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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도 가까워 온다. 나라 안팎은 최근 들어 더욱 어둠이 짙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무엇보다 빛으로 충만해야 할 종교계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안방에 전달되는 정치권 소식에서는 밝은 내용을 접할 수가 없다. 백화점이든 재래시장이든 경제상황도 여전히 시린 겨울 소리를 내고 있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봄을 맞아 펴는 기지개를 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에 잡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두움이 깊어진 것 같지만 기어코 어두움이 빛으로 전환되는 부활의 아침은 오고 있다.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주간은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의 시간이다. 동시에 부활의 아침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은총을 체득하는 깊은 영성의 크로노스다. 부활신앙이란 부활절 중심의 몇 날 동안 하는 축하가 아니다. 오히려 1년 365일을 부활의 은총을 연주하는 삶이 곧 부활신앙이다. 바로 세상에 살면서 빛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활의 은총을 입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다. 빛은 비췸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사명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생명이며 빛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차이점을 보면 소금은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극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며,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한복음 9:5절).” 여기서 ‘세상’에 해당되는 Cosmo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바올람’이다. 원래 이 단어는 ‘영원’ ‘불변’ 등의 의미를 나타냈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고통의 현세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고통의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구원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빛의 의미는 3가지로 조명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둘째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善을 의미한다. 셋째는 영적인 관계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빛의 반대인 어두움의 3가지 의미로는 첫째, 자연계와의 관계에서 생명이 상실된 죽음이다. 둘째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악을 의미한다. 셋째 영적인 관계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요1:5). 그것이 부활의 은총이고 부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세상에서 빛으로서 삶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의미를 역설하면서 삶으로 이를 증거한 사도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바로 이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 되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삶이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본질적인 의미가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Doing이 아니라 Being, 다시 말하면 무엇을 행하느냐 보다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되어 있지 못하면서 되려고 하는 것을 ‘행동주의적 기독교(behavioristic Christianity)’라 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21:23).” 하고 책망하신 일이 있었다. 전형적인 Being이 아닌 Doing의 사건이다. 카오스현상이 되어가는 교회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기쁨을 위해 많은 사람이 아파하는 일을 행하는 것을 정당하고 의롭다고 항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를 공동체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Being의 사람이 아닌, 나에게 모든 사람이 맞추어 주기를 바람하는 Doing의 사람이다. Being의 사람은 무엇이 되었다고 다르지 않다. 변함없이 항상 그대로 주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Doing의 사람은 무엇이 되고 나면 변한다. 어제와 동일하지 않다. 모든 기준이 자기가 되어 간다. 중요한 것은 “주여 나는 빛입니다.”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어두움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죄인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빛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 실제는 빛이 되어지는 것이며,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 순간 이미 그는 의인으로 칭함받는(Justification) 은총을 입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빛이 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이 아닌 자신을 높이려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참 빛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무엇이 되겠습니다.”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이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Doing이 아닌 Being의 의미를 깨달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부활 신앙인의 삶이다.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을 앙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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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성서연구] 부활이 주는 자유
