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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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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생각나는 것이 ‘따뜻함’이다. 이 따뜻함은 남녀노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 따뜻함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 노인, 한부모가정, 외국인, 노숙인 등등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또 하나, 미혼인 사람들도 약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고,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이들은 중심에서부터 밀려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 당사자이면서 미혼인 나도 이들과 같다.
이들에게는 어떤 따뜻함이 필요할까?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 ‘물질의 따뜻함’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돈)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질은 필요하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그것을 사랑의 온도로 표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따뜻하게 만든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12월 25일 성탄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 주변 또는 교회 내에서 찾아서 지원하거나, 단체의 기부를 하는 형식으로 돕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형식적이든 비형식적이든,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시선의 따뜻함’에 대해서는 어떤가?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단 한 번이라도 ‘시선의 따뜻함’을 떠올려 본 기억이 있는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선의 따뜻함이 중요하다. 아니 필요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따뜻한 시선을 기다리고 있고 필요로 하고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약자들이나 미혼인들에게는 사회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교회 중심에서도 벗어나 있기에 더더욱 필요하다.
이들이 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전통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서의 시선, 전통적으로 관습되어 내려온 시선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하나님의 시선, 사회적 약자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들을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대접 받고 유명한 이들만 따뜻하게 품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고 연약한 자일수록 교회는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그리고 교회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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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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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시종여일하고 신시경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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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 연합사역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말로 감당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다. 괜찮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은 처음 함께 했을 때의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그 처음의 마음은 당연히 공동체의 가치와 목적에 합하고, 순리적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우리 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깊게 살펴보면 시작하는 일의 내용과 자세가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악하고 나쁜 일도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진행되었기에, 시작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함은 명약관화하다. 또 시작이 반이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시작과 함께 이미 반을 이루었기에, 그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해서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신시경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당나라 충신 위징이 당 태종에게 올린 글에 나온다. 그 의미는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태하고 게을러질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신중하게 일을 시작하고 일의 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라고 진언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사위였던 성종에게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바로 신시경종이다. 군주가 조금만 마음을 게을리 하면 간신배들의 아첨에 넘어가기 때문에 항상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대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신시경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충신이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과 마음을 담은 글을 올린 것이다.
한명회가 남긴 말 중에 신시경종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말은 “시근종태는 인지상정이지만 종신여시 하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지만 끝날 때에는 태만해 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군자는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근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신여시와 비슷한 말은 시종여일이다. 시작과 마침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한명회가 노년에 유배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후회와 회한 그리고 성종이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언한 것이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미를 지닌 초지일관도 있다. 이것 또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일이관지’ 즉 처음의 뜻을 끝까지 꿰뚫는다와 모든 것은 하나로 꿴다와 같은데, 처음의 마음이 마침의 시간까지 뜻을 잃지 아니하고,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시종여일, 신시경종, 종신여시, 초지일관 등은 거의 다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곧 성공한 삶이며 승리한 인생이다. 역사 이래로 충신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도, 그리고 자신의 주군도 그렇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초심을 지켜 성공한 사람은 더 강력하게, 초심을 잃어버려 실패한 사람은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솔하고 담대하게 진언한다. 나도 시종여일 신시경종 하는 사람들이 참 좋다.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내 곁에 이들이 있기를,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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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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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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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내한하여 강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감부열 선교사는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다시 내한하지 못했다. 이때 감부열은 뉴저지의 플레인필드제일장로교회와 엘리자벳제3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자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며 미국에서 목회를 정리하고 1947년 4월 4일 다시 내한했다. 해방된 한국교회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속히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한국어도 능통했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강계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대구지부로 배속되었다.
