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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교회대수선 및 리모델링에 대한 건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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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건설경기 부진에의해 신축보다는 기존시설을 성능개선하여 교회공간을 재배치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성능개선에는 두가지 법적 사항이 다르게 적용된다 이 차이와 내용을 알면 대수선을 할지, 아니면 공간의 재배치를 할것인지가 결정된다. 대수선행위는 사전에 건축허가를 득해야된다 대수선 행위는 단순히 공간을 재배치하는 것을 초함해서 건축물의 주요 구조부재를 해체하거나 변경하는 행위이다
그 내용은 주계단을 해체하거나 변경하는 행위이며 구조벽체를 해체하거나 변경하는 행위, 기둥의 이동이나 해체등이 대수선 행위이다. 또 기존의 층수를 더하거나 감하는 행위, 주요보를 이동하거나 변경하는 행위도 대수선에 포함된다. 대수선에 포함이되면 건축허가를 득하고 공사를 해야한다.
리모델링(공간재배치)은 노후화된 내부의 성능개선을 위해 마감과 비내력벽체등을 변경하거나 재배치하는 행위이며 이경우에는 인허가 행위 없이 신고사항이다 대수선 행위도 리모델링 범위에 들어가지만 건물의 주요구조체를 변경하는 차이이다. 대수선행위는 건축의 동선이나 내부공간을 전반적으로 고치는 행위이며 리모델링은 주요 구조부위는 그대로 존치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대수선 행위시 주요 건축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건축물의 구조안전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었다. 내진기준이 과거와 달리 강화되었고 기둥과 기둥사이거리가 20m 이상일 경우 건축구조심의를 득해야한다. 또 건축물외벽에서 3미터 이상 돌출되어진 구조물도 구조심의 대상이 된다. 내력벽, 기둥, 피난계단. 지불틀변경등의 행위는 심의 대상은 아니고 허가 대상이다.
둘째, 소방법이 강화되었다. 화재시에 스프링쿨러가 과거보다 많이 설치하게 되어있다. 또 천정내부가 1.5미터 이상이면 상하향식 스프링쿨러를 설치해야한다. 이것을 만족시키려면 천정공사는 전체다 이루어 져야하며 소방용수의 증대로 저수로가 커져야한다. 이런 요인은 대수선 공사비가 증대되는 요인이 되고있다.
셋째, 피난기준이 강화되어있다. 교회내부에 화재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될경우 일시에 많은 인원이 대피하려면 계단의 설치기준이 이에 대응하게 설치되어야한다. 최근 개정된 피난법은 주계단과 피난계단을 건물 대각선 길이의 1/3 이상 띄어서 설치하게 되어있다. 계단의 설치기준은 바닥면적이 60평이상일 경우 주계단과 피난계단을 설치해야한다. 그리고 계단과 계단사이를 이격하여 배치해야 되며 반드시 계단과 계단은 복도로 연결해야한다. 이 사항은 공간의 동선과 연계되는 내용으로 대수선 공사시 중요한 체크 사항이다.
넷째, 단열재의 설치기준과 에너지 절약설계 내용도 현행법기준에 맞게 설치해야한다. 과거 건축된 건축물은 지금에 비해 단열재가 효율이 많이 낮게 되어있어 외벽의 단열재 재배치 공사가 이루어져야한다. 에너지 절약설계의 경우 일정규모이상의 면적 대수선 행위시에는 대상이되며 별도의 전문 업체가 설계해야한다.
