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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크리스천자녀양육기]“아이들을 키우는 이 사역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명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여전히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회에서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은혜이자 감사”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가족은 이 마음을 확장해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아이들도 교회에서 뛰어놀며 자라게 하자”고 생각, 지난 2024년 9월에 사송우리는교회란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하고, 2025년 7월에 사송 예배당을 마련, 지금까지 다음세대를 위한 사역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는데, 여기에 교회가 생긴 것을 보고 찾아왔어요” “교회에서 아이들 활동을 한다고 해서 한번 방문해봤어요” 교회 간판만 걸면 사람들이 몰려오던 1970-80년대는 아니더라도 지역에 ‘교회’(물론 우리뿐 아니라 곳곳에 교회가 있다)가 생기고, 여러 활동들을 한다고 알렸으면 구경이라도 오리라 기대했는데 현재까지 자발적으로, 스스로, 교회 문을 여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주중에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한 달에 한번은 ‘월간 미식회’로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프로그램이 쉬지 않고 돌아가고 그 때마다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는 하는데,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한 번 정도 왔지만 지속적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열풍을 가졌왔던, 그래서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던 ‘두쫀쿠’ 만들기를 교회에서 했습니다. 한번도 교회에 나온 경험이 없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은 “교회에서 이런거 하는게 너무 신기해요. 엄청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했고, 또 다른 초등학생은 “다음 달에는 뭐 할거에요?”라며 기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참여한 다른 아이들 모두 반응이 비슷했습니다. 교회에서의 이런 활동이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주일에 교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이런 사역들이 지역 사회에 교회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지 전도가 목적이 아니야”라며 안위하기도 했지만, 개척교회에서 씨뿌리는 작업을 계속 한다는 것이 버겁습니다. 이런 느리고 더딘 사역을 10년 20년 30년 해온 수많은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교회들 또한 지금의 우리와 같은 시간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우리는 참고 견디고 버텨야한다는 것 또한 알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이 사역을 해나갈 것입니다. 주중에는 몇몇의 아이들이 학교가 끝난 뒤 교회에 와서 수업을 듣고, 간식을 먹으며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것, 종종 체험 활동과 음식 만들기를 통해 교회가 장을 펼쳐주면 아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시간을 펼치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교회가 이런 곳이라고. 따뜻하고 즐거우며 누구나 와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교회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 사역에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명의 우리 자녀들을 넘어 지역 사회의 수많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이 다음세대 사역에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후원계좌 : 사송우리는교회 농협은행 351-1364-27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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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6-02-27
  • [소강석칼럼]“소 목사의 휴민트(HUMINT)”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써주는 교회가 없어서 교회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학교에서 교회 개척학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교회 개척학이라는 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강남에 있는 광림교회에서 세계적인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를 초청하여 교회 개척과 성장론을 강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 수업을 빠지고 2박 3일 동안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할 지역부터 선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욕구 진단을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서 전도도 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지역교회를 탐방하여 성공하는 목회자와 실패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하거나 그 이유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만 그 교회 목사님을 1대1로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 100여 명에 가까운 목회자를 만났고 수백 개의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목회자를 못 만나고 주일 공예배에 참석하지 못해도 몇 주간의 주보를 보고 휴민트 작업을 하였습니다. 휴민트(HUMINT)란 사람(Human)과 정보(Intelligence)를 합성한 말로 사람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뜻합니다. 제가 보니까 성공하는 목회자와 교회는 설교부터 다르고 예배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아니, 예배에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고 설교에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 몰라도 설교도 그저 그렇고 예배 분위기도 그저 그런 걸 보았습니다. 설교를 유심히 들으려고 하는데도 제 귀에 도대체 들려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개인적으로 만날래야 만날 수가 없었지만, 역시 대형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다르고 설교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중에서 딱 한 분을 뵐 수가 있었는데 고 옥한흠 목사님이었습니다. 저희 신학교 동기 처제가 옥한흠 목사님의 비서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몇 사람들과 함께 옥 목사님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수요일이면 사랑의교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그 후로도 옥 목사님은 가끔 뵐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옥 목사님은 부지런한 독서광이자 설교 준비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준비를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맨땅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좀 부흥하고 있나요?” “예. 