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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육칼럼] 환영 받는 아이로 키우자
    최근 뉴스나 일간지에 사건사고로 자주 보도되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아동‧청소년 문제 중 하나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거나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안하무인 후안무치(眼下無人 厚顔無恥)형의 아동‧청소년들이다. 이런 유형의 아동들은 대부분 정서‧행동문제를 가지고 있어 아동기나 청소년기에도 또래는 물론 학교 교사나 교회 교인들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하며, 문제가 되는 행동들이 일상화되면 청년기는 물론 성인기 아니 일평생 주변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부를 당하게 된다. 아동‧청소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정서‧행동문제를 보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유아기부터 양육되어 오는 과정에 매 성장기에 적합한 정서적 요구와 신체적 요구가 충분히 수용되지 못하고 거부당하거나 따뜻한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동이 존중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서‧행동문제로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되었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아동‧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성장과정을 확인해 보면 폭력의 가해자 이전에 그 아이들 역시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자녀양육은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연령에 적합한 과제를 배워가고 그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피고 교육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말한다. 개개 부모의 양육형태는 그들이 속해 있는 국가와 사회의 가치와 관습 및 요구, 그리고 부모가 개인적으로 갖는 특성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양육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동의 정서적 요구와 신체적 요구를 잘 살피고 민감하게 그 요구에 반응해 주는 것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아동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요구에 적합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말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 없는 영아기에는 울음으로 요구를 표현한다. 똑같은 울음 같지만 민감하게 그 요구를 읽어보면 잠이 와서 우는 울음, 배가 고파 우는 울음, 안아달라고 우는 울음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언어 대신 울음으로 자신의 요구나 의사를 표현하는 영아기에 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계속 젖병만 물리거나 무시해 버리거나 울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면 아동은 자신의 요구가 무시되어 더 크게 울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하려 하거나 겁에 질려 울음을 멈출 수도 있다. 더 크게 우는 아이들은 이후에 반항적인 아동으로, 겁에 질리는 아이들은 위축되는 아동으로 각각 다른 유형의 정서‧행동문제를 가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양육환경과 양육방식이 아동‧청소년기의 다양한 행동문제와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정서‧행동문제 없는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자녀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우선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자녀의 말이나 행동, 선택이나 결정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공감을 받아본 아이들은 타인을 더 잘 공감하게 된다. 공감능력은 환영받는 아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다음은 자녀의 정서적, 신체적 요구를 잘 살피고 그 요구에 적합하게 반응해야 한다. 자신의 요구에 적합한 반응을 받을 때 아동은 자신이 존중받고 배려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존중과 배려와 사랑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고 스스로 타인에게도 실천하게 된다. 끝으로 자주 격려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성장해가는 과정에 가정에서는 동생과 부모를 통해 또는 유치원, 학교에서는 또래들과 선생님을 통해 상처를 받거나 위축될 때가 있으며 종종 실수나 실패를 할 때도 있다. 이럴 때마다 다그치지 말고 따뜻하게 격려를 하자. 격려는 정서적 지지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정서적 안전기지가 있음을 확신하며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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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신앙교육나침반] 자녀세대의 마음을 치료하는 자리, 가족 성경학교
    120세의 노련한 리더인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하여 다음 세대의 양육을 책임져야 함을 절절히 외친다. 모세는 자녀세대들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기 위한 핵심전략을 간명하게 밝힌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그는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는 부모세대들이 생활양식이나 관습이 아닌, 내적인 차원의 ‘마음’을 놓고 싸워야 함을 명령한다. 즉, 그는 부모세대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이 아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는 존재로 달라져야함을 명령한다.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큰 영향력은 없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소통하려고 한다. 자녀와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복음이 되어 자녀의 영혼을 일으켜 세운다. 사랑의 테두리 밖에서 전해지는 율법과 진리는 공허한 종교가 되어, 자녀세대들의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녀세대의 마음을 보듬는 “관계”속에서 신앙이 전수된다면, 그것은 다음세대의 삶에 생명의 영향력을 미치는 “복음”이 될 것이다.