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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령과 직권남용으로 ‘정직 6개월’
    A노회 B교회 담임목사가 ‘횡령’과 ‘직권남용’으로 노회 재판국으로부터 정직 6개월을 처분받았다. 노회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교회 부속건물의 임대료 및 관리비 명목으로 7년 2개월 동안 1,450만원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교회에 알리지 않고 임의로 관리하고 지출하였으며 코로나 지원금 잔액 135만원도 재정부에 반환하지 않고 임의로 지출하였다. 비록 사무간사를 통해 관리해 왔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고 하나 이는 횡령에 해당하며 교회법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판결했다. 또 “직원 퇴직금을 당회와 제직회의 허락 없이 연금상품에 가입하고, 당회나 제직회가 알지 못하는 통장을 개설하고 관리하였으며, 회계 전산 프로그램에 접근하여 항목을 조정하고 1,875,100원 송금을 지시하는 등 목사로서 본연의 직무를 벗어나서 교회 재정관리 전반을 직접적으로 관리하였는데 이는 담임목사로서 직권을 남용한 일”이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외 ‘소송당사자 관계인 피고가 두 번의 당회를 소집하고, 임시당회장을 청한 것’과 ‘(교회 부속건물의 임대료 및 관리비)통장을 임의로 해지 한 것이 증거인멸의 의도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며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목사라는 점을 감안 할 때 중벌을 면키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횡령한 대부분의 금액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한 점과 늦게라도 직원 퇴직금을 지급하기 위해 187만원을 교회통장에 입금한 점, 그리고 선처를 요구하는 220명의 자필 탄원을 고려하여 주문(정직 6개월)과 같이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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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9-09
  • [서임중칼럼] 지도자의 헤드십과 리더십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은 이번 파리대회에서 금메달을 가장 많이 획득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총 33개의 메달을 획득했는데 파리 올림픽에서는 예상을 뛰어넘은 금메달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로 32개의 메달을 땄다. 한마디로 국위선양과 체육인들은 물론 국민 축제다. 폭염과 장마보다 더 짜증나는 정치권 뉴스를 날마다 들으면서 불편했던 국민에게 올림픽 금메달 소식은 얼음냉수를 마시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배드민턴 세계 1위의 안세영 선수의 협회를 향한 작심 발언으로 뒤숭숭한 어두운 면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최고 성적을 내고도 개운하지 않다. 협회와 선수의 갈등이 잘 해결되어 한국 체육 문화가 한 단계 발전되기를 바라면서 이즈음에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언제부터인가 양식(良識)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이 나라 정치지도자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그 발원지를 대부분 국민은 여의도 1번지를 지목한다. 선량(選良)들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언행을 우리는 날마다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면서 뉴스 시간이면 TV 채널을 돌려 마음이 구겨지지 않는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무엇인가 한참 잘못되어 가는 현상이다. 어디 정치지도자뿐이겠는가 교회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도 옛이야기로 들리는 아픈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Ph. D.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에 관한 내용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조사된 바에 의하면 교회 성도들의 공통점 하나가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懷疑)였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자란 목사와 장로에 국한 시켰고 지도력의 회의(懷疑)란 목사와 장로의 지도력에 대한 이해를 헤드십(headship)으로 인식을 하고 리더십(leadership)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로서 자괴지심(自愧之心)에 아파하면서 보다 더 바람직한 목회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었다.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한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목표를 잡고 꿈을 이루기까지 원동력은 제 분노였다.”는 아픈 말을 지도자들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헤드십을 정해진 의무의 강제적 이행을 구하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며 또한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리더십은 상대방의 진보와 향상을 도모하며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우리라는 공동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말할 것 없이 이와 같은 리더십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도자들에게서 리더십이 아닌 헤드십이 발휘된다면 이는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리더십이 아닌 헤드십을 발휘하는데서 오늘의 교회가 갈등과 무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평안과 부흥은 올바른 리더십에서 가능하며 그로부터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게 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분야의 지도자도 다를 바 없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지도자들의 약점이 무엇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 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자는 항상 이론과 실제, 그리고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로 고민하게 된다. 