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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여호수아의 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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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바라보는 것이다.
찬송가 중에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 라는 가사가 있다.
신앙생활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봄의 법칙이 있다. 본때가 생기는 것이다.
성경 인물 중에서 여호수아는 연구 대상이다.
여호수아는 “구원하다”는 뜻으로 예수님과 이름이 같다.
여호수아의 시대는 오늘처럼 격동의 세월이었다. 여호수아의 사역은 광폭이 엄청나다. 한마디로 여호수아는 출애굽 역사와 가나안 정복 역사를 연결하는 결정적인 인물이다.
여호수아의 시대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그 땅에서 한 사람을 들어쓰신다.
모세가 죽은 후 도래한 여호수아 시대는 큰 위기요, 역사의 전환점을 이룬 때이다.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설명할 수가 없을 만큼 위대한 지도자가 모세인데 그가 죽은 후에 가차없이 여호수아 시대가 펼쳐졌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이 위기의 때를 살리고 광야의 방황하던 40년 역사를 종식시키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뉴 리더십이 여호수아이다.
만사가 때가 있고 기한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여호수아는 이미 노인이었다. 인생 후반전도 끝나가는 인저리타임 정도였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고비를 넘기고 이 때를 살리는데에 여호수아를 오랫동안 준비시키셨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지금은 엘리야때처럼? 지금은 모세의 때처럼? 지금은 다윗의 때처럼? 그렇게 여호수아의 때를 맞추셨다.
믿음이 자라나듯이, 은혜가 내려와 고이듯이, 성령이 임하고 머물 듯이 리더십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지고 세워지는 것이다.
모세의 수종자였던 만년 2인자에서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마치 학생이 선생이 되고, 주일학교를 담당하던 전도사가 담임 목사가 되듯이, 들판에서 양치기하던 청년 다윗이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듯이, 운동 선수가 코치가 되고 감독이 되듯이 모세 사후 대혼란기, 리더십의 진공상태가 되었을 때 마치 이때를 위하여 차곡차곡 준비한 듯이 여호수아가 쓰임 받는다.
종의 근성을 가지고 평생을 굴종하며 살아가기가 쉬운데 여호수아는 현장, 전쟁터에서 활동하던 군인에서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의 반열에 우뚝 올라섰다. 오랜 세월 하나님의 커리큘럼에 따라 잘 준비된, 버릴게 하나도 없는 그 시대의 맞춤형 지도자가 되었다.
여호수의아 사역
여호수아는 지난 시절 모세의 수종자로 청춘을 소모해버린 것 같았지만 그 어려운 시절이 나중에는 추억의 계절, 화려한 시절이 되었다. 젊은 날 하드 트레이닝, 파워 프로그램의 준비과정이 복된 시간이 되었다.
작은 경험들이 쌓여서 노하우가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원망하거나 시대를 탓하지 않고 사도바울처럼 족한 줄을 알고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이 되었다. 수종자로서 평생을 종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늙어 갈수도 있다.
흉보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모세를 적폐대상으로 생각한다거나 모세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시샘을 하면서 모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자연스럽게 모세 사역에 완성자가 되었다. 역사는 돌발 변수가 많고 예측불허의 상황들이 속출하지만 여호수아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놀라지 않았고 담대하게 돌파구를 찾아 나갔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점점 겁이 많아지고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에 빠지기 쉽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하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가나안 정복 역사를 펼쳐나갔다. 모세 장례식을 치르며 죽은 사역을 하고 권한 대행 노릇이나 하는 임시방편이요 일회용 반창고 같은 땜방이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모세의 뒤를 이어 완숙한 지도자가 되었다. 시키는 일만 하던 사람이 이제는 나라와 민족을 지도하는 일을 하며 시킬줄 아는 자가 되었다.
