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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독 안의 게인가 새끼거북이 될 것인가
    지난 2007년 이맘 때(12월 7일)에 충남 앞바다에서 선박 간 충돌로 인해 한국역사 상 최악의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쏟아진 기름 물량만 12,547킬로리터, 환산하면 1,200만 리터 넘는 양이 하필이면 청정해역 안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거대한 기름띠가 바다를 포위했고, 넘실대는 시커먼 파도가 해안으로 돌진했으며, 해변은 모래와 미역 대신 온통 기름덩어리로 뒤엉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보거나 맡아도 괴로운 현장이었으나, 무엇보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대재앙(연합통신)이 일어난 태안 해양생태계의 80%가 타격을 입었는데 생명력이 강하기로 소문 난 불가사리마저 폐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외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하는 가운데 완전한 회복에 수십 년이 걸릴 거라는 예측이 난무했고, 사건 및 후속 대응 현장을 취재하던 국내언론사마저(이를테면 한겨레 등) 무조건 10년 이상은 필요하리라 보았습니다. 그만큼 상황은 긴박했고 엄중했으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건 직후 시군 당국은 즉각 비상재해와 재난지역을 선포했고 공무원과 군인들이 투입되면서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인파가 만리포로 향하는 도로를 가득 메우는 수준으로 늘어나 물경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대동단결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당시 섬기던 교회에서도 청년들이 휴가까지 얻어가면서 각자 기름을 닦을 헝겊과 컵라면 등 먹을거리를 챙겨서 결연한 출정식(?)을 치른 후 서해안으로 향하는 교회 차량에 탑승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회 어른들이 박수를 쳐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자 해안의 풍경이 바꼈습니다. 검은 기름 띠대신 사람들이 걸친 흰 우의가 해안선을 따라 거대한 하얀 띠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사랑의 띠 앞에서 재앙은 무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기름포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일이 바위와 해변의 기름을 손수 닦아내기 시작했지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와 육지가 제빛을 찾았고 괴사했던 해초류가 살아났고 떠났던 물고기들이 돌아왔습니다. 회복은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이 놀라운 역사를 담은 22만건의 기록물은 2022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언젠가 “독 안의 게”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참게는 털이 있고 발톱이 날카로워서 아무리 깊은 독 속에 집어넣어도 다시 기어나온답니다. 그러나 예닐곱마리릉 한꺼번에 넣으면 그러지를 못한다지요. 한 마리가 위로 올라가려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랍니다. 반면에 새끼바다거북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네요. 어미 거북은 알을 날기 위해 뭍으로 나와 깊이 50, 넓이 2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500-1,000개의 알을 낳는데, 부화한 새끼들은 사전에 훈련이라도 받은듯 서로 힘을 합해서 구덩이를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이 천정에 있는 모래를 파고, 가운데 녀석들은 벽을 허물고, 아래에 있는 녀석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다져서 발판 삼아 올라옵니다. 학자들이 실험해 본 결과, 알이 하나면 탈출 확률 25%, 둘일 때 60%, 알이 네 개 이상이면 100%였다고 합니다. 경험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새끼들이 본능적으로 서로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한 천연적인 사례입니다. 위기 속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방버둥쳐도 소용이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들의 발목을 붙잡으면 다같이 패망함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큰 위기라도 서로 힘을 합치면 상생의 길이 있음을 태안에 모인 사람들과 바닷가에 모인 새끼거북들이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큰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구성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가겠습니까? 온통 캄캄한 절망의 띠가 휘감을지라도 모두 함께 사랑의 띠를 두른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구덩이에 빠졌던 예레미야를 에벳멜렉이 구출했던 것처럼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신 성령의 줄을 영차영차 함께 당긴다면 어떤 함정이라도 거뜬하게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결코 독 안에 든 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손도손 올라가는 바다거북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겐 국난극복의 디엔에이(DNA)가 있다 했습니다. 같이 협력해서 무너진 경제를 일으킵시다. 추락한 국격을 회복합시다. 꺼져가는 민주주의를 다시 살립시다. 기울어가는 교회을 떠받칩시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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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은혜의말씀] 시대의 우울을 거절하라(야고보서 5:17~18)
    현실의 한복판에서 신앙인도 시험이 들고 우울증이 올 수가 있다. 신앙인이 양심에 가책을 더 받기 쉽고, 거룩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천국을 소망하지만 골치 아프고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갈등구조에 빠지고 상처받기가 쉽다. 머리 둘 곳이 없고 정신이 분열 될 듯하고 만정이 떨어지고 살아갈 여망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지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시험에 들고 우울해진다. 팔랑귀가 되어 입술의 30초가 가슴에 30년이 된다. 말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지고 급 우울이 올 수 있다. 세상은 변화무쌍하며 돌발변수가 많다. 현재 대한민국은 1인 가구가 40% 가까이 되며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다. 사람들이 대인관계를 두려워하고 기계인 휴대폰을 가지고 SNS, 유튜브를 편안해 하다 보니 점점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가 힘들어진다. 패배감, 열등감, 낭패감, 수치감, 죄책감이 만성이 되어 대한민국은 집단 패닉 상태이다. 무기력, 무반응, 무대책, 무관심, 무계획 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코로나 이후에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왔고 저출생, 지방소멸이 몰고 온 축소사회, 개인주의사회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 표현들이 사람들의 마음마저 의기소침하게 위축시켰다. 