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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어마, 나느 왜 마르 모태”(1)
    쉽게 열지 못하는 상자가 있다. 손에 닿는 곳에 있고, 언젠가 한 번은 열어야 하는데 머뭇머뭇 거리며 용기를 내지 못해 마음만 졸이며 만져보지 못하는 상자.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암에 걸린 환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환자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분명 몸에 이상이 있었단다. 평소와 달리 쉽게 지치고, 소화는 계속 안되고… 이런 생활을 꽤 했었는데 병원을 쉽게 갈 수가 없었단다. 예상하고 있던 대로 암이라고 판정받을까봐. 이미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고 어디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것을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사실을 확정받는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무서워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100% 같을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집 막내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키가 클뿐만 아니라 공놀이도 잘하고 친구들과 달리기를 하면 늘 큰 차이를 두고 먼저 들어오곤 했다. 4살 때 간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유아체육시간에는 독보적인 활동량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큰 키에 비례해 말도 또박또박 하면 좋으련만, 말은 2살 아기와 비슷하게 했다. 막내 은샘이가 5살이 되었을 때이다. 새학기가 되면 어린이집 적응기간이라 일정 시간 부모와 함께 어린이집에 있어야 했다. 그 때 반에서 또래 친구와 은샘이가 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어떤 야무져 보이는 여자 아이가 은샘이에게로 가서 무엇이라 말하고는 곧장 선생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여자 아이가 선생님에게 “선생님, 그런데 저 키 큰 오빠(은샘이를 가리키며)는 말을 못해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는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은샘이가 오빠같이 보였고, 그 오빠에게 말을 시켰는데 자기처럼 또박 또박 말하지 않자 말을 못하는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남자 아이들은 말하는 것이 늦을 수도 있지.’라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위에 형들, 누나 모두 말하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아이들이 없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말은 곧장 했다. 문장도 또래 아이들과 비슷하게 구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발음이었다. 6살 때까지 2살 아이의 발음처럼 옹알거리듯 말하고,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이쯤 되면 엄마인 나도 심각성을 느끼고 발음치료센터라도 가봐야 하는데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마음으로, 그 다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또 그 다음에는 두려워서 섣불리 센터를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은샘이가 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3월이 되었다. 문장은 어른처럼 사용하지만, 그 문장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엄마인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점점 “은샘이가 발음이…” “한번 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들이 들려오면서 나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보면, “아픈 것도 아니고, 아예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서 발음 검사만 해보는 건데, 그게 뭐가 무서워 안가고 있을까”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몸에 분명이 이상 신호가 왔음에도 병원을 갈 수가 없었던 암환자처럼 나 역시 병원은 찾지 못하고 여러 이유로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고민만 하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물론, 그런 고민 끝에 결국에는 언어 치료사를 찾았고, 내가 무엇을 놓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 방안을 들었다. 하지만 난 이번 일을 겪으며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실체도 없는 두려움에 두려움을 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이 작은 발걸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큰 애가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막내가 7살 즈음 되자 이제 육아로부터 조금 여유가 생겼나보다라고 여기던 딱 그 순간에, 아이들로 인해 또 꼬꾸라지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나를 본다. 이걸로 보아,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이, 자녀 양육은 하나님으로 향하는 분명한 지름길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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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2-04-29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우리 신앙의 에스프레소