대구 정착과 교회 재건으로 분주하게 지냈는데 1950년 6월에는 전쟁이 발발했다. 대구로 피난해 온 피난민들을 돕고 교인들을 보살폈다. 그의 대구 주택은 피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피난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위험하다고 본 그는 안의와 선교사와 같이 안동으로 가서 안동선교부의 기물과 주요 문서를 대구로 옮겼다. 안동이 점령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에서 수복감사예배를 드릴 때 그는 미군 군목 자격으로 킨슬러와 힐, 아담스, 보켈, 마펫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서 예배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로 돌아왔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후퇴하는 긴박한 현실에서도 한국에서의 군목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 군목병과의 교범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군목제도를 도입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
전쟁 중에서도 한국교회는 신학교 문제로 혼란하였고, 총회가 두 학교, 곧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제3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설립할 때 대구의 감부열을 초대 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인돈(William Linton), 권세열(Francis Kinsler), 조하파(Joseph Hopper)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명신홍 한경직 등은 초대 교수로 추대되었다. 이 학교가 오늘 총신대학교로 발전했다.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일할 때 그 가까이에서 일한 한국인이 서정환(徐廷煥, 1906-1952) 전도사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고산진(高山鎭) 출신인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고,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구로 와 그와 함께 일했다.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 부부를 부모처럼 여기고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감부열 선교사는 195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 주 젱킨스타운의 비버대학(Beaver college)과 일리노이주 휘튼의 휘튼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얻고 1953년 대구로 돌아왔다. 1954년 4월에는 대구에 계명기독대학이 설립되는데, 초대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12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8년 3월에는 첫 졸업생 49명을 배출했다. 도서를 확보하고 도서관을 건축하고 또 음악당을 건축하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1958년 7월에는 학장직을 안두화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8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한국선교 경험을 담은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1958년 김윤국에 의해 ‘한인 중심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다. 길지 않는 145쪽에 지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전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5-6명의 선교사 외에도 고난과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켰던 한국인 17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익두, 서정환, 손양원, 안의숙, 이대영, 이승만, 이영식, 임한성, 주기철, 한경직, 한병혁 등이다. 그가 남긴 또 한 가지 저서는 강계에서 함께 사역한 바 있는 노혜리, 곧 로즈(H. A. Rhhodes)와 1935년 이후의 북장로교의 한국선교사를 정리한 500여 쪽에 달하는 역사책(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35-1959)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사냥도 즐겼는데 동료들과 곰사냥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어려움 중에서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고, 곰으로부터 큰 화를 당한 일도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나는 살겠으나 곰은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위기를 벗어난 일도 있다고 한다. 그가 대구에서 일할 때 정일영 목사가 그를 힘들게 하고 괴
롭혔다고 한다. 정일영(鄭一永, 1901-?) 목사는 평양신학교 31회 졸업생(1936)으로 대구 대봉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부열 선교사는 참고 지내다가 한 말이, “정 목사, 예수 사면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1972년 1월에는 부인 안혜리(헬렌) 여사가 사망했다. 미국펜실베니아주 빌라 신위드의 웨스트민스터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에 감부열은 루시 링컨(Lucy E. Lincoln, 1905-?) 여사와 재혼했다. 루시 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10년째 혼자 지내던 여성이었다. 5년을 같이 살고 1977년 1월 감부열 선교사는 86세로 사망하여 첫 부인 헬렌 옆에 안장되었다. 감부열은 헬렌과 사이에 1남(Archibold) 3녀(Helen, Frances, Ann)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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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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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그림자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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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에 교회에서 연로하신 담임 전도사님과 장로님과 예배당 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장로님이 말없이 내 몸을 옆으로 밀어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내고 전도사님이 사택으로 들어가신 후 장로님이 제 손을 잡고 조용히 건네주시는 말씀을 하셨다. “서 선생,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돼. 따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내가 전도사님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것을 보신 장로님이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른 공경에 대한 마음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림자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되는 교훈은 목회 사역에서는 물론 내 실존의 의미와 삶에도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오래전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Chamisso Adelbert von)의 ‘피터 술래밀의 놀라운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최문규 옮김;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슐레밀은 가난한 청년으로서 하루는 어두컴컴한 부둣가를 거닐다가 이상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무슨 물건이든지 다 끄집어낼 수 있는 신비한 주머니를 슐레밀에게 내밀면서 슐레밀의 그림자와 바꾸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가난하게 생활하던 슐레밀은 별생각도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그 신비한 주머니와 바꾸게 된다. 순간 그 사나이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그 주머니를 건네주고 슐레밀의 그림자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 사라져 버렸다. 그 사나이는 악마였다.
그림자를 주머니와 바꾼 슐레밀은 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의 의혹을 받게 되고 놀림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게 되면서 점점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방에 들어앉아 혼자가 된다.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초를 방 전체에 켜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불안하고 초조함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사랑하던 여인과도 그림자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고 실연의 쓰라림을 경험해야 했다. 주머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낼지라도 이미 그 주머니는 삶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다.
슐레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지만 악마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이번에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요구한다.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와 바꾼 신비한 주머니를 던져버리고 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일을 하면서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친구 사밋소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죽는다.
