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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새롭게 시작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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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이륙해 하늘을 날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출발과 시작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과 성격이 다르지만 첫 발을 내딛을 때 너무 많은 고민과 염려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늘 시작입니다. 자발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떠밀려서라도 시작하는 게 인생의 걸음입니다. 망설이고 안될 것이라는 핑계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시작. 작심삼일로 끝날 것 같아 도전하기 시작. 그러나 의외로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고민들로 힘이 빠지지만 막상 시작하고 그 일을 이어가면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시행착오와 실수를 통해 발전하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시작을 멈추게 하는 불안, 게으름, 과거의 습관을 버리로 일단 시작해봅시다. 일단 같이 출발해봅시다. 시작하는 순간 뭔가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첫째, 시작하면 새로운 일을 넘어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주위에 365일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식단, 운동 그 어느것하나 제대로 하지 않고 매번 걱정만 합니다.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을 했으니 실천하고 있다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는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작하려면,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거대한 것이 아닌 사소한 것들이라도 시작해야 새로운 일이 생기고, 새로운 희망도 생깁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책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주 글을 쓰는 실천을 할 때, “나도 작가가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실천할 때 흔적이 남습니다.
문을 열어야 볼 수 있고, 담은 넘어가야 나갈 수 있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습니다. 저 망망대해를 지나는 배를 본 적이 있습니까? 배를 지나는 자리마다 물결의 흔적이 남습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산을 오르는 땅을 밟는 자리마다 발자국의 흔적이 남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어두운 시절을 시로 남겼기에 그의 흔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을 “그냥 보내고 있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는 돌아서서 나의 흔적이 남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바라보고 있다고 되어지지 않습니다.
밀가루만 본다고 빵이 되지 않습니다. 강물을 바라보고만 있다고 건널 수는 없습니다.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 작은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야 합니다. 시작해야 시간 속에 존재하고, 시작해야 생명이 보입니다. 시작해야 오늘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으니, 결국 시작이 반입니다.
넷째, 시작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변하는 세싱입니다. 이미 세상은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도 같이 출발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나의 모습을 보면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연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며 무엇이든 할 수 있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바로 그 주님에게 나의 미래를 맡긴다면 시작도 출발도 거침없이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일을 시작해야 경험이 생깁니다.
시작은 도전입니다. 시작은 미래의 모를 일에 대한 모험입니다.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해봅시다. 같이 경험해봅시다. 같이 경험할 때 하나님과 친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역동성이 생깁니다. 순종이 무엇인줄 알고 음성이 무엇인줄 알게 됩니다.
이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까!
다시 기억하십시오. 시작이 반이자, 시작이 곧 희망입니다. 주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할 때 그 분이 하시는 일을 기대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확장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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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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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경남지방에서의 서양음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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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경남지방에서 서양음악 전파에 기여한 두 교회는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였다. 물론 두 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제일영도교회나 항서교회 등도 기여한 바 있지만 첫 두 교회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컸다. 우선 호주장로교 선교부 중심으로 소개하면, 호주선교부 제2진 5명은 1891년 10월 12일 입국하게 되는데 이들은 1892년 봄 부산시 동구 좌천동으로 이주하여 한옥에 거주하면서 집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부산진교회의 시작이었다. 호주 여선교사 중에 1892년 8월 3일 내한한 베시 무어(Bessie Moore)는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고 음악적 소양이 깊었던 여성으로 부산진교회에서 풍금 반주자로 활동했다. 정확하게 언제 부산진교회에 풍금을 설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93년에는 반주용 악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배용으로 찬양 반주로 그리고 일신여학교 음악 수업에 사용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금으로는 일신병원 내의 메캔지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39건 풍금이다. 그 후 교육용으로 일신여학교에서 사용한 풍금이 61건 풍금인데, 현재 일신여학교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길지 선교사는 교회 음악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그는 1900년 10월 29일 내한하여 11월 4일 부산진교회 첫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때 풍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그해 12월 9일 새로 매입한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날 자 일기에서 왕길지 목사는 공간이 좁아 4,5명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오르간이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오르간을 밖으로 내어놓고 예배드린 일을 말하고 있다. 1900년 당시 예배를 위한 서양 악기 풍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길지는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후일 장로교공의회의 찬송가위원으로 활동했고, 마틴 루터가 1529년에 작시 작곡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1905년 판 ‘찬셩시’에 수록되게 했다. 이 찬송은 1935년판 신편창송가에 다시 실리게 된다. 그는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풍금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서 은퇴하고 1937년 3월 호주 멜버른으로 귀국할 때 한국에서 사용하던 그 풍금을 가지고 돌아갔는데, 1987년 나는 이 풍금을 본 일이 있다. 꼭 50면이 지난 때였다. 그의 아들이 멜버른대학 주변인 파크빌 82번지 스토리 가(82 Story St, Parkville)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 왕길지 선교사가 늘 연주했던 그 빛바랜 풍금을 볼 수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61건 정도의 크기로 보였다.