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규율, 관습, 진리는 껍데기뿐인 종교가 되어,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다. 수많은 자녀세대들이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다쳐 있다. 현재 전국 176개의 모든 교육청에 청소년 자살사건이 보고되어 있다고 한다. 수많은 자녀세대들이 마음이 멍들고 찢어진 채로 쓰러져 있는데, 누구하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쓰다듬어주는 이가 없다. 마음이 다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마음이 다치면, 생명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음이 다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교회는 이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는가? 마음에 피가 나고 상처가 난 아이들을 모아두고, 사랑이 없이 성경지식과 교리만 열심히 가르치고 주입하고 있는가? 자녀세대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그 무엇도 배울 수 없다. 자녀세대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복음을 받을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온 세대가 함께 생명의 복음을 받고, 자녀세대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따스한 사랑 없이, 성경지식과 교리만 가르치는 일을 지금 당장 멈추어라! 지금은 온 세대가 아이들과 복음을 함께 받고, 모두 함께 천진난만한 아이로 돌아가 복음으로 함께 놀아야 할 때이다. 놀이는 자녀세대에게 생기이다. 소통이다. 밥이다. 언어이다. 놀이는 자녀세대에게 목숨이다. 온 세대가 복음으로 놀이하라.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벽이 허물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놀라운 소통이 경험될 것이다. 그러한 소통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복음은, 자녀세대의 마음을 치료하는 보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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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6-09
  • [다음세대칼럼]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라
    우리가 원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현대 교회에는 다양한 예배가 존재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것이 개인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두 번째는 공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고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셋째는 생활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성도의 삶 전체는 모두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구분은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상하고 우아한 성도들과 함께 전문적인 합창단과 맞먹는 찬양대가 있고,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의 설교를 조용히 듣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토크쇼의 진행자 같은 목회자가 헤드셋 마이크를 끼고 강단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토크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찬양 팀의 공연 같은 찬양이 있는 예배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는 짧고, 대신에 드라마나 영상이 있는 예배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멘’ 소리조차 내지 않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예배를 선호합니다. 이런 예배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이유, 목회자의 성향, 성도들의 선호도 등에 의해서 오늘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어떤 예배를 선호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예배는 어떤 것이냐”라는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종류를 나누는 것이 신학적으로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또,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사람이 원하는 예배라는 말이 가능한가?’라는 바로 이 두 가지 질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사전은 예배를 “경배, 고백, 기도, 감사를 통해 초월자를 향한 존경, 숭배,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예배를 “아베다”라는 단어로 가장 먼저 설명합니다. 이 “아베다”라는 단어는 ‘종, 노예’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자가 ‘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역시 ‘엎드려 고개 숙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우리의 생각, 의지,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종처럼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의식의 의미는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신명기 12장 1절 말씀은 예배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1)” 드릴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거기서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잘못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예배이고 가나안의 예배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온 이집트는 수천수만의 신이 있었습니다. 각 신들마다 예배하는 신전이나 장소가 따로 있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도 신들이 많았습니다. 신명기 12장 2절 말씀에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2).” 가나안 사람들은 성전을 세우는 등 예배처를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높은 산이든지, 낮은 언덕이든지, 무성한 나무 아래든지, 커다란 바위 밑이든지, 어디든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상을 세우고 숭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 제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석상이나 목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나 가나안에 예배처소가 많았던 것은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고 흐리고 비오는 날이 이어지면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를 오게 만드는 신을 섬겼습니다. 