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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두 교회, 다음 세대는 어떤 교회를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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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로 본 교회의 선택
오늘날 교회는 수적으로 많지만, 다음세대가 체감하는 교회의 모습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어떤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 있게 성장하며 다음 세대를 품는 반면, 어떤 교회는 존재하지만,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두 종류의 교회로 분명하게 나눈다.
생산적인 교회와 비생산적인 교회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타국으로 떠나는 주인을 통해 자신의 승천 이후 교회의 시대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맡기신 사명과 기회, 책임을 의미한다.
다음 세대가 떠나는 교회, 비생산적인 교회
비생산적인 교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교회는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 이는 다음세대의 언어로 말하면 변화를 두려워하고, 시도를 거부하며, 실패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회다.
첫째, 사명을 멈춘 교회다. 복음 전도와 다음세대 양육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교회는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의 삶과 동떨어진다. 둘째, 변명으로 가득 찬 교회다. “요즘 애들이 문제다”, “시대가 변했다”라는 말은 결국 교회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일 수 있다. 셋째, 에너지를 소모하는 교회다. 내부 갈등, 말다툼, 형식적 논쟁에 에너지를 쏟는 교회는 다음 세대를 위한 상상력과 투자 여력을 잃는다.
넷째, 불신앙의 교회다. 하나님보다 실패를 더 두려워하는 교회는 새로운 세대를 향한 도전을 시작하지 못한다. 다섯째, 현상 유지에 머무는 교회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 그대로 하자”는 태도는 빠르게 변화하는 다음 세대의 삶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음 세대에게 매력 없는 공동체, 머물 이유 없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쉽다.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 생산적인 교회
반면 예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생산적인 교회는 결과보다 태도, 규모보다 방향을 중시한다.
첫째, 작은 일에 충성하는 교회다. 다음 세대 한 사람, 한 영혼을 향한 꾸준한 관심과 돌봄을 소중히 여긴다. 둘째, 기회를 즉시 붙드는 교회다. 변화의 신호를 위기가 아닌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셋째, 보이지 않아도 충성하는 교회다.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사명을 감당한다.
넷째, 보상을 계산하지 않는 교회다. 숫자나 성과가 아닌,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다음 세대 사역을 지속한다. 다섯째,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교회다. 다음 세대 사역은 단기간의 성과가 아니라 긴 호흡의 믿음이 필요함을 아는 교회다. 여섯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교회다. 이는 교회의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초대다.
올해에는 우리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달란트 비유의 결론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교회가 건물이나 프로그램보다 사람을 남기기를 원하신다. 특히 오늘의 교회는 다음세대를 향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다음 세대는 말보다 삶으로 증명되는 신앙, 형식보다 진짜 관계, 규모보다 진정성 있는 공동체를 기억한다. 생산적인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세대를 향한 책임을 감당한다. 마태복음 25장의 메시지는 오늘의 교회에 도전한다. 다음 세대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통해 실망하게 할 것인가,
착하고 충성된 교회, 그리고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가 되어 마침내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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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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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하나님께 맡기는 2026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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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대한민국의 학부모로 산다는 것은 늘 ‘불안’이라는 그림자를 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을까, 지금 이 선택이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부모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항상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 ‘맡김(Trust)’입니다. 이 ‘맡김’의 원리가 자녀교육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자녀 인생의 ‘진짜 주인’이십니다
많은 부모님이 자녀의 인생을 자신이 설계하고 완공해야 할 ‘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경영하려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부모는 경영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를 잠시 위탁받아 기르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부모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모든 과정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듯, 우리 아이의 성격, 재능, 심지어 우리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 있습니다. 자녀를 내 소유로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우리 아이 인생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때, 부모는 비로소 아이를 내 기준에 맞추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아이를 통해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관찰자’이자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미래라는 무거운 짐을 부모의 연약한 어깨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 드리는 것이 자녀교육의 첫걸음입니다.
