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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달라지지 않은 것, 달라진 것
    하박국은 남 왕국 유다 말기의 선지자입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하박국 1장 6절의 <갈대아 사람>이란 구절은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군대가 유다를 향해 다가오던 때임을 알게 해 줍니다. 당시 유다는 서산 너머로 기우는 태양과 같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 사회의 온갖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박국 1장 2-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이런 하박국의 항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악한 유다를 심판하고 징벌하기 위해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군대를 준비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박국에게 조금도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 많은 약소국을 점령하는 악을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또 다시 하나님께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1장 17절입니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런 상황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흥을 갈망하여 부르짖었습니다. 3장 2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부흥하게 하옵소서>란 기도는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여기 <부흥>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하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야 동사는 살다,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부흥하게 하소서>란 기도는 <살려 주소서>란 절규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의 절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이를 보여주는 것이 하박국 3장 18-19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은 더 이상 절규하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3장 16절의 하박국이 아닙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이랬던 하박국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하박국의 환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7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 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하박국은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하박국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됩니다. 부흥은 바깥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심령의 변화입니다. 부흥은 심령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바깥세상을 탓하지 말고, 그것을 견디고 이기지 못하는 심령의 나약함을 탓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부흥되길 원합니다. 그게 먼저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 심령이 부흥될 것이고, 그러면 바깥세상이 광야와 같아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심령의 부흥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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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서임중칼럼] 감사의 근원은 마음이다
    포항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어느 날 예배당 마당에서 앞에 가는 두 분의 집사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봉사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아이고, 목소리 좀 낮추어라 남들 듣는다.” 내용인즉 재활용센터에서 물건을 샀는데 봉사하시는 집사님이 불친절하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재활용센터를 들여다보고 그분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그렇게 불평하는 사람과 거의 몇 달 동안을 주목해 봤다. 분명한 것 한 가지가 확인되었다. 재활용센터에서 봉사하시는 그 집사님은 언제나 밝고 친절하고 감사함이 일상생활에 배어있었지만 불평했던 그분은 항상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불평이나 감사는 환경 상황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근원임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잠언 4:23절의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말씀은 지고한 생활 교훈이다. 이메일 편지 한 통 받았다. 추수감사주일에 감사헌금을 얼마 할 것인가로 인하여 두 내외가 한참 논쟁을 벌이다가 자기가 이겼다는 내용이다. 내용인즉 원로목사님이 시무하실 때 가르쳐 주신대로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하여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봉헌정신이라고 아내에게 설명하고 올해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 가정 범사가 너무도 은혜로 한해를 지나오게 되었으니 십일조 한 번 더 하는 마음으로 하자고 했더니 아내가 목사님 말씀 하시는 대로 다 할 것 같으면 천국 가기도 전에 천사된다고 좀 지나친 농담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말다툼이 되었고 나중에는 손을 잡고 회개하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가르친 奉獻의 의미를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 고마워 눈시울이 젖었다. 왜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의 조건을 감사함으로 누리지 못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첫째는 교만이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기 자신이 다 이룬 듯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는 불만이다. 불만은 만족함이 없는 마음의 표출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감사함이 없는 결과다. 셋째는 무지(無知)다.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는 것, 좋은 것을 좋은 줄 모르는 것이다. 그 삶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내용의 대표적인 사건이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열 명의 나병환자의 치유 사건이다. 