    오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식사하시고 커피도 한 잔 하셨겠죠? 요즘은 밥값보다 비싼 커피가 그렇게 많더라구요. 그런데요. 커피를 마시러 가면 바리스타가 우리에게 “어떻게 드릴까요?”라고 꼭 물어봐요. “무엇으로 드릴까요?” “커피 달라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무슨 커피냐고요?” 물어봐요. 옛날에는요, “커피 주세요.” “어떻게요?” “맛있게 타 주세요.” 그러면 됐어요. 이제는 그게 아니죠. “아메리카노 드실래요? 카페라떼 드실래요? 카페모카로 드실래요? 아니면 돌체라떼나 마끼야또로 드실래요?” 복잡해요. 그만큼 커피 종류가 다양해졌어요. 자기 취향에 따라서 골라 먹을 수가 있어요. 저도 참 많은 커피를 종류별로 다 먹어본 것 같아요. 그런데 그중에서 희한한 커피가 있어요. 바로 에스프레소라는 커피인데 주는 것도 아주 조금 줘요. 무슨 간장 종지 같은 컵에다가 좁쌀만큼 주는데 엄청 진하고 맛은 별로 없어요. 인상을 쓰게 될 정도로 아주 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어요. 커피전문점을 가면 아메리카노, 까페라떼, 카페모카, 돌체라떼, 마끼야또, 이런 거는 간혹 없는 곳도 있어요. 그런데 어디를 가나 반드시 있는 커피는 바로 주기도 조금 주고 맛도 없는 쓴 커피, 에스프레소입니다. 희한하죠? 이걸 누가 먹는다고 커피전문점마다 있나? 왜 그럴까요? 이것이 바로 모든 커피의 기본 베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이 에스프레소가 없으면 다른 커피를 못 만듭니다. 에스프레소에다가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요, 에스프레소에다가 우유를 부으면 까페라떼가 되고요, 여기에다가 쵸콜렛을 부으면 카페모카가 되고요, 연유를 넣으면 돌체라떼가 되고요, 여기에다가 카라멜을 부으면 카라멜 마끼야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프레소 커피가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커피가 없으면 모든 커피는 하나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커피는 무슨 커피라구요? 바로 에스프레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른 커피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데 에스프레소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커피를 다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우리의 교회에 있어서 신앙의 에스프레소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수많은 청소년들을 만나고 어린이를 만나고 청년들과 교사들을 만났습니다. 초청받아서 설교나 강연을 하러갈 때마다 고민을 했습니다. 이분들한테 무슨 얘기를 해 줘야 하나? 지혜를 강조해야 하나? 용기를 강조해야 하나? 아니면 사랑하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항상 돌아오는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핵심이 무엇인가?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모든 커피를 커피 되게 하는 커피의 원재료처럼 우리가 우리 되게 하는,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특히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우리 10대들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붙들어야 할 단 하나의 가치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살아가면서 아무리 큰 절망에 처해도 부활하신 예수님만 바르게 알고 만날 수 있다면 그 절망을 이겨내고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꿈이 보이지 않고 비전이 사라졌다고 해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가치만 놓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붙잡고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해마다 부활절이 다가오니까 하는 설교나 가르침이 아니라 정말 설교자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통과한 능력의 이야기로 예수님의 부활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한 명의 교사의 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스토리로 예수님의 부활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아이들의 인생은 예수님의 부활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마치 에스프레소가 물이나 우유, 연유나 카라멜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커피의 맛을 창조하듯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 다음세대들의 삶에 녹아들어 그들의 생을 향기롭게 하고 그들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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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04-12
  • “우리는 학교에서도 예배합니다!”(2)
    지난번 글에서 위축 되고 있는 한국교회와 다음세대사역의 부흥을 위한 대한으로서 학교복음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제안을 했다. 기독교복음사역의 여러 영역들이 모두 소중하고 필요하나 시대를 회복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필요한 사역의 영역은 “학교복음화”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다음세대사역을 회복과 부흥을 위한 학교복음화 사역의 효과적인 사역들을 소개하려한다. “학교 국기게양대기도”와 “인근학교 영적입양사역”을 통한 다음세대복음화 전략이다. 한국교회 다음세대의 현황과 미래에 대해서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라는 한국 교회 미래학 보고서를 출판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예측, 진단했던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최윤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 교회는 위기에 휩싸이겠지만 위기의 끝도 아니며 몰락을 몰고 오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 전국차원의 몰락은 2028년경이 될 것이다.”했다. 그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 미래의 개신교는 엄청난 감소를 보였다. 