2. ‘맡김’은 방관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 어떤 분들은 “그럼 부모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방관’과 ‘맡김’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맡김은 부모의 책임을 회피하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지만 그 결과물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맡기듯, 부모는 아이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따뜻한 밥을 해 먹이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 성실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내 뜻대로 바뀌지 않을 때,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맡김’의 실천입니다.
“나는 뿌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불안한 강요는 아이의 영혼을 숨 막히게 하지만, 부모의 신뢰 섞인 기도는 아이의 영혼을 춤추게 합니다. 부모의 성실함과 하나님의 지혜가 만날 때, 자녀의 인생에는 부모의 계산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경영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3. 부모와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한 팀’이 되게 합니다
세상의 자녀교육은 부모와 자녀를 ‘감독과 선수’ 혹은 ‘관리자와 노동자’의 관계로 만듭니다. 성과를 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수직적이고 긴장된 관계입니다. 그러나 자녀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면, 부모와 자녀는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경영자 아래 있는 ‘동역자’이자 ‘한 팀’이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자녀는 부모의 권위가 아니라 부모 뒤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자녀 또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한국 부모의 열정과 자녀의 가능성이 ‘하나님께 맡김’이라는 영적인 원리 안에서 결합될 때, 가정은 전쟁터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부모는 아이를 다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손잡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동반자가 됩니다. 이러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녀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비로소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올 한 해 아이의 학원 스케줄을 짜기 전 먼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잠언 16장 3절의 말씀을 소리 내어 선포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의 학업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 아이의 성품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 아이의 진로와 만남의 복을 주님께 맡깁니다.”
걱정은 하나님께 맡기고, 부모인 우리는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고 축복하는 일에 집중합시다. 우리가 주님께 맡겨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완벽한 방법으로 우리 아이의 인생을 경영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부모만이 누릴 수 있는 그 깊은 평안과 행복이 2026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의 삶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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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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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사명으로 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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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이나 청소년 집회하다 보면 상처나 열등감을 도와 달라는 호소가 많다. 그래서, 돕다 보면 그 치유의 정점은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다. 사명의 길을 갈 때 진정한 성숙과 행복이 온다. 깊은 신앙과 상처에서의 회복도 완성된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다시 세우고 돕는 방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는 상처를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상처가 사명이 되게 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고 실현이 빠른 해결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가진 은사와 재능을 찾아야 한다. 강점도 발견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쓰이는 곳이 사명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신앙이 좋은 증거도 은사가 불같이 일어서 사명을 감당한다고 고백한다.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모세는 왕자 리더십, 그리고 광야의 인격과 영성이 은사가 되었다. 왕자 리더십과 정치 능력을 40년간 애굽 왕궁에서 한 훈련은 이스라엘 지도자로의 리더십을 준비함이다. 거기다가 출애굽을 위해 미리 애굽 나라를 잘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40년 광야에서 사는 훈련은 출애굽 후 광야로 인도하기 위한 광야 전문가가 되는 훈련이다. 처가댁의 양치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로 출애굽을 하여 인도함을 잘 수종을 들고 모세도 그렇게 목자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이끌며 보호하고 사랑하라고 하는 이유이다.
모세의 처가살이 40년은 하나님 백성들의 까다로운 반항과 불순종을 잘 통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유함을 가져야 가능하기에 미리 준비하는 여정이다. 유모를 바로의 궁에서 친어머니를 통해서 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킬 자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미리 훈련되기 위해서이다 자기 정체성을 준비시킴이다.
결국 모세야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출 4:2)라고 할 때 “지팡이니이다.”(출 4:2)라고 했다. 결국“그것으로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같이 되어 사역하라.”(출 4:16-17)고 하셨다. 모세의 사명 치유이다.
요셉과 다윗,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 사도 등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가진 은사를 통해 불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특히 상처도 사명의 도구가 되게 하셨다.
