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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 칼럼]절망할 이유가 없다
    한국에 세계적인 <영혼의 맑은소리를 내는 시인> 송명희 씨가 있다면, 일본에는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씨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그는 홍역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1937년에 출생하여 목사님으로부터 성경책을 선물 받고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18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라는 명저를 세상에 남겼으며, 47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그 분의 시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은 <삶>이라는 시다.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의 장풀꽃은 닭의 장풀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나는 이 시를 읊조릴 때마다 눈시울을 적신다. 가슴이 젖어든다. 겐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로운 섭리를 짧은 시 한 편으로 리얼하게 표현했다. 비교원리가 아니라 창조원리를 그림 그리듯 한 편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망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송명희 시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원망이나 불평이 아닌 감사가 일상의 찬송이 되는 것이다. 믿음 있는 자는 결코 절망할 이유가 없다. 나도 숨을 쉴 수 없도록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처절한 아픔과 외로움, 모해와 거짓과 수모의 비통스러운 터널을 통과할 때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고, 겐조의 <삶>의 시 한 편이 나의 삶이 되었으며, 송명희의 <공평하신 하나님>이 내 삶의 노래가 되었다. 어떤 상황에 이를지라도 주 안에서는 절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 가정의 아픔의 한 부분이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으로 아브라함은 뼈를 깎는 아픔을 삭이며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냄으로 봉합한다. 이 사건을 바울은 은혜와 율법의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내쫓긴 자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아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뜨거운 사막, 햇볕만 내려 쬐는 광야, 마실 물도 없고 나무 그늘도 없는 곳! 살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없는 광야에서 하갈은 어린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죽 부대에 담은 물 한 통만을 들고 헤매었다. 결국 물도 다 떨어지고 이제는 살 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하갈은 어린 아들을 떨기나무 작은 그늘 아래 앉혀 놓고 떨어져 나와 통곡을 한다. 그것은 쫓겨난 자의 울음소리요 광야에 퍼지는 궁핍한 자의 울음소리며 무력하고 소망 없는 자의 울음소리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생광야 어디서든 들리는 울음소리다. 왜 쫓겨났는지, 왜 광야에서 기갈하고 기근에 울어야 하는지, 왜 광야 길에서 절망해야 하는지의 신학적 조명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울음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울음소리는 하갈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오늘의 인생 광야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창21:7)” 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막 같은 인생 여정에서 절망과 고통의 울음을 터뜨릴 때 그 울음소리에 세상의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며 그 고통의 소리에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갈의 사건을 통하여 정리해 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 곁에는 해답도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심으로 샘물을 보고 그 물을 마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샘물을 마시고 영적 은혜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사건이 복음을 교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갈의 광야길은 그리스도를 떠난 자의 삶의 여정이다. 광야에서의 하갈의 울음소리는 그리스도 없는 삶의 절망이다. 그런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소리도 항상 듣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울음소리에 응답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절망할 이유가 없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백부장도 하인의 죽을 병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고, 귀신들린 딸을 치료하기 위해 주님을 찾았던 가나안 여인도 절망하지 않았다. 사노라면 걷잡을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억울하고 속상하여 잠도 오지 않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릴 경우도 있다. 교회생활도 싫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홀로 있고 싶을 때도 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 이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며 그 이름 앞에 우리의 마지막 생명을 의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 은혜 받은 성도의 삶이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는 절망할 수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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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5
  • [시사칼럼]신학과 동행하는 추격자 과학
