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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자녀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들에게
    다음세대를 양육한다는 것이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매년 연말마다 교사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는 교회학교 교사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교회에서의 교사는 그만둘 수라도 있죠. 가정의 부모들은 그만둘 수도 없는 육아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오늘은 그런 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지금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실 거예요. “우리 애가 어느 날 갑자기 쑥 좀 안 크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제가 밥을 차리겠습니다!” “오늘 피곤하시죠? 제가 아침을 차려놨습니다.” “오늘은 양식이 좋으시죠? 얼른 일어나 드세요.” 이런 날이 오길 바라는 부모들이 있어요. “아휴! 저게 언제 커서 사람 노릇을 하려고 저러나?” “언제까지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나?” “언제까지 내가 돌봐줘야 하나?” “언제쯤이면, ‘어머니! 월급 받아 왔습니다. 빨간 내복입니다.’ 이런 날은 언제 오나?” 이런 분들이 계실 거예요. 아이들 키우는 이 시간이 마치 아무 의미 없고 그냥 힘들기만한 시간 같아요.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기억을 한번 되짚어보세요. 애들이 어렸을 때 어떻게 생각했나요? 우리가 “이거 여기서 안 크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이 너무 예쁜데! 요거 지나면 어떡하지?” 그랬던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너무 예뻐서 “이거 크면 안 되는데!” “요거 커서 시집 장가 가버리면 이거 아쉬워서 어떡하나?” 하는 날들이 있었단 말이에요. 지금 애들 옛날 사진 보세요. “야! 이렇게 예뻤는데! 내가 왜 그때는 얘를 그렇게 예뻐하지 못하고 키우기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던가?” 후회가 되시잖아요? 여러분, 그 시간이 너무 힘들고, 잠 못 자고, 나 못 먹고 아이 먹여야 하고, 나 못 쉬고 아이 챙기던 그 시간들이 그때는 마치 불필요한 시간 같고, 불행같이 여겨졌지만,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이 정말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시간이었고, 또 내가 이 아이들 때문에 성숙해지고, 내가 부모가 되어 가면서 하나님 마음을 알아갔던 그 시간들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고난이라는 시간이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잘못 행했대요. 왜요?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고 그냥 나만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땐 어렸으니까요. “하나님! 저 힘들어요. 하나님! 저 지금 귀찮아요. 하나님! 저 죽겠어요. 그런데 왜 자꾸 말씀을 주세요?” 그 말씀을 내가 지킬 의지도, 능력도 없었어요. 그런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내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새로워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었단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무엇을 깨달았나요? 이어지는 6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시편 119:68)  그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선한 것 같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힘든 말씀을 주시나?” “왜 이렇게 벅찬 말씀을 주시나?” 그런데 이제 고난 가운데 내가 그 터널을 지나며 내가 성숙해지고, 내가 치유되고, 내가 회복되고 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은 선을 행하시는 분이구나! 주의 말씀이 내게 얼마나 양약이 되는지를 깨닫고 나니까 이제는 더 원하게 되는 거예요.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주님! 더 주세요! 더 주세요! 더 주세요!” 여러분, 말씀을 더 원하고, 말씀을 더 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는 찾아왔는데 지금 애타게 기도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의 시간이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시간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깨닫고, 그분을 찬양하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분들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것을 한번 고민해 보시길 바래요. “이 고난의 시기, 이 아픔의 시기에 과연 하나님은 내게 어떤 고백을 찾으실까?” 이 시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찾으시는 고백, 이 고난의 때에 내가 드릴 고백은 무엇인지를 여러분, 꼭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래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 시간을 지나서 내가 다시 도전할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고난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재도전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재도전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과연 다시 도전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릴 과제가 무엇인지를 꼭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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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1-10
  • [다음세대칼럼] 다음세대를 세우라
