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1(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다음세대

실시간 다음세대 기사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 사역과 성령의 임재
    우리는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비전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은 다음세대 사역을 하면서 우리가 표어로도 내걸고 사역의 목표로도 삼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교육 현장에서 보면 성령의 임재와 이에 따른 권능에 대해서 아직도 오해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이 임했다고 하면 열광하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는 결과를 기대합니다. 겨울수련회를 하면서 우리가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들이 저녁집회 시간에 얼마나 열광적으로 찬양을 했는가? 얼마나 눈물을 많이 쏟고 큰 소리로 기도했는가? 얼마나 손을 높이 들고 발을 열심히 굴렀는가? 얼마나 기운을 빼면서 밤을 새도록 기도했는가?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것을 기준으로 성령의 임재를 재려고 하고 평가하려고 할까요? 그건 바로 이런 것들이 학생들의 삶에서 일어날 구체적인 변화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눈물 한 번 쏟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찬양 한 번 뜨겁게 하고 기분을 풀어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과 회개는 눈물의 기도와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선 후의 삶의 변화로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 받고 난 후의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시험에 들어 그렇게 간절하게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도 겨울성경학교나 수련회에서 잔뜩 은혜 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밀린 공부는 언제 할 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와 한 판 거하게 붙고 나서(?) 수련회에서 은혜 받아봤자 아무 소용없다며 다시는 수련회 안 갈 거라고 은혜 무용론을 외쳐대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찬양하고 결단하고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줄 믿는다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은 내 주변 환경을 전혀 달라지게 해주시지 않으셨냐고, 하나님이 과연 정말 계시는 게 맞느냐고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너무하신다고 낙망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수련회에서 받은 은혜를 떨어뜨리려는 사단의 시험일까요? 많은 경우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가 정말 올바른 성령의 역사인지 확인시켜주는 아주 감사한 기회입니다. 내가 정말 은혜를 바르게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만 계시다면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고 견뎌내고 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정말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면 권능을 받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하고, 바뀌어야 할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정작 수련회에 가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았다는 나는 바뀌지 않으면서 왜 우리 엄마는 바뀌지 않았냐고, 왜 내 형제 자매나 친구들은 예전 그대로냐고, 그래서 시험에 들었다고, 다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그건 말씀을 잘 못 이해한 것이고 은혜도 이상하게 받은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차기 왕으로 선택되어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그는 얼마나 가슴이 뛰고 벅찼을까요? 하지만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골리앗이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다윗 자신이지 골리앗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과 숙련된 기술로 골리앗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또한 다윗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요?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사울 왕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일로 시험에 들어 ‘기름부음 받아도 아무 소용없네!’ 하면서 포기했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사울 왕을 피해서 동굴에서 전전할 때에도 꾸준히 기도하고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도 그를 몇 번이나 살려주면서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의 권위와 의미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악하고 완악한 내가 변화되는 이 유일한 권능은 성령님이 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다음세대들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바르게 가르치고 양육합시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1-20
  • [다음세대칼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우리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웃이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고 신고를 하고 서로 싸웁니다. 주차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집 앞에 옆 집사람이 주차하면 반드시 욕을 하며 싸우게 됩니다. 