    <“어이, 훌륭해!”촌장이 외쳤다.“많은 땅을 차지했군!”빠홈의 일꾼이 달려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빠홈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엎드러져 죽었다. 바시끼르인은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 일꾼은 삽을 들고 빠홈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빠홈은 정확하게 머리에서 다리까지 들어갈 수 있는 2미터가량의 무덤에 묻혔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단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중에 나오는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빠홈은 작은 무덤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기쁨에 겨워 달리기 시작하던 그 날 아침에 이미 그의 영혼은 땅에 대한 욕심에 갇혀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족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라는 감옥에 갇혀 삽니다. 무덤은 죽은 후에만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욕망을 품는 그 순간 이미 갇혀버립니다. 그래서 무덤이라 불리는 좁은 욕망의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생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19세기에 살았던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 학자이며, 목사로서 당대 비견할 인물이 없을 정도의 성경학자요, 교회사가였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 『유대인 스케치』(1867년)가 있는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삶과 환경에 대해 1차 사료에 입각해 저술한 탁월한 저서입니다. 그는 팔레스틴 땅을 <그 땅>이라 부르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 땅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래된 히브리 문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날 랍비 요나단이 제자들과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위쪽에 달려 있던 농익은 열매가 갑자기 터지더니 달콤한 즙이 바닥으로 주르르 쏟아졌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암염소의 불대로 분 젖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두 줄기가 하나로 섞이는 것을 지켜 보던 랍비가 외쳤다.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약속이 말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유대인들이 얼마나 광적으로 팔레스틴 땅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쉐키나(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는 오직 팔레스틴에만 있다’‘팔레스틴의 공기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 ‘팔레스틴에 사는 것만으로도 모든 계명을 준수하는 것과 맞먹는다’‘팔레스틴에 사는 자에게는 죄가 없다’‘이스라엘 땅에 묻힌 자는 제단 아래 묻힌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 그 땅에서는 평화와 행복의 웃음소리 대신 참혹한 전쟁 소식만 들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마스에 의해 무참하게 폭행당하고 살육되었는지 듣고 있습니다. 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벌써 여러 달이 지나도 멈출 기색 없이 확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떠나려던 성지 순례는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이미 그 땅은 성지가 아닙니다. 폭력과 전쟁의 땅으로 전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갇히셨습니다. 그랬기에 무덤은 예수님께 갇힌 곳이 아니라, 위대한 부활을 위한 전초기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후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 무덤은 예수님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부활은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는 다락방에도 나타나셨고, 시공을 초월하는 완전한 자유를 보이셨습니다. 부활은 자유입니다. 얽매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자신도 부활할 것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선 욕망 때문에 갇히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갇힌다면 사랑 때문에 갇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바울 사도처럼, 선배들처럼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무덤 같은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 훨훨 날아야 합니다. 그 자유가 나중에는 육체의 부활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터전이야말로 성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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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시사칼럼] 부활을 둘러싼 부활들
    예나 지금이나 “부활”이란 종교와 학문과 일상을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나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올해에도 서구와 한국 기독교계에서 지키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쩍 “부활”이란 말이 각 영역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부활절 특수를 노리기라도 하듯 부활주일 이틀 전에는 「7인의 부활」이라는 드라마 방영이 시작됩니다(SBS). 덧붙인 제목들도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욕망의 진화인가 참회인가?” “악인들은 속죄할 수 있을까?” 세속적인 이 드라마가 과연 얼마만큼의 부활절 프리미엄을 누릴지 궁금합니다. 