    역사학자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를 로마라고 한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3개 대륙에 걸쳐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나 통치체제, 도로와 사회기반이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1,000여년을 흥왕하던 로마가 어느 시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멸망했다. 역사학자들의 오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이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찾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가 로마 멸망 원인을 ‘인구감소’라고 하였다. 로마가 제국이 되어 당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로마인들은 안락한 삶을 살았다.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아서 육아하는 일을 꺼리게 되었고, 쾌락에 빠져들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을 등한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점차 노동력이 줄어들게 되었고, 노예들로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에 나갈 사람이 줄어들자 당시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국가가 강력하게 출산정책을 썼다. 결혼을 의무화하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그리고 38세 이상 독신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었다. 게다가 3자녀 이상의 가정에 큰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저출산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로마인의 비율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야만인이었던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하게 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나라가 이런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실제로 통계청 발표를 보면 상황이 심각하다. ‘2023년 출생·사망통계(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명으로 전년(24만9200명)보다 1만9200명(7.7%↓) 감소했다. 출생아 수는 2015년 이후 8년 연속으로 줄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2015년(0.7%)을 제외하고 매년 감소 추세를 보인 것으로, 2013년 43만6000명을 넘던 출생아 수는 감소세를 지속해 10년만에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합계 출산율은 0.72명이다. 2022년 0.78명으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으나, 1년 만에 0.06명 감소해 ‘바닥의 바닥’을 보여준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인구절벽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노년 세대가 급증하게 될 것이고, 출산율은 점점 더 떨어져서 노령화가 가속될 것이다. 결국, 각종 경고가 말해주듯 나라가 소멸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 같아서 보통 걱정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상황은 이것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가 지난 10년 동안 20%가 감소했는데, 교회의 다음 세대는 35%가 감소했다는 통계를 접한 적이 있다. 무려 15%나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25년 뒤인 2050년에 21세 이하의 연령층은 총인구가 1485만 명에서 932만 명으로 오늘과 비교해서 37%가 감소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21세 이하 교인은 318만 명에서 111만 명으로 무려 65%가 감소할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25년 뒤에 교회 내의 21세 이하의 교인은 무려 2/3가 줄어들 것이다. 요즘 필자는 25년 뒤의 한국교회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우선 대부분의 교회가 노인들만 남게 될 것이다. 교회학교가 있는 교회가 열 교회 중에 두 세개 정도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당이 텅 빈 채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주변에서 문 닫는 교회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될 것이고, 교회 건물이 팔려서 다른 용도로 쓰이는 교회도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도 여전히 오늘처럼 좋은 교회로 든든히 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분명하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을 잘하는 것이다. 교회학교가 감소하지 않게 지켜내고, 가정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다음 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는 교육환경을 보면 안타깝다. 우리 자녀들은 한 주 168시간 동안 세상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다. SNS나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과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 정보와 지식에 노출되어 있다. 단지 1시간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는다. 1/168의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켜갈 수 있나? 우리 부모들이 나서야 한다. 집에서 부지런히 말씀을 듣게 해주어야 한다. 가정예배, 베갯머리교육, 밥상머리교육, 자녀와 대화 등으로 말씀을 듣게 해 주어야 한다. 신명기 6장은 자녀들이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메주자(문설주)라는 것을 달아놓아서 자녀들이 집에서 나갈 때 말씀을 읽고 나가게 했다. 그리고 손과 머리에 테필린이라는 것을 부착하게 해서 어디에 있든지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부모들이 말씀 교육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면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 보충해 준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당한다고, 신앙교육을 위해 과외하는 부모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교회의 소망은 다음 세대이다. 이 악하고 패역한 세상 속에서 우리 자녀들과 교회의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양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행여라도 우리 다음 세대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말씀으로 잘 세워가는 한해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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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신앙교육나침반] 십계명 복음놀이로 온세대 믿음의 가정을 일으켜세우다!