나도 어릴 시절 깊은 살골의 삶이 지금 사람들의 깊은 아픔을 살피는 전문 상담가, 전문 가정사가 되게 하셨다. 한센병 할아버지 섬긴 경험이 상처로 굳기보다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는 상담과 설교를 하게 되었다. 알코올의존 아버지로부터 복음으로 20여년 자주 맞으며 핍박받은 상처는 도리어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며 전하게 되고 복음을 확신 있게 믿게 하는 믿음이 되었다.
이렇게 상처받고 힘들게 산 이야기는 “자연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 강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명의 삶으로 재해석할 때, 상처보다 큰 삶을 살게 된다. 이를 “자연이야기”에 대응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안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 사람을 “비전”(Vision)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비전을 성취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 “사명자”, “비전 성취자”(Visionary)라고 한다. 이제 청소년의 상처를 공감하고 불쌍히만 여기는 자리에서 상처가 사명이 되어 놀라운 하나님 나라 대안 이야기를 쓰게 하자. 그러면 청소년 당사자의 상처는 모두 결국 치료되거나 극복하게 된다. 이렇게“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한국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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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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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마음세대이야기]레아의 기다림과 성탄절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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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첫딸인 레아는 평생 자기보다 예쁘고 똑똑한 동생 라헬과 비교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시력이 약했다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눈이 나빴다는 말이 아니라 늘 눈동자가 지쳐보였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예쁘지 않았다, 외모가 매력이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늘 눈물로 적셔져 있어서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레아는 늘 슬프고 험한 인생을 산 거죠. 그리고 이름만 봐도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그녀의 이름 뜻은 “들소”였습니다. ‘약함’, ‘지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생 라헬은 “암양”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름다움’, ‘고움’의 뜻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빠 라반이 야곱과 동생 라헬이 결혼하는 그 밤에 두 자매에게 너무나 뜻밖의 말을 합니다. 레아에게 신혼방에 들어가라고 한 거에요. 그때는 불도 없고 그러니까 밤이 되면 어두워서 안 보이잖아요. 언니와 동생이 비슷하니까 누군지 모르고 첫 날 밤을 보낸 거죠. 그러자 야곱은 억울해하고 분하게 여겨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람의 뜻은 예쁘고 매력적인 라헬이 먼저 시집을 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레아에게도 공평하게 향한다는 것을 볼 수 있죠.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결국 세상의 방법과는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니까요.
자, 이제 두 자매가 야곱과 결혼한 여기부터가 중요합니다. 야곱과 결혼한 레아는 같이 야곱의 부인이 된 동생 라헬과 경쟁하는 삶을 살아요. 그 당시는 아들을 낳는 것이 대를 잇는 것 뿐 아니라 아내의 역할을 다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 장자의 어머니가 됐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야곱이 의무감으로 결혼한 레아보다는 사랑해서 결혼한 라헬과 잠자리를 더 많이 했을 테니까 당연히 라헬이 먼저 애를 가지고 낳았을 거 같아요. 그런데 정작 첫 아들을 낳은 아내는 레아였습니다. 첫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어요. 이름 뜻은 ‘보라 아들이라!’였어요. 누구 보라구요? 동생 라헬 보라구요! 이어서 두 번째 아들을 또 레아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어요. 뜻은 ‘들으심’이에요.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거에요. 그리고 세 번째 아들도 레아가 낳아서 이름을 ‘레위’ 연합, 하나됨이라고 지어요. 이제 내 남편은 내 동생 라헬과는 완전히 결별을 하고 나와 완전히 연합해서 하나가 될 거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이름이죠.