이 사건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함이 없었던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지난날의 처절했던 상황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생활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전형적인 감사함이 없는 대표적인 일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서 1: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디모데전서 4:4절을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그렇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과학자들은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엔돌핀이 생겨서 T 임파구가 생성되는데, 그것이 암 덩어리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기분이 좋은 것이 무엇인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기분(氣分), 즉 온 몸의 기운이 분산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건강으로 축복으로 이어진다. 기가 막혔다는 말은 그 반대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는 예수님 믿고 인생을 바꾸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늘 불평불만으로 얼굴이 한 번도 웃음이 없었다. 사람이 미웠다. 특히 잘난 사람들이 미웠다. 그러니 늘 긴장관계의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믿은 후는 모든 것이 좋았다. 밥 먹을 때마다 “건국 이후에 가장 맛있다”고 한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잘 생겼다. 얼굴 참 좋다. 미소가 좋다. 이름이 좋다”면서 어찌하든 칭찬할 것 찾아 축복한다. 모든 것이 좋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여지고 느껴진다. 나를 힘들게 하고 모해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도 도무지 밉지 않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은 늘 바보라고 한다. 바보가 되니 불만도 모르고 불평도 모르고 그저 감사한 것뿐이다. 먹는 것마다 맛이 있고, 하는 일 마다 행복하다. 도대체 불평할 이유를 찾으려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오늘까지 남의 말 나쁘게 해본 기억도 없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내 입으로 불평하고 불만해 본 기억이 없다. 그저 행복하고 모든 것이 좋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함을 생활에서 연출한다.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실천한다.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렇기 때문에”의 감사의 삶을 노래한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살전5:18)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한다.(롬1:21, 고후8:2) 감사는 축복을 심는 씨앗이다.(신16:15)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최고의 행동이다.(고후9:1) 나는 요즈음 육신의 작은 아픔 하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마음은 더욱 평안하고 행복하다. 입만 열면 감사가 노래된다. 고희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난다. 누구 못지않은 아픔을 마음에 담고 숨을 쉴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도무지 그 어떤 상황도 불평 없이 그 누구도 미움 없이 여전히 감사함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천국이라고 찬송한다. 나의 저서 “인생은 지우개가 없습니다”에서 쓴 글이 많은 블로그와 카페에서 인용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지 못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가을이 온 듯 했는데 겨울을 느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더 따뜻한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더 따뜻한 옷(?)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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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시사칼럼] 두 후보 이야기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한 듯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정치는 때로 세계적인 이슈나 국제적인 약속을 초월할 때도 있습니다. 최근 새롭게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포기하면서까지 국내 조기 총선(중의원 선거)을 선택한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뭐니 해도 근래 최대 관심사 또한 내년 있을 대선을 앞두고 각각 선출된 여당과 야당의 두 후보에 관한 기사들일 것입니다. 한국은 양당제 국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여당’과 ‘야당’ 혹은 ‘여야(與野)’라는 단어가 보통명사처럼 쓰이며 최소한 대선 기간에서만큼은 실질적 양당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되지 않았습니까? 전례를 보아할 때,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현재 여당과 야당의 두 후보 중 한 명이 차기 대통령이 되리라 봅니다. 그러니 후보들을 앞두고 무성한 말잔치에 얘깃거리들이 풍성합니다. 공교롭게도 두 후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습니다. 첫째, 불과 십년 전만 해도 정치권에서 그 이름을 찾을 길이 없었던,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 신인이라는 면에서 닮았습니다. 대통령제의 모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케네디나 클린턴이 같은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좋든 싫든 미국사회가 체험했던 신선한 변화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둘째, 두 후보 모두 가정사(家庭事)의 문제를 지적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닮았습니다. 여당의 후보는 부모형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야당의 후보는 처가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대로 대선이 끝난다면 적어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상징하는 동양적 국가지도자의 덕목 하나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할 지도 모릅니다. 셋째, 유독 ‘설화(舌禍)’의 주인공들이라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여당의 후보는 거침없고 과격한 발언으로 원래 유명했고, 야당의 후보는 자체 경선 과정에서 말(言)과 관련해 수많은 논란거리들을 양산하고 다녔습니다. 그밖에도 두 후보는 기이하리만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지 않은 닮음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정치적 의제(agenda)를 압도하고 있는 소위 ‘대장동사건’이나 ‘고발사주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벌써부터 ‘찍을 사람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시민들로부터 터져 나오고 있고, 심지어 후보들을 비하하는 ‘놈놈놈’이란 말까지 들려오는 실정입니다(한국일보, 이태규). 