“친구,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사랑해야 하네.”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소유물임을 교훈한다.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국가, 가족일 수 있고 신앙이며 양심이며 명분일 수도 있다. 비록 그림자는 팔았지만 자신의 근본인 영혼은 팔지않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던 주인공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슐레밀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당장 눈앞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림자를 팔아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어쩌면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라는 명분쯤은 지금 당장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고 그래서 눈앞의 팥죽 한 그릇이 더욱 소중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다.
눈앞의 팥죽보다는 명분과 가치를 존중했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겨 팥죽 한 그릇을 기꺼이 에서에게 건네 줄 수 있었으며 그것은 야곱의 일생을 결정하는 축복의 계기가 되었다.
삼손이 ‘나실인’의 명분을 들릴라의 무릎보다 간과하였고, 발람이 모압왕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삯’을 예언자의 명분보다 귀히 여겼고, 고라의 권력욕이 역할의 명분을 패역으로 몰락시켰고, 가룟 유다는 지고한 예수 제자의 명분을 은 30과 바꾸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준엄하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얼마나 소름 돋는 말씀인가. 그림자의 소중한 이치를 모르는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 같은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교훈이다.
여의도 1번지의 선량(選良)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자의 교훈을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존귀한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과 당리적인 이해타산에 팔아버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지고한 정치철학을 짓밟고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오늘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이랴. 은퇴 이후 한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세계 여러 나라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보이고 들리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유다서에 기록된 경고메시지를 간과하고 명분보다는 실리(實利)에 낭패스러운 삶을 연주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는 주님의 아픔이기 전에 공동체의 슬픔이 되기도 한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사명이며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다. 그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에 더럽히고 그 명분을 이해타산에 팔아버리면서 주님의 교회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이 유다서에 경고한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나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장로님의 가르침이 새삼 생각난다. 아프고 벅찬 삶의 여정에서도 ‘목사’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가히 몸부림하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를 실증하는 삶을 엮어내는 삶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그림자의 교훈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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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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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그들이 모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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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께서 위기에 몰리시면 그 엄청난 능력으로 적들을 이기고 나오실 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모진 수욕과 고통을 참으셨고, 가야바 법정에서 있었던 산헤드린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정죄를 받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그 과정을 본 가룟 유다는 절망했습니다.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면서 자신이 무죄한 피를 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유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그 은을 성도에 던져 넣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인 반응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핏값이라 부정하게 생각하여 성전고에 두는 게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에서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성전 건물이나, 드나드는 사람이나,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이 거룩하거나, 드려지는 예물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깨끗한 예물만 성전고에 두기 때문에, 다시 말해 거룩한 자신들이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가장 악한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찾아온 유다를 외면하면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큰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판을 깐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던 차에 유다가 어리석게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유다의 은 삼십을 핏값이라고 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보다 더 악한 자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 착각은 결국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도 나그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들은 은 삼십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자신들은 죄인도, 나그네도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나그네이지만, 자신들은 예루살렘의 주인으로서, 언제까지라도 부귀영화를 누릴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무서운 착각입니다. 그들 역시 나그네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떠날 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에 머무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당시 유대 사회, 특히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층이요,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 비유한다면 기성 교회의 지도자들에 해당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이들처럼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죄인이지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나그네지만, 자신은 나그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는 추하지만, 자신들은 성전을 거룩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역시 나그네입니다. 우리 역시 무수한 상처를 내고, 마음의 피를 흘리게 하면서 삽니다. 예수님 앞에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을 때 시작됩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나그네요, 피 흘리는 자임을 알 때, 예수님의 복음이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한국교회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처럼 굳어졌습니다. 상대를 향한 유다라고 비방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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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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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 봉준호와 비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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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국의 한강 작가를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비할 바 없는 영예겠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최초요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모습에서 무척 닮아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재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자로서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명장 마틴 스콜세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서 배웠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대단한 환호가 쏟아졌고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정작 스콜세지 감독은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지요? 대신 로랑 티라르가 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에는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그 영화의 예술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는 스콜세지의 말이 실렸다고는 합니다(조준형, 연합뉴스, 2020. 2. 11).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은 한국의 작은 일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한국 고유의 풍자와 해학을 가미했는데도 세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한강이 다루는 글들도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많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다수인데도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개인적이지만 예술성이 높을 수 있고,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던지는 시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막과 번역의 한계를 유월(踰越)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역시 봉준호가 남긴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1인치 자막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미국인)은 훨씬 더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2020. 1. 5,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국 영화를 선호하면서 외국 영화를 보려면 감수해야 하는 자막을 그는 “1인치 장벽”이라 불렀는데, 봉 감독이 이룩한 작지만 위대한 성취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장벽의 일부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번역 타령을 해댔습니까? 유독 탁월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민족의 문학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하나를 받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번역 문제로 치부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번역도 또 하나의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봉준호와 한강은 바로 이러한 면이 문학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일종의 도전(challenge)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면서 각자의 반응(response)을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셋째, 가부장제(paternalism)의 혁신적 파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뉴욕타임스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지 하루만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최고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기념됐지만, 한강 작가와 다른 여성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뿌리 깊게 가부장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남성중심주의나 권위주의를 가리키지만,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더 확장 적용이 가능합니다. 한강과 봉준호는 이전에 소위 ‘블랙리스트’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습니다. 2016년 당시 특검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백서”를 통해 그런 사실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을 마치 부모처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단지 픽션일 뿐인데, 여전히 소재를 문제 삼고 방향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일상에도 그런 잔재들이 많습니다. ‘한 발자국 가까이’나 ‘휴지는 휴지통에’라는 문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전 국민이 모두 이런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노벨상위원회가 어째서 고은이나 황석영이 아니라 한강에게 상을 안겨주었는지를 우리 모두 다 같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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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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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플랜B (창세기 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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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울 때는 A안이 있고, 그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책이나 또 다른 계획을 플랜B라고 한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스카웃은 길거리 캐스팅이 많다. 주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B급 인생도 가망이 있다.