정치나 사회교육이나 종교 등, 모든 분야의 공동체는 지도자의 행동철학을 보고 싶어 한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이나 탁구의 경우 지도자의 헤드십이 아닌 리더십을 언론은 조명한 것을 공감한다.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은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다. 그것이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던 것이다. 좁쌀만 한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명예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가 아니라 ‘내가 있기에 네가 있다.’는 자가당착의 병리적 현상에 젖어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대한배드민턴협회 국가대표 운영지침에 ‘선수들은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와 ‘담당 지도자의 허락없이는 훈련에 불참하거나 훈련장을 이탈할 수 없다’는 조항이 대한양궁협회 국가대표 운영지침과 비교되고 언론에 조명되는 이유는 헤드십과 리더십을 통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파리 올림픽 경기에서 배드민턴 선수와 양궁 선수의 결과를 통해서 확인되면서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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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성서연구] 큰 일과 중요한 일
    예레미야서 후반부 35장 이후를 읽노라면 마치 기울어가는 타이타닉호를 보는 듯합니다. 배가 기울 때 사람들이 극도의 혼란 중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처럼, 바벨론 군대의 포위 아래 놓인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때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와중에서도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유다의 멸망 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레미야는 사랑하는 나라의 멸망을 바라보며 극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눈물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와 함께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는데, 예레미야의 서기인 <바룩>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했습니다. 45장 1절을 보면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예레미야가 갇혀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왕과 방백들 앞에서 기록한 예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바룩도 당시 상황에서 예레미야 못지않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45장 3절을 보면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씀대로 살길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받습니다. 반면에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5장 5절 앞부분을 보면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바룩이 추구할 수 있는 큰일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우선 살길을 찾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또 국가적으로 유다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찾는 것도 큰일일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다가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도모할 동지라도 규합하는 것도 큰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큰일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룩에게 주신 말씀에서 말기적 혼란기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배우게 됩니다. 큰일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유다를 징벌하여 멸망하게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일관되게 외친 메시지도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5장 5절에서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동기로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도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5장 4절입니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의 역사를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셋째, 바룩 자신이 큰일을 도모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룩에 대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45장 5절 후반부를 보면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룩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붙잡고,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하루하루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한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종종 이루지도 못할 일, 이룬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대단한 삶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역사의 물줄기를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묵묵히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주어진 상황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영역에 지나친 미련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초연하길 기원합니다. 큰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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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은혜의말씀] 성령의 불을 받아라 (누가복음 12:49~51)
