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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작은 승리를 기뻐하는 아이로 키우자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기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은 큰 성공을 거두고 성적이 쑥쑥 올라가는데 우리 아이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아서 걱정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고 단시간에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어려울 때 우리는 작은 승리를 꿈꾸며 그것을 기뻐하는 아이로 우리 자녀를 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큰 성공, 큰 승리를 꿈꿉니다. ‘그게 아니면 아예 승리도 아니야.’ 라고 지레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상의 승리가 없어졌습니다. 일상의 간증이 없어졌습니다. 너무 큰 것, 대단한 것만 바라보니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한때 서울 수서동에서 유명한 과외 선생이었습니다. 과외 선생 홍 선생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의 그 아파트 한 단지가 다 저의 필드였습니다. 제가 한 달만 쉬겠다고 그랬더니 어머니들이 안 된다고 해서 군대 입대하기 열흘 전까지 과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나서 과외를 다시 하라는 굉장히 많은 유혹을 받았는데 그걸 다 뿌리치고 월 27만원 받는 교육 전도사를 시작해서 목회의 현장으로 들어가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국 돈보다 목회의 길을 걷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당시에 평균 60점 맞는 아이가 열심히 하겠다고 많이 찾아왔습니다. 홍 선생님 밑에 가면 뭔가 잘 된다니까 애들이 옵니다. 근데 60점 맞는 아이의 다음 시험 목표는 몇 점이어야 됩니까? 저에게 보내는 모든 엄마들의 목표는 100점입니다. 물론 제가 가르치는 클래스에 평균 100점 받는 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원래 99점 받던 아이입니다. 99점 받던 애가 저한테 와서 100점 맞게 되니까 전교 1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홍 선생이 전교 1등을 만들었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60점 받는 애를 데려다 놓고 100점 맞으라고 하니 어떻게 될까요? 그 아이는 도저히 100점 맞을 수가 없습니다. 또 실패를 맛볼 뿐입니다. 그 아이는 일단 한 문제부터 더 맞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65점부터 맞고 그 다음이 70점, 그다음 80점, 90점, 이렇게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절차와 계획이 엄마들의 마음에 들지가 않은 겁니다. “돈이 얼만데. 당장 100점을 맞아 와야지. 70점? 야! 다니지 마!” 그리고는 학원 끊어요. 그럼 그런 애들이 다시 60점으로 내려갑니다. 원위치가 되는 겁니다. 한 문제씩 맞춰갈 때 하나씩, 하나씩 배워갈 때, 기본기가 없는 애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고, 그다음 루트도 하고 미분, 적분도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언젠가는 100점도 맞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금 나의 수준보다 딱 한 단계만 더 올라가자, 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적어도 10단계, 20단계, 100단계는 단번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알아줄 만한 대단한 승리를 거둘 거야! 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목표는 항상 적어도 두 배 이상, 적어도 10배에서 100배 정도는 돼야 성공이지, 그렇지 않고 약간 늘어나는 건 성공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라톤을 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2.195km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걸음을 잘 달려야 합니다. 지금 한 발을 잘 디뎌야 결국에 이 한 발 한 발이 모여서 마라톤 코스를 완주합니다. 그러면 지금 나의 한 발은 승리인가요, 아닌가요? 승리입니다. 지금 나의 한 발은 성공인가요, 아닌가요? 성공입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이 뭐냐면 지금 나의 한 걸음이 성공임을 아는 겁니다. 지금 나의 한 걸음이 승리인 걸 아는 겁니다. 한번 도전했습니다. 한번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성공인 것이고 그게 승리입니다. 너무 큰 것을 바라보다가 지금을 놓치는 우를 범치 않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내가 예배하고, 지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성공이고 승리입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가 교회에 나오는 건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로 만족을 못하고, “적어도 중등부 회장은 해야지! 적어도 얘가 예배 인도쯤은 해야지! 찬양 인도쯤은 해야지! 우리 애가 드럼은 좀 쳐야지!”라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왔으면 대단한 겁니다. 업고 다니고 뽀뽀를 하고 용돈을 줘도 시원치 않은데, 구박합니다. “왜 아침에 나오는데 30분씩 걸리냐? 네 머리 괜찮은데 왜 또 감냐?”고 구박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환대해 주세요. 기쁘게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세요. 교회에 나오는 그 아이들이 너무너무 귀한 아이들입니다.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23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득점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골씩 넣어야 됩니다. 한 골씩. 이게 중요합니다. 축구공 23개를 한꺼번에 들고 와서 한꺼번에 뻥! 차 놓고 나 득점왕 됐다! 