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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성령의 불을 받아라 (누가복음 12: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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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물 탄 듯이 맹탕인 인생들이 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 무미건조한 물맛이다.
계3:14~16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하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였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지형적으로 북쪽 히에볼리의 물은 뜨거운 온천수이고 남쪽 골로새의 물은 시원한 냉수지만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만다. 삶도 그러한데, 뜨뜻미지근한 맹탕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슴에 불덩어리가 있는 사람이 있다. 냉철하게 시원한 것도 아니고, 불같은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닌 맹탕인 사람, 불씨, 열정이 없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던지러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신 게 아니라 불을 땅에 던져서 분쟁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였다. 잠시의 평화가 아니라 영생의 복을 받는 항구적인 평화를 얻어야 된다. 당장 시끄러울 까 싶어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지나면 복음을 전할수가 없다. 집안이 시끄러울 까 싶어서 미루고 연기하다보면 회개 할 틈이 없이 너무 늦어서 가족구원을 놓치게 된다.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천국의 복을 전하기 위해서, 회개하라는 불을 던지고 충격요법을 써라.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급진적이고 강력하다. 성령이 임할 때 생짜배기 베드로가 변화되어 하루 저녁에 삼천 명을 변화시키는 불의 사도가 되었다. 성령은 불처럼 나타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뜨겁다. 뱀은 냉혈동물이다. 저온에서 증식하는 암세포처럼, 사탄마귀의 역사는 싸하고 차갑다. 신앙생활도 냉랭하고 식어빠진 심령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은혜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불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내 가슴에 발화가 되고 착화가 되고 점화가 되어야 한다. 내 마음의 엔진에 발동, 시동이 걸려야 한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해서 뜨겁게 반응할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세례를 받고 큰 기쁨이 있었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이다. 물 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하라. 불씨가 없으면 아예 소망이 없는 것이다. 껍데기 신앙, 무늬만 신앙, 인본적이고 세속적인 짝퉁 믿음의 가면을 벗어라. 회개하라. 성령의 불을 받아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서 하늘의 영광과 거룩함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할 때 천사가 핀 숯불로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였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모든 더러운 것을 불사른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작은 불씨가 큰 불로 불타오르게 하라. 성령을 소멸치 말라.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첫사랑이 식지 않도록 이열치열하라. 바빠도 기도하고 힘들어도 찬송하고 어려워도 선불감사하라. 삶이 역기능적으로 꼬이지 않고, 피곤이 만성이 되지 않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은혜 위에 은혜를, 갑절의 영감을, 칠 배의 권능을, 백배의 결실을!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열정의 소유자들이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이 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나아가야 세상을 이길 힘이 있다.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나가서 전하든지, 보내든지,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기도하든지, 섬기든지, 헌금하든지 한 가지를 똑 부러지게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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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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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뒷것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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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가수며 연출가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명인들 중에서도 동명이인이 많으니 “아침이슬”의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떠나기 석 달 전 어느 공중파 방송에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었지요. 제목부터 전율을 느꼈습니다. “뒷것”이라니, ‘앞것’이 아니라 “뒷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든 간에 분명하게 누렸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을(1951년생) 그는 철저하게 ‘앞것’이 아니라 “뒷것”으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아침이슬” 탄생부터 그랬습니다. 1971년 어느 날 습작처럼 발표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악보, 현장에서 까닭모를 놀라움을 느꼈던 후배가 주워서 펴고 이어 붙여 연습하며 발표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흔쾌하게 허락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된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이었기 때문입니다. 원곡자인 그도 훗날 이따금 불렀지만 어느덧 저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전설이 되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함께 불렀던 이 노래의 앞것으로 후배(양희은)를 세우고 스스로는 기꺼이 “뒷것”을 자처했습니다. 동물원, 들국화, 강산에, 박학기, 장필순, 권진원, 유리상자도 그가 후원한 자들입니다. 고 김광석의 공연장을 제공했으며, 세계적인 재즈 싱어 나윤선도, 대가수 윤도현에도 모두 그의 후광이 서렸습니다. 얼마나 쟁쟁한 앞것들입니까!
