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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희망이 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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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2024년이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신 성탄을 기뻐하고 나면 이제 2024년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금년 한 해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는지 마무리 하는 이때 한국교회 현주소에 대해 한번쯤 고민하고 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탄핵과 혼란스런 국내정치 상황,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와와 우크라이나, 중동전쟁 상황 등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이때 교회는 과연 세상의 희망이 되고 있는지, 아님 세상의 걱정꺼리가 되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국내 3대 종교 중 유독 교회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목회자의 도덕성 문제를 비롯한 교회 내부의 문제, 상식적이지 못한 이런 모습이 점점 교회를 향한 거리를 두는 모양세다. 대다수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지만, 몇몇 대형교회 중심으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교회의 신뢰도를 더욱 추락시키고 있다. 비록 일부 교회들의 문제이지만, 교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은 감소하고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듣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왜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비춰졌는지 고민하고 돌아봐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비춰지고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라면 내가 조금 더 피해를 보더라도 남을 위해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2025년도에는 삶의 한 부분이라도 그분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보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나보다 더 어렵고 소외된 이웃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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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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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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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국회에 의해 탄핵되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탄핵의 이유가 되었지만, 매번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은 거대야당의 횡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 언론이 여론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협되는 문제는 정치권의 극단 대립’이라는 응답이 35%로 가장 높았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정도를 가지 않고 있다는 증명이다.
우리 국민들도 정치의 혐오와 증오가 활활 불타는 화염 속으로 같이 들어가지 말고,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은 마치 전설 속의 불가사리와 같다. 쇠붙이를 먹어야 힘을 얻는 존재라고 한다. 국민들이 마치 쇠붙이를 공급하는 것처럼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치권도 극한 상황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정 정파의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며, 하늘의 능력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이 나라에 안정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인들에게 권세와 권력을 더 주셨고, 또 그에 따른 심판도 엄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 격동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모든 국민들은 격견(格見-품위와 격에 맞는 의사 표현)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격랑 가운데에는 기독 의원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이 국회에서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기 바란다. 한국교회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국가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앞장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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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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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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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일은 즉흥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가장 오래 준비하시고, 가장 큰 사랑이 담은 최고의 선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한 최적의 때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때가 최적기였던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우선 세계 언어인 헬라어가 있어서 언어의 장벽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발달된 육상, 해상 교통로를 이용하여 전도자들이 빨리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이룩한 평화, 소위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인해 복음 전도자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회당을 세우고 살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방인들이 쉽게 복음을 이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적절할 때 탄생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정말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미가서 5장 2절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스가랴 9장 9절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이사야 53장 5절은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을 조금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프로젝트를 추진하시는 가운데 사람들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소위 예수님의 족보를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 시작한 족보는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에 이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탄생까지 이어오는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역할은 <낳고>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아서 다음 세대로 이어갔습니다.
더구나 자녀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낳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1장 12절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는데, 주전 597년에 바벨론의 2차 침략이 있었고, 그때 불과 십팔 세이던 여호야긴 왕이 폐위되어 끌려가고, 숙부인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이 12절의 <여고냐>입니다. 그는 왕위를 잃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스알디엘을 낳았습니다. 요즘도 여러 어려움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나라가 멸망하는 와중에, 포로가 된 사람이 자녀를 낳아 다음 세대로 이어갔다는 것은 정말 끈질긴 집념을 보여줍니다. 그 <낳고>가 없었다면,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는데, 스룹바벨은 바사의 고레스 왕이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 백성의 인솔자인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고냐가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은 <집념어린 이어감>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싸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매우 어려운 신앙 환경을 맞고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이 점점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가 온통 혼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낙망하지 말고, 오늘 낳아야 할 것을 낳아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믿음의 열매를 낳아야 합니다. 