이럴 수 없습니다. 23골을 한꺼번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유명한 캘커타의 성녀라고 하는 마더 테레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기아에서 건지고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라고 묻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명씩 안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난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축구는 한 골이 중요하고 사랑은 한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적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거창한 성공보다 작은 승리를 기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길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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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8-18
  • [다음세대칼럼] 은혜의 집(2)
    만약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인다고 했을 때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 중에 몸이 가장 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중증 환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 연못은 진짜 은혜가 필요한 병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죽게 된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단순 감기 환자가 먼저 뛰어 들어가 버릴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만성두통과 복통 환자가 먼저 들어가 버립니다. 다리의 장애가 있는 사람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운동하다가 다리를 접질린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쟁과 대립으로 가득한 살벌한 현장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각종 환자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 인해 영적 질병에 걸려서 무기력,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 줍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어서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고통스러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리를 절고 있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긴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중풍병자와 같아서 진리를 향하여 움직이거나 진리 안에서 활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예 진리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불신자들, 모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모든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비슷합니다. 무한 경쟁시대 속에서 교회와 교회도 형제가 아닌 경쟁자입니다. 교회와 교회끼리 경쟁합니다. 서로 큰 건물 짓기 경쟁을 합니다. 서로 사람 수 늘리기 경쟁을 합니다. 몇 십억, 몇 백억, 몇 천억 단위의 건물을 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큰 건물이 많은 사람을 흡수하고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 발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왕들을 뽑습니다. 진돗개 전도왕, 양육 전도왕, 파워 전도왕, 능력 전도왕, 웃음 전도왕, 심지어 마사지 전도왕까지 뽑습니다. 그리고 이 전도왕들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집회를 통하여 전파하고 다닙니다. 이런 교회들끼리의 경쟁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감투 경쟁, 기득권 경쟁, 자기중심적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경쟁 원리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넘쳐야 할 교회에 38년 된 병자와 같이 남을 원망하며 남을 탓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현실입니다. 은혜는 사라지고 온갖 원망과 불평과 불신과 판단으로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세상보다 더 이기적이고 더 자기중심적인 곳이 교회라고까지 말합니다. 참으로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습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예수님을 보고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자비와 은혜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예수님을 찾고 그를 절대적으로 의지합니까? 주님이 계실 때에야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계셔야만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고 부를 수가 있게 됩니다. 주님이 계실 때 그곳은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베데스다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는 오늘날 교회입니다. 은혜와 자비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베데스다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만이 소망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치유자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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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 [신앙교육나침반] 온 세대가 하나 되는 전교인 수양회, 기적을 만들어내다!