여호수아의 연골
건강에서 나이가 들수록 중요한 것이 연골이다. 연골이 나빠지면 운동, 여행을 할 수 없고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도 없게 된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연골이 발달되었다. 모세가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에게 바통 터치가 되었다. 계주에서 주자는 바뀌어도 바통은 그대로 전달이 되어야 된다. 연결이 중요하다. 다윗에게 솔로몬, 엘리야에게 엘리사, 바울에게 디모데가 연결되듯이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고 어려움 당한자의 중보기도자가 되고 연약한 자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된다.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에 여호수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균형 감각을 잡았다. 이편, 저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굳게 서서 요동치 않았던 것이다. 모세 사후에 비교 불가한 대안이 되고 대체 불가한 대체가 되었다. 모세가 건너지 못한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모세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여호수아는 새 시대에 새 역사를 만들어 가는 새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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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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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기독교세계봉사회와 아펜젤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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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외원기관들이 우리나라를 원조하기 시작했다. 여러 외원 기관 중 기독교계가 절대적 다수를 차지했고 대표적인 기독교계 구호 단체가 기독교아동복리회(CCF, Christian Children's Fund), 선명회(World Vision), 홀트아동복지회, 컴페이숀(Compassion),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 Mennonite Central Committee), 기독교세계봉사회(CWS: Church World Service) 등이었다. 앞의 4단체는 주로 고아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나머지 단체는 전 계층의 극빈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여러 구호단체가 부산에 본부를 두고 구호 사역을 감당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단체가 기독교세계봉사회(CWS)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2차 대전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과 유럽의 국가들을 돕기 위한 목적에서 1946년 북미외국선교협회, 미국연방기독교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 미국위원회 등 3개 단체가 공동으로 설립한 구호단체였다. 이 단체는 미국 개신교회의 구호활동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기구였는데, 1951~63년에 미국교회협의회(NCC)의 한 부서였다가, 1964년부터 독립한 범세계적 구제 및 재활단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지회가 설립된 때는 1949년 4월이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한국 지부가 조직되기 전부터 활동했는데, 첫 책임자는 감리교의 빌링스(Bliss Billings, 변영서)였다. 그 후에는 대구의 동산병원 원장을 역임했던 플레처(A.G. Fletcher) 의사였다. 그 이후 한국지부가가 조직되면서 구호 사역을 관장하도록 미국교회연합회(NCC)에 의해 파송된 인물이 아펜젤러 박사였다. 1889년 11월 6일 정동에서 감리교 초대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장남이자 둘째로 출생한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89-1953)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미국으로 가 프린스톤대학교(1911), 드루신학교(1915)를 졸업하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고(MA, 1917) 목사안수를 받고 그해에 제2대 선교사로 내한하여 인천 지방에서 활동했다. 1920년부터 1940년 한국을 떠나기까지는 선친이 설립한 배재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1940년 일제 의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LA의 감리교회 목사로 봉사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기독교세계봉사회 책임자로 미국교회 연합회의 파송으로 1950년 다시 내한하게 된 것이다. 그는 피난지 부산을 거점으로 미국본부뿐만이 아니라 우방각국의 봉사기관과 협조하면서 지원물자를 공급받아 전쟁이재민들에게 식량·분유·의복·담요 등 생활필수품을 지원하는 일을 주관했다. 이 일은 전쟁 이후까지 계속되어 휴전 후에는 고아원·양로원·신체장애자 재활센터 등 사회복지시설을 지원하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한국지회가 조직되기 이전인 1947년부터 1955년 어간에 한국을 위해 1억 달러의 현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외원기관의 전체 후원금은 31억 달러에 달해 외원기관이 ‘제2의 보사부’로 불릴 정도였는데, 기독교세계 봉사회가 상당 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는 부산을 거점으로 피난민과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동분서주했다. 그는 1953년 11월까지 3년 동안 구호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다가 백혈구 부족으로 쓰러져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가 계속 치료를 받았으나 1953년 12월 1일 뉴욕의 감리교 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만 64세 때였다. “나의 뼈는 나의 고국이요, 사랑인 한국 땅에 묻어 달라.”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한국선교사 출신이자 고인의 동료였던 전선(全善, Anders Kristian Jensen, 1897-1956) 목사의 사회로 엄수되었다. 젠센은 1927년 내한하여 선교사로 활동했고, 6.25 전쟁 중에는 개성에서 중공군의 포로로 억류생활하다 석방된 인물이었다. 미국기독교연합회는 한국기독교연합회에 이렇게 통보했다. “한국에서 출생하고 65평생을 한국, 한국민, 한국교회를 위해 가장 선한 친구로, 가장 착한 지도자로, 가장 귀한 목자로 봉사하던 고 아펜젤러 박사의 최후를 영결하기 위한 장례식은 12월 2일 수요일 오후 미국 뉴욕 시내 감리교회에서 부인과 아들, 그의 형제인 두 아펜젤러 박사와 한국인 교우와 한국관계자들과 미국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서 젠센 박사의 사회로 엄숙히 집례되었다. 특히 웰치 감독과 베커 감독이 장례식 집례를 보좌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골은 젠센 선교사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4년 4월 20일 오후 2시 정동감리교회에서 배재학교와 기독교세계봉사회 공동 주최의 이장예배가 엄숙히 거행되었고, 유해는 그의 부모와 누나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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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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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안구건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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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건조증이란?