자, 그러면 이제 이쯤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어요. 레아의 남편 야곱은 정말 예쁜 라헬만 사랑하고 못 생긴 레아는 외면했는가? 하는 거에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레아가 아들 셋을 연속해서 낳을 수가 없죠. 야곱은 비록 의무감이었을망정 두 아내에게 모두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었고 자기의 역할을 묵묵히 다했던 거였죠. 그렇다면 레아의 인생이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요?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남편에게 그리 사랑받지 못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아픔은,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오직 '남편의 인정'에서만 찾으려 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의 사랑으로 내 빈 마음을 채우려 하니,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처럼 늘 목마르고 비참했던 것입니다. 비교하면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질 뿐이니까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 그녀가 네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녀는 드디어 이전의 방식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동생 들으라고, 약올리는 이름을 짓지 않고 ‘유다’라고 합니다. 뜻은 ‘찬송’이에요. 이렇게 넷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이제는 더 이상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사랑을 갈구하며 살지 않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주어진 생을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내겠다는 신앙의 다짐을 담은 이름을 지은 것이죠. 더 이상 남편의 사랑을 구걸하는 약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거룩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마음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보기 전에 이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레아, 약함, 지침이란 이름을 가졌던 한 여자, 일생을 통해서 비교당하고 언제나 약하고 지쳤던 그녀가 마침내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어머니가 되는 한 여인의 인생을 우리가 봤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받던 라헬이 아니라 사랑도 못 받던 레아가 여섯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게 되었을까요?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29:31)
레아는 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약했기에 기다렸고 하나님은 그녀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약해서 기다리는 자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같이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약하고 무력해서 다만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시대의 레아들에게 주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레아의 기다림이 왜 오늘 대림절에 중요할까요? 바로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림 끝에 낳은 네 번째 아들, '유다'의 자손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받지 못했던 여인, 가장 약했던 여인,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다려야 했던 그 여인의 몸에서 세상을 구원할 왕이 오셨습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화려하고 강한 곳이 아니라, 약하고 기다리는 자의 삶에 찾아오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레아처럼 지치고,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것 같고, 약해 보이십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약하니까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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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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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다음세대를 주목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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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았지만 거역하고 도망쳤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돌아온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를 담은 요나서는 우리에게 참 많은 인사이트를 주는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요나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요나서 4장 11절은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4:11)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 이것이 하나님이 아끼시는 대상을 나타내는 말이었어요. 이 표현은 당시에 6세에서 7세 미만의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아직 유치부, 미취학 아동인 거에요. 당시에 이 아이들은 아무 쓸모없는 물건처럼 취급을 당했어요. 말도 잘 안 통하고 일을 시킬 수도 없고 자꾸 울고 보채고 먹을 것이나 찾고...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무조건 강자 중심이고 어른중심이 아닙니까? 경제활동을 하니까요. 돈을 벌지 못하면 사람 숫자로 잘 치지 않습니다. 요나서가 기록된 구약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만 숫자로 치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몇 명인지는 셀 이유도 없고 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니느웨에 사람 숫자를 헤아리면서 어른 숫자가 아니라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숫자를 계수하십니다.
이건 요나가 아까워하는 대상과는 완전히 다르죠. 요나는 자기한테 유익이 되는 대상, 자기의 머리 위를 가려줄 유능한 박넝쿨을 아까워했어요. 비록 하루아침에 났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박넝쿨이지만 요나는 그런 존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유익도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말씀하고 계신 거에요. 왜요? 그들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가 사는 이유이고 우리의 목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고 그들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예수님께서 직접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18:10-14)
너무 놀랍지 않으세요? 아이들마다 그들의 천사들이 있는데 그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고 하십니다. 이건 그야말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잃은 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잃은 양이 바로 앞에 나온 “이 작은 자중의 하나”인 겁니다. 그럼 이 잃은 양을 어떻게 찾을까요? 그 천사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서 하나님이 직접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잃은 양이 14절에는 다시 “이 작은 자중의 하나”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이 작은 자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잘 키워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다음세대를 키워내는 교회가 되자고 할 때 이 말은 다음세대와 기성세대를 나눠서 서로 경쟁하자는 게 아닙니다. 누가 더 소중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음세대가 없으면 교회는 미래가 없어집니다. 아무리 큰 교회도 이제 다 문 닫고 다른 용도로 팔리는 시대가 곧 올 겁니다. 유럽과 미국교회의 사례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곧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다음세대를 사랑하고 살려내는 교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다음세대를 살려 미래를 열어가는 복된 교회가 되길 우리 하나님 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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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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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만남은 사역의 시작이자 은혜의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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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역을 하다 보면 매달 백 명이 넘는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 그중 어떤 아이는 단 하루 스치듯 지나가고, 그중 어떤 아이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함께하며 마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날 때, 우리가 전하지 못한 복음이 얼마나 무겁게 마음에 남는지 사역자는 모두 알고 있다. 최근 나는 그런 아픔을 겪었다. 열 달을 함께했던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주었던 시간, 함께 밥을 먹으며 웃었던 순간들이 떠오를 때 ‘내가 복음을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하는 자책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만나는 아이마다 복음을 미루지 말자.”