    물에 물 탄 듯이 맹탕인 인생들이 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 무미건조한 물맛이다. 계3:14~16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하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였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지형적으로 북쪽 히에볼리의 물은 뜨거운 온천수이고 남쪽 골로새의 물은 시원한 냉수지만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만다. 삶도 그러한데, 뜨뜻미지근한 맹탕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슴에 불덩어리가 있는 사람이 있다. 냉철하게 시원한 것도 아니고, 불같은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닌 맹탕인 사람, 불씨, 열정이 없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던지러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신 게 아니라 불을 땅에 던져서 분쟁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였다. 잠시의 평화가 아니라 영생의 복을 받는 항구적인 평화를 얻어야 된다. 당장 시끄러울 까 싶어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지나면 복음을 전할수가 없다. 집안이 시끄러울 까 싶어서 미루고 연기하다보면 회개 할 틈이 없이 너무 늦어서 가족구원을 놓치게 된다.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천국의 복을 전하기 위해서, 회개하라는 불을 던지고 충격요법을 써라.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급진적이고 강력하다. 성령이 임할 때 생짜배기 베드로가 변화되어 하루 저녁에 삼천 명을 변화시키는 불의 사도가 되었다. 성령은 불처럼 나타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뜨겁다. 뱀은 냉혈동물이다. 저온에서 증식하는 암세포처럼, 사탄마귀의 역사는 싸하고 차갑다. 신앙생활도 냉랭하고 식어빠진 심령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은혜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불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내 가슴에 발화가 되고 착화가 되고 점화가 되어야 한다. 내 마음의 엔진에 발동, 시동이 걸려야 한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해서 뜨겁게 반응할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세례를 받고 큰 기쁨이 있었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이다. 물 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하라. 불씨가 없으면 아예 소망이 없는 것이다. 껍데기 신앙, 무늬만 신앙, 인본적이고 세속적인 짝퉁 믿음의 가면을 벗어라. 회개하라. 성령의 불을 받아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서 하늘의 영광과 거룩함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할 때 천사가 핀 숯불로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였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모든 더러운 것을 불사른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 작은 불씨가 큰 불로 불타오르게 하라. 성령을 소멸치 말라.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첫사랑이 식지 않도록 이열치열하라. 바빠도 기도하고 힘들어도 찬송하고 어려워도 선불감사하라. 삶이 역기능적으로 꼬이지 않고, 피곤이 만성이 되지 않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 은혜 위에 은혜를, 갑절의 영감을, 칠 배의 권능을, 백배의 결실을!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열정의 소유자들이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이 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나아가야 세상을 이길 힘이 있다.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나가서 전하든지, 보내든지,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기도하든지, 섬기든지, 헌금하든지 한 가지를 똑 부러지게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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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시사칼럼] 뒷것의 최후
    한 달 전 가수며 연출가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명인들 중에서도 동명이인이 많으니 “아침이슬”의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떠나기 석 달 전 어느 공중파 방송에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었지요. 제목부터 전율을 느꼈습니다. “뒷것”이라니, ‘앞것’이 아니라 “뒷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든 간에 분명하게 누렸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을(1951년생) 그는 철저하게 ‘앞것’이 아니라 “뒷것”으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아침이슬” 탄생부터 그랬습니다. 1971년 어느 날 습작처럼 발표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악보, 현장에서 까닭모를 놀라움을 느꼈던 후배가 주워서 펴고 이어 붙여 연습하며 발표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흔쾌하게 허락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된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이었기 때문입니다. 원곡자인 그도 훗날 이따금 불렀지만 어느덧 저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전설이 되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함께 불렀던 이 노래의 앞것으로 후배(양희은)를 세우고 스스로는 기꺼이 “뒷것”을 자처했습니다. 동물원, 들국화, 강산에, 박학기, 장필순, 권진원, 유리상자도 그가 후원한 자들입니다. 고 김광석의 공연장을 제공했으며, 세계적인 재즈 싱어 나윤선도, 대가수 윤도현에도 모두 그의 후광이 서렸습니다. 얼마나 쟁쟁한 앞것들입니까! 