    2025년 1월에는 향기나무 복음놀이코디네이터과정이 열립니다. 본 과정을 수료한 이들은 교회와 다양한 사역 현장에서 [향기나무 복음놀이터] 프로그램을 통해서, 온세대 믿음의 가정을 복음의 능력으로 일으켜세웁니다. 올해 첫 번째 복음놀이코디네이터과정의 주제는 “열마디 사랑의 외침,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 믿음의 가정에 꼭 필요한 생명의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서문은 다음과 같습니다(출애굽기 20:2).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십계명의 대상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구원받은 백성의 언약관계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를 맺은 자기 백성에게 사랑의 열마디 말씀, 곧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 번째, 믿음의 가정은 십계명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사랑의 관계맺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길 갈망하시며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1-10계명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열마디 외침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백성아! 너희는 십계명을 지킴으로 나와 사랑하자!” 두 번째, 믿음의 가정은 십계명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의 사명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보여줍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자녀의 인생 설명서입니다. 세 번째, 믿음의 가정은 십계명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받을 아무 자격이 없는 나를 구원하셨다는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동시에,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2025년에 다음의 교회를 주목해주십시오. 이 교회에는 믿음의 가정을 복음의 능력으로 일으켜세울 수 있는 ‘온세대 복음놀이 전문 코디네이터’가 있습니다. 가음정교회(고신), 고성중앙교회(합동), 구미상모교회(합동), 군산성광교회(기장), 대구대일교회(고신), 동래제일교회(고신), 더향상교회(고신), 바이탈교회(합신), 부산명성교회(백석), 부산중앙교회(합동), 부산효광교회(고신), 삼척소명교회(합동), 새언약교회(고신), 서울중앙교회(고신), 서도교회(고신), 서울한신교회(기장), 수원고색평강교회(백석), 시냇가에심은교회(고신), 양산교회(고신), 양양중앙교회(합동), 여량교회(합동), 연지교회(고신), 오색교회(합동), 울산성산교회(고신), 은평시민교회(고신), 은항교회(고신), 정선중앙교회(합동), 지구촌교회(합신), 푸른숲성산교회(기장), 흥덕향상교회(고신), 향상교회(고신), 해운대제일교회(합동) 담임목사님, 사모님, 부목사님, 전도사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등 다양한 직분, 다양한 연령,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소망을 품고 본 과정에 참여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다음세대 가정을 품자! 지키자! 보존하자!”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한국교회를 넘어 전 세계 교회의 열망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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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호감도는 여전히 꼴찌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원장 신승민 목사, 이하 기사연)가 지난 6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사회문제 인식조사’를 발표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10월 기독교인 1058명, 비기독교인 1094명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다.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종교 호감도에서는 여전히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52.9%) 천주교(48.5%) 원불교(17.9%) 개신교(14.3%) 천도교(10.1%) 이슬람(5.9%) 샤머니즘(4%) 순으로 호감을 느낀다고 응답해 주요 4대 종교중 꼴찌를 기록했다. 호감도가 낮은 이유는 지나친 전도(31.8%) 부패(25.9%) 차별과 혐오 발언(13.3%) 독선(10.9%) 비합리성(7.9%) 사회적 책임 결여(6.5%) 비민주성(2.4%)으로 조사됐다. 비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좋은 교회’의 특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봉사와 구제’(42.5%) ‘경건한 예배와 말씀’(12.8%) ‘서로 돌봄’(9.2%)이라고 응답했다. 기독교인의 ‘탈교회적’ 성향도 두드러졌다. ‘종교 단체에 소속하지 않아도 종교인으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개신교인 절반 이상(58.9%)이 ‘그렇다’고 답했다. 또한 기독교인 10명 중 3명(30.9%)은 출석하는 교회가 없는 ‘가나안 성도’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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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1-10
  • 막말 퍼레이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전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는 가운데, 일부 이단성 논란에 휩싸인 인사들의 막말이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씨는 지난 12월 29일 긴급 생방송을 통해 “이번에 발생한 무안공항 사고는 주사파, 종북좌파 등 이런 문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영적으로 보면 사탄이 오늘 비행기 사고를 일으켰는데 이것은 물론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 주요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다락방 류광수 씨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가르켜 “나라가 미쳐서 항공기 추락과 같은 재앙이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두 사람의 이 같은 발언이 세상에 공개되자, 누리꾼들은 “이제는 크게 놀랍지도 않다”며 다만 이 사람들이 발언들이 한국교회의 호감도를 추락시킬 것 같아 걱정된다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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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1-10
  • 무안 여객기 참사에 통합 교단 교인 7명 희생