많이 부흥하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몇백 명은 모이고 있습니다. 그 후 저는 분당으로 교회를 신축해서 당시로서 개척 성공 신화를 이룬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비서를 시켜서 제 설교 테이프를 구해다가 들으셨다고 합니다. 뒤늦게 안 용어이지만 이 역시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의 휴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들어봤겠습니까? 그리고 개척 이후에도 정말 부흥하는 교회를 탐방하고 목사님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린 잠정 결론은 역시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성령 충만한 영성, 살아있는 설교, 그리고 성도를 향한 태도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니 개척 목회자로서는 최대형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대형교회 목회자로만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한국교회 공교회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교회 생태계를 위협하는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광화문이나 여의도에 가서 집회를 하기보다는 전략적 휴민트를 통하여 해당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하고 이해를 시켰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을 할 때도 휴민트를 통한 코로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무조건 현장 예배만 강행한 것이 아니라 루터와 칼빈처럼 소수의 현장 예배를 지키면서도 쿼런틴 시스템(격리 제도), 요즘 말로 하면 화상 줌이나 온라인 예배 등으로 이원화 전략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잠시만 찬란한 바보가 됩시다. 잠시만 허들링 처치가 되게 합시다. 그러면 국민들은 한국교회를 고맙게 생각할 것이고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는 더 신앙적 갈망이 생기고 교회를 영혼의 토포필리아로 생각하여 교회는 회복 탄력성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반대를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그런 어두운 면도 보도를 하였지만 찬란한 바보, 허들링 처치를 더 인상 깊게 보도 하였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휴민트’라는 영화를 봤는데 저의 지나온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휴민트 영화가 액션을 넘어 인간을 통한 정보, 신뢰, 인간애를 보여 주었듯이 저도 끊임없는 영적 휴민트를 통하여 제 자신을 발전시키고 성도들을 섬기며 새에덴교회를 굳게 지키며 더 부흥시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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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성서연구]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creatio ex nihilo)입니다. 한자로 <유>는 <있을 유>로서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자가 붙으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유의미, 有意味>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유리, 有利>는 말은 <이익이 있다>는 뜻이지요. <있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입니다. <있음>의 반대는 <없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상태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없던 곳에 빛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없음보다 있음이 아름답습니다. 없음은 슬픔입니다. 집은 있는데,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이 텅 빈 방, 살림살이는 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집은 허전합니다. 하나님은 있게 하십니다. 반면에 사탄은 있는 것을 없게 합니다. 하나님은 채워 주시고, 사탄은 있던 것도 사라지게 만듭니다. 아버지 재산을 받아 집을 나간 탕자에게 재산을 준 분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게 한 것은 그를 타락의 영으로 이끈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어서 고통 받는 곳에 있게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것을 가지고 와서 채웁니다. 있게 합니다.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이런 사람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영에 끌리는 사람은 있어도 없다고 말합니다. 있는 것도 없게 합니다. <없을 겁니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낙망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부정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 명은 없는 것만 말했습니다. 적들처럼 강하지도 못하고, 신체가 우람하지도 못하다면서, 없는 것을 부각시켜 백성을 낙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컵에 물이 절반쯤 있을 때, 말하는 법이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이 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없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다>고 하면서 있는 것에 눈길을 줍니다. 목회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목회자에게 고마운 사람은 있는 것을 말씀하는 이들입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꼬마들이 많습니다. 열정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큰 힘이 됩니다. 교회에 긍정의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면서,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하는 성령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조란 <있게 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우리도 있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을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살림을 부수고, 가족을 구타하는 가정에서 불우하게 사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담임인 <앨리스 팔머>는 어린이들에게 <각자의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기>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가난한 소녀 때문에 밤새 그런 숙제를 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다음날 어린이들은 예쁜 인형, 장난감 등을 가지고 와서 자랑했습니다. 가난한 소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가져올 물건은 없어요. 그러나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팔을 베고 자는 동생의 금발이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소녀를 칭찬했습니다. <평생 네 주변에서 잘 찾아보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것 찾아내며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소녀는 큰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없는 것에 슬퍼하지 않고, 있는 것을 찾으며 산 결과였습니다.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이 봄에 겨울 동안에 텅 비었던 산하를 다시 푸름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있게 하시는 성령님 안에서, 있게 하는 사람으로 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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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성경적 경영안개론] ① 서문