사춘기의 공포와 7포 시대에 빠진 청년들의 입시전쟁, 취업전쟁, 사랑과 전쟁을 통해서 사회부적응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갱년기 장애가 오고 정치, 경제 현장에서 극심한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분노조절 장애가 왔다. 정글과 같은 사회의 무한경쟁 시대에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조차 이론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로 인한 공황장애와 정신분열이 오고 있다. 신앙인도 우울증을 겪는다. 그러나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기 때문에 더 빨리 낫는다. 베드로처럼 엎어지고 자빠져도 얼른 회개하면 된다. 가롯 유다처럼 똥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해결된다. 유튜브를 보면 알고리즘 추천 영상들이 먼저 나오는데, 그것은 이전에 무엇을 검색하고 봤는지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삶에도 다 연결된 알고리즘이 있고 말이 씨가 된다. 그러니 신앙생활에서도 원(망)불(평)교(만)하지 말고 용(서)감사하라. 사울왕은 악령에 의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릴 때에 다윗이 연주한 수금으로 인하여 뮤직테라피(음악치료)가 되었다. 그러나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불신하며 반역하며 신접한 여자에게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다윗은 훨씬 더 악조건이 많았지만 현실을 원불교하지 않고, 시를 적고 노래하며 춤추며 맡은 양을 지극 정성으로 케어하고(텃밭테라피) 하나님 앞에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고백하며 표현했기 때문에 건강하였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의 사람으로,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보낸 문자 하나에 까무러치는 연약하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루만지시며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일으켜 주셨고, 그가 간절히 기도한대로 응답하셨다. 모든 눈물과 고통, 시대가 주는 우울감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 멋지게 힘차게 살아가자. 마음 문을 열고 소그룹에 나아가서 함께 어울리고 말씀과 기도를 나눌 때 풍성해지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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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공산주의’ 라는 이름의 유령
    20세기 최대의 사건 한 가지를 들라면 단연코 ‘공산주의의 대두와 소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쇠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 렌닌주의를 따르는 공산정권을 탄생 시킨 후 지난 100년 동안 공산주의는 창궐하여 한때는 세계의 3분지1을 점령하여 세상을 뒤흔들었다. 전제군주국이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한 이후 렌닌은 주변 국가들과 공산 동맹을 맺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을 창설했는데, 우즈베케스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15개국이 소련이란 이름하에 편입된다. 1924년 렌닌이 사망한 이후 집권한 스탈린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일인독제 체제를 강화하였고, 인근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라바키아, 폴란드, 항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도 공산화된다. 이런 공산화의 물결 속에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등은 1921년 공산당을 창당하고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공(中共)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소련이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을 통해 조직적으로 중국에 공신혁명을 수출한 결과였다. 러시아와 중국이 공산화되자,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북한, 에티오피아, 쿠바 등이 잇따라 공산화된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과 중남미로 전파된 것이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게릴라 활동 끝에 1959년 1월 미주대륙 최초로 공산정권이 수립된다. 이렇게 공산주의는 전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쇠퇴의 시작이 된다. 이보다 앞서 1989년 1월 헝가리 공산당은 복수정당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공산당의 권력 독점 조항을 폐기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해 11월 9일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데, 이는 동유럽과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서기장이 축출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시작된 체코슬라바키아의 민주화 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2월 22일에는 38년간 유지되었던 루마니아의 1인 독제정권이 민주화 세력에 의해 무너졌고, 그날 체포된 차우셰스쿠 대통령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5일 성탄절에 처형되었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인 1991년 12월 26일, 7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소련연방은 붕괴되었다. 그 전날인 12월 25일 소련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 붕괴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대부분의 마르크스-렌닌주의 국가는 사라졌고, 현재는 쿠바, 베트남, 라오스, 중국, 북한 등 5개 국가만이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으나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삼대 세습 일인독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유사(類似)마르크스렌닌주의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무엇을 남겼는가? 공(共) 산(産)의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유토피아를 이루었는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시대 역사가 보여주었다.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량학살, 숙청, 처형, 비밀경찰, 공포정치, 가난과 굶주림뿐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 레제크 콜라콥스키는, “사회주의는 공산당 1당 독재로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은 물론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마”라고 지적했다. 