    현생인류와 바이러스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3월, 신앙의 거장 한 분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국 물리학자요 성직자였던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2021)입니다. 처음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리물리학을 가르쳤으나 50대 초반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나중에 다시 학계로 돌아와 케임브리지의 퀸즈칼리지 학장을 역임하며 과학 최고의 권위인 왕립학회 회원 자격을 얻은 동시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분의 최근 작품들 즉『양자물리학과 기독교신학』(2009),『과학으로 신학하기』(2015), 그리고『성서와 만나다』(2015)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발달한 문명에서는 더 이상 기독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거나 과학의 영역에서 신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항간의 속설들이 어렴풋이 내면의 자아에 끼치던 영향력을 붕괴시키는 충격파가 그 책들로부터 뿜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을 ‘이유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고, 과학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실재를 이해하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과학자인 동시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구론’을 주창한 맬더스(Thomas Malthus, 1766-1834) 역시 영국왕립학회 회원이었으나 본직은 목사였고,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파에 속한 성직자로 훗날 수도원장이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활동하던 당시 과학은 오늘날 관점으로 볼 때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이십 세기 접어들면서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DNA 구조를 발견하는 등 과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신학은 점차 뒤안길로 밀려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와중에 과학 분과에서도 최첨단에 서 있었던 폴킹혼의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 생애와 업적이 대대적으로 기념되었겠지만, 과학과 미생물의 치열한 전투 한 복판에서 마지막 순간조차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그 덕분에 영국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먼저 개발되는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요? 한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학자-신학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1953)입니다. 옥스퍼드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교제하던 중 회심하여 같은 대학에서 신학박사가 되었고, 현재는 런던대학교 킹즈칼리지 학장으로서 종교와 과학 그리고 교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원래 논문의 주제였던 ‘칭의(稱義, justification)’ 이론으로부터『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와 같은 교회사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고 있지만 그의 성취는 이 한 마디, 바로 ‘과학적 신학(A Scientific Theology)’에 응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저 또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은 과학이다!’ ‘성육신과 십자가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교리다!’ 그런데 맥그래스는 ‘신학적 과학(A Theological Science)’의 가능성을 살짝 열어두면서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기독교는 과학적 서사를 풍요롭게 한다.”(『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296) 우연과 해체의 개념이 판을 치던 현대과학계에서 거장 중의 거장 아인쉬타인은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사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파했던 하이젠베르크도 성경을 좋아하고 삶의 신앙을 강조했다고 하고, 무신론자로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을 압도했다는 평가의 주인공 비트겐쉬타인 역시 의외로 신앙을 견지했다지 않습니까? 철학이든 과학이든 인간과 우주를 초월하는 ‘실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바로 그곳에 신앙이 자리하고 신학이 존재하는 영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바이러스의 역습 사건도 마찬가지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제나 자연이 먼저 도전장을 던져왔고, 인류는 가진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고투를 벌이고 해결책을 만들어내었고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아무리 거센 도전이라도 결코 멸망하지 않고 버티고 견뎌서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믿음이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런 추격들이 가능했겠습니까? 이번에도 그런 아름다운 동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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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5
  • [은혜의말씀]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수 23 : 1-6)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두 장은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출발한 여호수아는 모세의 죽음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부름받아 지금까지 충성스럽게 순종하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모든 사람이 가야하는 길에 서 있습니다. 유언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죽음에 이르러 부탁하여 남기는 말” 유언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말이기에 가장 진솔하고 신중하며 가장 중요한 말일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의 죽음에 앞서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남긴 유언 – 최후의 권면이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는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교훈을 받으려 합니다. 1. 