대수선, 리모델링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인허가나 설계의 내용이 다르다. 따라서 그범위부터 선정해야하며 대수선은 안전에 대한 사항이 수반되어지므로 진행전에 기준 건축물에 대한 구조안전진단을 선행해야한다. 구조기술사가 기둥이나 보등에 대한 안전진한후 대수선의 구체적볌위가 결정되어진다. 사전에 이런 내용들을 미리 전문가의 조언과 컨설팅을 받고 시행해야 리스크와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 단순히 인테리어의 개념뿐아니라 건축법과 인허가 안전진단등이 결부되어지므로 폭넓은 분석이 전제 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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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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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씨앗이 자라듯, 다음세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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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이다. 교회의 미래는 자라나는 세대 안에서 어떻게 신앙의 씨앗이 뿌려지고, 또 어떤 열매로 맺히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두 가지 비유, 곧 네 가지 밭의 비유와 씨가 자라는 비유는 다음 세대 사역의 본질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말씀 전파가 하나님 나라의 핵심
첫 번째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 말씀 전파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 4:26)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땅”은 세상을 가리킨다. 오늘의 다음세대 역시 수많은 정보와 가치관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스마트폰과 미디어 문화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경험이다. 교회와 가정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씨앗은 반드시 생명력으로 싹트게 될 것이다.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신앙
두 번째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가 시간을 두고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되”(막 4:27)라고 말한다. 신앙은 단번에 성숙하지 않다. 아브라함이 25년 만에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처럼, 모세가 80세에 비로소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신앙은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늘 “빨리빨리” 문화 속에 조급하다. 교회 안에서도 청소년들이 곧바로 믿음의 거목이 되기를 바라며 서두르곤 한다.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신앙도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와 교회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청소년들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과정조차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음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와 열매
세 번째 공통점은 신앙의 열매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점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지만, 씨가 자라는 과정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막 4:28)라는 말씀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강조한다.
다음세대를 향한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열심, 교사의 수고, 교회의 프로그램이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열매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씨앗을 충실히 뿌리고, 성령께서 자라나게 하심을 믿으며 맡기는 것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열매를 거두신다.
다음세대를 향한 교회의 과제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다음세대를 위한 사역의 본질은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씀을 뿌리는 일이다. 또한, 그 말씀이 뿌리내리고 자라도록 인내하며 기다리는 공동체의 사랑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교회는 충실히 말씀을 전하는 농부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위기를 말한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간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시대든,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다시금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가 힘을 합쳐 다음세대의 마음 밭에 말씀을 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시고, 풍성한 열매로 거두실 것이다.
씨앗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 뿌려진 작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다음세대의 가슴 속에서 싹트고 자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교회와 부모, 교사와 성도 모두가 말씀을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다음세대를 품을 때, 한국 교회의 미래는 희망으로 채워질 것이다.
“씨가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다.” 이 고백이 다음세대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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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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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다음세대 교육의 핵심, 5C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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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가 다음세대로 신앙전승이 잘 이루어질지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대안 마련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성민교회로도 많은 연락이 옵니다. 하지만 단기적인 미봉책으로 교회학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리더들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을 이해하고 다음세대를 만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교육학자 하워드 핸드릭스는 그의 저서 '가르치는 것 이상의 가르침(Teaching to Change Lives)'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5가지 원칙을 5C로 강조했습니다. 이는 확신(Conviction), 교통(Communication), 대면(Confrontation), 책임(Commitment), 자신감(Confidence)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이 원칙들은 교회 교육에 그대로 적용되는 핵심 개념들입니다.
1. 확신 (Conviction)
확신은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깊이 있는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됩니다. 확신을 가진 교사는 학생들에게 배우는 내용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교회교육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 실존적인 하나님을 경험한 교사들이 확신 가운데 ‘나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할 때 비로소 생명력과 운동력이 있는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2. 교통 (Communication)
교통은 교사가 학생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학생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핸드릭스는 교통이 '다리'와 같아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신뢰를 쌓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교통은 학생의 필요와 질문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질문을 던지시고 그 질문에 다시 질문을 이어가시는 방법으로 제자들과 문답식 교육을 하셨습니다. 교회교육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나눔입니다.
