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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왜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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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용어가 우리들의 삶에 일상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황량한 벌판이 된다. 그래서 복음의 삶이 되어야 한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일상이 되는 십자가 은혜의 삶이다. 그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작금의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못되면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하나 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이 지경이 되도록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국민들을 살맛 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그들로 인하여 고통해야 하는가?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대통령이 구속되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를 받는 상황에 국가경쟁력은 곤두박질치고, 경제는 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진 듯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카오스 현상이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국가가 무너지고 국민의 삶이 좌불안석이 되어도 그들은 오직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에 가히 혈안이 된 듯한 행태를 보면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아직도 이 나라는 영웅 같은 정치 지도자가 보이지 않으니 그럼에도 아직은 난세가 아닌가 보다.
교회도 다를 바 없다. 은퇴 후 초교파적으로 매 주일 말씀 사역을 다니면서 듣고 보고 경험하는 것이지만 시끄럽고 분쟁으로 교인들이 아파하는 교회의 공통점 또한 ‘내 잘못 없고 네 잘못’ 뿐이다. 추(醜)함이다. 십자가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하는 교회는 좋은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잘못은 모두 ‘내 탓’이 일상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하여 우리 사회를 함께라는 공동선을 지향했다. 동시에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 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아름다운 자기반성의 아름다운 사회운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 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행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정의를 외치며 하나님의 공법을 역설하면서 성경을 강론하는데 자기 생각을 채색하여 선포하여 교인들은 둘로 갈라치기 되고 교회는 분쟁이 일어난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데 왜 교회는 자꾸 분쟁으로 카오스현상이 되는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지고한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도자는 항상 이론과 실제, 그리고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로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국민들은 정치 지도자의 행동철학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 나면 거짓말이 되는 정치지도자의 언행에서는 결코 국태민안의 정치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오늘의 국민들은 야고보의 리더십을 요청한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왜 이순신을 회고하고, 김구를 읊조리며, 윤동주를 그리워 하는가? 왜 주기철을 회고하고 손양원을 읊조리며, 조만식을 그리워 하는가? 그들에게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어디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가?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쉽은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다. 오늘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인물 풍년에 인재 흉년이라는 아픈 용어가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너나없이 오늘도 힘든 하루를 살아가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됨을 믿기에 오늘도 엎드림으로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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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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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차기 지도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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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정국에 있다 보니, 오늘 원고의 제목을 보고 읽게 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정치 평론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원고입니다. 대한민국 교계에, 정치, 경제 등 여러 영역을 위한 차기 지도자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
지도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우리 사회에서 <차기>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은 정치인만은 아닙니다. 차기를 준비하는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차기>를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 예가 다윗과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통치하고 있을 때 이미 차기 지도자로 다윗을 예비하시고,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방의 사도로 복음을 증거할 차기 영적 지도자로 사울이란 청년을 선택하시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는 후일 바울이란 이름으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세대 지도자>란 말 자체가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는 아직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현재는 지도자가 아니지만 내일이란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현재 피 나는 자기 훈련을 통하여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훈련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차세대 지도자들이 얼마나 철저한 훈련을 통해 준비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앞에서 언급한 다윗은 어린 시절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후 긴 세월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강적과의 맞대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인했고, 민족애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그 어떤 적도 이길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전쟁터에서 리더십과 신앙인의 영적 야성을 터득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왕의 사위로서 궁중의 음모들을 통해서 권력 주변의 악한 현실을 배웠고, 그 현실과 맞서기 위해 어떠한 하나님의 정의가 필요한지를 철저히 배웠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렇습니다. 요한은 능력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하고 호소력이 있었는지 당시 강퍅한 군인들, 돈 때문에 민족까지 배신한 세리들도 요한 앞에 나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할 정도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우러러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능력의 메시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숨겨진 삼십년> 때문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했습니다.(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 있으니라) <광야>는 고독한 영적 훈련소입니다. 