    서울 강남일 교회 150여명의 온 세대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주제로 전교인 수양회를 열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3세대와 현재를 열정으로 살아가는 2세대와 과거 역사의 유산과 지혜를 품은 1세대가 3일 동안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강남일 교회 전교인 수양회의 주요 프로그램은 담임 목사님의 저녁 말씀집회와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이끄는 온세대 복음놀이터입니다. 지난 5월에 저는 교회의 요청으로 오후예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설교시간에, 이 시대를 살아하는 자녀세대에게 교회와 가정이 하나 된 자리가 얼마나 가치 있고 절박한지를 강조하였습니다. 담임목사님과 많은 성도들은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복음을 놀이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한 복음 놀이 안에서 온 세대가 하나 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 하셨습니다. 당시 교회는 올 여름 전교인 수양회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분리하여 별도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교회는 향기나무에 연락을 주셔서, 온 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복음을 놀이하는 시간을 요청해주셨습니다. 드디어 전교인 수양회의 온 세대가 복음놀이터가 시작되었습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150여명의 온 세대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온 세대가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주제의 복음 말씀과 놀이에 참여하였습니다. 강남일 교회는 특히 1세대 실버 어르신들이 절반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2세대 장년들과 3세대 다음세대들은 바닥에 앉고,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실버어르신들은 관절이 불편하셔서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힘도 없으시고, 표정도 없으셨습니다. 과연 온 세대 복음놀이터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한마디로 ‘미라클’이었습니다. 향기나무의 세대통합 복음말씀이 시작되자, 온 세대가 숨죽여 매력적인 복음에 사로잡혔습니다. 복음은 연령과 성별과 직분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1세대와 2세대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3세대를 품에 안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3세대는 1세대의 2세대의 진심어린 기도와 응원의 미소 앞에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복음 놀이가 시작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세대와 3세대가 주도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1세대 실버부대의 함성소리가 온 강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왕년에 강남일 교회를 세우셨던 뜨거운 열정이 2023년도에 다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뜨겁게 즐거워하며 복음놀이에 참여하셨습니다. 2세대와 3세대는 1세대의 숨은 열정과 천진난만함을 보며, 실버세대의 새로운 모습에 감격했습니다. 강남일교회의 40년 역사를 품은 1세대와 교회를 열정으로 세워가는 2세대, 그리고 강남일 교회의 미래를 꿈꾸는 3세대의 매듭이 묶여지니, 놀라운 기적이 만들어졌습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전교인 수양회는 미라클(miracle: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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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8-18
  • [양육칼럼] 묻지마 범죄를 보며 양육태도 돌아보기 : 십계명을 되새기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요건을 먼저 선포하신 것이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열 가지 말씀이 나타내는 신앙과 윤리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계명 속에 들어 있는 신앙과 윤리적인 삶을 구분해 본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관한 규범은 1-4계명으로 4가지이고, 나머지 5-10계명 즉 6가지는 윤리적인 삶에 관한 규범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매일같이 보도 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묻지마 범죄 사건을 보면 도대체 저 범죄자들은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설명되지 않는 동기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지며 일상에 대한 불안도 가중된다. 이미 일어난 범죄에 대한 모방범죄를 예고하는 글도 온라인상에서 폭주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국민 전체가 혹여 피해를 입을까 하는 불안심리도 높다. 묻지마 범죄자들은 일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처지나 실패 등의 원인을 타인이나 사회구조에 전가하여 이에 대한 분노나 스트레스를 블특정 다수를 향해 표출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의 범죄 원인은 현실적으로는 실업으로 인한 생활고, 외부와의 단절, 인터넷 게임 중독으로 인한 충동성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 원인에 대해 교육학적. 심리학적 접근을 하면 범죄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포함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충분히 공감 받지 못했으며 소외되거나 거부되는 양육환경에서 자랐고,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또래들로부터 또는 주변 성인들로부터도 따뜻하게 공감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며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공감 받지 못하며 자란 아이들은 당연히 타인의 입장이나 처지를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타인이나 사회에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십계명 중 5-10계명을 다시 살펴보면 자녀 양육의 핵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숙고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은 살인하지 마라. 7계명은 간음하지 마라.