볼셰비키혁명 80주년을 앞둔 1997년 11월, 스테펀 쿠루투아 교수 등 프랑스학자 11명이 공동 저술한 <공산주의의 흑서>라는 책에서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참혹한 살육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약 1억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소련 2천만, 중국 6천5백만, 베트남 1백만, 캄보디아 2백만, 동유럽 1백만, 남미 15만, 아프리카 1백70만, 아프카니스탄 1백50만, 북한 3백만 이상, 국제공산주의기구 및 비집권 공산당에 의한 희생자 수만 명으로 산정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스승인 포이엘바하는 “인간은 그가 먹는 것 바로 그것이다. Der Mensch ist, was er ißt.”라고 말했는데, 인간은 물질이라는 유물론적 인간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미국 카터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젠스키는, 1988년 8월 공산주의의 종말에 대한 ‘대실패’(The Great Failure: the Birth and Death of Communism in the Twentieth Century)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공산주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광기’라고 썼다. 그런데 그 철 지난 광기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철부지 여대생이 “공산주의가 좋아요”라고 외치고 있고, 어설픈 지식인은 그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변호하고 있다. 문화 막시즘 또한 우리 곁에 버젓이 둥지를 틀고 있다. 역사가 외면한 공산주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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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11-29
  • [성서연구] 오직 은혜뿐입니다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 목사가 되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영락교회가 6.25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락교회는 1945년 12월 2일에 창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다니전도교회였으나, 영락교회로 개명했습니다. 지역이 영락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 하면 한경직 목사님이 떠오를 정도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은 거의 한 몸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한 몸>이라 하지 않고, <거의 한 몸>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락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였습니다. 6.25가 발발한 날은 주일인데, 그날 주보를 보면 장년 출석이 4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와서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에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전국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군목 제도를 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영락교회는 1,004군데의 군인 교회 중에서 건축비 전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 반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600여 교회 이상이 영락교회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육 선교에도 힘을 쓰셔서 1938년에 자진 폐교한 숭실대학교를 1954년에 영락교회에서 재건했고, 또 보성여중고를 재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광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의료과학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현재 영락교회는 총 8개의 학교를 운영 중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과 사랑 사역에도 힘쓰셔서 신의주에서부터 시작하신 고아를 위한 보린원을 비롯하여 중증장애인 시설인 애니아의 집, 모자원 등 현재 총 15개의 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 목사로서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영락교회 성도들은 이것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이 영락교회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이 완전히 한 몸이 아니라, <거의 한 몸>이라고 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거의>라고 한 이유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 사이에 거리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거리감은 성도들은 이상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드러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겸손이었습니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영락교회 성도들은 한경직 목사님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처럼 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에 영락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부임한 후에 성도들이 주문한 것은 <한경직 목사님처럼!>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요구였습니다. 하나는 한경직 목사님처럼 많은 사역을 하라는 것과 동시에 한경직 목사님처럼 겸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역은 드러내는 쪽입니다. 겸손은 숨기는 쪽입니다. 두 가지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저는 무능해서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조용히 있는 것뿐입니다. 뭘 하겠다고 나대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시편 131편 1절에서 감동받았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조용히 있으면 부수적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노력하는 게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제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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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소강석칼럼] 아쉽지만 마음은 함께 합니다
