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4(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성서연구]지금은 기도 뿐입니다(예레미야 27장 16-18절)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멸망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눈물의 예언자입니다. 바벨론의 유다 침략은 세 차례에 나누어 이루어졌는데, 주전 605년에 1차 침공이 있었고, 다니엘 등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2차 침공은 주전 597년으로서 즉위한 지 석 달 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 왕이 에스겔 등이 함께 끌려갔습니다. 3차 침공은 주전 586년으로서 이때 유다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2차 침공 후에 있었던 말씀입니다. 이때는 아직 유다 왕국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멸하기로 작정하신 후였고, 나라는 완전히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하셨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고, 날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있기에,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바벨론에 약탈된 성전 기구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은 예레미야는 그 반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약탈된 성전 기구가 돌아올 것이며 포로들도 무사 귀환할 것이라고 말하는 선지자들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남아있는 유다 왕국마저 완전히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터였습니다. 머지않아 느부갓네살의 3차 침공이 있을 것이고, 그때엔 유다 왕국은 사라질 판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들은 백성이 듣고 싶어 하는 좋은 말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백성들이 좋아하는 말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예레미야만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을 섬기고 기다리면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포로들이 돌아오게 하시고 무너진 예루살렘과 성전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런 메시지는 백성들에게 반감을 샀습니다. 예레미야는 매국노처럼 보였고,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저는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 특히 서로 충돌하는 상반된 메시지가 선포되던 당시를 자주 생각해 봅니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 시대를 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젠가 유투브를 보니,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는 어떤 이들이 장차 대한민국이 세계 위에 우뚝 서서 전 세계를 선도할 것이며,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국 경제가 세계 1위가 된다는 내용도 있었고, 몇 년 안에 통일이 되어 부강해질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흥분되는 내용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유투브에는 상반된 내용도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다가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타락한 교회와 사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판의 채찍 중 하나가 북한의 핵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제게 선택권이 있다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우리가 할 한 가지 일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예레미야 27장 18절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선지자라면 남아 있는 것이라도 바벨론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기도입니다. 정치, 경제, 안보, 도덕 등 모든 분야가 위태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축복인지, 심판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기도가 식어버린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국 기도원들이 문을 닫고, 기도하는 소리가 죽었습니다. 그 대신 갈등과 분쟁, 교권을 둘러싼 경쟁만 치열합니다. 뜻 있는 성도 여러분,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기도의 제물이 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1-05-07
  • [소강석 칼럼]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
    ‘사막에 숲이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방송작가이자 독립프로덕션 허브넷 대표인 이미애 작가가 쓴 책입니다. 죽음의 사막에 나무를 심어 생명의 숲으로 만든 인위쩐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2006년 식목일, KBS1TV '수요기획'에서 ‘숲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인위쩐이라는 몽골 여인이 1985년 바이완샹과 결혼하였는데, 인위쩐의 아버지는 죽음의 땅 사막에 그녀를 내려놓고 가 버렸습니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사막이라 돌아가는 길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완샹의 순한 눈을 보고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대신 그녀는 바이완샹에게 사막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자고 제안하고 친척이 준 양 한 마리를 팔아 나무 600그루를 사서 심기 시작합니다. 