뒷것은 뒤에서 그저 서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무대 뒤편에서 처절하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존재가 아닐까, 김민기 때문에 떠오르는 상념(想念)입니다. 1991년, 그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십 년 노래 인생을 정리하면서 기념 음반을 발매하기로 하고 제법 묵직한 계약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어려운 형편의 연극인들을 위해 만든 공간이 바로 <학전(學田)>입니다. 그리고는 묵묵하게 뒷것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가 만든 이 배움터(학전)을 통해서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대표적인 앞것들이 ‘학전 독수리 5형제’라 불리는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입니다. 또 얼마나 쟁쟁한 앞것들입니까! 하지만 본인도 잠깐 연극계에서 앞것처럼 자리매김할 때도 있었습니다. 흥행가도를 달렸던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연출가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공연이 잘 될수록 그는 더 낮은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친구다’, ‘개똥이’ 같은 어린이극을 잇달아올린 것입니다. <지하철 1호선>을 멈추면서까지 그랬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돈 되는 일을 하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이 합동결혼식을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만든 노래가 애국가의 대체곡으로까지 거론되는 <상록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까지 뒷것의 인생을 살고자 했을까요? 수줍은 성격 탓이었을까요? 평생 저항의 사람으로 살았으니 그런 이유 같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는 자질이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일까요? 서울대미대를 졸업하고 기타 하나로 당대 음악의 천재들까지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는 그 실력을 보면 또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후대에 더 이름을 남기고자 했을까요? 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책세상, 2001)에 “수정된 누가복음 18장 14절”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써놓았습니다(99 p.).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지금은 낮은 곳에 있으나 언젠가는 높아지리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낮춤을 이용해서 높임을 받으려는 영악한 목적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음험한 자들은 또 없을까요? 그러나 적어도 예수는, 니체가 어떤 의도로 또 날카로운 펜끝을 누구에게로 향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런 부진정한 뒷것론을 펼친 적도 없고 또 그런 뒷것을 가장하며 사시지도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8-9), 예수야말로 뒷것 중의 뒷것이요 그가 진 십자가야말로 뒷것의 극치가 아닙니까?
김민기가 노래패로 활동을 펼쳤던 곳은 “청개구리의 집”이었는데, 서울 명동에 있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 한쪽에 마련된 무대였습니다. 한국에서는 1922년 시작된 YWCA는 주지하다시피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약자입니다. 수도 없이 노래했을 그곳에서 김민기는 많은 젊은 여성 그리스도인(Christian)을 앞것으로 세우시는 위대한 뒷것의 존재를 만나지 않았을까요?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도 YWCA 파견 교사였다 하니, 혹시 김민기의 <상록수>라는 제목도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예수와 김민기의 신비한 만남은 없었는지, 뒷것 김민기는 어쩌면 예수의 뒷것으로부터 나오지는 않았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 은밀한 접점 가운데서 탄생했을지도 모르는, 고인의 노래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금관의 예수>를 소개하며 글을 맺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1973년, 김지하 글, 김민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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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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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새롭게 시작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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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이륙해 하늘을 날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출발과 시작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과 성격이 다르지만 첫 발을 내딛을 때 너무 많은 고민과 염려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늘 시작입니다. 자발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떠밀려서라도 시작하는 게 인생의 걸음입니다. 망설이고 안될 것이라는 핑계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시작. 작심삼일로 끝날 것 같아 도전하기 시작. 그러나 의외로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고민들로 힘이 빠지지만 막상 시작하고 그 일을 이어가면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시행착오와 실수를 통해 발전하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시작을 멈추게 하는 불안, 게으름, 과거의 습관을 버리로 일단 시작해봅시다. 일단 같이 출발해봅시다. 시작하는 순간 뭔가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첫째, 시작하면 새로운 일을 넘어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주위에 365일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식단, 운동 그 어느것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매번 걱정만 합니다.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했으니 실천하고 있다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는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작하려면,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거대한 것이 아닌 사소한 것들이라도 시작해야 새로운 일이 생기고, 새로운 희망도 생깁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책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주 글을 쓰는 실천을 할 때, “나도 작가가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실천할 때 흔적이 남습니다.