뒷것은 뒤에서 그저 서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무대 뒤편에서 처절하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존재가 아닐까, 김민기 때문에 떠오르는 상념(想念)입니다. 1991년, 그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십 년 노래 인생을 정리하면서 기념 음반을 발매하기로 하고 제법 묵직한 계약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어려운 형편의 연극인들을 위해 만든 공간이 바로 <학전(學田)>입니다. 그리고는 묵묵하게 뒷것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가 만든 이 배움터(학전)을 통해서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대표적인 앞것들이 ‘학전 독수리 5형제’라 불리는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입니다. 또 얼마나 쟁쟁한 앞것들입니까! 하지만 본인도 잠깐 연극계에서 앞것처럼 자리매김할 때도 있었습니다. 흥행가도를 달렸던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연출가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공연이 잘 될수록 그는 더 낮은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친구다’, ‘개똥이’ 같은 어린이극을 잇달아올린 것입니다. <지하철 1호선>을 멈추면서까지 그랬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돈 되는 일을 하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이 합동결혼식을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만든 노래가 애국가의 대체곡으로까지 거론되는 <상록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까지 뒷것의 인생을 살고자 했을까요? 수줍은 성격 탓이었을까요? 평생 저항의 사람으로 살았으니 그런 이유 같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는 자질이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일까요? 서울대미대를 졸업하고 기타 하나로 당대 음악의 천재들까지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는 그 실력을 보면 또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후대에 더 이름을 남기고자 했을까요? 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책세상, 2001)에 “수정된 누가복음 18장 14절”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써놓았습니다(99 p.).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지금은 낮은 곳에 있으나 언젠가는 높아지리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낮춤을 이용해서 높임을 받으려는 영악한 목적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음험한 자들은 또 없을까요? 그러나 적어도 예수는, 니체가 어떤 의도로 또 날카로운 펜끝을 누구에게로 향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런 부진정한 뒷것론을 펼친 적도 없고 또 그런 뒷것을 가장하며 사시지도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8-9), 예수야말로 뒷것 중의 뒷것이요 그가 진 십자가야말로 뒷것의 극치가 아닙니까? 김민기가 노래패로 활동을 펼쳤던 곳은 “청개구리의 집”이었는데, 서울 명동에 있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 한쪽에 마련된 무대였습니다. 한국에서는 1922년 시작된 YWCA는 주지하다시피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약자입니다. 수도 없이 노래했을 그곳에서 김민기는 많은 젊은 여성 그리스도인(Christian)을 앞것으로 세우시는 위대한 뒷것의 존재를 만나지 않았을까요?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도 YWCA 파견 교사였다 하니, 혹시 김민기의 <상록수>라는 제목도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예수와 김민기의 신비한 만남은 없었는지, 뒷것 김민기는 어쩌면 예수의 뒷것으로부터 나오지는 않았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그 은밀한 접점 가운데서 탄생했을지도 모르는, 고인의 노래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금관의 예수>를 소개하며 글을 맺습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1973년, 김지하 글, 김민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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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신앙교육나침반] ALL GENERATION 가정을 품는 여름사역 현장 속으로!
    이번 여름, 한국교회의 수많은 교회는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는데에 진력하였습니다. 특히 올해는 다음세대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다음세대의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다음세대가 살아가는 현장인 가정을 품지 못하면, 결국 다음세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닌 우리 모두가 몸소 경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하기에 많은 교회는 점점 더 다음세대의 가정을 품는 사역을 전략적으로 준비하여 실행하고 있습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매년 여름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는 찬양과 복음설교, 복음놀이는 모두 교회와 가정이 함께하는 신앙교육현장을 위한 온세대 가정사역 프로그램입니다. 올해 많은 교회가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의 <느헤미야> 주제의 복음놀이 프로그램으로 ‘무너진 가정을 교회로 다시 세우자’는 슬로건을 걸고 온가족, 온세대 성경학교와 전교인 수련회를 진행하셨습니다. 과연 교회가 가정을 품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온 세대 가정이 느헤미야 말씀에 담긴 창조타락구속의 복음을 성경학교와 수련회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과 설교, 복음놀이를 통해서 경험하였습니다. 