기도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출 33:11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말씀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여호수아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여리고 정복을 목전에 두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신을 벗고 엎드립니다. 아이성 정복 실패 때는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여러분, 기도는 믿음의 시작이며 믿음의 끝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간절히 오랫동안 기도한다는 것과 비례합니다. 어떤 분은 “기도의 시간보다, 내용이나 질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말씀하십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도는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나오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고,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끝까지 기도해야 승리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기도가 있어야 우리의 마지막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삼상 12:23) 오늘 이 자리에 혹시 기도를 쉬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다시 기도를 회복하시기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한 영혼을 낳는 것은 해산하는 수고 없이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 출발은 기도로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2. 말씀의 고백을 남기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은 오래전 모세의 죽음 후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르신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어느덧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말씀을 다음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으로 물려줄 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자기가 받았던 말씀을 다시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이 순간, 얼마나 감격스럽고 아름답습니까? 여호수아는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무진 애를 썼고 그 말씀이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 왔다는 강한 확신과 믿음으로, 다음세대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의 간증을 남기는영적 부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수아처럼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이 아빠가 이 엄마가 살았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인생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많은 재산보다도 믿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부모의 삶입니다. 마지막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 마지막 명령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삼고 그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사명이요, 마지막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준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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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5
  • [목회자칼럼]쓰임받는 사람의 특징
    최근에 훌륭한 목사님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느낀점이 있었다. 한 시대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의 특징은 절대 안정감, 차분한 평정심, 온유와 겸손함, 놀라운 균형감각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코로나 블루 한 복판에 서 있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평온할까? 요즘 새벽마다 묵상하는 사무엘상에 나타나는 사울왕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사울왕은 최고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큰 두려움에 휩싸여서 심히 떨었다. 그래서 그런지 계속해서 오판과 실수를 하고 불신앙적인 추태를 부리다가 결국 그의 왕조, 세 아들과 함께 길보아 전투에서 죽었다. 주께서는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평안을 먼저 주신다. 흔히 인사할 때에 “안녕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라고 묻는다.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인사한다. 여기서 샬롬은 그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거룩”, 아모스 선지자가 주장하는 “공의”, 호세아 선지자가 강조하는 “사랑”,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 사도바울이 외치는 “자유”가 합쳐진 상태가 평강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 평강이다. 시편은 평안함 가운데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평안은 오랜 신앙생활의 말씀, 기도, 찬양, 섬김을 통하여 형성된 성령의 열매이다. 수많은 연단을 통해서 믿음의 근육이 생기고 영적 전투에서 항체가 형성된 모습이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촐싹거린다. 도무지 안정감이 없고 흔들린다.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버린다. 에서는 장자권을 경박하게도 너무나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고 그 결과로 나중에는 울고불고 해도 복을 받을 수 없었다.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다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망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은 일상이 요동친다. 일상의 평온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불안하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뿌리가 깊이 수맥에 닿아있기에 이파리가 마르지 않고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결국은 형통하게 된다. 요셉의 가지는 샘곁에 심기운 가지가 견강해서 한계를 뛰어 넘고, 담을 넘어서 뻗어 나갔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 세상 인심은 변하고 인기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끝이 없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치 않는 그 사랑을 받고나면 행복해진다. 