    예장통합 총회 사회봉사부(부장 김선우)가 여객기 참사 유가족 지원을 위해 지역노회에 확인한 결과 순천남노회 소속 교인 2명, 전남노회 소속 교인 4명, 광주노회 소속 교인 1명이 이번 여객기 사고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특히 순천남노회 교인 2명은 노회 부노회장을 역임한 은퇴장로 부부인 것으로 전해졌다. 총회 사회봉사부는 여객기 참사 긴급구호금 500만원으로 지역 목포노회를 통해 유가족과 자원봉사자 물품을 지원했고, 추후 유가족을 위한 위로와 애도 기도회를 준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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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1-10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좌파 공산주의자가 된 이재복 목사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 중인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북한 공작금 수수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모 목사와 10여 차례 통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모 목사는 북한공작원 리광진과 접촉했는데, 2015년 4월 쿠알라룸프르에서 미화 1만8900달러의 공작금을 받았고, 또 다른 B목사와 함께 북한 공작원과 회합, 통신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3대 세습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B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12월 기소되어 2017년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앞의 모 목사는 북한 공작금 관련 기소가 늦어져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3. 1. 25). 이와 같은 기독교계의 공산주의자는 일제하에서부터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 난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도 적지 않았다. 남로당을 지지하거나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경우가 그것이다. 해방 이후 남로당의 파괴 공작은 엄청났다. 1946년의 대구 철도의 10월 항쟁, 1947년 3월 제주도4.3사건, 1948년 8월의 여수14연대 반란사건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박헌영은 신변위협 때문에 황해도 해주로 가서 은거하였고, 지령으로 이런 사건을 조종했다. 이 조종을 받아 남한에서 이 사건을 수행한 이가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李載馥, 1903-1949)이었다. 그런데 그는,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출신의 목사였다. 그는 이재봉(李再鳳)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한 목사였다.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마산 재건교회 지도자 주상수, 반공목사 박병훈과 동기였다. 박윤식에 의하면, 이재복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597번지에서 이유업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하던 중 도일하여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공부했다. 도시샤라는 교명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만든 결사체’라는 뜻인데, 이 학교의 교훈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였다. 정대위 윤성범 김태묵 서남동 등 많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했고, 시인 윤동주나 정지용도 이 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재복의 수학 기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 공부한 한국인들과 교우했을 것이다. 1943년에는 평양 출신 공지길을 만나 혼인했다. 공지길은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가 교토에서 산파 공부를 하던 중 이재복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체류하던 이재복은 해방을 앞두고 귀국하여 영천읍내의 영천교회(지금의 영천제일교회)에서 8개월 간(1945. 2.15-10.14)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후 좌익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인민당에 입당하였고, 경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군사부장에 오르게 된다. 박헌영(1900~1956)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대구 10.1폭동 이후에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지하로 잠적했고, 이후 제주4.3 사건, 여수 14연대(반란)사건까지 주도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49년 12월 18일 새벽 3시경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 377번지에서 체포되었다. 이곳은 그의 세 번째 부인 집이었다. 당시 남로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은신처 확보를 위해 본 부인 외에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재복은 박영근(朴永根), 오일서(吳一緖), 이근민(李根民), 이일도(李一道) 등과 같은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가명이나 은폐가 이재복의 굴절된 삶의 방식을 반영한다. 여기서도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거짓, 기만, 은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가정을 파괴하거나 가족관계까지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김창룡은 그에게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겠느냐”며 끝내 전향을 거부하였고, 1949년 5월 26일 서울 인근 수색에서 총살당했다. 김창룡은 이재복이 전직 목사인 점을 감안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 남한의 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당신이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는 것이다”라고 설득하자 일주일간 버티던 그는 500여 명의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명단 제공에 의해 군 내부의 공산당원 제거로 6.25 전쟁 초기에 군부 내의 봉기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남침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삼일동안 서울에 체류한 것은 봉기를 기대한 것이었으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삼일이 남한과 유엔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호기가 된 것이다. 봉기의 불발로 격분한 김일성은 결국 박헌영을 언더우드와 접선한 미제 간첩으로 몰아 총살한 것이다. 이때가 1956년 7월 19일이었다. 이때 감리교의 현순(玄楯) 목사 딸 현 엘리스는 박헌영의 애인으로 북한 외무성에 근무했으나 박헌영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재복이 좌익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그의 내면에 기독교와 공산주의, 양자의 충돌이 없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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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1-10
