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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4, 권세열
    권세열 선교사는 미국의 교회와 개인으로부터 구호품을 인계 받아 구호활동을 계속했는데, 그가 남긴 보고서는 전쟁 당시 한국과 부산의 상항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주고 있다. 1951년 2월 15일자로 작성한 보고에서는 전쟁이 발발한지 7개월이 지난 때의 피해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한에서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목사수: 장로교 136명, 감리교 24명, 북한에서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목사 수 장로교 111명, 감리교 31명, 그리고 남북한을 합쳐서 성결교 목사 6인, 구세군 사관 4명, 성공회 신부 6명, 로마가톨릭 80명, 외국인 선교사 32명, YM, YW총무 7명, Y직원 1명이 피살되거나 행불자가 되었다고 했다. 다 합치면 438명이나 피살되거나 행방불면된 것이다. 또 남한의 피해자는 47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닐 수 있으나 그것이 선교사 사회에 알려진 통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에는 1만2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제주도로 피난을 갔고, 이중 목사는 400여명으로 목회자 가족은 1천7백 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제주도로 간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40여 교회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1953년 8월에 기록한 보고서에서는, 3년간의 전쟁에서의 교회의 피해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데, 500여 명의 목사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고, 파괴된 교회 수는 1천여 교회, 과부가 된 이가 10만 명, 전쟁고아가 20만 명, 파괴된 가옥 50만호, 시민 사상자 수는 1백만 명, 전쟁 피난민은 900만 명에 이르고, 북한땅에서 공산정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보고하고 있다. 권세열은 부산에 거주하면서도 서울을 왕래하기도 했는데. 1951년 6월 11일 주일에는 부산영락교회에서 설교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교회(영락교회를 의미함, 필자 첨가)는 서울에서 회집되던 잘 알려진 피난민교회였고, 지금은 피난민 생활을 부산에서 다시 시작하는 피난민교회로서, 서울의 담임목사를 계속 모시고 주일학교와 청년부 등도 본래대로 운영하면서 모이는 교회이다. 주일 아침예배에는 500여 명에서 1천여 명에 이르는 이들이 참석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서울교회들도 피난지 부산에서 재조직하여 전시 중심지의 바쁜 여건 중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전시중의 신학교육에 대한 보고도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권세열은 1951년 6월 16일자 보고에서, 서울 남산에 있던 장로교신학교는 1951년 5월 1일 부산진교회에서 피난 학교로 개교했는데, 100여명 등록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등록학생이 275명에 달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고 한다. 1951년 11월 7일자 보고에서는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500여 학생들로 개교하였고, 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그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순교당 했거나 이산가족들이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라고 한다. 교회 건물을 임시교사이자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고, 학과 공부 외에도 노방전도, 개인전도, 교회심방, 군인병원과 교도소 심방 등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53년 5월 15일자 보고에서는 졸업생이 73명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제 2회 졸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졸업생인 김광수와 이능백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김광수(金光洙)와 그의 동생은 평양에서 그의 부친이 공산당의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금광에 끌려가 하루 20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유엔군이 북진할 때 총살자으로 끌려가던 광수의 아버지는 탈출하여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또 이능백(李能伯) 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공산정권의 징집을 피해 마루 밑에 구멍을 파고 숨어 지내거나 산에서 피해 지내던 중 유엔군의 북진으로 해방되었고, 곧 한국인에 입대하여 공산 정권과 싸웠고 재대 후 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1953년 5월 22일자 보고에 의하면, 1953년에 이 총회신학교에 20여명의 학생이 지원하여 총 등록학생이 45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신학교가 되었고, 학생 중 4분지 3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이들이라고 한다. 신학교는 신학고목 외에도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등의 과목도 공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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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6-11
  • [은혜의 말씀]여호와의 종이 되십시오!