그 놀라운 사랑을 맛 본자는 삶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 모든 것은 유통기한이 있다. 성령님은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저 천국에 이르도록 견인하신다. 성령님은 내 편이시요, 최고의 상담가요, 보혜사, 변호사, 대언자, 중보자가 되셔서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도 나를 위해 탄식하시고 친히 간구하신다. 욕심을 버리고, 사심을 버리고, 이기심을 내려놓고 공익과 공평을 따르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것은 주께서 교통정리를 해 주신다. 위로는 주만 바라보고(오직예수), 옆으로는 양떼만 바라보라(목양일념). 주께서 책임져 주신다. 가시밭의 독초가 아니라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사람 냄새가 아니라 예수 향기를 퍼뜨리자. 시골에 가 보면 어린 시절 소가 먹기에 좋은 풀들이 많이 자랐지만 생태계가 파괴된 지금은 물가에 독초들이 무성하다. 오늘날 삶의 환경이 파괴되고 오염, 감염, 전염이 된 시기에는 더욱 건강한 모습이 그립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평소의 관계가 통친합락, 착충지부, 말기찬섬 할때에 영적인 샬롬이 생긴다. 통친합락은 신통하고, 친밀하고, 마음에 합한 자가 되고, 즐거워하는 자를 말한다. 착충지부는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를 말한다. 말기찬섬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을 말한다. 예수님은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고서 밤중에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그 전날도 온 동네를 두루두루 다니시며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신 이후에 완전 피곤하실 텐데도 새벽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가셔서 기도로 또 하루를 시작하셨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 하셨다. 기도가 하나님께 접속하는 것이요, 밧데리 충전하는 시간이요, 최고의 릴렉스 타임이다. 그래서 성도는 바쁠수록 기도하고, 힘들수록 찬송하고, 어려울수록 감사해야 된다. 출애굽 길에서 홍해를 가르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셨다. 성도는 분요한 세상보다 하나님과 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져야 되고 시끄러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의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된다. 그래서 고요함, 차분함, 안정감, 균형감을 갖출 때 쓰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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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5
  • [의학 칼럼] 간암 바로 알기
    간은 복부에서 오른쪽 위쪽에 있는 인체 내의 가장 큰 장기이다. 우리 몸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을 합성하여 생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간에 생기는 종양은 암성 여부에 따라 양성 및 악성 종양으로 나눌 수 있다. 간암이란 주로 악성종양을 말하는데, 간세포가 여러 가지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자신의 고유 기능을 상실하고 암세포로 변신하여 꾸준히 증식하고 주변 또는 먼 곳으로 퍼져 나가는 특징을 갖게 되는 종양을 말한다. 바이러스에 의한 간염은 우리나라 간암 발생의 가장 주요한 위험인자이다. 우리나라는 B형간염 바이러스 감염의 유병율이 전인구의 약 3-4%로 높은 편이며, 이로 인해 간암 환자의 약 70-80%가 B형간염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것이다. 음주도 간암 발생의 주요한 위험인자인데, 오랜 기간 동안 습관적으로 많은 양을 섭취할 경우 간기능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간암을 발생시킬 수 있다. 흡연은 간암 발생을 2배 정도 증가시킬 수 있는데, 흡연과 음주를 같이 하는 경우 간암의 발생률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간암은 남성에서, 나이가 증가될수록 발생률이 높아진다. 간암이 많이 진행된 경우에도 환자가 느끼는 증상이 거의 없거나 미미하여 흔히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조기진단 및 적극적 치료를 위해서는 B형간염, C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와 간경변증과 같은 간암 고위험군에서 6개월 마다 주기적인 초음파검사와 혈청 알파태아단백검사를 통해 감시검사를 해야 한다. 간암의 예후는 다른 암들과 비교하여 상당히 불량한 편이다. 하지만 진단 및 치료법이 발달하면서 1995년에는 약 10%에 불과하였던 5년 생존율이 2014년에는 약 30%까지 향상된 것으로 보고하였다. 생존율이 낮은 이유는 조기 발견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저 간질환으로 인한 간 기능 저하 여부도 관여한다. 따라서 간암 환자를 치료하기위해서는 간암의 병기와 함께 기저 간기능을 고려하여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단독 혹은 병합하여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암의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절제술은 암이 발생한 부위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간 기능이 좋고 조기 간암이면 간 절제술을, 간 기능이 나쁘지만 간암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는 간 이식이 추천된다. 그러나 실제로 간암을 진단받은 환자에서 절제술 또는 이식 가능한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비수술적 치료를 받게 된다. 대표적인 비수술적 치료는 경동맥 화학색전술, 고주파 열치료, 경피적 에탄올 주입술, 방사선 치료 및 항암약물 요법 등이 있다. 최근 표적항암제 뿐만 아니라 면역항암제가 소개되면서 많이 진행된 간세포암 환자의 치료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간암 환자에게 영양은 중요한데, 환자의 체력이 유지되면 치료 효과도 좋아지며 치료에 동반되는 일부 부작용을 쉽게 극복할 수 있고 감염에 대한 면역력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특정 음식을 집중적으로 섭취하기보다는 환자의 소화 능력을 고려하여 탄수화물, 단백질 등 영양분을 고르게 섭취하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충분히 먹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운동도 중요한데, 운동은 근육량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며 궁극적으로 환자의 예후를 향상시킬 수 있다. 간암은 조기에 발견하여 적극적인 치료를 하는 것이 예후에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간질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건강 검진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적절한 음주와 금연을 통해 간암 위험을 낮추는 것이 간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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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5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5, 권세열