  • [목회자칼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시골에 땅을 샀습니다. 한 평에 150만원을 주고 사서 조그마한 공장을 짓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너무 기대하고 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땅이 한 평에 100만원도 안 하는 땅인데 나는 150만원이나 주고 땅을 샀던 것입니다. 옆집에서 저에게 하는 말이 “아이고 도시 양반. 속아서 땅을 샀구먼?” 그때 저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작은 회사이지만 이 땅이 저희 회사에 정말 필요한 땅이었습니다. 정말 저는 잘 샀다고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땅을 살 때 사용가치로 보았지, 교환가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땅에서 회사의 일이 너무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와 글을 읽는 여러분은 교환가치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이 땅을 교환가치로만 볼 때는 비싼 땅이지만, 저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필요한 땅, 사용하기에 너무 좋은 땅인 것이죠. 아니, 한 평에 200만원을 달라고 해도 저였다면 오케이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환가치로 나의 인생을 보면 나이가 들었을 때 ‘열심히 살았는데 집 한 채밖에, 아니 집 한 채도 없는 인생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무릎뼈가 닳고 허리가 아플 지경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의 인생은 과연 몇 점일까?’하고 허무함을 느끼며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가치로 인생을 볼 때는 ‘얼마나 멋지고 최선을 다한 인생인가? 얼마나 열심히 사용했으면 더 쓰이지 못할 만큼 사용한, 멋진 노인의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을, 교회 어르신들을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요? 저희 교회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근면성이 얼마나 사용가치 있는가?’, 지금도 창조적인 생각으로 ‘놀면 뭐하나’, ‘쉬엄쉬엄 일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일거리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해주니 고맙지’. 이와 같은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반면 저희 교회 청년들에게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내 값어치가 한 달 200만원 밖에 안되나요?’,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250만원이라니? 회사 다닐 맛이 안 나요’. 젊은이들에게는 이 부분에서 갈등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교환가치의 관점으로만 인생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는지요. 나의 갈등은 인생을 사용가치로 볼 때 나오는가요? 교환가치로 볼 때 나오는가요? 여기에는 객관적인 생각과 주관적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치관도 객관적 가치관, 주관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꼭 가치 평가를 일반적인 평가로, 일반적인 잣대로,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요? 몇 년 전에 기억에 남는 폐업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배를 드려달라고 요청을 하신 장로님, 권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목사님, 이제까지 많은 개업 예배를 드려 오셨지만 폐업 예배를 드리러 오신 적은 없으시죠? 저희가 35년간 세탁업을 했는데 이제 힘도 없고 해서 폐업을 하고자 합니다. 오셔서 예배 인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가고 말고요.”라고 답하고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바깥에 손님이 옷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잠깐 인사를 주고받으시는데, “이제 폐업하신다면서요?” “네. 그동안 저희 가게를 이용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네. 이제 저희들이 불편해서 어떡하죠?”라며 대화를 나누는 정다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이 노부부는 건강하게, 재미있게 사용가치를 잘 사용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저 기억이 제게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가치관 때문에 불행합니까? 아니면 사용가치 때문에 행복합니까? 누구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네” 하고 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사용가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 아닐까요? 늦게 선교에 눈을 떴다며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선교에 열정을 쏟고 계신 집사님, 맡은 교회 식당 봉사를 그 연약한 중에도 웃으면서 감당하시는 권사님, 말없이 뒤에서 기도하면서 격려해주시는 여전도회 집사님. 너무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2025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올 한 해는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의 자녀에게 너무 고맙고, 나의 가족에게 너무 사랑하고, 우리 교인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 지금까지 사용가치로 봐주시고 사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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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교회법 특강] 교회법(法)은 세상 법(法)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정치’ ‘교회질서’라는 말은 흔히 ‘교회법’으로도 불린다. 한국교회 초창기는 ‘규칙’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법이라는 말이 권위와 순종을 전제하기에 민주주의 시대에는 맞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교회는 법과 질서보다 은혜와 사랑이 지배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의 권위를 변호하기 위할 뿐, 세상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이런 용어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를 구시대 유물이라며 이 시대에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의 법은 역사나 문화의 요청에 따라 개념이 변천하지만, 교회의 법은 시대 변천에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해야 한다. ‘교회법’이란 무엇일까? ‘교회’와 ‘법’이라는 말의 합성어다. 많은 사람이 이 합성을 모순이라고 여겼다. 