우리 대에서 끊어지면 안 됩니다. <낳고, 또 낳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싸움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 시대의 몫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우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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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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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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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탈진을 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갑자기 박순애 전도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박순애 전도사님과 친한 윤동현 목사님에게 올해 안에 집회가 가능할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내년까지 집회 일정이 다 차 있지만 어느 한 교회를 잘 설득해서 다음으로 연기하면 12월 첫 주에 우리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일찍 11월 중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날짜가 그렇게밖에 안 된다고 하니 저도 잠시 고민을 하였습니다. 12월부터는 저의 일정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거든요. 교회와 교회 밖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교역자정책수련회와 성탄절 행사를 하고 나면 곧바로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부흥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쉽게 결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다가오는 확고한 감동과 거룩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를 한다고 했더니 제 측근에 있는 몇몇 동역자들이 “또 해요? 같은 간증일 텐데요.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면 순종해야지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을 들었지만 제가 다시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아니야, 간증이 반복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 프레임으로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하실 거야. 더 깊은 간증과 새로운 영적 언어로 말씀을 전해주실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부터 은혜 받아야 돼. 많은 신도시 교회들은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우리 교회는 시대 흐름보다 중요한 게 은혜야.” 그리고는 제가 담임목사의 권한으로 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상 하고 다니는 간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간증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분은 시대에 편승하고 조류를 타는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역행하고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적인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한순간, 한순간의 간증과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대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속 시원하게 다 전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일예배에는 담임목사로서 그런 극한적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심령부흥회를 열어서 담임목사는 하지 못하는 회개의 말씀, 헌신과 사명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개척 초창기에 심령부흥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 부흥 보다는 심령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직접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의 두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제 자신이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회를 열게 되었는데, 새로운 깊이의 간증과 말씀을 저에게만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무학으로 자라난 산골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영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영혼의 문장을 이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피곤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목이 상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분은 집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저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 보면 말씀의 초점이 흐려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집회 기간 동안에 전화 한통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발 뒤꿈치에 화상을 입었는데도 엎드려서 저도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가시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꼭 짜놓고 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 가서도 최선을 다하셨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윤동현 목사님에 의하면 셋째 날은 얼마나 기도를 쏟아 부었는지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오셔서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전도사님, 살살 하세요. 목도 아끼셔야지요.” “예, 그러겠습니다.” 해놓고 또 올라가서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적당하게 기도하고 끝내고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여 베스트 원, 넘버 원이 되는 게 아니라 온리 원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간증 앞에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니라고 손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유레카의 감탄을 할 뿐이죠. 우리가 그런 삶을 못 산 것이 부끄러울 뿐이죠. 다만 아쉬운 것은 유튜브로 방송을 못 보내서 더 많은 분이 듣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부터 도전을 받아 온리 원의 신년축복성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의 성회가 온리 원이었다면, 제가 하는 신년축복성회는 온리 원 중의 온리 원의 집회가 될 것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려서 누구도 받지 못하는 최고도의 축복, 아니, 온리 원의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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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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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성탄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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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 새벽시장은 너무 추웠습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러 방학 때면 이따금 새벽에 자갈치시장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간 겨울들은 왜 그다지 추웠을까요? 발끝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고 귓불이 떨어져나간 건 아닌지 쓰윽 만져볼 때쯤이면 시장 상인들은 커다란 드럼통에 모닥불을 지폈습니다. 따로 부를 필요도 없이, 어느 샌가 하나둘씩 불앞에 모여듭니다. 사위(四圍)를 온통 다 삼켜버릴 기세의 어둠을 하나둘씩 갈라져 나오는 빛들이 살라버리고 ‘따닥따다닥’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가 어둠을 가로지르는 노랫소리처럼 들리면 동태같이 얼어붙은 몸이 녹아들면서 마음도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지피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언 손과 발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 우리 마음과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모닥불은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요?