가뭄을 지배하는 신, 농사를 지배하는 신, 밤이나 어둠을 지배하는 신, 건강을 주관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신을 믿은 이유는 모두 그들이 원해서 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처소도 본인들의 생각과 필요에 맞는 곳이면 어디든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우상을 섬기는 곳을 다 허물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허물뿐 아니라, ‘석상을 부수고, 목상을 불태우고, 신상들을 부수고, 그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지워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나안 우상들은 가나안의 ‘문화’입니다. 그들의 ‘역사’이고, ‘삶의 흔적’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문화유적’으로 잘 보존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철저히 없애라고 하셨습니까? 가나안의 우상들이나 제단들을 그대로 두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2장 30절 말씀에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가나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보다 안정되고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가나안을 볼 때, ‘이 민족들이 자기의 신들을 어떻게 섬겼을까?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상숭배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우상들과 그 예배 방법을 없애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31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의식을 싫어하시고 역겨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나안의 신들과 예배처소를 철저히 없애는 대신에 신명기 12장 5절 말씀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예배의 중심은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거기서만 예배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아무데서나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는 ‘유일중앙성소’라는 말입니다. 그 택하신 곳은 가나안 초기 ‘실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자신이 사는 곳에서 물이라도 한 사발 떠놓고 손 모아 빌면 되는데,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소나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되는데, 하나님은 굳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명기 12장에서 말씀하는 예배에 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소를 구별하시는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정된 장소에 있는 성막과 성전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장소와 건물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예배가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배를 드릴 장소와 건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장소와 건물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 12장에서 예배 장소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있는 곳은 어디나 예배 처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구별된 예배처소는 주 안에서 구별된 성도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고, 또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의 가정이 거룩하고, 우리의 학교와 직장이 거룩하게 구별된 예배처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예배처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 세대가 이런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기성 세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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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갔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예수님의 천국비유장인 마태복음 13장의 핵심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천국은 저 하늘나라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는, 그냥 머릿속에 추상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데 천국이 우리 가운데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는 겁니다. 겨자씨 한 알이 어때요?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이게 누구의 시선입니까? 어른들의 시선입니다. 어른들의 시선, 배웠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겨자씨 한 알로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건 작은 씨앗에 불과해.” 그런데 아이들의 시선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관찰하고 계속 심습니다. 이걸 자기 밭에 갖다 심고 계속 관찰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여러분, 겨자는 1년 생 풀입니다. 봄에 싹이 트면 여름에 자라서 가을에 추수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는 풀보다 커서 마치 나무처럼 커진다는 겁니다. 나무는 1년을 넘어 2년, 3년 계속 살잖아요. 마치 그럴 것처럼 크게 자란다는 거에요. 이렇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어 보이는 가장 작은 겨자씨에서 풀보다 큰 나무가 나오는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공중의 새들이 누굽니까? 마태복음 13장 처음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아시죠? 거기서 길가 밭에 떨어진 씨를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즉, 새는 누구냐? 