3. 대면 (Confrontation)
대면은 학생이 자신의 삶에 배운 내용을 적용하도록 도전하고 격려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학생의 태도, 행동, 가치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내용을 너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 학생 스스로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핸드릭스는 이 대면을 통해 학생의 성장이 진정으로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믿음이란 내 삶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맞서는 영적 훈련입니다. 죄의 고리를 끊고 신실한 삶을 살겠다는 분명한 다짐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4. 책임 (Commitment)
책임은 학생이 배운 내용을 삶에 적용하겠다는 의지를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학습을 넘어, 배우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겠다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교사는 학생들이 이러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과정을 함께 지지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합니다. 책임은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인 삶의 변화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맡은 바 자리를 지켜내는 책임이 중요합니다. 주신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책임 있는 모습이 주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5. 자신감 (Confidence)
자신감은 교사가 학생에게 배우는 내용과 그들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핸드릭스는 교사의 역할이 학생들에게 '너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그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신뢰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새로운 도전에 맞서고, 성장하며, 결국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이 5C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핸드릭스는 강조했습니다. 그는 교육이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심오한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5C를 바탕으로 우리의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입체적인 복음의 진수가 전해지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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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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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장애와 노년은 그리 멀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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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가 어느새 꺾이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창문을 넘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이 시기를 사람의 신체나이로 생각한다면 과연 몇 살쯤 될까?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뜨거웠던 청년시기와 40, 50대를 지나 노년을 준비해야 하거나,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가늠해 본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그리고 삶이 지속되는 한, 누구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뜨거웠던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중년시절을 맞이한다. 중년이 되면 영원히 젊을 것 같고 건강할 것 같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개인 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 신체 어딘가 하나둘 고장이 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하여 삶의 영역에서 불편한 부분들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장애라고 부른다. 장애는 장애인들에게만 적용되거나 쓰이는 말이 아니다. 또한 장애는 그리 멀리 있지도 않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장애는 나와 동떨어져 있거나,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며, 장애문제에 관심도 없고, 준비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장애인구는 2023년 12월 기준(보건복지부 장애인등록현황)으로 263만 명으로 대한민국 총인구수의 5.1%를 구성하고 있다.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장애인으로 등록한 숫자일 뿐이다. 여기에 장애인으로 낙인찍히기 싫어서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장애인의 가족들과 이해관계자들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것이다.
또한 장애 발생 원인은 10명 중 8명이 태어난 이후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음을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장애는 그리 멀리 있지도 않고,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단, 본인 스스로가 장애인이 아니기에 멀리 있거나 상관없다고 여길 뿐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65세 노인 인구수는 2024년 12월 기준(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현황 자료)으로 10,256,782명으로, 1년 전에 비해 526,371명이 증가했다. 대한민국은 이미 전체인구수 대비 노인인구수 비율이 20%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노인 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은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장애 발생빈도는 오히려 높아질 것을 암시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실제 지표에서도 전체 등록장애인 중 55.3%인 144만5천782명이 65세 이상이며, 이는 1년 전(53.9%)보다 1.4%포인트 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인은 요즘 초중등학교로 장애인식개선 강의를 나가고 있다. 두리발(부산광역시 장애인콜택시 명칭)을 이용하여 강의를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아직 드물기는 하지만 ‘어르신 유치원’이라는 곳이 존재함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이미 대한민국은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고, 장애인구 중에서도 65세 장애인이 절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니 이 땅에 교회들이 다음 세대라고 불리는 아이들이나 청년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 유치원’이 생긴 것처럼 노인과 장애인에 대해서도 관심을 더 갖고 다시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때가 가장 빠를 수도 있다.
하루하루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되어 장애를 겪거나 사고나 질병으로 이른 시기에 장애를 겪기도 한다. 그러면 심하거나, 심하지 않음을 떠나서 불편함이 찾아온다. 그래서 장애와 노년의 삶은 결코 나와 상관없거나,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임을 인식하고 함께 준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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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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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진정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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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양산미션센터 입당감사예배를 드렸다. 저녁예배 4성전 출석이 궁금했다. 그런데 덕천성전, 화명성전, 금곡 드림센터 출석은 그대로였는데 양산미션센터에 별도로 800명이 출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대마다 때마다 부담을 주시는데, 그 미션을 수행하면 항상 깜짝 선물 같은 역사를 보여주신다. 이에 번개같이 드는 생각이 주께서 양산미션센터를 허락하심이 새로운 전도의 열심을 주심이라고 느꼈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가면 매너리즘에 빠져서 현실에 안주하기가 쉽다. 그러나 포도원의 부흥역사를 보면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주셔서 덕천 찍고 화명 찍고 금곡 찍고 양산 찍고 아프리카 우간다에까지 이르도록 부담을 주셨다.