문을 열어야 볼 수 있고, 담은 넘어가야 나갈 수 있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습니다. 저 망망대해를 지나는 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배를 지나는 자리마다 물결의 흔적이 남습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산을 오르는 땅을 밟는 자리마다 발자국의 흔적이 남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어두운 시절을 시로 남겼기에 그의 흔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을 “그냥 보내고 있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는 돌아서서 나의 흔적이 남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바라보고 있다고 되어지지 않습니다.
밀가루만 본다고 빵이 되지 않습니다. 강물을 바라보고만 있다고 건널 수는 없습니다.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 작은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야 합니다. 시작해야 시간 속에 존재하고, 시작해야 생명이 보입니다. 시작해야 오늘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으니, 결국 시작이 반입니다.
넷째, 시작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변하는 세싱입니다. 이미 세상은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도 같이 출발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나의 모습을 보면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연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무엇이든 할 수 있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바로 그 주님에게 나의 미래를 맡긴다면 시작도 출발도 거침없이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일을 시작해야 경험이 생깁니다.
시작은 도전입니다. 시작은 미래의 모를 일에 대한 모험입니다.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해봅시다. 같이 경험해봅시다. 같이 경험할 때 하나님과 친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역동성이 생깁니다. 순종이 무엇인줄 알고 음성이 무엇인줄 알게 됩니다.
이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까!
다시 기억하십시오. 시작이 반이자, 시작이 곧 희망입니다. 주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할 때 그 분이 하시는 일을 기대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확장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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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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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서양음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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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경남지방에서 서양음악 전파에 기여한 두 교회는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였다. 물론 두 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제일영도교회나 항서교회 등도 기여한 바 있지만 첫 두 교회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컸다. 우선 호주장로교 선교부 중심으로 소개하면, 호주선교부 제2진 5명은 1891년 10월 12일 입국하게 되는데 이들은 1892년 봄 부산시 동구 좌천동으로 이주하여 한옥에 거주하면서 집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부산진교회의 시작이었다. 호주 여선교사 중에 1892년 8월 3일 내한한 베시 무어(Bessie Moore)는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고 음악적 소양이 깊었던 여성으로 부산진교회에서 풍금 반주자로 활동했다. 정확하게 언제 부산진교회에 풍금을 설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93년에는 반주용 악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배용으로 찬양 반주로 그리고 일신여학교 음악 수업에 사용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금으로는 일신병원 내의 메캔지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39건 풍금이다. 그 후 교육용으로 일신여학교에서 사용한 풍금이 61건 풍금인데, 현재 일신여학교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길지 선교사는 교회 음악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그는 1900년 10월 29일 내한하여 11월 4일 부산진교회 첫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때 풍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그해 12월 9일 새로 매입한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날 자 일기에서 왕길지 목사는 공간이 좁아 4,5명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오르간이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오르간을 밖으로 내어놓고 예배드린 일을 말하고 있다. 1900년 당시 예배를 위한 서양 악기 풍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길지는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후일 장로교공의회의 찬송가위원으로 활동했고, 마틴 루터가 1529년에 작시 작곡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1905년 판 ‘찬셩시’에 수록되게 했다. 이 찬송은 1935년판 신편창송가에 다시 실리게 된다. 그는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풍금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서 은퇴하고 1937년 3월 호주 멜버른으로 귀국할 때 한국에서 사용하던 그 풍금을 가지고 돌아갔는데, 1987년 나는 이 풍금을 본 일이 있다. 꼭 50면이 지난 때였다. 그의 아들이 멜버른대학 주변인 파크빌 82번지 스토리 가(82 Story St, Parkville)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 왕길지 선교사가 늘 연주했던 그 빛바랜 풍금을 볼 수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61건 정도의 크기로 보였다.