더 이상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눅10:29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율법교사는 눅10:27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개념상 이웃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교사는 아마도 그의 친족과 같은 동료 유대인들에게는 선을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좁은 의미로는 같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마을에서든 성읍에서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낯선 자도 모두 ‘이웃’이어서, ‘이웃’은 ‘같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레위기 19장 34절 말씀에는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에서 이 거류민은 타국인, 객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에서 신앙을 바르게 보존하고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를 두고 격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시기 전 200년 동안에는 ‘이웃’ 개념이 아주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실제로 ‘신앙의 동지’ 또는 ‘같은 당원’이라는 정도의 뜻만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율법에서 본래 뜻하고 요구했던 ‘같은 사람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 불리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웃의 개념에 자신의 친족이나 가까운 동지 유대인들만을 포함시킨 율법교사의 위선과 편협한 사고를 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유대사람이 한적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그 강도가 그냥 깔끔하게 돈만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그 강도는 아마도 그 유대인을 죽일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죽을 정도로 폭행을 당한 유대인은 길가에 그냥 버려졌습니다. 그 유대인에게 당연히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모른 척 지나칩니다. 그런데, 천대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친절을 베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당연히 누가 이웃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이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입니까? 누구나 아시겠지만 사마리아인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나는 율법을 잘 지킵니다.’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답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 같은 동네의 사람, 아는 사람, 등등이 그 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들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나 친분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증오와 미움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이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을 베푸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회복했고, 신앙을 지키며 산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이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편의에 맞게 이웃의 범위를 각자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부자의 이웃은 부자만 되고, 가난한 자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사람의 이웃은 젊은 사람만 되고, 나이든 사람의 이웃은 나이든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람의 이웃은 한국 사람만 되고, 외국인의 이웃은 외국인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이웃이 아니었던 사람을 이웃이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이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하면 서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이라고 경계를 그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경계를 그어놓고 그 안에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경계를 그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가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위기 청소년들, 그의 가족들, 저의 도움이 필요한 모두가 저의 이웃입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니까 복음 안에서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번 주에 어떤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 만나서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과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 비유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실천하는 2023년이 되길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1-20
  • [신앙교육나침반] 복음을 놀이하다!
    향기나무 교육개발원은 지난 3년 동안 쉼 없이 ‘우리집 성경놀이터’를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인지적인 방법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놀잇감을 이용해서 복음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컨텐츠입니다. 지금까지 향기나무가 개발한 놀이는 약 100여개가 넘으며, 그 중에서 복음 놀이 50개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50주 과정의 복음놀이 책이 발간되면, 누구나 손쉽고 저렴하게 복음놀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놀이터는 저 멀리 땅 끝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과 한인교회 사역자들에게는 귀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사역하는 현장은 한국보다 훨씬 더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장벽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세대의 장벽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복음 도구는 안타깝게도 인지적인 방법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향기나무교육개발원에서 개발한 복음 놀이는 언어와 문화와 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차별화된 복음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래는 이번 복음놀이 50주 과정의 놀이시연에 참여한 인원입니다. 4세 어린이 1명, 5세 어린이 1명, 7세 어린이 1명, 9세 어린이 2명, 10세 어린이 4명, 11세 어린이 1명, 12세 어린이 1명, 12세 어린이 1명, 14세 청소년 1명, 40대 장년 5명, 50대 장년 2명 다양한 연령의 영아, 유아, 아동, 청소년, 장년이 3일 동안 동일한 놀잇감과 내용으로 복음놀이를 경험하였습니다. 