안구건조증이란 눈물이 부족하거나, 눈물이 지나치게 증발하거나, 눈물 구성성분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안구 표면이 손상되고 눈이 시리고 자극감, 이물감, 건조감 등의 자극 증상을 느끼게 디는 눈의 질환을 말합니다.
보통은 기후적 특성상 대기가 건조한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지만, 최근에는 미세먼지의 영향과 선풍기, 에어컨 바람등의 영향으로 4계절 내내 환자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구건조증의 증상은 어떻습니까?
눈이 뻑뻑해지고 이물감이 느껴지거나 눈 안쪽이 살짝 가렵거나 혹은 따가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눈꺼풀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빨갛게 충혈이 되기도 합니다. 시야가 살짝 흐려지거나 평상시보다 빛이 눈부셔 보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건조감이 며칠간 지속된다면 안과에 오셔서 진단을 받으셔야 합니다.
■안구건조증의 원인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원인을 크게 나누면 눈물이 적게 나오는 경우와 눈물이 빨리 증발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눈물이 적게 나오는 경우는 노화, 자가면역질환등으로 눈물샘의 기능이 저하되는 것이 있고 눈물이 빨리 증발하는 경우로는 컴퓨터를 많이하거나 스마트폰을 많이 해서 집중하게 되면 정상적인 눈 깜박임을 하지 않고 오래 뜨고 있기 때문에 증발되어서 건조증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마이봄샘질환인 눈꺼풀염증질환에서 눈물의 지방층을 유지 해주지 못해 안구건조증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안구건조증을 방치할 경우 다른 안과질환으로 발생할 수 있나요?
안구건조증을 방치할 경우 각결막염이나 안검염으로 진행되어 만성화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안구건조증이라는 용어보다 건조 각결막염이라고도 하자는 안과학회 차원의 논의가 있습니다. 단순히 건조로만 보기에는 만성화되어 잘 낫지 않는 난치성질환이 될 수 있다고 생각 됩니다. 다른 안질화과 증상도 유사하여 감별하기 곤란하므로 병원에 방문하여 진단을 받는게 좋겠습니다. 특히 백내장과 녹내장등도 눈이 뻑뻑해지거나 이물감을 느끼기 때문에 주의해야겠습니다.
■안구건조증은 어떻게 검사하나요?
안과에 방문하게되면 우선 증상에 대한 진료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양상으로 증상이 나타나고 불편한 지, 생활방식이나 컴퓨터 사용시간 및 스마트폰 사용시간, 면역질환이나 전신질환이 있는지 복용하는 약제가 있는지도 물어보게 됩니다.
눈의 건조상태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눈물띠의 두께, 눈물 분비량, 눈물이 증발하는 시간, 눈의 충혈, 염증 유무와 눈꺼풀테의 염증 유무가 중요한 검사입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복잡한 검사를 단순화해서 수치로 보여주는 검사장비들이 많이 도입되어 안구건조증의 진단, 치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물층 중 지질층에 대한 검사 및 치료를 하는 장비가 병원마다 도입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위에 안구건조증으로 진단받고 인공누액을 넣으시는 분들이 많던데요, 치료법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인공눈물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증상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인공눈믈은 눈물을 보충하는 역할이지 눈물의 분비를 촉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검사를 통하여 전문의의 처방을 받아야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건조의 원인에 따라 눈물이 부족하다면 인공눈물을 보충해줘야 하고 눈물의 생성을 촉진하고 염증을 조절하기 위해 건조치료제를 사용해야 할 수 있고 심한 경우 안연고를 사용하거나 눈물의 배출을 막고자 눈물이 배출되는 눈물점을 플러그로 막기도 합니다.
그 외 지방층을 생성하는 마이봄샘의 치료를 위해 온찜질을 하고 마이봄샘 입구를 청소하기 위해 짜주거나 안검 마사지등도 시행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병원뿐만 아니라 집에서 직접 홈케어를 할 수 있도록 온열 마사지기구나 세척액이 나와있으므로 병행한다면 치료가 효과적일 것입니다.