바울 사도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 년을 머물렀으며,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훈련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광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훈련하는 광야에 요한은 삼십 년을 머물렀다고 하겠습니다. 그 삼십 년은 요한에게 능력을 주었고, 그는 헤롯왕의 불의를 정면으로 책망할 수 있는 정의감과 용기를 배웠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도 그렇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느 날 갑자기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표된 것은 후였지만,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를 수행하면서 리더십ㄴ 훈련을 받았고, 이 외에도 여호수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받은 더 철저한 훈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여호수아의 훈련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회막이 하나님을 뵈옵는 장소였으며, 여호수아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거기서 철저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은 거의 사십 년에 달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 곳곳에서 진정한 차기 지도자들이 자라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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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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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천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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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시대에도 천재가 필요할까요? 역사의 주역은 천재입니까, 아니면 범상한 인물들입니까? 오랫동안 제기되었고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천재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사상가들마다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천재예찬론자라 할 수 있는 철학자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쇼펜하우어를 천재라고 부르면서 “사람은 각자 내면에 ‘생산적인 유일성’ 곧 ‘그의 본질의 핵심’을 지니고 있고, 이 유일성을 의식하면 비범한 사람의 광채가 나지만 게을러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악의 저편’에서는 천재를 “생산하든지 출산하는 자”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반면 덴마크 태생으로 실존주의 효시라 불리는 키르케고르는 니체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철학자였습니다. 자신부터 천재를 꿈꾸지 않았으며 세속적 천재보다 신앙적 인물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점’이란 글에서 천재는 ‘내재(immanance)의 영역’에 머무는 반면 사도는 ‘초월의 영역’(transcendence)에 속했고, 내재의 영역에서는 이성이 절대적이지만 초월의 영역에서는 신앙이 귀하다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천재가 아니라 순교자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재란 비범합니다. 재능과 기예 면에서 비범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도 그러합니다. 특히 천재라 불리던 사람들은 보편적인 실존적 불안을 넘어서는 증상을 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측면을 천재의 특성으로 꼽을 전도였겠습니까? 1514년 당대의 화가로 추앙받던 알브레히트 뒤러는 ‘멜랑콜리아 1’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멜랑콜리아”라는 말 자체가 불안이나 우울이란 의미이니 그런 면들을 천재의 특징으로 여겼다는 당시 풍조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우울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니체의 말처럼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창조적 천재들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말이 일견 그럴싸해 보이기도 합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고갱과 고흐,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로빈 윌리엄스 – 이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종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던 유명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천재들이 시대를 선도하고 문화를 주도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겠습니까? 인간 문명이 불안에 기초한다면 그 자체로 얼마나 우울한 소식입니까?
그렇다면 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천재에 열광하는 걸까요? 다시 키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왜냐하면 천재를 한낱 기적으로서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천재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재란 ‘자신의 사고를 한 방향으로 활용하거나 모든 것을 소재로 이용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적인 삶을 진지하게 관찰하며 여기저기에서 모범과 자극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자기의 수단으로 짜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162). 천재가 우리와 다른 점은 그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열정과 관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재는 우리가 온갖 곳에 쏟는 관심과 에너지를 자신의 일에 온전히 투자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일”이라는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천재라 불리는 존재들은 처음부터 인류애나 역사의 진전 같은 문제에 관심을 쏟았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이상한 ‘천재론’이 퍼져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폐허가 된 이 땅을 부강하게 만든 존재는 한 사람의 천재였습니까? 개발도상국에 불과하던 이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요 세계 5대 문화강국이 되게 한 비결은 한 사람의 비범한 천재의 지략과 재능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이념과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은 천재적인 누군가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런 존재들에 집착합니까? 일종의 허영심과 자기애 때문이라고 한 사상가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괴물인 자보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괴물로 만들어진 존재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땅의 위대하고 찬란하며 아름다운 역사는 한두 사람의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수많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역사의 주관자를 누군가 하나의 존재로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영광의 자리는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를 부정할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은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취와 행적을 좇아 살아가는 범상한 그리스도인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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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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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순종, 자람, 사랑 (누가복음 2: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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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자라났고 어떻게 사랑스러워져 갔는가, 그야말로 예수님의 골든타임을 살펴보며 교훈을 얻자.
1.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셨다.