복음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세대의 수준 격차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뛰고 놀고 웃으면서, 우리는 어느 새 나이와 성별과 모습을 초월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놀이의 힘입니다. 복음을 인지적,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복음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요? 복음놀이가 마친 둘째 날, 이들 중 세 명의 아동들이 목욕탕에서 만난 할머니께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을 능숙하게 잘 하지 못하는 유아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스토리를 떠올려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온 몸으로 경험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놀이하다 50」(가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과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많은 분들의 후원과 기도가 절실합니다. 예수님 손에 올려진 오병이어처럼, 주님 손에 올려져 열방의 많은 영혼을 배불리는 데에 쓰임 받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1-2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무엇보다 강력한 교사를 세웁시다
    2023년이 밝았습니다. 새 시대, 새 마음으로 한 해를 출발하는 사랑하는 한국교회와 다음세대 사역자들, 교사들, 부모님들을 축복합니다. 많은 이들이 한국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교회사역도 함께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기에는 새 해의 소망이 너무나도 선명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많은 역사 속에서 위기를 이기며 성장해 왔습니다. 특히나 우리 교회학교의 역사를 보면 그동안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70년도 우리나라 전체 출산 인원은 약 100만이었습니다. 한해 100만 명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때는 동네마다 아이들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냥 북치며 전도하고 인형극만 보여줘도 아이들이 교회로 몰려 왔습니다. 간식 주면 아이들이 오고, 축구하면, 합창대회하면 아이들이 교회로 교회로 몰려오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도로 들어서 한국 사회의 출산 인원은 연 63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점점 아이들을 낳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도에는 연 47만 명으로 줄었고, 최근에 2020년도에는 무려 연 27만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50년 동안 아이들을 낳는 숫자가 4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20년 동안은 3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저출산을 넘어서 초저출산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이는 교회학교의 규모 자체를 줄어들게 하는 상황을 가져왔습니다. 출산율의 저하 외에도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격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교회학교에 타격을 준 것은 주 5일제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에 가고 출근을 하던 시절에는 주일 하루만 쉬기 때문에 그 하루 쉬는 주일은 반드시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주일 성수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금요일 오후부터 퇴근하고 하교하고 들로 산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2박 3일로 주말여행을 떠나는 가정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토요일과 주일의 구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주일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놀러가느라 교회를 안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건강의 위협은 결정적으로 더 한국교회를 코너로 몰아갔습니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2017년 황사를 뛰어넘는 미세먼지, 그리고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사태까지. 이 모든 우리 삶의 급변하는 상황들은 이제는 교인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제 상황이 어려워졌으니 교회를 안 나와도 좋다고 하는 공식적인 양해를 해 주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을 양해 받게 된 세대. 지금의 교인들과 아이들은 그런 공식적 허락을 받은 첫 세대입니다. 지금까지 초대교회 이후로 주일날 교회에 안 와도 좋다고 허락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상황을 피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교회학교 학생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현장예배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야외에서도, 어디서나 메타버스로 예배하는 시대, 함께 모이는 가치를 이야기하면 구시대 사람처럼 취급받는 시대에 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책무를 지닌 교육의 주체가 바로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아무리 교회학교의 상황이 어려워진다 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친히 지켜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로 쓰임받는 교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위기를 넘어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은 바로 파도처럼 몰려오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도 교회학교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켜낸 교사들의 무릎 꿇는 기도와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사들에게 똑같이 선포되고 들려질 주의 음성입니다.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여러분 같이 얻은 백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은총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한 현재의 은총으로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돕는 방패요 영광의 칼이 되어 주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과 창이 날아와도 방패만 든든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방패이십니다. 또한 어떠한 적도 물리칠 수 있는 영광이 칼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또한 여러분에게 주어질 미래의 은총은 바로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고 여러분이 그들의 높은 곳을 밟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루실 승리이지만 여러분도 그 동역자로 초대되었습니다. 교회학교의 승리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기뻐하며 찬양할 영적 싸움의 마지막 영광입니다. 올 한 해 교회교육의 현장에서 물러서지 말고 최선을 다합시다.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교사들이 세워질 때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3-01-02