그렇다고 다들 투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작년 4.15 총선 직전 당시 사실상 미래통합당 수도권 선대위원장 역할을 하던 유승민 의원은 어느 지역구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역설적으로 지금 의미심장해진 말을 남겼습니다. “최악이 아니라면 차악,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 달라.” 사실은 새로운 표현도 아닙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덜 나쁜 악이 더 큰 악보다 선호가 크고, 선호가 크다는 것은 좋은 것이므로, 덜 나쁜 악은 더 큰 악과 비교할 때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라는 명구(?)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더욱 민주시민으로서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남녀와 인종과 재산의 구별 없이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이 인정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의 눈물과 기도와 희생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두 번째로 누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타인의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이번 언제든지 여당 후보 지지자도, 야당 후보 지지자도, 제3정당의 후보 지지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교회의 강단은 결코 설교자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로 온갖 구설수와 의혹이 아니라 후보들이 제시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약속과 비전을 고려해서 투표하고, 그렇게 해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그 약속과 비전을 반드시 지키고 이루어가게 해달라고 영원한 대통령이신 주께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 주여. 제게 대한민국을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소서.” 존 녹스(John Knox, 1514-1572.11.24.)의 마음이 후보자들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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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은혜의말씀] 근심을 이기는 비결(2)-기도 (요 14:13-1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근심을 이기는 비결 두 번째 시간으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기도가 막히면 우리 영혼은 답답해집니다. 최근 들어 여러분의 영혼이 시들해지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기도의 불이 꺼져가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막혀있는 모든 영적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고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며, 시온의 대로가 펼쳐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왜 기도가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까? 1. 기도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근심의 폭풍이 몰아칠 때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문제들이 나를 너무 조여오기 때문입니다. 근심이 밀려와 불안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안하면 기도하고 불안하면 또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롬 8:28)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는 마음이 고민하여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니다. 비로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마 26:36-46) 여러분, 기도하면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도 이기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합니다.(빌 4:6-7) 어느 사이에 근심 걱정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내 가슴에 강물 같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내 짐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게 됩니다.(시 55:22) 아무리 문제에 둘러싸여 있어도 눈을 들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2. 예수님의 이름 안에 응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3,14절)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1)예수님의 이름이 왜 중요합니까? 죄 많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께로 연결해 주신 통로가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딤전 2:5) 예수님의 이름만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이 붙은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엡 3:12) 2) 그 이름 안에 응답의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받을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요 16:24) 기도해서 응답받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근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근심은 삽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근심을 해결해 주신다는데, 왜 그렇게 근심을 끌어안고 걱정합니까? 기도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능력입니다. 어떤 절망도 어떤 장벽도 기도로 돌파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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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의학칼럼] ‘조기발견 어려운 췌장암’ 예방엔 복부 CT검사 추가가 바람직
