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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칼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즘처럼 위로가 필요했던 시대도 없을 듯하다. 사회 양극화 현상은 너무나도 뚜렷하다. 경제는 모두가 고통스러워할 만큼 힘이 든다. 정치는 언제나처럼 희망을 주지 못한다. 곳곳에서 산불로 고통받거나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도 많다. 남북이 분단되어 불안한 마음은 언제나 똑같다. 국제정세도 만만치 않다. 곳곳에서 전쟁과 재해, 사고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도 적지 않다. 이렇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 인생이 고달프다는 말이다. 어떤 분들은 설교라도 자주 위로가 되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할 정도로 마음의 고난과 버거움이 심각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이 위로를 구하면서 살지만 실제로 진정한 위로나 강력한 위로는 좀체 찾아내지를 못한다. 가장 흔하게는 ‘잘 될 겁니다. 힘내세요.’ 하는 식의 피상적인 위로가 있다. 잘 안된다고 해서 책임질 것도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이다. 때로는 임종을 앞두고 있는 환자 앞에서도 ‘곧 다시 일어서실 겁니다.’라는 말들이 다 그렇다. 수험생에게 재수하면 내년에는 잘 될 거야. 이 말도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의 대부분은 이런 수준이다. 이 말들이 우리의 마음에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겠는가? 병이 낫고 회복되어도 결국은 다 죽는다.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진짜 딜레마는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실존은 불안과 근심이라는 요소를 피할 수 없이 안고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진짜 위로는 어디 있는가? 싸구려 위로가 아닌 진짜 위로는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모든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진짜 위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성경 전체에서 위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최고의 말씀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일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최고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계 있는 인간이 주는 위로가 아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의 한계와 고통과 근심을 경험하시고 주신 위로이다. ‘근심하지 말라’ 반대말이 무엇인가? ‘주 예수를 믿으라’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위로의 말씀은 오늘 고민과 걱정거리가 많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주님의 위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는 것이다. 이 위로는 잠깐의 만족과 감정적 위안이나 고통의 감소를 가져오는 위로가 아니다. 이 위로는 궁극적인 위로이다. 우리 인생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과 근심의 문제를 이기게 만드는 위로이다. 병든 자가 건강을 찾는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일 뿐이다. 사업을 다시 일으켜 재물을 많이 모으게 되었다고 해도 잠깐 있다가 다 놓고 가야 하는 길이다.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보장을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인간이 주는 위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주님의 위로는 다르다. 어떤 상황, 어떤 근심거리도 이 위로를 빼앗지 못한다. 도리어 이 위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가지는 모든 근심을 다 앗아갈 만큼 강력한 실재이다. 오늘 우리 근심의 대부분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어찌 살까?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까? 이 사람을 어찌할까? 이런 근심은 땅에 속한 근심들이다. 이런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천국을 잊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은 다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을까? 내 삶에서 혹은 내 결정에 있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근심들이다. 여기서 이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과 그 일의 능력을 믿는 자들을 위한 위로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자만을 위한 위로이다. 오늘 이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길 기도한다. 우리 다음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늘의 위로를 받고 살아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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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5가지만 기억하세요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이때쯤이면 교회마다 신앙전승을 잇기 위한 여러 가지 특별한 프로그램을 합니다. 하지만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당장 눈앞의 변화만을 위해서 프로그램에 매달린다면 매년 또 다른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교육학자인 존 웨스터호프가 제시한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위한 5가지 지침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 교육, 특히 가정에서의 신앙 형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학자입니다. 그가 제시한 이 다섯 가지 지침은, 신앙이 단순히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함께 경험되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 성서 이야기를 함께 반복하며 이야기해야 한다. 신앙은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다고 웨스터호프는 강조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성경 속 이야기를 자주 나누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해야 합니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기억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야기를 삶에 연결시키는 반복이 신앙의 뿌리를 깊게 합니다. 이를 위해 매주 저녁 한 번은 ‘성경 이야기 시간’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와 함께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읽고, "너라면 동물 한 쌍을 데려간다면 어떤 동물을 고를래?" 