    제가 탈진을 하여 링거를 맞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부산 세계로교회를 섬기시는 손현보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이러다가 한국교회가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10월 27일 종교개혁주일 오전 11시에 광화문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 연합예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누워 있는 채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인가요? 아직은 그 정도의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함께하자고 하면 해야지요. 제가 주일날 예배를 포기하면서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주일 오후에는 제가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자라고 배운 신학교, 교회와 역사관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교회를 위한 염려와 걱정은 같았고 의견이 동일했습니다. 그 분도 단순하고 저도 단순하게 쉽게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주일 낮 예배를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일 오전에 광화문에서 모인다는 것은 다른 집회와 괜한 혼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복잡한 계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의를 한 것이죠. 저의 몸은 많이 지쳐서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자단과 순례하는 일정을 조정하기 위하여 담당 목사에게 날짜를 조정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각도로 노력해봤지만, 기자단의 출장 날짜와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 총장과 교수, 역사관 예약 등의 변경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펜젤러 선교사의 후손도 어렵게 시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를 어찌할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손현보 목사님께서 저에게 공동대회장을 맡아 달라는 간절한 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일을 놓고 제 주변에 있는 동역자들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참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 이름만은 넣는게 좋지 않느냐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한 동역자들이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 동기와 목표는 참 좋은 것이지만 일회성 집회로는 대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기도회 후에도 있을 일을 감당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적지 않는 재정적 부담도 있을거구요. 더구나 참석 못하면서 이름을 올리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날짜가 안 맞아서 출국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담임목사님을 대신해서 희망하는 성도들과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여당이나 야당에서도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법이 발의된 게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차분하게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어떤 직책을 맡으면 재정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저는 잠들어도 10.27, 일어나도 10.27 생각뿐이었습니다. “집회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든지 간에 순수한 진의가 잘 전해져야 할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손현보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후로 변경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못하게 되었지만요. 물론 한 번의 큰 기도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반기독교의 흐름과 공격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장수는 앞서서 전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선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큰 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생각은 다 똑같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전략적으로 계속해서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도 정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집회나 기도회를 통해서도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회를 우려하고 너무 비판을 하는 분들도 자제해야 합니다. 칭찬은 못할망정 비판을 하는 것은 그 또한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쉬운 마음을 전하면서 기도회가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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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4-11-08
  • [시사칼럼] 세대와 복음
    점차 “알파세대(alpha generation)”라는 표현을 쓰는 빈도가 늘어갑니다. 사실 그 동안 많이 썼던 “엠지세대(MZ)”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15세부터 45세까지(1980년~2010년) 연령대를 망라하기 때문입니다. 10년 터울만 해도 세대차가 엄청난데 무려 30년 간격이 있지 않습니까? 1995년을 전후해서 2010년까지를 지세대(Gen-Z, 젠지)라 하고, 그 다음부터 현재까지 출생자를 알파세대라 부릅니다. 앞선 세대와도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알파세대의 특징은 바로 ‘인공지능(AI-generation)’입니다. 이들은 나면서부터 ‘지니’ 같은 인공지능 목소리에 익숙하고, 숙제를 챗·GPT로 능수능란하게 해냅니다.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며 활동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알파의 복음입니다. ‘알파 예수의 복음’입니다. 앞서 언급한 “지·세대(Z-generation)”는 새 천년 전후로 태어나 자란 세대로, 현재 10대 후반부터 20대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1996~2009). 이 시대를 지나며 다들 아이폰(2007.6.29), 페이스북(2004), 유튜브(2005), 트위터(2006), 인스타그램(2010)의 탄생을 지켜보았지만, 지·세대는 이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 세대와 다릅니다. 이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ABCD로 정의해 보았습니다. 먼저 에이(A)는 ‘무신론적’ 성향을 상징합니다(Atheistic). 비(B)는 ‘큰(Big), 총명한(Bright), 뛰어난(Brilliant)’를 가리킵니다. 씨(C)는 ‘크루(Crew)’의, 마지막 디(D)는 ‘디지털(Digital)’의 앞 글자에 해당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새로운 인류라는 뜻의 이름을 부여하기도 합니다(포노·사피엔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인류에게도 A·I(인공지능)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는데, 바로 Am·I(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의 복음’입니다! 다음으로 “3040세대”를 생각합니다. 