    오늘은 그동안 살펴보았던 여호수아서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세겜에 모으고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시작할 당시 1:1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소개했지요. 그러나 오늘 여호수아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 성경은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한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종”으로 끝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서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종’으로 불릴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종은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24장 전체를 통하여 여호수아가 회상하며 고백하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하나님의 이야기를(His +Story)를 역사(histor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걸음 걸음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해서, 순종하는 백성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우리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고백은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에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줄 믿습니다. 두번째, 여호와의 종은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안다면,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적당히 믿고 대충 얼버무리는 신앙은 용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할지 심각한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라는 우스게 소리가 진리처럼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신앙이란 우리가 버려야할 세상적인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결심을 보십시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나와 내 집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자녀들 자손들 미래까지 우리 가정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지나갔고 여호수아도 지나갔습니다. 오리 모두도 이 세상을 지나 갈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이 땅에서의 삶,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며 충성스런 삶, 후회 없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여호수아의 삶이 우리의 삶이되길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달려온 인생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므로 또 새로운 은혜를 향해 달려나가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선택입니다. 신앙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평생을 아름답게 사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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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의학 칼럼]다낭콩팥병 새로운 치료제, 나에게도 필요한가?
    상염색체우성유전 다낭콩팥병 또는 다낭신장병 (이하 다낭콩팥병)은 오랫동안 “부모를 닮아서 콩팥이 좋지 않아...”라는 말로 체념하면서 사는 병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낭콩팥병의 진행속도를 둔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약제가 등장하면서 체념보다는 적극적 전투에 나선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 새로운 약제의 이름은 ‘톨밥탄’이다. 첫째. 톨밥탄은 바조프레신 수용체를 차단하는 약이다. 우리 몸에서 수분이 부족하면 분비되는 바소프레신이 콩팥 물혹의 성장에 주된 역할을 한다. 이 바소프레신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수용체에 먼저 붙어야 하는데 톨밥탄은 수용체 자체를 차단하여, 바소프레신이 분비되더라도 물혹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둘째. 콩팥의 물혹을 없애는 약물이 아니다. 물혹의 성장을 차단하는 약이 아니라 억제시키는 약이다. 임상연구들에서 낭종의 성장을 억제시켜 콩팥기능을 보존하는 효과를 보였다. 대조군 (약을 쓰지 않고 비교한 환자들)에 비해, 물혹의 성장과 콩팥기능 저하를 약 50%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셋째. 모든 다낭콩팥을 가진 환자가 치료대상은 아니다. 톨밥탄은 빠르게 진행하는 다낭콩팥병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성인환자에서 콩팥기능이 천천히 저하되도록 하는 약이므로 빠르게 진행하는 다낭콩팥병 환자가 치료대상이다. 다낭콩팥병은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부모형제 사이에도 질병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험인자를 많이 가지고 있는 환자일수록 콩팥기능이 빨리 감소하여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투석이나 이식수술을 해야한다. 콩팥의 총부피가 큰 환자, 35세 이전에 고혈압 또는 요로계 합병증이 발생한 환자, 특정유전자 변이를 가진 경우 등이 위험인자가 된다. 넷째. 약물과 연관된 부작용이 흔한 약물이다. TEMPO(3:4)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수분이뇨(소변량 및 횟수가 증가하는 증상)와 연관된 부작용을 경험한 환자가 78%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은 수주 내지 수개월 사이에 호전을 보인다. 간독성이 발생하여 약을 중지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다낭콩팥병의 치료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다. 톨밥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치료하기로 결정하든, 하지 않기로 결정하든지 적어도 치료결정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더 이상 체념하고 묻어 둘 질환이 아니니 주치의와 상담해 보시기를 환자와 가족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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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3, 권세열
