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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YF가 남기고 간 것들
    구원파 박옥수가 설립한 IYF가 지난 7월5일부터 16일까지 한국교회에서 월드문화캠프를 개최했다. 이번 캠프에 참석한 숫자는 세계 50여 개국 4천 명이라고 IYF측에서 발표했다. 특히 첫 일주일은 부산에서 모든 행사를 진행했다. IYF측은 캠프뿐만아니라 지난 5년 동안 세계청소년부 장관들을 초청해 장관포럼을 개최하고, 세계 각국 총장들로 구성된 총장포럼도 개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재경 의원이 국회에 이들을 초청하고 만찬을 했으며, 서병수 부산시장도 개막식 참석과 이들을 부산시청에 초청해 만찬을 나누기도 했다. 특히 박옥수는 “세계 여러곳을 다녔지만, 부산만큼 좋은 곳이 없다. 서 시장님이 IYF에 마음을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 부산에 머무를 시간이 많을 것 같다”고 화답했다. 예년에 비해 명사 강의 등이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박옥수의 입지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특히 부산시장과 지역 학계, 재계, 정치권 인사들과 관계를 돈둑히 하는 등 부산에 높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교계의 대응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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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7-23
  • 총회 임원회의 이상한 행보
    고려학원 이사장 강영안 장로에 대한 총회 재판이 지난 29일 부산 성산교회에서 열렸다. 총회 임원회가 스스로 결정해 총회재판국에 기소시킨 내용을 다시 해당노회로 환송하라는 것은 오히려 총회 임원회가 ‘직무유기’하는 느낌이 들고 있다. 이미 총회재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사안을 놓고 서류 반납 요청은 앞뒤가 안 맞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 총회운영위에서 총회 임원회의 분위기는 강 이사장 편을 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회장의 설교 내용에서부터 사회보는 것까지.... 이사장에 비판적인 인사의 발언권을 제지하면서, 참석 대상자도 아닌 학교법인 감사에게 발언권까지 주면서 강 이사장 ‘이사장 추인’ 통과에 열을 올렸다. 과정들을 살펴보면 총회 임원회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다. 여기에 지난 21일 모인 임원회에서는 법인 이사 4인이 행정소송한 건에 대해서도 ‘일단 사실여부를 확인 한 다음에 총회재판국에 보낼 지 판단한다’고 결의한 후 유보한 상태다. 총회 임원회의 노골적인 이사장 감싸기가 이제는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학교법인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다루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지금까지 총회 임원회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이사장 감싸기’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과한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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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7-23
  • 신원그룹 회장 박성철 장로 이야기
    △노사분규 없는 신원그룹 평소 신원그룹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이 이 회사를 방문하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성가곡이 흘러나오고, 벽면에는 ‘월요예배순서’가 붙어 있다. 사옥에는 예배실과 기도실, 신학연구소와 성가단의 간판까지 볼 수 있다. 교회인지, 회사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국내 굴지의 의류업체인 (주)신원은 자타공인 믿음의 기업이다. 경영이념의 첫 번째가 믿음 중심이고 다음이 고객중심, 미래지향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전 세계의 신원 직원들이 예배를 드린다. 회사 입구에는 ‘주일은 주님과 함께’라는 문구가 크게 붙어 있다. 이유를 막론하고 주일에 쉬는 것은 박성철 회장(서울 신길성결교회 원로장로)이 창업부터 지켜온 그의 철칙이다. 박 회장은 신앙으로 운영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신원통상을 설립했다. 섬유수출과 의류사업으로 승승장구했던 회사는 금융, 레저산업까지 진출하며 국내 16개, 해외 8개 계열사를 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97년말 외환위기 때 빚을 제때 갚지 못하고 경영권이 채권단으로 넘어가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의류와 관련 없는 사업은 모두 접었다. 다행히 해직된 직원들 대부분 다른 업체에 재취업을 했다. 신원 직원이면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이 큰 힘이 됐다. 박성철 회장은 신원이 워크아웃에 들어간 책임을 지고 보유 지분 전량을 회사에 무상증여, 월급쟁이 회장이 됐다. 박 회장은 방만했던 경영을 스스로 반성하고 재점검하며, 회사 회생을 위해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직원들은 보너스, 영업비를 스스로 반납했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 평소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며 야근도 자처했다. 박 회장은 지방으로 내려가 직원들을 설득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쉬어야 합니다”면서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이들 영업점들이 주일에 문을 닫으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이 오히려 15%나 늘었다. 신원은 해고된 직원들에게 명절이면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을 보내기도 했는데 ‘저희는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는 뜻을 이와 같이 성결교 증경총회장 이재완 목사가 위와 같이 담아 글을 올렸다. 전국CBMC 중앙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박성철 장로는 지난 4월 국세청으로부터 조세포탈 협의로 고발당했다. 지난 7월 9일 사기 회생 및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썩은 사과’ 신원 박성철의 추락(이 글은 동아일보 권순활 논설위원이 지난 7월 15일자에 실은 칼럼 내용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란 표현을 썼다. 임직원들에게 도를 넘은 연봉과 상여금을 뿌리던 미국 금융회사들이 경영이 어려워지자 정부에 손을 내밀어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행태를 비판했다. 탈세 및 사기 혐의 등으로 그제 구속된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을 보면서 경제학자의 질타를 눈여겨 봐야한다. 