피곤이 능력이고 부담이 사명이니 이 또한 감사하다. 아이야의 축복을 보면, 마침내 아브라함이 왕성 창대하게 되었다가 끝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이어 이삭, 이삭의 이후로 야곱, 야곱 후에 요셉에게로 축복이 연결되고 이어진다는 것이 또한 큰 축복이다.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죽고 난 뒤에 얼마나 큰 상실감에 빠졌겠는가? 이삭은 늦둥이요 허약한 아들로 마마보이가 틀림없었을 것이다. 마마보이들의 약점은 어머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혼의 원리는 창2:18을 볼 때 부모를 떠나는 것이 시작이다. 떠나지 못하는 것이 정신병, 고착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어머니가 별세한 이후 외로운 나날을 들판에서 저물도록 하나님을 묵상하며 지냈다. 망연자실해서 술에 취하거나, 소일거리 취미, 유튜브에 중독이 되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신앙생활은 눈싸움이다. 바라봄의 법칙이다. 사울은 다윗을 묵상했고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했다. 혼란한 시절 속에서도 요게벳은 갓 낳은 모세의 준수함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초대교회의 담임목사 바나바는 볼썽사나운 관계들을 보지 않고 교회 위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하와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유혹에 지고 말았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늙고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소통의 달인이었다. 어린 도련님에게 예를 갖추고 본분과 충성을 다하였다.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비로소 가장으로서 리더십이 생겼고 어머니를 떠나 리브가로 중심 이동이 되었다. 만남의 축복이 되어 리브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어머니 장례 후에 리브가가 큰 위로가 되었다. 반면에 기도하는 어머니의 품을 떠난 후에 들릴라를 만난 삼손은 실패했다.
외할머니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을 이어받은 디모데는 초대교회의 리더십이 되었다. 아버지를 떠난 이후에 다시 돌아온 탕자는 회복되었다. 포도원의 첫사랑, 덕천성전 이후 청년 화명성전, 중년 드림센터를 지나 양산미션센터는 이삭이 어머니를 여읜 후 아내, 리브가를 만난 것과 같다. 어머니의 큰 사랑 이후에 아내를 만나 새로운 사랑의 신비함으로 나아갔고, 그 리브가는 이후에 아들 야곱의 축복을 연출, 시나리오, 무대소품을 담당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후에 리브가를 만났던 이삭처럼,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세상에서 큰 상실감을 느낄 때에 우리의 진정한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 모든 것이 채워지는 은혜를 맛보아 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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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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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정교분리와 종교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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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간의 화제는 뭐니 해도 ‘정치와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통일교와 신천지 같은 유사종교에서 불교와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정종유착(政宗癒着) 관련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종교단체의 수장들이 압수수색을 받거나 심지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종교탄압(宗敎彈壓)이라는 말들이 안팎으로 터져 나오는 양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종유착을 강조하는 측도 종교탄압을 강조하는 측도 똑같이 내세우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정교분리’입니다.
물론 양자가 이제야 새삼스러운 관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역사 속에서 둘은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아 왔습니다. 그 결과 일종의 법적 결과물을 양산했는데, 현대 헌법들에 그 흔적과 자취를 또렷하게 남겼습니다. “의회는 종교를 세우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미국수정헌법 1조, 1897년). 이를 두고 ‘정교분리’(the Sa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조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이 원리를 제대로 명문화한 국가는 독일입니다. 바이마르공화국헌법(1919)은 일찍이 “국교의 부존재와 종교단체의 설립”이라는 표제 하에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한다.”(137조 1항)라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우리 헌법도 그 영향을 받아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라는 조항을 두었는데, 거기다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문구를 더했습니다(헌법 20조 1, 2항). 왜 그랬을까요?