    주변에 췌장암을 진단받고 치료를 받으셨거나 혹은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체 종양 발생의 3위가 췌장암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2030년에는 미국 전체 암발생의 1위가 췌장암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통계에 따르면 췌장에 발생하는 낭종성 질환은 최근 10년 간 10배 가량 유병율의 증가를 보이고 있으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췌장의 본래 기능은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하는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중요한 외분비 기관이면서 인슐린 등의 호르몬을 분비하는 내분비 기관입니다. 따라서 단백질 및 지방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서구식 식습관이 보급되면서 본인의 췌장 분비 기능보다 많은 양의 췌장액을 만들어내고 분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췌장 외분비 세포의 손상이 발생합니다. 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췌장관에 이상세포가 발생하는 것이 췌장암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췌장암의 조기 발견이 매우 어려운데 있습니다. 실제 췌장암을 수술이 가능한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는 20% 미만이며 일단 증상이 발생하면 대부분 이미 수술이 불가능한 진행성 종양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췌장의 위치가 복부 내 아주 깊숙히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검진으로 시행하는 상하부 내시경 검사나 복부 초음파로는 췌장 전체를 살펴보는데 제한이 많습니다. 하지만 초음파 내시경을 활용하게 되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초음파 내시경은 내시경 끝에 초음파 기구가 연결된 형태로 식도 위를 지나 십이지장에 진입하게 되면 복부 초음파에서 관찰이 어려운 췌장, 담도, 담낭 등 중요한 장기들을 바로 근처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높은 해상도를 가지고 확대 등이 가능하여 선명하게 관찰함으로서 작은 췌장의 병변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진단 기구 입니다. 췌장암의 경우는 진단 당시에 수술이 가능한 환자는 전체의 약 20%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80%는 진행성 췌장암이나 전이성 췌장암 단계로 항암치료 밖에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진행성 췌장암의 경우 진단 후 6개월 이내 사망하는 경우가 많으나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내과적인 치료를 병행하여 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수명 연장을 가져오는 것을 목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기간을 살더라도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 끊임없는 통증과 폐쇄에 의한 담관염 등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면서 오랜 병원 생활을 하게 되는 것에 반하여 적절한 항암치료 및 필요 시 내시경적 역행 담췌관 조영술 등을 이용한 배액 치료를 하는 경우 다른 만성질환 처럼 주기적으로 외래에 내원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기 때문에 상당히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됩니다. 최근 항암치료 약제의 발전과 투여하는 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약물 치료만으로도 상당히 높은 치료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경계성 단계의 환자의 경우 수술 전 먼저 항암제 투여하여 미세 전이 등을 제거한 후 수술을 진행하게 되면 완치율이 상당히 향상되며 수술의 성적이 개선되는 것이 최근 10년 이내에 많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췌담도 질환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50세 이후에는 국가 검진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췌장암 검진을 위한 복부 CT가 필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한번 이상 복부 CT를 시행하여 복부 초음파에서 맹점으로 되어있는 췌장 체부 미부 및 담도계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부산 경남지역은 타지역에 비하여 민물회 섭취의 병력이 높은 빈도를 보여 간 디스토마의 유병율이 높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B형 C형 간염이 간암의 1급 발암 인자인 것처럼 간 디스토마는 WHO에서 담도암의 1급 인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민물회 생식은 피해야 하며 간 디스토마는 몸 속에 들어온 후 수 십년 간 생존하면서 담도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과거 생식한 병력이 있다면 반드시 병원에 방문하여 간디스토마 기생충약을 먹어야 합니다. 1일 복용으로 충분한 제거 효과를 볼 수 있어 담도암 예방으로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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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목회자칼럼] 까칠한 축복
    모세5경 마지막 신명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흔히 축복이라고 하면 꽃길을 걷게 되고 뭔가 달달한 어떤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신명기에 나타나는 축복은 여간 까칠한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고 고생하지 않고 대박을 얻으려는 생각이 많다. 신명기에 나타나는 축복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디테일한 조건이 붙은 축복을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는 기원, 출애굽기는 구원,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법도, 민수기는 훈련, 신명기는 축복에 대한 말씀이다. 축복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덩어리가 아니고 상당히 엄중한 조건이 따르는 약속이다. 축복 같은 저주가 있고, 저주 같은 축복이 있다. 양날의 검처럼 축복과 저주는 함께 붙어있다. 순종과 해석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첫째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지키고 불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라는 것이다. 사람이 전신이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고 간이나 콩팥, 허파, 어느 한 곳만 아파도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그래서 전인건강이 중요하다. 한국 사람의 몸에 좋지 않은 한 가지 충이 있는데 해충, 요충, 편충이 아니라 대충대충이다. 일을 할 때에 대충대충, 설렁설렁, 얼렁뚱땅 하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지 마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킬 때에 비로소 강성해질 것이다. 제품을 사면 제품 사용 설명서가 따라온다. 매뉴얼을 잘 지킬 때 제대로 작동이 되는 것이다. 보험 계약을 할 때 약관을 살펴보고 약관을 지킬 때 보험이 나오지 약관을 어기면 보험을 탈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은 적당하게 지키면서 복은 거창하게 받으려는 생각은 게으른 욕심쟁이의 생각일 뿐이다. 성경을 덮어놓고 살지 말고 펴놓고 살아야 된다. 인생 사용설명서, 성경말씀을 모두 지킬 때 복을 받는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주문을 디테일하게 받는다. 음료수, 찬 것 혹은 따뜻한 것, 고기의 굽기, 샐러드 안에 빼야 될 것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만들어 준다.