결핍, 부족, 연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B급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낙망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 과부, 소자, 약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멸시치 않으신다. 성경에서 장자를 중요시 하지만 의외로 차자가 쓰임 받은 경우가 많다. 다윗은 여덟째요, 모세는 셋째요, 아벨은 둘째요, 야곱도 둘째다.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다. 장자인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고 털이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자요, 거의 계집아이 같은 분위기였다. 에서는 따놓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다가 뺏겼지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장자권을 쟁취해 나아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뼛속까지 장자), 형님 발을 붙잡고서라도 지기 싫어했고(이기는 습관),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권을 샀고, 얍복 강에서 씨름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다(이긴 자).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사기꾼이 사랑꾼이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지랖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잡한 집안 구조인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되어 야곱의 축복을 이루었다.
대중가요에서 싸이는 B급 감성이라고 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강남스타일’을 불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규격화된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망가져서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재밌는 모습이 편하고 좋다. 세례 요한의 주제는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것이다.
주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실 때도 베들레헴 들판의 다윗, 바벨론 포로수용소의 다니엘, 미디안 광야의 모세, 애굽 감옥의 요셉, 갈릴리 바닷가의 베드로를 부르셨다. 모두 중심이 아니라 주변 언저리였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예루살렘 다운타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마리아에서 선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최고 양반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두개인,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역사의 아웃사이더들, 외인부대, OB팀, B급 인생들을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는 외모,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 중심을 보신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터지고, 평범한 데서 비범함이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장모가 데려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사역을 잘한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상품, "B급"상품, "못생긴 농산물",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못난이 감자", "못난이 수산물"이 인기가 있다. 때깔이 좋은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고, 색깔도 꾀죄죄하고 크기도 모양도 볼품없는 과일이 무농약에 진짜배기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다.
B는 Best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A급이 아니라, B급 인생이라도 들어 쓰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소망이 있다. 지치고 상한 채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들어 써주시옵소서 하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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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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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인공 지능 시대에 목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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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를 지나 알파 세대(Alpha generation) 시대가 온다. (아이패드가 출시된) 2010년 이후 출생된 젊은이들을 알파세대라 부른다. 유치원을 가기 전부터 리모컨과 핸드폰, 키즈 유튜브를 입맛대로 골라보는 아이들, 어린이 맞춤형 키즈 카페에서 노는 아이들, 디지털 기기를 자기 몸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아이들에게 문자, 글자보다 영상이 훨씬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 모리스 드니는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이브의 사과, 둘째 뉴턴의 사과, 셋째로는 폴 세잔의 사과를 말하는데 여기에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출시한 후 애플의 한 입 베어 물고 난 후의 사과 모양 로고가 네번째 사과라고 평가했다.
알파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자녀, 부모, 교시를 이야기한 후 목회자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 알파세대의 자녀는
1. 메타버스의 증강현실이 실체화 된다. 상상속의 세상과 현장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Zoom(줌) 교실 속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수업도 같이 한다. 원격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집에서 엄마가 주는 밥을 먹고 게임을 하며 친구와 논다.