그것도 교회의 주력구성원들이 고령자와 은퇴자 위주로 분포를 보인다는 것이다. 2013년의 예측에 코로나19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더 속도는 빨라지고 감소의 폭은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10년이 한국 교회의 마지막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호소이다.”라며 한국교회가 골든타임에 적절하게 대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 가운데 중요한 방안으로 다음세대의 회복을 얘기한다. “다음세대(Next Generation)를 키우기 위해 그들에게 줄 비전과 역동성, 뼈를 깎는 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 다음세대에게 세속적인성공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단 미래학자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한국 교회의 미래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프로그램의 부재 혹은 교회의 좋지 못한 사건사고로 인한 비난으로 인해서 교회 부흥이 저해가 되고 침체하는 것 보다 더욱 심각한 일은 다음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미래의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는 다음세대사역의 회복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쏟아내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현저한 인구 감소는 물론이고 특히 연령별인구비례를 볼 때 심각한 상황이다. 현재 연령별 인구 구조는 역삼각형 구조로 나타난다. 노년층 장년층에 비해서 젊은이 어린이들이 적어 미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심지어 역삼각형을 넘어 팽이구조로 바뀌는 현실이다. 이미 교회 내에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50%가 넘어 섰고 주일학교가 있는 교회들도 대부분 장년 숫자의 10% ~ 20%를 넘지 않는 가슴 아픈 상황이다. 특히 청소년 복음화 율은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3% ~ 5%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야말로 미전도 종족 수준이다. 이대로 20년 후의 한국교회는 상상하기도 두렵다. 필자가 사역을 하고 있는 부산을 중심으로 다음세대사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중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 개신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은 약1만 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다. 전국적인 청소년복음화 율이 3%라고 얘기하는데 부산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청년그룹은 더 심각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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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2
  • [신앙교육나침반] 온가족이 함께 경험하는 부활절!
    안타깝게도, 많은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뜨거운 헌신과 열정이 없는 아웃사이더로 전락한다. 왜 그럴까? 교회는 참으로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다음세대를 위해 특별 절기마나 연극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방학이 되면 복음캠프와 수련회를 열었다. 그런데 왜 교회를 떠나는 것일까? 왜 복음을 떠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정작 자신들이 먹고, 자고, 공부하고, 노는 일상 속에서 전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교회에서 듣는 거룩한 이야기이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아이들은 생각한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모두 가져가셨는데, 그래서 그게 내 삶에 무슨 영향력이 있다는 거지?’ 부모들이 자녀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을 마련해보라. 부모의 눈빛, 몸짓, 언어습관, 가치관 등 모든 것은 아이들의 일생에 최고의 영향력이다. 부모의 입술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고백해보라.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뒤흔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때 언어적, 인지적 방법만이 아닌, 부모와 자녀가 온 몸으로 복음을 함께 경험한다면,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면서,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나에게 죄가 있어요! 자신의 죄가 어떤 크기와 무게일지 생각해보고, 생각나는 죄의 무게나 크기와 비슷한 사물을 집에서 찾아서 가지고 오게 한다. 죄가 크고 무겁다면 크고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오고, 작고 가벼울 거 같다면, 그와 같은 물건을 가지고 온다. 모두 가져온 후에 왜 그러한 물건을 가져왔는지 이야기 나누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아빠는 식탁 의자를 가져왔어. 사실 냉장고를 가지고 왔어야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대신 의자를 가져왔단다. 예배시간에 졸 때가 많아. 그건 정말 무거운 죄일 거야.” “엄마는 작은 쌀알을 아주 많이 가져왔어. 날마다 너희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작은 죄이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짓는 죄인 거 같아.” ✱무덤에서 생명으로! 이불로 죄의 물건을 덮고, 가족 모두 안으로 들어간다. 이불 안에서 부모가 팔을 올려서 예수님의 무덤 모양이 되게 한다. 예수님의 무덤 이야기를 들은 후, 첸트(여우야, 여우야 노래 개사)를 주고받으며 놀이한다. 술래(대답하는 사람)가 마지막에 “살았다!”라고 하면, 온 가족이 밖으로 나오고, 술래는 한 사람을 잡으러 간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우리의 죄를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어! 우리의 죄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어. 그동안 우리를 짓누르고 다스렸던 죄가 완전히 죽었어.