종교적인 작품이라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2021년 고(故)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부활」도 당시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개봉되어 상당한 반향을 불러온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2월에 개봉되었던 미국 영화 「예수 혁명」도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거치면서 엄청난 화제몰이와 흥행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부활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개념입니다. 썩 좋지 못한 관례나 전통이 부활한다면 반길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반대로 되살아난다면 좋을 제도나 현상이 부활한다면 많은 이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경제계로부터도 이번 부활주일을 둘러싸고 두 가지 부활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는 ‘K-방산의 부활’입니다. 1971년 북한은 화포에 탱크까지 생산하는데 한국은 소총 한 자루 만들 능력이 없는 나라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최근 한국 방위산업의 발전은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미국의 한 방송(CNN)은 “한국 방위산업이 이미 메이저리그(defense major league)에 진입했고 미국과 NATO를 대신해 ‘자유민주주의의 무기고’(arsenal of democracy)’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2022. 8. 17). 하지만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 탓으로 한국 방산업계가 위기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으나 최근 들어 다시 기술 혁신을 이루어낸 몇몇 업체의 분발로 ‘K-방산의 부활’을 꿈꾸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일본 발 경제계 뉴스도 하나 있습니다. 지난 달 일본 정부는 규슈의 양배추밭이었던 곳에 세워지는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업체) TSMC의 제2공장 건설에 6조 5천억을 투자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미 구마모토에 위치한 제1공장에도 4조 이상을 투자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본 정부는 한 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위해 다양한 업체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반도체 산업만큼 경쟁이 치열한 분야도 드문데,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는 그리 반가운 소식만은 아닐 테지요. 물론 협력하는 분야도 많고 또 저마다 경제가 살아나야 동아시아 및 세계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윈-윈(win-win) 게임이나 다름없는 살벌한 경제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본의 부활은 한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의 전쟁 같은 의료 대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진료권 부활”이라는 개념이 간혹 지면에 다시 등장하곤 합니다. 건강보험 통합과 의약분업 및 고속철도 도입으로 인한 전국 일일생활권화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있기 때문에 풀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의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기되어 왔던 대안의 하나인데 일정 지역을 벗어나서 진료를 받고자 하는 경우 추가 비용을 부담하게 함으로써 일부 지역을 향한 의료 과잉 수요를 줄여보고자 하는 방안입니다. 단순히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어서 복잡한 국면입니다만, 진료권의 부활이나 어떤 식으로든 국민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번 논쟁이 서로 간 협의와 조정으로 인해 조속한 시간 내에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기왕 정치 이야기를 꺼냈으니 지금 모든 화제의 초점이 되어 있는 선거에 관한 부활 소식을 하나 더 전합니다. 작년부터 ‘지구당의 부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해방 후 수십 년 존속했으나 불법적 정치자금의 온상으로 퇴출되어 버린 지구당 시스템의 부활을 현재 소위 ‘팬덤 정치’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둘러싸고 혹은 추후 과연 지구당은 부활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부활을 둘러싼 몇 가지 부활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부활은 무언가의 가치 추구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고, 이익이나 특수와 거리가 먼 그 자체로 진정한 목적이요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은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신앙적 논쟁은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는 죽음에서 부활이란 기쁨을 모든 이들에게 선사하는 좋은 가치를 지닌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앙숙과 원수를 오히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윈-윈(win-wim)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의 몸의 부활 소식은 질병이나 고통이나 우울이나 심지어 사망까지도 초월하게 만드는 가장 건강한 소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이란 모든 부패와 타락을 씻어 정결하게 만드는 지극히 순수한 정치적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부활을 둘러싼 부활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부활을 더욱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진짜 부활을 닮아 모든 영역에서도 참된 부활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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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일...?