그 이후 양악 보급에 크게 기여한 호주선교사가 1905년 4월 내한한 켈리, 1913년 내한하여 진주와 마산에서 일한 안란애(A. W. Allen)와 1916년에 내한한 허대시(D. Hocking), 그리고 1918년에 입국한 위대서(M. Withers) 등이었다. 켈리는 음악적 소양을 갖춘 여성으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는데 1912년에는 매켄지(매견시)와 혼인하게 된다. 안란애는 멜버른대학에서 음악, 특히 피아노를 전공한 목사로서 진주광림학교와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가 창신학교에서 일할 당시 7가지 악기로 구성된 기악단을 만들고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마산에서의 첫 서양악기의 소개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정한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추정했다. 그런데 어느 하루 그의 연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심장마비로 죽어 있었다. 미혼 목사로 혼자 살았기에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응급 조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날이 1934년 7월 26일이었다. 허대시는 음악에 깊은 식견을 가진 여성으로서 부산 마산 통영에서 교회 한양대를 지도하고 서양음악을 소개했다. 위대서는 처음에는 마산에서 짧은 기간 일했으나 1923년부터 한국을 떠나던 1941년까지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부산진교회 찬양대를 지도하고 반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영향으로 1920년 7월 부산진교회에는 ‘청년찬양대’가 조직되고, 대원들은 일본에서 구입한 여러 악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청년찬양대의 음악 지도자가 허대시 선교사였다. 그래서 1921년 4월 초에는 첫 번째 음악회가, 그해 12월 9,10일에는 두 번째 음악회가, 1922년 6월 8일에는 세 번째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이때의 일은 ‘동아일보’(2021. 12.16, 1922. 6.5, 14)에 보도되었다. 이때 피아노, 풍금, 바이올린, 만도린 등이 악기가 동원되었다. 따지고 보면, 부산경남에서 일했던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 찬양대를 통하여 서양음악이 소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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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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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 목사] 사회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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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깊은 숲속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세워졌다. 그리고 그 세상은 개개인이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사회적 존재로 시작하게 한 세상은 다양한 사회로 구성되어 갔다. 그 사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사회학자 퇴니스의 말처럼 이익 추구와 상관없는 친족, 이웃, 종교 집단 등의 ‘공동체’(Gemeinschaft)와 회사나 정당 등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결사체’(Gesellschaft)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국가라는 복합체가 있다. 그래서 신학자 요더는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실질적으로는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이곳은 개인과 달리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있다. 우리는 삼권분립, 자유와 인권, 자유 무역, 시장과 물가 그리고 의료보험, 복지혜택 등을 말하지만, 그러한 사회구조와 시스템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모여 형성된 교회 공동체 또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세워졌다. 그 말은 모이는 교회라는 조직체가 사랑과 의와 성결의 모습으로 세상에 선한 도전을 주어야 한다는 뜻임과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교인 각 사람이 자신이 몸담은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를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사회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개인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을 갖고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한 빈곤의 원인이 그 자신에게 있기도 하지만, 사회구조나 정치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96년에 라이프매거진에 나이키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12세의 파키스탄 소년 사진이 실렸다. 그는 하루 10시간씩 217일을 일해야 나이키 신발 하나를 살 수 있을만큼 저임금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이키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제 3 세계 가난의 원인이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들과 유통구조에도 있음을 보게 되었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간 한 선교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나라의 가난과 정치적인 혼란의 배후에 자신의 이속만 챙기려고 하는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는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과 역사, 자아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으로 부르고, 이것이 빈약할수록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면서 역사적 변동과 사회구조적, 제도적 모순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집단 가운데 이 사회학적 상상력이 가장 빈곤한 곳이 교회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개인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고, 그 울타리 넘어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여기면서 무관심하다 보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빈곤하다. 더 나아가 사회구조를 뒷받침하는 여러 다양한 이념들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오히려 특정한 정치 경제적 이념을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며 신앙적 확신으로 삼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것이라 했던 카이퍼의 말처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역시 우리 주님의 통치 영역이다. 그 사회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보다 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사회,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그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더 풍부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양해서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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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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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끝나는 것과 계속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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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합니다. 죄가 들어온 후 사람의 모든 것은 유 한함에 갇혔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일시적인 것입니다.