    권세열 목사는 부산에서 약 2년간 구호활동을 전개하며 대구 혹은 서울 등지를 순회했는데,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일하면서 빈번하게 대구를 방문했다. 그러다가 신학교 교장 감부열 선교사가 안식년을 떠나게 되자 권세열 목사가 교장 서리로 임명되어 대구가 그의 거점이 되었다. 1952년 9월 대구로 이동한 그는 1952년 9월 30일자로 “한국을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쓴 보고에서 이렇게 썼다. “지난 2년간 여러분들이 보내주셔서 받은 의류품과 식품들은 우리의 한국 친구들에게 가장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우리는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우리의 한국인 친구들도 충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호를 요청하고 싶지 않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고, 겨울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울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적어 보내 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신학교 사정을 말한 다음 대구와 인근의 20여개 처의 고아원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고, 선교부가 지원하는 모자원과 과부들을 위한 시설에서도 형편은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계속적인 후원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금년은 전에 없던 혹한의 추위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루 셀 수없는 많은 가정이 작은 오두막이나 판자집, 천막, 임시 은신처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기아와 궁핍, 기다림으로 지처 있다고 호소했다. 구호품을 접수할 수 있는 주소지로 샌프란시스코의 장로교 선교부(APO 234, San Francisco)와 대구시 남산동 1번지의 장로교선교부를 소개하고 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1953년 5월 22일자 편지에서는 많은 구호품을 보내준 것을 감사하면서, 약 5천개의 구포품 소포를 받아, 고아원과 모자원, 피난민 수용소, 양노원, 약한 교회, 학생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금전적인 지원금으로는 새로운 구호사업을 시작했고, 미국으로부터 보내오는 엄청난 사랑에 감사하다고 했다. 권세열 선교사의 중요한 사역은 성경구락부 운동, 곧 가난한 아동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운동이었다. 그 결과 1백만 여 명의 저소득의 청소년들을 교육했고, 54개의 성경구락부를 정규중고등학교로 발전시켰고, 100여개 처 교회를 설립하였고, 신학교 교수로 사역하면서 그이 영향으로 200여명의 목사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전쟁 기간 중 한국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피난민들을 위한 구호사역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을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휴전이 되고 한 달 후인 1953년 8월에 쓴 선교보고에서 이렇게 썼다. “실로 한국의 현실은 비참함과 파괴, 유린된 전쟁터, 그리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하여 어두운 면이 없지 않으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신앙운동인 기독교의 믿음, 소망, 사랑의 밝은 면이 있다” (Yes, There is a dark side to the picture of Korea with its misery and destruction, its devastated battlefields and the threat of communism: but there is also the bright side of Christian faith, and hope, and love in what is one of the most remarkable Christian movements in history). 이상과 같은 헌신적인 봉사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권세열 선교사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문화훈장을 수여한 바 있다. “미합중국 프랜시드 킨슬러. 위는 1928년 이래 대한예수교장로회 파견 선교사로 봉직하는 동안 종교활동을 통하여 우리나라 국민의 심령개발과 교육 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음은 물론 6.25 동란으로 인한 전재민과 고아의 구호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고아원과 모자원을 설립하여 이들의 보호 육성에 눈부신 활동을 하는 등 우리나라 육영사업 및 사회복지 향상에 참여한 공적이 현저함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에 의하여 이에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함. 대통령 박정희. 1965년 2월 19일, 국무총리 정일권.” 한국에서 43년간 일하고 1970년 9월 14일 정년으로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고, 1992년 1월 9일 8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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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6-11
  • [성서연구]세월이 지난 후에(창세기 4장 1-7절)
    시인 박목월 장로님은 <개안, 開眼>이란 시의 서두에서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더 일찍 개안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시인의 60년은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육십 년 동안에 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도 눈이 열리지 않거나, 오히려 눈이 어두워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시인의 육십 년은 개안의 시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인은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에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했습니다. 가인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이 파생된 히브리어 <카나>는 얻다, 세우다 등의 뜻으로서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랬던 그가 나중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살인자가 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있었습니다. 