2. 디지털 기계가 너무 익숙한 아이들이 게임을 즐기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을 왔다 갔다 한다. 3차원 가상세계, 즉 증강현실, 가상세계, 거울세계, 라이프로깅, 4가지 개념으로 이해된다.
3. 아이들은 가상세계, 현실세계의 구분 없이 살아간다. 실제의 삶에서 누리는 자유를 갖고 있다. 전 세계를 아주 간단하게 연결하고 누린다.
4. 나와 타인이 함께 공존하며 관계없이 단편적 캐릭터로 여기면서 경험한다.
5.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어하며 기다림과 인내와 윤리적인 것들을 힘들어한다.
6. 장점은 창조성과 놀이를 같이 갖고 있어(예술성) 미래를 지배하는 것도 있지만 단점으로는 인간관계의 정을 이해하기 힘들다.
둘째 부모 입장에서는
1. 1980~2000년 교육을 받은 기성부모세대는 경험해보지 않은 자녀를 볼 때 이해하기 힘들다. 경험해 보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두렵기도 하다.
2. 노력하면 된다는 노력결과중독사회에서 성장했기에 성공하지 않으면 못 살아간다는 강박을 갖고 살아간다. 자녀에게 강요하다 보면 더 심한 충돌과 회의감을 느낄 것이다.
3. 성공과 결과에 대한 실패와 책임감 모두를 제도적 관점에서 살피지 않고 개인에게만 돌리는 사회와 마주칠 것이다.
4. “알랭 드 보통”이 말하기를, 성공에 대한 주관적 잣대를 갖게 될 때 우리를 병들게 하는 성장주의, 결과주의에서 벗어나 만족의 새 길을 찾을 수 있다.
셋째 교사 입장에서
1. 디지털 시대의 세상에서 단점과 문제도 있지만 장점인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도 이야기 해야 한다.
2. 이제 지식의 교육에서 벗어나 참 지혜의 교육을 찾아갈 때가 되었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정서를 이해하는 교육으로 변화해야한다.
3. 이성적이고 냉철한 합리적 사고에서 상황과 감정과 정서를 같이 가는 성숙한 교육관을 다시 찾을 때가 되었다. 이제 사회도 논리성과 함께 그 맥락을 읽는 직관성의 지혜도 같이 성숙할 때다.
넷째 목회자로서
1. 과연 우리는 자녀, 부모, 교사 모두를 이해하고 품을 그릇과 이해력이 준비되어있는가? 38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한 나 자신도 요즘 이해하기 힘들다.
2. 선택하여 책임지는 것에 자신 스스로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갖고 있는 이 때에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 갈등을 안고 설교와 목회를 해야 한다.
3.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의 계획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어떻게 미래를 전망하든 가족의 소중함과 권위의 역할을 계속 가르쳐야 한다.
오늘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의 대한민국 사회를 기대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알파세대에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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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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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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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부열(甘富悅)로 알려진 아치볼드 캠벨(Archibold Campbell, 1890-1977) 선교사는 여러 일화를 남긴 선교사였고, 그의 여러 가족이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한국선교 가족이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 캠벨(Edward Campbell, 甘茂悅, 1887-?), 여동생 메리(Mary Cross Campbell, 1892-1969)도 한국선교사였고, 이종사존 마리안 킨슬러(Marian Kinsler)와 헬렌 킨슬러(Helen Kinsler)도 한국 선교사였다.
감부열은 1890년 9월 28일 필라델피아에서 에디슨 캠벨과 애니 런던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913년 6월 시에틀의 와싱턴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얻은 그는 곧바로 프린스톤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1916년 신학사 학위(BD)를 받았다. 그해 9월에는 헬렌 막스웰 오트(安惠理, Helen Maxwell Ott, 1888-1972)와 혼인했다. 한달 후인 10월 24일 미국북장로교 시아틀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선교사로 파송되어 12월 9일 부인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2년 앞서 1914년에 내한했던 형과 누이 동생 부부는 선천과 청주에서 각각 사역하고 있어 한국이 낯설지 않았다. 내한한 감부열은 평안북도 강계 선교부로 배속되어 1917년 2월부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에 정주하면서 강계를 중심으로 평안북도 북부지역, 곧 산서(山西)노회 지역의 강계, 후창, 장진, 자성, 위원 등지의 교회를 관할했다. 1918년부터는 지역교회 순회와 관리 외에도 강계읍의 명신소학교와 영실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24년 6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대학교애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문학석사(MA)학위를 얻었고, 1925년 다시 임지로 돌아와 영실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이 영실학교는 1931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 당시 재학생 80명 가운데 85%가 기독신자였다고 한다. 그 졸업생 중의 한 사람이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고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던 서정환 이었다. 그는 감부열 선교사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학생이었다.