1980년에서 1995년생까지를 보통 “엠(M)세대”라 하는데, 새천년(밀레니움, Millenium)을 맞이한다 하여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엑스(X)세대”(X-generation)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엑스 다음 철자인 “와이(Y)세대”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령대를 고려하면 “3040세대”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들은 이미 사회의 주축입니다. 교회에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 숫자가 상당한데 그 가운데 많은 수가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소위 ‘가나안 성도’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가 40대요, ‘플로팅 크리스챤’(부평초 신자, floating christian)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가 30대입니다(코로나 이후 3명 중 1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함, 목회데이터연구소, 2023).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의 복음’입니다! 1980년대 인텔이 개인용 컴퓨터로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으면서 ‘80286’이란 번호를 붙였고, ‘286컴퓨터’라 불리기 시작하더니 ‘386’, ‘486’, ‘586’이 연이어 나왔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는데, 수강신청을 컴퓨터로 입력해야 해서 소동이 일었고, ‘채팅’이 등장했으며, 밤새 온라인게임을 하느라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주역들을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이라 해서 586세대라 부릅니다. 최근 2차 베이비붐세대(1964-1973) 은퇴가 시작되었지만 이들을 요즘 에이(A)세대, 뉴-시니어, 욜드(Young Old), 오팔(OPAL; Old People with Active Lives) 등 다양하게 부릅니다. 숫자도 비중도 막강하기 때문입니다(인구의 30%). 게다가 교회에서는 복음전파와 복음교육의 주력 세대입니다(핵심 일꾼의 30%). 이들은 민주화와 학생운동과 사회단체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집단입니다. ‘웨비(WAVY)’라고도 하는데, 재력을 갖추고(Wealthy) 활동적이면서(Active) 추구하던 가치를 단단하게 다지고(Value) 젊음을 놓치지 않으려는(Youth) 신인류라는 의미입니다. 충분히 역량이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올해 드디어 한국은 노령 인구 일천 만 시대를 맞았고, 65세 이상 비율이 19%를 넘어서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하기 일보 직전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70대 인구((631만 9천)가 20대 인구(619만 7천)를 추월했습니다. 바야흐로 ‘시니어 시대’입니다! 밝은 면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육아 피로에, 교회에서는 봉사 피로에 시달립니다. 섭섭함과 우울함이 찾아옵니다. 고립감과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았습니다. 헤겔은 유명한 <법철학강의>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는 말을 남겼는데, 우리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독수리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정채봉이 들려주는 동화 속 어른 독수리가 말합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나이가 들수록 상처는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그럴수록 더욱 절실한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시니어는 시니어가 전도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날개를 활짝 펴고 벌써 날개를 접어버린 이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시니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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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은혜의말씀] 믿음의 정상(베드로후서 1:5~7)
    등산은 산꼭대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신앙생활에도 유치찬란한 수준이 있고 믿음의 정상이 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정상에서 그의 믿음을 검증받았다. 정상에 오른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무한도전, 한계초월, 지극정성, 지사충성, 일사각오, 일편단심, 오매불망, 꿈에도 소원,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을 거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에 지치면 지고, 일에 미치면 이긴다는 말도 있다.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일상이 정상으로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베드로후서 1장에는 신의 성품이 나오는데, 신의 한수가 있듯이 신이 내린 성품도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변화무쌍하며 때로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의 성질도, 마음 밭을 잘 가꾸면 신의 성품을 닮아서 성품의 최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보다도 어렵다. 성자는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야생마가 천방지축 날뛰다가 임자를 만나 연단이 되면 천리마, 준마가 된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개구쟁이가 철이 들면 다정다감한 호인이 될 수 있다. 모나고 까칠한 성질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섬세하고 원만하고 따뜻한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말이 되어 툭 튀어 나오고, 말이 씨가 되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고, 성품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 사람의 인품, 인상, 건강, 관계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것이 성질이다. 이혼도 성격차이로 하는 것이다. 신의 성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있다. 똥물에도 파도가 있다. 사람마다 성품의 결이 다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① 믿음에 힘을 써야 된다. ② 믿음의 덕을 힘써야 된다. ③ 덕에 지식을 힘써야 된다. ④ 지식에 절제를 힘써야 된다. ⑤ 절제에 인내를 힘써야 된다. ⑥ 인내에 경건을 힘써야 된다. ⑦ 경건에 형제 우애를 힘써야 된다. ⑧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된다. 이런 여덟 단계를 올라서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벧후1:8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흡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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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위드애]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생각나는 것이 ‘따뜻함’이다. 