하고 묻는 것이죠. 이야기를 읽은 후에는 아이가 이해한 것을 직접 말하게 하고,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하면 더 좋습니다. 또 일상 속에서 비가 오는 날 "비가 오니까 노아 이야기 생각나네!" 하며 자연스럽게 다시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2. 신앙과 생활을 즐거워하며 삶 속에서 찬양해야 한다. 신앙은 우리 삶에 기쁨이 되는 모습,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상 속 작은 일에도 “하나님께 감사해”라고 말하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함께 부르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하루야~" 하고 노래하듯 말하거나, 차를 타고 가면서 가족이 좋아하는 찬양곡을 크게 틀고 다 함께 신나게 따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하나님이 너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하고 축복의 말을 던짐을 통해 신앙과 기쁨이 연결되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3. 함께 기도해야 한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식사 전 짧은 기도, 잠들기 전 함께 드리는 감사기도 등 일상의 순간마다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식사 전 "짧은 기도 릴레이"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빠가 "하나님,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하고 시작하면, 아이는 "맛있는 음식 주셔서 고마워요" 하고 이어가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는 오늘 하루 있었던 기쁜 일 한 가지와 힘들었던 일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그걸 가지고 함께 기도한다. 예를 들어 "하람이가 친구랑 놀아서 기뻤대요. 친구를 지켜주세요" 이렇게 말이죠. 4.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 말해야 한다. 신앙의 대화는 일방향이 아니어야 합니다. 아이들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부모는 그것을 진심으로 경청해야 합니다. “이건 맞고 저건 틀려”라고 바로 재단하기보다, 아이의 신앙적 질문이나 고민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소통할 때 아이들은 신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아이가 "하나님은 왜 눈에 안 보여?"라고 물을 때, "그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반가워하며 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답을 바로 주기보다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되묻고, 아이의 생각을 끝까지 경청합니다. 신앙 질문에 대해 무조건 정답을 주려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아이가 스스로 신앙을 탐색하게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5. 봉사와 증거의 신앙적인 활동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신앙은 말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체득됩니다. 가족이 함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거나, 교회나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신앙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신앙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족이 함께 김장을 하면서 "이 김치는 어려운 이웃들과 나눌 거야"라고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직접 배추 한 포기를 포장하게 하면서, 작은 손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혹은, 동네 청소나 교회 봉사를 가족 프로젝트처럼 함께 진행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 하고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도 좋습니다. 웨스터호프는 전체적으로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모두 ‘함께’, ‘생활 속에서’, ‘즐거움과 진심으로’가 핵심 키워드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딱딱한 '교육'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 즐거워하기 ➡ 함께 기도하기 ➡ 진심으로 듣고 말하기 ➡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기 라는 삶 속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번 오월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행복한 한 달로 보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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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5-12
  • [위드애] 장애에 대한 자부심
    ‘자부심’이란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사용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 자부심’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 ‘자부심’(自負心, pride)인데, “장애에도 자부심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거나,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 가 반면,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도 자부심이 있지”하는 사람도 있다. ‘장애 자부심’이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온 부정적인 장애 이미지에 대한 장애인 스스로의 도전이며, 역량강화된 자기 인정이고, 외부 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자기표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전신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 전신거울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은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 역시 선천적 뇌성마비장애와 스무 살에 갖게 된 왼쪽 편마비장애로 인하여 왼쪽과 오른쪽 어깨 길이에 차이가 있고, 허벅지 굵기 차이도 크게 난다. 그리고 마비된 왼손은 대체적으로 굽어 있고 얼굴은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샤워를 한 후, 또는 옷을 입기 전이나 외출을 하기 전에 현관 신발장에 있는 전신거울을 자주 본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애로 인하여 비틀어지고 좌우대칭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꺼려하고 보기 싫어할 수도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가진 그 모습도 인정해야 할 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여겨 주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만약 장애를 가진 몸에서 장애를 갖지 않은 몸을 가질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된다면 어떠할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픔을 겪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를 아픔과 고통,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신약을 구입해서 복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선택은 무엇일까? 