■안구건조증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 안건강에 신경을 써야겠지요. 영양공급을 위해 식품을 가려서 섭취하고 눈을 혹사시키지 않는 생활습관이 중요하겠습니다.
눈을 청결한 상태로 유지하여 염증이 생기는 것을 차단하고 가습기를 사용하여 습도를 올리거나 온열기구의 사용을 줄여 실내온도를 낮추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무엇보다 장시간 독서나 TV 시청,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오랜 사용 및 청소년들의 경우 장시간 게임등은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으니 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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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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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를살린다] “온도차를 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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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이나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문제에 대하여 나와 타인 또는 이편과 저편의 견해가 다르거나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인식의 차이가 있을 때 흔히 “온도차가 난다” 또는 “온도차가 심하다”라는 말을 쓴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느끼는 온도차는 개신교에 대한 우리 내부와 외부의 견해차이다. 어느 교단 신문에서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보니 그러한 생각이 더 들었다. 이 설문조사에서 특히 ‘개신교를 신뢰한다’라는 항목이 눈에 띄었다. 이에 대해 개신교인 스스로는 71.2%가 긍정적이라고 대답하였지만, 타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은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대답이 고작 5% 미만에 그쳤다는 사실이다. 개신교인인 우리와 비개신교인들 사이에 온도차가 너무나 심하게 나는 지점이다. 실제로 명절을 앞두고 한 성도님이 고향에서 받았다는 전화 한 통에 참 만감이 교차했다. 한 고향 이웃이 형님에게 “당신 동생, 교회 다니니까 고향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 사회적 기피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시점에 우리는 심각한 자성과 자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동안 교회 안의 우리들이 안일한 자세로 이만하면 좋다는 식의 생각으로 안주해오는 동안 교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점점 더 위태롭고 불안해진 것은 아닐까?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던 시대가 지나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와 버렸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요즘이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 커져버린 이 온도차를 줄이고 대사회적인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어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학교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지면에서 왜 교회와 개신교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는 것인가 의아해 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의 신앙공동체와 교회학교는 전혀 동떨어진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갈라설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교회학교와 교회, 성인세대와 다음세대는 모두 신앙인으로서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코로나19로 인해 그리고 한국교회 내부의 문제들과 외부의 문제들로 인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다음세대들은 스스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잃거나 교회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과연 교회와 교회학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기독교교육계에서는 이러한 교회와 사회 사이의 인식의 갭을 줄이고, 교회가 사회와 인류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까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있어왔고, 특히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논의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문제이자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사명에 관한 것이다. 요즘 신학계와 기독교교육학 영역에서는 이러한 연구를 공적신학, 공적실천신학이라는 타이틀로 많이 하고 있다. 신앙인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생활을 잘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 속에서 함께 공존하며 타인과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는 일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예전에 교회가 구원의 방주로서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선교의 사명을 다하여 교회 안으로 불러오는 역할을 강조했었다면 이제는 세상 속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구조선이 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아픔을 감싸 안아주는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널리 빛과 소금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문제가 신앙교육에서 강조가 되었다. 코로나19라는 전무후무한 비상상황을 맞이하여 세상은 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이제는 교회와 교회학교가 이 난관 앞에서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세상을 도와야 하는가가 곧 기독교교육, 신앙교육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오늘날 온 국민이 바이러스의 재 확산을 온몸으로 막기 위해 어떤 이는 현장에서 또 어떤 이는 집안에서 머물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없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들에게 교회와 신앙인들이 희망과 용기, 기쁨의 메시지가 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랑의 인내와 수고를 배우고 실천하는 도전이 필요하다. 우리가 때로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받는 억울한 일이나 부담스럽고 힘든 일도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다음세대들도 우리의 뒤를 따라 아주 조금씩이지만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느리지만 강력한 “다음세대를 위한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교육과정”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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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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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피난지 부산에서 순직한 원한경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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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경(H. H. Underwood, 1890-1951)은 언더우드 가의 제2대 선교사였다. 초대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원두우(元杜宇)라는 한국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1885년 4월 5일 내한하여 31년간 조선을 위해 봉사하고, 예기치 못한 발진티푸스의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뉴 저지주 에틀랜틱시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로부터 83년이 지난 1999년 7월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외국인묘지로 이장되었다. 원두우 선교사의 독자가 원한경인데, 1890년 9월 22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한국에서 중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그는 16세가 되던 해 한국을 떠나 프랑스, 스위스 등지에서 1년간 수학하고 미국으로 가 아버지가 공부한 뉴욕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선교사의 길을 다짐하고 22세가 되던 1912년 9월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다. 처음에는 경신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으나, 연희전문학교가 개교하는 1915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가르쳤다. 1916년 부친 사망 시 미국으로 가 교육학을 더 공부하고 1917년 내한한 그는 연희전문학교 전임교수로 영어 철학 교육학 심리학 등을 가르쳤고, 191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의 행정과 운영을 맡기도 했고, 1934년 10월부터는 이 학교 3대 교장으로 봉사했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가 뉴욕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1924.6) 받았고, 이어 1925년 6월에는 Modern Education in Korea 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후에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10일 간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고,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는데 결국 강제 추방되었다.