    권세열(權世烈)이라는 한국이름을 널리 알려진 프란시드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는 1904년 1월 13일 필라델피아의 저먼 타운(Germantown)에서 아더(Arthur) 킨슬러와 베르타(Bertha)의 아들로 출생했다. 위로 두 누이와 형이 있었다. 형은 후일 목사가 되었고, 두 누이는 한국 선교사로 살았다. 권세열은 1925년 매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하여 3년 간 수학하고 1928년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평양지부에 배속된 그는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1936년까지 성경과 영문학을 가르쳤다. 1930년 9월 18일에는 도로시(Dorothy Woodruff, 1907-2001)와 결혼했는데, 그는 권도희라고 불렸다. 이들은 오래 전 약혼한 사이였는데, 9월 12일 내한하였고 일주일 후 숭실학교 근처의 매쿤 선교사의 집 뜰에서 야외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성경구락부를 조직하고 거리의 방황하는 이들에게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는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의 교육운동을 시작하여 큰 지지를 받았으나 1940년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후 1948년 다시 내한하여 대구등지에서 활동하며 성경구락부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한글 보급 성경 교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고,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신약을 가르쳤고, 1952년에는 교장 대리로 일하기도 했다. 1951년과 1957년에는 주한 북장로교선교부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고, 한국의 존경받는 선교사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43년간 일하고 1970년 9월 14일 정년으로 한국을 떠났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92년 1월 9일 캘리포니아 주 듀알테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주요한 사역은 한국 전쟁기 군목 제도 창설과 피난민 구호, 그리고 포로수용소 전도였다. 그는 전쟁기 피난을 가지 않고 부산에 체류했는데, 1950년 10월 5일자 선교보고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말자 나는 부산과 그 인근에서 구호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우리 선교부의 다른 분들은 대구를 중심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 중에막대한 양의 세계교회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구호품(약 2천 포대의 밀, 콩, 팥, 수백 통의 의류들, 1천톤이 넘은 기름, 50부대의 솜, 90드럼 이상의 분유, 약간의 비누, 신발, 실)을 서울로 가져가지 않고 부산의 창고에 보관중이었다. 그리고 우리 서울 선교부의 운전 기사 한 분이 선교부의 큰 트럭 한 대를 부산으로 가져왔다. 나 역시 좋은 지프차 한 대를 감리교 선교부로 부터 빌려 쓰게 되었다. 구호사역에 경험이 있는 후렛쳐(Fletcher)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이 부산에 왔으므로 우리는 함께 구호사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권세열 선교사는 부산의 한 큰 교회에 구호본부를 설치하고, 1950년 7월부터 3개월 동안 곤핍한 이들에게 구호하고 그들을 도왔다. 그래서 6만 명의 피난민들을 구호했다.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선교부가 보관하던 솜을 가지고 1천개의 이불을 만들어 아기를 가진 이불 없는 가정에 분배했다.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시골교회로 순회하며 구호품을 분배하기도 했다. 이상이 1950년 10월 5일에 쓴 보고서의 내용이다. 1950년 11월 1일자로 서울에서 쓴 선교 보고에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에 남기고 간 공산군들의 잔악상은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나는 폐허가 된 도시들과 잿더미로 변한 가옥들, 파손되어 버려진 승용차, 지프차, 트럭들, 그리고 왜관, 김천, 대전, 서울, 사리원, 그리고 평양에 버려진 탱크들을 보았다. 그런데 공산군들이 가져온 최악의 파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국인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당한 재난과 위협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한밤중에 불려나가서는 영영 무소식이 된 그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공산군들은 총을 가지고 들어와서 식량과 의류를 탈최한 뒤 개별적으로 불러내어 처형하였다. 안심하고 지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보이면 모두 처형되었다.” 그런가 하면, 평양에서는 20여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사라진 사람까지 다 합하면 2만 명이 더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철의 장막 뒤를 보았고, 그 참상에 나는 전율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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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목회자칼럼]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기대한다. 일을 할 때에는 유능하고 실력 있는 사람을 찾는다. 원동연 박사는 실력 있는 사람의 5가지 힘을 말한다. 첫째는 지식의 내면화 능력인 심력이다. 마음의 알통이 있고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마음이 무너지면 병이 온다. 둘째는 참과 거짓의 구별 능력인 지력이다. 인생은 판단의 연속이기 때문에 판단력을 길러야 된다. 셋째는 바라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인 체력이다. 체력을 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넷째는 남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인관 관계력이다. 관계지수를 높여야 된다. 다섯째는 에너지를 분포할 수 있는 힘인 자기관리력이다. 이중에서 한 가지만 부족해도 거기로 모든 것이 쏟아져 버리는 최소량의 법칙이 있다. 실력 있는 사람은 8가지 “ㄲ”시리즈가 있다. 꿈, 꾀, 끼, 깡, 꼴, 꾼, 끈, 끝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이 그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다. 안될 사람은 꿈도 없다. 요셉은 생생한 꿈을 꾸었다. 꾀는 잔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얻었다. 지혜가 건강, 부자, 행복을 만든다. 끼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탈렌트를 말한다. 주신대로, 받은대로, 은사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쉽다. 깡은 담대함을 말하는데 몸짱은 아니라도 배짱이 있어야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깡살, 애살, 넉살이 좋아야 된다. 꼴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꼴값을 떨어도 되는 자존감을 말한다.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꾼은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말썽꾼이 아니라 일꾼, 프로, 달인, 전문가가 되어야 된다. 