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마라. 9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마라. 10계명은 네 이웃의 아내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는 모두 가족과 이웃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되며 탐욕을 부렸어도 안 된다는 규범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탐심을 버리고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명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먼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앞서 칼럼에서도 피력한 바 있지만 아이들은 가르치는 것을 배우기보다 보여주는 것을 더 쉽게, 더 견고하게 배우게 된다. 부모들의 신앙과 윤리적인 삶을 보면서 아이들의 신앙과 윤리적인 삶이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의 탐욕보다 가족과 이웃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어려서부터 자기 자신이 존중받고 공감 받으며 실수하고 실패해도 지지하고 격려하는 양육을 받아야 한다. 존중과 공감하는 능력은 존중받고 공감 받을 때 배우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족과 이웃을 존중하는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공감능력이 갖추어진다면 더 이상 묻지마 같은 범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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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육칼럼
    2023-08-18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충분히 괜찮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경제적인 자본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자본이 필요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 양육에 있어서 충분히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그건 바로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를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이해지능입니다. 나의 연약한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자녀의 연약한 부분들을 공감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부모는 자녀의 좋은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랑 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녀를 보면 부모는 “야! 같이 놀자고 그래! 왜 말을 못 해?”라고 다그치기보다 그냥 자녀의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면 됩니다. “내 아이 성격이 내성적이구나! 수줍음이 많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자꾸만 아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지적하고 닦달하고 다그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부모 본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실은 내가 소심한 성격인데 그래서 내가 못나 보이고 외톨이 같은데 그게 내 문제다 보니까 그걸 또 바로 그렇다고 인정할 수는 없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인정할 수 없는 그 안 좋은 감정을 딸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그걸 바로 심리학 용어로 ‘투사(投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속 그 문제로 아파하는 아이에게 안 좋은 말이 나옵니다. “너 왜 이렇게 못나게 굴어? 너 바보야?”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자꾸 이런 말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나의 문제인데 그것을 나의 문제로 인정할 수 없으니까 그것을 자녀의 문제로 바꾸고 그 자녀를 문제아로 몰아가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완벽한데 너는 왜 이래?”라고 하는 염려로 시작되었지만, 이 말이 점차 짜증으로 바뀌고 그것은 날카로운 분노가 되고 마침내 공격하는 말이 돼서 아이를 점점 쓰러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완벽한데 자녀는 왜 이 모양이지?’ 하는 부모들이 특히 교회 안에 많습니다. “나는 너무 멀쩡하고 신앙이 좋은데 자녀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분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럴 때마다 한 번쯤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할 때, 이 아이는 어떻게 자랄까요? 점점 이 아이는 그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엄마의 심한 말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 그대로 못난 아이로 자랍니다. 그럼 결국 나의 못난 모습을 아이가 그대로 가진 채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부모의 못남을 물려주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심리적인 자본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능력 말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다. 나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이런 약한 면도 있지만 이렇게 좋은 면도 있어. 내 안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이것이 통합적인 자기 이해입니다. 나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자기를 올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자녀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합니다. 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내가 있는데 그게 다 나라는 걸 인정한다는 겁니다. 좋아 보이는 나, 약한 나, 반면에 또 부족하고 답답한 나를 다 인정하고 나면, ‘아! 하나님이 그러한 나를 통해 하시는 그 구원과 역사가 너무너무 기이하다’는 것을 내 영혼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께 감사하는 것이고 또한 주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나 자신을 바로 알 수 있고 나를 나답게 지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져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녀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에게 부모이기 이전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의지할 때,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녀를 알아주게 되고 공감하는 충분히 괜찮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는 맨날 1등만 했는데, 나는 멀쩡했는데, 나는 친구도 많고 난 너무너무 완벽했는데 넌 왜 이러니?”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충분히 좋은 부모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완벽한 부모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좋은 부모요, 그거면 족합니다. 여러분, 그런 모습을 가질 때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겁니다. 완벽한 부모가 존경받는 게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때로는 사과하고, 때로는 고백하고, 때로는 화해를 청하는 부모가 진정 존경받는 부모입니다. 그렇게 충분히 좋은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닮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살리며 믿음으로 견고케 하는 또 한 세대로 굳건하게 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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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7-21