요셉이가 어릴 때 아빠 사랑을 담뿍 받은 것이 후반전에 요동치 않는 멘탈갑이 되었다. 복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중심하고,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받자. 행복한 가정에서 건강한 자녀가 나온다. 신앙생활은 교회보다 가정에서 부모를 통하여 먼저 배운다. 부모가 신앙의 본을 보이려고 애쓰기보다 은혜의 자리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큐티, 가정예배, 새벽기도가 신앙생활의 골든타임이다. 가정예배가 가장 기본이요, 본질이요, 핵심이요, DNA이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가정에서부터 배워 거룩을 감당하면 행복, 형통,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
2. 예수님의 모습은 ‘순종하고 받드시는 것’이었다.
순종이 내공있는 실력이다. 순종을 통해서 배워간다. 가정에서 순종이 시작되고, 일상에서 순종은 좋은 성품이 된다. 쓰임 받는 사람의 한 가지 조건은 순종이다. 성품이 안정되고 생활의 자신감이 있을 때 조용한 가운데 순종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도 그러했듯이 순종도 계승되고 전달된다.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미덕은 순종과 충성이다. 충성스런 종은 추수 때의 냉수같이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주께서 일꾼들을 칭찬하실 때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신다.
3.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
성숙해졌고 철이 들었고 성령충만해졌다는 뜻이다. 성장본능이 있다. 식물은 심어놓으면 자라고, 아기는 태어나면 반드시 자란다. 폭풍성장의 때도 있다. 대나무는 하루에 91cm까지 자랄 수 있다. 물고기는 어항의 크기만큼 자라고, 식물은 화분의 크기만큼만 뿌리를 내린다. 나 자신을 자신의 틀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꿈이라도 빵실하게! 기도라도 거창하게! 입을 넓게 열라.
세계가 우리 교회의 교구다. 코로나 이후에 영상세계, 유튜브가 되면서 포도원교회는 일만가정, 삼만성도, 십만선교, 백만전파가 실현되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고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고 무한도전 하라. 안될 수 없는 교회 부흥이다.
또한 지혜와 키가 균형있게 자라는 것이 건강이다. 균형이 지혜이고 균형이 안정이다.
4.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일에는 성공하고 사랑에는 실패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사랑, 절대사랑, 불멸의 사랑이다. 사랑의 개념으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도 사랑받고 사람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부간에 존경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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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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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 교회건축과 지속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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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는 비대면 예배와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져있다. 이런 변화는 교회성장을 둔
화시키고 성도수 감소로 이어졌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기존의 예배위주의 교회 환경을 지역 사회와 공유하거나 소통하는 공간으로 변화시켜야한다.
교회건축시 문화공간으로 계획해야한다.
지역사회가 교회와 유지적으로 연계되어지고 연합되어져야 비대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지역주민의 사랑방기능으로서의 북카페는 교회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인식시킨다. 특히 키즈방이나
키즈카페등은 엄마와 아이가 교회로 오게할 수 있는 적극적인 건축방향이 필요하다.
교회의 교육공간은 청소년 지역센터로 평일개방하여 스터디 카페로 사용하게하여 교회 공동화를
극복해야한다. 비대면 시기에 청소년 대학생들은 지역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교회의 공간이 이것을 대체하면 성장에도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교회의 주중 활용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내부기능을 극대화하여 경제적 공간을 계획해야한다.
교회특성상 하나의 실이 대수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분리와 통합의 공간설계가 필요하다. 대공간은 가변식 파티션으로 중·소 공간으로 분활 할 수 있고, 다기능의 공간으로 사용될수 있다. 특히 식당은 주일 하루만 사용하는데 식당을 문화센터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게 내부 기능을 대각화 해야한다.
방치되어있는 외부공간을 기능있고, 감성공간으로 계획한다.
외부공간은 내부공간이 가질 수 없는 기능을 소유한다. 야외 카페테라스, 프로그램 주차장, 바자회장, 마을장터, 어린이 키즈랜드, 청소년 체육공간등은 외부공간을 감성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지붕층공간은 스카이라운지, 풋잘장, 실내놀이공간, 야외공연장과 같은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어 지역사희의 명소로 탈바꿈된다.