먹지 않을 것이다. 왜 먹지 않을 거냐고? 내게 장애 자부심이 없었던 예전이었으면 복용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이 보기에 불편해 보이고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내 모습이 좋다. 물론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오히려 장애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장애인식개선강사로, 목사로 학생들이나 성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장애 자부심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장애당사자이면서,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인 내가 먼저 나의 장애를 마주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한다면, 즉 장애 자부심이 없다면 어찌 타인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어찌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함에 있어서 머뭇거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애인식개선은 물리적 환경변화도 중요하고,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장애 당사자부터 자신이 가진 장애에 대한 자부심을 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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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5-05-12
  • [시사칼럼] 누가 본회퍼와 히틀러를 자꾸 소환하는가
    최근 총신의 조직신학자 문병호 교수가 <칼 바르트 비판>을 출간했습니다, 저자는 지피지기의 마음으로 바르트의 대표작인 <교회교의학> 4권 16부 내용 전체를 개괄하고 핵심 내용을 병기한 한국 최초의 작업물을 저서의 말미에 남겼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바르트 신학을 비판하는 7가지의 테제를 역시 권말에 결론처럼 제시합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칼빈, 투레틴, 하지, 바빙크, 워필드, 오웬 등을 소환하면서도 불트만, 몰트만, 블로허, 판넨베르크 등 현대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고 심지어 가톨릭 계열의 칼 라너와 발타자르까지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학자들 즉 미글리오리나 마이클 호튼 등의 성과도 소개하고 특히 현대 바르트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맥코막이나 헌싱어 등의 의견을 빠짐없이 인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목할 사람은 에버하르트 부시인데, 방대하고 탁월한 바르트 전기를 기록한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비판서 앞부분도 바르트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그럴 때 필연적으로 만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바르트는 히틀러를 비판하면서 바르멘 선언(1934)의 주역을 자처했는데 당연하게도 나치당의 핍박을 받아 추방과 망명 아닌 망명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나치의 전체주의가 지배하던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의 시대에 히틀러를 공박하던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본회퍼입니다. 그는 “일부 사람의 권력은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고 설파했는데, 당시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추앙했던 독일 교회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개혁의 발상지였던 독일 기독교는 히틀러를 지지하고 심지어 일종의 메시아라면서 추종했습니다. 다시 독일을 하나가 되게 하고 부강하게 만들며 경제를 일으키고 민족자긍심을 높여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들은 히틀러 정권이 자행했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인권 모독 및 억압 그리고 민주주의에 가한 모욕은 물론 유대인 학살 같은 만행도 눈을 감거나 옹호하기 바빴습니다. 당시에는 그들이 주류였고, 그들이 옳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타국으로 이주를 거듭해야 했고,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결국 나치정권에 의해 사형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는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역사는 누구도 히틀러를 정당화하고 당시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최근 한국에 그것도 기독교계에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본회퍼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본회퍼 전문가인 김성호 박사에 따르면 정확한 표현은 ‘거리에 미친 사람이 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하는 모습을 본다면 목사로서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거나 유족을 위로하기보다는 먼저 차에 뛰어올라 운전대에서 운전자를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1946년 3월 본회퍼 사후 공개된 편지에서)이며, 설령 그와 같이 바르트 식으로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하더라도 과연 운전대를 잡은 미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왜곡이 있고 역사적 평가 앞에 정당할 수 있겠는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정치인 한 사람도 현재 일단의 세력이 히틀러보다 더하다고 발언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볼드모트” 같은 그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대에 히틀러 같은 존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누가 과연 히틀러 같은 존재입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는 누가 과연 옳은 지, 누가 과연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는 길을 가고 있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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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소강석칼럼] 빛의 나라에서부터 빛의 연대기까지
