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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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사랑을 위해 오셨습니다
    지난 주일 찬양예배 시간에 성만찬 예식이 있었습니다. 부목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제가 성만찬 예식을 집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갑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와서 몇 십 년 동안 살다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3부 예배가 끝난 후 한 가족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제가 목회하던 부산 땅끝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신앙 생활하던 목사가 옮겨서 목회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저를 한 번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곧바로 다음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반가운 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제가 그분들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통해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가 집례하는 자리에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인생에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그 의미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께는 웃음을 드리고, 의지가 되는 아들이었겠지요. 혹은 우리 아들이 목사라며 자랑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또 저는 아내의 인생에 수십 년을 동행하는 중입니다. 아내는 부모님과 산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저와 살고 있습니다. 아내 역시 제게 그런 의미로 다가와 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남은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힘들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저는 자녀들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의 의미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저도 옆에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좀 도왔습니다. 아직도 제게 용돈을 받는 자녀도 있지요. 제 자녀들이 제게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녀로 태어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가는 의미는 이렇게 보면 남의 인생에 미친 영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은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인생의 의미는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돈 벌려고, 권세를 누리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태어났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랑에서만 그 의미가 확보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매우 관심이 있고,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노력하는 이들 중에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매정하고, 끊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한 일에 충격을 받고 베드로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오순절 다락방에서 자신들에게 임하신 것과 똑같이 임한 것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는 분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의 비극은 연결을 끊어내는 데서 발생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향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릅니다. 그 타당성을 이해는 하지만, 아쉬움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국익, 민족 이익, 집단 이익,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익 앞에서 사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임영수 목사님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행복을 알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점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그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디 사랑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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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소강석칼럼] 이 발로 다시 뛰게 하소서
    주님,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숨이 가쁠 때마다 심장이 수고하고 폐장이 더 강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지만, 두 발이 이토록 수고했고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두 발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짱짱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매 주일이면 강단에 서서 5번, 6번을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와 각종 집회를 다닐 때에도 원고에 매이지 않고 강단을 뛰면서 뜨거운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저는 두 발 가운데도 발뒤꿈치가 이토록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따금씩 발뒤꿈치에 각질 같은 것이 벗겨지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두꺼운 발뒤꿈치에 저온 화상을 입고 저는 그 딱딱한 가죽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 같은 발꿈치 가죽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좁아서 세계 각지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무감각하고 딱딱한 발뒤꿈치 가죽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뒤꿈치 가죽이 있었기에 산행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마음껏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산꼭대기까지 다시 내려가기가 싫어 더 걷고 또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몇 주 걷지 못하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발뒤꿈치의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요. 저는 재생 치료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집사람의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집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살갗을 도려내었을 때 마취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봄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속살을 강제로 뜯어 피가 나게 하고, 그 쓰린 속살에 허벅지 살을 붙일 때의 쓰림과 아픔이 저로 하여금 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아픔과 쓰라림은 영혼의 아림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작은 화상에도 고통을 느낀다면 암 환자들은 어떻게 투병을 하고 있을까요? 