그 이후 양악 보급에 크게 기여한 호주선교사가 1905년 4월 내한한 켈리, 1913년 내한하여 진주와 마산에서 일한 안란애(A. W. Allen)와 1916년에 내한한 허대시(D. Hocking), 그리고 1918년에 입국한 위대서(M. Withers) 등이었다. 켈리는 음악적 소양을 갖춘 여성으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는데 1912년에는 매켄지(매견시)와 혼인하게 된다. 안란애는 멜버른대학에서 음악, 특히 피아노를 전공한 목사로서 진주광림학교와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가 창신학교에서 일할 당시 7가지 악기로 구성된 기악단을 만들고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마산에서의 첫 서양악기의 소개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정한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추정했다. 그런데 어느 하루 그의 연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심장마비로 죽어 있었다. 미혼 목사로 혼자 살았기에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응급 조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날이 1934년 7월 26일이었다. 허대시는 음악에 깊은 식견을 가진 여성으로서 부산 마산 통영에서 교회 한양대를 지도하고 서양음악을 소개했다. 위대서는 처음에는 마산에서 짧은 기간 일했으나 1923년부터 한국을 떠나던 1941년까지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부산진교회 찬양대를 지도하고 반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영향으로 1920년 7월 부산진교회에는 ‘청년찬양대’가 조직되고, 대원들은 일본에서 구입한 여러 악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청년찬양대의 음악 지도자가 허대시 선교사였다. 그래서 1921년 4월 초에는 첫 번째 음악회가, 그해 12월 9,10일에는 두 번째 음악회가, 1922년 6월 8일에는 세 번째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이때의 일은 ‘동아일보’(2021. 12.16, 1922. 6.5, 14)에 보도되었다. 이때 피아노, 풍금, 바이올린, 만도린 등이 악기가 동원되었다. 따지고 보면, 부산경남에서 일했던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 찬양대를 통하여 서양음악이 소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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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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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끝나는 것과 계속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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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합니다. 죄가 들어온 후 사람의 모든 것은 유 한함에 갇혔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일시적인 것입니다.
언젠가 요양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연세가 구순이신 장로님은 움직이지 못하고, 의식도 미약한 가운데 다른 이들의 손에 인생을 맡긴 채 누워 있었습니다. 상당한 재력가에 박사님이라고 하는 장로님에게는 남은 게 별로 없었습니다. 절반 정도 남은 베지밀 박스에, 기저귀 두어 세트, 그분 이름이 적힌 빨대가 달린 플라스틱 물병, 갑 티슈 서너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분이 입은 환자복은 나중에 누군가 다른 이의 몸을 가져 주겠지요. 간호사님과 돌보미들은 그분이 신체가 커서 씻기고 옷을 입히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은 몸조차 남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상황인데, 영원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향해 사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예로서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의 무리를 지칭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내세나 부활을 부인하고, 현세만 인정했습니다. 현세만 인정하다 보니, 그들은 현세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후손이 없이 죽은 한 남자의 아내가 남편의 여섯 동생과 모두 결혼한 후 다 죽었으니, 부활이 있다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한 이유도 이들이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두개파처럼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봅니다. 현세에 매달려 삽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 영원한 가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개 돈과 지위와 건강과 쾌락만 추구합니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기복주의 신앙 역시 이런 맥락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은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간 이유는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흉년이 두 번째 덮쳤을 때, 야곱의 모든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십 칠 년을 살았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요셉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그는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이어가실 일, 즉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을 주실 일을 언급했습니다. 자신은 유한한지만,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어질 것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 인생은 머지않아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일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는 일, 선한 일을 위해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 우리 유한한 시간을 사랑에 쏟는 일은 매우 소중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하면서 그 교회 역사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초대 목사님에 이어 여러분의 목사님들이 이어 교회를 섬겼고, 모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건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교회를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여전합니다. 우리도 영원히 이어질 일에 우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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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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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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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하반기 교역자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이번 워크숍 주제는 ‘체인 리액션(chain reaction, 연쇄 반응)’이었습니다.