  • [신앙교육나침반] 온가족이 회복되고, 온가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성경학교
    2023년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이 개발한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주제의 여름성경학교 컨텐츠는 기존의 다른 성경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한 특별함이 있습니다. 향기나무 성경학교는 “가정”이 대상입니다. 찬양과 설교말씀과 성경놀이 등 모든 내용의 대상이 다음세대만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가정입니다. 향기나무 여름성경학교에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 가족이 함께 복음을 받고, 함께 복음을 경험합니다. 온 가족 성경학교가 열리는 자리마다, 놀랍게도 불신 부모님들이 참여하십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자리이기에, 교회를 나오지 않던 부모님들도 큰 용기를 내어 나아오십니다. 그러니 온가족성경학교는 불신가족을 향한 전도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모두 함께 가정을 향한 복음을 듣고,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을 가지며, 함께 웃고 함께 감동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향기나무 성경학교에는 강력한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올해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을 통해 주신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이라는 주제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을 향한 강력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12장 23절 말씀을 주제말씀으로 선포하며 나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모든 가정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교회로 일어서게 하는 생명과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기에, 주제 찬양과 말씀과 성경놀이가 진행되는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아픈 가정을 치료하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향기나무 성경학교는 “놀이” 중심입니다. 가정이 모이는 자리에는 여러 세대가 모이게 됩니다. 영아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세대가 어떻게 복음을 함께 받고, 함께 경험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경놀이’가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자녀세대들에게 놀이는 언어입니다. 그러하기에 놀이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이어주는 공통언어가 됩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부모님들의 얼굴이,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환한 얼굴로 바뀝니다. 부모세대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자녀세대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복음이 담긴 놀이는 전혀 다른 세대들을 어느새 한 가족이 되게 만듭니다. 서울 세곡교회 영아, 유치부를 맡고 계신 정재연 전도사님은 성경놀이 중심으로 진행되는 향기나무 온가족 성경학교를 처음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정과 함께하는 성경학교의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다음은 전도사님의 온가족성경학교 후기입니다. “15일 16일 이틀간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 주제로 진행하였어요. 할 수 있을까 많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역대 최고의 여름성경학교였다는 평가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놀라운 은혜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복음놀이는 은혜와 기쁨을 주는 놀라운 놀이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희는 환경을 나일강가로 만들고 예배실을 집으로 꾸미고 문설주를 만들어 양의 피를 바르는 이벤트를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였답니다. 너무도 귀한 시간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복음놀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제공해주신 향기나무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낌없이 조언해주시고 자료를 제공해 주신 향기나무 박미화전도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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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다음세대칼럼] 은혜의 집(1)
    판문점에 가면 평화의 집이 있습니다. 남북간 민간 차원의 평화 회담을 위한 장소입니다.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1965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1989년 리모델링하였습니다. 평화의 집은 고위급 회담장으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국민들도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통일을 기대하면서 감격하였습니다. 