  • [다음세대칼럼] 명절이라 더 슬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손에 용돈까지 받아든 둥지의 아이들은 잔뜩 신나서 온 골목이 시끄러울 정도로 목소리 높여 인사를 하고 몰려 나갔다. 아이들이 다 떠나간 뒤 시끌벅적하던 둥지는 너무도 조용했다. 따따이와 별님은 이렇게 조용해진 둥지가 어색한듯 물끄러미 아이들의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조금 뒤 정아가 둥지에 들어오다 따따이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했다. “왜? 다시 왔어?” “아뇨. 뭘 깜빡하고 안 들고 가서..... 챙겨갈려구요” “그래. 며칠 있을건데 잘 챙기거라” 한참을 자신의 서랍장 앞에서 주섬주섬 챙기던 정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별님. 저 이번 명절에 그냥 둥지에 있으면 안돼요?” “왜 무슨 일 있니?” “아뇨. 그냥 몸이 안 좋아서요” 그리고 가만히 떨구는 얼굴에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한 것을 눈치챈 별님이었다. “왜 아빠랑 뭔 일이 있어?” “바쁘데요. 그래서 이번에 만나기 어렵다고.......” 사실 정아는 아빠를 제외하면 찾아갈 집도 부모도 친척도 없었다. 그 아빠마저 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을 하다가 2개월 전 가석방되어 나왔는데 서너번의 전화통화 외엔 찾아오지도 않았기에 만나지도 못했다.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안 찾아올 수가 있어요? 우리 아빠 진짜 너무 하지 않아요?” “아마 바빠서 그럴거예요. 요즘 직장 알아본다고 바쁘다고 했어요” “다음 주에는 오겠죠?” 그리고 이번 설날 때 몇 년 만에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 그 기대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몇 번을 전화했으나 받지 않자 당장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 30분이 넘게 골목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아빠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겨우 연결된 전화였는데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하기에 바빠서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온 몸에 힘이 빠진 채로 다시 둥지로 들어온 것이었다. 별님은 정아를 위해 명절 음식을 담은 점심식탁을 차리며 물었다. “정아야! 너 전에 사상에 할머니 사신다고 하지 않았니?” “예. 근데 아빠 교도소 가신 후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연락도 못했고” “그럼 지금 전화해 볼래? 그래서 명절인데 잠시 인사라도 하고 오는건 어때?” “그럴까요? 제가 가는 것 별로 안 좋아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냐. 그건 네 생각이고... 당연히 할머니가 손녀 오는데 반가워하시지. 한번 연락해보자” “그럴까요?” “할머니! 오늘 뭐해요?” “그냥요.... 좀 있다가 인사하러 갈게요” “예. 알겠어요” 아까보다 더 밝은 모습을 전화를 마친 정아에게 나나이가 물었다. “뭐라고 하셔?” “알았다고 오래요” 저 멀리 할머니집이 보이자 정아의 가슴은 꽁닥꽁닥 뛰었다. ‘오랜만에 나를 보면 뭐라 하실까?’ ‘혹시 사촌이나 조카들도 와 있는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허벅지와 팔뚝에 있는 문신은 왠지 싫어하실 것 같아 옷을 애써 당겨 입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너무 긴장되어 바로 옆 골목에서 숨을 고르며 담배를 한 개피 물었다. 그리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다가 연기 너머로 점점 뚜렷하게 보이는 얼굴로 인해 숨이 멈추는 듯 했다. 아빠였다. “아...빠.... 여기 어쩐 일이야?” “그냥. 너는?” “나는 할머니께 잠시 인사라도 할려고 왔지? 아빠 오늘 바쁘다면서?” “아빠도 급하게 와서 인사만 하고 지금 가던 길이다” 정아는 아빠를 만나면 그렇게 보고 싶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변해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 허벅지와 팔에 그 문신은 뭐냐?” “이거... 뭐 .... 그냥....” “야~~ 이 가시나 봐라. 어깨에도 그림이 있네” “아니... 곧 다 지울거야” “돈 들여서 새기고 뭐 할려고 또 돈 들여서 지우냐. 그냥 놔둬라. 이쁘네” “어.. 어... 그럼 그냥 놔둘까” “그래. 들어가봐라. 할머니 기다리시겠다,. 아빠 간다” 그리곤 아빠는 말 없이 사라져 갔다. 정아는 아빠의 익숙한 뒷모습에 괜히 서러움이 북받쳤다. 정아는 늘 자신을 놔두고 떠나가기만 하던 아빠의 뒷모습이 너무 싫었다. ‘잘 지내냐고 한번 물어봐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쁘게 컸네라며 한번 안아주면 지금까지 나에게 잘못한거 다 용서해 줄 수 있는데...’ 할머니를 만나 잠시 인사만 하고 도망치던 빠져나온 정아는 길거리에서 가족들끼리 오손도손 손 잡고 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지하철 안에서도 다른 가족들의 다정한 모습이 보기 싫어 눈을 감은 채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둥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따따이와 별님에게 자랑했다. “저 오늘 할머니집에 가서 인사 잘하고 왔어요. 가길 잘 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집 앞에서 아빠도 만났어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웠어요. 아빠랑 곧 면회 오기로 약속도 했어요. 용돈도 주시는데 제가 안 받았어요.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어서 배도 안 고파요” 그렇게 잔뜩 자신의 희망사항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 혼자서 라면 2개를 끓여서 김치와 최대한 맛있게 먹어치우면서 속으로 울었다. ‘다음 명절에는 괜찮아질거야’ 이번 새해와 명절에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 가지시고, 소외된 외로운 이웃들에게도 작은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따뜻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3-01-02
  • [신앙교육나침반]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에 더욱 절실한 우리집 성경놀이터!
