7월 부산제일교회가 설립되는데, 이 교회가 부산지방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이 교회는 1949년 4월 부산 서구 동대신동 1가 49번지의 적산 가옥을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했다. 이어서 부암감리교회(1951.1), 해운대감리교회(1951.1), 수정교회(현 성일교회), 대교교회(1951. 3), 시온중앙교회(1951. 9), 보수교회(1952. 1), 영도중앙교회, 온천교회 등이 설립된다. 1950년 말에는 부산의 장로교회는 41개 처에 지나지 않았고, 목사 10명, 전도사 23명으로 교역자는 33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른 교파의 교회는 10여 개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부산지방의 교회는 50개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1950년 말 통계라고 하지만 6.25 전쟁 발발 당시 부산의 교회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쟁 기간 중 부산의 교회수는 급증하게 된다. 기존교회로부터의 개척(설립)도 없지 않았으나 교회분규나 내분, 특히 고려신학측(현 고신총회)을 따르는 신앙노선 문제로 기존 교회로부터 분리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기 설립된 다수의 교회는 월남한 피난민들이 세운 피난민교회였다. 6.25 전쟁 전후 부산지방으로 월남 피난민들이 유입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두고 온 북한 지역의 교회를 부사에 재건하는 등 피난민 교회가 설립되는데, 약 50여개 처로 파악되는데 장로교계가 40여개 처에 달한다. 이들 장로교계 피난민 교회를 설립 년 중심으로 정리하면, 북성교회(현 대성교회, 1950. 2), 성도교회(1950. 12), 구덕교회(1951), 영락교회(1951. 1. 7), 서북교회(1951. 2), 철산교회(현 산성교회, 1951.3), 선천교회(현 산성교회, 1951.3), 우암교회(1951.3), 영도교회(1951), 평광교회(1951. 6), 수정동교회(1951. 7), 평북교회(현 산성교회, 1951. 8), 평동교회 (1951), 남성교회(1951. 10), 산정현교회(1951.10), 평양교회(1951.6.10, 평광교회와 대청교회로 분리된다), 모라교회(1951), 양정중앙교회(1951), 연산제일교회(1951), 원산제일교회(현 성덕교회, 1951. 12), 서북교회(현 동광교회, 1952.1. 6), 거양교회(1952. 1), 한양교회(1952. 3. 2. 이 교회에서 그해 6월 남부민교회가 분리되었으나 1973년 은성교회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삼성교회(1952), 영도중앙교회(1952), 부산서교회(1952. 4. 27), 감만교회(1952. 6), 신암교회(1952. 10), 양정교회(1953. 7), 영주교회(1953. 8), 명신교회(1954. 5) 등이다. 그리고 감리교회로는, 원산지역 피난민 중심의 부산제2교회(현 충무로교회), 해주 출신 교인들로 구성된 일신교회, 평양 출신 중심의 시온중앙교회, 그리고 서울아현교회 성도들 중심의 보수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되어 1953년 당시 부산에는 16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부산을 방문한 호주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조지 앤더슨(안다손, George Anderson)은 당시 부산교계인사들의 정보를 종합하여 당시 부산에는 156개 교회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상당힌 신뢰할 만 하다. 그때로부터 10년 지난 1965년 당시 부산에는 300여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1년 당시 920-950개 교회가 있었고, 현재 부산에는 1800-1850여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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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7-05
  • [성서연구] 무리를 둘러보시고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높은 긴장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면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는데, 이는 유대 지도자들이 볼 때 아무 일도 하면 안 되는 안식일에 추수라는 일을 하는 죄로 보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를 비난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를 옹호하셨습니다. 이런 긴장이 이미 흐르는 가운데,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과 이들이 다시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마침 회당에는 오른손이 마른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장애인은 비참했습니다. 장애는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되었고, 성전에서도 차별받아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 가장 바깥은 이방인의 뜰, 그 안이 유대인 여성의 뜰, 그 안이 유대인 남성의 뜰이었습니다. 더 들어가면 제단이 있는 본래의 성전 뜰이고,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건물이 있었습니다. 장애인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갈 수 있었기에, 사도행전 3장의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장애인도 여성의 뜰에 들어가는 입구인 미문 앞에서 구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가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음을 의미했고, 그는 가난했을 것이며, 회당에는 왔지만, 아무도 그를 중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시당하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지 엿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 되며, 이것도 일이라 여겼습니다. 간병하는 사람은 안식일에는 병세를 호전시키는 것도 치료라는 일을 하는 죄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정말 이상한 법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엿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의 안타까운 생각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그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실 때부터 자신의 병을 고치실 것을 기대하면서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보는 순간 가슴이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척을 지고는 유대 사회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를 고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은 잠시 갈등했을 것입니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면,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을 게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기로 결단했습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한가운데 섰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리고는 손 마른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순종하자,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손을 내밀라>고 하기 전에 <무리를 둘러보셨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를 둘러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아무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를 가로막아도, 아무리 케케묵은 안식일 규정이 나를 가로막아도, 이로 인해 내가 미움을 받고 죽더라도, 나의 사랑을 멈출 자는 아무도 없다. 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려 한다. 보느냐? 너희도 은혜가 필요하지 않느냐? 왜 보고만 있느냐? 너희도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너희도 마비된 너희 인생을 내 앞에 가져오라. 내가 너희도 고치고, 은혜를 베풀 것이다>란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당 안의 다른 무리들도 인생이 마비된 사람들이요, 그들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절실했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마비된 인생이 펴지는 복을 얻을 것입니다. 모두가 은혜의 주인공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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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소강석칼럼] “18년째 이어온 보은행사 이야기”