    ‘성경적 경영학개론(Principles of Biblical Business Administration; P-BBA)’이라는 주제로 칼럼을 시작한다. 월1회, 1년을 목표로 연재를 이어갔으면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환경이 정상화되었다. 그럼에도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AI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은 물론, 많은 크리스천 경영자들이 이윤 극대화와 무한 경쟁이란 세속적 가치관 속에서 여전히 신앙과 현실의 긴장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경영학이란 무엇일까? 본 칼럼은 기업의 목적과 인간의 가치, 그리고 재화의 흐름을 성경 원리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탐구하는 학문적·실천적 체계로 정의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는 그리스도인이 기업경영을 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체계화하였다. 첫째, 경영은 단순히 부를 창출하는 과정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행하는 소명으로, 이윤 극대화의 경제적 가치를 넘어 신앙적 가치를 통합한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경영(Glorifying God)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시장을 통해 새로운 기업가치를 창출한다. 셋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 경영(Service to Neighbors)으로, 구성원을 생산의 수단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체로 대우하고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경영을 한다. 넷째, 성화의 경영(Sanctification in Business)으로 경영자가 경험하는 고민과 의사결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 역할을 한다. 다섯째, 청지기적 사명(Stewardship)의 실천 경영으로 위탁된 자원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관리하여 사회 유익과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 즉 패커는 기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절대 주권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제시한 종교개혁자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과 일치하는 기업경영론을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상은 앞으로 본 칼럼이 개혁 신앙의 토대위에 글을 집필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근간이 될 것이다. 본 칼럼은 ‘경영학원론’과는 다른 ‘경영학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경영에 대한 지식을 자세히 전달하는 것보다, 일련의 경영학의 큰 흐름속에서 이를 기독교 신앙과 연결한 신학적 통찰의 제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필자가 지금의 대학 경영학부에 재직한지 28년이 되어 간다. 아울러 그동안 로고스경영학회 학술지 <로고스경영연구> 편집위원장 3년 업무를 마치고, 올해부터 학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본 칼럼은 2002년에 설립된 로고스경영학회의 논문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또 기독경영연구원(KOCAM)의 축적된 이슈와 한국기독인실업인회(CBMC)의 활동을 포함한 경영사례도 반영할 예정이다. 주요 참고문헌은 리처드 츄닝(Richard Chewning)의 <기업경영과 성경적 원리>, 스콧 레이(Scott B. Rae)와 켄만 웡(Ken Man-Wong)의 <비즈니스 윤리와 지속가능 경영>, 개혁주의학술원의 <칼빈과 사회> 등이 있다. 이 칼럼의 논리는 영리 목적의 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와 가정, 사회 그리고 교회 등 신앙생활의 주체가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양하게 활용될 수도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스스로 자문해 보길 바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 경영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함께 칼럼을 출발해 갔으면 한다. *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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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시사칼럼]봄동비빔밥과 라캉의 욕망론
    한동안 ‘두쫀쿠’(두바이쫀득쿠키) 열풍이 불더니 이제는 ‘봄동비빔밥’이 대유행입니다. 최근 썸트렌드(Sometrend)의 빅데이터 집계 결과 지난달 13일부터 한 달 동안 ‘봄동비빔밥’ 언급량이 작년 같은 기간 대비 540% 이상 치솟았다고 합니다(세계일보). 구글트렌드 검색 추이에서도 동일한 검색어의 관심도가 한 달 사이에 15에서 100으로 최고치를 찍었답니다(한국경제신문). 검색은 구매를 촉발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모자라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가격도 올라 불과 1주 만에 32% 상승했고 전년 대비로는 78% 올랐답니다(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호들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동 대란’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쫀쿠’에 열광하며 ‘두쫀쿠 지도’를 제작하고 ‘두케팅’이란 신조어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가히 ‘두쫀쿠 신드롬’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봄동 기차로 갈아탄 느낌입니다. 어느 전문 매거진은 ‘두쫀쿠→봄동비빔밥’의 갑작스런 환승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했습니다(푸슬레터). 우선 낮은 레시피 장벽입니다. 