■ 청소년 사역은 ‘수많은 만남’ 위에 세워진다. 아이들은 사역자의 마음을 흔든다. 어떤 날은 기쁨으로, 어떤 날은 걱정과 속상함으로, 어떤 날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감사로 마음이 가득해진다. 만남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그 아이의 삶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때로는 그 아이의 ‘가장 힘든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이 사역자일 때도 있다.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성경 속 모세의 인생이 문득 청소년 사역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모세의 삶도 만남의 연속이었다. 믿음의 부모와의 만남, 애굽 공주와의 만남, 동족과의 갈등이라는 만남, 광야에서 십보라를 만난 사건까지 모든 만남이 그의 인생을 준비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모세의 인생은 ‘사명’이라는 방향을 갖게 된다. 광야에서 보낸 40년은 허무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빚어가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 사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는 청소년 사역을 하며 아이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종종 맞닥뜨린다. 얼마 전 밤 11시에 한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며칠 동안 꿈에서 목사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어요. 하나님… 정말 계신 것 같아요.” 또 다른 아이는 제주 한길학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진로, 새로운 꿈,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두 해 만에 교회에 다시 찾아왔다. 이 아이들의 고백은 사역자의 피곤을 단번에 녹여내는 은혜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이미 그 아이들을 향해 일하고 있었다.”
■ 아이들과의 모든 만남은 ‘하나님의 퍼즐 조각’이다 청소년 사역이 어렵게 느껴질 때, 나는 다시 이 사실을 붙든다. “우연한 만남은 없다. 사역자에게 주어진 모든 만남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다.” 어떤 만남은 우리를 웃게 하고, 어떤 만남은 마음의 짐처럼 느껴지고, 어떤 만남은 오랫동안 가슴을 울린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조각이 아이 한 명을 세우고, 사역자를 빚고,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새로운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나는 묵상처럼 이 기도를 드린다. “주님, 이 아이의 인생을 준비하신 당신의 이유를 보게 하소서.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소서.” 사역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아이들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빚어가고 계신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모든 청소년 사역자와 교회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지혜가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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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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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스마트폰 중독에서 청소년을 자유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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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집회와 일반 초중고 강의를 가면 무려 스마트폰 중독이 무려 97%가 넘는다. 충격이다. 3% 중독이 아니고 스마트폰 관리를 잘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대안학교를 다녔다. 쉽게 말해 학교규칙과 학교에서 부모에게 요구한 규칙으로 같이 지도해서 폰 중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사의 자녀마저도 대략 90%는 중독이었다.
스마트폰은 연령이 낮아질수록 더 높은 중독 경향성과 더 심한 피해를 준다. 뇌가 덜 성장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은 두개골이 얇고, 뇌 조직의 전기적 성질이 달라 동일한 기기 사용 시 흡수되는 RF 에너지(SAR)가 성인보다 크기 때문이다. 자기 관리력이 더 자라야 할 때 유혹에 노출되어 노예가 되고 만다.
1) 스마트폰의 피해 중에 전자파의 피해를 대부분 모르고 있다. 스마트폰은 주로 수백 MHz ~ 수 GHz 대역의 무선전파(랜·셀룰러 신호: RF-EMF)를 발생한다.