정말 누가 보면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묵묵히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고,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사막 1400만 평을 온갖 나무와 채소가 자라는 믿을 수 없는 생명과 기적의 땅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애 작가가 인워쩐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직접 책을 쓰고 다큐멘터리로 방송 제작까지 하면서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위쩐도 대단하지만 이걸 연구해서 책으로 엮고 다큐로 제작까지 한 이미애 작가도 참 대단한 분이시죠. 저는 이 책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어서 송구한 마음과 기대감이 겹쳐 단숨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가 그림처럼 펼쳐졌고, 인위쩐의 이야기가 제 앞에 영화처럼 한 장면 한 장면 펼쳐졌습니다. 저 역시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꽃밭을 여행했으면 사막으로 가라 / 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 / 꽃밭의 향기를 사막에 날리고 / 사막의 침묵을 꽃밭에 퍼뜨리라 / 꽃밭에는 사막의 별이 뜨고 / 사막에는 꽃밭의 꽃잎이 날리리니.” 그런데 저도 예장합동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사막으로 간 꽃밭여행자가 되어 공교회와 공적 사역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쁘기만 하였지 아무 흔적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만 같아 허전함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높은 탑을 쌓든지 넓은 도로를 내든지 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일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한국교회와 민족의 광야에 꽃씨를 심고 나무를 심는 사역을 해 왔습니다. 어쩌다 고향에 가면 어린시절에 거의 벌거숭이 산이었지만 지금은 울창한 무덤산을 보며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어린시절 벌거숭이 산에 식목일마다 나무를 심었는데 그때 심은 나무가 지금은 울창한 숲을 이루었거든요. 저 역시 인위쩐처럼 오늘도 사막에 나무를 심고 꽃씨를 심고 있습니다.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이 끝나도 저는 계속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십 수 년 전부터, 이슬람, 동성애, 종교인과세 문제를 대처하고, 한국교회 연합과 생태계 보호사역을 위해서 눈물로 씨를 뿌려왔습니다. 저는 이념적 세계관을 가지고 공적 사역을 해 온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적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이런 일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이 정도라도 한국교회를 지키고 건강한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무를 받기도 합니다. 코로나 이후에는 한국교회 예배 회복을 위해서 애간장이 타도록 전면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좀 더 온전한 예배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가시지 않아 잠 못 이루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절절포(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의 정신으로 사막에 꽃씨를 뿌릴 것입니다. 저의 시처럼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가 되어 방역에 힘쓰고 안전한 예배운동을 위해 앞장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사막으로 간 꽃밭여행자가 되어 꽃씨를 뿌리면 코로나19와 반달리즘이 쓸고 간 폐허 속에 예배 회복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모든 영역에 다시 새 풀이 돋고 꽃이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1-05-07
  • [시사칼럼]그 쇳물 쓰지 마라
    5월의 첫 날을 “메이 데이(May Day)”라고 부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이미지와 사뭇 다른 “근로자의 날”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곳곳의 오월에 안타까운 사연들이 꽃같이 피었습니다. 1993년 5월 10일 태국의 한 인형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188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작업능률과 도난방지를 위해 출입구를 막아놓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들을 추모하며 국제노동기구(ILO) 등이 제정한 날이 바로 “산업재해노동자의 날”(4월 28일)입니다. 한국은 올해 들어서야 이 날을 법정기념일에 포함하자는 발의가 나왔습니다. 2016년 5월 26일만 해도 서울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홀로 수리하던 약관의 청년이 사고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말입니다. 당시 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비용 절감을 위해 4-6명의 하청업체 직원에게 48개 역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2인 1조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를 조성하여 결국 어린 김 군이 홀로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월 국회환경노동위원회 산업재해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가 한 발언이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고 유형을 보니 실질적으로 작업자 행동에 의해 많이 발생했다.. (작업장의) 불완전 상태는 안전시설투자로 바꿀 수 있지만, (작업자들의) 불완전한 행동은 상당히 어렵다.” 