    4월 23일 수요일 오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빛의 연대기’ 공연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그냥 지켜보는지 모르지만 저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제가 작사를 할 뿐만 아니라 영상 하나하나, 멘트 하나하나까지 다 체크를 해야 했거든요. 사실 제가 영상 내레이션을 몇 번을 보면서 “이렇게 고쳐라, 이렇게 편집하라”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영상 실무를 담당하는 나유진 자매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시험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지적을 했거든요. 사실 장소를 허락해 주신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마는. 아쉬운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되지 못했다는 사실 입니다. 저는 애당초 한교총과 한기총이 합하여 이 칸타타를 공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무선에서부터 반대가 심하고 어떤 적대감, 증오심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빛의 연대기’ 공연을 더 넓은 광장에서 하고 싶었지만, ‘광장’하면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잠실에 있는 체조경기장이나 기타 다른 곳도 찾아봤지만, 대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본당 2층을 가득 메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그 뜨거운 열기는 강단으로 까지 전해졌고 저의 제스처에 따라서 다 움직이는 성도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음악감독을 맡은 류형길 지휘자가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총 9곡인데 제가 과감하게 한 곡을 뺐습니다. 저라고 아쉬움이 있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저는 항상 시간을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한 곡을 더 불렀으면 그 한 곡 때문에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류형길 지휘자에게 서곡을 한번 멋지게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지역 차량이 돌기 때문에 12시까지 예배를 마쳐야 되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행사가 끝나는 시간이 12시 1분 30초였습니다. 제가 7번 곡을 뺀 것이 너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서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피날레에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청중이 감동을 받고 다 일어서서 함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태초의 밤하늘에 떠오르던 별 / 달빛 아래에 잠든 꽃들이 깨어나고 / 구속사의 푸른 장강 이 흐르고 /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길을 따라가 /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역사 / 길고 길었던 시간들 / 하나님 섭리로 이겨냈네 / 빛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이제 어두웠던 역사 그 치고 / 밝은 빛의 향해를 시작하네 / 우린 진정한 하나가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우 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 빛의 선민으로 나아가리라 / 우린 진정한 한민족 되어서 / 이 빛 을 지켜가리라 / 거룩한 환상 생명의 언어로 /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리라 / 어둠을 뚫고 밝 아오는 찬란한 / 찬란한 새벽빛이여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행사가 끝나고 나니까 어느 국회의원은 “이거 목사님이 진짜 쓴 거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또 어떤 총회장은 “목사님이 시인이라는 걸 이제 알았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국민일보도 안 보십니까?” 사실 이 공연은 한 교회에서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 한들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유튜브를 시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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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5-05-12
  • [성서연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저런 목적으로 몇 차례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둥그런 중국식 식탁에 둘러앉아 십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음료수 잔은 우리의 것보다 많이 작습니다. 거기에 사이다를 부어 마시는데 제가 한 모금 마시면, 중국인 형제가 다시 채워주곤 했습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조금이라도 잔이 내려가면 다시 채워주는 것이 중국식 손님 접대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배가 부르면 마시지 말고 그냥 놔둬야 합니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다시 채워줄 테니까요. 끝없이 채워주는 것, 그것이 그들의 환대법이었습니다. 중국식 손님 접대법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잔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잔을 빈 채로 놔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 잔을 가득 차고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다윗은 이 은혜를 체험한 후에 노래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빈손으로는 은혜의 생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잔은 클수록 좋겠지요. 믿음만큼 받고, 기도한 만큼 응답 받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크게 기도하고, 크게 응답 받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잔을 준비하십시오. 아무리 큰잔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든 잔에 넘치도록 채우실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기대 이상으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잔을 엎어놓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엎어놓은 잔에 무엇을 채울 수는 없을테니까요. 반드시 잔은 바로 놓아야 합니다. 엎어놓은 잔은 배가 튀어나왔습니다. 교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놓은 잔은 안으로 움푹 들어갔습니다. 겸손합니다. 모름지기 은혜는 겸손한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앞을 보십시오. 잔이 채워졌습니까? 