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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성전된 자기 육체(요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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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 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13절)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의 이미지하고는 너무 다릅니다. 분노하시며, 채찍을 휘두르시고, 사람들을 내쫓고, 상을 뒤엎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는, 무서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왜 그러실까요?
당시의 유월절 모습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14-16절) 유월절은 이스라엘 전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까지 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먼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부터 제사 드릴 짐승을 끌고 오기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에 쓸 짐승을 사고파는‘매매’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 입장하려면 ‘종교세’를 내어야 하는데, 세겔이라고 하는 유대 돈만 받습니다. 그러니, ‘환전상’이 성전 안에 진을 치고 앉아서 장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부패 구조를 보시면서 참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야 할 거룩한 곳이 욕심을 채우는 시장 바닥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돈 벌기에 눈이 멀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도 있습니다. 바로 편의주의입니다. 요즈음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예배 숫자가 확 줍니다. 주일 낮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예배생활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인들이 왜 대형교회를 선호합니까? 또, 가나안 신자가 급증한다고 합니다. 그런 편의주의는 우리의 영을 죽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점은 물질주의입니다. 유대교는 제사장들의 돈 욕심 때문에 망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교단이 이렇게 난립하고 장로교단만 백 개가 넘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왜 발생합니까? 결국은 지도자들이 눈이 어두워서 틈만 있으면 쪼개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나고, 그래서 이웃 주민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고, 전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그런 일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교의 부패상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교회가 교회다운 본질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잘못을 범하는 교회, 편의적이고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모하는 교회,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묻자(18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19절) 그리고 이 말씀의 진의가 무엇입니까?(2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구약의 성전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니까 자꾸 건물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렇게 예배로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리고 교회인 우리는 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도는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재해 계십니다.(고전 3:16)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에,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세상 속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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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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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이슬은 밤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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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슬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슬은 지표면(地表面) 가까이의 풀이나 물체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생긴 물방울인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즉 야간의 복사냉각(輻射冷却, radiational cooling)에 의하여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이슬은 비록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식물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사막지역 등지에서는 식물의 생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이슬(Dew, 露)이 사용될 때도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축복의 의미로 조용히 내린 이슬이 갈한 식물을 적셔 초목에 생명을 줌과 같다. 둘째는 덧없는 표상으로서의 이슬로 해가 돋으면 금새 증발하여 사라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바알과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이슬과 같으리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이슬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과 같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는 살리는 생명이 된다.
초목이 자라는 데는 물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 이슬은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팔레스틴 지방의 식물과 초목에 있어 이슬은 그야말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슬은 낮에 내리지 않고 밤에 내린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도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다. 역경과 환난, 고난과 아픔, 슬픔과 실패를 만나는 때가 그것이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은 때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의 때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불행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시냇물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그 물 아래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 없는 골짜기를 흘러가는 시냇물은 소리가 없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었다고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다시 온 대지에 빛을 뿌린다.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제비가 죽은 것이 아니다. 겨울이 가면 제비는 봄과 함께 다시 돌아온다. 추운 겨울이라고 앙상한 모든 나무들이 죽은 것이 아니다. 봄 돌아오면 앙상한 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새 생명이 약동한다.
세상살이가 날마다 좋기만 하겠는가? 아니다. 곤고한 날, 실패의 날, 외로운 날, 아픈 날, 고통의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우리 인생의 밤이다. 이 밤 같은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내린다. 캄캄한 밤일수록 빛이 더욱 찬란하듯 우리 인생도 캄캄한 밤일 때에 하나님의 광명한 진리의 빛이 더욱 보인다. 내 영혼이 어두울 때 은혜의 빛이 보인다. 내 삶이 지쳐 어두운 밤 같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것이다.