해방을 맞게 되자 1945년 9월 미육군성 관할 하의 한국어 통역관으로 임명받아 다시 내한하였고, 곧 미군정장관 아놀드 중장의 통역 및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8월에는 연희대학 명예총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에는 미군정청 교육부장관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나 7개월 후에는 군정 업무를 마감하고 연희대학으로 복귀했다. 그의 주된 업무는 연희대학의 복구와 확장 그리고 재정 동원 및 대외 관계였다. 당시 총장이 백낙준 박사였다. 얼마 후 불행한 일을 겪게 되는데 1949년 3월 17일 그의 아내 에델 반 와그너(Ethel van Wagoner, 1888-1949)는 다섯 명의 좌익청년들에 의해 피살된다. 4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원일한 박사였다. 새문안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는데, 교회 찬양대 지휘자 이창식 교수의 지휘로 ‘만세반석 열리니’를 부르고 이어 ‘할렐루야’를 노랬는데, 장례식에서 할렐루야를 부른 것이 이 때가 한국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부인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5월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부인의 죽음을 심각하게 여겼고 이때부터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6.25 동란이 발발했다. 미국에서 전쟁 소식을 들은 그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한국의 비극과 믿음’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리고 한국을 지원해 주도록 백망으로 노력했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심리전 G-2’의 민간고문자격으로 일했다. 이 때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부산으로 피난을 권했다. 그래서 원한경은 부산으로 와 동래에 머물게 되었다. 그의 장남 원일한은 부산에 있는 해군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막내 원득한은 미육군 소위로 부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때로 뒷산 금정산을 오르기도 했으나 심장병으로 고생했다. 심장마비가 오는 일도 있었는데, 1951년 2월 20일 그날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원한경 박사는 그날 오후 7시 45분, 61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사망했다. ‘조선의 선박’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그는 사망 직전 까지 이순신에 대한전기를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생을 우리나라 교육계와 종교계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을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많은 공헌을 한 문화계의 대은인인 연희대학 명예총장 원한경 박사는 20일 하오 7시 40분 산동여관에서 61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서거하였다. 특히 박사는 한국을 제 2의 고향이라고 늘 말해 왔으며 한국을 이해하기가 한국인 이상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2월 26일 오후 2시 부산역전의 미국인교회(Base Chapel, 전 부산시 공회당)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 미8군 사령관과 유엔군 장교들, 미국대사와 해외 공관장들, 한국교회 대표들이 참석했다. 장례식은 아펜셀라의 사회로 거행되었고, 공무로 제주도에서 비보를 듣고 달려온 백낙준 박사가 영결사를 했다. 전쟁 중이라 원한경 박사는 부산 대연동의 유엔 묘지에 묻혔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56년 양화진 외국인 묘지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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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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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상처를 영광으로(창 50: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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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약의 요셉일 것입니다.