    지난 화요일은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TV조선 ‘뉴스 퍼레이드’ 생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태생이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저녁형 인간입니다. 그래서 젊을 때 새벽기도하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하다가도 저녁만 되면 눈이 반짝반짝 뜨이고 머리 회전이 팍팍 돌아가는 걸 느끼죠. 그런데 그날은 일찍 일어나서 분명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출발을 했는데, 차 안에서도 졸려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죠. 생방송이란 편집을 하지 않고 즉문즉답을 적절하게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현장에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스튜디오로 들어갔습니다.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막상 인터뷰에 응하려고 하니까 목이 많이 잠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후회를 하였습니다. “물도 좀 마시고, 목소리도 고르게 발성연습도 하고 들어갈 걸 잘못했구나….” 그런데 끝나고 나올 때 앵커께서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목사님, 아주 적절하게 잘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수십 건의 문자가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내용이 “목사님, 너무 잘 하셨어요. 다큐 50분짜리보다 훨씬 더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요. 목이 잠겨서 몹시 불편했고, 워딩도 100% 만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에요. 꾸밈없이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목사다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런 문자가 왔습니다. 이튿날까지 200통이 넘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TV조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플 퍼레이드 시간에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닌 목회자를 불러 인터뷰를 한 것이 방송사로서는 큰 결단을 해야 했으리라고 봅니다. 돌아오면서 전날 있었던 평개원 간사들의 모임에 대한 피드백 문자가 몇 개 떠올랐습니다. 이분들은 매일 교회에 출근을 하셔서 몸과 시간과 물질로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어찌 이분들뿐이겠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은 김종대 장로님이었습니다. 이분은 18년째 참전용사 초청행사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년 전 장로님께서는 후두암으로 성대를 잃으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전문 닥터들이 생존하는 것도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굳센 믿음과 강한 신념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 왔습니다. 후두를 제거하면 음식 삼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밥을 점심까지 씹어서 삼켰다고 합니다. 또 점심을 저녁까지 씹어서 삼키고, 저녁식사도 주무시기 전까지 씹고 또 씹어서 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살아야 합니다. 소강석 담임목사님의 사역을 돕고 6.25 참전용사 행사를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라면서 그는 성대를 잃은 후에도 이메일로 부지런히 미국과 소통을 해서 지금까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겨오셨습니다. 올해는 텍사스 주의 달라스에서 행사를 합니다. 왜 그곳으로 가게 되었냐면, 그 지역에서 우리 교회 초청을 받은 참전용사들이 너무 감동을 받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도 후원을 하였는데요. 그래서 그곳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를 하고 난 후 장로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물론 장로님은 후두를 잃어 전화로 통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께 “장로님 덕분에 인터뷰를 잘하고 왔습니다. 장로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할 때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게 사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 또 한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강종직 장로님이었습니다. 지난 주 장로회수련회를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한 게 아니라 장로님들의 말을 다 경청했습니다. 대부분 다 담임목사의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건강을 염려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좀 약간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때 강종직 장로님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요. 우리 목사님은 전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목사님께 순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처럼 강직한 발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아주 엄숙하고 숙연해진 것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 교회는 18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보은이 한 개인의 인격이라면, 보훈은 한 국가의 품격이죠. 우리 교회는 적어도 보은을 넘어 보훈의 정신을 함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니 18년 동안 이어온 보훈행사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교회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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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시사칼럼] 국격을 떨어뜨리는 사람들, 국격을 끌어올리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국격(國格)”이란 말이 회자되는데, 사실 이 말은 그 유래도 불분명하거니와 2011년에 들어서야 표준어로 지정될 정도로 본래 익숙하여 자주 쓰던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사용빈도가 증가한 듯합니다. 최근 국내의 M경제지 사설에는 “국격”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칼럼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국격 떨어뜨리는 디올백 · 기내식 특검 모두 부적절하다”(6. 6). 누가 국격을 떨어뜨린다는 말일까요? 과다한 기내식 비용을 지출한 전 대통령의 부인입니까, 아니면 선물의 정도를 상회하는 명품 가방을 받고서도 아무런 해명조차 하지 않고 있는 현 대통령의 부인입니까? “영부인의 뇌물수수 의혹을 덮어주는 대통령”입니까?(야당 대변인, 2. 23) 영부인의 단독외교를 주장하다가 혼란을 자초한 전 대통령입니까?(J일보, 6. 3) 대통령의 해외순방취소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입니까(야당 원내대표, 2. 16), 아니면 이번에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해외순방을 감행하는 행동입니까?(윤 모, 배 모 여당 의원, 2. 23) 지금부터 30여 년 전 바로 이맘 때(1993. 6. 7)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켐핀스키호텔(Kempinski Frankfurt)은 갑자기 찾아드는 한국인들로 특수를 누렸습니다. 삼성의 후계자 이건희 회장이 전 계열사의 임·역원들을 모두 소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신경영(新經營)선언’을 했는데, 그 핵심을 한 마디로 알려주는 말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꿔!” 