    고신총회는 최근 몇 년간 신대원 기수별로 부총회장을 당선시켜 왔다. 전임 총회장 권오헌 목사가 40회, 총회장 김홍석 목사가 41회, 부총회장 정태진 목사가 42회 출신이기 때문이다. 교단 안에서도 신대원 기수별로 부총회장을 맡자는 정서가 강하게 흐르고 있고, 대부분 동기회 안에서 출마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에 대해 교통정리 등을 통해 후보를 추천하고 있다. 그런데 금년 차례라고 할 수 있는 43회가 최근 ‘후보를 추천하지 않기로 했다’는 대외적 선언을 했다. 모 언론사 두 곳에 ‘43회 동기회는 금년 부총회장 후보를 추천하지 않기로 했다’와 ‘그러나 개인이 출마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는 광고를 게재했다. 지금까지 동기회가 동기 중에서 특정인을 추천하거나, 지지하는 모습 등은 비춰왔지만 ‘추천하지 않기로 했다’고 대외적으로 선언(광고)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다. 문제는 이 내용이 동기회 결의없이 진행되었다는 것. 43회 A 목사는 “이 내용은 동기회 결의없이, 회장이 독단적으로 광고를 한 내용이다. 동기들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아직 아무런 해명이나 사과가 없다.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B 목사도 “(43회)임원회 자체적인 결의가 있었는지 몰라도, 이런 사안은 전체 동기회의 결의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그런 결의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또한 동기회 회장의 선언과 달리 43회 동기회는 2년 전 ‘차기 부총회장 후보로 43기를 대표하여 정00 목사를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A 목사는 “2년 전 정00 목사를 우리 동기를 대표해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와서 회장의 독단적인 선언(광고)은 동기회를 무시하는 처사이고, 모종의 정치적 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43회 동기회는 동기 48인의 이름으로 ‘임시총회 소집 요청’을 한 바 있다. 안건으로는 ‘기존의 임원 해임의 건’과 ‘차기 부총회장 후보로 43기를 대표하여 기존 결의대로 정00 목사를 추대하는데 대한 재확인 건’이다. 만약 현 임원회가 임시총회 소집을 불응할 경우, 비상총회를 열어 새로운 동기회 임원을 구성하겠다는 의지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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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3-25
  • 신천지 이만희 건강 이상설 확산
    신천지 이만희 교주의 건강이상설이 붉어지고 있다. 지난 3월 9일 열린 전국 신천지 담임강사 대상 교육에서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이만희는 연설 도중 “그런데......”라고 말을 한 뒤 약 20초 정도 말을 잇지 못하거나, “누가복음 32장을 봐 줘야 돼”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속삭이는 말투로 “누가복음은 32장이 없습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쓴 글을 읽다가 “내가 쓴 게 아닌 것 같은데....”라며 자신이 쓰고 읽은 글을 잊어버리는 모습을 비추기도 했고, 천지창조를 설명하던 중 느닷없이 천지일보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이날 교주의 돌발 행동에 신천지 지파장들과 강사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비춰지는 등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 신천지 측은 이만희 교주의 실언이 계속 이어지자 온라인 실시간 방송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이단전문가들은 “고령으로 인한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장면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며 “최근 신천지 내부에서 이만희 사후를 대비하는 모습들이 포착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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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3-25
  • 2024년 부활절과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와의 48년 목회 여정
    2024년 사순절은 2월 14일에 시작하여 3월 31일이 주일이자 부활절이다. 40일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일, 고난의 행군이고 사순절을 보내고 종려주일이 끝난 바로 하루 3월 마지막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을 기념하는 날이다. 10년이 4번씩이나 거듭해 오던 목회 48년이란 한국교회 그리 흔치 않는 긴 세월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하는 것이 보기드문 역사의 현장에서 윤성진 목사(부산영락교회 담임)를 우연히 만났다. 3월 14일 오전 윤성진 목사를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필자 역시 교계 신문에 몸담고 있은지 근 50년 전 젊은 윤 전도사를 만난 인연이 이어져 오늘까지 지켜왔다. 부산영락교회 전도사로 초임 부임하여 부산고등공민학교와 주일 교회학교 학생들을 섬겨 왔다. 한 교회에서 이런 오랜 세월동안 부임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 퍽 드문 일이다. 위임목사로 32년, 현재에도 목회 2~3년 마지막 길을 걷고 있다. 부산영락교회 하면 6.25 전쟁으로 인해 남하한 한경직 목사님과 30여명의 피난민 성도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이다. 72년이 된 오늘에 부산영락교회는 코로나 감염 사태 전에는 성도 2500여명이 출석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교회였다. 교회당 수용 인원은 불과 1000명 수준 공간이다. 이 교회는 고현봉 목사 총회장 취임 1년 전에 새 성전을 건립한 1000여평 공간에 부산 사법부가 중심이었던 서구 부민동 중간에 위치한 교회이다. 그 당시 두 개의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어 두 십자가를 둘러싸고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항간의 루머를 말해주듯이 한때는 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고 목사를 비롯하여 윤성진 목사도 두 번씩이나 목사 징계를 당한 예장통합측 교회 가운데 경남 마산 문창교회 다음가는 교회분쟁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교회이다. 결국엔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백석교단으로 교단을 가입했다. 지금도 부산 안에 부민동 소재 부산영락교회와 하단동 소재 부산영락교회 같은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들 두 교회는 한 뿌리로서 서로 아픔을 치유하는 화해로 모든 문제를 풀고 서로를 위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들이 많이 배출된 특별한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현재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는 “이제 불과 은퇴 2~3년 남겨두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은퇴 마무리를 짓고 물러날까 고민하고 있다”고 귀뜸 해 주었다. 