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하기 때문에 귀찮아도 꼼꼼하게 주문을 받고 주문대로 음식을 내어 놓아야 한다. 둘째, 건너가야 복을 받는다. 옴짝달싹을 안하고 당최 움직이지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꿈도 꾸지 마라.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가 복을 받는다. 소극적인 것은 비극적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 건너가야 되는 것이다. 건너간다는 것은 소풍을 가거나 여행을 다니는 행위가 아니라 전쟁을 불사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을 마무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되는 것이다. 요단강에 두 발을 담글 때 비로소 강물이 멈추었다. 건너간다는 것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거인 족속인 네피림, 목이 길어서 장대 같은 아낙 자손이 그 시대의 최고의 병기인 철병거를 가지고 버티고 있었기에 상당히 어려운 전쟁을 치러야 되는 것이다. 건너간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체력의 한계, 물질의 한계, 기질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한계를 뛰어 넘어 무한도전 해야 된다. 가면 있고 안 가면 없다. 하면 되고 안하면 안 된다. 유월절은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것이다. 셋째, 건너가서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지 말고 완전히 차지하라. 승리의 깃발을 꽂기까지 끝장을 보라. 찰떡의 유래는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골병이 들어 골이 빈 상태에서 찰떡을 먹여서 골을 채운다는 말이 있다. 최후 승리의 깃발을 꽂아라. 빈 깡통이 시끄럽다. 그릇을 빌려서라도 채워야 된다. 신앙생활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은혜 충만, 진리 충만,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된다. 성령 충만 없이 사역하는 것은 비극이다. 넷째, 나의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될 축복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물려주어야 될 풍성한 축복을 받아야 된다.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였다. 후손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된다. 다섯째, 평지를 쉽게 가려고 하지마라.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할 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의 특징은 산지이기 때문에 일교차가 심하고 이슬이 생기고 풀이 자라고 양이 살아서 그 젖을 짜는 것이다. 성경에는 산 위에 마을이 있다. 높은 곳이 군사적으로 안전하고 헐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려서 산지에서 샘으로 터져 나오고 산지에는 심한 일교차 때문에 이슬방울이 맺히고 그것을 통하여 잎이 자라고 양이 그 잎사귀를 따 먹으면서 젖을 만들고 사람들은 젖을 짜는 것이다. 꿀은 대추야자에서 나오는 꿀처럼 단 열매를 말한다. 여섯째, 옛적 애굽 땅과 같지 않다. 이제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때 비로소 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코로나 이전의 수월했던 시절을 추억하지 마라. 코로나 이후는 산 너머 산이요 산 너머 똥밭이요 산 너머 지뢰밭이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야 되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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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5
    앞에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구제사역과 고아와 극빈자 자녀들을 위한 직업학교 교육을 소개했는데, 세 번째 사역은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자활교육이었다. 6.25 전쟁 기간 중 약 30만 명의 과부가 생겨났는데 이들의 자활을 위한 직업교육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MCC는 1954년 8월 우선 대구 지역에서 직업교육이 필요한 과부들에게 바느질 혹은 재봉틀을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했는데 이를 과부프로젝트(Widows project)라고 불렀다. 실제적으로 재봉틀을 이용하여 바느질을 가르쳤음으로 바느질 프로젝트(Sewing project)로 불리기도 했다. MCC는 대구 시내에 한미재봉소라는 이름의 교육장을 설치하고 주위의 추천을 받아 우선 30명의 과부를 대상으로 재봉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전쟁과부들이었지만 일부는 다른 이유로 남편을 잃고 생활을 꾸려가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이들이 교육 받는 동안에는 호구대책이 없었음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이 재봉소에 필요한 물품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MCC가 지원해 주었고, 재봉틀 교육을 통해 생산된 물품들은 이를 필요로 하는 고아원이나 영세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었다. 일정기간 교육이 끝나면 졸업생들이 자신의 재봉틀을 구입하도록 지원하여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활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다. 넷째는 지역사회 후원 프로젝트(Community Service project)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1960년 12월 시작되었는데, 농민들을 위한 농업교육 중심이었고 이를 통해 농민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기술학교가 위치한 경상북도 경산에서 시작되었는데, 학교 내에 농촌지도소를 설치하고 이를 거점으로 인근의 10여개 마을 선정하여 농촌생활을 지도했다. 종자 개량, 비료 사용법, 병충해 방지대책, 곡식재배, 축산기술 교육 등을 실시하였고, 이에 더하여 공중위생, 건강, 영양 섭취 등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또 부녀자들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요리법, 부엌개선 작업, 가족계획 등에 대해 지도하고 지역 사회 개발에 힘썼다. 이런 농촌 사회 지원 프로그램은 3가지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한국의 현실에서 도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지만 농촌사회는 낙후되었다. 둘째, 농천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도자 양성이 시급하지만 이런 지도자가 양성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농촌 사회 지도자는 희생과 봉사 정신에 기초해야 하는데 이는 기독교정신에 기초한 기관에서야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다. 셋째, 농촌사회의 발전 없이는 진정한 도시 및 국가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 그래서 MCC는 지역사회 후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초 이 프로그램을 운용했던 농촌지도소장은 경산교회 출신인 정주경 씨였는데 후일 목사가 되었다. 