    베트남 호치민 하늘꿈 교회는 30여명의 한인들이 예배하며,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는 한인 교회입니다. 하늘꿈 교회 담임목사님인 김형진 목사님은 올해 초에 교회에 부임하셨고, 특별히 다음세대 전도와 신앙전수에 많은 열정과 관심을 지닌 분입니다. 담임목사님은 부임 후 코로나에 확진되셨고, 격리하는 기간 동안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운영하는 [향기나무 우리집성경놀이터] 유튜브채널의 경건한 가정클래스 강의를 밤새 보셨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향기나무 강의를 들으며, 코로나 시대에 다음세대를 잃지 않기 위한 방향을 찾으셨고, 저희 팀에게 바로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시기에, 향기나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베트남 호치민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저희는 계획에 없던 사역이기에 짧은 3일 일정으로 호치민에 가게 되었고, 이틀 동안 세대통합 성경놀이터, 말씀집회, 부모충전세미나, 한글학교 한-베 가정 자녀 대상 성경놀이터 사역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세대통합 성경놀이터 시간, 유아부터 10대에 이르는 자녀들과 부모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자리가 처음이라서, 부모님들은 처음에는 뒤로 물러서서 구경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자녀들 곁으로 와서 함께 깔깔 웃으며 놀았습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 말은, 한국말에 서툰 6학년아들이 교회와 가정이 함께 웃으며 놀았던 성경놀이터를 마친 후에, 엄마에게 성경놀이터에 대한 소감으로 남긴 말입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 한마디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갑자기 이 먼 곳 호치민에 오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하는 다음세대의 귀한 응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상기된 표정과 억양으로, 아들이 이렇게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신다며 좋아하셨습니다. 그 날 성경놀이터에는 얼마 전 엄마를 먼저 천국 보낸 일곱 살 여자아이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어둡게 앉아있던 그 아이가 성경놀이터 안에서 빛나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그 작은 소녀의 미소에 눈시울이 붉어지셨습니다. 성경놀이터는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한국-베트남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더욱 빚을 발하였습니다. 한글학교 아이들은 복음색깔 스카프 놀이를 통해 온 몸으로 ‘놀다보니 하나님! 놀다보니 예수님! 놀다보니 성령님!’을 경험하며 복음에 스며들었습니다. 모든 세대가 다양한 각자의 모습과 나이와 장애와 성향과 상황을 초월하여 복음 안에서 함께 감사하고 감탄하며 하나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먼 타국에 이주하여 바쁘게 살아가는 부모님들, 그리고 부모와 여유로운 소통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성경놀이터를 통한 ‘마주함’은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한 부모충전 세미나는 20대에 호치민에 와서 40-50대 엄마의 자리에 서기까지 온갖 힘든 터널을 지나오신 믿음의 어머니들의 여정에 함께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충전을 경험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3일의 일정동안 감당하기 벅찬 사역임에도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향기나무 사역에 집중해주며 귀히 여기시는 눈빛과 감동과 눈물 섞인 간증으로 환대해주심에 새 힘과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3-01-02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3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해서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나누면서 그 대안으로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제시하고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장점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특징을 좀 더 알아보고 이를 활용한 이미지 전개형 광고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상상력은 현실을 떠난 허황된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함으로서 회중들에게 설교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더욱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를테면 하나의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 장면을 각자 상상해서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로 위를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보여주고 잠시 뒤 이 차가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서 말하게 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회중들은 각자 이 차가 잠시 후 어떤 일을 겪게 될지 각자 상상해서 의견을 낼 수 있다. 계속 잘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고,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연료가 떨어져서 도로 한 복판에 서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고 심지어 갑자기 앞에서 달려온 다른 차와 정면충돌을 하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회중들과 나누면서 우리는 회중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지금은 아무 일 없이 잘 달리고 있는 이 자동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평안해 보이는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이렇듯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음을 한 장의 이미지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인도에 혼자서 생존하게 됐을 때 필요한 물건을 한 가지만 고르라고 말한 뒤 손전등, 확성기, 망치, 돋보기, 책, 알람시계, 마술 모자 등의 물건을 이미지로 보여주면 회중들은 이 물건들 중에서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회중들은 각자의 생각의 차이도 알 수 있게 되고 