안동에서 목회를 할 때 대학교수로서 한국 농학(農學)의 권위자인 조 박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 이 일은 어두운 밤과 같은 상황이었다. 대학 강단에도 설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앞이 보이지 않고 살 소망이 끊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절망의 때에 조 박사가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의 아내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오직 믿음으로 남편을 내조했다. 예배 시간이면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축도를 마치고 내려가면 나는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오른손으로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은혜의 이슬이 메마른 그의 영혼을 적셨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메마른 광야 같은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슬처럼 임하며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걷고 말하며 다시 강단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회복되면서 잃었던 영적 생명을 다시 찾았다. 칠흑 같던 잠깐의 어두움은 새 빛에 물러갔고 그들은 안수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아름답게 교회를 섬기며 교수로서 존경받는 사명도 잘 감당하셨다.
필요악이란 말이 있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란 말도 있다. 파스칼의 병약함은 모든 사람의 심혼을 정화시키는 ‘팡세’를 세상에 내놓게 했다. 십여 년을 결핵성 골수염으로 투병한 미우라 아야꼬의 고통은 인간의 본질을 깊이 파헤친 ‘빙점’의 명작을 쓰게 했을 뿐 아니라 병상에서 영생할 수 있는 신앙을 얻게 했다. 부서진 질그릇 같은 훼니 제인 크로스비, 남의 실수로 눈이 멀어 평생 시각장애인이 된 그 가냘픈 여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수많은 찬송시를 썼다. 질고의 대명사 송명희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다. 육신이 병들고 눈물을 음료로 대신하던 고난의 때를 지나며 살 소망마저 끊어졌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렸다. 우상을 섬기는 가정의 아들인 내가 목사가 되었다. 목양길 걸으며 한 걸음도 더는 앞으로 내딛지 못할 것 같은 그 밤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려주셨다. 그 속에서 나는 용서를 배웠고, 감사를 배웠고, 사랑과 소망을 배웠으며, 기도와 겸손을 배웠다.
그렇다. 우리의 삶이 상처투성이로 소망이 없을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메마른 땅일지라도, 비록 육신은 깨어진 옹기 같을지라도, 삶의 자리가 칠흑 같은 밤일지라도, 이슬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날마다 축복을 노래할 수 있다. 인생들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고난의 날들은 어두운 밤과 같지만 그 밤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 밤에도 이슬은 내린다. 그러나 이슬이 내리지 않는 밤이 있다. 구름이 낀 날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구름이 끼여 있으면 은혜의 이슬은 내리지 않는다.
이슬은 밤에 내린다. 구름이 없는 맑은 밤에 이슬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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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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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사가지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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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이 인물을 평가할 때에 신언서판(身言書判), 네 가지를 보았다. 그것이 사가지이다. 발음을 강하게 하면 싸가지가 된다. 인물 좋고 말 잘하고 학식 많고 똑똑한 사람을 말한다. 몸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고 글 솜씨가 뛰어나고 판단력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실력이 없는 것은 용서해도 싸가지가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인생은 네 박자라는 유행가도 있다. 언행심사도 네 가지다.
요한삼서에서는 네 가지 축복이 있다.
첫째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편지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셋째는 형통의 복을 받는 것이다.
넷째는 자녀의 축복이다.
첫째, 요한의 별명은 우뢰의 아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 사랑받는 제자가 되니 변화가 되어 성경을 다섯 권을 기록하고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모친 마리아를 부탁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천국의 비밀을 가르쳤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한 것이다. 사랑의 힘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는 것보다 받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받지 못할 때 모든 문제가 생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 받은 자이다.
둘째, 요한삼서는 편지이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 오고 불통하면 불행하다. 세 가지 필통이 있어야 된다. 반드시 통해야 되고 느낌(Feel)이 통해야 되고 필기도구를 넣을 수 있는 필통이 있어야 된다. 적자생존이라고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 기록이 기억보다 오래간다. 소통이 어렵고 공감이 부족할 때에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피가 통해야 건강하고 말이 통해야 행복하고 돈이 통해야 부자가 된다.