미국의 수정헌법과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이 국교(國敎)를 부인하는 배경에는 종교개혁에 이어진 종교탄압 및 종교전쟁이라는 역사적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헌법태동기의 한국인들에게는 약간은 낯설었던 현상입니다. 따라서 한국헌법의 정교분리선언은 남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원래 정교분리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에 치중했다면, 우리는 ‘종교의 국가적 중립성’을 동일하게 강조한다고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제1회 국회속본회의 속기록 23호 참고). 그런데 ‘정치→종교’보다 ‘종교→정치’의 방향성에는 다음과 같이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종교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여 이를 종교인의 모든 정치적 발언과 행위를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든지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성정엽,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의 의미”, 「법학논고」, 경북대 로스쿨(2020))
실제로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교회에는 정교분리를 이유로 제국주의의 불법부당한 지배에 굴종하는 모습을 합리화했던 사적(史蹟)이 존재합니다. 일부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이유로 정치적 사건에 일제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그 결과 개인적인 각성과 부흥에만 천착하는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비판하는 견해들도 있습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988), 최영근, “한국기독교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 「신학사상」, 157호(201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단체가 자신의 입지를 위해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지원하고 공적 선거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민의를 호도하거나, 종교인이 국가적인 의사결정에 지나치게 사적으로 개입하여 대의를 그르치는 일에 관여한다든지,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의 본질을 유월하는 정치적 발언을 자의적으로 무제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종교인이나 종교단체의 정치적 발언과 행위는 종교적 신앙(religious belief)뿐만 아니라 공적 이성(public reason)에도 근거해야 합니다. 정치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그래야만 비종교인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들이 수긍하지 않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정교분리는 ‘정치→종교’의 반작용에 해당했지요. 영국의 청교도 탄압과 프랑스의 위그노 학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오히려 ‘종교→정치’의 반작용에 가깝습니다. 정치가 종교를 불법적이고 불의하게 대한다면 마땅히 저항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정치를 불법적이고 불의하게 대한다면 마찬가지로 정치영역과 시민사회로부터 저항을 초래합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하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하라”(딤전 2:2)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불법불의한 권세나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까지 그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동시에 스스로도 불법불의나 권한남용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민에게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데(딤전 2:4) 스스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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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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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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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 전승절 80주년을 맞아 열병식을 했습니다. 저는 영상으로만 봤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신형 무기들이 등장하는 모습들을 봤기 때문입니다.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DF)-61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쥐랑(JL)-3, 다탄두 탑재가 가능한 ICBM DF-5C와 미사일 방어시스템인 훙치(HQ)-19, HQ-29 등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날 최초로 공개된 DF-61 미사일은 DF-41의 개량형으로 추정됐으며, 이외에도 ‘괌 킬러’ DF-26D,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무력화할 무기로 꼽히는 DF-17도 함께 공개됐습니다. 상공 비행을 통해선 J-20S·J-35A 등 중국이 최근 수년 사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가 과시됐고 YJ-17 등 극초음속 대함미사일, 로봇개 등 무인전투체계도 공개되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을 보고 러시아의 푸틴도 내심으로는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중국이 대만을 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걸 봤습니다. 그러나 대만이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물론 이 모습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지켜봤을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기분이 좋을 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은 실전 경험도 없고 이제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미국 항공모함의 역사는 100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경험과 노하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나라입니다. 자꾸 평화만 주장하지 말고, 안보력과 국방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일각에서는 방위비, 국방 안보비를 삭감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번 중국의 열병식을 보고 나서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방위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의 외교력입니다. 한미일 공조뿐만 아니라 대중, 대러, 대북과의 외교력도 잘 펼쳐 나가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이미 폴란드에 FA-50 전투기를 수출하였고 동구 나라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서구라파 나라들에도 전투기를 수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간곡하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한국은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나라였습니다. 새벽이면 차디찬 교회당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통곡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 기도원에서 구국기도의 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아리쳤습니다. “주여,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주옵소서. 저 155