그러면 잔을 들어 감사하면서 들키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잔이 채워졌건만, 아직 자신의 잔을 빈 잔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채 몹시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에서 단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깬 그는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순간 뜰에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뜰 안의 화단에 행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집 뜰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미 잔이 채워져 있답니다. 잔이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는 지혜가 있길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잔이 채워져 있음을 알면서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마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오래도록 소유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은혜는 누리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샘은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는 법입니다. 퍼내지 않고 놔두면 썩습니다. 은혜는 사용하고 나눌수록 더 많이 주어집니다. 록펠러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록펠러는 무엇을 남겼는가?”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남겼다” 그렇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대로 두고 갈 뿐입니다. 사용하십시오. 누리십시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시고 나면 잔이 빌까 염려하여 마시지 못합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잔을 빈 채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채우고, 또 채우실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고단한 인생 길에서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합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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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은혜의말씀]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 (시편 118:17~19)
    본문은 하나님께서 나를 경책하시되 생명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나의 앞길을 열어주시고, 전도의 문을 열어주심을 감사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신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건강도 주시고 물질도 주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고민하지 말라. 후패할 육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길을 가라. 인생에서 보람 있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 영혼구원을 위한 삶을 따라가라. 생생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나의 발을 이끌어간다. 성도는 구도자, 예배자, 전도자로서 삶의 구호가 분명해야 한다.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은 할렐루야 아줌마, 고(故)최자실 목사님의 사진 밑에 기록된 평생의 구호이다. 최자실 목사님은 경남 진해에서 살다가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당시 전도사였던 고(故)조용기 목사님을 만났고 전도에 힘쓰며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함께 사역을 하던 조용기 목사님에게 따님인 김성혜를 시집보내고 조용기 목사님의 장모가 되었다. 그리고 기도의 영성을 강조하면서 오산리 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원이 되었다. 지금은 그 오산리 금식기도원의 한 자리에 조용기 목사님도, 김성혜 사모님도, 최자실 목사님도 묻혀 있다. 또 최자실 목사님은 아들인 김성광 목사님과 강남 금식기도원을 세웠는데, 기도원 곳곳에 "살면 전도, 죽으면 천당"이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한 여인의 신앙적인 열정이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고 국제적인 기도원을 세워서 수많은 기도의 용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CTS 청년 독수리의 진행자 김형민 목사님도 최자실 목사님을 롤 모델로 삼고 따라하려고 같은 모자를 쓴다고 한다. 모자만 흉내 내어도, 모양이라도 따라하다 보면 큰 영향력을 미친다. 사람은 생사관이 분명해야 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이순신장군의 정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이다. 신앙생활은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복음 전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는다. 전도는 살아있는 사람이 해야 될 사명이다. 전도를 하게 되면 죽은 영성이 깨어난다. 전도는 무기력한 교회를 살린다. 전도하기 시작하면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고 나서면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복음을 전하면 사람이 바뀌고 가정이 변하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전도하면 교회학교가 살아나고, 전도하면 교회에 생기와 소망이 넘치게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부흥되고 건축하고 그 이후에 어느 순간 전도의 불씨가 꺼지게 되었다. 편리주의, 적당주의에 편승하여 본질을 잃어버리니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나 죽으나 복음전파 하리라. 복음 전도는 취미활동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고 사명이다. 사명은 죽어도 해야 되는 것이다. 전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요, 성도의 핵심 사역이다. 한번뿐인 인생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주의 일을 해야 된다. 살아서 건강한 동안에 전도 하리라. 죽으면 전도할 수가 없다. 천국에 가서는 전도할 필요가 없다. 아난티 회장 이중명 장로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창의적인 실행, 그리고 몰입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대구의 어느 장로님은 주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일하지 않고 적당히 사는 것이라고 한다. 살면 선교, 죽으면 영생 복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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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은혜의 말씀] 제자의 품격(마태복음 10:5~14)