본래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탄’이 요즘같이 많이 언급되기도 처음입니다. 언제나 돌아오기 마련인 ‘성탄(聖誕)’의 계절에 ‘탄핵(彈劾)’이라는 정치적 사건 때문에 곳곳에서 ‘탄성(歎聲)’이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탄(感歎)’하는 소리들이 있는가 하면 ‘탄식(歎息)’하는 소리들도 적잖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결의가 이루어진 12월 14일을 전후하여 전자는 주로 여의도 일대에서, 후자는 주로 광화문 일대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헌법 제1조 제1항) 모든 국민에게는 양심의 자유(헌법 제19조)와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헌법 제21조 제1항)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의도든 광화문이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고 나아가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들을 자제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인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 평가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상호간에 존중하고 관용하며 이해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모두가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습니까? 함께 아름답고 성숙하며 발전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절을 전후해서 광장마다 사람들로 넘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인파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금번 성탄의 광장들은 탄핵을 둘러싸고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가득 채우리라 예상합니다. 진리가 항상 다수의 편에 서 있다는 역사의 필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연하게 일어서는 소수가 언제나 진리라는 가설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통계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드러낼 뿐 가치와 평가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전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탄전야의 대한민국을 잠간 묘사해 보겠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조사해 발표한 ‘대통령 탄핵 찬성 여부’ 여론조사 결과 찬성은 76.1%, 반대는 21.9%였습니다(중앙일보 12월 11일). 데일리안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한 조사 결과는 찬성이 73.6%, 반대가 22.2% 나왔습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결과는 찬성이 73.6%, 반대가 24%였다고 합니다(매일경제). 물론 표본조사에 불과합니다만, 이런 통계들은 대체로 70% 넘는 국민이 탄핵을 찬성하고 30% 가까운 국민이 탄핵을 반대한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런 자료들이 탄핵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정당한 판단은 신과 역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광장에서는 탄성만 울리지 않았습니다. 광장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했는데, 광장마다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도 달랐습니다. 여의도 일대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빅뱅의 ‘삐딱하게’ 같은 K-팝이 울려 퍼진 반면, 광화문 일대에서는 ‘내 나이가 어때서’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노래들이 울려 퍼졌습니다. 광장에서 들어 올린 기물도 달랐는데, 알록달록한 아이돌 응원봉이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반면 알록달록한 태극기와 성조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여의도 일대는 갑자기 광장의 주축 세력으로 등장한 20대와 30대 여성들을 포함해서 엠지(MZ)세대가 주력이라면, 광화문 일대는 최근 ‘노노(NoNo)족’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우파(右派)유튜브족’이라 부를 수도 있는 60대와 70대가 주력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여의도 광장에서는 풍자용 캐럴이 불렸다면 광화문 광장에서는 원래 캐럴이 불렸다는 차이도 있네요.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탄핵에 대한 ‘전국담임목사 대상 긴급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67.2%가 찬성이고 28.8%가 반대였습니다(국민일보 12월 12일). 하지만 60대와 7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제 교회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자, 그렇다면, 여의도로 상징되는 새로운 광장세대는 향후 교회로 찾아오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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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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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마음을 지키라 (잠언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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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마음이 병 들면 다 무너지고, 모든 관계도 마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고, 힘줄이 있고, 성경말씀에서처럼 마음의 밭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가꾸고 잘 지킬 것인가, 6가지로 살펴보려 한다.
1. 초심: 시작할 때 마음은 대체적으로 순수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 된다. 동안을 가지려면 동심을 회복하면 된다. 마태복음 28:16 실패한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첫사랑을 회복하였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된다. 처음처럼 초지일관하며 한결 같을 때에 변질되지 않고 괴물이 되지 않는다.
2. 진심: 아굴의 기도는 헛된 마음과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한다. 사람은 진심이 통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진정성이 느껴지면 된다. 진심이면 된다. 에서는 장자권을 만홀히 여기고 진지함이 없이 가볍게 여겼다가 망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사위들은 심판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가 망했다. 매사에 진지하라.
3. 중심: SFC강령에는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 있다. 쓰리센터링이다. 사람이 중심을 잡아야 요동치 않는다. 인간관계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이다. 성경 중심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추어야 된다. 교회가 소망이다.
4. 열심: 사역을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열정의 소유자들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다. 성령은 불이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사역에는 이열치열, 마태효과가 있다. 열심의 반대, 게으른 것이 죄악이다.
5. 전심: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도둑질을 하는데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좋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 속에는 인간적인 욕심과 야망이 묻어날 수가 있다.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가져야 된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 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쉐마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다윗은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한 100% 전심을 원하신다. 최고의 기도는 이심전심이다.