동회사는 최근 5년 간 산업재해신청 현황 1위였고, 직전 대비 사고가 2.2배 증가했으며, 사업장 특별관리도 실시되었으나 개선된 부분이 없다는 지적 끝에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이를 옹호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산업안전관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들도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하는데, 호통만 치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의원들이 문제라는 식의 기사도 존재했습니다(조선, 2021.3.1). 하지만 동시에 “내 아들을 살려내라”며 울부짖는 어머니와 함께 젊은이를 사지로 내몬 기업과 환경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이 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하인리히(Herbert W. Heinrich)는 1931년「산업재해예방 : 과학적 접근」에서 “1: 29 : 300 법칙”이라는 유명한 이론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중상자 1명이 나왔다면 이미 그 이전에 경상자가 29명과 잠재적 상해자 300명 정도가 있었으리라는 추정입니다. 그러면서 재해가 일어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설정했는데(도미노 이론), 그 중에서도 불완전한 행동이 산업재해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80%). 그러나 1969년 버드(Frank Bird)는 170만 건의 사고를 분석한 뒤 하인리히 이론을 수정․보완한 신 도미노 이론을 내놓습니다. 그에 따르면 재해는 <관리감독의 부족, 기본원인, 직접원인, 사고, 재해>의 다섯 단계를 거치는데(New Domino Theory),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관리감독과 기본원인이며 따라서 이 둘에 주력해야 실질적으로 재해를 줄이고 예방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2020년 9월 가수 하림은 의미심장한 노래를 한 곡 발표했습니다.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제목을 가진 이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 쓰지 마라 자동차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마라...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찰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창문 곁에 세워두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 번 만져보게.” 다음은 하림 씨의 말입니다. “십 년 전 바로 오늘, 당진에서 스물 아홉 청년이 용광로에 추락해 사망했다... 그 후로 여태까지 위험한 상황은 사라지지 않아서, 요즘도 일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는다.” 2018년에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또 다른 이십 대 청년이 목숨을 잃자, 희생자 이름을 딴 법개정안(김용균법)까지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곳곳에 위험은 산재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동안 이러한 현실을 모른 척하고 살았을까요? 구약의 성전은 만군의 여호와를 모시는 신전치고는 너무 왜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성경은 곡식 떠는 소까지도 챙겨주라는 말씀을 남겼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1-05-07
  • [의학칼럼]다낭콩팥병 ‘물이 보약
    물혹을 발생시키고 성장시키는 주된 원인은 ‘바소프레신’이라는 호르몬으로 알려졌다. 바소프레신은 주로 우리 몸에 물이 부족할 때 뇌하수체에서 정상적으로 분비되어 체내에서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인체의 필수 호르몬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열심히 한 후 땀을 많이 흘리고 나면 갈증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소변이 진노랑색으로 나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체내의 수분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뇌하수체에서 바소프레신이 다량 분비되어 콩팥에서 수분의 배설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명이 유지되는데 필수적인 호르몬이 다낭콩팥병에서 물혹의 발생과 크기 증가의 핵심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낭콩팥병 환자에서 바조프레신이 적게 분비될수록 콩팥의 낭종 형성억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조프레신은 우리가 물을 지속적으로 마실 때 효과적으로 억제되기 때문이다. 다낭콩팥병 환자에서 물을 많이 마실 때 낭종의 성장이 억제가 되는지에 대하여 몇가지 연구에서 증명되었고, 현재 대규모 전향적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기다리는 동안 신장내과 전문의들은 다낭콩팥병 환자들에게 물을 많이 마시도록 권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을 마셔야 하나요? 라고 물어보실 것이다. 의학적으로 소변의 오스몰농도가 280mOsm/kg 이하로 유지하도록 권고되고 있다. 필자는 환자의 측면에서 소변색이 투명한 연노랑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물섭취를 하도록 권한다. 환자의 체격에 따라 마시는 물의 양이 차이가 나겠지만 대개는 2-3리터의 물을 하루 종일 골고루 나누어 섭취하도록 권한다. 다낭콩팥병 환자에서 요로결석의 유병률이 20%로 높기 때문에 콩팥내 결석이 있거나 요로결석의 경험이 있는 경우라면 수분섭취량을 확실히 늘릴 것을 권한다. 하지만 환자의 콩팥기능의 상태에 따라 이러한 지침도 조정이 필요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수분섭취량에 대해 주치의사와 상의하길 권한다. 갈증이 없는데 물마시기란 때로는 힘든 일이다. 다낭콩팥병 환자들에게 보약이 될 수 있는 하루 2-3리터의 물 마시기를 위해서는 물 마시는 시간을 정해놓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5-07