2) 스마트폰 지도에 다음 여섯 가지는 꼭 지키자.
첫째, 청소년이 전자파로 인한 피해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에 맞은 협의를 하여 스마트폰의 사용 규칙을 정하자. ① 통화 시 스피커폰/이어폰(유선) 사용으로 귀와 휴대폰 머리 간 거리 늘리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노출이 감소한다. ② 통화 시간과 사용 시간을 줄이기 — 개인pc로 유튜브, 게임, 강의 듣기를 하게 하자. ③ 밤에 기기를 침대에서 멀리 두기- 수면 질 개선 및 불필요한 상시 송수신(백그라운드) 노출을 감소한다. ④ 어린 자녀에게는 스마트폰을 아예 주지 않거나 사용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여야 발달·수면. 중독 문제를 예방한다. ⑤ 기기 보관 방법을: 몸에 붙여 보관(특히 허리·가슴 주머니)하는 것을 피하자. 몸에서 사용하지 않을 때 2m 이상 두자. 이런 권고는 전자파 차단하는 조치도 되지만 노출을 현실적으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WHO와 여러 공중보건기관도 권고하는 내용이다.
둘째, 부모와 교회 지도자도 스마폰 바른 사용을 실천하면서 해야 한다.
셋째, 스마트폰의 중독의 3요소를 잘 이해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지도해야 한다.
① 조절실패이다. 스마트폰을 없이 생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이다. ② 현저성이다. 개인 삶에서 폰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집착과 관심이 두드러지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③ 문제적 결과이다. 지나친 폰 사용이나 잘못된 폰 사용으로 인해 신체, 심리, 경제, 대인 관계, 사회, 영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넷째, 부모와 학교 교사 그리고, 교회와 나라가 같이 동참하고 협력해야 한다. 부모 혼자 잘 지도해도 실패하는 확률이 훨씬 더 높다.
다섯째, 청소년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제거하거나 해결하는 능력을 높여야 한다. 스트레스와 불안이 스마트폰 중독과 다른 모든 중독의 원인 전체에 무려 70%이다. 청소년이 불안하지 않는 환경이 되고 실컷 놀고 다양한 체험을 하며 자란다면 스마트폰 중독과 다른 모든 중독에서 자유한다. 지금까지 청소년 상담만 거의 4,000명 정도 진행한 나의 사례에서 청소년 우울증, 청소년 ADHD, 청소년 품행장애, 자기조절력 결핍, 분노조절장애, 학교 부적응, 대인관계 문제에 스마트폰 중독이 없는 청소년은 한 명도 없었다.
여섯째, 스마트폰 중독해결과 예방은 청소년에게 예배 회복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교회가 알고 시급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중독해결이 되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안 된다. 스마트폰 중독 청소년이 설교를 이해하고 듣는 능력이 무려 10%만 알아들었다. 내가 집회와 설교를 하면서 직접 조사한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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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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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아이들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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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교육을 할 때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부분이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다 다른데, 이 감정들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아이는 기분이 계속 좋아요. 그런데 어떤 아이는 기분이 훅 나빠져요. 왜 그럴까요? 아이들마다 그 부분이 건드려지면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그 아이만의 히스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아이들은 다 괜찮은데 나만 감정이 상하고 힘들다면, 우리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감정의 이름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우리가 만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단순히 아이들이 말하는 “개 짜증”, “기분 나빠.”가 아니라 그 일이 왜 나에게 기분 나쁘게 다가왔는지를 파악하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려고 합니다.