신원그룹은 1998년 1조 원의 차입금을 안고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을 신청해 대상기업으로 선정됐다. 외환위기 충격으로 수많은 기업이 사라지고 직장인들이 줄줄이 해고된 ‘고통의 시절’에 신원은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부채 상환 유예와 탕감, 추가 융자를 받았다. 특혜에 가까운 혜택이었다. 박 회장은 대주주 지분은 포기했지만 퇴진 약속을 뒤집고 회장 자리를 지켰다. 그는 워크아웃 기간에 재산이 전혀 없는 ‘가난한 전문 경영인’의 이미지를 풍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2002년 국회 공적자금 국정조사특위가 공개한 자료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박 회장 일가는 1998년 이후 11번이나 해외에 나가 귀금속 쇼핑 등에 2711만 원을 썼다. 국내에서도 신용카드로 2억8600만 원을 사용했다. 검찰과 국세청은 워크아웃을 악용해 회사 빚을 떠넘겼던 그가 당시 300억 원의 재산을 숨긴 사실을 최근 밝혀냈다. 박 회장은 가족 명의로 소유한 광고대행사를 통해 신원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되찾으면서 증여세 등 30억 원대의 세금을 포탈했다. 기업 부실은 국민의 세금으로 해결한 뒤 ‘말끔한 회사’의 대주주로 당당하게 복귀한 셈이다. 2011년에는 또다시 개인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것처럼 법원을 속이면서 개인 회생을 신청해 250억 원의 개인 채무를 면제받았다. 100억 원대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도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 회장은 ‘썩어도 한참 썩은 사과’다. 틈만 나면 나랏돈을 빼먹으면서 자기 주머니는 몰래 챙긴 행태는 죄질이 특히 나쁜 악성 경제 범죄다. 이런 양심불량 기업인 때문에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떵떵거리며 산다’는 속설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박 회장은 10년 넘게 법의 빈틈을 악용해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국가와 국민에게 전가했다가 결국 추락했다. △박성철 장로의 ‘야누스의 얼굴’ 긍정과 부정을 엮은 두 편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은 부끄러움뿐이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랴. 하지만, 호남출신이자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인 박성철 장로는 한국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줬다. 대형사고가 터졌다고 하면 그 중심에 크리스천이 있다는 사실에 한국교회는 휘청거리며 위기를 맞고 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본 것 같은 충격이다. 신이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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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현장
    2015-07-23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동성혼, ‘강 건너 불’ 아니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하는 결혼은 짐승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악습 동성혼은 말이 안된다. 짐승도 짝짓기를 암컷끼리 혹은 수컷끼리 하는 경우가 없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동성끼리 부부가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천부당 만부당하다. 그럼에도 동성애와 동성혼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이다. 이 악습은 더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37개 주에서 동성간 결혼법이 통과되었고, 지난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혼도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상, 하원에서도 동성애 지지세력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까지 공개적으로 동성혼을 찬성하고 동성애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동성혼 합법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법안 통과는 오늘 내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졌고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닌가. 대통령이 취임할 때에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나라인데도 동성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외에도 20개국이 동성혼을 합법화했다. 최근에 아일랜드도 동성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되었고 지난 5월 15일 룩셈부르크에서는 베델총리가 남자 연인과 동성간 결혼식을 거행했다. 부총리 역시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1978년 호주에서 시작된 동성애 축제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매김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지고 퍼레이드까지 하고 있다. 2007년 10월 1일 법무부 인권국에서 동성애차별금지법을 발의하고 의견수렴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동성애 합법화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동성애 차별법안에 따르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경우 고발하면 2년 이하의 징역, 일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법무부에서는 2013년에 동성애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기독교와 시민들의 반대로 법을 제정하지 못했다. 동성애와 동성혼이 세계적인 추세이긴하나 우리 한국만이라도 기필코 막아야하고 한국이 동성혼 반대 분위기를 전 세계에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동성혼은 성경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레 18:22, 고전 6:3, 롬 1:24~27) 뿐만아니라 동성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사 부부가 되게 하셨다. 동성혼은 순리가 아니고 역리이다. 또 한가지는 동성혼은 에이즈를 확산시킨다. 어느 면으로 보든지 동성애와 동성혼은 막아야할 악습이다. 한국교회는 이 악습을 막아내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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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07-23
  • [시내산] 때늦은 후회는...