다섯째는 가족 및 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이었다. 이를 Family Child Assistance program이라고 불렀는데, 1962년에 시작되었다. MCC는 전쟁 직후 대구에 우유보급소(Milk box)를 설치하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공급한 바 있다. 또 구호사역의 일환으로 빈곤층 가정에 식량이나 피복을 제공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단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보다 발전된 가정 회복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이것이 가족 및 어린이 지원프로그램이었다. 아동보호 수용시절에 수용된 아이들은 해방 직후 3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6.25전쟁 당시는 24,945명으로 증가되었고, 1960년에는 62,697명에 달했다. 전쟁기보다 증가된 것은 전쟁고아들만이 아니라 극심한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MCC는 가족공동체 회복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여 깨어진 가정을 다시 세워주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가정보다 더 좋은 수용시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로 하여금 수용시설이 아닌 자신의 가정집에서 살면서 가족 간의 유대감과 연대감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용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시되었음으로 생활비 지원, 식량제공, 교육비 보조, 의료비 지원, 그리고 사업지원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때로는 주택 건축을 후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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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11-19
  • [성서연구]추수감사절을 맞으며(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목사로 살면서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목사답지 못할 때가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목사를 신뢰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다를 거야>라고 기대합니다. 강단에서 외칠 때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목사가 부족 투성이라는 것을 아실까요? 목사가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몰라서 신뢰한다면 미안한 일이고, 알면서도 사랑하신다면 성도님들이 정말 귀하지요. 제가 젊은 담임목사였을 때,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교회 마당에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꼭 알아야 해서 그런데요, .....이란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지요?>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은 아주 귀에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금방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버무렸습니다. <생각이 날 듯 한데 떠오르지 않네요. 제가 알아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조금 후에 바로 필요해서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성경 전부를 다 외우는 것도 아니니 – 외우는 분도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 변명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뻔히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실제로는 모를 때입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길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부분은 스물네 시간 기도하듯이 기도에 힘쓰라는 격려로 이해하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알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것은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부분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겠지요. 11월의 갈등을 아시나요? 11월에는 추수감사주일이 있어서 모든 목사님이 감사를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면서 설교하는 것일까요? 설교하는 것, 현재의 사역지, 둘러싸고 있는 성도들, 가정 등에 대해 감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목사인 나는 감사하지 못하지만, 성도들이라도 감사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일까요?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찌푸린 얼굴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면서 원망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정말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행복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무슨 노하우가 있습니까? 강단에서 얼굴을 벌겋게 되도록 열을 올리면서 <항상 기뻐하세요>라고 강단을 치며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11월이 다가오면 제대로 감사하지도 못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고, 진실한 기쁨을 알지도 못하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참 불편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11월의 고뇌>입니다. 이제부터 진지한 고민을 해 봅시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진정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강요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력한다고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지만, 서로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감정은 우러나야 합니다. 기쁨도 감사도 우러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말씀했는데, 그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성령님께서 마음을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면 우리는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성령님 안에서 감사하는 11월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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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소강석 칼럼]“한국교회여,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주세요.”