3절 서두에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되어 있는데, 살인자 가인은 세월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은 시간, 즉 세월의 작품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어떤 존재로 만들어지고 있을까요? 그러나 세월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사람이 세월을 만든다는 말로 바꿀 필요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 세월을 살아가는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월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조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나무 덩어리, 혹은 돌 덩어리 하나씩 주어져 있고, 세월 속에서 그것으로 멋진 조각 작품을 만들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루 하루가 지나면서 나무와 돌 덩어리는 조금씩 모양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조각가는 끊임없이 매달려 다듬고 깎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조각 작품은 완성됩니다. 그런데 조각가는 그 시간에 사실은 자기 인생을 조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든 조각 작품에 따라 인생도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든 조각 작품이 예술성이 풍부한 멋진 작품이라면 그는 성공한 조각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을 조각하는 중입니다. 세월은 무수한 하루와 하루들의 합입니다. 세월 전체를 훌륭하게 살려면 하루를 훌륭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그와 그의 제물이 거절된 것은 결국 그가 살아온 세월이 거절된 것이며, 그가 무수하게 지나온 하루와 하루들의 삶이 거절된 것입니다. 반대로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이 살아온 무수한 하루와 하루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절에서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매일 매일 죄를 다스리고 선을 행했어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행할 선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 살면, 그래서 그 날들이 쌓여 세월이 지났을 때, 그는 선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실패는 하루에 대한 실패였다고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단한 꿈을 꾸는 것보다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위대한 헌신자가 되려는 마음보다 오늘 하루 주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대한 섬김보다 오늘 작은 섬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 한 방울, 눈 한 송이가 쌓여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주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 3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무리를 가르치고 먹이시고, 산에서 기도하신 후 밤 사경에 제자들에게 오시고, 그 후엔 게네사렛에서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을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과 깨달음과 생각이 어린아이 같았지만, 나중엔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는데, 우리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성숙해가길 원합니다. 오늘은 결코 작은 날이 아니며, 한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 멋진 조각을 해 나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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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목회자칼럼]내 인생의 역주행을 위해!
    크레용팝의 ‘빠빠빠’, EXID의 ‘위아래’, 브레이브 걸스의 ‘롤린’, 비의 ‘깡’ 그리고 가장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sg 워너비까지, 앞에서 열거된 가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역주행’입니다. 음원을 발표한지 꽤 지났지만 우연한 계기로 사람들에게 재조명 받으며 다시 인기를 모으는 가수들 혹은 그런 현상을 가리켜 역주행이라고 말합니다. 브레이브 걸스 같은 경우는 2017년에 데뷔했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다 4년이 지난 2021년 유튜브에서 화제를 일으키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며 역주행에 성공한 아이돌 그룹으로 꼽힙니다. 역주행이 유행처럼 번진다고 해서, 모든 무명의 가수들이 버티고 견뎌 하루 아침에 갑자기 짠하고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주행에도 일정한 비결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브레이브 걸스의 인터뷰는 이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 때마다 희망을 꿈꿨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모두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역주행의 두 번째 비결은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도 실력을 키우는 일에 매진했다는 사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깡’이란 노래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가수 비는 스케줄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매일 노래 연습과 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날 잘 준비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비의 이런 성실과 노력이 역주행 신화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가수들처럼 우리 인생도 역주행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순히 운이 뒤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 결실의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기다림도 필요하지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꽉 잡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역주행하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먼저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역주행은 시간이 지난다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고, 화려한 결과를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역주행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한걸음씩 해나가야 합니다. 