씨앗을 먹어버리는 존재. 씨의 세계에서는 천적과 같은 존재. 무서운 존재. 인생의 방해꾼입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겁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씨인데 아이의 눈으로 보면 자란 후에는 오히려 그 천적들을 품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결국은 씨가 승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지금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구원과 은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이들을 봐줄 때 아이들의 꿈이 보이고 아이들의 미래가 보이고 아이들의 비전이 보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봐줄 때 우리는 천국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보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지금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명품으로 휘감고 정말 번쩍번쩍 나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게 내가 지금 보여주는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 하나님이 바꿔 주시는 나, 하나님이 변화시키는 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선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어른들도요, 어른이라도 우리가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한 아이, 부지런한 아이, 성실한 아이, 매력 있는 아이들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을 봐도 마찬가지죠.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를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기대가 되는 미래는 바뀔 것입니다. 너무너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이건 전국에서 분홍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분홍 목사님!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분들이 기대하는 답은 뭐냐면 예산이나 프로그램입니다. “과연 성민교회는 아이들에게 예산을 얼마나 줍니까? 과연 얼마나 돈을 씁니까? 아니 어떤 프로그램을 합니까?” 다 거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회 예산? 다른 교회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프로그램? 특별히 대단한 내용들 굳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미래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미래의 그 아이들이 공중에 새들이 와서 깃들 어마어마한 나무가 될 것을 믿는 겨자씨 한 알이라고 믿고, 그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알아보는 눈! 그 시선을 가진 교사들입니다. 바로 아이의 시선을 가진 교사들이 자녀에게는 가장 필요한 그들의 선물이고, 또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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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6-09
  • [양육칼럼]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부모가 된다는 건 준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간에 수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자녀의 신체발달, 인지발달, 언어발달, 정서발달, 사회성발달, 영양, 질병,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또한 부모의 자녀 양육방식은 자녀의 발달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부모가 되기 전 ‘부모 되기’ 교육을 받고 부모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오늘날 아동・청소년기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는 가정 내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양육과 교육의 출발지인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 양육을 무엇에 중점을 두고 하였으며, 부모가 자녀와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점적으로 길러주어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로부터 비롯되며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로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자신 스스로를 가치를 갖춘 존재로 여기고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감정을 의미한다. 자존심과 비슷하지만 용법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존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거나 받들어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감정을 의미하지만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감정의 의미로 주로 쓰인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들에게는 많은 도전과 경험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닥쳤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해’, ‘이거 하다 실패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 반면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문제가 어려워 보여 걱정은 되지만 상관없어. 일단 한번 해보자’로 시작한다. 또한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이 충분히 존중받고 지지받는 아이이기 때문에 친구나 주변 사람들도 소중하게 대한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질 것 같거나 못할 것 같으면 쉽게 포기해 버리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며, 자신감이 없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대인관계를 기피하기도 하고,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이 스스로 존중받는 대상이라고 느낄 수 있게 도와줘야 하고, 부모는 아이가 하는 자기표현을 수용하고 경청하는 태도로 들어 주어야 한다. 아이의 의견이나 요구가 수용 받을 때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낀다. 