    최근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넷플릭스 TV 부문 시청률 1위에 오를 정도로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실업자, 신용불량자, 소매치기, 조직폭력배,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여성 출소자, 시한부 환자 등 돈에 쫓겨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는 절박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총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1번부터 456번까지 참가자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등 총 6개의 게임을 통과해야 합니다. 최후의 승자만이 456억 원을 받게 되고,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은 총에 맞아 죽습니다. 영화는 너무나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엽기적인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영화는 자본이라고 하는 맘몬의 신에 영혼마저 빼앗겨 버린 채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여주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드라마를 본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너무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설정하여 보기 불편하더라는 것입니다. 데스 게임에 참가한 244번 참가자는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다가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을 밀어 죽인 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합니다. 240번 참가자 지영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면서,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인 아버지를 자신이 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아버지가 목사였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혐오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지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탐심, 생존 본능을 들추어내고자하는 의도라면, 왜 굳이 기독교인만을 특정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국내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들의 눈에 기독교의 모습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었을 지를 생각하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 현대사회는 극한의 생존 서바이벌 게임에 함몰되어 영혼마저 빼앗긴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비극의 데스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 중에 과반수만 반대를 해도 언제든지 게임을 멈추고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가자들은 거액의 상금에 눈이 멀어 끝까지 멈추지 못하고 죽음의 질주를 합니다. 그 죽음의 질주 끝에 최후 승자는 고향 후배 상호를 제친 성기훈이었습니다. 그는 456억의 우승 상금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를 만납니다. 그 설계자 역시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징어 게임을 만든 이유는 오로지 심심해서, 재미로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기훈에게 인간을 신뢰하느냐고 물으며 또 다른 노숙자 게임을 제안하더니 갑자기 병상에서 죽고 맙니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표출 시키고 말았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오징어 게임에 나타나는 탐심과 증오, 분노의 표출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 세계의 유일한 희망의 출구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잃어버린 채,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한국교회에 그래도 다시 한 번 구조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평론적 해석도 해 보았습니다. 이 오징어 게임을 본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제발,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달라고, 부디 데스 게임에 몸을 맡긴 채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손을 잡아 구원해 달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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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시사칼럼]꽃길
    “가을이 깊어지면 산등선을 따라 억새가 은빛 물결을 이루며 일렁거린다. 밤에는 선명하게 빛나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땅에서 반짝이는 별인 억새가 만발하는 요즘이다.” 어떤 기자분이 쓴 글 중 일부입니다. “낮에는 땅에서 반짝이는 별”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그 곳에는 낮에도 ‘억새의 은하수’가 펼쳐져 있겠습니다, 요즘 황매산을 가을에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하던데 이런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경남 산청과 합천을 잇는 해발 1,113미터의 이 산 정상에 서면 합천호,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이 다 보인다 해서 영남의 금강산이라고도 부른다는 이 산은 본래 봄철에 철쭉으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하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길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그 동안 적실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일상이 회복되었을 내년에는 억새든 철쭉이든 꼭 그 길 한 번 밟아보리라, 다짐해 보았습니다. 사실 가을의 상징으로는 단풍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늦가을 무렵 우리는 결단코 낙엽을 무시하고 지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낙엽 밟는 소리,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버석버석? 사각사각? 그렇게 마음 하나 가득 낙엽이 쌓이다보니 문득 호기심이 하나 생겼습니다. ‘봄철 아름답게 피어서 찬란하게 만발한 꽃길을 걷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가을철 처연한 아름다움을 뿜으며 떨어지는 낙엽을 부러 밟으며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그리고 낙엽을 보면서, 활짝 피었을 때 자기 모습과 언젠가는 분분히 떠나고 말 인생의 진면목을 투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꽃길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프랑스 시인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의 말처럼 “발로 밟으면 영혼처럼 우는” 낙엽 길을 걷고 있습니까?(Les feuilles mortes) 아니, 그 동안 당신은 꽃길만 사뿐히 밟으며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이리 저리 떨어진 낙엽 가득한 여정을 주로 걸어오셨습니까? 예수전도단 설립자로 지금도 생존해 있는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삶에서 뒤를 돌아보면 항상 꽃길인데, 앞을 보면 항상 낭떠러지였습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표현이 아닌가요? “꽃길만 걷게 해 줄래”라는 노랫말이 유명해진 까닭은, 누구나 그런 인생을 사모하지만 실상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이어지는 그 길은 결국 낭떠러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오늘부터는 우리,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기를 바랍니다. 막상 낭떠러지 같아 보이는 그 길이, 돌아보면 결국은 꽃길이었다는 고백을 로렌 커닝햄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가 운이 좋고 남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주의 도우심을 받고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신자였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테니, 우리도 그와 같다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찬송가 191장 3절입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찬송가 430장 역시 3절입니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어떤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동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당신이 나아갈 길은 항상, 꽃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그런 길에는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더해지겠지요. 내년 봄이면 눈이 시리도록 피어날 철쭉을 보러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내년 가을이면 들판 가득 찬란히 빛나는 억새별을 보러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오다가다 살짝 신청해 주세요, 설렌 가슴에 담아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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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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