평화의 집에서 회담이 이루어지고 실제로 평화통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장소입니다. ‘봄이 찾아온 평화의 집’이라는 기사도 게재가 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두 정상이 만나서 오랜만에 평화의 집이 평화의 집의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평화의 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은혜의 집’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에 베데스다 연못의 위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위치는 양문 곁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는데 성벽에 여러 개의 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 양문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될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은 성전과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집’을 의미하는 ‘베이트’와 ‘은혜’를 의미하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자비의 집’ 혹은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의 집은 베데스다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집이 두 정상을 만나서 ‘봄이 찾아온 평화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과 38년된 병자가 만남으로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 제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은혜의 집.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요한복음 5장 2절에서 ‘행각’이란 지붕 달린 정자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환자들이 머물던 장소를 말합니다. 그 행각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왜 거기에 와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중한 병들을 고침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전설은 요한복음 5장 4절에 나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 연못의 이름이 베데스다 곧 은혜의 집이라고 불러졌습니다. 이곳에는 항상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들어가서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은 이름만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지 정작 은혜나 자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극한 경쟁만 있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 그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만이 낫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2등이나 3등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1등만 고침을 받습니다. 이곳의 분위기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롭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병자들은 늘 긴장해 있을 것입니다. 배타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을 것입니다. 이곳 이름은 은혜의 집이지만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경쟁의 집, 기회의 집 혹은 눈치의 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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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2
    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이 9살짜리 소년은 형들이 휘발유를 뿌려가면서 불붙이는 걸 구경하다가 너무 신나고 좋아 보여서 집에 가서 자기도 이것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집에 와서 골판지에 불을 붙이고 휘발유를 붓는데, 안 부어지니까 그 통에 불을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꽝!’ 하고 폭발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고 그 아이는 그 창고 반대편 벽에 가서 부딪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온 집안이 큰불에 타버렸고 이 불로 이 아이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무려 5개월 동안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죽을 확률이 109%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미 이 아이는 죽었다고 할 정도의 그런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수차례 수술 끝에 5개월 만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 아이의 열 손가락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 녹아내려서 전부 잘라냈습니다. “아무도 내 손을 잡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이 아이는 이때부터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내가 우리 집을 태워 먹었어.” 라는 죄책감이 들고, “나는 이제 모두 망가져 버렸어.”라며 깊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가 참 희한한 행동을 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아이를 데리고 “너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그랬지?” 피아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아이는 손가락이 없어서 피아노를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때부터 선생님을 보내주었고, 이 피아노 선생님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자, 시작해 볼까?” 악보를 꺼내고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아니, 손가락이 없는데 무슨 피아노를 배우고, 악보를 보고... “이게 뭐야?” 이 아이는 얼마나 그 마음속에 좌절감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열 손가락이 다 문드러져서 건반을 칠 수도 없는 이 소년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줄을 가져와서 붕대로 감싼 그 손에 연필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의 건반을 하나하나 “도, 레, 미, 파” 그걸 찍는 걸 가르쳤습니다. 정말 그 인생 가장 긴 시간 너무너무 답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못하겠어요!”라고 하는 이 소년에게 그다음 날 선생님이 또 왔습니다. 그다음 날 또 왔어요. 그다음 날 또 왔어요. 이렇게 5년을 찾아왔어요. 그렇게 5년을 마치 장애가 없는 평범한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이 아이가 멀쩡한 것처럼 확신에 차서 가르치는 선생님 덕분에 5년 만에 이 아이는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을 두려움 없이 해내는 법을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란 소년의 이름은 ‘존 오리어리’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세계적인 작가요, 연사요, 동기부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온몸은 3도 화상에 다 불타버렸고, 또 온 손가락은 다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그의 손을 거의 찢다시피 해서 저렇게 물갈퀴 같은 손가락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나는 이들에게 “왜 당신은 행복하지 않습니까? 