독일의 법학자이자 교회법학자인 루돌프 쇰(1841-1917)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이 어울리지 않는 합성을 비판한 이유는 교회의 본질은 영적이나, 법의 본질은 세상적이기에 법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본질과 상충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으로 부패하면서 교회 안에 법과 질서가 서서히 들어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의 법과 질서는 성경적이지 않고 교회가 부패함으로 나중에 도입된 것이며 현시대에 뒤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법’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 오해이다. ‘교회법’이라고 할 때 ‘법’은 법 이전에 ‘권리’를 가리킨다. 신자는 누구나 교회에서 법적 관계, 법적 질서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 이 ‘법’(권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義)라는 ‘특별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義)의 은혜를 받은 의인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 은혜로 회복된 의와 화평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로마서 5장 1절이 이 권리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신칭의의 은혜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 이웃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신자의 권리는 그의 범죄에 의해서도 박탈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질서를 통해 화평을 이루시는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이 점에서 세상 법과 교회법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세상의 법과 질서도 ‘의’(정의)를 말하지만 정죄와 형벌을 목표로 한다. 반면 교회의 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화평을 누리게 하는 목표를 가진다. 교회법은 법이나 규정, 시벌(施罰)을 넘어 회개와 용서, 화평이 그 목표다. 교회법의 목적은 목사가 설교하는 화평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당회는 결코 이혼을 권할 수 없다. 도리어 화평과 희생과 자기부인을 권해야 한다. 모든 교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최종 목적은 화평이다. 시벌의 목적도 회개하여 용서받고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화평할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범죄한 자를 고소(고발)할 때에 먼저 '권고'에서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다. 교회에 있는 모든 직분의 봉사 역시 바로 이 목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와 성례 시행, 나아가 장로의 다스림과 심방, 집사의 구제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있으며, 노회의 시찰(視察) 역시 회중이 누려야 할 화평의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법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선사받은 화평의 권리를 보장하는 목적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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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0
  • [변종문 목사] 칼빈주의 오대 강령: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의 선언
    칼빈주의 오대 강령(TULIP)은 1618-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아르미니안주의에 반박하며 확립된 교리로서, 이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며,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첫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구원을 받을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완전한 무능력에 놓여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선함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임을 깨닫게 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로마서 3:10-11). 둘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조건 없이 선택하셨음을 강조한다.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과 무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에 근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1:4). 셋째,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인류를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을 위한 실제적이고 확실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선택받은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적용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 넷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회개와 믿음으로 반드시 끌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인간의 저항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역사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드러낸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6:37). 다섯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택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영원히 구원을 보장받는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각 항목이 논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완전한 구원 교리로 작동한다. 전적 타락은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하며,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주권성과 확실성을 보여준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성취됨을 선언하고, 성도의 견인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성을 보장한다. 이 다섯 강령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한다. 이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확신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높이는 교리로 작용한다.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를 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핵심으로서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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