  • [은혜의 말씀]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14:6-15)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거의 마무리 지을 무렵 그들에게 중대한 한 과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정복지를 지파별로 분배하는 문제였습니다. 땅을 분배하는 그 긴장된 자리에 갈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수아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러면 내가 올라가서 그 땅을 정복하겠나이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모두들 ‘어떻게 하면 제비를 잘 뽑아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 가슴 졸이고 있던 상황에서 갈렙의 뜻밖의 폭탄선언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갈렙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런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1. 갈렙은 말씀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9절) 45년 전 가나안땅 정탐 때 “네가 밟는 땅은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는 날을 꿈꾸며 그 꿈에 취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입니다. 갈렙은 이 약속의 말씀 때문에 늙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을 받은 사람은 위기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말씀을 좇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안정적으로 쌓아놓은 삶의 기반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평생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붙들 수 있는 말씀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일생을 걸 수 있는 말씀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전진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갈렙은 도전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2절) 사실 갈렙은 헤브론 산지에 구태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밟는 땅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도전합니다. 모두가 꺼리는 곳 위험한 곳으로, 오직 하나님의 꿈을 위해서 헤브론 산지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이도 육체적 조건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한계가 한계가 되지 못합니다. 믿음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믿음으로 도전합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교회를 통해 아직 헤브론 같은 이 땅이, 여러분의 직장이, 여러분의 이웃이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도전에는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도전은 대가를 지불해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 땀도, 눈물도, 내 생명까지라도 주님께 드리기에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의 도전은 헌신이라는 희생을 통해 꽃 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헌신과 충성 땀과 눈물이 재료가 되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섬김과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날 것을 믿으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1-05-07
  • [목회자칼럼] 나는(담임목사로서) 왜 이럴까?
    3년 전 교회 뒤 언덕 틈 사이에 꽃을 심었는데 올해 봄에 보니 아름답게 피어 꽃이 만발이다. 얼마나 이쁜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꽃 옆에 있는 풀을 뽑고 있다. 왜 혼자냐구? 함께 할 다른 사람들은 없냐구? 물론 교회에 같이 풀을 뽑을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리고 작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풀 뽑는 것을 맡기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농촌에서 살아 본 경험이 없기에 풀을 뽑아라고 주문했더니,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꽃과 풀을 같이 뽑아놓은 것이 아닌가! 사실 꽃과 풀이 같이 어우러져서 뒤엉키듯 피어있으면 풀만 골라서 뽑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어떤 사람들 눈에는 풀이 꽃같고, 꽃이 풀같아서 분별하는 것부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혼자서 조용히 풀을 뽑았다. 아름다운 꽃 사이로 숨은 풀을 찾으며,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에 살아서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지 약간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쩌면 하나님도 나에게 일을 시킬 때 답답한 것이 너무 많지는 않을까, 돌아보게 되었다. 꽃과 풀을 구분 못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알곡과 쭉정이도 구분 못하고, 더 나아가 충성된 자와 아첨자를 구분 못하는 미련한 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아무리 넓은 들판이나 동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꽃과 풀을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인데 도시에 자란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 힘든가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내게 맡겨준 성도들 중에 충성된 자와 아첨자를 한 눈에 보면 아시는데,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게 참 쉽지가 않다. 사실 그렇다. 나에게 정말 충성된 마음으로 조언하는 성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아첨자들에 둘러 싸여 정말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이 된다. 특히, 우리 모두는 죄성을 갖고 있기에 목사도 성도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얻어 성실한 열매와 결과를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 나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모습을 가끔씩 나 스스로 발견하고는 마음을 다시 잡는다. 