마일의 휴전선을 지켜주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기도의 내용을 더 확장시켜야 합니다. “주여, 우리 대한민국 서해를 지켜주옵소서. 남해, 아니 동해도 지켜주옵소서. 우리 대한민국이 전투기만 수출할 뿐 아니라 항공모함을 수출하게 하시고 세계 평화 질서를 이끌어가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뀐다고 할지라도 안보와 국방, 그리고 평화에 대한 생각을 시종일관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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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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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지진 전 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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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백성이 아니라, 남 왕국 유다의 백성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예언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아모스 7장 14~15절입니다.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마샤는 벧엘의 금송아지 신당 제사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스는 선지자도 아니고, 목동이요, 농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문성이 없는 아모스를 북 왕국에 보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업적 종교인보다 때 묻지 않은 사람을 통해 외치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아모스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1장 1절이 이를 말씀합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시 남 왕국에는 웃사야가 왕이었고, 북 왕국에는 여로보암 2세가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남북 왕국 모두 상당히 번성하던 때였습니다. 특히 여로보암 2세 당시의 북 왕국은 다윗 시대처럼 강했고, 영토도 가장 넓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이런 면만 봅니다. 경제 지표, 정치적 상황만 고려하면서, 살기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줄을 대고, 경제적 번영을 위해 달리며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믿의 성도라면 1장 1절에서 다른 구절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진 전 이년>이란 구절입니다. 아모스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지 2년 후에 거대한 지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지진 전 이년>이라고 한 것은 이 지진이 충격으로 새겨진 지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스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 지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지진 전 이년>이란 구절은 앞의 웃시야 왕 시대, 여로보암 2세 시대의 번영과 대조됩니다. 후자가 번영을 의미한다면, 전자는 멸망을 의미합니다. 지진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충격적이며 무서운 재난입니다.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진노와 경고와 징벌의 징조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는 번영의 때가 아니라, 멸망 직전입니다. 흥청댈 때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1절 이후에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예고가 이어집니다. 아람의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향하는 곳은 힘을 가진 지도자들입니다. 벤하닷의 궁궐, 규 잡은 자, 궁궐들, 보스라의 궁궐, 왕, 지도자들, 재판장 등이 이를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각 나라의 힘 있는 자들을 겨냥하십니다. 요즘 핫뉴스는 네팔 사태입니다. 시위로 총리가 사임 후 도피하고 각료들의 집이 불타고 심지어 도로에서 구타를 당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지도자들을 향한 백성의 분노입니다. 지도자들은 책임이 무겁습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이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각 나라에 주신 책망의 내용은 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죽인 죄입니다. 그런데 유독 유다는 여호와의 율법을 떠나고 우상 숭배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유다의 다른 죄보다 가장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보시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했습니다. 2장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반적인 죄 외에도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의 죄룰 가장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지진 전 이년>이란 구절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아담과 하와 죄 이후 인류는 늘 <지진 전 이년>의 상황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도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심판 경고가 주어지는 시간으로 받아야 합니다. 나라로 말하면 멸망하기 직전이요, 성읍으로 말하면 함락되기 직전이며, 개인으로 말하면 숨 거두기 직전입니다.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영적으로 깨어 있게 됩니다. 이게 바로 종말론적 깨어 있음입니다. 이 깨어 있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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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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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크리스천자녀양육기]“엄마가 너희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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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초등학교 4학년 딸이 학교에 갔다 와서는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내 친구가 그 일 때문에 엄마한테 엄청 혼나고 벌도 섰대. 진짜 슬펐을 것 같아. 내 친구 너무 불쌍해. 그 엄마 너무 했어.”
“친구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니 은별이 친구도 이런저런 부분에서는 잘못한 것 같은데, 그 엄마도 딸이 그렇게 행동해서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의견도 말하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는 이미 100% 자신의 말에 공감하지 않은 나를 향해 불신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도 “그냥 잠잠히 듣기만 할걸…”이라는 후회가 밀려올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분적 공감’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깨달은 나의 한계 중 하나는 “나는 누군가를 온전히 100%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나, 내가 낳은 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의 가족은 내게 ‘온전한 공감’ 받기를 원하며 감정을 쏟아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온전히 공감해주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부분적 공감’만 하며 대화의 종착지로 가면 갈수록 내 이야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수없이 많이 저지른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공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기에 공감하는 척, 마음을 이해하는 척, 100% 경청하는 척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내 것을 아이들에게 주입’ 시켜야한다는 속셈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람의 내면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는 ‘정서적 지지’이다.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 사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의 정서를 100% 공감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특히 내면이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엄마, 아빠로부터 받는 절대적 공감과 수용이 인생을 건강하게 펼쳐갈 평생의 거름이 된다.