끈은 가방끈은 짧아도 기도의 끈은 팽팽해야 된다. 화끈, 불끈, 매끈, 질끈, 따끈해야 된다. 끝은 끝내주는 사람, 뒷태가 고운 사람, 나중 축복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실력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학창 시절까지는 교복이 비슷하듯이 친구들끼리가 비슷비슷하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차이가 나는가? 실력의 차이가 중요한 것 같지만 다른 면이 많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고민의 차이이다. 실력차이는 별로 없어도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뼈가 녹는 고민을 하고, 온갖 발상, 구상, 착상, 상상력을 동원하여 몸부림을 치다보면 주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반짝거리는 영감도 주신다. 고장난 관념인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지붕을 뜯듯이 발상전환을 하면 된다. 안된다, 어렵다, 힘들다, 못살겠다, 죽겠다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걷어치우고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고민을 하다보면 전혀 새로운 돌파구가 보일 것이다. 문제의식도 없고, 고민도 없고, 애씀도 없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영성도 없고, 야성도 잠들고, 정성도 소홀한 채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질문의 차이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쁘다. 미주알고주알 주님께 물어보라.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선택하며 얼마나 집중하는가가 중요하다. 기도제목을 보면 그의 믿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소원을 품을 때 주께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 비전, 응전의 삶을 살아가야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한도전하고,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딪쳐 나가는 것이다. 그럴때에 마침내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고, 느낌표가 말줄임표가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였다. 시대마다 쓰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입은 자였다. 결국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열정의 차이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기에 구약최고의 선지자가 되었다. 성장엔진, 발동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부어 주옵소서. 쓰임 받은 사람의 DNA에는 갈증, 긍정, 열정이 있다. 그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하며 절대긍정 사고방식을 가지고 해도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이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이다.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은 예술이다. 사랑도 실력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뿐이라(시109:4) 사랑을 하다보면 사랑과 전쟁이 되고 원수 같은 그 인간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기도의 차이이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최고의 선물은 기도해 주는 것이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눈물의 차이이다. 부모님은 나를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주셨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다. 한나와 히스기야는 통곡기도를 하였다. 땀과 눈물과 피흘림이 없이는 사랑도 없다. 나는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땀흘려 수고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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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시사칼럼]알파세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에 이름 붙이기를 즐겨 하였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먼저 나타난 세대 즉 이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이비붐세대’ 같은 말도 있었습니다만, 상용어처럼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 후반의 ‘엑스(X)세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세기 말의 세대를 자연스럽게 ‘와이(Y)세대’로 부르게 되었고, 새로운 세기의 출발 시점에는 당연히 ‘제트(Z)세대’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천년을 뜻하는 ‘밀레니엄’이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MZ(엠지)세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십여 년 동안 태어난 그야말로 최신세대를 일컫는 말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알파세대’를 거론합니다. 영어 알파벳 끝이 ‘제트/지(Z)’니 이제 새롭게 그리스어의 첫 글자로 시작하자는 취지입니다. 대체로 2010년 이후 출생한 아이들이 그 대상이 되겠습니다. 알파세대는 앞선 세대와 구별되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들을 지녔습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영어 문자 ‘엔(N)’을 초성으로 가지고 있어서 ‘4N’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뉴노멀(New Normal)’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진행 중인 판데믹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알파세대는 급작스럽게 찾아온 가치와 기준의 대전환기에 태어나서 활동하게 될 주역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수(Number)’라고 규정해 보았습니다. 사상 초유의 낮은 출산율과 급전직하한 취학연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복수형 ‘알파들(αs)’이 아니라 단수형 ‘알파(α)’ 하나가 정말로 소중한 세대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네이티브(Native)’입니다. 언어를 그 나라 사람처럼 즉 원어민처럼 잘할 때 보통 ‘네이티브 스피커’라고 하지 않습니까? 알파세대는 전통적인 언어가 아니라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디지털과 함께 태어나 디지털과 함께 자라는 세대입니다. 네 번째 특징은 ‘넷(Net)’으로 보았습니다. 