언젠가 요양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연세가 구순이신 장로님은 움직이지 못하고, 의식도 미약한 가운데 다른 이들의 손에 인생을 맡긴 채 누워 있었습니다. 상당한 재력가에 박사님이라고 하는 장로님에게는 남은 게 별로 없었습니다. 절반 정도 남은 베지밀 박스에, 기저귀 두어 세트, 그분 이름이 적힌 빨대가 달린 플라스틱 물병, 갑 티슈 서너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분이 입은 환자복은 나중에 누군가 다른 이의 몸을 가져 주겠지요. 간호사님과 돌보미들은 그분이 신체가 커서 씻기고 옷을 입히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은 몸조차 남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상황인데, 영원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향해 사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예로서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의 무리를 지칭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내세나 부활을 부인하고, 현세만 인정했습니다. 현세만 인정하다 보니, 그들은 현세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후손이 없이 죽은 한 남자의 아내가 남편의 여섯 동생과 모두 결혼한 후 다 죽었으니, 부활이 있다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한 이유도 이들이 부활과 내세를 부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두개파처럼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봅니다. 현세에 매달려 삽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 영원한 가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개 돈과 지위와 건강과 쾌락만 추구합니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기복주의 신앙 역시 이런 맥락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영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야곱은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간 이유는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흉년이 두 번째 덮쳤을 때, 야곱의 모든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십 칠 년을 살았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요셉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그는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이어가실 일, 즉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을 주실 일을 언급했습니다. 자신은 유한한지만,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어질 것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우리 인생은 머지않아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일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는 일, 선한 일을 위해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 우리 유한한 시간을 사랑에 쏟는 일은 매우 소중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하면서 그 교회 역사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초대 목사님에 이어 여러분의 목사님들이 이어 교회를 섬겼고, 모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건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교회를 통해 예배를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여전합니다. 우리도 영원히 이어질 일에 우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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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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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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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하반기 교역자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이번 워크숍 주제는 ‘체인 리액션(chain reaction, 연쇄 반응)’이었습니다.