즉,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매일의 실력을 조금씩 쌓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꿈을 꾸고 앞을 향해 달려가지만 너무 멀게 느껴질 때,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함께 시작한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앞서 달려갈 때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포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꼭 오늘 당장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끝까지 가보는 자세, 그 마음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는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삶의 자세와 태도는 작은 요소이지만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당장 감사할 일이 없더라도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을 은혜와 감사로 여기는 삶이 인생 역주행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비결입니다. 역주행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오늘, 지금, 나의 성실한 태도와 자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나요? 나의 모습을 돌이키면서 역주행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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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시사칼럼]네카라쿠배
    혁명적 변화라 할 만한 시대 속에서, 스스로 적응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면 다음과 같은 신조어들이 요긴합니다. ‘네카라쿠배’, ‘미라클 모닝’, ‘벤자민 버튼 증후군’, ‘코리안 멜랑콜리’ 이들 중 몇 개를 알고 계십니까? 먼저 ‘네카라쿠배’부터 보겠습니다. 이는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 민족>, 이렇게 네 기업의 앞 글자를 조합한 말입니다. 현재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회사들로서, 초임도 5천에서 6천 수준으로 높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내 복지라든지 워라밸 측면에서 압도적인 만족감을 준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미 최첨단회사들을 가리키는 ‘마가(MAGA)’(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아마존) 혹은 ‘팡(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 같은 단어가 유행한지 오래입니다. 한국의 네카라쿠배 또한 진화하고 있습니다. 당근마켓과 토스를 합쳐서 네카라쿠배-당토, 직방을 추가해 네카라쿠배-당토직, 야놀자를 포함한 네카라쿠배-당토직야, 이런 식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미래가 결국 이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운 관심과 흐름을 분별해야 합니다. ‘미라클 모닝’이란 글자대로 ‘기적의 아침’입다. 뜻밖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소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장로로서 새벽기도하던 습관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차이도 존재합니다. 새로운 세기에 한 때 반짝하고 유행했던 소위 ‘아침형 인간’의 목표는 인생의 성공에 있었습니다. 먼저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대로였습니다. 반면에 2016년 미국의 할 엘로드(Hal Elrod)가 쓴 동명의 자기계발서에서 비롯된 ‘미라클 모닝’은 조금 더 포괄적인 목적을 가집니다. 현재 이 단어를 검색하면 수십 만 건의 게시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매일 습관적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 독서, 명상, 운동, 외국어 공부, 요리, 투자 같은 활동을 하고 사진으로 인증하는 개인 계정들이 넘쳐납니다. 단순한 성공을 초월해서 이들은 자기만족, 보다 효율적인 삶, 그리고 생활의 만족감과 행복의 증진을 추구합니다. 교회에는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세대를 향해 기적의 아침을 소망하며 기도해 적이 있습니까? ‘벤자민 버튼 증후군’은 2017년 나온 동명의 영화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극중 주인공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80대의 모습으로 출생하여 세월이 갈수록 젊어집니다. 그런데 기업 분야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 불경기를 맞아 중형항공사 스카이마크 등 대기업들이 자본금을 일부러 줄여서 중소기업으로(자본금 1억 엔 미만)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국내의 경우에도 중견기업연합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몇몇 기업이 자발적으로 중소기업 회귀를 결정했다고 하니, 코로나가 불러일으킨 벤자민 버튼 증후군이 어쩌면 우리 사회에 더 넓고 깊숙이 자리 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즉 중소기업으로부터 대기업 군으로 진출한(자산 총액 5,000억 이상) 사례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네이버, 카카오, 하림, 셀트리온 등이 그러합니다. 이들을 보통 ‘유니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벤자민 버튼’의 상극이라 할 수 있겠네요. 우리 사회에는 역(逆) 벤자민 버튼 증후군이 팽배하여 무수한 유니콘들이 새롭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코리안 멜랑콜리’입니다. 세계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급속한 변화를 초월하는 속도와 성장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거나 속도가 느리면 참지 못하는 우울증 비슷한 것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특한 성향이 반전의 결과를 도처에서 양산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불편이나 지나친 규제들을 속속 개선하는가 하면, 바이러스 사태의 관리나 백신 공급 등에 있어서도 민첩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변화는 중요합니다. 신자인 우리에게도 변화는 중요합니다. 주님은 안주(安住)를 원치 않으시고(마 17:4), 당신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고 새 것이라 하시며(고후 5:17), 세상을 대하여서도 언제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롬 12:2).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변화에 최적화된 인류입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두려워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네카라쿠배!’ 이제 새로 배운 말들을 복창도 하면서 ‘크리스챤 멜랑콜리’의 태세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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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소강석 칼럼]그리움과 애태움의 연가