지역사회와 교회가 공존하며, 소통하는 적극적 공간으로 개방되어질 때 지속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지역사회가 필요한 기능이나 공간, 지역주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의 전략적인 분석과 연구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
교회건축이 단순히 공간이 부족해서 진행되는 것 보다 지역사회와 연합되고 소통되어 지는 측면에서 접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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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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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리교 김창준 목사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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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목사(1890-1959)는 3.1 운동 당시 33인 중 한사람이었고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유망한 인물이었으나 변절자가 되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공산 인민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창준은 서울에 나타나 김일성 환영대회를 개최하는 등 침략자들을 지원하였고, 서울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기독교민주동맹’을 다시 결성했다. 사무장은 전북 삼례 출신으로 경동교회에 출석하던 김욱이라는 자였다. 이 조직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되었던 친북조직이었다.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가풍리의 평민 집안에서 1890년 5월 3일 출생한 김창준은 18세 때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e)에게 세례를 받았고, 숭실대학과 일본 아오야마에서 1년간 수학하고 감리교의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7년 3월 졸업했다. 만주에서 일한 손정도와 동기생이었다. 그 후 서울 인사동의 중앙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중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참가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참가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에 처해졌다. 1921년 12월 22일, 한용운 등과 함께 가출옥(가석방) 된 그는 서울 감리회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922년 9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4년 5월부터 1926년까지 미국 게렛신학교(신학사)와 같은 켐퍼스의 노스웨스턴 대학교(문학사)에서 공부하고 1926년 12월 27일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는 한편 글도 쓰고 중국과 만주선교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고, 이때부터 좌익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1930년대부터 기독교사회운동을 제창한 바 있는데, 기독교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해방 이후에는 인민민주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경제적 평등을 위해서는 김일성이 주창했던 인민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인식하고, 1947년에는 ‘남조선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을 지지하는 좌파 조직이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또 좌파 인사들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선) 확대 중앙위원회에 참가하여 김기전, 김원봉, 박헌영, 여운형, 허헌 등과 같이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수의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은총의 개념은 사라졌다.
그런데, 김창준은 1948년 봄 김일성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1948년 4월 18일 월북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평양에 체재하며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후에는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협의회 부서기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국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부터는 파리, 프라하, 비엔나 등지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로 참석했다. 김일성 정권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는 미제국주의를 비난하고 기독교회를 파괴하고 기독신자들을 살상한 것은 미제국주의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중에 1950년 6월 북한이 남침하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에 나타나 김일성장군 환영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런 반미 반한 행각을 벌이다가 북한으로 돌아갔고, 1950년 6월의 홍남표 장의위원에 이어 1951년 2월에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에는 허헌 장의위원, 그리고 1953년 4월에는 김정주 장의위원을 지내는 등 북한의 일인 독제정권의 지도자 반열에서 활동했다. 1953년 7월 29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김창준은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말년까지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관여하다가 1959년 5월 7일, 오후 2시 30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9세 때였다.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부고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주의 건설 사업을 위하여 계속하여 투쟁하여 왔다. ... 고 김창준 동지가 전체 조선 인민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데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라고 기록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가 어떻게 월북하여 교회를 탄압하고 반 기독교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을까? 장병일은, “쓸데없는 명예욕과 생활에서의 불만이 가져온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자기를 위하여 더 유익했을 것”이라고 썼다(장병일, 『한국교회유사』,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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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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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변하는 세상, 변해버린 세상 (젊은이와 소통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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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잘 통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도 너무 변해버린 생각과 가치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식당, 은행 등 공공장소에서 3가지 ‘척’, ‘3척’을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잘난 척. 둘째, 있는 척. 셋째, 아닌 척을 잘해야 현 사회에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겸손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미덕이었는데… 그때는(나때라고 말하기 쉬워서) 잘 나가도 잘나지 않은 척하고, 알아도 잘 모르는 척. 있어도 있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덕이었고 겸손의 진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상하게도 자기과시를 하는 사회가 되어 나를 알려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자기과시욕구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 종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자신을 굉장히 도덕적이고 깨끗하며 남과 다르다고 말하고 인식시키면서 자기확증편향으로 굳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갖는 욕구이지만 특히 이러한 욕구는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된 성도에게 매우 강하게, 자주 발견됩니다.