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 속에 안치되었어. 죽은 죄도 무덤에 함께 들어갔어. 3일 후 예수님이 살아나실 때, 나도 새사람으로 살아났어! 우리 가족 모두 새사람으로 살아났어!” “OO야, OO야! 뭐하니?” (무덤 왔다~) “누구 무덤?” (예수님 무덤~) “살았니? 죽었니?” (살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이불 위에 온 가족이 둥글게 앉은 후, 공(또는 풍선)을 옆 사람에게 전달하면서 로마서 6장 8절 말씀의 내용을 전달한다. 처음에는 말로만 하며 전달하고, 점차 다양한 동작을 하면서 전달한다. 다음 사람은 이전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예수님이 왜 다시 살아났을까? 로마서 6장 8절 말씀 속에 정답이 숨어 있단다. ❶만일 우리가 ❷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❸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❹믿노니 로마서 6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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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4-12
  • [우리는학교에서도예배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예배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황은 통계를 들이대고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심각한 위기의 상황인 것이 분명하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다음세대들에게 기독교와 교회의 존재마저도 희미해지는 상황은 더욱 암담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역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사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하나님은 결코 대한민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기에 부흥하는 대한민국 교회의 미래를 꿈꾸게 된다. 기독교 복음사역의 여러 영역들이 모두 소중하고 필요하나 시대를 회복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필요한 사역의 영역은 “학교복음화”이다. 가장 많이 파괴되었기에 가장 급하게 뛰어 들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미래의 주역인 다음세대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필요하고 확실한 사역의 장이 학교이기에 더욱 그렇다. 마치 수족관에 물고기가 없으면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아와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학교에는 학생들이 많다. 교회는 학교로 가야한다. 교회마다 다음세대들이 줄어가고 있고 비어가고 있다. 이제는 교회학교마저 없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대한민국의인구감소가 원인이라고 나름의 위로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인구비율로 봐도 다음세대는 교회를 떠나있는 현실이다. 학교현장에서도 교회를 다니는 학생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는가? 교회와 사역자들의 안일한 대처와 사역의 방향들이 부실했던 것만이 원인은 아니다. 우리의 다음세대사역은 학교에서부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행동은 인식과 문화와 법등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언제부터인지 학교에서의 종교행위가 불법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종교교육이 사라졌다. 복음을 위해서 설립된 사립학교에서도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종교 활동이 제제를 받기 시작했다. 신학대학교에 입학조건이 세례교인이어야 한다는 조항도 없어진지 오래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대한민국 헌법 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가질 자유이다. 종교를 가질 자유가 종교를 막을 자유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세대의 터전인 학교에서의 신앙생활이 마치 불법인 것처럼 조장되고 인식이 되고 있다. 학교에서 전도는 물론이고 예배가 제제를 받는 현실이다. 나아가 사회문화적으로 기독교와 교회가 혐오집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고통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의 부흥하는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학교로 나아가야한다. 학교복음화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회복시킬 최고의 대안이다. 교회는 학교를 품어야한다. 학교복음화를 막고 있는 왜곡된 법과 인식과 문화들을 부수고 학교로 전진해야한다. 그리고 갇혀 있는 학생들의 영혼을 구원해야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그날을 위해서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야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는 학교에서도 예배합니다...”하며 기쁨의 찬양을 드리는 그날을 향하여 전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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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신앙교육나침반] 교회 아이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