아이의 의견이나 요구, 감정을 무시하거나, 어린아이의 의견이나 표현이라고 가볍게 여긴다면 아이는 자신의 요구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훈육할 때 아이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아이를 무시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훈육 상황에서 부모들은 화가 나있는 상태로 무심코 던진 말들에서 아이들은 난 할 수 없는 아이, 혹은 난 실수만 하는 아이 등의 부정적인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며 자존감이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자주 스킨십을 하며, 아이 스스로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수용하고 경청한다면 자존감이 높아지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책임질 줄 하는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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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축구와 다음세대 부흥의 공통점
    요즘 한국축구를 보면 세계적인 축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많이 발전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느낄 정도입니다. 오래 전 한국축구의 패스는 주로 뒤로 했습니다. 아니면 옆으로 횡패스를 해왔습니다. 그동안 뒤로 아니면 옆으로 패스했던 이유가 뭘까요? 이것이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축구는 그동안 욕먹는 게 두려워서 계속 뒤로, 때로 옆으로 패스했습니다. 실패할 확률도 적었고 그래서 욕도 덜 먹었습니다. 그런데 손흥민이 나타났어요. 이강인이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패스를 앞으로 합니다.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앞쪽에는 적들이 많으니까 수비수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골도 들어가고 좋은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실제로 골도 더 많이 들어갑니다. 자,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그동안 한국축구는 뒤로, 옆으로 해왔는데 손흥민, 이강인은 앞으로 패스를 합니다. 차이가 뭘까요? 무엇이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변화가 왔을까요? 이 변화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바꾸어 놨을까요? 손흥민과 이강인은 과연 뭐가 다른 걸까요? 그동안의 한국축구와 이 새로운 개념의 축구는 과연 차이가 뭘까요? 우선은 “목표를 정확히 본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들은 목표 중심입니다. 그동안은 목표가 아니라 우리 편을 보고 축구를 한 것입니다. 우리 편을 보고 우리 편이 어디 있나를 살펴서 가능하면 안전한 패스를 주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목표를 향해서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생각의 전환”입니다. 중요한 것은 축구를 왜 하느냐는 것이죠. 욕 안 먹으려고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욕 안 먹고 내 플레이에 실수가 없었다는 걸로 만족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골도 넣고 그래서 결국은 승리하기 위해 하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하면 선수들의 플레이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 이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경기를 즐깁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욕을 먹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 경기를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이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골을 넣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계적인 선수들이 지금 이 플레이를 하고 있는, 그리고 수많은 연봉을 받으며 지금 전 세계의 카메라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골을 넣기 위해서. 그래서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고 만족을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아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이런 차이들은 궁극적으로는 어디서 나오는 차이일까요? “실력” 자기의 실력을 쌓았고, 오랫동안 연습한 실력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감독과 코치의 사고 전환” 입니다. 감독과 코치가 만약에 한 번 실수했다고 혼내고 주눅 들게 했으면 아마 그렇게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주로 해외에서 뛰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뛰는 지도자들은 주로 몇 번 실수했느냐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인 플레이를 했느냐? 얼마나 창의적인 플레이를 했느냐? 네가 얼마나 너 스스로의 장점을 살렸느냐?를 주목하고 지도하니까 선수들이 마음껏 플레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잘하는 축구, 공을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점유하고, 이 공을 가지고 뭔가 플레이를 하는 그런 축구가 아니라 앞으로 한 발이라도 나가는 축구, 상대방을 향해서 전진하는 축구, 그리고 공을 만들어 내는, 기회를 만들어 내는 축구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그동안의 한국 교육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육은 어떤 교육이었습니까? ‘안전하게, 가만히 있어라.’ 교육이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교육도 애들에게 우리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애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모든 것은 교사와 교역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시간에는 아무도 떠들면 안 됐습니다. 공과 시간에 입을 열면 혼났습니다. 안전하게 교육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강인이나 손흥민이 우리 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만히 듣고 있었을까요? 창의적인 생각을 하며 계속 질문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질문을 잘 받아주고 같이 고민해주는 교역자와 교사들의 자세가 새 시대의 아이들을 길러내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이룬 마틴 루터는 카톨릭에 대한 질문에서 종교개혁의 씨앗을 틔워냈습니다. 질문과 저항, 그리고 이를 통한 소통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정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학교에서 질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소통이 막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축구계의 변화처럼 교회교육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신앙교육의 세계에서도 손흥민, 이강인이 등장할 환경을 만들어줄 변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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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5-19