이 따뜻함은 남녀노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이 따뜻함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 노인, 한부모가정, 외국인, 노숙인 등등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또 하나, 미혼인 사람들도 약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고,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이들은 중심에서부터 밀려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 당사자이면서 미혼인 나도 이들과 같다. 이들에게는 어떤 따뜻함이 필요할까?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대부분 ‘물질의 따뜻함’을 떠올렸을 것이다.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돈)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질은 필요하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12월이 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그것을 사랑의 온도로 표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따뜻하게 만든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12월 25일 성탄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모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 주변 또는 교회 내에서 찾아서 지원하거나, 단체의 기부를 하는 형식으로 돕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형식적이든 비형식적이든,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시선의 따뜻함’에 대해서는 어떤가? ‘따뜻함’이라고 했을 때에 단 한 번이라도 ‘시선의 따뜻함’을 떠올려 본 기억이 있는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선의 따뜻함이 중요하다. 아니 필요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따뜻한 시선을 기다리고 있고 필요로 하고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사회적 약자들이나 미혼인들에게는 사회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교회 중심에서도 벗어나 있기에 더더욱 필요하다. 이들이 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전통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서의 시선, 전통적으로 관습되어 내려온 시선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하나님의 시선, 사회적 약자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들을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그들(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대접 받고 유명한 이들만 따뜻하게 품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고 연약한 자일수록 교회는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그리고 교회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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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목회자칼럼] 시종여일하고 신시경종하라
    목회자로서 연합사역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말로 감당할 수 없는 복이며 은혜다. 괜찮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은 처음 함께 했을 때의 마음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그 처음의 마음은 당연히 공동체의 가치와 목적에 합하고, 순리적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우리 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깊게 살펴보면 시작하는 일의 내용과 자세가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악하고 나쁜 일도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진행되었기에, 시작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다워야 함은 명약관화하다. 또 시작이 반이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시작과 함께 이미 반을 이루었기에, 그 나머지 절반의 성공을 위해서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신시경종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당나라 충신 위징이 당 태종에게 올린 글에 나온다. 그 의미는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나태하고 게을러질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올 때는 신중하게 일을 시작하고 일의 끝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라고 진언하였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한명회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사위였던 성종에게 유언처럼 당부한 말이 바로 신시경종이다. 군주가 조금만 마음을 게을리 하면 간신배들의 아첨에 넘어가기 때문에 항상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대국을 다스리는 왕이라 할지라도 신시경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충신이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과 마음을 담은 글을 올린 것이다. 한명회가 남긴 말 중에 신시경종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말은 “시근종태는 인지상정이지만 종신여시 하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지만 끝날 때에는 태만해 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군자는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근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종신여시와 비슷한 말은 시종여일이다. 시작과 마침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한명회가 노년에 유배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후회와 회한 그리고 성종이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언한 것이다. 처음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미를 지닌 초지일관도 있다. 이것 또한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일이관지’ 즉 처음의 뜻을 끝까지 꿰뚫는다와 모든 것은 하나로 꿴다와 같은데, 처음의 마음이 마침의 시간까지 뜻을 잃지 아니하고,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시종여일, 신시경종, 종신여시, 초지일관 등은 거의 다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곧 성공한 삶이며 승리한 인생이다. 역사 이래로 충신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도, 그리고 자신의 주군도 그렇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초심을 지켜 성공한 사람은 더 강력하게, 초심을 잃어버려 실패한 사람은 자신과 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솔하고 담대하게 진언한다. 나도 시종여일 신시경종 하는 사람들이 참 좋다.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내 곁에 이들이 있기를, 내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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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2