체인 리액션은 원료가 되는 화합물에서 생성물이 얻어지는 과정이 몇 가지 소반응의 조합으로 성립하고, 하나의 반응(연쇄 개시반응)이 시작되면 그 생성물(라디칼, 이온 등)이 다음 반응을 일으켜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반응을 말합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의 눈덩이가 다른 눈덩이와 뭉쳐서 큰 눈덩이가 되고, 그 큰 눈덩이들이 구르고 뭉쳐서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엔트로피(entropy, 높은 에너지, 높은 확률) 법칙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워크숍 주제를 체인 리액션으로 정한 이유는, 지금의 새에덴교회에 머물고 싶지 않고, 오늘의 새에덴교회라는 성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강의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반기에 거룩한 눈사태를 일으키고 거룩한 생명과 부흥의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조별로 발표를 하게 하였습니다. 토의와 발표는 첫날 밤부터 시작해 다음 날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부교역자도 힘들었겠지만, 전체를 총괄하고 지휘하는 담임목사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저녁에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을 걷기도 하고 온천 사우나를 하기도 했으며 스크린 야구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강원도에 가서 계곡 길을 걷고 온천도 즐기고 스크린 골프나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저도 이런 낭만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제가 누구보다 산을 좋아하고 계곡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점심 먹고 한 15분 정도 걷고 오긴 했어요. 그런데 옆에 함께 걷던 선 목사님이 “저녁 워크숍이 끝나고 주전골 계곡 끝까지 걸어가 볼 수 없습니까?”라고 했지만, 저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늦게 잠들면 다음 날 워크숍을 인도할 능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잠을 청했습니다. 사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앉아서 워크숍을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것도 체리(체인 리액션의 줄임말)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을 청했지만, 이따금씩 꿈을 꾸고 또 잠에서 깨어날 때는 계속 ‘체리’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체리’, 꿈을 꿔도 ‘체리’ 생각만 났습니다. 그렇게 잠을 청했기 때문에 제가 마지막 통성기도 시간까지 잘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끝나고 나서라도 주전골 계곡을 걷고 싶었지만, 춘천에 들러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마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색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또 춘천에서 교회로 오는 길에 마지막 수련회 7강과 8강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교회에 돌아와서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교역자 워크숍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주중에 하룻저녁이라도 다시 모여서 더 토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문학소년 내지는 낭만 가객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워크숍 전후로 저는 이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가득가득 밀려오는 것입니다. 마치 가슴 속에 밀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체리'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어떨 때는 부담감으로, 어떨 때는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강원도에 가서 낭만적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럴 환경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가 자제를 한 거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는 낭만보다 부담감이 더 크고, 현재의 즐거움보다 미래의 설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체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제가 오색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습니다. “장년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나서는 반드시 오색을 한 번 찾아오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과 그 기나긴 주전골 계곡을 걸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 다짐이 지켜질지, 안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여름수련회를 마치고 주전골에 12폭포까지 걷고 오리라고 다짐해 봤습니다. 물론 ‘체리’가 주는 부담감과 설렘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을 전제로 하고 말입니다.
부디 후반기 사역에는 우리 새에덴교회에 ‘체리’의 바람, ‘체리’의 파도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체리’의 바람과 파도가 불어올수록 담임목사의 자리는 더 고독하고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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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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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마당’을 내어줄 의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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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시각장애를 가진 김예지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했던 연설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 연설문을 요약하면, 코이라고 불리는 물고기를 작은 어항 속에 넣어두면 크기가 10cm를 넘지 않지만 수족관에서는 30cm까지, 그리고 강물에서는 1m가 넘게 자란다. 즉,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기회와 가능성, 그리고 성장을 가로막는 어항과 수족관이 있으니, 이런 어항과 수족관을 깨고 국민이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강물이 돼주시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른 바, 환경에 따라 성장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코이의 법칙’이다. 필자는 이 연설을 접하면서 ‘코이’라는 물고기가 다름 아닌 필자임을 느꼈다.
필자는 1980년 생으로 선천성 뇌성마비장애를 갖고 있으며,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목사다. 그리고 40여 년 가까운 세월을 경기도 의정부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오다가, 2년 전에 부모와 가족을 떠나 부산으로 와 홀로 거주하고 있다. 내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셨다. 부모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부모님을 설득하여 부산으로 왔다.
필자에게 성경말씀(창12:1)을 언급하시면서 부산으로 오게 만든 두 분이 계신다. 그 두 분이 나누신 대화를 한 분이 SNS에 올리셔서 이곳에 옮겨본다. “얼마 전에 ○○○목사와 식사하며 교제하며, 무슨 얘기를 하다가 유한영 목사 얘길 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고맙다’고 하니 ○목사님이 그랬지요. 자신은 한 일이 없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마당을 내어주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참 귀합니다. 놀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마당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을 ○목사님은 유한영 목사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유한영 목사는 그 마당에서 정말 즐겁게 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부산으로 온 지 2년,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내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나그네이고 이방인인 나를 세대로교회 성도들과 많은 사람들이 환대해 주었다. 그러면서 놀 수 있도록 마당을 내어주었다. 그 마당에서 나는 즐겁게 할 일을 찾게 되고, 교회를 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장애인식개선교육강사’ 양성과정에 최종합격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목사님! 부산으로 오시기를 참 잘하셨죠?”라고. 이 말에 난 1초에 망설임도 없이 “네. 100% 잘한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40여 년 간 살았던 곳이 어항이었다면, 2년 째 살고 있는 부산은 수족관을 넘어 강물이다. 나는 그 강물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고, 이제는 강물을 넘어 바다로 나아가려고 준비 중이다.