한 손에 모두 고자극 스마트폰을 들고 수시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앉아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은 도무지 긴 시간 동안 복음을 듣고 경험하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드디어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시작되고, 찬양과 설교와 복음놀이가 거듭될수록, 부모와 자녀들의 손에 꼭 쥐어져 있던 스마트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추상적인 언어로만 전하지않고 온몸으로 경험하는 온세대 복음놀이로 전하자 복음은 스마트폰이 주는 재미를 초월하는 고자극 복음자극이 되었습니다. MZ세대 부모와 알파세대들의 입술에서 연신 “너무 재미있어요!"가 터져나옵니다. 이번 여름에 실제로 온가족 성경학교와 수련회에 참여하였던 아동, 청소년, 부모세대의 후기를 몇 가지 공유드립니다. “온가족이 함께 복음을 듣고 놀이하면서 한마음으로 활동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복음풍선을 날리고, 물총놀이하며 마귀와 서바이벌 게임 한 게 가장 재미있었고, 또 하고 싶다. 여름성경학교를 한 후, 예수님과 한발짝 더 가까워졌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다.” “복음 벽돌을 하나씩 빼면서, “하나님을 떠났어요” “사랑을 잃었어요”..라는 말을 하다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교회의 무너진 곳이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무너진 성을 세우고 싶어요.” “부모님이랑 함께 십자가만들기 놀이를 할 때 활기차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복음서바이벌놀이를 할 때 말씀과 믿음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엉망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너무 활기차게 놀고 갑니다.” “예수님이 우릴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 “찬양과 복음설교, 여러 놀이를 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 “부모님 분들이 저희를 지켜주신 것처럼 저도 이 다음에 부모가 되면, 말씀으로 무장해서 우리 자녀를 지켜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교회만 다니는 부모가 아니라, 말씀으로 무장한 믿음의 부모가 되어 우리 딸을 지켜주어야겠다. “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개닫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온전하게 전하여 믿음의 자녀로 바르게 설수 있기를 기도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 “우리 아이들을 유혹하는 것이 많은 세상을 느꼈고, 말씀무장과 기도로 아이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씀과 기도를 심어주어야겠다고 결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세대가 아닌, 신앙을 이어가는 다음세대가 되기를 더욱 열망하게 됩니다. “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복음을 받고,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 같아요. “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다음세대를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말씀으로 무장해야하는 큰 책임감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덤으로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 “오늘 자녀들과 귀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낸 거 같습니다. 말씀으로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가정을 지키며 회복하는 경건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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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다음세대칼럼] 엘리 가정이 주는 교훈
    사무엘상 4장 12절부터는 엘리 가문 몰락에 대한 기록이다. 13절 말씀에는 전쟁에서 달려온 베냐민 사람이 언약궤를 빼앗긴 것과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은 소식을 전한다. 그러자 온 성읍이 떠들썩하고 공포와 부르짖음으로 가득했다고 기록한다. 이로 인해 엘리가 죽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그의 며느리도 죽었다. 이것은 멸망의 도미노이고 부메랑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제사장 집안에 저주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씨 뿌림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선하게 살고 의롭게 행동했더라면 이 가정과 이 나라에 이런 재앙이 일어났겠는가? 엘리의 두 아들은 삼상 2:12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몰랐다고 기록한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만 했던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다. 그들에게는 체험적 신앙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는 자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불법자들이다. 이들은 제사를 멸시했고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욕보였다. 이런 자식들을 아버지 엘리는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아들들의 악행을 듣고도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 그러지 말아라, 주변에서 들리는 너희에 대한 소문이 좋지 못하다’라는 그 정도로 꾸짖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책망해도 그 아들들은 듣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이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다고 사무엘상 2장 25절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신앙생활의 모습을 가르치기에 엘리 제사장은 소홀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제사를 멸시한 삶의 결과가 바로 오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전장에서의 비참한 최후로 나타났다. 이 아들들의 죽음과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엘리 제사장도 넘어져서 죽었다. 출산을 앞두고 있던 그 며느리도 태어나는 아이에게 ‘이가봇’이라는 이름이 붙여주고 죽었다. 이것은 성경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저주스러운 한 가정의 몰락 장면이다. 