인터넷망을 뜻하는 기존의 ‘넷’을 넘어서 이들은 오늘날 인터넷과 미디어를 아울러 범지구적, 전방위적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넷플릭스(Netflix)’ 세대라 불릴 만하기 때문입니다. 알파세대가 그러나 꽃길만 걸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깔려 있기에 더욱 낯설고 헤매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음세대를 생각하게 되는 오월을 맞아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이들 알파세대를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알파세대에게 있어서 ‘공동체’는 새로운 의미로 중요합니다. 형제자매가 많았던 예전과 다른 알파세대는 공동체라는 개념에 태생적으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교회수련회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신앙공동체를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고용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알파세대와 공동체를 연계할 수 있을까(Westerhoff), 이 문제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둘째, 알파세대에 절실한 것은 ‘공감’입니다. 진즉부터 감성지수와 공감능력을 강조하는 견해가 속속 등장했습니다(Daniel Goleman, Howard Gardner).자칫 이기적이고 기계적일 수 있는 알파세대에게 ‘공감’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셋째, 알파세대에게는 ‘공간’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함의를 가집니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가 독창적으로 재정의한 ‘공간’의 핵심은 ‘개방성, 경계, 환대’에 있는데,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공간 개념을 열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근본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5-6). 시대가 아무리 달라지고 환경이 얼마나 바뀌어도 ‘알파’의 근원은 언제나 여일하고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침 ‘알파세대’라 불리는 저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소중한 것 역시 바로 그 ‘알파(the α)’가 아니겠습니까? 어린이날은 지났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신약성경의 각 권 5장 5절을 보면 이러한 알파세대 어린이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구절들이 많습니다. 성령(고전 5:5; 고후 5:5; 갈 5:5), 기업(엡 5:5), 빛(살전 5:5), 소망(딤전 5:5), 아들(히 5:5), 여기에 이미 ‘알파’로부터 비롯된 ‘공동체’와 ‘공감’과 ‘공간’이 망라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새롭게 등장한 알파세대에게 변함없이 우리는 그 알파와 알파의 말씀들을 내리내리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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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은혜의 말씀]영원한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수20:1-6)
    이스라엘의 가나안땅 분배가 모두 마쳤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이 복수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도피성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도피성은 생명의 존중을 보여줍니다. 도피성 제도는 우리의 한 생명 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존중이 담겨있습니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라 할지라도 사람의 복수로 그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창 1:27,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작품 중에도 작품, 걸 작품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기에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고 때로는 섬김을 통하여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길 축복합니다. 2. 도피성은 모두의 피난처(보편성)임을 보여줍니다. 도피성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있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피성은 민족이나 인종간에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든 갈 수 있게 이스라엘 전역에 있습니다. 요단 동편에 3곳, 요단 서쪽에 3곳 모두 6곳을 지정하여 누구든지 하룻밤에 달려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영혼의 도피성, 피난처입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교회는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3.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살인자는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으면 죄가 있고 없고 간에 상관없이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본향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마 11:28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문제와 아픔, 고통의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받아주시고 대신 져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 눈물을 아시고 붙들어 주시는 영원한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피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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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서임중 칼럼] 들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만남 가운데 종종 ‘에서’ 같은 들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때론 ‘야곱’ 같이 장막에 거하는 사람도 만난다. 분명한 것은 장막에 거하는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평행감축인데 들사람의 삶은 세월이 갈수록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선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지금은 은퇴를 해서 목회라는 단어가 추억이 되었지만 현역 목회시절에 기록해 둔 목회일기장을 열어 읽노라면 지난 목회사역의 상황을 추억하면서 눈물 짓기도, 미소 짓기도, 웃기도 한다. 임직을 받은 집사님 가정에서 감사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그날은 시편 65:4절 말씀으로 축복한 날이 있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그렇다. 