  • [다음세대칼럼] 잔인한 가정의 달
    정은이는 둥지로 힘들게 찾아온 엄마와의 면회를 거부했다. 사실 정은이는 엄마가 부끄러웠다. 나이가 50살이 넘도록 아직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무식한 엄마가 싫었다. 아직 한글도 읽고 쓰는 엄마였기에 친구들에게 소개시키는 생각은 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인데 엄마가 둥지를 불쑥 찾아온 것이다. 정은이 엄마는 어릴 때부터 심한 학대를 당하면서 성장했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 할아버지는 엄마를 싫어해서 초등학교가 아닌 식당에 일하러 보냈다.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면서 어린 나이에 매일 밤 눈물 흘리며 고생하며 지냈다고 한다. 일이 힘든 것은 참고 지낼만했는데 어린 나이의 엄마는 끔찍한 성폭행까지 참아가며 그곳에서 버텨야만 했다. 결국 어린 나이에 임신까지 하게 되어 정은이의 언니를 낳았지만 폭력과 술주정을 부리는 손길을 피해 도망을 쳐야만 했다. 강원도에서 최대한 멀리 부산으로 도망을 와서 만난 남자와의 짧은 동거 기간에 다시 임신하여 낳은 아이가 정은이였다. 그 남자 역시 엄마를 학대하여 다시 도망쳐야만 했다. 엄마의 모진 세월에 집 안에 남은 것은 성처투성이의 자신과 아빠가 다른 두 딸 뿐이었다. 두 딸을 위해 엄마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닥치는대로 막일을 하면서 키워왔다. 언니는 그런대로 성장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휴학 후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은이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집과 엄마와 언니 그 모든 것이 너무 싫었기에 학교를 소홀히 하고 가출을 반복하는 문제를 점점 드러낸 것이다. 정은이는 무엇보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전단지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부끄러운 모습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엄마와 마주치는 것이 싫었다. 진통제, 우울증 등 각종 약을 한 손 가득 먹어야만 겨우 잠이 드는 엄마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집에 점점 늦게 들어가다가 안 들어가게 되고 자신을 이해하는 남자 친구를 만나 장기간 가출 생활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실종신고가 되고 경찰서에서도 학교에서도 정은이를 찾다가 통고가 되어 법원 재판을 받고 둥지로 오게 된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나이지만 1학년 때 이미 다니던 학교에서 유급된 상황이라 둥지에서 중졸 검정고시와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하도록 판사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마침 정은이 재판의 국선보조인을 제가 맡게 되어 이런 정은이와 어머니에 대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게 되었다. 둥지 처분 후 정은이는 자신의 짐을 다 챙긴 후 걱정이 되어 따라나서는 엄마를 한사코 뿌리치며 다음에 보자고 하며 자신만 홀로 왔다. 그런데 그 엄마가 둥지로 직접 찾아온 것이다. “정은이 너 면회 안 갔네” 정아가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정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응. 몸이 좀 안 좋아서...” “근데 너희 엄마 진짜 예쁘더라” “진짜?” “그래. 화장 안하고 그 정도인데 꾸미면 끝내주겠던걸” “뭘... 화장하면 다 이쁘지...” “아냐. 우리 엄마는 화장해도 똑 같이 안 예뻐. 내가 엄마 닮았는가봐” 정아가 끼어들었다. “너희 엄마 몇 살이야?” “50살” “진짜 40살처럼 보이던데” “우리 엄마는 37살인데” “뭐?? 37살이라고? 뻥치지마라” “진짜야. 37살.” “야. 그럼 너를 몇 살에 낳은거야?” “내가 중학교 2학년 15살이니깐 22살에 낳은거지” “엄마 진짜 젊네. 같이 다니면 언니라고 해도 믿겠다. 개 부럽다” “우리 엄마는 나를 18살에 낳았는데” “뭐라고?” “우리 엄마아빠가 고등학교 때 사고쳐서 나를 임신하고 학교도 짤렸데” “그 뒤에 어떻게 됐는데?” “뭘 어떻게 돼. 그때 낳았으니 지금 내가 있지. 그 뒤에 성인되서 바로 결혼한거래” “와. 진짜 멋있다” “그래도 일찍 결혼해서 동생도 낳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게 다행이지” “나도 그런 사람 만나고 싶다” “저기 미쳤나. 그럼 지금 임신해서 애 낳고 싶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멋진 남자 만나 오래가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둥지는 마당에서도 다 들릴 정도로 웃고 떠들며 자신들의 엄마 얘기에 빠져들었다. 그때 조용히 자리를 비켜 TV를 켜는 아영이. 갑자기 시작된 엄마 얘기에 자신은 끼어들 틈이 없어 마냥 TV화면만 쳐다보고 있다. 살짝 뒤돌아보니 자기 침대에 돌아누운 정은이가 보인다. 아영이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되뇌었다. ‘씨×. 그런 엄마라도... 있으면 좋...겠...다’ 사실 아영이는 미혼모시설에서 태어나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모른채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단순히 놀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된 가출이 반복되면서 문제를 일으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지난 실수에 대해 반성하며 시설로 돌아가서 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시설측에서는 다른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고, 계속된 기회에도 비행을 반복적으로 일으켜 왔기에 다시 받을 수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 결국 둥지로 오게 된 상황이다. 있어도 없어도 문제인 부모.... 잔인한 가정의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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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신앙교육나침반] 수영로교회 온 세대 가족성경놀이캠프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2023년, 온세대가 복음을 함께 받고, 온세대가 복음을 함께 경험하는 자리를 위해 세대통합 가족성경학교 컨텐츠(주제: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를 개발하였다. 