체인 리액션은 원료가 되는 화합물에서 생성물이 얻어지는 과정이 몇 가지 소반응의 조합으로 성립하고, 하나의 반응(연쇄 개시반응)이 시작되면 그 생성물(라디칼, 이온 등)이 다음 반응을 일으켜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반응을 말합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의 눈덩이가 다른 눈덩이와 뭉쳐서 큰 눈덩이가 되고, 그 큰 눈덩이들이 구르고 뭉쳐서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엔트로피(entropy, 높은 에너지, 높은 확률) 법칙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워크숍 주제를 체인 리액션으로 정한 이유는, 지금의 새에덴교회에 머물고 싶지 않고, 오늘의 새에덴교회라는 성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강의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반기에 거룩한 눈사태를 일으키고 거룩한 생명과 부흥의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조별로 발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토의와 발표는 첫날 밤부터 시작해 다음 날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부교역자도 힘들었겠지만, 전체를 총괄하고 지휘하는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저녁에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을 걷기도 하고 온천 사우나를 하기도 했으며 스크린 야구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강원도에 가서 계곡 길을 걷고 온천도 즐기고 스크린 골프나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저도 이런 낭만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제가 누구보다 산을 좋아하고 계곡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점심 먹고 한 15분 정도 걷고 오긴 했어요. 그런데 옆에 함께 걷던 선 목사님이 “저녁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 끝까지 걸어가 볼 수 없습니까?”라고 했지만, 저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늦게 잠들면 다음 날 워크숍을 인도할 능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사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앉아서 워크숍을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것도 체리(체인 리액션의 줄임말)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을 청했지만, 이따금씩 꿈을 꾸고 또 잠에서 깨어날 때는 계속 ‘체리’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생각만 났습니다. 그렇게 잠을 청했기 때문에 제가 마지막 통성기도 시간까지 잘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끝나고 나서라도 주전골 계곡을 걷고 싶었지만, 춘천에 들러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마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색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또 춘천에서 교회로 오는 길에 마지막 수련회 7강과 8강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교회에 돌아와서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교역자 워크숍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주중에 하룻저녁이라도 다시 모여서 더 토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문학소년 내지는 낭만 가객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워크숍 전후로 저는 이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가득가득 밀려오는 것입니다. 마치 가슴 속에 밀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체리'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어떨 때는 부담감으로, 어떨 때는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강원도에 가서 낭만적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럴 환경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가 자제를 한 거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는 낭만보다 부담감이 더 크고, 현재의 즐거움보다 미래의 설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제가 오색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습니다. “장년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오색을 한 번 찾아오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과 그 기나긴 주전골 계곡을 걸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 다짐이 지켜질지, 안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주전골에 12폭포까지 걷고 오리라고 다짐해 봤습니다. 물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을 전제로 하고 말입니다.
부디 후반기 사역에는 우리 새에덴교회에 ‘체리’의 바람, ‘체리’의 파도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체리’의 바람과 파도가 불어올수록 담임목사의 자리는 더 고독하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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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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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마당’을 내어줄 의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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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시각장애를 가진 김예지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했던 연설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 연설문을 요약하면, 코이라고 불리는 물고기를 작은 어항 속에 넣어두면 크기가 10cm를 넘지 않지만 수족관에서는 30cm까지, 그리고 강물에서는 1m가 넘게 자란다. 즉,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기회와 가능성, 그리고 성장을 가로막는 어항과 수족관이 있으니, 이런 어항과 수족관을 깨고 국민이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강물이 돼주시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른 바, 환경에 따라 성장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코이의 법칙’이다. 필자는 이 연설을 접하면서 ‘코이’라는 물고기가 다름 아닌 필자임을 느꼈다.
필자는 1980년 생으로 선천성 뇌성마비장애를 갖고 있으며,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목사다. 그리고 40여 년 가까운 세월을 경기도 의정부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오다가, 2년 전에 부모와 가족을 떠나 부산으로 와 홀로 거주하고 있다. 내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셨다. 부모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부모님을 설득하여 부산으로 왔다.