요셉은 형님들에게 버림받고, 낯선 땅 애굽에 노예로 끌려갔고, 애굽에서 죽도록 충성했던 주인집에서 오히려 모함으로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상처를 결국 영광으로 바꿉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험난한 인생길에서 알게 모르게 허다한 상처를 입고 살아가지만, 만일 그 상처를 영광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가 입은 상처는 결코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와 이웃을 원망하지 전에 우리에게 다가온 감당 못할 상처를 오히려 영광으로 바꾸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롬8:28)
요셉은 어떻게 이 깊은 상처를 극복했을까요? 자기의 형님들 열 명이 작당하여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옷을 벗겨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나중엔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리는 상처를 당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도 못보고 고향에서 멀리 잡혀 갑니다. 손발이 묶인 채 피 눈물을 흘리며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통곡해도 안 되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꿈>을 굳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됨을 믿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반드시 선이 이루어진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2. 상처는 축복의 지름길이 됨을 믿으십시오
고난이 요셉에게 준 것은, 손해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익이 되고 축복의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고난은 내가 아무리 힘써도 안 될 <꿈을 이루는 지름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셉에게 상처는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굽의 감옥에 들어가서 왕의 신복들의 꿈을 잘 해몽해 주었기 때문에, 나중 애굽 바로왕의 꿈을 해몽해주고 애굽의 살길을 지혜로 가르쳐 줌으로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까지 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시119:71) 상처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지혜를 열어주는 기회입니다.
3. 상처는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자산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의 상처(가시)가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자산이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12:7-10) 요셉은 평생 교만하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자기의 상처를 통해 하나님이 높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결코 우리에게 손해만은 아닙니다. 상처를 통해 영광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는 길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경 속에 있고, 역사 속에 있고, 오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 이웃 상처 입은 영혼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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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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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나는 반대합니다(I dis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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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 나는 반대한다>라는 작품이었는데, 전자는 실명(實名)이고 후자는 반대 의견의 명구(名句)입니다. 지난 9월 18일 바로 그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Ruth Bader Ginsberg)” 미국연방대법원판사가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RBG, 애칭)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 행렬이 법원 앞에서 끊어지질 않고 있다 하니 놀랍습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 또한 그녀는 “정의의 챔피언”이라며 추모해마지 않았습니다. 한국 인터넷 상에서도 누군가가 이렇게 썼습니다. “아메리칸 포청천, 긴스버그의 명복을 빕니다.”(9***) 하버드와 콜롬비아를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펌조차 들어갈 수 없었던 자신의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일평생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를 위해 제도권을 향해 “나는 반대합니다”라고 외쳤던 그 숭고한 정신과 지치지 않는 열정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존경합니다.
긴스버그의 두 살 연상 ‘찰스 척 핀니(Charles Francis Chuck Feeney)’ 역시 최근 세계적인 유명세를 탔습니다. 공항면세점 사업으로 이룩한 엄청난 부를 모두 기부했기 때문입니다. 9월 14일 개인자선재단(Atlantic Philanthropies)을 해체하면서 모교(코넬)를 포함한 교육 부분에 37억 달러, 사형제 폐지를 비롯한 인권과 사회 변화에 8억 7천 만 달러, 건강관리 분야에 7억 달러 등을 출연(出捐)함으로 그는 노후 자금 200만 달러를 제외하고는 재산 80억 달러(9조 4천 억) 전액을 공언한 대로 사회에 환원하고 말았습니다. 기부왕으로 알려진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그가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후 남긴 말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해 보십시오, 정말 좋습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진 않지만 배후에 깔린 강력한 문구 하나를 발견합니다. ‘나는 반대합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환상을, 재산을 우상처럼 섬기는 정신을, 물질본위사회를, 나는 반대합니다.’ 마침 그의 이름은 부흥과 개혁을 주창했던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닮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한 주가 흐르는데 “녹초 라떼 새만금, 4대강과 쌍둥이”라는 묘한 제목의 기사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CBS). 이제는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해진 최병성 목사가 새만금에 방문해서 드론을 띄어 찍은 사진을 첨부하며 “비참한” 심정으로 쓴 글입니다. 극명하게 달라 보이는 방조제 안팎의 두 물 색깔과 사뭇 다른 물가 풍경이 침묵 가운데 많은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 목사만큼 ‘나는 반대합니다’가 어울리는 인물도 드물지 싶습니다. 영월 서강에 추진하던 쓰레기장 매립지를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결국『강은 살아있다: 4대강 사업의 진실과 거짓』을 출간하기에 이르렀고, ‘쓰레기 시멘트’ 문제를 부각시키다가 인터넷 검열의 위헌성 여부를 밝혀내고 최근에는 초등학교 앞 난개발을 반대하다가 소송에 휘말려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고독한 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을 서강에서 배웠습니다. 여울을 보며 피라미를 보며...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거지요.”(빛과 소금, 2016. 6)