사람이 육체나 정신이 아플 때 흔히 그 통증을 멈추게 하기 위해 진통제를 찾는다. 견디기 힘든 아픔을 진통제 한 알로 멈출 수 있으니 편하면서 감사하다. 그러나 진통제의 뒷면에는 중독성이 있다. 순간의 통증을 잠재우기 위해 편한고 좋은 진통제를 수시로 복용하면 내 몸이 진통제에 중독돼, 진통제가 없으면 불안할 것이다. 내 삶이 곪아 가는 상처의 아픔을 잊을 수 있도록 돕는, 그래서 치료의 기회를 잊고 없애 버리는 중독성 강한 진통제를 내가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변화의 과정이 나 중심이 아닌 주님의 자녀, 성숙한 백성의 마음으로 가기가 참 쉽지 않다. 부목사 때는 담임목사가 너무 좋아 보이고, 빨리 되고 싶었는데 막상 담임목사의 자리에 앉고 보니 책임감과 부담감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이 책임감과 부담감을 조금 줄이려고 내 귀에 듣기 좋은 말, 빨리 한 알 먹으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정서적 진통제와 같은 소리들을 듣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개척 16년째로 접어들면서, 다시 내 안에 정직한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산 언덕에서 꽃과 풀을 잘 분별해서 찾아내듯 하나님이 담임목사인 내게 하시는 말씀, 내 안에 내가 하는 말들, 그리고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잘 분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나가는 사역에 다시 매진해야겠다. 이쯤되니 평생을 목회하며 은퇴하신 선배님들에게 존경심이 생긴다. 한결같이 목회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일평생을 살다가 영광스런 은퇴를 하신 선배 목사님들을 보며 이제야 후배 목사가 머리가 희어져 철이 좀 드는게 아닌가 싶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1-05-07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2
    전쟁기 부산을 거점으로 구호활동에 나선 대표적인 선교사는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 Adams, 1895-1965), 곧 안두화(安斗華) 목사였다. 초대 선교사이자 대구지방 첫 상주 선교사였던 안의와(James Edward Adams, 1867-1929) 목사의 장남인 그는 미국 캔사스에서 출생하였다. 그런데 그는 생후 3개월 때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왔고 부산에서 영아기를 보내고 1897년 2살 때 대구으로 이동하여 대구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중국 지푸(芝罘, Zhīfú, 지금은 옌타이 煙台)에 있는 선교사 학교에서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가 아버지처럼 매코믹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1년 제2대 선교사로 내한했다. 이때로부터 1963년 한국을 떠나기까지 42년간 한국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으나 1925년 대구지부로 이동하였고, 교회개척, 성경학교 운영 등을 관장하였고 후에는 계명기독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6.25 전쟁 중 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남아 있던 북장로교 선교부의 6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전쟁기 아동복리회(CCF)의 위원으로, 그리고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위원으로 활동했다. 운크라는 ‘유엔한국부흥위원단’으로 번역되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한국의 경제를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재건하기 위해 1950년 12월 국제연합 산하에 설립되었는데, 전쟁기간 동안에는 민간인에 대한 긴급구호에 집중했지만, 전쟁 후에는 산업․교통․통신시설의 사회기반산업의 복구와 주택․의료․교육 등 생활환경 개선에 주력하였다. 특히 그는 ‘기독교세계봉사회’(CWA: Church World Service) 한국 지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란 미국교회협의회(NCCUSA) 산하 구호조직으로서 해방 후 한국 지부가 설치되었고, 사회개발,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6. 25 전쟁 중에는 전쟁고아와 전쟁과부, 그리고 피난민 구호활동을 전개한 단체인데, 안두화는 한국 지부 책임자였다. 안두화는 기독교세계봉사회가 소유한 자원 중 부산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구호물자를 사용하여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구호물자는 밀과 밀가루, 콩과 같은 식량이었다. 그는 구호물자를 분배하기 전에 현지의 목사들과 기독교 신자들과 접촉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효율적인 물자 분배를 위한 인력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지역 주민들에 대한 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일단 군중이 모이면 구호요원들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식량과 쪽복음서나 신약성경을 제공했고, 비신자들에게는 식량과 기독교 안내서 혹은 교리서를 전달했다. 안두화 선교사는 구호사역이야말로 전쟁 중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구호물자 배부에 있어서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분배하는 원칙을 고수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베푸는 것은 불가피했다. 많은 미국의 교회들이나 독지가들이 기독교 공동체에게 지정기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두화 목사는 교회나 기독교기관에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는 구호품 나누어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고, 이런 구호활동은 정부나 유엔 기구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안두화 선교사는 식량이나 피복의 공급만이 아니라 피난민의 비상 대피를 위해서도 도움을 주었다. 이동 수단이 없던 피난민을 위해 지프차나 트럭과 같은 장비를 가지고 이동을 도와주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의 피난을 지원하였다. 