봄동도 결국 배추인지라 누구에게나 겉절이로 무쳐내는 일이 낯설거나 어렵지가 않고 모양을 꾸미거나 참기름을 제외하면 특별한 첨가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단번에 일반 가정의 식탁을 휘어잡는 장악력을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두쫀쿠는 점점 가격이 올라 나중에는 한 알이 만원에 육박하는 미친 인플레를 보여주었는데, 봄동은 아무리 올랐다지만 3~4천 원이면 4인 가정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반전의 가성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지도까지 나올 정도로 구매하기 어렵던 두쫀쿠와 달리 인근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접근성 또한 봄동의 돌풍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도 봄동비빔밥을 여러 번 맛있게 먹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둘은 비록 확연히 다른 먹을거리지만 순식간에 국민 음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들 열풍은 일종의 루틴을 따르는데, 일단 셀럽들이 소개하여 화제가 되고 이후 인플루언서들이 가세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요즘 용어로 정의한다면 ‘알고리즘에 의한 따라하기’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경을 인용하면서(요일 2:16)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간주하고, “내게 네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면,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고백록 3권). 그런데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나요? 현대의 욕망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자크 라캉은 욕망의 개념에 관해 ‘전염’(프로이트)이나 ‘모방’(르네 지라르)을 넘어서 아예 ‘주체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동 먹고 싶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서 식욕을 느꼈을 텐데, 그렇다면 타자의 욕망이 나(주체)의 욕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라캉 식의 ‘욕망의 전이’나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첫째, 무기력과 약점이나 죄의식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욕망은 감염역이 강합니다. 집단적으로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릇된 애국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혹은 극우나 극좌 같은 편향된 사상에 물들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l'homme désire le désir de l'Autre)는 라캉의 명제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향한 경쟁심과 시기·질투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욕망이 분쟁의 불씨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셋째, 주체의 요구와 타자의 요구가 딱 맞아떨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넷째,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싸르트르가 ‘타자의 눈은 지옥’이라(닫힌 방) 말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전통적 신학은 이런 욕망을 ‘뒤틀린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신의 은총에서 구했습니다. 타인의 욕망은 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타인의 신앙도 결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건강에도 좋은 제철음식인 봄동비빔밥은 맛있게 드시되, 누구에게나 혹은 무엇에게든 나의 정체성을 뺏기지 말고, 특히 자기 신앙을 지키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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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교회건축칼럼]미래 교회공간의 모습
    지금의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의 속도가 너무 급격하여 자고일어나면 세계곳곳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으며 국내의 사정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교회공간은 어떻게 진화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는 것도 교회성장과 복음의 확장성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미래교회공간의 핵심키워드는 하이브리드(Hybrid)와 메타버스(Metaverse)를 지적한다. 물리적인 현실공간과 디지털 가상공간이 합성되어지면 예배는 지금의 영상예배보다 더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메타버스내에서는 신구약이 결합되어지고 세계가 하나의장소로 압축되어지며 시공간을 초월하게 한다. 이런 기술은 다양한 직업군을 만들어내고 성도의 예배환경도 변화시킬것이다. 건물에 모여 집합예배드리는 형식도 있지만 반대로 흩어져서 삶의 처소에서 예배드리는 흩어지는 교회도 생겨날 수 있으며 카페, 공유오피스 가정과 같은 일상교회가 새로운 형태의 교회로 등장할 수도 있을것이다. 라이프스타일 중심의 신앙이 고착화되어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게되며 이 현상은 팬테믹을 겪으면서 심화되어있다. 미래는 탈권위 세대가 주도적인 계층이 되어지므로 기존의 수직적 구조의교회형태는 사라질 것이다. 일방향적 설교나 성경공부가 쌍방향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 평신도 교역자의 역할과 교회내 전문가들이 더 적극적인 사역자로서 활동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내 나눔과 소통의 공간이 본당비율보다 더 크게 자리잡을 것이며 지역 사회와 연합되어지는 범위도 더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이 변화를 소극적으로 대처할 때 교회고립의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된다. 시대의 다양한 네트워크는 교회가 주일하루 사용되는 지금의 비기능적이고 비효율적인 공간구조는 생존할 수가 없게 된다. 주중 비어있는 공간을 주민과 지역사회의 공간 셰어링으로 바뀌어야한다. 많은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회공간을 자기들만의 공간으로 인식하여 개방에 소극적이다. 이것은 미래시대의 교회에서는 공동화로 직결되어진다. AI와 성도의 신앙은 목회의 주요수단으로 자리잡게되며 교회성장과 복음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너무 익숙치 않은 과제이나 현실은 더 익숙해질 것을 요구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계신다. 이것이 유비쿼터스이다. 유비쿼터스는 편재성, 비가시성 유동성 실시간성을 뜻한다. 어디서든 네트워크가 상존하는 이 개념은 인간과 하나님이 소통하고 하나님의임재를 믿는 성도의 신앙과 맥을 같이하는 개념이다. 기술이 기술로서 파편화되는 이질적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현대 기술이 너무 가까이 와있다.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일어나서 거대한 집단으로 변해가는 것을 현대 기술은 디스토피아로 귀결시키는 개념이라면 성경의 디지털은 생명으로 복귀는 내용이다. 매래 교회공간은 장소성에 한계지움 받지 않고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공간으로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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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다음세대칼럼]새학기, 다음세대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새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묻어난다. 새로운 교실, 새로운 친구, 새로운 규칙. 어른들 역시 다르지 않다. 이번 학기는 별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걱정을 안고 한 해를 시작한다. 성경은 이런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대하에 등장하는 남유다의 왕 아사는 혼란의 시대 한가운데서 중요한 선택을 했던 지도자다. 