    가락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제가 직접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때는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한사람, 한 사람이 대부분 제 손에 의해서 이끌려 졌습니다. 출석교인이 100여명이 좀 넘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장로, 권사님이시지만, 당시 김창환 집사와 유추자 집사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딸까지 데려가니 성도 4명이 교회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봉고차로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는데요, 공항에서 헤어질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공항에서 교회로 돌아오면서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왔습니다. “아, 그들은 꼭 이민을 가야 했을까. 내가 가지 못하도록 더 붙잡고 말릴 걸...” 사실 김장환 집사님 부부는 가락시장에서 장사해서 십일조도 잘하고 봉사와 헌신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먼저 간 형제가 자꾸 미국으로 오라는 바람에 꼬임을 받아 LA로 간 것이거든요. 저는 그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때문에 몇 주일 동안이나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떠난지 1년 반쯤 되었을까요? 그때쯤 제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김창환 집사님 부부 역시 한국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김창환 집사님을 끌어안고 함께 울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세요. 한국에 오면 얼마든지 가락시장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잖아요?” 저의 말에 설득을 당하여 그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부부가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교인 한 부부가 돌아오는 게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요. 이런 그리움과 애태움은 코로나로 인하여 저의 가슴 속에 다시 가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보랏빛 엽서’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불렀겠습니까? “♪ 보랏빛 엽서에 실어온 향기는 목자의 눈물인가 이별의 마음인가 / 한숨 속에 묻힌 사연 지워보려 해도 떠나버린 성도 마음 붙잡을 수 없네 / 오늘도 가버린 성도의 생각에 눈물로 써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 다시 돌아올 성도 모습 기다리는 목자의 사연” 또 ‘J’라는 노래를 사랑하는 성도를 향한 연가로 개사를 해서 불렀습니다. “J 아름다운 교회 생활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 J 난 성도들을 못 잊어 / J 난 성도들을 사랑해...” 그러나 공간대비 20% 예배를 드리는 기간이 너무 오래 되다보니까 이것이 너무 당연시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며 깊은 상념에 잠겨봅니다. “개척교회 시절에 성도 한 명을 보낼 때의 애태움과 그리움이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가. 한 성도를 떠나보내며 성도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애타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지난 주 저는 김부겸 국무총리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총리님, 언제 교회 예배 때문에 확진자가 나온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는 코로나 감염이 안 되었잖아요. 그러니 어서 빨리 예배가 더 원활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언론보도에 나온 것처럼, 김부겸 총리님께서는 “목사님들이 백신을 많이 맞도록 권면해 주십시오. 그러면 7월부터는 예배 제한이 좀 더 풀어지지 않겠습니까?”라는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총리님, 저는 예배 회복을 위해서 이미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았습니다. 화이자나 모더나도 맞을 수 있었지만 저는 아스트라제네카를 선택해서 맞았습니다. 이렇게 예배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의 열정도 알아주시고 예배 회복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활동도 회복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공간 대비 비율 예배 회복의 퍼센트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목사의 가슴에 성도들을 향한 그리움과 애태움이 메말라가고 있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총회 사역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공적 사역을 위해 바삐 뛰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저의 모습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유튜브로 예배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교회를 향한 애태움과 그리움이 메말라가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요. 오늘밤은 아무리 하늘을 봐도 구름이 꽉 끼어서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비록 코로나의 먹구름이 성도들과 저를 갈라놓고 있다할지라도 저는 지금도 여전히 성도들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다시 예배의 감격으로 불태울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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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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