    ‘구원 초청잔치’, ‘새생명 전도축제’ 많은 교회가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기에 새친구를 전도하고, 복음제시를 합니다. 이 날이 되면 전도되어 나온 친구들이 듬성듬성 섞여서 앉아있고, 목사님은 특별한 날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제로 복음을 전합니다. 목사님은 평소 주일보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어조로 복음을 전합니다. 어릴 때부터 1년에 한번, 이러한 복음을 경험하는 교회 아이들(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이 아이들은 특별한 절기에 연출되어지는 복음축제를 경험하면서,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특별한 날에 듣는 것,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복음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영접기도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영접기도를 따라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이끌린 기도가 아니라 의미 없는 주문을 외우듯이 영접의식을 행합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한 아이의 인생을 뒤바꿀 정도의 영향력이 있으려면 일상성과 반복성이 따라야 하는 법, 복음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읽기나 기도를 일 년에 몇 회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녀에게 꼭 필요한 습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아이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제한하고 있을까요? 교회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30세 이전에 교회를 떠난다는 것을 여러 보고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유는 명쾌합니다. 교회 아이들 중 대다수가 복음의 생명에 사로잡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 중 다수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세상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교회 아이들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절기 뿐 아니라, 매 주일의 예배와 활동에 생명의 복음이 반드시 담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공간인 가정에서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만이 이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 밖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찾지 못해 머리를 싸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동안, 교회 안의 아이들은 복음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교회와 가정에서 복음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우리집 성경놀이터를 제공합니다. 성경놀이키트와 영상자료를 통해 제공되는 놀잇감과 찬양, 말씀 등의 영상컨텐츠는 모두 교회와 가정이 교회 안과 밖의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복음의 찬양을 부르면서, 온 몸으로 경험하는 복음놀이시간은 아이들에게 웃음과 재미만 제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나게 땀 흘리며 놀이하면서 복음의 생명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아이들에게 복음은 부담스럽고 무거운 주제가 아니라, 나의 일상을 깨우는 생명과 기쁨이 됩니다. 교회 아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멈추지 않고 전하는 교회와 가정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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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교육 나침반
    2022-03-18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탈진(burn out)
    육체는 피곤하고 감정은 메말라 화만솟구친다.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데, 무기력이 몰려와 시작할 수 없고 음식을 먹어도 허한 마음은 달래지지 않는다. 이런 증상이 수일 동안 지속되고 있다. 스스로 진단하건데, 탈진이다. 일하는 시간과 양이야 늘 비슷하니 그것이 주 원인은 아닌것 같고, 아이들 또한 기쁨과 화남을 적절히 배분해서 주기에 애들 때문은 아닌 것 같고…그럼 무엇일까? 나의 외부 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내부의 마음 상태는 지하 저 밑바닥에 있는 이 이유는 무엇일까? 탈진은 기운이 다 빠져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단순히 분주하고 바빠서 탈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혹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탈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다 빠져 없어졌기에 일어나는 현상이 탈진이다.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그 일을 다 할 수 있는 기운만 있으면 탈진은 생기지 않는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되면 탈진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원인들만 봐서도 나는 단순히 일이 많고, 바빠서 탈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없기에, 내 속에 에너지가 없기에 더 나아가 내 안에 채워져 있던 것이 다 비워졌기에 탈진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내 마음 속에 80의 에너지가 있다고 치자. 낮에 아이들과 함께 에너지의 30을 쓰고 밤에 양육이 끝난 후 나만의 방법으로 20을 채웠다고 하면 다음날은 70의 에너지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양육으로 인해 써버리는 에너지가 채워지는 에너지보다 훨씬 많다면 금방 고갈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너지는 0, 혹은 -30 등이 되고 탈진을 낳게 된다. 반면, 에너지를 쓴 후 더 채워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30의 에너지를 받고, 경건한 신앙 서적을 통해 +50의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다. 그 결과 다음 날은 더 여유롭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양육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내게 적용시켜 내 속에서 비움과 채움이 적절히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비움은 100인데, 채움은 10정도 밖에 안되기에 탈진까지 오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나는 지금 어디서 채움을 얻고 있는지 짚어야 한다. 영, 육, 혼 이 세 영역에서 어느 하나라도 균형을 잃으면 제대로 된 채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예배, 개인 경건 시간의 확보 등을 통한 영의 채움, 건강하게 먹고 질 높은 휴식으로 인한 육의 채움, 만족과 감사를 기본으로 한 정서적 안정의 채움을 통해 탈진된 상태에서 서서히 회복해야 할 것이다. 넘어지면 잠시 쉬어갈 수 있으니, 지금이 그 때라 생각하고 다시 일어서는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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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목사가 되게 한 선생님의 한 마디