아사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겉으로만 남아 있던 신앙을 정리하고, 우상을 제거하며,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우상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권력과 혈연보다 신앙의 방향을 우선시한 선택이었다. 그 개혁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친다. 구스 사람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백만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이다. 군사력으로 보면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사는 전쟁터에서 계산보다 기도를 선택한다. “여호와여, 주밖에는 약한 자를 도와 강한 자를 대적할 이가 없나이다.” 이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다.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고백하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기록한다. 전쟁은 유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승리 후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은 아사에게 선지자 아사랴를 보내신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축하가 아니라 경고에 가까웠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요, 너희가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나,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역대하 15장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찾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다.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선택, 삶의 기준을 그분께 맞추는 태도, 관계를 회복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뜻한다. 아사와 백성들이 보여 준 태도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들은 혼자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왕 개인의 경건함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몇몇 열심 있는 사람에게 신앙을 맡기지도 않았다. 온 백성이 함께 언약하고, 함께 결단하며, 함께 하나님을 찾았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한 사람의 방향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으로 다루지 않는다. 더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은 그들이 ‘자기 시대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들의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에서 길을 내셨던 하나님, 다윗과 여호수아의 시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오늘의 다음 세대는 전례 없는 속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정보는 넘치지만, 기준은 흐려지고, 성공의 언어는 크지만, 신앙의 언어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나 더 세련된 방법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시 하나님을 찾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찾은 공동체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15:4).” 이 평안은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해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 주어지는 깊은 쉼과 안정이다. 새학기를 시작하는 다음 세대에게, 그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어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성적과 결과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분은 여전히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새학기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성공하는 새학기가 되길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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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7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다음세대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만약에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를 보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돈과 명예, 성공과 성적을 향해서 무한질주를 벌이는 지금의 다음세대들에게 하나님이 꼭 들려주고자하시는 말씀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의 다음세대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 60장 1절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60:1) 이 말씀은 매우 유명한 말씀이고 우리에게는 찬양 가사로도 익숙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지금 나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다음세대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어느 부모도 내 자녀가 움츠리고 있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부모도 자기 자녀가 어두움 가운데 다니길 만족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떨쳐서 일어나길 원하고 그렇게 일어나서 세상 곳곳을 다니면서 빛을 비추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음을 드러내고 전파하길 원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요?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말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현상 유지에 머물지 말고, 떨쳐 일어나서 도전하고 시도하고 싸워내고 마침내 이루고 기뻐하며 감사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빛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구상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이른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신 능력을 이제 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소망을 품고 일어나십시오. 빛을 발하십시오. 