    엊그제 내린 봄비에 새싹이 쏙쏙 자란 것 같은데 벌써 7월이다 앞산 중턱에 어미고라니가 새끼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뛰어놀고 밤새 울어대던 소쩍새 노래는 하늘을 멤 돌고 있다. 7월 초여름 푸르고 신비로운 자연의 변화 누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과학과 인간의 힘으로 할 수없는 대 자연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분은 바로 전능하신 성령님이시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어 온 천하 만물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대자연은 계절을 따라 경이롭고 신비롭기 그지없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데 작금의 한국 교회는 푸르고 싱싱한 여름이가고 낙엽 지는 가을이 온다고 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다. 머지않아 교인수가 줄어들어 예배당 문을 닫게 된다고 하니 기도 쉬는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다. 숫자로 보면 동네 다방보다 더 많다던 한국교회 국민 네 명중 한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엄청난 영적 부흥을 일구어 냈던 한국교회가 쇠퇴하여 진다니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 모두 홀연히 일어나 서산마루 지는 해를 바라만 보지 말고 죄악의 어둔 그림자가 이 땅을 삼키기 전에 한국교회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한국교회를 살리고 다시금 부흥의 파도를 탈수 있을까? 지나간 세월을 회상해보며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 몇 가지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순수성을 잃었다! 가난과 헐벗음 굶주림 속에서 절망하던 이 나라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격하였던가? 교회에 가면 누구나 소망이 있고 웃음과 행복이 있었다. 성도 간에 격의 없이 뜨겁게 사랑하고 아낌없이 나누며 베풀고 살던 삶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세상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단호하게 배척하고 내쳐야 했음에도 교회는 세상 유혹에 힘없이 젖어들었다. 그것이 상한 누룩이 되어 교회를 썩고 부패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갖은자와 갖지 못한 자의 괴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의 차이가 없음에도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세상의 명예 권세는 성도의 사이를 벌려 놓았다. 결국 교회는 세속주의에 물들기 시작 했다. 둘째.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겼다! 그 우상은 무엇인가? 바로 돈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 사상에 젖어 버린 것이다. 한국 교회들이 다 그런 것 아니겠지만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주인 행세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 한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마치 자기 소유인양 목소리 높아지고 군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 한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돈 없으면 아무리 믿음 좋아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등한시 되었다! 예배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처럼 흘러나와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어야 함에도 말씀은 뒷전이고 자기자랑 세상 자랑 자녀자랑 코메디 연기로 성도를 웃기려는 인도자가 보이니 참되고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뿐이랴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옆 사람과 인사를 하게하고 예배를 방해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 될 수 없지 않은가? 넷째. 성도의 생활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다! 교회에서 신실한 믿음의 일꾼이요 봉사 잘하고 열심인 사람이 세상에 나가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별 할 수없는 세상이 되었다. 회식자리에서 술잔 드는 것은 당연하고 한잔 정도 마시는 것은 가벼운 일? 식사 전 감사기도 않는 것은 예사가 되었다. 이러니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한국교회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진정 부흥을 원한다면 굵은 베옷을 입고 십자가 밑에 엎드려 무릎 꿇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통회자복하며 입고 있던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 백성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자비의주님 그 손에 들려있는 은총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이를 갈며 슬피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때 늦은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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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안동철 목사] 교회에서 다음세대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탈종교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갤럽이 2014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의 전체 종교 비율은 50%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10년 전인 2004년에 비해 4%가 하락한 수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0대의 종교인구가 68%로 가장 높은 반면, 30대에서 38%, 20대에서는 3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종교 비율은 전형적인 역삼각형 모델로 한국사회 전체의 종교 미래가 어두울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의 시각을 교회 내 다음세대로 한정해 본다면 더욱 충격적이다. 현재 한국의 중고등부 학생의 복음화율은 3.8%로 선교지에 가까운 참담한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 1996년 미국의 ‘Christianity Today’가 ‘소리 없는 출애굽’(Silent Exodus)이라고 말한 현상과 비슷하다. 즉, 미국 내 한인교회 2세대들이 고등학교 졸업을 전후로 70%가 교회를 떠났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90%가 교회를 떠났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의 다음세대의 교회 이탈 속도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이 말한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가 되는 일은 머지않은 일이다. 