강계선교부에서 일할 때 감부열은 1930년 8월 동료 선교사들과 백두산탐사여행을 다녔는데, 사울세브란스병원의 부츠, 연희전문학교의 피셔, 남감리회의 에머릭, 성서공회의 홉스, 서울의 사업가 모리스 등은 회령선교부의 맥밀란과 만나 두만강 무산에서 출발하고, 감부열은 계레지병원의 바이람, 한국을 방문한 장인 오트와 함께 압록강 혜산진을 출발하였는데 두 팀이 산지연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을 등반했다고 한다. 감부열은 여름휴가 때 백두산 정상을 오르곤 했는데, 백두산 생태계를 촬영하여 1931년 6월 25일 선천기독청년회관에서 ‘백두산 실사회’를 개최한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감부열은 수영도 좋아하여 백두산 천지(天池)를 가로 질러 수영했던 사람은 오직 3사람 뿐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천지는 신성시 되던 곳인데, 수면은 해발 2,257m, 면적은 9.165 km2, 둘레는 14.4 km이고, 평균 깊이는 213.43m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가로질러 가려면 동서 길이가 3.54km, 남북으로는 4.5km라고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거리였다. 무엇보다도 수온이 낮고 수압이 높아 수영하기 어려웠으나 감부열은 그렇게 했다고 한다.
1932년과 1933년 두 번째 안식년을 보냈다. 다시 임지로 돌아왔을 때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면서 1935년부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선교학교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학교를 유지하던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던지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북장로교는 이론과 격한 토론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 결국 영실학교도 1938년 폐쇄되었고, 남아 있던 재학생은 일단 선천의 신성중학교로 보냈다. 감부열은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산서노회의 80여 교회를 돌보며 교인들을 격려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일관계가 악화되었고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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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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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플랜 B (본문 창세기 25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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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울 때는 A안이 있고, 그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대응책이나 또 다른 계획을 플랜B라고 한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스카웃은 길거리 캐스팅이 많다. 주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B급 인생도 가망이 있다.
결핍, 부족, 연약한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B급 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낙망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 과부, 소자, 약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멸시치 않으신다. 성경에서 장자를 중요시 하지만 의외로 차자가 쓰임 받은 경우가 많다. 다윗은 여덟째요, 모세는 셋째요, 아벨은 둘째요, 야곱도 둘째다.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다. 장자인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고 털이 많은 상남자 스타일이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자요, 거의 계집아이 같은 분위기였다. 에서는 따놓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다가 뺏겼지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장자권을 쟁취해 나아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뼛속까지 장자), 형님 발을 붙잡고서라도 지기 싫어했고(이기는 습관), 팥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권을 샀고, 얍복 강에서 씨름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했다(이긴 자). 그래서 이름도 바뀌고, 사기꾼이 사랑꾼이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지랖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잡한 집안 구조인 열두 아들이 열두 지파가 되어 야곱의 축복을 이루었다.
대중가요에서 싸이는 B급 감성이라고 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강남스타일’을 불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규격화된 딱딱한 모습이 아니라 먼저 망가져서 무겁지 않고 가볍고 재밌는 모습이 편하고 좋다. 세례 요한의 주제는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하는 것이다.
주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실 때도 베들레헴 들판의 다윗, 바벨론 포로수용소의 다니엘, 미디안 광야의 모세, 애굽 감옥의 요셉, 갈릴리 바닷가의 베드로를 부르셨다. 모두 중심이 아니라 주변 언저리였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예루살렘 다운타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사마리아에서 선한 사람이 나온다. 당시 최고 양반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 고관대작을 차지한 사두개인,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역사의 아웃사이더들, 외인부대, OB팀, B급 인생들을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는 외모, 스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질, 중심을 보신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적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터지고, 평범한 데서 비범함이 나온다. 병든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은 나라에서 데려가고, 돈 많은 자식은 장모가 데려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이 사역을 잘한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상품, "B급"상품, "못생긴 농산물", "부끄러운 과일과 채소", "못난이 감자", "못난이 수산물"이 인기가 있다. 때깔이 좋은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가 없고, 색깔도 꾀죄죄하고 크기도 모양도 볼품없는 과일이 무농약에 진짜배기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다.
B는 Best의 약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A급이 아니라, B급 인생이라도 들어 쓰신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소망이 있다. 지치고 상한 채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들어 써주시옵소서 하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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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