‘무엇이 행복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경건 욕구와 욕망, 그리고 돈, 물질에 관한 욕구, 욕망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특히 경건에는 기도가 빠질 수 없고, 물질에는 구제가 빠질 수 없습니다. 과시용 경건을 목적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이가 있을까요? 과시용 경건을 목적으로 구제를 시작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다 보면 습관화 되어버리고 처음의 순수한 동기가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구제의 동기가 과연 하나님 사랑의 실천인지, 나도 모르는 우월의식에서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구제의 보상으로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함인지 한번 되돌아볼 여유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하여 우리는 얼마나 풍족해지고 편리하게 된 줄 모릅니다. 감사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며 불평과 우울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마음의 첫 동기가 중요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독일 교회가 히틀러에게 속아 교회의 참 역할을 잃어버린 때의 이유를 값싼 은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정품 아닌 짝퉁, 참 값어치 아닌 싸구려 은혜, 회개가 없는 죄 용서입니다. 죄를 용서받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막상 그 죄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축복 받기만 원하지, 헌신의 고백, 죄의 고백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하려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그저 청소와 식당 봉사 몇 번 하고 자기 일을 다한 듯이 하거나, 일이 많아서 짜증나고 힘들다고 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안하느냐고 불만과 불평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 싸구려 은혜가 아닌가요?
예수님의 피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구약의 황소와 염소의 피가 효력이 있었으니, 신약의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효력이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2000년이 지나도록 식지 않고 뜨겁게 흐르고 있는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복음의 값어치를 가지고 오늘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해버린 세상이지만 변하지 않는 복음을 들고 살아내야 할 우리의 기독교 용사들. 다시 힘을 내어 달려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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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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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특강] 교회법(法)과 여러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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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이라는 말 외에 교회가 사용해온 용어들이 더 있다. 교회질서(Church Order), 교회헌법(Church Constitution), 교회정치(Church Government, Church Polity), 교회권징서(Church Discipline), 교회법령(Church Ordinances). 한국장로교회는 초창기 ‘규칙’으로 이름을 붙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 1907).
그런데 위 용어들을 가만히 읽다 보면 왠지 불편하다. 성경이 교회에서도 질서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말들은 차이는 있지만 모두 어쨌든 권위와 순종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지금 21세기 민주주의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당회나 노회, 총회라는 치리회의 권위를 변명하는 말이 아닐까? 치리, 통치, 정치 이런 말은 세상에 더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이 말들을 구(舊)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면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사실 세상 법은 시대마다 역사나 문화의 요청에 따라 개념이 변천한다. 심지어 법적 해석과 법적 판결조차도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용어 문제에서 우리는 시대 변천에 상관없이 영원한 진리의 책인 성경을 따라야 한다. 성경의 잣대를 가지고 이 용어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비추어 볼 때 각 용어가 강조하고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교회법’이다. ‘교회법’은 법 이전에 ‘권리’를 가리킨다. 교회의 ‘법’(권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의’(義)라는 ‘특별 은혜’에서 나온 ‘법’(권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법은 은혜로 회복된 의, 화평을 선사받은 신자와 교회의 권리를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법은 기본적으로 교인의 권리를 강조한다.
둘째, ‘교회정치’(통치/치리)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치리(통치)하신다는 사상이 이 용어의 바탕에 있다. 교회정치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왕(王)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왕이시다(마태 28:18). 교회의 치리 또한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자기 통치를 이뤄가신다. 따라서 교회법 조항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치리를 드러내는 도구다.
셋째, ‘교회 질서’다. 성경은 로마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제와 신자 사이를 구별하는 질서를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와 달리 ‘화평’을 주는 질서를 말한다. 이 화평은 구원의 질서를 말한다. 하나님은 전하는 자를 보내시며 그를 통해 말씀을 듣게 하시며, 이 들음에서 믿음이 나오게 하신다(롬 10:14 이하). 또 이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입으로 ‘시인’(고백)할 때 구원을 주신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구원의 질서에 대해 말한다. 이것이 교회 생활에 토대가 된다. 교회에서 질서를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는 로마천주교처럼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대신 교인의 권리, 직분의 선택과 임직, 성례와 예배, 치리회와 관련하여 질서를 강조한다. 특별히 직분이 교회에서 구원을 전달하는 기능을 하도록 한다. 권징은 교회의 거룩과 관련하여 시행되는 질서다.