셋째,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온몸이 강건한 삼중축복, 사차원의 영성, 오중 복음이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더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기는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처럼 복을 받되 다중적인 복을 받는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듯이 복을 받은 자가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고 섬기는 자가 크다. 건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간호하고 강한 자가 더 연약한 자에게 돕는 배필이 된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다.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다. 어떤 애비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으며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 복 있는 사람이 또 다른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영혼이 잘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온 몸이 건강한 것이 순리이다.
신통, 인통, 물통, 사통이다. 모든 것은 영적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나의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내가 통하면 인간관계가 풀리고 물질 문제가 해결되고 일이 성사된다. 그 순서가 중요하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관계, 물질관계, 일처리가 순적하게 되고 소화도 잘되는 베스트 컨디션이 되기 때문에 신통하면 인통하고 물통하고 사통하고 밥통 문제가 잘 되어 진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절반 이상이 부정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부정적으로 나아간다. 사고방식이 부정적이고 언행심사가 삐딱하고 까칠해지기 쉽다.
하나님께 은총(은혜와 사랑)을 받고 말씀과 기도로 통하면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주님은 말씀을 주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된다. 믿음, 소망, 사랑의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직하며 견딜만하며 사랑스러워진다.
주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넷째,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요한삼서는 기록하고 있다. 아이야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순종, 야곱의 기도가 이어져서 샘곁에 심기운 가지가 담을 넘어서 뻗어나가는 요셉의 축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수천 대까지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미워하고 죄를 짓는 자는 삼사대에 망하는 것이 십계명을 주실 때의 약속이다.
자식농사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녀들이 곁길로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가. 자녀들이 신앙생활 잘하고 반듯하게 의인의 길에 선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소식이 없으리라.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인도하는 전도,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예배, 진리를 파수하는 자녀들이 아름답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부모들의 믿음이 다음 세대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 이후에 솔로몬, 모세 뒤에 여호수아, 엘리야를 이은 엘리사,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처럼 바통이 이어지는 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찾는 자를 만나 주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신다. 주님 앞에 갈급한 심령으로 부르짖을 때 그 중심, 싸가지를 보시고 마침내 복을 내리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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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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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내 몸의 면역력 방패, 지금 챙겨야 할 비타민·미네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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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되면서 이제 생활환경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 마스크 착용이 생활화되면서 감기나 폐렴 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고, 알레르기성 비염 등 환절기 증상도 줄고 있다. 직장 회식은 사라진 지 오래고, 모임도 최소한으로 줄었다.
이러한 코로나19 뉴노멀로 우리 몸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운동 및 활동 시간이 많이 줄어 소위 ‘확찐자(갑자기 살이 찐 사람)’가 늘고 있다.
주말에도 외출이 줄어 햇빛 쬐는 시간이 감소했다. 이로 인해 피부에서 비타민 D의 합성이 줄어 비타민 D 결핍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비타민 D의 결핍이 장기화되면 우울감·무기력감·근육통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지금 원인 모를 우울감이나 무기력감, 전신 근육통이 지속된다면 혈액검사를 통해 비타민 D 결핍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운동량이 줄어 신체 면역력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주목해야 할 점은 확진자와 접촉한 모두가 감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개인이 가진 ‘면역력’의 차이에 따라 감염 여부, 감염 후 증상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코로나19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손 씻기,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서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면역시스템 강해야 감염 안 돼
신체 면역력이란 외부의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등과 같은 다양한 균으로부터 우리 몸을 지켜주는 인체 방어시스템이다.
면역시스템이 건강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가 주변에 떠돌아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그럼 신체 면역력이 저하돼 있는 현대인에게 코로나19를 막아줄 수 있는 비타민과 미네랄은 뭘까. 비타민은 비타민 C, D가 있고 미네랄은 아연, 셀레늄이 있다.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제1차 면역반응세포인 대식세포(Macrophage), 자연살해세포(NK cell), 호중구(neutrophil)가 바이러스를 파괴한다. 하지만 면역반응세포가 부족해 관문이 뚫리면 제2차 면역반응세포인 B세포, 림프구가 격렬하게 싸워 염증을 유발하는 사이토카인을 분비시킨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이러한 사이토카인이 심하게 분비돼 폐렴 등의 염증반응을 일으킨다. 즉, 1차 면역반응과 관련된 면역세포들이 충분히 있었으면 염증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1차 면역반응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비타민 C, D와 아연, 셀레늄이다.