또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괴로워했던 욥은 어떻게 인내했을까요? 아니, 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통, 영혼의 아림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로뎀나무 아래 눕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 겨울 끝자락을 맞을 때는 아니지만 믿음으로는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홀한 시련도 다 끝나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식을 한 부위가 잘 생착이 되어 새살이 차오르고 굳은살로 변해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숨 쉴 수 없는 고난의 뜨거운 바람 내 영혼을 찢으며 불어올 때 광야에 홀로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 속에 깊은 밤 뜨거운 눈물 흘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가시밭길 맨발로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생명이기에, 사명이 눈물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은혜이기에 사명이 축복이기에 외롭고 고독해도 사명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폐장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체중과 모든 무게를 떠받들고 받쳐줄 수 있는 이 두 다리 그리고 발바닥에 주신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번 소생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저와 같은 화상을 입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저의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맞을 환란의 방어막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걷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뛰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달려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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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시사칼럼] 호모 피델리스
    인간은 무엇입니까?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라는 말 이래로 비슷한 표현이 많았지만 요즘도 신조어들이 등장합니다. ‘호모 엠파티쿠스’(제레미 리프킨, 공감하는 인간)나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하찮은)를 비롯해서 ‘호모 큐라스’(고미숙, 돌보는 사람), ‘호모 디스컨텐트’(선봉란, 불만의), ‘호모 데지그난스’(지상현, 디자인하는), ‘호모 듀비탄스’(박규철, 의심하는), ‘호모 비아토르’(문요한, 여행하는)가 그러합니다. 최근에는 “호모 피델리스”(한민, 저녁달, 2024)가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그 의미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풀었습니다. 원래 의미의 ‘숭배’는 신(神)을 전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도 서문을 제목부터 “종교는 인생의 화두였다”로 정하고 “종교는 헤아릴 수 없는 옛날부터 인간과 함께 해 왔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저작물의 탄생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최근의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지금 인류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을까요? 첫째, ‘유사영웅’(pseudo-hero)을 숭배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나요,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저기서 유사영웅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전광훈이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쪽 지방에서도 다른 목사 하나가 뜨면서 이런 흐름에 편승했는데, 마찬가지로 담임하는 교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는 역사를 가르쳐서 유명해진 일타강사가 정치판에 혜성처럼 합류하여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이들을 유사영웅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이들의 존재감이 객관적인 업적 평가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주관적이면서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돌발적인 추앙(推仰)에 터를 잡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문의 사진에 주로 나타나는 유형 역시 중요한 면일수록 역사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사람이 차지하는데 이 논문의 저자들도 이를 일종의 ‘신화’로 간주하고 ‘유사영웅’이라 불렀습니다(임영호·김보영·최수정, “신문사진에 나타난 신화의 유형”). ‘유사영웅’이라도 그들을 둘러싼 지지자들의 열광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다 보니 “호모 피델리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던 것입니다. 둘째, 운명을 숭배합니다. 현재 가장 급증하는 종교는 ‘무종교’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미국도 지난 50년 간 무종교인 비율이 5%에서 30%로 증가했다지요?(Pew Research Center, 2024). 한국도 201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56.1%였고 나이가 어릴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반면에 무속인은 늘어나고 점집이나 인터넷으로 운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은 사람이나 귀신보다는 운명을 숭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당이나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 운명이 궁금한 자들입니다. 현대는 바야흐로 ‘탈종교시대’ 내지 ‘후종교시대’라고 해야 하지만 동시에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넘쳐납니다. 새로운 사업이 잘 될지,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될지, 언제쯤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지 등 운명을 향한 수요는 다양합니다. 대중들을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운명을 원망하지 말라’ 했고, 니체는 한술 더해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를 남길 정도였으니 운명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었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운명은 무(無)다’(불안의 개념, 임춘갑 역)를 외쳤습니다. 운명은 무언가 실제(實際)인듯 말하지만 실재(實在)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라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허상입니다. 셋째, 자신을 숭배합니다. 운명론자의 반대편에 현대판 나르시스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자율성을 강조하며 자유의지를 절대시하면서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였습니다.