젊은 세대의 탈종교화, 특히 교회의 미래가 될 다음세대의 급격한 교회 이탈은 왜 이렇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불신자들에게 너무 안 좋아진 것에서 찾고 싶다. 이는 비종교인에게 종교를 믿지 않는 것과 무관하게 가장 호감을 느끼는 종교를 물은 결과 ‘개신교’가 10%의 비율로 불교, 천주교 등 주요 종교들 중에서 꼴찌를 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개선을 위해서는 교회의 미래인 다음세대에 전략적인 집중을 해야 하며, 그들을 복음으로 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자 매튜 팍스(Mathew Fox)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전통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성경 안에서 보여 지는 두 가지 은총 중 ‘붉은 은총’(red blessing)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즉, 교회 중심의 신앙을 말하며, 죄와 용서에 집중한 것이다. 물론 붉은 은총이 없는 기독교는 없다. 그러나 매튜 팍스에 의하면 기독교는 또 하나의 은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푸른 은총’(blue blessing)이다. 이 푸른 은총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관심을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더불어 사는 것,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것 등에 대한 관심이다. 오늘의 다음세대가 주목하고 있는 바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물을 짓는데 전념하던 패러다임을 ‘붉은 은총’과 ‘푸른 은총’으로 무장된 다음세대를 길러내는 데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이스라엘의 다른 세대가 여호와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삿 2:10). 여호수아가 위대한 믿음의 용장이었지만, 다음세대를 향한 신앙전수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런 실패의 아픈 기사를 남겨놓으신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부모와 교회가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신앙의 전승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다음세대를 향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다음세대 부흥을 통한 한국 교회의 회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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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7-09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5)
    잠언 27:17에 이런 말씀이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탈진 상태에 빠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누구일까? 부모? 아내? 자녀? 형제? 스승? 상담사? 의사? ... 물론 다들 소중한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다.그러나 성경이 확증하고 있는 바처럼 인간관계에서 〈친구〉만큼 좋은 것은 없다.옛 어른들 말에 「부모 팔아서 친구를 산다」고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정하게 성장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부모님보다도 ‘친구’가 더 필요하다. 친구란 “가장 가까운 사이 /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 / 어떤 어려운 문제(부탁)도 들어주고 도와 줄 수 있는 사이 /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 / 전쟁터에서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이 / 외롭고 힘들 때 만나고 싶고 전화하고 싶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 / 내게 있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기꺼이 주고 싶은 사이 ... ” 이다.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 나의 친구’ 라고 말씀하신다(사41:8, 대하 20:7, 약2:23, 창18:17). 그러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도 ‘친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친구)이 필요하신 것이다.이 얼마나 놀라우면서도 기분 좋은 현상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고 ‘나의 벗 나의 친구’ 라고 하시니 지켜보는 우리들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온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믿음의 후손-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롬4:11,12).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래, 너희들도 나의 〈벗〉 이다” 라고 말씀해 주실 가능성이 아주 크다.신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좋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시고 제자들은 〈학생〉이라는 도식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요 15:11~15)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요13:1), 보호하시고(요14:18),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다(눅22:32, 요20:19, 21:15). 그리고 여전히 사명을 맡기셨다(요21:15, 행1:8).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부께 제자들을 이 험난한 땅에서 보전(保全)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셨다(요17:15). 그리고 성령께도 제자들을 잘 도와주고 지켜 줄 것을 당부 하셨다(요16:7). 그리고 자기 자신도 친히 제자들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마28:20).〈친구〉란 이러한 것이다. 끝까지 함께해주고 할 수 있는 바는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다 동원하여 사랑하고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이이다. 이 모든 것을 조금도 귀찮게 여기거나 억지로가 아니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베풀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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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7-09