비타민 D는 바이러스 종류와 상관없이 몸 안의 유해 바이러스나 세균과 싸울 수 있는 생리적 항생제인 카텔리시딘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면역기능을 총괄해 면역력을 높여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통 성인의 비타민 D 정상 혈중농도는 30ng/㎖ 이상이며, 40ng/㎖ 이상을 유지하게 되면 신체 면역력은 활성화된다고 한다. 한국인의 경우 30ng/㎖ 미만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타민 D의 혈중농도를 40ng/㎖ 이상 유지하려면 초기엔 하루에 3000~4000 IU 복용하든지 고용량 주사(20만~30만 IU)를 맞는 것이 좋다.
비타민 C의 경우 직접 초기 면역세포 중의 하나인 식균세포와 자연살해세포를 활성화시켜 바이러스나 세균을 죽게 해 우리 몸의 염증반응을 억제해 감기나 인플루엔자 증상을 완화해준다.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 증식하는 것 자체를 막아주기도 한다. 바이러스 억제를 위해선 적어도 하루에 총 6g 정도를 세 번에 나눠 복용하는 것이 좋다.
셀레늄은 대식세포와 자연살해세포를 활성화시키고, 면역수용체인 인터루킨2 수용체를 발현시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직접 죽이는 T세포 생성을 촉진시킨다. 직접 NF-kB(염증 신호 전달물질) 활성을 억제해 염증을 제어하기도 한다.
아연도 1차 면역기관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운동은 면역력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지만 1시간을 넘기는 등 지나치면 되레 면역계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약간 빠르게 걷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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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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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6, 밥 피얼스, 하워드 마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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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을 구제하고 선교했던 밥 피얼스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좀 더 정리해 두고자 한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한국의 전쟁 실상과 참담한 현실을 보고 전쟁 피난민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집단 학살된 후 방치된 기독교인들, 고아들과 과부들, 버려진 아이들의 딱한 현실을 보고하면서 “이 글이 독자들에게 공분과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가 목격한 피난민의 고통과 처참한 참상을 보고 구호단체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것이 1950년 9월 22일 조직된 월드비전(World vision)이었다. 이 조직은 그 이후 가장 큰 기독교 구제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보고서 작성 외에도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첫 번째 영상이 ‘38선’(The 38th Parallel)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한국의 분단 상황에 대한 영화였다. 두 번째 영상이 1952년 제작된 ‘불꽃’(The Flame)인데, “시대를 초월한 한국 전쟁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독교 영상물”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기록 영화였다. 피얼스는 이 영상을 미국 전역의 교회나 기독교 기관에서 상영하고 피난민들과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미국 전역에서 후원자를 얻게 되었고 월드 비전의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전쟁 이후 월드비전은 한국의 많은 고아원을 지원하고 고아들을 위해 후원의 손길을 보냈다.