‘나는 반대합니다’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반대인지, 그리고 그러한 반대를 향한 대응 방식이 중요합니다. 긴스버그는 평등과 소수자 보호라는 법의 대의에 기초하여 반대 의 견을 냈습니다. 찰리 척 핀니는 교육, 보건, 인권 등 공적가치를 위해 개인자본맹신주의를 향한 반대의 충격파를 쏘았습니다. 최병성 목사는 환경이라는 대체비교불가한 피조세계를 위해 때론 바보처럼 반대의 몸짓을 날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반대하고 있습니까? 그 반대는 무엇을 위한 반대입니까? 한편 한 사회의 성숙도는 반대의 목소리를 어떻게 경청하고 다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는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들을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다루어 왔습니까? 반대하는 의견이 조금이라도 양심과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반대하는 자유가 있습니까? 반대하는 자들을 향한 관용이 있습니까? 합리적인 대화와 진지한 토론은 가능합니까? 반대에 따른 보복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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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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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저는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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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종, 목사입니다. 누가 아무리 저에게 돌을 던진다 할지라도 저는 목사입니다. 물론 저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코로나 시대 속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는지, 우리 목사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는지...” 그러나 목사가 목사를 공격하고, 성도가 목사를 공격하고 교회가 사회를 공격하고 사회가 교회를 공격하는 이 야만의 시대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저는 목사였습니다.
저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를 다니겠다고 생각을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교회를 다닌 후에도 목사가 되겠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불가항력적인 소명을 받아 신학교에 간다고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죽했으면 그 차가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내쫓김을 받아야 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오직 주님 한 분 바라보며 선지동산의 문을 두드렸고 온갖 모진 고생과 어려움 속에서 고학을 하며 오늘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직 주님, 오직 교회를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된 행복감에 젖어 주님을 태우는 군마가 되어 말갈기를 휘날리며 거친 광야를 달리고 삭막한 황야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지난주간에는 주님 앞에 엎드려 이런 기도를 드려보았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목사로서의 행복감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어찌하여 목사라는 이름이 이렇게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단 말입니까? 교회라는 이름이 이렇게 부끄러운 이름이 되어버리고 말았단 말입니까? 휘몰아치는 잔인한 폭거와 비난의 화살 앞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주님의 종으로서 초라하게 느껴진단 말입니까?”
저는 이런 기도를 드리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에서 쫓겨나며 흘렸던 그때의 눈물보다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고 교회의 영광성과 거룩성이 훼손당하는 현실 앞에 너무 송구하고 죄송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울다가, 다시 생각해 보며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그래도 주님이 불러주셔서 세우신 당신의 종입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가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공격을 받는다 할지라도, 저 땅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또 밟혀 누더기가 된다 할지라도, 저는 당당하게 목사라는 이름을 다시 둘러 입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여도, 그러나 다시 일어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겠습니다. 왜냐면 주님, 저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자 해서 목사가 되었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목사라는 직분을 버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이 저를 거부할 수 없도록 불러주셔서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교회를 지키며 세우는 목사가 되게 하셨기에 저는 이 이름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소명의 옷을 입혀주신 그 이름을 제가 어찌 부끄럽다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에게 다시 한 번만 힘을 주옵소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무너져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이 시대의 진정한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전 사회가 셧 다운 되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잔인한 말들과 야만의 폭거가 소용돌이치는 이 혼돈의 시대 속에서도, 목사의 말과 순명을 지키며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아니, 목사라는 이름이 다시 숭고하고 교회가 존엄하고 거룩하다 불리워질 날을 위하여, 저의 마지막 땀과 눈물과 혼을 바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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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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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하나님의 손길은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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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이 제일 먼저 받는 훈련은 제식훈련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식훈련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총검술 훈련도 받고, 사격 훈련, 유격 훈련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훈련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오락과 휴가도 있습니다. 훈련병을 이렇게 다양하게 다루는 한 가지 목적은 용맹한 정예군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통해 다양한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우리를 연단하시는 단 한 가지 목적은 우리를 충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가 교훈하는 것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결코 고난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갑니다. 땅을 개간하여 고르게 합니다. 그러나 농부는 언제까지나 이 일만을 하지는 않습니다. 땅을 다 고른 후에는 씨를 심습니다. 파종이 끝난 씨는 잘 자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추수를 하게 되고, 그 후에는 타작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의 첫째 교훈은 농부가 밭을 갈기만 하지 않고 파종도 하고, 시간이 가면 추수하여 타작하듯이, 하나님도 일련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연단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다양한 손길에 의해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안하지만, 어떤 때는 재앙을 만납니다. 