필자에게 성경말씀(창12:1)을 언급하시면서 부산으로 오게 만든 두 분이 계신다. 그 두 분이 나누신 대화를 한 분이 SNS에 올리셔서 이곳에 옮겨본다. “얼마 전에 ○○○목사와 식사하며 교제하며, 무슨 얘기를 하다가 유한영 목사 얘길 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고맙다’고 하니 ○목사님이 그랬지요. 자신은 한 일이 없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마당을 내어주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참 귀합니다. 놀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마당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을 ○목사님은 유한영 목사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유한영 목사는 그 마당에서 정말 즐겁게 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부산으로 온 지 2년,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내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나그네이고 이방인인 나를 세대로교회 성도들과 많은 사람들이 환대해 주었다. 그러면서 놀 수 있도록 마당을 내어주었다. 그 마당에서 나는 즐겁게 할 일을 찾게 되고, 교회를 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장애인식개선교육강사’ 양성과정에 최종합격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목사님! 부산으로 오시기를 참 잘하셨죠?”라고. 이 말에 난 1초에 망설임도 없이 “네. 100% 잘한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40여 년 간 살았던 곳이 어항이었다면, 2년 째 살고 있는 부산은 수족관을 넘어 강물이다. 나는 그 강물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고, 이제는 강물을 넘어 바다로 나아가려고 준비 중이다.
세상은 장애인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필자도 두 분을 포함하여 환대해 준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부산에서의 삶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역량과 내가 무얼하고 싶은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 다시 유턴했을 수도. 그러나 많은 분들이 장애를 가진 나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새로운 터전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많은 교회들이 가진 자, 비장애인,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당을 내어주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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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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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선한 삶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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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미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가 암살범의 총에 의해 피격을 당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기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국민 약 1천 200명이 사망했다. 그날 이후,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팔레스타인 국민 3만 5000명이 사망했고, 8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충격과 아픔 그리고 슬픔과 분노의 현장들이다.
1916년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코파 아메리카 2024 대회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 1960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UEFA 유러피언 풋볼 챔피언십 2024 대회에서 스페인이 우승했다. 1877년 영국에서 시작된 2024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바르보라 크레이치코바가 남녀 단식경기에서 우승했다. 기쁨과 환희 그리고 감격과 감동의 현장들이다.
슬픔과 분노의 현장이든지 기쁨과 환희의 현장이든지 그곳에는 항상 그 현장을 목도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또한 여러 가지의 매체들을 통해서 그 현장의 소식들을 전해 듣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일들이 일어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과 현장에서 일어난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의 정서적 충격 여파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목격하고 경험해야 하는 삶의 현장이 후자여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1. 선한 삶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심상사상(心想事成),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 했다. 지성이면 감천과 유사한 의미다. 세상과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자가 얻게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부귀와 영화, 출세와 성공, 건강과 명예, 관계의 회복과 심신의 평안을 통한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에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복권도 구매해야 당첨될 수 있다. 선한 삶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악함을 원하면 삶의 자리로 그러하다.
2. 선한 삶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선한 삶을 추구하고, 계획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천리의 길도 첫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천자문도 하늘 천(天)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선한 삶의 현장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 월드컵이 진행되고, 축제가 열려도 자신이 그 현장에 없으면 현장이 주는 기쁨은 결코 누릴 수가 없다. 현장의 기쁨과 감격은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열매이며 축복이다.