위대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이미 우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받을 때 아마도 어떤 분들은 “아니, 내가 지금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냥 이렇게 살다 죽는 거지요”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든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이 선포되던 당시의 상황 역시 똑같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는 이스라엘이 잘나가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도리어 이스라엘의 최악의 시기,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나라는 바벨론에 의해 망해버렸고, 땅을 잃어버렸으며, 성전은 불타버렸고 성벽은 무너진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나 상황이 말씀을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씀으로 상황을 재해석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상황이 말씀을 판단하게 두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받는 모든 부모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처한 상황을 재해석해내는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예배는 사라졌으나, 이 말씀이 선포되자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자들이 믿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전 세계를 통치하던 가장 강력한 제국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바사 제국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돌아가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성전을 지으며 나라를 재건하십시오”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역대하와 에스라를 읽으며 그 감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역대하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읽어보세요. 눈물이 앞을 가리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에스라서를 읽으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던 자들이 하나 둘씩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으로 이 상황을 재해석하며 돌아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절망의 끝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나를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자리에 내가 뛰어들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빛이 없고 힘이 없지만, “일어나 빛을 발하라” 하시니 일어나 보는 것입니다. 내가 빛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게 임한 그 빛, 하나님의 빛을 일어나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빛이 나갑니다. 그렇게, 이미 내 안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과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빛으로 올 한해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나의 미래를 비추는 다음세대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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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6-02-27
  • 부교역자 욕설파문 일파만파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부교역자에게 상습적인 욕설을 했다는 보도가 A 매체를 통해 2월 10일 오후 보도됐다. 그런데 이 매체가 보도과정에서 음성파일을 첨부해 파장이 더 커지고 있다. A 매체는 지난 20일 저녁 이 보도를 홈페이지에서 내렸지만, 문제는 첨부된 음성파일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타 매체들을 통해 후속보도 등이 이어지고 있다. A 매체 발행인 B 목사는 금년 초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욕설을 하는)이런 분이 교단의 수장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부총회장직)내려 놓는다면 보도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내려놓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보도를 할 생각이다. 돈으로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중재하기 위해 B 목사와 만난 C 목사는 “B 목사가 녹취록을 17개 정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번에 보도한 것은 가장 약한 것 중 하나”라며 “만약 추가 보도를 한다면 더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김문훈 목사는 지난 24일 교단지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피해를 입은 부목사들과 사역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출직(부총회장)을 총회 임원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말에 대해서는 교단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모 교단관계자는 “진정한 사과라면 그 사과문 안에 ‘부총회장직을 사임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교단관계자도 “총회임원회에 맡긴다는 것 자체가 부총회장직에 연연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고 볼 수 있다”며 “사과문의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문훈 목사를 옹호하는 교단 내 목소리도 존재한다. D 목사는 “부교역자에게 욕설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14년 전 불법 녹취된 내용이 지금와서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떤 불손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고 전했고, A 장로도 “어떤 사람이라도 10년 전 사건사고를 뒤진다면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있느냐?”며 “(부총회장직을)낙마 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단 중진 모 목회자는 “이번 사건을 통해 부교역자를 대하는 담임목사들의 태도와 언어가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교역자에게 함부로 한다면 이번처럼 큰 홍역을 치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김문훈 목사는 지난 26일 총회임원회에 부총회장직을 사임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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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6-02-27
  • 기독교보 사장 선거 과열조짐...?
    예장고신(총회장 최성은 목사) 교단지 기독교보(고신언론사) 사장 선거가 금년 중순에 예정되어 있다. 지난 2020년 9월, 9대 사장으로 취임한 최정기 사장은 한차례 연임한 뒤 금년 9월 은퇴한다. 기독교보 사장을 선출하는 총회유지재단이사회는 금년 5월 경 모집공고를 통해 7-8월 경 기독교보 사장을 선출할 예정이다. 9월 총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거론되는 인물은 2명의 목회자와 2명의 장로.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출마 의사를 비춰왔다. 또 5번째 후보도 나올 수 있다는 소문도 무성한 상황에서 대략 4-5명의 후보들이 고신언론사 사장 자리를 놓고, 총회유지재단 이사들의 판단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단내에서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A 목사와 B 장로의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두 사람 모두 좋은 평판을 받고 있어서, 결국 고신언론사 운영방향과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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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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