그 반대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제까지라도 재앙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들에게도 재앙이란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금 평안한 사람은 시련도 각오해야 하며, 지금 시련을 만난 사람은 평안도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나라나 개인에 대하여 다양한 계획으로 채워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과정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둘째 교훈은 우리 각자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파종할 때도 곡식 종류에 따라 심는 법이 다릅니다. 소회향, 대회향은 뿌립니다. 소맥은 줄줄이 심습니다. 대맥은 정한 곳에 심고, 귀리는 그 가장자리에 심습니다. 타작 방법 또한 다릅니다. 소회향은 막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부숩니다. 곡식은 수레바퀴와 말굽을 사용해서 부셔지지는 않을 정도로 타작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이 각기 다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복음으로 인해 투옥되었을 때, 야고보는 순교한 반면,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옥에서 풀려났습니다(행 12장).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나라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처럼 되지 않는다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교훈은 이런 다양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목적은 그들의 성숙과 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농부의 다양한 농사 과정의 목적이 풍성한 추수에 있듯이, 하나님도 이런 다양한 방법(평안과 재앙을 통한 연단)을 통해 유다 백성을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를 주실 줄 믿고 평안과 시련의 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의 어려움과 정치, 경제, 사회적 시련에 처해 있습니다. 시련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도 시련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시련 속에서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성숙과 부흥에 있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거두시는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오늘의 난국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련이 있으면, 코로나로부터의 회복과 축복도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힘내서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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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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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우리의 기준, 하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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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했습니다. 애국가와 교가를 불렀고,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들었습니다. 조회를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는데, 가장 가운데, 혹은 오른쪽 끝 맨 앞 학생이 손을 들고 <기준!>이라고 외치면, 그 학생을 기준으로 일정 간격을 벌려 줄을 섭니다.
인생에도 기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소설 <성의>의 작가인 <로이드 C. 더글라스, 1877-1951>가 학생 기숙사에 살 때, 아래층에 은퇴한 음악교수가 살았습니다. 그 교수는 휠체어를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침에 인사를 나눌 때마다 휠체어를 두드리면서 <기본음은 도야!>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기본음은 도야. 위층 테너는 소리가 쳐지고, 건너편 피아니스트의 피아노는 조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어제도 기본음은 도고, 오늘도 그렇고, 천 년 후에도 기본음은 도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도에게 기본음 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본음을 잘 알고 살았던 모델을 시편 1편에서 만납니다.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본문 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그에게는 확고한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노!, No!>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기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율법, 말씀입니다. 2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2절의 <오직>, <주야로> 등의 표현은 그에게는 이미 다른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 줍니다. 이미 그는 뜻을 정했습니다. 그가 갈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른 유혹들에 대하여 거부를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준 없이 흔들렸던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르호보암은 왕이 될 무렵 원로대신들의 충고와 젊은 동료들의 충고 사이에서 번민했습니다. 그에게 기준이 없었으므로, 그는 결국 젊은 동료들의 충고를 따랐고, 그 결과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내 주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고,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르호보암에게는 그런 말씀의 기본이 없었기에 동료들의 말에 흔들린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교회는 공공성 논쟁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절대다수의 교회가 당국의 방침에 따라 방역을 하고,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음에도 비난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교계에서는 비난을 줄이고,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방역 물품을 후원하거나, 수련원 등을 격리 내지 치료 시설로 제공하고, 생필품 세트를 준비하여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고, 교회 주변의 시장이나 상가를 대상으로 물건 사주기 운동을 벌이는 등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쉽게 여기는 점은 이 모든 것이 소위 공공성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현 정부는 ‘공공’이란 개념을 정책의 여러 분야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공공의 목적,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수립합니다. 부동산 정책, 의료 정책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일은 마땅하지만, 공공성 때문에 섬긴다면 문제입니다. 교회는 공공성 때문에 억지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공공성이라는 이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야 합니다. 행동의 근거를 세상 논리가 아닌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 구성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므로, 우리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말씀에 입각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에 수종드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직 말씀만이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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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