말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위기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이 때 이미지는 단순히 물건을 보여주는 역할이 아니라 회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렇듯 상상력은 설교에 회중들의 생각과 의견을 첨부함으로써 당연하게 생각되는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회중들은 성경 본문을 더욱 풍성하게 만날 수 있으며 만날 말씀을 자신의 삶에 더욱 분명하게 적용하면서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이미지 전개형 광고 활용하기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장점은 곧바로 광고로도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교회 예배시간의 광고는 주보에 나와 있는 그 주의 주요 내용을 인도자가 읽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는 교회의 일상에 익숙한 기존 교인들에게는 유효하지만 처음 교회를 찾은 새 가족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간에 전달할 광고 내용을 강단의 대형 화면을 통해서 이미지와 영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광고는 모두의 눈을 사로잡기에 적합하다. 특히 필자가 섬기는 성민교회에서는 매주일 광고시간에 교회학교에서 예배하고 활동하는 다음세대들의 모습을 부서별로 이미지와 영상으로 편집하여 회중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장년 교인들이 교회학교에 관심을 갖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눈으로 매주일 다음세대 부서의 활동을 지켜본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교회학교 행사를 돕게 되고 기도하고 후원하면서 장년과 다음세대의 효율적인 연결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전개형 광고는 가정예배의 정착과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존의 가정예배는 순서지를 나눠주고 가정별로 예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인데 이는 누가 참여하는지 잘 알 수 없고, 참여할 동기 부여도 잘 되지 않는다. 이 때 가정예배 인증샷을 찍어서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하고 이 인증샷들을 매주일 광고시간에 한 장씩 보여주면서 소개하면 가정예배를 드린 가정은 온 교회 앞에 소개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참여하지 못한 가정들은 참여한 가정들의 인증샷을 보면서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고 가정예배에 동참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성민교회를 찾은 새 가족들의 하나같은 이야기는 교회가 참 따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일예배 한 번 드렸을 뿐인데 어떻게 교회가 따뜻한지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이미지 전개형 광고의 효과이다. 30분의 설교시간동안 대형화면으로 설교자의 얼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의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서 설교 말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광고시간에도 교회의 여러 부서, 여러 성도들의 다양한 활동들을 접하고 나면 짧은 시간이지만 교회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이야기를 들은 듯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느낌을 받은 새 가족들은 교회에 등록하여 정착하는 비율도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성민교회가 시도하고 있는 이미지 전개형 설교와 이미지 전개형 광고는 준비과정이 힘들지 번거롭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성과와 반응을 건져 올리고 있다. 코로나19의 위협 속에서도 교인 수가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나고 다음세대의 유입과 교회 예산이 도리어 올라가는 현상은 이미지로 교인들의 마음을 열고 자연스럽게 복음이 각 사람의 심령 속으로 파고들도록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시도를 모든 교회들이 시도해보길 권면하고 소망한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12-20
  • [신앙교육나침반]세대통합 성탄놀이터 Happy Birthday Jesus!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므로 죄와 함께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가운데 고통 받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로 몸소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은 죄 가운데 고통 받는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감이 도사리는 세상, 그리고 초미세먼지와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오염!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한숨만 안겨다줄 뿐, 기뻐할 소식은 없는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복음 2장 10-11절 말씀에서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줄 소식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무력감과 불안을 겪는 다음세대에게 기쁜소식일까요?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나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올해 성탄절기에는 온 세대가 이 기쁜 소식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시간을 꼭 마련해보시길 바랍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세대를 분리하지 않고, 교회의 여러 세대가 기쁜 소식을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우리집 성탄놀이터를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습니다. 종이컵과 복음색깔 탁구공을 이용해서 복음을 즐겁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쁜소식 릴레이 모든 사람이 양손에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두 줄로 나누어 팀대결 놀이를 합니다. 기쁜 소식 공을 옆 사람의 종이컵에 전달하면서, 공의 색깔에 해당하는 복음단어를 말하면서 전달합니다(하늘색 “하나님!”, 빨간색 “십자가!”, 노란색 “자녀!”, 초록색 “생명!”). 제한시간을 정하여, 더 많은 기쁜소식 공을 마지막 사람 또는 바구니에 전달한 팀이 승리합니다. ✤기쁜소식을 찾아라! 두 팀으로 나누어, 동일한 수의 종이컵을 준비합니다. 종이컵 바닥에 누가복음 2장 11절 말씀의 30개 글자를 적은 후, 종이컵 바닥의 글자가 보이지 않게 세워둡니다. ‘시작’신호와 함께 종이컵을 뒤집어서 글자를 확인한 후에, 누가복음 2장 11절 말씀의 순서대로 종이컵을 포개는 놀이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을 완성한 팀이 승리합니다. ✤기쁜소식이 짠! 종이컵 바닥에 복음색깔 스티커를 부착하고, 기쁜소식 팀과 방해팀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기쁜소식 팀은 기쁜소식이 드러나게 종이컵을 뒤집어 세우며, 방해팀은 기쁜소식이 나타나지 않게 종이컵을 뒤집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기쁜소식 스티커가 더 많이 나타났다면 기쁜소식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집 성탄놀이키트 구입문의 | 향기나무교육개발원 031-305-0116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신앙교육 나침반