전쟁 당시 피난민은 군인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다. 피난민 행렬에 적군이 숨어 있을 수 있었고, 난민들이 군인의 이동이나 군장비의 이동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작전이 우선이었음으로 피난민들은 귀찮은 존재였다. 이런 형국에서 선교사들이 피난민의 이동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안두화 선교사는 기독교세계봉사회 관할의 차량을 이용하여 난민들을 실어 날랐는데, 수일동안 야산에서 야영하던 약 1만명의 피난민을 부산근교의 난민 보호소로 이동시켜주었다고 한다. 부산은 난민들로 가득 찼고, 학교, 교회, 사찰, 백화점과 가게 등 모든 건물은 병원이나 막사 혹은 난민 켐프로 사용되었다. 안두화는 미국북장로교선교부에 피난민은 “파리 떼처럼 살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적절한 조치가 없다면 대규모의 전염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안두화 목사는 구호물자의 공급 외에도 난민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목사나 전도자를 난민켐프에 파송하고 남민 켐프에서 살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큰 텐트를 준비하여 임시 예배처로 사용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5-07
  • [성서연구]엘리사가 구한 것(열왕기하 2장 9절)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셨을 때, 모세와 함께 등장한 구약을 대표하는 영적 거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이 통치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북 왕국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가 극에 달했고,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이 의로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하던 무법천지의 나라였습니다. 엘리야는 흑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선지자들과 왕과 백성을 모아 거룩한 내기를 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써 참 하나님 되심이 드러났고,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게다가 엘리야는 에녹과 함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려 할 때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간 제자 엘리사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하늘로 올려지기 직전에 엘리야가 원하는 것을 물었을 때, 엘리사가 대답한 내용입니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 듣는 마음을 구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부귀영화가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듣는 마음,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 채워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왕이었기에 백성들의 말을 들어 분별하여 제대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옳은 것을 구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성령님의 갑절의 역사를 구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엘리사의 혜안을 봅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였습니다. 그것도 엘리야를 이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해야 했습니다. 우상으로 가득한 나라, 악한 왕들과 백성들 틈에서 영적 부흥의 기치를 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엘리사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부흥은 불가능함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소원에 응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진 후 엘리야에게 역사하던 성령님의 능력이 엘리사와 함께 했습니다. 엘리사가 겉옷을 말아 물을 칠 때 요단강이 갈라졌던 것처럼, 엘리사도 그렇게 하여 강을 건넜습니다.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한 것을 알았고, 엘리사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그후 엘리사는 악한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왕들도 의지하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 결과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한국교회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든 지 벌써 한 세대가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세의 감소와 사역의 위축이 뚜렷합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코너에 몰려 있고, 복음 증거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이라 포장된 교권 다툼과 분쟁이 너무도 심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보다는 세련된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써 온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신앙 경력이 오랜 가정에서 출생하여 뛰어난 학벌을 가지고, 다양한 달란트를 가진 인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심령을 깨뜨려 회개하게 할 영적 권능입니다. 세례 요한의 야성을 가진 영적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며 영적으로 충만한 거성들이 많았습니다. 학문이 부족하고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심령을 뒤흔드는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도원마다 사람들이 넘쳐났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엘리야에게, 엘리사에게 임했던 성령님의 역사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 모든 성도가 성령님의 역사를 사모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엘리사처럼 구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1-04-26