6. 일심: 건강한 교회는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된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면 안 된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 성령님의 탄식을 공감하는 것이 믿음이다.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성경말씀을 잘 가르치고 전해야 된다. 한마음으로 힘써 마귀와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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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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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우리에게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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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과 그 곁에서 사랑스럽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그들 곁에 선 목자들과 여러 동물들, 그리고 각자 황금과 유향, 몰약 등의 예물을 들고 경건하게 서 있는 세 명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요즘은 교회나 성당, 또는 호텔 로비에 이런 조형물을 만들어 놓은 곳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올 겨울에 개봉해서 많은 성도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영화 <저니 투 베들레헴>의 하이라이트 장면도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인 헤롯왕의 아들 안티파테르가 성탄절의 밤에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마리아, 요셉, 동방박사들과 마주치는 이 장면은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던 이 영화의 백미였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마굿간의 모습을 후대에 누가 재현해서 성탄을 기리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이 되면 이 형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돌아보고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는지 아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분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92년 ‘타임’지는 지난 천 년간 가장 중요한 10대 인물을 선정하면서 종교인으로서는 종교개혁을 주도한 독일의 마틴 루터와 함께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코를 선정했습니다. 같이 선정된 발명가 구텐베르크나 탐험가 콜롬버스, 과학자 갈릴레오 갈레이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에 비해서 대중적인 지명도가 크지 않았던 그가 이름을 올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의 삶 그 자체가 복음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삶의 모델로 삼아 기쁨으로 그분을 본받아 살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는 삶을 권했습니다.
프란체스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성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 되시기 위해 아기로 태어나신 성육신 사건에 감동받아 그는 성탄절을 특별히 엄숙하게 기념했습니다. 1223년 그레치오 마을에서는 베들레헴의 첫 크리스마스를 재현해 마구간, 짚, 소와 나귀를 마련하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탄의 의미를 나눴습니다. 그는 성육신의 겸손을 따라 자신의 삶에서도 철저한 가난을 실천하며, 가난 속에서 오히려 기쁨과 힘을 발견했습니다. 저도 2022년과 2023년에 아시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굿간 형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 교회의 다음세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흰색 도자기로 제작된 마굿간 형상 세트를 직접 구입해서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가난을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마음의 자세로 이해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겪어도 인내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통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심한 병고를 겪으면서도 그는 “주님, 이 모든 고통에 감사드립니다. 원하신다면 더 많은 고통을 허락하셔도 좋습니다.”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마구간의 크리스마스를 재현한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일깨웠습니다. 이후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구유와 아기 예수상을 집과 교회에 두는 관습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마굿간의 아기 예수를 떠올리며, 그 가난한 왕을 따라 사는 거룩하고 소박한 삶의 열망을 점검해야 합니다.
프란체스코는 단순히 말로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실천하며 복음서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2024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혼돈과 변혁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구원하시는 능력과 세상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공의에 대해서 알려주고 따라가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다음세대가 이 시대를 살리는 오늘날의 작은 예수로 설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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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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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스마트폰 중독을 바로 알고 지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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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러 중고등부 집회와 상담을 하면서 스마트폰 중독이 무려 95%가 넘었다. 충격이다. 스마트폰 지도만 잘해도 청소년들의 예배와 공부와 미래는 잘 지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부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가족부·교육부가 2014에 발표한 것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인터넷중독보다는 스마트폰 과의존이 더 심각한 모습을 보인다. 스마트폰은 연령이 낮아질수록 더 높은 중독의 경향성을 보인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독 위험군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다른 연령보다 청소년이 스마트폰 중독 위험군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1) 스마트폰의 피해가 너무 크다. 스마트폰은 전자파로 뇌, 특히 전두엽의 시냅스를 70% 가까이 석화하거나 죽인다. 그래서, 학습이나 감각이나 공감 기능, 절제와 바른 선택 기능, 행복을 느끼는 기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스마트폰의 전자파로 인하여 전두엽의 시냅스가 2/3정도나 굳거나 죽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치매증후군이 생긴다. 성중독이 70%나 공동질환으로 생긴다. 거기다가 책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예배드리며 설교를 이해하는 기능이 최소 70%-95% 가까이 없어진다.