    2022-12-20
  • [다음세대칼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매년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해마다 그 느낌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해는 성탄절을 준비하느라 분주함으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는 들떠있는 세상의 분위기에 마음이 들뜬 상태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올해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드는 생각은 위로였습니다. 이번 주에 만난 청소년 때문입니다.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입니다. 현재 중학교 1학년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가정환경은 부친과 모친이 오래전 이혼한 결손가정입니다. 부친은 현재 조현병으로 입원치료중입니다. 모친은 외국인 여성으로 현재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현재 학생은 조부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아무런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이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적 혜택보다는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탄의 계절에 이 학생을 만나면서 묵상이 되었던 말씀이 바로 이사야 40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주의 백성 된 우리를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또한, 이 땅에서 고통받고 여러 어려움에 허덕이는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이사야 40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 200년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 될 때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이후의 일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에 대항하여서 많은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 이후에 히스기야는 병이 들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병에서도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문병을 온 바벨론 사신에게 히스기야는 자신의 건재를 자랑이라도 하듯 자신의 창고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창고가 아니라 자신에게 승리를 주시고 병에서 놓임을 얻게 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어찌되었던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기를 심판의 날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소유와 자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회복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 첫마디가 “위로하라”입니다. 이 말씀이 있고 130여년 후에 남 유다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포위 되어 있는 동안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살아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바벨론의 칼에 죽어 일부는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70년 후에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말 그대로 위로일 뿐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은 정확하게 70년 만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미리 예고하며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40장 2절 말씀에 보면 ‘힘든 노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음을 선언’해 주시므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패역한 삶의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를 통해 70년간의 포로기간을 예언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70년간의 포로 기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포로로 끌려 갈 때부터 첫 번째 돌아 올 때까지가 70년입니다. 또한 성전이 파괴되고 재건 될 때까지가 70년이었습니다. 누가 일부러 짜 맞추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은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성탄은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세상의 온갖 환란과 고통 속에 살고 있던 우리들을 완전히 놓아 주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으로 이 일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노역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의 사하심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입니다. 이 놀라운 일의 시작,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성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은 우리의 노역의 때가 끝나고 우리의 죄악의 사함을 받게 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위로자 되시는 우리 주님을 전하는 이번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자 되십니다. 주님만이 세상의 위로자 되십니다. 필자가 만난 학생에게도 위로자 되십니다. 그 학생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위로자 되시는 주님이 증거되는 이번 성탄이 되길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다음세대 칼럼