구호활동을 전개한 또 한 사람이 하워드 마펫(Howard Moffett, 1917-2013)이었다. 초대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 1864-1939)의 4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여 17세까지 한국에서 성장은 하워드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1948년 31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해군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봉사했다. 그는 이미 군 복무를 마쳤으나 다시 군 복무를 자원한 것이다. 9.28 서울 수복에는 평양까지 가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인데, 의료 분야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아스피린, 페니실린 등 의약품을 제공하고 피난민을 구호했다. 의료 활동은 난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요청이었기에 그는 이런 필요에 응답한 것이다. 또 하워드는 의료 활동 외에도 교육·사회봉사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전쟁 이후 고아와 난민, 전쟁미망인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1953년 9월 제대 후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1956년 재내한하여 대구 동산병원에서 일했다. 1959년에는 동산병원장에 취임하여 일하는 등 학교법인 계명기독대학 이사장,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협동의료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45년간 한국에서 봉사했다. 불과 60병상이던 동산병원을 1000여 병상의 대형 의료원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하워드였다. 그는 2013년 6월 2일, 97세 나이로 미국 산타 바바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유언에 따라 아내 마가렛 마펫 여사와 함께 그해 9월 25일 계명대 동산의료원 은혜정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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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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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선한 사마리아인이여 여인인지 확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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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에서 한 여성이 쓰러졌는데,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남자들 아무도 선뜻 도와주려 나서지를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반 언론들까지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고, 요즘 민감한 주제인 ‘페미-반페미 논쟁’으로 격화될 조짐까지 보였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괜히 나섰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니 그럴 수 있다’는 말부터 ‘남성이 여성을 꼭 도와야 하나’는 의견까지 등장했는가 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일종의 여혐(女嫌)이다’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초 신고자가 “사람이 쓰러졌는데 남녀가 어디 있나요, 남녀 가릴 것 없이 시민들이 쓰러진 분을 도왔습니다”라며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글을 재차 올려서 웃픈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만, “(선정적인 제목까지 쓰면서) 언론이 더 남녀 분쟁을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그의 마지막 언급은 개운치 않는 또 다른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빈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른바 ‘젠더 갈등(Gender Trouble, Judith Butler)’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여당의 유력한 여성 정치인은 자신을 ‘반페미니스트’라고 비판한 목소리에 대해 “내가 문제 삼은 건 남성 배제적 ‘페미의 극단화’를 경계하는 것이고 독선적이고 혐오적으로 오해 받는 페미 현상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반박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격적인 ‘30대 기수론’을 현실화시켜버린 야당의 젊은 대표는 일부 당내 대선 주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여가부(여성가족부) 폐지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갈등 속 폭풍의 눈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상 ‘이대남(20대 남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그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당권을 장악한 이력 탓인지 당내 안팎으로 다음과 같은 반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당의 내부 견제가 ‘이대녀(20대 여자)’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서울신문 김균미).
이러한 움직임들과 관련하여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원래는 나사와 나사 사이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약간의 틈을 의미합니다. 기어나 톱니바퀴가 진행 방향으로 나아갈 때는 흐름을 더 매끄럽게 만들어 주지만, 반대 방향으로 가려하면 오히려 심한 소음과 마모 등으로 흐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는 공학적 단어입니다. 그런데 199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Susan Faludi)는 이를 당시 불고 있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대중적 역풍을 상징하는 사회공학적 개념으로 썼습니다. 지금 야당 대표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의 공공연한 반페미적 발언과 태도를 일각에서 ‘백래시 운동’의 일환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상기의 과정을 넘어서 이 단어가 갑자기 정치공학적 개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흔히들 거론하는 몇 가지 이론들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백소영), 이 문제가 더 이상 무시하고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논점이 되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지하고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모색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분야의 고전인『가부장제의 창조』(거다 러너)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는 남자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여자가 만들었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아마도 대부분의 생활 토기들은 여인들이 만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성의 공헌들이 은폐되거나 사라지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역사가 정말 오래 되었겠구나”, 이런 견해를 피력합니다. 읽다 보니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 준 강도 만난 이웃은 남자였을까요? 여인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요?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사용하신 하나의 비유나 상징이었을 터, 그렇다면 그 이후 역사의 현장에서 숱하게 나타났던 연약한 이웃에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퍼뜩 떠오른 재미있는 단상(斷想)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라면 한 마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워있는 그 사람이 여인인지 확인해 보았습니까?’ 선행도 신중하게,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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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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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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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성경 중에서도 참 소중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이 우리에게 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삶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권세 있는 말씀으로 교훈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엄청난 사건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격한 것을 여기 요한복음에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요한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합니까? 그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입니다. 아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과 인생들 사이에 최대의 문제는, 소통. 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방편을 마련하셔도 그걸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5절)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 14절이야말로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이제 조금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 말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18절)