    저는 고3 때까지 꿈이 없었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름수련회에 가서 하나님께 저의 꿈을 받아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난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반 담임 선생님이 교회를 매우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 수련회에 간다고 자율학습 빠지는 학생들을 쫓아 매를 들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분의 별명은 ‘불타는 감자’였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홍융희! 너 작년, 재작년에 다 여름방학 때 교회 수련회 갔다면서? 이번에도 가면 내가 너를 죽이던지 퇴학을 시킬 거야!” 이런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꿈이 없고, 제가 붙잡을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그 예수님을 붙잡을 길인 수련회에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두 눈 딱 감고 여름수련회를 갔습니다. 무슨 용기를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첫날 밤 집회 시간에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비전을 주세요.” 응답이 왔을까요? 안 왔습니다. 둘째 날엔 더욱 간절히 “주님! 꼭 진로를 보여 주세요.”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응답이 안 왔습니다. 자, 이제 셋째 날 마지막 날 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겁니다. 이제 내일 학교 가면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목숨 걸고 온 수련회인데 이 밤에 응답이 안 오면 나는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나무뿌리를 뽑는 심정으로 제 안에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알려주세요. 저에게 꿈을 보여 주세요.” 밤새 데굴데굴 구르며 기도했습니다. 목이 다 쉬어버렸습니다. 그 밤에 응답이 왔을까요? 아쉽게도 안 왔습니다. 결국 저는 응답을 못 받고 산을 내려 왔습니다. 그 다음 날 학교에 가는데, 5분 거리가 50년 같았습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학교 교문에서 감자선생님이 불타고 계셨습니다. “감히 네가 내 말을 어기고 수련회를 가?” 주체를 못 하실 정도로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방학 때 종교활동 다녀왔다고 매질을 할 수도 없고 퇴학은 더욱 안 될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찾던 선생님은 저를 교무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분은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교사용 500자 원고지 100매를 던져 주시면서 “여기 앉아서 이거 다 채워서 반성문 써서 내고 가!” 그러시는 겁니다.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안 죽은 것은 다행인데 이걸 쓰다가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리나 해보자.’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왜 교회에 갔는지, 왜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께 왜 내 진로를 하나님께 구했는지, 왜 그분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지를 쭉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주님이 내게 해주신 모든 일들, 그 감격, 은혜 받은 것, 모든 것을 다 써내려갔습니다. 마치 옥중서신을 적는 사도바울이라도 된 듯 은혜가 충만해졌습니다. 내용을 쭉 다 쓰다가 마지막에는 ‘그러니까 선생님도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마무리가 됐습니다. 원고지 100매를 다 채우고 선생님께 갖다 드리니까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걸 정말 다 썼어? 진짜?” 그러더니 쭉 읽어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읽다가 이분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옆에 앉게 하고는 찬찬히 원고지 100매를 채운 반성문을 다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반성문을 딱 덮으시더니 이분이 충격적인 말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저주하고, 교회 수련회 간다고 자율학습 빠지는 놈들을 죽인다고 하셨던 그분이 그때 하신 말씀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 말은 바로 “융희야, 너 목사 되어라! 내가 반성문을 한두 번 받아 본 게 아닌데 내가 보니까 넌 진짜다. 네 글을 읽어 보니까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네가 믿는 하나님은 진짜 같다. 융희야! 너 목사 되지 않을래?” 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수련회 내내 3일 밤을 새우며 매달렸던 제 인생 진로의 응답이었습니다. 