가장 아쉬었던 것은 교회 옆 건물 부산은행 자리를 아깝게 구덕 신협에서 경매를 낙찰받아 사지 못하였고 바로 길 건너 골든오피스텔 건물 20층 자리도 사실상 통일교에 넘어간 상태라 이것마저 놓쳐 현 위치에서 지하 주차장과 10층 규모의 새성전을 신축하는 방안을 놓고 기도하며 당회와 숙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윤성진 목사는 일찍이 거제 하청이 고향으로 어릴 때부터 하청교회에 출석하면서 부산장신대학교 통합교단에서 줄곧 학업을 연마했던 골통 통합맨이다. 지금도 적(교단)은 백석이지만 백석교단 수뇌부에서 교단 부총회장 출마 권유도 수없이 받아 왔지만 정중히 거절한채 오로지 교회 부흥에 올인하고 있다. 부산교계에 여러 연합체 대표회장 권유도 모두 사양하고 여러 교회 집회나 부흥 사경회 강사 초청도 모두 거절하고는 오로지 교회 한 곳에만 목회 전념하는 보기 드문 순수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장로들이나 집사, 권사와 일반 성도들에게는 겸손하고 친절하며 정이 넘치는 목회자로 소문난 70대 목회자다. 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장신대학원을 거쳐 서울 소망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미국으로 학업을 위해 유학 중이고 딸도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제자들을 양육하고 있다. 서울 소망교회에서 유학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 제공 약속마저 사양하고 박사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항간에 윤목사의 뒤를 잇는 세습 운운하는 소문에 윤 목사는 “그런 기우는 내가 살아있는 한 일체 없을 것이다”고 반박했다. 일찍이 양산 지역에 큰 대지를 구입하여 양산지역 복음화에 주력하기도 했다. 양산성전도 날로 부흥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현 성전을 놓고 결정 여부에 주력하면서 조용히 은퇴 마무리를 지어 소망이 실현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윤 목사는 48년 인연이었던 필자와의 대화에 부활의 꽂망울을 피울 준비에 부담없는 담소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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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24-03-25
  • [목회자칼럼] 변함에서 전함으로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고(故) 이건희 회장은 파격적인 변화를 선언했고, 이 회장의 발언은 훗날 ‘혁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효과 때문인지, 혹은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30년 전에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지금은 태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의 속도가 빠릅니다. 변화가 대세로 자리잡아 그 흐름을 타지 못하면 금방 도태될 것만 같습니다. 30년 전 대기업 회장은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했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해야 살 수 있다. 혁신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변하지 않으면 곧 죽음이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입니다. 세상은 이미 변화와 혁신의 중요성을 알고 하루, 분, 초 단위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지금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 시대 교회의 생존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요? ‘변화’는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도 과거와 비교하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상황, 세상이 인식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 등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변화 앞에 교회도 변화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변해야 할까요? 이불변응만변以不變應萬變 이란 말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매일 만가지 변화를 겪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 속도에 맞추기 위해 급급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의 수만은 변화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수 있는 것, 만가지 변화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거나 혹은 변화를 또 다시 바꾸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는 이들에게 인생의 의미, 복음의 가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전해야 합니다. 만족이 없고, 변화를 위한 변화만 계속되는 현실에서 하루 하루 자족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구원의 감격으로 나와 이웃을 섬기는 삶이 어떤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역인 ‘영혼구원’이야말로 세상의 변화에 가장 ‘혁신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양을 쌓는 곳도, 친목 도모를 하는 곳도, 공부를 하는 곳도 아닙니다. 복음의 꽃을 피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아는 성도들은 교회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경계하여 지키는 사람입니다. 지키는 사람이 졸거나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경계는 무너지고 안전은 위협 받습니다. 