  • [서임중 칼럼]지도자의 언행
    인터넷에서 옮겨온 이야기다. 전직 대통령 중에 발음이 온전치 않은 분이 한 분 계셨다. 그 분에 관한 에피소드도 많이 알려졌다. 한번은 어느 도시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시를 유명한 강간(관광)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무장관이 깜짝 놀라 용어를 수정하여 말씀 드렸다. “각하, 강간 도시가 아니라 관광 도시입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애무(외무)장관은 씰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무(외무)나 잘 하세요.” 리더는 말과 행동이 명확해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우스갯소리다. 집사님 한 분이 질문을 하였다. “목사님의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통감의 리더십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입니까?”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과,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과, 작은 자를 주님처럼 보는 심안의 리더십입니다.” “어디에서 그 리더십을 정립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리더십에 근거한 것이죠.” “예수님의 복음적 리더십이 무엇입니까?” “이해, 관용, 용서, 사랑을 통한 섬김의 리더십이지요.” “그러면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적 리더십으로 다스려야죠.” “그러면 무조건 용서하고 감싸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잘못할 때는 권징의 징계 수단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럼 그 기준, 즉 사랑하고 징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슨 말이죠?” “분명히 우리가 보아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무질서하게 하고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문제 있는 사람인데 왜 목사님은 감싸고돌고,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이 없는데요?” “우리 교인 모두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 똑 같이 대답할 겁니다. 목사님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라 오랫동안 이 문제로 마음이 무거웠다. 강단에서는 서릿발 같은 말씀을 선포하면서 강단을 내려오면 그 서릿발은 봄눈 녹듯이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토록 베풀고 사랑했는데 배반으로 돌이킨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동행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언행(言行)!’ 참 어려운 말이다. 인간이란 어떤 사람을 무론하고 완벽한 도덕과 윤리적 삶을 사는 이가 없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으리라. 그러기에 도덕적, 윤리적 삶을 뛰어넘어 성경적 관점에서 어프로치 해야만 제대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성전에서 돈 바꾸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불호령으로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외치시며 그들을 몰아내시던 주님은 간음죄로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향하여 돌로 치라고 소리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는 ‘죄 없는 사람이 있다면 치라’고 하시면서 여인을 살려내셨다. 그 주님의 언행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규범윤리, 상황윤리를 넘어선 ‘생명윤리’다. 웃기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사건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2004년 11월 18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웃지 못 할 기사가 실렸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출판 한 저자 차 모씨가 구속 수감 된 이야기다. 차 씨는 경영컨설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남의 돈 18억을 빌려 쓰고 중국으로 도망을 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별 수 없이 귀국을 했다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쓰고 자기가 그 말대로 행한 웃기는 언행일치의 사건이다. 이런 상황을 보며 “진짜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당시 네티즌들이 댓글을 달았던 일화는 유명한 에피소드다.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희망찬 취임사를 연설했다. 그러나 현 상황은 취임사와는 정반대로 허전하고 허망하게 귀결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지도자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의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교회 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을 느낀다. 나의 약혼식과 결혼식은 고 김기수 목사님을 주례로 모셨다. 나 같이 별 볼 일없는 사람을 존귀하신 어른께서 주례해 주신 것이 감사하여 엎드려 큰절을 하면서 해마다 문안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때부터 어르신이 천국 가시기 전까지 우리부부는 한해도 빠지지 않고 33년 동안 결혼기념일이면 어르신을 찾아뵙고 축복기도 받는 것으로 결혼기념일을 대신했다. 목사로 안수 받던 날 눈물 콧물 쏟으며 서원했던 사례비의 3분의1은 헌금으로, 3분의1은 구제비로, 3분의 일은 생활비로 쓰겠다는 주님 앞에 드린 고백도 힘들 때가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 명예도, 온갖 자리매김의 영광도 내려놓고 조기 은퇴 후 때론 고달프기도 하지만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부흥사경회 말씀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과 감동은 고달픔도 다 잊게 하는 경험하는 자 만의 축복이다. 