그런데, 난 사실 공감과 수용이 쉽지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말처럼 그들의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주고 싶은데, 실제 삶 속에서는 나의 정서를 읽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이들의 마음을 100%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오늘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아이가 부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즉각 반응하기. 물론 쉽지 않았다. 거품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쉴 새 없이 빼다 끼다를 반복했으며 두부 한 모를 온전히 다 써는데 20분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절충점을 찾아 처음보다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는 일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또한,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하루 10분 정도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들이 많아서 엄마와의 둘만의 대화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실천하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한 걸음이라도 내딛어 보는 것이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어서 아이들의 온전한 정서적 지지 기반이 되어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는 존재,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 편이라는 정체성을 내가 먼저 인식하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가치를 마음 속에 담고 노력할 때 아이들에게 나의 진심이 조금이나마 전달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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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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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말틴 루터(1483-1546)와 교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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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틴 루터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종교개혁가이다. 당시 교회의 부패를 잘 보여준 ‘면죄부’(면벌부)를 주제로 토론할 목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당 문에 95개 조항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을 이루어냈다.
루터가 쓴 여러 책 중에 <소교리문답>(1529년)이 있다. 십계명,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등을 중심으로 해설했다. 그런데 루터눈 이 책 서문에서 자신이 왜 교리문답을 작성하는지 이유를 밝혔다. “근간에 내가 여러 곳의 교회를 시찰(視察)하고 신자들의 비참한 신앙생활을 목격한 나머지 극히 쉬운 문장과 적은 책자로써 준비된 교리문답서를 내놓아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도록 했다. 아! 불쌍하도다. 내가 직접 본 비참한 상태를 슬프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저들은 스스로 신자라고 말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주의 성찬을 받으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 결과 무지한 가축과 이성적이지 않은 돼지처럼 살고 있다.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남용하는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였다.”
루터가 왜 저렇게 탄식할까? 대체 무슨 일이 있은 것일까? 종교개혁은 복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중세교회에서 변질한 교회시찰을 회복했다. 여기에 앞장선 이가 루터다. 교회시찰은 본래 사무엘, 엘리야(삼상 7:17, 10:8; 11:14; 13:8; 15:1; 열왕기상 17-21장) 등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모범을 보이고, 고대교회도 이를 실행했다. ‘시찰’은 교회를 ‘두루 다니며’(‘시찰’) 상태를 살피고 돌보며 악을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행 15:36, 16:4, 18:23, 고전 4:19, 17:5-8 등).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41). 그런데 이 시찰이 중세교회에서 크게 변질하고 부패했다.
루터와 지역 교회는 이 시찰을 다시 회복했다. 그런데 시찰을 시행한 결과는 처참했다. 신자들이 세례받았다고 하면서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짐승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남용하는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였다고 개탄했다.
루터는 동역자 멜란흐톤을 통해 “선제후령의 삭슨지역에서 목사들에 대한 시찰위원 지침”(1528년)을 작성하도록 했다. 서문은 그가 직접 작성했다. 서문에서 루터는 시찰의 실례와 원리, 역사를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다시 우리에게 오게 되었지만, 이제 시찰과 감독의 관행이 다시 세워져야 할 것을 호소했다. 실제로 교회시찰은 2-6년마다 시행되고, 교회재산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리, 당회의 규정, 각종 명부(교인, 성찬, 세례, 혼인, 장례, 성찬 참여자 등)을 살폈다. 목사, 당회, 회중을 시찰하기 위해 특별히 18개 항목을 작성했다. 거기에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세례, 회개, 성찬, 여러 기도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시찰에 앞서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소교리문답>이다. 소교리문답 내용은 시찰 내용과 흡사하다. 아마 교회시찰이 없었더라면 소교리문답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계속되는 교회개혁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교회개혁을 위해 성경과 사도의 본을 따라 루터가 앞장서 회복한 시찰, 오늘날 노회가 맡은 가장 중요한 기능인 교회시찰이 형식에 그치고 중단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1922년)부터 헌법에 부록으로 수록된 <시찰 위원 특별심방시 문답 실례>를 삭제한 교단도 많다. 노회 직무 중 하나는 시찰위원을 두어 관내 교회를 시찰하는 것이다.
교회개혁을 위해 시찰을 교회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회복한 말틴 루터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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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