그리고 2년 후 중국 베이징에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기업경쟁력은 이류, 행정력은 삼류, 그리고 정치력은 사류”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평하기를 이류에 불과하다던 삼성이라는 기업은 뼈를 깎는 혁신을 이루어 냈습니다. 1995년 당시 통화가 잘 안 된다는 불만이 폭주하던 휴대폰 15만 대를 시가 500억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는 퍼포먼스까지 감행하더니, 2002년 휴대폰 4,500만 대를 팔아 일약 3조원의 수익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류에 불과하다던 정치는 어떻습니까? 혁신은커녕 지금 현재는 오히려 국격을 갉아먹는 적폐(積弊)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며칠 전 이제는 범세계적인 팝그룹이 된 비티에스(방탄소년단, B. T. S.)의 일원이자 맏형인 김석진이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다는 소식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외신을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역시 복무 중인 구성원들이 휴가를 얻어 축하해주러 왔고, 팬덤(fandom)들도 다양한 플래카드와 현수막과 풍선 등을 내걸고 축하했지만 현장에 나타난 이들은 적었습니다. 앞서 소속사에서 “전역일은 다수의 장병이 함께 하는 날이니 별도의 행사가 없으며, 혼잡에 따른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팬 여러분께서는 현장 방문을 삼가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회사에서 팬들까지, 교양과 배려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비티에스는 종종 전설의 비틀즈를 소환합니다. 빌보드 음악순위에서 최근 10년 간 가장 많은 1위곡을 냈고(6곡), 둘은 발표한 솔로 곡마저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여당의 혁신위원장을 포함하여 이들의 군역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얼마나 비등했습니까? 심지어 특례 조항의 신설 취지로 병역법 개정이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당하게 군대에 입대했고, 최선을 다해 병역을 마쳤거나(특급전사)성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조교) 중입니다. 무엇이 국격을 떨어뜨리고 끌어올립니까? 전술한 사례들에서 문제되는 부분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이를 합쳐서 ‘공정(公正)’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같은 사안이라면 같은 절차나 같은 실제가 똑같은 원칙과 잣대에 의해 적용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사안이라면 남의 경우를 다룰 때나 나의 경우를 다룰 때 똑같은 원리와 과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정(公正)’입니다. 한국의 정치권은 괄목상대한 경제력이나 문화력에 견줄만한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바로 이 ‘공정’이라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래서 국격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는 겁니다. 반면 엠지(MZ)세대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이 대단한 케이팝 가수들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원입대하여 여타 젊은이들과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실천함으로써 공정의 극치를 보여주며 국격까지 한껏 높여주었습니다. 주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는 또한 지극히 기독교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 기준의 도량형이나 저울추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거듭해서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레 19:35-36; 신 25:13-15) 바울 사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로마시민권의 특례까지도 포기하고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지 않았습니까? 하늘 보좌까지 기꺼이 버리시고 사람과 똑같이 되신 주님은 어떠합니까? 우리라도 부디 국격을 떨어뜨리는 사람 되지 말고, 국격을 끌어올리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의 국격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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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위드애] 천국과 지옥
    저는 등산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제 아내와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푸르른 신록의 숲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들이키며, 시원한 바람을 맞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제 아내가 “천국이 이것보다 더 좋을까?”라고 말을 했습니다. 저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나무가 있는데, 우리는 살아서도 천국, 죽어서도 천국, 영원한 천국을 살고 있으니, 지금 이것도 천국을 누리는 것이고, 죽어서는 더 좋은 천국을 누리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천국 같았던 기쁨도 몇 시간이 지나자 육체의 상황에 따라 변했습니다. 하산길에 아내의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무릎이 아프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아내는 “지옥이 이것보다 더 괴로울까?”라고 말을 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함께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도와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동행했습니다. 나의 무릎이 아프지 않다고 아픈 아내를 뒤로 내버려 두고 빨리 내려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릎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이 제 아내이고, 제 아들과 딸의 엄마이고 우리는 가족이니까요. 하지만 가족이 아닌 무심한 등산객들은 저와 제 아내를 추월하여 앞서서 내려갔습니다. 그분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분들도 빨리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까요. 육체의 상태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이지만 천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평생을 지옥처럼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분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함께 안타까워하며 동행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니까요. 뇌출혈로 편마비 상태가 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어르신의 가족이 여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70대 노부부가 휠체어를 밀면서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부만 왔으면 너무 힘들어서 여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족은 사위와 딸이 함께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센 젊은 사위가 장인어른을 도우며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가족은 천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동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동행하는 삶이 천국을 누리는 삶이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파하며 함께 울기도 하시고, 우리의 지옥 같은 삶이 천국 같은 삶이 될 수 있도록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천국을 누리는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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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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