3. 선한 삶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인생에서 받아야 할 가장 큰 축복이 만남의 복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 했다. 곁에 있으면 물드는 것이 상식이다. 생선을 만지면 비린내가 나고 꽃을 만지면 향기가 난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인격자가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인생을 망친다. 동일한 선상에서 비판적이고 호전적인 사람을 만나면 삶이 거칠어지고,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을 만나면 인생이 어그러지기가 쉽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선한 삶의 자리와 선한 삶을 향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기독교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으로 채워져 가고 있고, 무신론과 탈종교화 사회로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먼저 선한 삶을 추구하고, 선한 삶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선한 삶의 모델이 되어 주고,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선한 삶의 현장을 접하게 해주는 통로와 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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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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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서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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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지방에서 서양음악, 곧 양악(洋樂)은 언제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필자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무심하게 지냈는데 최근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대강이라고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 어떤 음악교사가 이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가 서양음악이라할 때 우선 동양음악이 아닌 것으로 정리하면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음악을 처음 알게 된 때는 1780년이라고 말한다. 박지원이 청나라 사절로 다녀온 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썼는데, 이 책에 언급된 풍금기(風琴記)가 첫 언급이라고 한다(유덕희, 세계음악교육사. 406). 그후 천주교의 전파와 더불어 코랄이나 그레고리안 찬트 등 교회 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이 소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784년 이승훈의 영세 이후 천주교는 백여년 간 금압된 종교였음으로 천주교회 음악이 대중화에 기여하지는 못했다. 실제적으로 한국에 양악이 소개된 개신교의 전파 이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상우는 한국에 서양음악이 소개된 시점을 1885년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서양문화의 옷을 입고 전파되었으므로 1884년 이후 서양 음악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통해 유입된 것이다. 첫 선교 학교라고 볼 수 있는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에서는 처음부터 ‘창가’(唱歌)를 가르쳤는데, 서양음악의 보급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창가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이화 경신, 인천의 영화여학교 등 선교학교와 교회에서 찬송가를 통해 서양음악이 소개 된다. 북감리교의 존스와 로드와일러의 ‘찬미가’(1892), 장로교 첫 선교사 원두우의 사성부(四聲部) 곡과 가사로 된 찬양가(1894), 북장로교 그라함 리와 기포드 부인의 찬셩시(1895)를 시작으로 여러 찬송가가 발간되면서 서양음악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최남선의 ‘소년’이 창간된 1908년 당시 찬송가 발행 부수가 6만 부, 1910년 당시 22만5천부, 1911년에 다시 5만 부, 그래서 찬송가 첫 발간 이후 22년간 87만4천5백 부가 발간되어 양악이 한국인의 일상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20년대까지 서양음악은 사실상 찬송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구한말 왕실이 군악대를 조직하고 독일인 음악가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군악대의 육성을 맡긴 일(1900)도 양악 소개의 한 축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부산경남에서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서양음악이 소개되었을까? 이 지방에서의 양악의 소개도 개신교 선교 및 선교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891년 내한하여 부산에 정주하게 된 윌리엄 베어드는 영선현에 자신이 주택을 건립하고 예배용으로 서양 악기를 준비했는데 그것이 일본 요꼬하마에서 1892년에 수입한 풍금이었다. 이 풍금이 부산경남 지방 두 번째 서양식 악기였다고 한다. 베어드의 부인 애니(Annie)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1859년 미국인 와너(A. B. Warner)가 쓴 가사에 브레드버리(W. B. Bradbury)가 곡을 붙인 “예수 사랑하심”(Jesus Love Me this I Know)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풍금을 타며 이 노래를 가르쳤는데 애니가 번역은 이 가사는 1898년에 편찬된 찬송가 「찬성시」에 게재되었다. 1895년에 설립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처음부터 성경, 가사, 조선말, 한문 등과 창가(음악)을 가르쳤다. 창가는 사실상 찬송을 가르친 것인데 여 선교사들의 몫이었다. 1914년 이후에는 교장인 대마가례(M. Davies)가 음악을 가르쳤다. 이런 음악교육이 서양음악의 전파였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는 예배음악을 통해 양악을 소개했다. 부산에 처음 소개된 피아노는 선교사 사보담(William Sidebotham) 부인 에피(Effie)의 것이었다. 이들은 1899년 11월 내한하여 대구지부에서 일하게 되는데, 태평양을 건너 온 피아노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대구 달성이 사문진 나루에서 16km 거리인 대구시 중구 종로(현재의 약전골목)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운반했는데 이것이 대구지방 첫 피아노였다. 1900년 3월 말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보담 선교사가 1900년 11월 부산선교부로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소유 피아노도 부산으로 이동하여 부산과 경남지방 첫 피아노가 된다.