주의 뜰은 장막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도들이 자신의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으로 신학자들은 주석을 했다. 부디 직분 받은 후 그 직분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존귀함을 깨달아 에서처럼 들사람이 되지 말고 야곱처럼 장막생활을 통한 사명 잘 감당하기를 축복했다. 그는 장로가 되었고 지금도 말할 수 없는 축복받은 삶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교회 생활, 즉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신앙생활을 액세서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들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런 경우는 이유 여하를 무론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들사람이 되지 말고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창세기 25:27절은 에서를 가리켜 들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이다. 에서에 대한 표현방법이 아주 묘하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에서는 민첩한 기질로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사냥 업에 종사한 것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에서에 비하여 야곱은 장막생활을 즐거워했다.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라는 말씀의 장막은 구약에서는 두 가지의 의미로 씌어졌다. 장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명사 ‘오헬’과 ‘미쉬칸’이 있다. 오헬은 보편적으로 ‘천막’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미쉬칸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계된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장막의 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서가 충동적이고 활동적이며 무절제의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야곱은 사리분별이 있었고 인내와 절제를 통한 영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하셨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식・주가 우선이 아닌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신앙적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기의 방법으로 양식을 구하려는 몸부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들사람의 특징이다.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축복권을 야곱에게 넘기며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참담한 말을 하게 된다. 왜 이지경이 되어 가는가? 하나님이 주신 명분을 경멸하고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업신여긴 것이다. 이것이 들사람의 특징이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에서의 행동 원문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와야칼 와야쉐트 와야캄 와야라크’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갔다’이다. 여기 ‘그리고’의 ‘와우’ 용법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에서가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의 ‘바자’는 ‘업신여기다’ ‘경멸하다’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명분은 관심도 없고 눈앞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들사람의 모습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오늘도 주님의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들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들사람의 특징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그래서 옳고 그름에 분별력이 없고 가치관의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며, 삶의 의미를 육신적인 것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도 예외 없이 교회에서의 직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홀히 여기는 일이 다반사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명분을 천하보다 귀히 여겼던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들사람과 장막의 사람의 차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절대적인 믿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초지일관의 바울 사도의 사명수행의 삶은 장막에 거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연주다. 그러나 들사람 데마는 세상이 좋아 세상으로 갔고, 들사람 가룟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들사람 고라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명분을 잃어버리고 모세를 대항하다가 저주받아 땅이 삼켜버리고 말았다. 모두 유다서에 기록된 저주받은 이름들이다. 어찌 이들 뿐이겠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들사람이 있고 장막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참 신자는 들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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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성서연구]부끄럽고 무력합니다(열왕기상 6장 8-23절)