아름다움이란 억지로 다듬어 내면 식상하기 쉬운 법,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나 연기나 노래나 설교나 목회에서도 다를 바가 없음을 늘 느낀다. 평생 목회를 하면서 그것을 늘 마음에 담고 목회를 했고 은퇴 후 전국 각지로 말씀 사역을 다니면서는 그곳 성도들의 삶에서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무게가 아니다. 분량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순수함, 신선함, 건강함이 내재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근원에서 저절로 표출되는 하나님 마음이다. 삶이란 가꿈이다. 가꿈이란 낮아짐, 섬김, 베풂에서 자란다. 가장 힘든 언행의 가꿈도 할례 받은 입과 절제된 행동으로 요셉과 다윗 같은 Attitude, 즉 마음관리를 잘하면 더 없는 아름다운 자기 인생의 화원을 만들 수 있다. 언행의 가꿈은 일치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그러나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서 연주되는 언행을 일치로 가꾸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내 마음은 아름다운 화원이 된다. 그러므로 더더구나 지도자의 언행일치는 지고한 생명윤리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1-04-26
  • [시사칼럼]늑대는 혼자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브레흐만(L. Bregman)의 책『휴먼카인드(HUMANKIND)』의 한 대목입니다. “인터넷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우화 하나가 떠돌고 있는데, 단순하지만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다. 어떤 노인이 손자에게 이야기한다. ‘나의 내면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두 마리 늑대의 처절한 싸움이다. 하나는 분노에 차 있고 탐욕스러우며 질투가 심하고 교만하고 비겁하다. 다른 하나는 평화롭고 타인을 사랑하며 겸손하고 관대하며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다. 너의 내면에서도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잠시 뒤 손자가 '어느 쪽 늑대가 이기나요?' 묻자 노인은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안에서는 어떤 늑대가 자라고 있나요? 아마 전자라고 대답할 사람들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결론을 예상하면서 인용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생각보다 의외로 미담과 선행이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IMF 사태(1997) 때와 서해안 기름유출사건이 발생했을 때(2007)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나 할 것 없이 금을 내놓고, 시간과 땀방울을 아낌없이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2005년 미국 남부에 허리케인(Katrina)으로 인해 미시시피 강이 범람해서 대홍수가 났을 때 강으로 변해버린 도심 곳곳에 작은 함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구호품을 싣고 손수 보트나 작은 배들을 몰고 멀리 텍사스 같은 곳에서까지 사람들이 하나 둘 달려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더 심한 고비를 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도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연대(連帶)’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이른바 '제3의 권리'로서 바로 이 "연대의 권리"라는 신종 인권(人權)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장착한 인간이 쉽사리 연대할 수 있겠느냐는 비관적인 전망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인권이 아니라 시민권 차원에서도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려는 시도들이 속출합니다. 캐나다 정치철학자 킴릭카(Kymlika)는 ‘다문화시민권’ 이론을 내세운 바 있고(1995), 최근 들어와서는 ‘사이버시민권’과 함께 ‘지구시민권’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최 현,『인권』). 현재 인류 앞에 과거 여느 때와는 달리 국경을 넘어 인종을 초월해서 함께 하지 않으면 감히 맞서기 힘든 상황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비드19와 미얀마 쿠데타 혹은 일본의 방사능오염수 배출 시도와 같은 거시적인 사태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연대하여 고난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인 분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이제 2kg 몸무게에 겨우 산소마스크를 뗀 어느 선교사님의 조산한 아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아픔 속에서 지금도 흐느끼고 있는 어머니, 남편을 잃고 성치 않는 아기를 데리고 낯선 하늘 아래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주민 모자(母子)... 이들에게는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과 보살핌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어찌 이들뿐이겠습니까? 우리 서로에게도 따뜻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독일 동물학자 에릭 지멘 박사는 늑대의 새로운 면모를 소개합니다. “늑대는 보통 10마리 이상 무리 생활을 한다. 한 번 짝을 맺으면 평생을 같이 한다. 어미뿐만 아니라 다른 늑대들도 새끼들을 함께 돌보며, 행군할 때도 병든 동료를 돌보며 함께 간다.” 사실 외톨이늑대는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늑대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 돌보고 함께 견디며 연대하는 선한 시민 선한 인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1-04-2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