기도원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그 순간 예수라곤 전혀 믿지 않는, 도리어 제겐 핍박자였던 불타는 감자 선생님 입을 통해 들려온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선생님이 저희 부모님을 찾아가서 신학대학교 원서를 쓰도록 설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그해 장신대를 갔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을 갔고, 목사 안수를 받았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쳐 담임목회를 하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 제가 붙잡은 길인 예수님은 진리시라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란 말은 그분 놓치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분 놓치면 죽는 줄 알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분홍목사가 된 지금도 오직 예수님만 전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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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03-18
  • [좌충우돌크리스천자녀양육기] 엄마가 그어주는 사랑의 경계
    막내가 올해 7살이다. 아이 4명을 양육하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잊는다’는 사실이다. 막내를 낳고 모유수유를 시작했을 때, 분명 위의 형제들도 수유를 했는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조금 먹다 잠들어서 금방 깨는 것도 생소했고, 먹다가 사래가 들려 콜록콜록 거리는 것도 낯설었다. 형과 누나들이 혼자 샤워를 했을 때도 기특했는데, 막내가 혼자 머리를 감고 나올 때는 마치 아이를 처음 키우는 엄마처럼 놀랍고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태어난 형과 누나의 육아 시절을 까맣게 잊으며 막내의 모든 행동이 처음인 것처럼 여겨질 때 느끼는 나의 감정은 “막내가 무조건 예쁘고 귀여운” 사랑스런 마음이다. 어른들이 “막내는 뭘 해도 막내다. 심지어 혼낼 때도 이쁜 게 막내다”고 말할 때 “그럼 마음이 형제 간 차별을 조장하는데… 내가 낳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이쁘지, 누군 덜 이쁘고 또 누구는 더 이쁜게 있을까” 싶었는데 사랑의 크기는 같을지언정 사랑의 모양과 색깔은 다른게 분명하다. 막내는 막내다. 최근에 7살 된 막내에게 잊지 못할 일이 생겼다. 날이 조금 풀린 날 아이들과함께 자전거를 타러 갔는데, 두발 자전거를 타는 형을 유심히 보더니 “엄마, 나 이제 네발 안 타. 두발 자전거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두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형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 7살이 된 어린 아이에게 단번에 보조 바퀴를 뗀 자전거를 주는 것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위험한 일이어서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그 사이, 그 찰나 같은 순간에 막내는 떼를 쓰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차례 더 어르고 달래 보았지만, 두발을 잘 탈 수 있다는 아이의 말에 오히려 설득 당해 그 때부터 맹훈련이 시작되었다. 약 2시간 정도 열심히 넘어지더니 어느 순간 비틀비틀 거리지만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혼자 두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자기도 놀랐는지 아이도 엄청 기뻐하고, 스스로 바람을 가르며 행복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보는 나도 정말 감격스러웠다. 첫째, 둘째가 처음으로 두발 자전거를 탔을 때도 지금처럼 기뻐했겠지만, 생각이 전혀 나지 않고 오히려 막내의 두발자전거가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내가 막내를 조건없이,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을 나머지 아이들이 눈치챘고, 무엇보다 막내가 사랑받는 자신의 위치를 누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형아, 누나보다 날 더 좋아해”라는 말을 곧잘 하는 막내가 이제 슬슬 그런 나의 마음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막내 특유의 애교와 귀여움을 발사하며 무조건 자기 뜻대로 일이 되도록 만들었다. 형에게 잘못을 했을 때도 오히려 자기가 피해자인 것 마냥 눈물을 훔치면서 혀 짧은 소리로 “엄마, 형아가 자꾸만 나한테 마음대로 해”라며 자기 잘못은 말하지 않고, 밥을 먹을 때도 “나는 아직 애기니까 조금만 먹을거야”라며 불리할 때 쓰는 막내 카드를 마음대로 막 사용한다. 하루 이틀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더 이상 두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경계를 그어주기 시작했다. 운동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그라운드가 그어져 있다. 축구는 가로 120m, 세로 80m의 축구장에서만 경기를 해야 하고, 야구는 1루와 3루 사이에서 오고 가는 공들만 득점으로 인정된다. 마찬가지로 탁구도 규격의 탁구대에서만 경기가 치러지고 농구, 달리기 등 모든 경기는 정해진 경계 내에서만 자유롭게 경기할 수 있도록 정해 놓았다. 이제 우리 막내에게도 그런 경계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 같다. 지금까지는 막내라는 이름으로 혹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경기장을 조금 벗어나도 이해해줬지만 이제는 더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확실한 경계를 지어줘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아이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경계가 생겨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도 있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엄마가 만든 사랑의 경계가 구속이 아니라 더 행복한 자유를 준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인 나에게도 사랑의 경계는 아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양육하고 치우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방법이될 것이다. 이렇게 하루 하루 아이와 나는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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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2-03-0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빵돌이에게 찾아온 기적