2023년 5월 12-13일, 향기나무 사역팀은 부산 수영로교회 가정을 대상으로 “가정은 하나님의 보물” 성경놀이캠프를 진행하였다. 부산 수영로교회 가정사역팀은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의 영적 교류와 소통을 위해 향기나무에 협력을 요청하셨다. 이번 가족성경놀이캠프는 다음 두 가지 소주제의 말씀과 놀이로 진행되었다. Play Bible1 [가정의 탄생]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로 사로잡힌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특별한 계획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믿음의 가정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레위 남자와 여자를 결혼하게 하시고, 믿음의 자녀들을 허락하셨다. 가정은 남녀의 뜨거운 사랑으로 어쩌다 우연히 생긴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뜻 가운데 치밀하게 설계되어 탄생한 하나님의 보물이다. 성경놀이캠프에 참여한 가정은 [가정의 탄생] 말씀과 놀이를 통하여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비전을 발견하게 되었다. Play Bible2 [가정의 구원] 하나님은 애굽에 마지막으로 장자의 죽음이라는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극렬한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가정보물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방편을 알려주신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이다. 가정마다 어린양을 잡고, 그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죽음의 심판을 피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신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입고 교회로 세워지기를 열망하신다. 성경놀이캠프에 참여한 가정은 [가정의 구원] 말씀과 놀이를 통하여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열망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거룩한 교회되기를 기도하였다. 향기나무의 복음말씀과 복음놀이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를 이어주는 공통언어가 되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영적인 교류와 소통을 선사하였다. 2023년 여름성경학교는 온 세대 가정을 품는 자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1,2,3세대가 함께 마주하는 자리에서, 1세대의 지혜와 2세대의 열정과 3세대의 비전이 어우러져, 무너진 가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세운 교회로 새롭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세대통합 가족 성경학교 컨텐츠 문의| 향기나무교육개발원 031-30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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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부흥의 열쇠는 질문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저희 부산 성민교회와 분홍목사 사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를 만나는 분들마다 재촉하는 게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해 보라는 것입니다. 성민교회는 뭘하길래 아이들이 몰려드냐? 한마디로 해봐라. 그런데 참 답이 애매합니다. 저희가 무슨 프로그램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으면 참 대답이 쉬울 겁니다. 이거 하시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다음세대 사역은 단답형으로 대답하기가 좀 복잡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성민 교회의 다음 세대의 사역은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질문. 바로 아이들에게 직접 묻는 것입니다. “얘들아, 뭘 해주면 좋겠니? 얘들아, 우리가 너희한테 뭘 해주면 너희가 행복하겠어?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여러분, 아이들에게 질문할 때 교회학교는 어마어마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가 요즘 여러 교회에 초청을 많이 받습니다. 교사 헌신 예배, 교사 세미나, 교사 수련회, 교회 학교 부흥을 위한 자리에 불려 가면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겁니다. 잘못 불렀다고. 저를 부르지 말고 이 자리에 서야 할 오늘의 강사가 있다고. 그러면 모두 그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강사가 누구냐면 ‘여러분 교회 부서의 아이들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여러분 교회 부서의 아이 중에서 특별히 교회에 나오기를 싫어하고 예배에 집중을 못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불러 놓고 마이크를 주고 “네가 원하는 걸 말해봐. 어떻게 해주면 너희 부서의 애들이 많아지고, 행복하고,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겠니?”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여러분이 그대로만 하시면 여러분의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아이들을 부르지 않고 저를 부를까요? 왜 소위 전문가를 부를까요? 어른인 우리가 애들한테 물어보기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먼저 애들에게 물어본 분홍목사, 저를 부르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뭐냐면 먼저 물어본 사람이 전문가입니다. 먼저 물어봐서 아이들의 마음을 아는 제가 전문가라고 강의를 하고 다니지만 결국 중요한 키는 아이들이 쥐고 있습니다. 질문이란 건 뭐냐면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왜 질문이 그렇게 중요한 화두일까요? 이미 교회학교에서 10년, 20년 교사근속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 왜 질문이 핵심이라고 하는 걸까요? 질문이라고 하는 것.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을 받아 준다, 질문에 답한다, 말이 오고 간다. 여러분, 이것 자체가 소통입니다. 제가 다음 세대 사역을 20년 이상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소통과 부흥에 대한 정의입니다. 많은 분이 어떻게 알고 있냐면 ‘소통하면 부흥한다.’라고 알고 계세요. 맞습니까? 소통하면 부흥합니까? 