이 시대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성도들은 깨어있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된 한국 교회가 더 이상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깨어서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어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성도는 본인도 깨어있어야 하고 더불어 잠자고 있는 성도들도 깨워야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잠을 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혹시, 최근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내가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는 아닌지,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지키면서 동시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의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자 핵심입니다. “저는 죄인이라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제대로 전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십자가 앞에서 내 모습을 그대로 올려드리기에 죄인임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안된다고 말할 때가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교회, 복음의 생명력이 흘러 넘쳐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는 교회,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교회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이 복된 복음을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전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이심전심으로 하나가 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어 복음의 파수꾼으로 지키며 전하는 삶. 진정한 변화와 혁신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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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공주제일교회 양두현 장로와 그 후손들
    앞에서 공주지방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스(禹利岩, Frank Earl Williams)와 그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禹光福, George Zur Williams)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프랑크 윌리엄스, 곧 우리암 선교사에 의해 발전된 공주읍교회와 이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양두현(梁斗炫) 장로와 그 후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공주읍교회는 후일 공주제일교회로 불리게 되는데, 스크랜튼 선교사를 한강이남 지역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공주지역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1898년 스크랜튼에 이어 수원, 공주 지역 관리자로 임명된 스웨어러(W. C. Swearer, 1871-1916) 선교사는 1902년 가을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하여 초가 1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공주읍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교회가 남부지역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1903년에는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맥길(W. B. McGill, 1859-1918)과 이용주 전도사가 전도활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샤프(R. A. Sharp, 1872-1906) 선교사가 공주로 오면서 선교활동이 확대된다. 즉 로버트 샤프는 명설학당을, 부인 엘레스 샤프는 명선학당을 설립했다. 그런데 샤프 선교사가 순회전도 여행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 5일 급사했고, 대신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1906년 공주로 오게 되는데, 그는 이전 학교를 수습하여 영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가 후일 공주 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이 학교에서 수학한 이가 유관순 의사였다. 감리교 공주선교부 거점 교회로 출발한 공주읍교회는 건실하게 성장하였고, 안창호, 윤성렬 목사, 황인식 등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크게 기여한 인물이 양두현, 지누두 부부였다. 이들은 우리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공주제일교회 출석하며 믿음으로 살았는데, 새벽기도회 참석, 십일조 헌금 등 당시 성도들에게 본을 보았고, 교회와 이웃에게 사랑과 선행을 행하며 교회를 섬겨 공주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드려 전도사업을 전개하게 했고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를 잘 아는 우리암 선교사는 양두현, 지누두 부부가 회심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토지를 기증하려는 의지 등에 대해 선교사들이 발간하던 영문 잡지 Korea Mission Field 1924년 12월호(254-5쪽)에 소상하게 소개했다. 양두현은 1938년(소화 13년)에는 전답 20,963평을 교회에 기증했다. 당시로 볼 때 엄청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한 것이다. 이때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명의로 포상장을 수여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포상장 공주지방 공주읍교회 양두현. 우인(右人)이 자기의 소유 재산인 전답 20,963평을 본 교회 천국사업에 봉헌하였음으로 그 봉사적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자에 은제(銀製)상패 1개를 수여함. 소화13년(주후1938)년 10월 1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 이런 헌신을 고려하여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박사는, “양두현은 공주지역의 대지주로서 공주감리교회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했다. 양두현 장로의 아들이 양재순(梁載淳, 1901-1998) 박사인데, 공주 영명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1922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리학(文理學科)에서 1년 간 수학한 후 1923년 세브란스 의전에 다시 입학하여 1925년 졸업과 동시에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함흥 자혜병원, 군산 구암병원 등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1927년에는 공주에서 공제(公濟)의원을 개업했다. 공주에서의 제1호 양의사였다. 이때부터 70여 년간 인술을 베풀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특히 그는 선대에 이어 공주읍교회를 섬겼고, 1958년에는 장로로 장립 받아 봉사했다. 