첫 번째, ‘불안’입니다. “불안하네. 이거 잘 될까? 불안해!” 이 ‘불안’은 사실 뭐냐 하면 우리 삶의 거품을 제거해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불안하구나 싶으면 뭘 해야 하냐면 “이 불안은 왜 찾아오는 걸까?” 돌아봐야 합니다. 흔들리고 불안하다면 이건 정말 필요한 것 이외의 것들을 제거하라는 사인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나,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붙잡고 껍데기를 버리게 하는 과정이 바로 불안인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건드려질까 봐 불안한 거죠. 그렇다면 내가 그것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를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불안한 순간에 우리는 정말 중요한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두려움’입니다. “나 저거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은 뭐냐 하면 사실 우리 용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두려움이란, 내가 이걸 넘어서서라도 꼭 얻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대학 입학을 놓고 두려워하는 우리 학생들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 대학을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내게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두려움도 없겠지요. 두려움이란 나의 목표를 알려주는 감정입니다.
세 번째, ‘질투’입니다. “질투는 나쁜 거 아니야?” 하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아니요. 질투는 나의 욕망을 보여주는 감정입니다. 누가 사랑받는데 보니까 질투가 난다. 내 안에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에이!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이렇게 넘어가려고 해요. 그런데 알고 보면 내 안에 그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단 말이죠. 그동안 숨겨왔던 것. 그동안 거부했던 것. “아니에요. 난 안 그래요! 안 그래요!” 했었는데 진짜 내가 누구인지, 진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장치가 뭐냐? 그게 질투라고 하는 거예요.
네 번째,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연결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 괜찮아! 괜찮아! 나 안 만나도 괜찮아! 나 괜찮아! 나중에 봐!”라고 하지만 괜찮지 않거든요. 여러분은 늘 괜찮으세요? 아니요. 우리 모두 괜찮지 않아요. 외로움이라는 이 감정은 연결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일깨워주는 감정입니다.
다섯 번째, ‘실망’입니다. 실망은 나쁜 감정이 아닙니다. 실망은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에요. 내가 그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해 얼마나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입니다. 많이 기대한 만큼 실망하니까요. 추락하는 것은 항상 날개가 있는 것이잖아요. 나한테 별로 관심 없었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까 내가 되게 실망했어요. 그 때, 나는 “내가 기대했었구나. 내가 그걸 원했었고, 내가 바라고 있었구나. 내가 그것을 진짜 원했네!”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여섯 번째, ‘초조함’입니다. 초조해요. 손이 떨려요. 초조함은 더 나은 나를 향한 채찍질입니다.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떨지도 않아요.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초조한 거예요. 떨리는 거예요. 잘하려고 하지 않으면 초조할 일도 없는 거에요. 면접 보기 전에 왜 초조해요? 대학 입시 보기 전에 왜 초조해요? 잘하고 싶으니까요. 그래요. 이 초조함이라는 감정은 잘 하고 싶어서 생기는 참으로 소중한 감정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분노’입니다. 분노는 나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감정입니다. 내안에 분노가 일어났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는 건 적어도 내가 그 사람에게 진심이었다는 거예요. 진심이 아니면 화가 날 일도 없어요. “그놈의 인생! 그렇게 살라고 해!” 지나가 버리면 화날 일이 없어요. 그런데 왜 분노하는가? 정말 사랑했으니까!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적어도 그 사람에게 난 뜨거웠으니까! 그 마음이 짓밟히고, 그 마음이 무시당할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감정에, 또한 우리 아이들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줄 때 우리는 이 감정을 통해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감정을 바르게 읽어내고 이를 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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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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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씨앗이 자라듯, 다음세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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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이다. 교회의 미래는 자라나는 세대 안에서 어떻게 신앙의 씨앗이 뿌려지고, 또 어떤 열매로 맺히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두 가지 비유, 곧 네 가지 밭의 비유와 씨가 자라는 비유는 다음 세대 사역의 본질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말씀 전파가 하나님 나라의 핵심
첫 번째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 말씀 전파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 4:26)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땅”은 세상을 가리킨다. 오늘의 다음세대 역시 수많은 정보와 가치관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스마트폰과 미디어 문화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경험이다. 교회와 가정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씨앗은 반드시 생명력으로 싹트게 될 것이다.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신앙
두 번째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가 시간을 두고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되”(막 4:27)라고 말한다. 신앙은 단번에 성숙하지 않다. 아브라함이 25년 만에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처럼, 모세가 80세에 비로소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신앙은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늘 “빨리빨리” 문화 속에 조급하다. 교회 안에서도 청소년들이 곧바로 믿음의 거목이 되기를 바라며 서두르곤 한다.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신앙도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와 교회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청소년들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과정조차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음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와 열매
세 번째 공통점은 신앙의 열매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점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지만, 씨가 자라는 과정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막 4:28)라는 말씀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강조한다.