소통하면 부흥이 됩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해보니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은 ‘소통이 부흥이다.’입니다. 소통하는 자체가 부흥입니다. 이미 아이들과 교사가, 어른과 아이가 서로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그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제가 저희 교회에 와서 처음 한 것은 아이들의 교회 학교 예배시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25년 동안 저희 교회는 아이들은 9시에 오고, 어른들은 11시에 오는 예배였습니다. 25년을 하면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들이 다 9시에 오는데 항상 제시간에 못 오고, 9시 10분, 20분, 30분, 40분, 50분에 오고 10시가 되어야 아이들이 오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 25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제가 와서 아이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애들아, 뭘 해주면 좋겠니?” “목사님, 시간이 너무 일러요. 9시에 못 나오겠어요. 미치겠습니다. 팔짝 뛰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럼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했더니 아이들은 “어른들은 11시에 나오잖아요. 우리도 11시에 나오면 좋겠어요.” “그래? 11시에 나오면 너희들 잘 나올 수 있겠어?” “그럼요! 저 누구도 데려오고, 누구도 데려오고, 다 데려올 수 있어요! 11시에 오면 안 돼요? 왜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당회에 건의했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9시 예배드리고, 애들은 11시에 예배하자. 그랬더니 웅성웅성 그러세요. 왜? 25년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애들은 9시에 교회에 데려다주고, 또 집에 갔다가, 애들 데리고 와서 데려다 놓고, 11시에 예배드리는 게 그동안 누구도 아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내내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아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애들한테 물어보는 순간 애들은 하나같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9시에 못 오겠다고. 자, 그래서 저희는 2017년부터 교회학교 예배시간을 오전 11시로 전부서 다 바꿨습니다. 바꾸는 순간 어떻게 됐을까요? 모두 부서가 부흥했습니다. 잃은 양 다 찾았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학교앞 전도하면서 수요일마다 간식 주고 말씀 나누고 했던 아이들 주일에는 한 명도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수요 교인이었어요. 그런데 11시로 바꾼 후 다 나왔어요. 왜? 아이들이 자기가 올 수 있는 시간, 오고 싶은 시간대로 어른들이 물어봐 주었고, 아이들은 말을 해 주었고,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답을 찾은 것이죠. 그러면서 저희 교회가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질문이 부흥의 키입니다. 오늘, 바로 아이들을 만나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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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4-28
  • [다음세대칼럼] 믿음의 유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가페의 사랑과 비슷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보면 아무런 조건이 없고 무한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까요?’ 우리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자녀들을 위하는 것인지에 대해 창세기 26장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절에서 11절 말씀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10절에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흉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런데 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흉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브람 때에 일어난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랄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브람 때에 흉년이 들었을 때는 아브람과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에 창세기 26장 2절에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은 이삭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흉년이 들어서 살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 지역에 머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은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때로는 우리 인생에 흉년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줘야 될 중요한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포스트모던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 종교든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참 진리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세의 때에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 밖에도 세상에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심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에 될 유일한 삶의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물려줘야 할것인가?’ 자녀들이 우리를 통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도록 힘쓰는 것은 우리가 평생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힘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인생의 흉년에 관계 없이 언제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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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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