그는 공주제일교회를 위해서도 재산을 헌납했지만 특히 1980년에는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에 화은감리교회를 사비로 신축하고 그 교회와 인근 주민들에게 20여 년 간 무료진료를 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가 194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영명학교는 양재순, 당신이 맡아야 해”라고 하여 양재순 박사는 1940년부터는 모교인 영명학교(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봉사했고, 이보다 앞서 1946년에는 충청남도보건후생국장을 맡아 도정에도 관여한 바 있다. 양재순 박사의 넷째 아들이 부산교계에 널리 알려진 양덕호(梁德鎬, 1934- ) 박사인데,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3년간 수학 한 후 선대의 유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자하여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장기려 박사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며 여러 의료기관 사회봉사기관에서 활동했다. 1982년에는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어 3대째 장로로 주님을 섬겼다. 특히 그는 장기려 박사가 시작한 부산 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 25년간 봉사했다. 양덕호 장로는 선친의 공제의원과 그 주변 땅을 공주제일교회에 헌납하여 교회의 재건축을 가능하게 했다. 양덕호 박사의 아들이 양한광 박사인데, 서울의대 출신인 그는 위암수술의 권위자로 서울대 암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선정한 세계 50대 의사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로부터 받은 복음이 양두원- 양재순- 양덕호- 양한광으로 이어지며 인술을 더하여 우리 시대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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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03-25
  • 부활의 능력과 소망
    부활절의 날이 밝았다. 올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에게 낮아짐을,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신다. 2024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온갖 재앙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붙들기 때문이다. 이 부활의 능력. 화해의 능력. 용서와 사랑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세상은 무력과 폭력으로 자기를 성취하려고 한다. 자신이 드높아 지기 위해서라면 타인을 짓밟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분열과 분리가 일어난다. 반면, 오직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낮추시고, 약해지심으로 세상을 섬기시고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약함’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약함’의 영적 실상은 ‘강함’이다. 부활은 영혼을 새롭게 하고, 육체를 새롭게 하고, 삶을 새롭게 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며, 자연을 새롭게 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단어이다. 옛 것을 다시 형상화 시키는 것이 부활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거듭남을 입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새로운 것이 아닌 옛것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자. 부활의 의미를 무엇보다 제대로 정립해야하는 기독교가 진정한 의미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상의 변화의 중심에 기독교가 서야 한다. 부활을 맞아 우리가 먼저 의식을 깨어 구태의연한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는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기자.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위대한 미래를 건설할 것이다. 옛 것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도약하고자하는 우리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건전한 영향력으로 전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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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교회여 공직선거법을 준수하자
    4월 10일, 제22대 총선이 눈 앞에 다가왔다. 총선을 앞두고 최근 기윤실이 ‘공직선거법준수캠페인’을 제안하며, 예배, 헌금, 기부, 말, 통신, 명함, 사진 총 7개 분야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선거법을 제시했다. 예를들어 ‘교인인 후보자의 출마를 통상적으로 간단히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나 학력/경력 등을 소개하거나 인사 기회를 주는 것은 금지’, ‘교인이 정해진 일정에 따라 기도/간증하는 것은 가능하나 선거기간에 급조해 기도/간증하는 것은 금지’, ‘교회를 방문한 후보자의 참석을 알리는 것은 가능하나 출마사실을 알리거나 지지를 유도하는 것은 금지’ 등이다. 이렇게 공직선거법이 교회내에서 강조되는 이유는 선거철마다 다수의 목회자들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각 교회마다 온라인 방송이 강화됐고, 더 이상 목회자의 설교를 현장에서만 청취가 가능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들어 ‘교파라치’(교회+파파라치) 활동도 활발하다. 일부 기관과 시민단체들이 예배시간, 설교시간 불법선거운동을 제보받고, 그 내용을 토대로 고발을 일삼으면서 제보자들에게는 소정의 포상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법 위반은 개교회에도 상처가 되지만, 이를 통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정파나 이념, 종교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직선거법을 준수하여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문화를 만드는 22대 총선이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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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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