  • [교회법률상식] 위험천만한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의 발상(1)
    -상비부와 특별위원회, 총회가 위탁하지 않은 사건 처리 못해-정치부 상설화는 소수집단이 꿈꾸는 위헌적 독재정치의 꼼수 기독신문 제2015호(2015.6.24.) p.2에 “총회기구혁신안 나왔다”라는 머리기사의 “정치부 상설화로 헌의안 심의 강화”라는 소제목으로 “정치부에 5-6개의 분야별 상설소위원회를 설치해서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정치부는 이 안들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총회실행위원회에서 심의하므로 가을의 본 총회에서 이를 내외에 수백 건의 헌의안을 급하게 처리하는 일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특별위원회는 거의 폐지되게 된다. 즉 올해와 같은 경우 총회정치부 관련 헌의에 대해 구성된 특위만 27개인데, 이 특위의 임무가 정치부 산하 분과들로 분산되는 것이다. 정치부 내에 설치가 가능한 분과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제1분과위 : 헌법, 규칙적용 유권해석, 제2분과위 : 기구, 제도설치 연구, 제3분과위 : 기구, 제도운영 개선, 제4분과위 : 노회행정 조정, 제5분과위 : 불법, 분쟁 조사처리”라는 기사내용과 “한국교회 교류협력위원회, 세계교회 교류협력위원회, 통일준비위원회와 같은 상설위원회는 상비부 산하가 아니라 상설위원회로서 활동하게 한다는 것이다.”라는 기사내용은 경악을 금치 못할 충격적인 대형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이유인즉 “정치부 및 특별위원회의 상설화는 헌법을 무시하고 민주적인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는 일부 소수의 집단적 독재정치를 구상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헌법을 무시하는 것은 곧 성경을 어기는 행위로서(교회 법률상식 pp.608-612 참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인본주의적 정치체제에 다름 아니다. 1. 치리회와 상비부 정치 제8장제1조(정치의 필요)에 “교회를 치리함에는 명백한 정치와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전14:40). 정당한 사리와 성경 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한즉 교회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다(행15:6).”라고 하여 치리권은 치리회에만 있도록 한 것이 성경과 교회 헌법이 정한 진리요 법리이다. 그런데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는 성경과 교회 헌법의 근본인 장로회 정치의 대원리를 배격하고 치리회인 총회만 처리할 수 있는 노회가 상정한 모든 안건들을 “정치부 상설화로 …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자는 내용이다.”라고 하였고 “이렇게 되면 … 사실상 특별위원회는 거의 폐지되게 된다(올해에 구성된 27개의 특별위원회와 같은 경우 등).”라고 하였으니, 총회가 처결하는 사안과 특별위원회에 맡겨 처리할 사안들을 정치부가 도맡아 하게하는 위험천만한 비성경적 위헌적 소수집단을 구성하여 정치부가 총회위에 앉아서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제정한 교회 헌법은 “치리권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부가 위원회 심사의 원칙을 무시하고 총회 헌법을 어기며 총회의 위탁도 받지 아니하고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도록”(정치 제12장 제4조 위반) 할 수 있으며, 정치 제12장 제5조(총회 권한) 제1항에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고”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부가 총회의 위탁도 받지 이니 하고“헌법, 규칙 적용 유권 해석”까지 하게할 수 있으며, 동 제3항에 규정한 헌법 조항을 무시하고 “불법 분쟁조사처리권”을 총회의 위탁 없이 정치부가 시행할 수 있도록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혁신위원회의 구상은 장로교 정치의 근본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시행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을 폐기하며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부가 총회의 옥상옥이 되어 독재정치를 해보겠다는 잠꼬대 같은 발상으로 여겨진다. 이는 총회가 장로회정치를 포기하고 혁신위의 구상대로 헌법을 개정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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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성경인물탐구] 관용의 사람 요셉(8)
    요셉은 관용의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무 죄도 없이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고에게 팔려 애굽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형들에게 미움과 분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려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판 일로 인해 마음에 불안을 품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은 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인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야곱이 죽자 마음속에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죽었으므로 요셉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야곱이 죽기 전에 형들을 용서할 것을 요셉에게 유언하였다고 전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들을 때에 울며 형들에게 두려워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형들이 자신을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하셨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알았기에 형들의 악행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을 때 어떠한 일도 관용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지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 아비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셔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습니다. 요셉은 장수의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고하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 곧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들을 권고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자신의 유골을 메고 가져가겠다는 약속을 하게했습니다. 