인간은 죄에 빠져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낱낱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운 분인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길을 마련해놓으셨는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참된 중보자가 되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딤전 2:5)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중보자를 필요로 합니다. 중보자의 제일 되는 조건은, 인생의 문제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이해하는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히 4:15)
셋째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마 20:28)
인생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히 9:22) 피를 흘려 죗값을 치러야 사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늘의 권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요 1:12) 이제는 예수님만을 굳게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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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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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메타버스 함께 승차하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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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덴교회는 올해로 15년째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였습니다. 초청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한 흑인 노병인 레리 래딕분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2007년도에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재단에서 주는 국제평화상을 받기 위하여 L.A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전야제를 하는데 한 흑인 노병이 저에게 다가와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총을 맞은 흉터를 보여주면서 “자신은 한국전 참전용사인데 한국을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엎드려 큰절을 하며 “제가 반드시 어르신을 초청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혼자 오지 말고 친구들도 함께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대여섯 명 정도가 함께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40명이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분 덕택에 미국 참전용사 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에티오피아, 태국, 필리핀 참전용사들까지, 미국에 가서 섬긴 인서비스까지 합치면 우리가 섬긴 분이 5000여명이 됩니다. 사실 10년 정도 되었을 때, 끝낼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면 노병들이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더구나 역사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웨버 대령과의 만남을 통해서 참전용사 행사를 계속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강원도 원주전투에서 폭탄을 맞고 두 다리를 잃고 팔도 한쪽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한국전 회상의 유리벽을 세워서 유리벽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처음에 10만 불이 넘게 후원을 하였고 그 후로도 몇 만 불을 몇 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전에 참여했다가 수류탄에 맞아 팔다리를 잃었으면 우리나라를 원망하고 듣기도 싫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웨버 대령을 보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분 댁을 찾아갔을 때 “소 목사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살아있는 한 끝까지 이 일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일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 일을 신명으로 알고 성대를 잃어버린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다 바쳐서 감당하시는 김종대 장로님께 도전을 받고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세계 최초로 화상 줌 초청 행사를 했습니다. 올해는 메타버스를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추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세계를 의미합니다. 그 메타버스 안에서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하여 90대 노병들을 20대의 젊은 시절의 이미지와 영상으로 복원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왜 돈 들어가게 그런 것을 하느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 교회가 젊은 교회요 창조적인 교회요 앞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창조적 발상 때문에 우리 교회는 지난 목사장로기도회 때 한국교회 최초로 진단키드를 했고 역사적인 갈라 콘서트도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전통, 의식, 제도 이런 것만 붙잡는 올드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질은 생명처럼 붙잡되, 여러 가지 소통의 방법과 공감, 참여시키는 것은 창조적 플랫폼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코로나 상황 중에서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얼마든지 소통의 방법이 있고 창의적인 길이 있다는 것을 교회가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창의적 발상을 통해서 이번에도 중단하지 않고 더 새롭게 하게 된 것입니다. 시작은 한 흑인 노병과의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은 새에덴교회의 브랜드를 만들고 메타버스 처치를 만들게 된 셈이죠. 그리고 이러한 창의적 도전과 변화를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벤치마킹도 하면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함께 메타버스에 승차하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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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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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무엇으로 이길 것인가(고린도후서 10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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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 목회자가 찾아와 조언을 구했습니다. 들어보니 목회 현장에 늘 있는 갈등의 문제였습니다. 목회자와 사사건건 맞서는 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제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을 말씀해 드렸습니다. 이런 주제는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싸우면서 억지로 뜻한 바를 관철함으로써 얻는 이익보다 뒤로 미루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써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할 때 평안을 얻습니다. 