2) 스마트폰 3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부모만 지도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을 조절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가정, 교회, 학교, 국가 4군데서 같이 규칙을 제정하여야 한다. 협력하여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여야 한다. 스마트폰 사용하지 않기 서명 운동을 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해악을 더 정확하게 미디어로도 알리고 그에 따른 협의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부모와 교회 지도자가 전문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일찍 그냥 폰을 주는 건 자녀를 다 망치게 만드는 나쁜 일이다. 하지만 그냥 일방적으로 안 된다고 하는 방식도 자녀에게 상처가 되거나 거절감을 느낄 수 있다. 《중학생 뇌가 달라졌다》책을 통해서 부모와 교회가 아이들과 같이 토론하고 협의하여 규칙을 같이 정하는 협의 문화로 지도하자. 개인pc로 전환하는 것이나, 사용 차단 앱을 쓴다든가, 아예 자기관리 기능이 70% 넘을 때까지 주지 않는 방법이 좋다. 최대 빨리는 중학교 늦게는 고3 이후가 좋다. 학교나 교회에서 부모가 스마트폰을 쓰도록 오히려 알림과 교육을 하는 것도 협력 없이 잘못된 사용을 부추기는 것 중에 하나이다.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3요소를 부모와 교회 지도자와 학교 교사들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 ① 조절실패(Self-control failure)이다. 스마트폰을 없이 생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이다. ② 현저성(Salience)이다. 개인 삶에서 폰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집착과 관심이 두드러지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③ 문제적 결과(Serious consequences)이다. 지나친 폰 사용이나 잘못된 폰 사용으로 인해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대인관계적, 사회적, 영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하는데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 불안과 스트레스를 제거해 주자. 스트레스와 불안 관리와 해결이 스마트폰 중독해결에 중요한 요인이다. 십대 우울증이 2.5배나 증가하는 원인이 ‘스마트폰 중독’때문이다. 이제 스마트폰 중독만 잘 지도하고 해결해도 교육과 예배의 70%는 이상을 다 한 것 같다고 할 만큼 스마트폰 중독은 청소년 삶에 치명적이다. 신앙에도 치명적이다. 교회와 부모와 상담가들이 비상을 걸고 먼저 노력하고 법으로 필요한 것도 나라에 정책 건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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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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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교육나침반] 온세대와 함께 복음을 놀이하는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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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구하고자,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중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가장 어둡고 죄악 가득한 나무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빛나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죄와 고통 가득한 저주의 자리로 급강하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이신 그 분의 첫걸음은 급락하는 포물선을 따라 인간이 되는 것부터였습니다.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후에,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십자가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결코 성육신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의 피부 아래에는 인간의 뼈와 장기가 있었으며, 인간의 혈관을 따라 피가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하기 위해, 우리와 완전히 같은 본질을 입는 고통을 선택하셨습니다. 구유로의 낮아짐이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는 구유로부터 계속 아래로 떨어지는 그 길에서 마침내 십자가까지 도달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번 성탄절에, 이 놀라운 복음을 온세대가 함께 감탄하며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꼭 마련하길 원합니다. [복음놀이리부트50]의 40번부터 45번의 내용은 온세대가 함께 성탄의 복음을 경험할 수 있는 복음놀이입니다. 복음색깔 탁구공과 검은색 종이컵을 이용해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고, 온세대 교회공동체가 함께 전하며,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가고, 큰 회사에 취업하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에 기뻐하고 감탄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과 다른 것에 기뻐하고 감탄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날마다 어떤 환경속에서도 변함없이 기뻐하는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하며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부활생명으로 새사람이 되어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나는 빛의 갑옷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올해 성탄절에는 온세대, 온성도가 함께 복음의 기쁜소식을 말로만 듣지말고, 온 몸으로 놀이하며,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상처입고 주저앉은 수많은 다음세대와 부모들이 복음의 능력으로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여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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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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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부이치치 목사, “교회가 사교 모임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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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없는 인생(Life Without Limbs)’의 대표인 호주의 닉 부이치치 목사가 요즘의 교회가 본질을 잃은 채 사교 모임으로 전락했다고 쓴소리 했다. 최근 미국의 한 기독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서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는 컨트리클럽이나 사교 모임과 더 비슷해졌다”며 2000년대 초반 미국 교회가 젊은 세대를 교회로 이끌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중심의 접근 방식을 택한 것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미국의 많은 교회가 복음에는 아주 조금 관심을 두고 오락과 재미, 소통에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며 “호주의 어떤 교회들은 청소년 담당 목사가 베이비시터로 전락하기도 했다”고 비판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락과 재미 등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에 무게를 두다 보니 본질에 소흘해져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됐다는 것. 복음 전파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가 다음세대를 제자로 양성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또 그로 인해 휴대전화 등 미디어 중독이나 잘못된 성인식 등 사회 문제가 심화됐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부이치치 목사는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는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보호를 잃을 위험이 있다. 우리는 단결해야 하고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며 교회와 기독교인이 회개와 책임, 연합 등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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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