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일찍 간파했듯이, ‘공관복음’이나 ‘제4복음’이 아니라 ‘내가복음’을 선호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수년 전 바이올라 대학의 윌리엄스 교수(조직신학)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빨리 번지는 종교는 ‘자기숭배’(Self-Worship)고 미국인 84%가 ‘자신을 즐기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면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은 이제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는 자조 섞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TGC 칼럼). 상기한 첫째와 둘째 역시 자기숭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요하니 자기 운명을 알고 싶어 하고, 자기가 중요하니 자타가 신격화를 즐깁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숭배를 부추긴다.”(키르케고르) 우리는 다른 무엇을 숭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신자들이여, 부디 그리스도만을 숭배하는 인간인 ‘호모 피델리스 크리스티’(Homo Fidelis Christi)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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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은혜의말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 (창세기 41:37~40)
    창세기에 보면 위기의 때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요셉이 나온다. 살아서 석방되기 힘들다는 왕실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요셉이 30세에 전격적으로 석방이 되어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는데 그날 총리가 되고, 이방 제국 애굽의 모든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에 치우친 반쪽 지도자가 아니라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온전한 지도자로서 데뷔한 것이다. 이방 황제인 바로의 한 줄 평가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이다. 그는 꿈꾸는 자요, 용모가 아담하고 준수한 자요, 샘 곁에 심기 운 나무요, 범사에 형통케 된 자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는 열 받고 분노의 화신이 되고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살아가는 자이다. 다윗처럼 성령에 감화감동을 받은 자이다.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심을 받은 후에 예수님도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셨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부터 난 지혜와 명철이 있어서 신의 한수를 두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한 베드로가 "내 양을 치라"고 사명을 받았듯이 요셉도 마침내 "내 집을 다스리라"는 어명을 받았다. 왕의 인장 반지를 받으며 하루아침에 죄수에서 대국의 총리로 등극하였다. 온 무리가 무릎을 꿇으니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증거이다. 그길로 요셉은 바로 나가서 온 땅을 순찰했다.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받은 종들처럼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남기는 모습이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27:23). 현장에 답이 있다. 탁상공론만 하고 있지 말고, 일어나 가서 현장을 사수하라. 평안하여 안정이 될 때 그곳에 머물지 마라. 야성을 잃지 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라. 가서 제자 삼으라. 요셉은 총리가 되고 한풀이를 하거나 권력의 맛에 취하여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서 애굽 온 땅을 순찰하였다. 그리하여 칠년 대풍년에 흥청망청하지 않고, 각 성에 곡식을 착실하게 저장하여 칠년 대기근을 여유 있게 준비했다. 요셉이 어려서 엄마를 잃고 형들에 의해 팔려 끌려가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지만 비로소 때가 차매, 30세에 애굽 왕 바로 앞에 섰다. 요셉은 위기의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올 때도 결코 속단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며 꿈꾸며 기다렸다. 마침내 꿈 꾼 대로 된 것이다. 요셉에게 지난 세월은 끔찍한 시간들이었지만 뒤돌아보면 잘 준비된 골든타임이었다. 버릴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형통한 때였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원(망)불(평)교(만)하지 말고 용(서)감(사)사(랑)하라. 사람이 판단하기에 불운의 연속일지라도 어떤 놀라운 역사에 밑천으로 쓰일지 모르는 일이다. 요셉을 보면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하나님 손에 붙잡힌 자, 예수로 충만한 자, 성령에 감동된 자, 혈기와 분노가 없이 평화의 왕, 지혜와 명철이 충만한 자, 나라의 위기, 대풍년, 대기근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인재, 온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자! 요셉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자다.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시절을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어지는 현실마다 감당하며,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길을 인도하시는 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멋지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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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위드애]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
    오래 전, 신학교를 다닐 때에 겪은 일이다. 지금의 나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여 보행을 하지만, 당시(2009년)에는 지팡이를 이용하여 보행을 할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있는데 한 분이 교실로 오셔서 나를 보시더니 “전도사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봤어요?” 라고 물으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분위기를 고려하여 “당연히 기도했죠” 라고 미소로 답한 적이 있다. 나처럼 장애로 인하여 불편함을 겪거나, 질병으로 아픈 사람치고 그 상태가 호전되거나 사라지기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에게 질문을 던진 분처럼 말하는 분들이 실제로 교회 안에 많이 있다. 물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 줄은 알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심정을 한 번쯤은 헤아려 보았는지 묻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에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여 어울리는 말을 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만약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거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건 그저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이거나,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비수(匕首)가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과 환경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말'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이다. 