요즘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보게 된다. 중직자의 자녀들도 교회를 떠난다. 우리가 행한 삶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선한 행실을 한 사람은 선함과 의로움과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악한 행실을 일삼는 사람은 실패와 두려움과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로마서 2:6-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믿음의 다음 세대에게 진리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 예배자로 살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선한 행실을 한 사람은 선함과 의로움과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7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여러 사람이 부인하고, 유력한 인사와 뛰어난 학자들이 부인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많은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소리를 다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실과 마음속 생각까지 읽고 계신 분이시다. 오늘 하루의 삶과 예배를 보시고 받으시고 기록하시고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선한 것은 선으로 악한 것은 아픔으로 갚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머지않아 그 심으신 것의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선한 행실을 심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우리는 엘리 가정을 통하여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없던 시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던 그 시대를 보면서 요즘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무능한 지도자 엘리 제사장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게 만들었던 그 모든 책임이 사실상 엘리 제사장에게 있었다. 그의 실패한 삶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교훈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오늘 심는 것은 내일과 모래, 우리 혹은 우리의 자손들이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심어야 한다. 바르고 옳은 것을 심어야 한다.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으로 심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만한 것으로 심어야 한다. 선한 행실을 심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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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칼럼
    2024-08-16
  • ‘교회 다닌다’는 사실을 숨기는 청소년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최근 기독 청소년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학교에서 크리스천임을 드러내고 신앙 얘기를 하는 편’이라는 응답이 43%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꺼려짐’,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비난이나 놀림을 받은 적이 있음’이라고 응답한 비율도 각각 19%, 17%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목회데이터연구소측은 “크리스천임을 드러내는 것에 떳떳하지 못하고, 심지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친구들 사이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학교 문화권에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기독 청소년들에게 신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목회자가 아닌 어머니 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조사에서 ‘어머니(30%)’를 꼽은 청소년들이 가장 많았고, ‘지도 목회자/사역자(25%)’, ‘아버지(14%)’, ‘교회 친구/선후배(10%)’, ‘교회학교 선생님(8%)’, ‘학교 친구/선후배(5%)’, ‘형제 자매(4%)’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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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8-16
  • 정명석 추가 구속
    JMS 정명석이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구속 심문을 마친 뒤 도주우려로 인해 추가 구속됐다.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정명석은 지난 15일이 항소심 구속기간 만료였으나, ‘불구속 상태일 경우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구속기간은 2개월 단위로 2차에 한해 갱신할 수 있어 최대 6개월 연장이 가능하다. 1999년 정명석은 여신도 성추문 사건에 휘말리자 해외 도피 생활을 전전했다. 2007년 5월 중국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10개월간 조사를 받다가 한국과 중국 간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2008년 2월 한국에 들어와 강간치상, 강간, 강제추행 등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018년 2월 형 만료로 대전교도소에서 전자발찌를 차고 출소했으나 불과 4년 만인 2022년 또다시 여신도를 성폭행하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정명석은 1심에서 징역 23년을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해외 도피 생활을 한 이력이 지금에 와서 ‘추가 구속’으로 귀결되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정씨는 22일 항소심 6차 공판이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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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4-08-16
  • 나의 교계 언론 55년 ..