넷째, ‘교회 헌법’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 등을 모두 묶어서 이렇게 부른다. 이는 미국교회의 영향이다. 본래 개혁주의전통은 신앙고백서와 교회정치를 하나로 묶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구 교회도 점점 이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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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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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사랑을 위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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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찬양예배 시간에 성만찬 예식이 있었습니다. 부목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제가 성만찬 예식을 집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갑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와서 몇 십 년 동안 살다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3부 예배가 끝난 후 한 가족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제가 목회하던 부산 땅끝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신앙 생활하던 목사가 옮겨서 목회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저를 한 번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곧바로 다음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반가운 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제가 그분들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통해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가 집례하는 자리에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인생에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그 의미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께는 웃음을 드리고, 의지가 되는 아들이었겠지요. 혹은 우리 아들이 목사라며 자랑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또 저는 아내의 인생에 수십 년을 동행하는 중입니다. 아내는 부모님과 산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저와 살고 있습니다. 아내 역시 제게 그런 의미로 다가와 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남은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힘들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저는 자녀들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의 의미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저도 옆에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좀 도왔습니다. 아직도 제게 용돈을 받는 자녀도 있지요. 제 자녀들이 제게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녀로 태어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가는 의미는 이렇게 보면 남의 인생에 미친 영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은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인생의 의미는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돈 벌려고, 권세를 누리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태어났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랑에서만 그 의미가 확보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매우 관심이 있고,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노력하는 이들 중에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매정하고, 끊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한 일에 충격을 받고 베드로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오순절 다락방에서 자신들에게 임하신 것과 똑같이 임한 것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는 분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의 비극은 연결을 끊어내는 데서 발생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향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릅니다. 그 타당성을 이해는 하지만, 아쉬움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국익, 민족 이익, 집단 이익,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익 앞에서 사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임영수 목사님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행복을 알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점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그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디 사랑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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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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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이 발로 다시 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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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숨이 가쁠 때마다 심장이 수고하고 폐장이 더 강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지만, 두 발이 이토록 수고했고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두 발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짱짱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매 주일이면 강단에 서서 5번, 6번을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와 각종 집회를 다닐 때에도 원고에 매이지 않고 강단을 뛰면서 뜨거운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저는 두 발 가운데도 발뒤꿈치가 이토록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따금씩 발뒤꿈치에 각질 같은 것이 벗겨지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두꺼운 발뒤꿈치에 저온 화상을 입고 저는 그 딱딱한 가죽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 같은 발꿈치 가죽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좁아서 세계 각지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무감각하고 딱딱한 발뒤꿈치 가죽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뒤꿈치 가죽이 있었기에 산행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마음껏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산꼭대기까지 다시 내려가기가 싫어 더 걷고 또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몇 주 걷지 못하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발뒤꿈치의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요. 저는 재생 치료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집사람의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집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살갗을 도려내었을 때 마취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봄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속살을 강제로 뜯어 피가 나게 하고, 그 쓰린 속살에 허벅지 살을 붙일 때의 쓰림과 아픔이 저로 하여금 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아픔과 쓰라림은 영혼의 아림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작은 화상에도 고통을 느낀다면 암 환자들은 어떻게 투병을 하고 있을까요? 또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괴로워했던 욥은 어떻게 인내했을까요? 아니, 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통, 영혼의 아림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로뎀나무 아래 눕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 겨울 끝자락을 맞을 때는 아니지만 믿음으로는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홀한 시련도 다 끝나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식을 한 부위가 잘 생착이 되어 새살이 차오르고 굳은살로 변해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숨 쉴 수 없는 고난의 뜨거운 바람 내 영혼을 찢으며 불어올 때 광야에 홀로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 속에 깊은 밤 뜨거운 눈물 흘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가시밭길 맨발로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생명이기에, 사명이 눈물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은혜이기에 사명이 축복이기에 외롭고 고독해도 사명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폐장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체중과 모든 무게를 떠받들고 받쳐줄 수 있는 이 두 다리 그리고 발바닥에 주신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번 소생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저와 같은 화상을 입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저의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맞을 환란의 방어막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걷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뛰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달려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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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