    2022-12-20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2
    우리는 지난 호에서 코로나 이후 설교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나누면서 그 대안으로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설교 형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오늘은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구조를 알아보자.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서론과 본론, 적용과 결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된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설교 제목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설교자는 처음 화면에 보이는 제목 이미지에 이 설교의 메시지에 대해 관심을 끌 수 있는 이미지와 제목을 선정해서 회중들에게 보여주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이 때 너무 직접적인 주제를 담는 이미지보다는 회중들이 적절히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관심을 끌만한 이미지와 제목이 좋다. 설교를 시작하면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질문, 문구 등을 보면서 회중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주제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서론 단계를 갖는다. 또한 이 서론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설교 제목을 은유적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회중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시작해서 주제로 들어가는 귀납적인 형태의 설교이기 때문에 설교 제목에 주제가 모두 드러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으로 하되 결론까지의 과정을 다 거치고 나면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제목을 정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회중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현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성경 본문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여 의미를 분명하게 알아보는 본론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청중의 필요를 충분히 듣고 성경 본문에 귀를 기울일 때 살아있는 말씀이 실제 상황에 파고들어 회중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잘 인지하고 회중을 향하여 말씀을 전한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이미지나 영상을 활용하여 본문의 내용을 더 확실히 전달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지나면 다시 회중과의 교감을 통해서 그날의 본문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적용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 때 설교를 듣고 결단할 내용을 텍스트로 정리해서 화면에 띄우고 온 회중이 함께 읽으면서 오늘의 말씀에 대한 실천할 사항들을 다같이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어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설교의 주제와 연결되는 가사의 찬양을 함께 부르며 결단의 기도를 드리는 결론 단계로 마무리된다. 이 때 함께 부르는 찬양의 가사를 회중들이 고백하는 것은 이 설교를 완결하는 주체가 설교자가 아니라 회중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능숙한 메시지 전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응답과 결단으로 마무리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를 마무리하는 찬양을 선곡할 때 가사의 의미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이미지 전개형 설교의 장점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고 있는 이슈에 대한 도표나 연구 결과물을 한 눈에 이미지로 보면서 설교에 참여하기 때문에 모든 회중이 설교에 더욱 신뢰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 방식의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전달하기 때문에 회중들은 설교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되어 설교의 효과가 배가된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인터넷을 접하고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관련 내용을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설교의 내용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설교를 들으면 설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설교의 메시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미지 전개형 설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교 형태이다. 상상력이야말로 우리를 위해서 언어에 있어서 새로운 창문들을 창조해주고 우리의 믿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세상을 보는 데에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에 사용될 새로운 언어들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미지를 직접 보여주면 언어로만 전달하는 방식보다 회중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단순히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상상력을 북돋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바르게 사용하면 회중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할 수 있다. 다음세대에게 있어서 상상력만큼 위대한 스승은 없다. 다음세대가 얼마든지 자기의 상상력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행할 수 있도록 이미지 전개형 설교를 준비해서 전하는 시도를 해보길 권한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2-11-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