사탄은 평화를 깨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책략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힘들었던 것은 바울 사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 사도께서 오랜 시간을 바쳐 최선의 헌신으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은 핍박자였으므로 예수님의 사도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에까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직접 가기도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최소 네 번의 편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만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 역시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바울은 본문 3절에서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입고 육정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육체적 방법으로 싸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싸웠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웠습니다. 본문 4-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바울 사도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립니다. 그 단적인 예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여리고성보다 더 견고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립니다. 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듭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 이론입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옳음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론들을 동원합니다. 회의를 하는 중에 생각과 이론들이 충돌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분란이 일어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굴복시키고 사로잡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후배 목사님에게 드린 조언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또 하나의 생각과 이론을 보태어 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생각과 이론으로 충돌하지 말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면 결국에는 사람의 생각과 이론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만 남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것처럼 보인 것들도 나중에는 이루어지고, 또 그 과정도 평안하게 흘러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람은 늘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요즘 세상도 시끄럽고 교회도 시끄럽습니다. 생각과 이론들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평안한 승리를 얻길 원합니다. 고요히 머리 숙여 주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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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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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과잉 사회에서 따뜻한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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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구마를 싫어한다. 어릴 때, 부모님이 흰 쌀밥 대신에 고구마를 자주 주어서 평생 먹을 고구마를 그 때 다 먹은 것 같아 지금은 고구마 줄기, 고구마 잎 등 고구마와 관련된 음식은 즐겨 먹지 않는다.
시골에 살았던 우리는 뭐든지 부족했다. 쌀밥은 물론이고 지금은 어린 아이들이 흔하게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 하나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넘쳐난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는 이야기’와 ‘많이 먹음으로 인해 살빼는 이야기’ 뿐인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가 넘쳐나고, 유튜브를 통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설교를 맞춤식으로 들을 수도 있다.
물질뿐만 아니라 의지도 넘쳐나는 시대이다. “할 수 있다”는 무한 긍정의 붐이 일어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마치 ‘실패한 사람’ ‘능력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며 내재성의 넘침으로 자기 중심성이 극에 달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할 수 없어”가 아니라 “할 수 있어”라는 긍정 과잉으로 발생되는 문제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울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를 통해 “긍정의 과잉은 우울을 부른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과 해서는 안되는 것을 전부 할 수 있음으로 바꾸는데 오는 증상 중 하나가 우울증”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는 결핍의 시대를 빠른 속도로 지나 과잉 사회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과잉 사회의 부작용들이 무한 경쟁, 우울과 같은 현상들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무한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또한, “할 수 있다”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척척 해내는 초인이 아니다. 한계를 가진 존재에게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듯 몰아붙이면 결국 남는 것은 탈진과 절망뿐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과잉 능력, 과잉 긍정 등으로 흘러가면 인간에게 부여된 존엄성마저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계가 있는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가 과잉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먼저, 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체면을 걸 듯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어”라는 무한 긍정을 자극하면 결국 제 풀에 지치고 말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는 달리, 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짜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타인 역시 나와 같이 한계를 가진 사람임을 인정할 때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존중하게 된다. 그럴 때 “저 사람도 혼자 다 할 수 없으니 나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라는 긍휼한 마음이 생기고, 함께 할 수 있는 따뜻함이 전해진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이 시기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치킨집 사장님 이야기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을 준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시민들이 나서서 일부러 그 치킨집에 주문했다는 소식. 그래서 그 치킨집 사장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경쟁과 과잉 사회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 이야기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몇 해 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난다. 모두가 살리지 못한다고 말할 때,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김사부는 “내 구역에서는 하나밖에 없어.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고 말했다.
피로사회, 우울사회, 절망사회, 위협사회라고 부르는 지금, 우리에게 시골의사 김사부의 따뜻함과 정체성이 필요하다.
이 마음과 이 정신으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양식을 붙들고 살아갈 때 과잉 사회를 넘어 따뜻함이 살아있는 사회,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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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