    “우연이 모이면 필연이 되고 필연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고 한 말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구가 사형 집행 사흘 전 고종 황제에만 부여된 낡고 처음 설치된 전화기로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고종의 한 통의 전화가 그의 일생을 바꿔 놓았다. 생전에 언론이란 낱말도 생소한 언론과는 거리가 먼 맨땅에서 헤딩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첫 발을 딛고 시작한 교계 언론 초년생이었던 1969년 8월 초여름 날 삼복 더위 속에서 우연한 교계 지인(이관동씨)의 소개로 광복동 입구에 위치한 작은 3층 자리 건물 안에 마련된 ‘교회연합신보 부산지사’ 수습기자로 들어 갔다가 6개월 만에 현재 동서대학의 전신인 부산실업전문학교 교장 장성만 목사에게 학교 탐방 취재 목적으로 방문하여 취재한 다음 차를 나누는 시간에 장 목사님이 잘 아는 김연준 장로(한양대학 설립자이자 그의 부인 백경숙 여사가 교회연합신보 이사장 겸 발행인)에게 소개 추천장을 써 준 관계로 서울에 직접 본사 방문 후 지금의 (주)기독교신문 사장 장충협 장로로부터 부산 주재 기자 발령을 받은 것이 첫 교계 기자의 출발점이었다. 정말 우연한 계기가 필연으로 역사의 현실적인 삶의 변화로 55년 세월의 오늘까지 이어 온 것이다. 지자제로 지방화 시대 열었던 1995년 4월 11일 ‘부산기독교신문’으로 첫 교계 지방지 신문 발행으로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지금의 명예이사장 박선제 목사를 창간 축하 예배 설교자로 장충협 교회연합신문 사장의 축사와 당시 부산시장 문정수 시장의 축사, 부산교계 인사 150여명 내빈들이 참석하여 거창하게 지방화 시대를 열었던 부산 교계신문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 후 몇 년 뒤 신문 제호를 부울경을 커버할 뿐아니라 한국교회 전 지역을 배포하는 의미에서 신문 제호를 ‘한국기독신문’으로 바꿔 발행하여 지금은 인터넷 신문과 종이 신문을 동시에 발행한지 무릇 29년이 흘렀다. 이제 나이도 80세를 넘겨 한계가 와서 아들(신상준 국장)에게 회사 운영권을 넘겨주고 조용히 지나간 교계의 역사 현장 칼럼만 쓰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연재 된 ‘역사의 현장’ 1권, 2권과 ‘부산예수’란 연재물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은성교회 장로 시무 18년 은퇴 후 주일 날은 1부 9시 예배 드리고 2부 11시는 집 근처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작은 교회(부민드림교회)를 은퇴장로로서 조용히 출석하며 자리를 메우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마지막 주일은 ‘시련과 성숙’(야고보 1:1~4)이란 제목으로 8월 4일 첫째 주일 주기철 목사(고신대 신학 교수)가 맡아 설교하는 제목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야고보 1:5~8) 제목으로 설교하시는데 주목사 자신이 10년 동안 영국 유학 생활동안 온갖 고생과 알바로 시련을 겪어 온 과정을 지낸 젊은 시절을 연상하면서 “시련은 헛된 것이 아니고 믿음을 테스트하는 것이며 이를 통과하면 성숙과 인내가 주어 진다”는 메시지가 나의 과거 힘들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했다. 보편적으로 교계신문 발행은 종합대학 기독교 대학이나 대형교회에서 운영을 하는 경향이 있어도 일개의 개인이 운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는 일인데도 용하게 29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요 뒤에서 헌신과 숨은 뒷바라지를 한 아내 김해옥 권사의 지원과 가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늦은 70대에 우연히 부산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전공을 배운 결과 요양보호사 자격증과 상담심리자격증을 취득한 덕에 척추 협착증 수술로 아픈 아내를 케어하는 일과로 보내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고 우연이 필연이 된 역사의 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시련은 야고보가 말해듯이 기쁨으로 여기며 성숙단계로 이어 간다는 것이 진리인 것을 여든이 되었어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는가?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 중에 기자와 나눈 대화가 인상 깊었다. 코로나 백신으로 노벨 생의학상을 2023년 받은 커털린 커리코 헝거리 세게트 대학 교수는 “실험을 통해 단서를 찾아가는 과학자는 마치 형사 콜롬보처럼 계속 질문하고 추적하는 것이 과학자 직업과 같다” 말한 것처럼 그는 코로나19. 모더나, 화이자 백신을 개발하기 전까지 미국 페실메니아대에서 주임 교수로부터 괄시 받고 교수에서 연구원으로 강등 되어 실험실에서 강제 폐쇄되는 수모를 받아가면서도 원망도 후회도 없이 기쁨으로 견디어 왔다는 그의 진실한 고백이 감동을 주었다. 비전공자로 교계 언론에 몸담아 온 지난 55년은 보잘것없은 도전 정신이었고, 앞만 바라보고 작지만 꾸준한 인내와 습관이 인생을 바꾸어 준다는 교훈을 인생 후반절에야 알았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각계 각층에서 목회에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와 기업에 성공한 기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계 언론 생활에서 쳐진 것은 물질이 아니고 교계의 인맥이었고 그들의 열정으로 확실한 목표를 갖고 시간과 인맥을 관리하면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추적하며 역사의 현장에 담기로 마음 먹고 써 온 것이 29년 세월이 흘렀다. 비록 물질은 벌지 못해도 한국교계의 역사적인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안목이 나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 흔적들을 담은 ‘부산노회 장로 70주년사’(통합)를 집필할 수 있었고 여러 교계 인사들의 자서전,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것만이라도 감사할 수 있었다. 한번 뿐인 내 인생 이제까지 소홀했던 가정과 가족을 돌보며 잘못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새벽제단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과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데 꾸준히 기도하는 길 밖에 없었다. 원망도 후회도 없이 무서운 현실의 삶 속에서 남은 인생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 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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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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