    저는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학교에서 빵돌이를 했습니다. 당시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파는 아이를 빵돌이라고 불렀습니다. 매 수업시간 마치는 종 치기 5분 전에 저는 일어나서 혼자 교실 문을 열고 나옵니다. 그래도 아무도 저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빵돌이가 빵 팔러 가는 가보다 하는 겁니다. 저는 애들이 공부하는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갑니다. 그래도 아무도 제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빵돌이니까요. 매점으로 가서 문을 열고 빵을 준비합니다. 드디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면 학생들이 매점으로 뛰어오기 시작합니다. “야, 나 빵 줘.” “나, 볼펜 줘.” “나, 우유.” 정신없이 팔다가 다시 수업 종이 울리면 학생들은 다시 교실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매점 문을 닫고 애들이 공부하는 복도를 지나갑니다. 아무도 절 쳐다보지 않습니다. 수업이 시작된 지 5분이 지나 수업이 한창인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도 아무도 절 쳐다보지 않습니다. 빵돌이니까. 저는 그렇게 투명인간처럼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다니며 수업의 앞뒤 10분을 잘라먹고 독학으로 보충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친구들이 축구하는 점심시간에 저는 내내 빵을 팔았습니다. 학생들이 농구하는 방과 후 시간, 저는 내내 빵을 세며 재고를 파악했습니다. 왜 빵돌이를 했을까요? 학비를 못 내서 그랬습니다. 집에 학비를 낼 돈이 없으니까 빵돌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빵돌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저한테 “야, 너 빵돌이 아니야.” 하는 감동을 주시는 겁니다. “예? 하나님 저, 잘 보세요. 저 빵돌이 맞거든요.” “아니야. 너는 내 자녀야.” 그러시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큰데, 너 내가 안 보이냐? 야, 네가 누구인지 뭐가 중요해? 내가 중요하지. 너 내 자녀야.” 그러시는 겁니다. 저는 놀랐지만 그 자리에서 “아멘!” 했습니다.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습니다. 학교만 오면 늘 눌려 살던 제게 하나님은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마음을 가지고 그해 전교 학생회 부회장에 출마했습니다. 당시 저희 학교의 학생회장, 부회장 선거는 학생들이 직접 투표하는 직선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선거에 나갔을 때 제일 반대한 게 누구였을까요? 바로 저희 친형이었습니다. 한 살 위의 형이 제게 한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빵돌이는 빵 팔아라.”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빵돌이를 찍어 주냐? 너 빵돌이인 걸 전교생이 아는데 누가 너를 찍어 주냐? 빵돌이는 빵 팔아라.”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한 빵돌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학교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에 수긍하고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내가 빵돌이인 줄 전교생이 다 알아. 맞아. 그런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항상 정직하게 빵을 팔았어. 한 번도 내가 애들한테 짜증 낸 적 없고, 한 번도 속이거나 잔돈 적게 준 적 없고, 바꿔 달라고 한 것을 안 바꿔 준 적도 없어. 나는 정직하고 성실했어.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사는 걸 보여줄 거야. 그래서 나는 이번 선거 꼭 나갈 거야.” 그리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형, 나는 선거 운동이 필요 없다. 애들이 나한테 매시간 와. 내가 가는 게 아니라 그 아이들 와서 나한테 부탁해. 빵 좀 달라고. 우유 좀 달라고. 아이들이 늘 줄을 서, 내 앞에. 나를 만나려고. 나 명찰 달고 있잖아? 전교생이 내 이름을 안다구. 형! 나는 이번 선거 나가면 이길 수밖에 없어! 나 이거 안 나갈 수가 없어.” 그리고 선거에 나갔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현직 빵돌이 신분으로 그해 학생회 부회장에 당당히 당선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해에 저는 학교에서는 전교 학생회 부회장이 되었고 교회에서는 고등부 회장이 됐습니다. 그 당시에 교회에서 고등부 회장은 학교에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또 학교 회장들은 교회 오면 예배드리고 나면 다들 바로 내빼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학교에서는 학생회 부회장 잘하게 도와주시고 교회에서는 고등부 회장 잘 해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시간 부족해도 공부할 때 집중력 주시고 교회에서는 잘 봉사할 수 있게 믿음 더해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해주셔서 저는 학교에서는 부회장으로, 교회에서는 회장으로 둘 다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 년 후에 다시 출마한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되어 학생회 부회장에 이어 전교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부족해도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통해 역사하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다음세대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며 살아가기를 꿈꾸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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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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