    주님 눈에 확 띄고, 주님 맘에 쏙 들고, 주님 손에 딱 맞는 사람이 있다. 경건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경건의 모양부터 먼저 갖추어야 된다. 주님의 제자가 가져야 될 마음가짐이요, 자세요, 복음일꾼의 태도는 무엇일까? 1. 오지랖을 넓히지 마라 마10:5~6에 예수님께서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셨다. 상반기 사랑과 행복의 초대 대상이 딱 좁혀지는 말씀이다. 주변, 사방팔방, 신변잡기로, 산만하게 간섭하지 말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고, 망각한 사명을 부여잡고, 식어버린 사랑의 불씨를 되살리고, 약해 빠진 마음을 추스르고,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라. 한 생명에 집중하라. 나와 관계된 가까운 데서부터 복음을 전하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거나 말거나, 닥치는 대로 복음을 전하라. 2.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라. 사람 비위나 맞추는 달달한 말만 하지 말고 회개의 천국 복음을 선포하라. 힘으로 능으로 깡으로 돈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 된다. 주님 주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힘 있게 섬기되 받은 복을 흘려보내라. 주는 자가 복이 있고, 섬기는 자가 큰 자다. 흐르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담대하게 흘러가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라. 은택을 잊지 말라. 나의 나 됨은 만 가지가 하나님의 은혜로다. 3. 설레발을 치지 마라. 호들갑을 떨지 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준비한다고 설레발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호들갑을 떨지 마라. 내가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주께서 친히 다 준비하신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앞으로도 예비해 주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라! 주님 앞에 조용히 기도하면 주께서 앞서 행하시며 역사하신다. 4. 입술로 쓴물을 쏟아내지 말고 축복하고 평안하기를 빌라. 어디를 가든지 축복권을 써 먹고, 평안을 기도해 주라. 트러블 메이커가 되지 말고 피스 메이커가 되라. 악의 축이 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미쳐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5. 미련을 떨쳐 버려라. 감정 소모를 지나치게 하지마라. 소탐대실 하지마라. 작은 욕심 때문에 집토끼, 산토끼 다 놓친다. 사소한 미련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지 마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라. 겸손하게! 성실 하게! 그러나 당당함을 잃지 마라! 6. 다투지도 들레지도 마라.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연한 순과 같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사역을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생색을 내거나, 티를 내지마라. 말이 앞서지 마라. 구구한 변명이나 핑계를 대며, 구차하게, 쪽팔리게 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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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2
  • [서임중칼럼]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부활 신앙의 삶)
    19세기의 최대의 시인 롱펠로우는 미국의 보든 대학 졸업 후 약 3년 동안 유럽에 유학하고, 귀국 후 모교의 근대어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1835년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또다시 유럽으로 갔으며 이때 첫 번째 부인을 잃었다. 스위스에서 ‘프랑세즈 애플턴’을 발견하고 그녀를 산문 이야기 <하이페리온>의 여주인공으로 묘사하였다가 그녀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43년 드디어 그녀와 결혼하였지만, 이 두 번째 부인도 61년 불행한 사고로 불타 죽었다. 롱펠로우는 그렇게 인생의 쓰라린 경험자였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롱펠로우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 짓’이라 하는 것이다. 오래전 울산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참으로 귀한 장로님을 만났다. 아직도 그분의 아름다운 신앙과 삶을 잊지 못한다. 그분은 월남전에서 양손을 다 잃은 전상자였다. 전쟁 중에 진지에 포탄이 떨어졌다. 떨어진 포탄을 쓰러 안는 순간 양팔은 날아 가버렸고 배는 터져 창자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동료 전우들은 살았다. 누구도 살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 한 상황에 긴급 후송되어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했다. 그 후 신앙생활을 통하여 그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장로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을 주는 거룩한 몸짓으로 오늘도 사역하고 계셨다. 함께 식사하면서 장로님의 숟가락과 젓가락 움직임을 보았다. 장로님의 양쪽 의수(義手)는 아주 민첩하게 밥과 반찬을 집어 올려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장로님 의수를 잡고 여쭈어보았다. “어떻게 열 손가락처럼 그렇게 민첩하게 손놀림할 수 있습니까?” 장로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의수를 보여 주셨다. 손가락 역할을 해 주도록 만들어진 의수(義手)는 강한 쇠붙이였지만 장로님은 그 의수로 글도 쓰시고 그림도 그리고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하신 담임 목사님은 한마디 거들어 주셨다. “P 장로님은 모든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비록 장애인이지만 누구보다 밝고 아름다운 삶을 엮으시면서 교회와 사회에서 존경받는 장로님으로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그것은 오직 장로님의 중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충만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오늘의 삶이다. 그것은 진실로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이었다. 사지백체 건강함을 가지고도 늘 불평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정신적 인격적 장애인들이 많은 오늘에 P 장로님의 미소는 목사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 비가 많이 쏟아지는 그곳에서는 식물들도 더욱 푸르게 자라난다. 안개가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알맞아 에메랄드의 섬이 된다. 우리 인생에도 고난과 슬픔의 안개가 짙을수록 에메랄드 같은 아름다운 심령을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 깊이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제비가 겨울 동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겨울 동안에 꽃나무가 죽어서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먹구름이 소나기를 내리게 하며 사방이 어두워 캄캄해진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제비는 다시 오고,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 이 땅에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해 잠시 비가 내렸을 뿐이지 태양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다. 