    해방 전 내한하여 강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감부열 선교사는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다시 내한하지 못했다. 이때 감부열은 뉴저지의 플레인필드제일장로교회와 엘리자벳제3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자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며 미국에서 목회를 정리하고 1947년 4월 4일 다시 내한했다. 해방된 한국교회의 재건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속히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한국어도 능통했고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강계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대구지부로 배속되었다. 대구 정착과 교회 재건으로 분주하게 지냈는데 1950년 6월에는 전쟁이 발발했다. 대구로 피난해 온 피난민들을 돕고 교인들을 보살폈다. 그의 대구 주택은 피난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피난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위험하다고 본 그는 안의와 선교사와 같이 안동으로 가서 안동선교부의 기물과 주요 문서를 대구로 옮겼다. 안동이 점령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에서 수복감사예배를 드릴 때 그는 미군 군목 자격으로 킨슬러와 힐, 아담스, 보켈, 마펫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서 예배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는 대구로 돌아왔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이 후퇴하는 긴박한 현실에서도 한국에서의 군목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 군목병과의 교범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군목제도를 도입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 전쟁 중에서도 한국교회는 신학교 문제로 혼란하였고, 총회가 두 학교, 곧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제3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설립할 때 대구의 감부열을 초대 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인돈(William Linton), 권세열(Francis Kinsler), 조하파(Joseph Hopper)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명신홍 한경직 등은 초대 교수로 추대되었다. 이 학교가 오늘 총신대학교로 발전했다.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일할 때 그 가까이에서 일한 한국인이 서정환(徐廷煥, 1906-1952) 전도사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高山面) 고산진(高山鎭) 출신인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석방되었고, 감부열 선교사가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구로 와 그와 함께 일했다. 서정환은 감부열 선교사 부부를 부모처럼 여기고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감부열 선교사는 1952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 주 젱킨스타운의 비버대학(Beaver college)과 일리노이주 휘튼의 휘튼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얻고 1953년 대구로 돌아왔다. 1954년 4월에는 대구에 계명기독대학이 설립되는데, 초대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12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8년 3월에는 첫 졸업생 49명을 배출했다. 도서를 확보하고 도서관을 건축하고 또 음악당을 건축하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1958년 7월에는 학장직을 안두화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8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0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한국선교 경험을 담은 The Christ of the Korean Heart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1958년 김윤국에 의해 ‘한인 중심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었다. 길지 않는 145쪽에 지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전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5-6명의 선교사 외에도 고난과 시련 가운데 믿음을 지켰던 한국인 17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익두, 서정환, 손양원, 안의숙, 이대영, 이승만, 이영식, 임한성, 주기철, 한경직, 한병혁 등이다. 그가 남긴 또 한 가지 저서는 강계에서 함께 사역한 바 있는 노혜리, 곧 로즈(H. A. Rhhodes)와 1935년 이후의 북장로교의 한국선교사를 정리한 500여 쪽에 달하는 역사책(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35-1959)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사냥도 즐겼는데 동료들과 곰사냥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어려움 중에서도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고, 곰으로부터 큰 화를 당한 일도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나는 살겠으나 곰은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위기를 벗어난 일도 있다고 한다. 그가 대구에서 일할 때 정일영 목사가 그를 힘들게 하고 괴 롭혔다고 한다. 정일영(鄭一永, 1901-?) 목사는 평양신학교 31회 졸업생(1936)으로 대구 대봉동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부열 선교사는 참고 지내다가 한 말이, “정 목사, 예수 사면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1972년 1월에는 부인 안혜리(헬렌) 여사가 사망했다. 미국펜실베니아주 빌라 신위드의 웨스트민스터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에 감부열은 루시 링컨(Lucy E. Lincoln, 1905-?) 여사와 재혼했다. 루시 여사는 남편과 사별하고 10년째 혼자 지내던 여성이었다. 5년을 같이 살고 1977년 1월 감부열 선교사는 86세로 사망하여 첫 부인 헬렌 옆에 안장되었다. 감부열은 헬렌과 사이에 1남(Archibold) 3녀(Helen, Frances, Ann)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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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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