부산에서 8년간 일한 사보담 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1907년 말 미국으로 돌아갔고 1908년 12월 3일 사보담은 가스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후 에피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8년간 부산을 지켰던 그 피아노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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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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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심슨 가족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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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미국 대통령선거전 관련 이야기가 화제입니다. 그런데 외신을 통해 아주 흥미로운 보도 하나가 전해졌지요. “심슨 가족의 예언”이라는 촌평입니다. 22일(현지) 미국 CNN과 CBS 방송은 최근 온라인에서 24년 전 방영된 심슨 가족(현재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최상수 TV 시트콤 애니메이션)의 한 에피소드 내용을 현재 상황과 비교하며 작성한 글이 퍼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회차는 극중 주인공 이름을 따서 “바트 투 더 퓨처(Bart to the future)”(1985년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영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의 패러디)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심슨 가족의 자녀 중 한 명인 리사 심슨이 성장해서 2030년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한다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이든이 사퇴하면서 여성 부통령인 해리스가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급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이 일이 사람들 주목을 끌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만화는 비슷한 시기에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는 당시로서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내보냈는데, 2016년 실제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만화 속에서도 그 다음에 리사 심슨이 등장하는데, 이번에 트럼프의 대항마로 여성이 최초의 대통령 후보자가 되기 직전이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 너무나 신기해서 사람들이 예언 아니냐고들 그럽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만이 아니라 세부적인 묘사까지 예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일치했는데, 2017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장면은 놀랍게도 17년 전 만화 속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서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켰더랬습니다. 그리고 데자뷰(déjà-vu) 같은 사건이 이번에 또 다시 벌어진 건데, 급부상한 해리스 부통령 사진이 온 세상에 퍼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습이 또한 이십 여 년 전 리사 심슨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해리스도 심슨도 똑같이 보라색 자켓을 입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게다가 둘 다 귀에는 진주귀걸이를, 목에는 진주목걸이를 장신구로 착용했는데, 마치 해리스가 만화 속 주인공을 모델로 했다 여길 정도로 똑같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예언 운운 하지는 않겠지요. 2012년의 심슨 가족 판에서는 가수 레이디 가가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공연하는 장면을 실었었는데, 2017년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에서 가가는 만화 그대로를 재현하고 말았습니다. 만화가 공연이 되고 공상이 현실이 되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미 1990년대에 지금은 상용화된 휴대전화나 가상현실 같은 류(類)를 벌써 예측하여 그렸다는 사실입니다. CNN은 “심슨 가족이 현대판 노스트라다무스로 찬사를 받고 있다”며, “복권 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야 할 판”이라는 우스갯소리 같은 논평을 남겼습니다.
심슨 가족만 예언자로 일컬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월드컵 문어를 아십니까? “파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의 문어 한 마리가 UEFA 유로 2008과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승패 여부를 높은 확률로 맞춰 일약 유명해져서 죽을 때까지 점쟁이 문어, 족집게 문어 등의 별명을 갖고 유명세를 떨치며 살았습니다. 문어가 그럴진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유튜브를 보면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자칭 예언가들이 수두룩합니다. 그 중에는 잘 알려진 노스트라다무스로부터 한국의 탄허 스님 그리고 9.11테러부터 오바마 당선과 코로나 창궐까지를 정확하게 맞추었다는 바바 반가, 역시 코로나 등 사건을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인도의 소년 예언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언가들이 갑자기 많이 등장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만큼 예언과 같은 이야기에 솔깃한 세상이 되었다고 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기야 손에 왕(王)자를 새기게 하고 당신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했다는데 그대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일약 스타가 되어 나아가 정치계까지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알려진 무슨 스승이나 법사 같은 이들이 있다지요? 점술가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각종 점쟁이와 자칭 예언가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이 그만큼 미신과 무속과 풍수와 도참에 빠져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풍조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 몹시 슬픕니다. 성경적 관점에 설 때 기독교인들은 특히 예언이라고 하는 개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정통적인 교리에서 이르는 바와 같이 이미 구원에 관한 예언은 다 이루어졌고(충분함),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은 그렇게 큰 실익도 없다(무익함)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분별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월터 모벌리는 『예언과 분별』에서 그 동안 예언의 주장과는 달리 예언의 분별에 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전문가들조차 논의하지 않는데 어떻게 일반인 신자들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예언이 미래의 종말이나 새로운 세상에 관한 즉 묵시(黙示)에 해당한다면 한층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스티븐 쿡은 『예언과 묵시』에서 묵시에 관한 새롭게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묵시에 관해서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거나 박탈 이론으로써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한층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손바닥 글자나 무덤을 이장하거나 예언이라는 말에 의지하여 인생을 변화시키려는 작태를 그만두어야 할 때입니다. 헛된 예언이 아니라 참된 계시의 말씀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일에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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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