이 속담은 우리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영향력이 큼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도 '말'과 관련된 구절들이 많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언 12:18),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로새서 4:6). 모두 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늘 사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 말이 때로는 누군가를 살리거나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 말로 인하여 사람이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힘이 되는 말, 사랑이 담긴 말을 듣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지 않을런지.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며칠 전에 따뜻하고 생명이 싹트는 계절인 봄으로 접어든다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사람들은 외롭고 아프고 힘들다. 춥다. 그런 사람들에게 환경과 상황에 맞는 말을 함으로써 온기(溫氣)를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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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5-02-07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치려면
    부모의 가장 큰 사명은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부터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을 잘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임하는지 생각해 보고, 이를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나눠보겠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한번 잘 믿어보겠다고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도 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려고 할 때 꼭 시험 거리가 생깁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가 옆에서 호시탐탐 보고 있다가 쳐들어온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 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삼상 7:7) 지금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치러 올라왔어요.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마음이에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자!” 하고 모였는데도 적들이 “와!” 하고 오면 두려워요. 너무너무 두려우니까 어떻게 해요? 8절에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리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삼상 7:8) “사무엘 선지자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다급하니까 지금 무엇도 준비할 수가 없어요. 금식해서 배는 고프죠. 무기도 없죠. 싸울 수가 없는데 적은 쳐들어와요. 그러니까 사무엘에게 “빨리 기도해 주세요. 빨리빨리! 이거 119예요!” 긴급 기도를 부탁한 거예요. 그러면 사무엘이 어떻게 해야 해요?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을 쫙 찢고 엎드려서 “주여!”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사무엘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다급한 순간에 백성들은 그에게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어지는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삼상 7:9) 우리 생각으로는 사무엘이 곧바로 부르짖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먼저 젖 먹는 어린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드려요. 여러분, ‘온전한 번제’는 어떻게 드리는 건지 아세요? 그냥 “어디 가서 어린양 하나 가져오세요!” 해서 드리는 게 아니에요. 온전한 번제를 드리려면 그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다 살펴서 그 가운데 어떤 양이 온전한 양인지를 찾아야 해요. 흠이 없고 온전한 어린양 한 마리를 찾는 것도 수고이고 찾으면 데리고 와서 거기다가 안수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위에 안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직접 잡죠. 각을 뜨고,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내장은 내장대로 분류를 다 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요? 피를 뿌려요. 그다음 불로 태워서 하나님 앞에 향기를 드립니다. 이 온전한 번제를 드리는 게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리고, 정말 번거롭고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이거를 먼저 하는 거예요. 왜요? 예배가 먼저니까요. 다급하다고 해서 그냥 나오는 대로 부르짖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먼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예배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시고, 예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지킨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가 교회를 붙잡고 교회를 지켜낸다는 건 너무너무 소중해요. 그런데 오늘날 가고 싶은 교회, 신뢰할 만한 교회가 사라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가 예배 때마다 “하나님! 이 예배가 하나님이 진정 역사하시는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 예배한 우리 모두가 인생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주께 온전히 드리는 거룩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갈등하며 흔들리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정돈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여 우리도 살고 이 지역도 함께 살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이렇게 응답받는 예배자가 될 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될 때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기도가 되고 그들의 기도가 비로소 응답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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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2-07