나는 뇌신경암 4년차 투병 중이다. 그런데도 1년 52주 한주도 쉼 없이 부흥사경회를 인도한다. 내 삶의 한편에는 아프고 지치고 벅찬 시간도 있지만 그보다는 감사와 평안과 행복한 삶이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활 신앙이 거룩한 몸짓의 삶을 연주하게 한다.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방문하여 말씀 사역을 하노라면 잠자리가 불편하고 식사가 만만치 않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운전도 순조롭지 않다. 그러면서 요즈음 내 마음이 흔들리는 일들이 있었다. 사역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교회 목사님의 전화 한 통이 또 나를 다음 마을로 가야 함을 깨닫게 했다. “서목사님, 우리 교회 78세 할머니가 서목사님의 방송 설교를 듣고 저를 찾아와 서임중목사님 설교를 생방송으로 듣고 천국 갔으면 원이 없겠다 하셨습니다.”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눈시울이 젖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에 포항중앙교회 주일 설교를 마치시고 목양실에서 “하나님, 말씀의 종 서임중목사는 녹슬어 사용하지 못하는 종이 아니라 닳아서 사용할 수 없는 그날까지 귀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축복 기도를 해 주신 시간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사역의 걸음을 옮긴다. 그것은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이리라. 오늘도 롱펠로우의 ‘인생 찬가’의 한 부분을 읊조리면서 주님의 나귀 되어, 또 다음 마을을 향해 걷는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아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가슴 속에는 심장이 있고, 머리 위에는 하나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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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성서연구] 십자가가 복이 되다
    일반인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 중 하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짐을 벗겨 대신 져 주시는 분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68편 19절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인생의 짊을 대신 져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 짐을 주님께 맡기고 살길 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뜻밖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짐을 지우기도 하십니다. 이 일을 경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매우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구레네는 오늘날의 북 아프리카 리비아 근처입니다. 당시 구레네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몬이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순례는 평생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시몬은 오래 준비했을 것입니다. 여행 경비, 하나님께 드릴 예물,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 예루살렘에서 입을 새 옷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날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는 새 옷을 입고 예루살렘 거리에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가까이 가 보니, 한 죄수가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죄수가 비틀거리자 로마 군병이 시몬을 끌어내어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날벼락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모두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형틀인데, 그것을 지게 되다니, 그것도 벼르고 별러 온 예루살렘 순례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는 정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 십자가에 배인 죄수의 피가 그의 옷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거친 십자가에는 이미 죄수의 피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 죄수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어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 그의 새 옷은 죄수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옷도 버리고, 영혼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충격적인 일이 시몬에게 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죄수가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그 날 시몬은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지는 순간, 예수님의 깊은 눈이 그를 사랑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 날 그가 누린 복이었습니다. 또 시몬은 그날 예수님의 보혈에 가장 먼저 닿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씻는 보혈입니다. 그런데 그 보혈이 그의 옷에, 그의 손에, 그의 몸에 닿았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의미를 몰랐겠지만, 후에 십자가 보혈의 사죄의 능력을 알았을 때, 시몬은 평생 그 날의 감격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예수님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시몬의 아내를 <내 어머니>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그의 가정은 로마에서 믿음의 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는 십자가도 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고 따르는 십자가도 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질 때는 무겁고 힘들지만, 후에는 복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습니다. 편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냉난방이 조금만 불편해도 원망합니다. 주차장이 없다고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주방 봉사자가 사라집니다.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신학생들도 편한 사역지만 찾는다고 합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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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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