    코로나19 팬데믹이 작년 2월경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비롯한 사역의 위축을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비난에 직면해 있고, 작은 교회들이 폐쇄되는 절벽에 서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작년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의 대표자들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코로나로 인해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거나, 인원을 제한당하는 상황, 이 과정에서 불거진 관계기관의 지나친 교회 간섭, 도에 넘게 교회를 비난하는 여론몰이 등으로 분노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만났고, 강력하게 항의를 제기하고, 한국교회가 예배에 목숨을 걸고 있다고 하면서, 개선방향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기독교인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말을 했습니다. 그 요지는 방역은 과학이며, 신앙은 마음의 평화는 주지만, 방역까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도를 보면서 그분의 신앙은 그저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을 통해 약간의 마음의 평화를 얻은 후에 남는 모든 문제는 인간이 과학과 법을 동원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평안과 위로만 주시고, 나머지는 인간이 해결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안과 위로와 함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홍해에 길을 내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코로나도 물리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역은 과학의 영역이요,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을 때,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우리는 큰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대통령께서 그렇게 말씀할 때, 우리 중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희가 코로나19가 종식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주 내로 대한민국에서 코로나가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도 방역은 과학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한국교회가 기도하여 코로나가 사라졌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마치 출애굽 과정에서 애굽에 임했던 재앙들이 모세의 말대로 사라지곤 했던 것처럼, 마치 갈멜산에 하나님의 불이 임해서 제단과 제물을 모두 태운 것처럼,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보여준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그런데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코로나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너무도 초라한 우리 모습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아람이 북 이스라엘을 수도 없이 침공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 군대의 길을 미리 알고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의 궁궐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작전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엘리사는 북 이스라엘을 지키는 보루였습니다. 우리는 왜 엘리사처럼 이 난국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무력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답은 코로나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인류에게 주시는 경고이며,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두 사람의 기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두시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어쩌면 우리가 엘리사와 달리 능력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가 입었던 겉옷을 입었습니다. 엘리야가 회리바람 중에 승천할 때 성령께서 갑절로 역사하시길 구했습니다. 그는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힘입고, 작은 일에서부터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아픔을 해결하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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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의학칼럼]다낭콩팥병, 철저한 혈압관리가 필수
    만성콩팥병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당뇨병이나 고혈압으로 콩팥의 기능이 빨리 감소하는 병이라는 정도는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다낭콩팥병이 당뇨병, 고혈압, 사구체신염에 이어 만성콩팥병의 네번째 가장 흔한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상염색체우성유전 다낭콩팥병(이하 다낭콩팥병)은 콩팥에 수많은 물혹이 생기고 커나가면서 정상 콩팥기능을 저하시키는 유전질환으로 최근 콩팥기능을 보존시키는 약제가 개발되면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질환이다. 다낭콩팥병 환자는 일반인보다 고혈압이 조기에 발생하며, 신장 기능이 정상인 경우에도 60% 이상에서 고혈압을 동반한다. 특히 35세 이전에 발생한 고혈압은 다낭콩팥병의 나쁜 예후인자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혈압을 치료하지 않을 경우 신장기능이 더 빠르게 감소하기 때문에 조기에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다낭콩팥병의 고혈압치료는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첫째. 다낭콩팥병 환자에서 레닌-안지오텐신-알도스테론 시스템이 항진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스템을 차단할 수 있는 고혈압약제 (안지오텐신전환효소억제제 또는 안지오텐신수용체차단제)를 일차약으로 사용하도록 권고한다. 다낭콩팥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 이들 약제가 혈압조절뿐만 아니라 좌심실근육량, 단백뇨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보였다. 다낭콩팥병 환자에서 안지오텐신전환효소억제제 또는 안지오텐신수용체차단제는 콩팥의 낭종이 커지는 속도를 늦추고, 콩팥혈관저항을 낮추는 신보호효과를 보였다. 둘째, 18세부터 50세까지의 콩팥기능이 상대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환자의 (사구체여과율이 60 이상인 경우) 목표 혈압은 110/75 mmHg 이하로 매우 낮다. 이는 고혈압의 철저한 관리가 매우 중요함을 의미한다. 그 외의 환자들의 목표혈압도 130/80 mmHg 이하이다. 셋째, 고혈압약 뿐만 아니라, 고혈압에 도움이 되는 저염식사, 저단백식사, 정상체중 및 정상콜레스테롤유지의 식생활습관도 병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환자와 의사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박지성과 히딩크 감독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의사는 코칭을 해주고 직접 필드에서 뛰는 선수는 환자이다. 환자 스스로 매일 혈압을 측정하고, 스스로의 생활습관을 유지하여 다낭콩팥병을 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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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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