다음세대를 향한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열심, 교사의 수고, 교회의 프로그램이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열매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씨앗을 충실히 뿌리고, 성령께서 자라나게 하심을 믿으며 맡기는 것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열매를 거두신다.
다음세대를 향한 교회의 과제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다음세대를 위한 사역의 본질은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씀을 뿌리는 일이다. 또한, 그 말씀이 뿌리내리고 자라도록 인내하며 기다리는 공동체의 사랑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교회는 충실히 말씀을 전하는 농부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위기를 말한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간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시대든,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가 힘을 합쳐 다음세대의 마음 밭에 말씀을 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풍성한 열매로 거두실 것이다.
씨앗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 뿌려진 작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다음세대의 가슴 속에서 싹트고 자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교회와 부모, 교사와 성도 모두가 말씀을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다음세대를 품을 때, 한국 교회의 미래는 희망으로 채워질 것이다.
“씨가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다.” 이 고백이 다음세대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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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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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다음세대 교육의 핵심, 5C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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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가 다음세대로 신앙전승이 잘 이루어질지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대안 마련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성민교회로도 많은 연락이 옵니다. 하지만 단기적인 미봉책으로 교회학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리더들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을 이해하고 다음세대를 만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교육학자 하워드 핸드릭스는 그의 저서 '가르치는 것 이상의 가르침(Teaching to Change Lives)'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5가지 원칙을 5C로 강조했습니다. 이는 확신(Conviction), 교통(Communication), 대면(Confrontation), 책임(Commitment), 자신감(Confidence)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원칙들은 교회 교육에 그대로 적용되는 핵심 개념들입니다.
1. 확신 (Conviction)
확신은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깊이 있는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됩니다. 확신을 가진 교사는 학생들에게 배우는 내용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교회교육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 실존적인 하나님을 경험한 교사들이 확신 가운데 ‘나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할 때 비로소 생명력과 운동력이 있는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2. 교통 (Communication)
교통은 교사가 학생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학생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핸드릭스는 교통이 '다리'와 같아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신뢰를 쌓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교통은 학생의 필요와 질문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질문을 던지시고 그 질문에 다시 질문을 이어가시는 방법으로 제자들과 문답식 교육을 하셨습니다. 교회교육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나눔입니다.
3. 대면 (Confrontation)
대면은 학생이 자신의 삶에 배운 내용을 적용하도록 도전하고 격려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학생의 태도, 행동, 가치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내용을 너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 학생 스스로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핸드릭스는 이 대면을 통해 학생의 성장이 진정으로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믿음이란 내 삶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맞서는 영적 훈련입니다. 죄의 고리를 끊고 신실한 삶을 살겠다는 분명한 다짐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4. 책임 (Commitment)
책임은 학생이 배운 내용을 삶에 적용하겠다는 의지를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학습을 넘어, 배우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겠다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교사는 학생들이 이러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과정을 함께 지지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합니다. 책임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인 삶의 변화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맡은 바 자리를 지켜내는 책임이 중요합니다. 주신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책임 있는 모습이 주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5. 자신감 (Confidence)
자신감은 교사가 학생에게 배우는 내용과 그들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핸드릭스는 교사의 역할이 학생들에게 '너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그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신뢰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새로운 도전에 맞서고, 성장하며, 결국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이 5C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핸드릭스는 강조했습니다. 그는 교육이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심오한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5C를 바탕으로 우리의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입체적인 복음의 진수가 전해지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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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