요셉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이루어졌고, 요셉의 뼈는 세겜에 장사되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애굽의 총리였지만 그 땅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언약하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고 그 언약 성취에 소망을 둡니다. 요셉이 가졌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서 구원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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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성공칼럼] 마지막 때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를 믿는 것과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주를 믿기는 하지만 그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주를 믿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믿음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이 둘이 서로 분리되면 심하게 말하면 그 신앙은 사기이며 거짓이며 악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며 상대방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며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 사랑을 위해 생각이나 노하우나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에서 진리가 나오고 진리는 사랑으로 가기 위한 길인 것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없고 진리 없이는 사랑으로 갈 수 없고 사랑을 전할 수도 없으며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과 진리와 선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서재에 수천 권의 책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책을 구입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썼고 읽고 정리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지불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칼럼과 책을 쓰고 강의도 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들도 있다. 그러면서 지금 나는 얼마나 인격적인 사람인가? 얼마나 선을 행했는가? 사람들에게 내 것을 얼마만큼 주었나를 생각해보면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만 들 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두려움은 더 생기고 마음은 더 좁아지고 이기적이 되는 것을 본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자신이 이루어놓은 그 어떤 능력이나 공적은 사라지는 것이며 내 속에 사랑과 진리와 선의 모습이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놓지 않으면서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 "네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했어도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보면서 주의 이름으로 목사, 장로를 하고 큰 교회, 큰 부자, 권력자일지라도 사랑과 선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 모습은 추한 모습이기에 주께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를 믿는다고 하면 ‘서로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는 말씀을 행동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과 선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좋은 말과 달콤한 말을 하면서 실제 행동에는 악과 이기적인 속셈이 있으면 그는 사기꾼이며 악한 자인 것이다. 이런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의 분리 이것이 사단의 계략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원래 사랑과 선에서 지혜와 진리가 나오고 진리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며 믿음을 통해서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선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믿으라고 하면 이것은 독재이며 악인 것이다. 독재시대를 상기해 보라. 그들은 좋은 명분을 갖고 믿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는 사랑과 선이 있지 않았다. 그냥 위협과 강요와 협박이 있었을 뿐이다. 자유를 주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악 중의 악이다. 천국은 주를 믿는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지배욕을 갖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화내는 사람이나 소유욕으로 돈과 권력과 최고의 좋은 것을 누리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숨이 막혀서 살 수 없는 곳이다. 으뜸이 아니라 낮은 자가 되는 것, 지배가 아니라 섬기는 것에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만 있으면 여기에는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능력, 무한한 풍요와 무한한 기쁨, 무한한 성장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가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곳이 천국인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마지막 때를 예언한 것을 보면 “마지막 때는...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리라.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다. 진리에서 사랑이 분리되는 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인 것이다. ‘이것이 옳다’ ‘이 말이 진리다.’ ‘이것이 방법이다’....이런 말들은 홍수처럼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진심과 사랑과 선이 없으면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는 것과 같다. 요즈음 책들이 얼마나 많으며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인터넷에 넘치는 것이 지식이며 진리다. 그러나 사랑은, 정직함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은 얼마나 있는가? 주를 사랑하고 믿는 것만큼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과 선을 행하는 하나가 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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