과연 무엇이 당신의 행복을 막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러한 내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당신은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해서 묻습니다.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어떤 상황입니까? 당신은 왜 좌절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우리와 다른 게 뭘까요? 이분이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첫 번째 책은 「On Fire」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대단하죠. 우리 같으면 이 사고가 죽기보다 떠올리기 싫을 텐데 정말 자기가 잊고 싶은 그 불 속에서 자기가 어떤 시간을 보냈고 그 이후에 어떻게 이 시련을 극복했는지를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책이 더 재밌습니다. 바로 「다시 인생을 아이처럼 살 수 있다면」이라는 책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어른의 눈으로 자기를 봤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모든 게 끝나버렸겠죠? 그 아홉 살 인생 때 자기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를 바라봤던 어머니의 눈빛, 자기를 바라봤던 피아노 선생님의 눈빛은 정말 너무너무 아이 같았다는 거예요. 너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마치 갓난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이 아이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희망차게 바라보고, 기대감으로 바라보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아이처럼 대해줬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9살로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두 번째 책에서 아이의 시선을 강조합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살아가자’ 여러분,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요. 아이의 시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쉽게 그 무엇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손가락이 없어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이 아이에게는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어!’라고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너무 기가 막히지 않아요? 여러분,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를 잘 살피고 관찰하는 힘이 있습니다. 뭐든지 궁금해 합니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살펴보는 힘이 있습니다. 게다가 계속 시도를 합니다. 더 나은 방법이 없는지 계속 시도해보고, 더 나은 길을 찾아서 셀 수 없이 도전하는 마음이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우리도 다음세대를 바라봅시다. 그들의 가능성을 찾아봅시다. 우리의 시선이 달라질 때 아이들은 가능성덩어리가 되고 변화를 주도하는 하나님의 복된 씨앗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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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6-30
  • [다음세대칼럼] 죽고 싶으니 제발 살려주세요
    그날 따라 유독 스산한 날씨였다. 잿빛 하늘에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듯이 흐렸다. 정은이의 인스타그램엔 “이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글과 함께 어느 아파트 옥상에서 찍은듯한 사진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정은이는 평소 밝게 잘 웃다가도 어느 순간 우울해지는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편이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는데.... 오늘 따라 학교 수업을 마친 후 귀가가 늦어 그렇잖아도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결국 일이 터져 버렸다. 정은이 어머니는 정은이를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졌다고 한다. 이후 고민 끝에 정은이를 낳았지만 홀로 키우기 힘들어서 정은이가 5살 때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재혼을 했다. 정은이를 위해 자신을 위해 최상의 선택일 것 같았던 이 결혼은 두 모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던 이 새 아빠는 정은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8살 때부터 중학교 1학년 14살이 될 때까지 5년간 지속적인 성추행과 성폭행을 상습적으로 가해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정은이는 뿌리치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만약 엄마에게 말하면 모두 죽는다. 너만 조용히 하면 다 해결된다”는 그 말에 속아 그 오랜 세월을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버텨왔다. 결국 마음의 병이 되어 중학교 1학년 때 잦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상담하던 교사에 의해 정은이가 당해 왔던 모든 일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일은 남편과의 관계가 힘들어도 아이들을 위해 버텨왔던 엄마에게도, 엄마와 가족을 위해 비참한 일을 당하면서도 참아왔던 정은이에게도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몹쓸 일을 저지른 새 아빠는 재판을 받아 교도소에 갔지만, 남은 가족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고통을 온 몸으로 부딪혀야 했다. 엄마는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술을 마시다 정은이에게 폭언을 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고, 정은이는 엄마에게 채워지지 않는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방황하며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따따이가 정은이가 있는 아파트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희정 선생님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희정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하고 있는데 둥지아이들의 친구같이 엄마같이 함께 하고 있는 고마운 분이다. 따따이는 조용히 정은이가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곳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희정 선생님이 맨 위층 복도창문이 여전히 열려있는 아파트 라인으로 올라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희정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정은이 만났어요. 