  • [다음세대칼럼] 우울증으로 아픈 청소년들에게 답하다(1)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은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에 맞게 정확하고 바르게 도와주어야 한다. 독감인데 비슷하다고 감기약을 자꾸 먹이면 효과는 없고 당사자와 돕는 사람 모두 고생만 하는 것과 같다. 우울증은‘우울장애’(depressive disorder)가 정확한 표현이다. 우울장애는 다른 질환과 공존질환으로 오는 경우와 우울장애 단독질환일 때 상담과 도움이 다르게 해야 한다. 특히 우울장애와 조울증을 구분하자. 10대 중반 이후 많이 생기는 청소년 우울장애는 실제 80%는 양극성 장애(조울증)이다. 우울장애로 치료하면 효과가 떨어진다. 이 구분을 잘해야 한다. 먹는 약부터 다르다. 사춘기의 예민성과 폭력성, 반항은 우울장애보다는 조울증에 더 가까운 증세이다. 우울장애는 인지치료로 생각의 구조를 바꾸어 주어야 한다. 먼저 침투사고에서 성찰사고로, 비합리에서 합리적, 비논리에서 논리적으로 개선하자. 진리요법은 바른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히 젖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충만과 말씀충만을 일상성의 영성으로 회복하자. 사명치유는 은사를 찾아 개발하고 섬기는 것을 통해 사명을 감당하며 의미를 찾자. 행동치료는 햇빛에 평균 30분 이상 노출하고 꾸준히 운동하자. 대인관계를 넓히고 깊게 하자. 가족상담을 통해 가정이 수용적 공동체가 되고 교회 공동체에도 잘 소속하고 교회 지도자에게도 적극 도움을 구하자. 우리나라 우울장애 환자가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2024년 7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최근 5년간(2018∼2022년) 국회에 보고한 우울장애 진료 현황 자료에 따르면, 우울장애 진단 인원은 2023년 기준 100만744명으로 100만명 넘었다. 2018년에 비해 32.9% 증가했다. 이제는 청소년도 점점 우울장애가 더 많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중독이나 흡연중독, 게임중독, 성중독, 품행장애, ADHD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우울장애와 조울증이 동반되고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면 관계가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더욱 많이 늘어나는 것이 더욱 이 질환을 잘 알고 도와주어야 할 필요를 가지는 것이다. 우울장애, 특히 조울증의 증가율은 10대에서도 불안과 스트레스가 더 심해지면서 매우 가파르게 많아졌다. 제가 만나는 상담이나 강의에서 그런 변화를 실감한다. 2달만 잘 도와주어도 70%는 개선할 수 있다. 청소년 우울장애와 조울증은 짜증, 반항이 많다. 등교를 거부한다. 성적 저하가 나타난다. 여러 가지 신체 증상이 나타난다. 약물남용이 생긴다. 청소년 비행이 생긴다. 고3병, 중2병, 초4병이 생긴다. 사실 사춘기 심한 증상은 우울장애나 조울증 초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청소년 우울장애는 자살에 대한 상담을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우울장애는 2/3은 자살을 생각한다. 이 중에 10~15%는 자살 시도한다. 1/100명은 자살한다. 우울장애의 공존질환은 불안장애, 공황장애, 사회공포증, 강박증, 완전주의, 결백증, 신경성 식욕부진증, PTSD, 특정 공포증, 망상장애이다. 우울장애 극복, 이렇게 도와주자. 우울장애 환자의 80% 정도가 수면장애를 호소한다. 불안 증상도 90%가 가지고 있다. 성욕도 저하된다. 우울장애 환자는 정기검진은 필수이다. 신체화가 되기 때문이다. 우울장애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며 활성산소가 쌓이게 되면서 각종 질병에 대한 노출도 쉽게 되기 때문에 내과적 검사를 해야 한다. 약물치료도 의사처방에 따라 잘하자. 약물치료(Pharmaco- Therapy)도 병행하여야 한다. 약물치료를 하면서 상담, 행동치료가 병행하면 우울장애 치료가 훨씬 빠르고 완치도 쉽다. 성경적 치료 관점으로 주로 하면서 인지행동치료 + 약물치료 + 심리정서의 원인을 잘 찾아 해결하기+ 칼라테라피 + 명상치료 + 운동치료 등을 개인에 맞게 고루 적용하며 종합적으로 치료하면 효과가 빠르고 완치율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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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이찬수 목사의 해명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는 지난달 19일과 26일 주일예배 설교에서 지금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 각자 판단을 유보하고 기도하자“고 말 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발언이 큰 후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그저 기도만 하자는 메시지로 받아 들여졌고, 사회적 비난도 쏟아졌다. 논란이 확산되자, 이찬수 목사는 지난 2월 1일 교회 홈페이지에 해명글을 올렸다. 이 목사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는 판단을 유보하고 기도하자"고 말한 것이 "각자 생각과 정치적·법적 판단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교회는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공존하는 곳이다. 각 그리스도인은 신앙 양심에 따라 상황을 판단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교인들이 양분되어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모두가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어눌한 표현이 또 다른 상처와 분노를 만들어 낼까 두렵다. 부족한 표현으로 인해 오해와 아픔을 드리게 되었다면 깊은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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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2-07
  • 트럼프, 행정명령으로 ‘남성’과 ‘여성’ 2개 성별만 인정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서명한 행정명령은 100여 건에 달한다. 이중에는 주관적 성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별만 인정한다는 행정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트럼프는 “오늘부로 남성과 여성, 단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한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이 될 것"이라고 직접 밝혔다. 또 여권, 비자, 입국 카드를 비롯한 정부 발급 신분 서류에 성별이 정확히 반영되도록 변경하라는 지시도 덧붙였다. 전임 정부 시절에는 여권에 남성과 여성 외에 '제3의 성'을 뜻하는 'X'를 택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철회될 것으로 보인다. 또 미국의 주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플로리다주에서 일정을 마친 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전용기에서, 동행한 기자들에게 트랜스젠더의 군복무를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한 다섯 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 행정명령에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이 아닌 다른 성별로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삶에서도 명예롭고 진실하며 규율적인 삶에 헌신해야 하는 군인의 자세와 충돌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 "트랜스젠더의 군복무는 군사적 대비 태세에 위협이 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정된 정책이 필요하다"고 명시되어 있어, 트랜스젠더 군 복무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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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2-07
  • 다락방과 예장개혁교단 결별 수순
    2013년 한기총이 다락방 류광수 목사를 이단에서 해제하자, 예장개혁총회는 전도총회(다락방)과 교단통합을 실시했다. 이 문제로 예장개혁은 크게 분열했고, 교단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지만, 10년이 넘게 통합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작년 PD 수첩 방영 이후 구예장개혁측과 다락방측이 분리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다락방측은 오는 18일 오전 11시 임마누엘 서울교회에서 열릴 총회를 앞두고 2월 4일 경기도 덕평 렘런트 신학연구원에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갖는다고 공지했다. 다락방 피해자모임으로 알려진 ‘코람데오연대’는 현대종교와의 인터뷰에서 “800여 개 교회로 이루어진 다락방 교회가 과연 몇 대 몇으로 분열될지, 코람데오연대와의 싸움 이후 다락방 측은 어떻게 될지, 또 예장개혁교단 측은 한국교회가 어떻게 대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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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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