손에 자해를 해서 피가 나고 있어요’ 따따이는 조용히 데리고 내려 올 것을 당부한 후 한숨 돌렸다. 조금 뒤 아파트 입구 자동문이 열리고 창백해진 얼굴의 정은이가 희정 선생님과 함께 나타났다. 정은이는 따따이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안겼다. “죄송해요! 갑자기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죄송해요” “그래. 이제 괜찮아” “죽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 집으로 가자” 순간의 위급함은 넘겼지만 앞으로 정은이가 감당해 가야할 시간을 생각하니 따따이는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둥지에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지난 주 병원에 가서 2주간의 약을 처방받아 왔는데, 둥지센터에 오고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이 되자 스스로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복용하던 약을 먹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넌 며칠 동안 밥을 안 먹고 왜 배가 고프지? 라는 것과 똑같다.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잖아. 밥을 먹지 않고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왜 기운이 빠지지라고 하는 것처럼, 약을 먹지 않고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지라는 것과 같다. 이 녀석아!” “죄송해요. 이젠 안 그럴게요”라며 정은이의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따따이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정은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 손에는 지난 자해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둥지로 돌아와서 얼마지났을까.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뭐하는데??” “빨리 나와라” “왜 그러니?” “정아가 좀 이상해요. 혼자 화장실 들어가서 30분 째 안나오잖아요” 아이들의 끊임 없는 성화에 하는 수 없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정아는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정아를 살피던 따따이는 다리를 자꾸 의자 밑으로 숨겨넣은 것 같은 정아가 의심스러웠다. 정아의 바지를 들어올리자 종아리 전체에 커터칼로 수 없이 그어놓은 자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죄..송,,해..요...” 아무 말 없이 연고를 발라주는 따따이에게 그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정말 죽고 싶어요”라는 말이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로 들려온다. “저 내버려 두세요. 내 맘대로 할거예요”라는 반항은 “저 좀 관심가져주세요”라는 애교로 들려온다. 잔뜩 흐렸던 날씨에 가려졌던 태양도 구름 사이로 마지막 햇살을 비추며 예쁜 석양과 함께 하루가 저물어간다. 오늘도 살려내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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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신앙교육나침반] 자녀세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교회와 가정의 핵심전략1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세대를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의 세대로 세울 수 있을까요? 학교교육은 연령별 수준에 맞게 교육하기 위해서, 당연히 세대를 연령별로 분리합니다. 학습자의 인지발달, 다중지능 등을 고려하여 세밀하게 분리할수록, 그 교육은 수준 높은 교육이 된다고 평가받습니다. 세상 교육의 프레임은 당연히 세대분리구조 안에서 진행됩니다. 이러한 세대분리 구조 안에서, 자녀세대의 정체성은 ‘교육의 대상’, ‘학생’입니다. 교회도 세대분리구조를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옳은 방향일까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에베소서 1장 23절 -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몸’으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세대, 민족, 직업, 성별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신앙고백 안에서 하나의 몸이 된 공동체입니다. 다양한 지체가 모여,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성경적인 방향으로 간다면, 교회에는 그 어떤 소외자도, 낙오자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의 몸이니까요. 반대로, 성경적인 방향이 아니라면, 교회에는 끊임없이 잃어버리는 양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세대분리 구조를 예배와 목양, 교육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세대분리 구조는 본질상 자녀세대를 목양의 대상이 아닌, 교육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구조입니다. 학교와 학원과 가정에서 교육의 대상인 아이들이, 교회에서의 정체성 또한 ‘학생’입니다. 이 아이들은 세상에서 ‘OO 학교의 학생’이며, 교회에서도 ‘OO 부서의 학생’입니다. 다르게 표현해보면, 이 아이들이 속한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는 온통 자신들을 가르치려는 선생님들만 가득합니다. 그 어디에서도, 이 아이들을 향한 목표는 ‘교육’입니다. 이 아이들을 향한 목표가 사랑과 관계와 소통인 곳은 없습니다. 구조가 그러하니까요. 이러한 구조 안에서 우리의 자녀세대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시들어갑니다. 아이들은 늘 지식을 배우고, 점검받고, 평가받습니다. ‘믿음’ 역시 ‘신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교육의 프레임 안에서, 배우고 점검받고 평가받습니다. 자녀세대를 어떻게 하면 믿음의 세대로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정답은 간단합니다. 기본 프레임부터 성경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교회를 보면, 세대를 분리하는 예배와 교육이 기초를 이루고, 세대를 통합하는 예배와 교육은 보완책입니다. 성경적인 모양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대를 통합하는 예배와 교육이 기초를 이루고, 세대를 분리하는 예배와 교육이 보완책이 되어야 합니다. 온 세대를 하나 되게 하는 예배와 교육구조 안에서, 우리의 자녀세대들은 “나는 OO부서의 학생이구나!”가 아니라, “나는 우리 교회의 성도구나!”라는 성경적인 정체성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세대의 회복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향상교회 세대통합 예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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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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