세상은 장애인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 필자도 두 분을 포함하여 환대해 준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부산에서의 삶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역량과 내가 무얼하고 싶은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 다시 유턴했을 수도. 그러나 많은 분들이 장애를 가진 나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새로운 터전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많은 교회들이 가진 자, 비장애인,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당을 내어주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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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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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아이들, 그리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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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간일 수 있는 아침 7시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예요?” 전화기 너머로 알 수 없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아침의 고요함을 깨웠습니다. “큰 일 났어. 정은이가 죽었대. 조금 전에 아파트 화단에서 발견됐다고...” 저는 믿기기 않는 소식을 직접 확인이라도 해야 할 듯이 달려갔습니다. 5개월 전에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소동을 벌였던 정은이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지난 봄 이후 정은이는 둥지에서 기본적인 생활과 학교생활은 무난하게 해왔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가끔 감정의 기복이나 컨디션의 난조로 보이기도 했고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하여 염려를 하기는 했지만 더 자해나 자살충동은 느끼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지내왔기에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퇴소를 열흘 앞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잘 생활하겠다며 다짐했었는데..... 믿기 힘든 소식은 현장에 도착해서야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전날 정은이는 집 근처 병원치료 후 다음날 등교를 위해 외박을 허락받아 집에서 있는데 밤 11시에 친구들을 만난다고 잠시 나간 후 소식이 없었습니다. 정은이의 엄마와 오빠가 동네를 다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아침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다급하게 현장에 가서 정은이 시신을 확인한 후 둥지로 연락을 했지만 충격으로 제대로 대화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경찰이 아파트 CCTV 등을 조사한 결과 정은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순간적인 판단력이 흐려진 가운데 혼자 아파트 출입문에 들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센터장님! 정은이는 17년 동안 힘든 시간을 살았어요. 그래도 마지막을 둥지에서 지내면서 많이 웃고 밝아지고 좋은 경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어요. 찍은 사진도 제일 많구요. 정은이의 마지막 가는 길도 꼭 챙겨주세요” 정은이 어머니는 따따이에게 장례식을 부탁했고, 저는 둥지 아이들과 정은이의 장례를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정은이를 기억하는 많은 친구들과 둥지의 가족들이 정은이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학교 다녀왔습니다”라며 정은이가 밝게 인사하면서 저쪽에서 들어올 것만 같은데 마음 아프게 그 곳은 정은이의 장례식장이었습니다.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충격 속에 3일간 장례를 치르고 2019년 7월 7일 오전 7시 정은이의 시신을 화장하고 추모공원에 봉안하였습니다. 17년의 짧은 생애 동안 힘들고 어려운 시간 보내다가 둥지에서 상담과 치료를 받으며 처음 입소 때보다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왔었기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자살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올해 1월 잠정 집계한 자살 사망자는 13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2.3% 급증했다고 합니다. 교회 안은 어떨까요. 매년 2600여명 전도의 기독교인들이 자살로 사망한다고 추정된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죄로 여겨 교회 안에서 자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지 않고 이 때문에 예방과 대응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자살예방교육을 할 수 있도록 부산에서 작은 움직임이 생기고 있습니다. OECD 국가 42개국 가운데 우리나라 자살률이 압도적으로 1위라고 합니다. 더욱이 전국 8대 특광역시 중 부산이 1위로 가장 심각한 상황입니다. 특히 청소년자살문제는 계속 높아지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살아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어른들이 모여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아이들. 그리고 교회’ 이런 제목으로 생명존중세미나가 6월 19일 수요일 오후4시 동래제일교회(미남역)에서 열립니다.
“저 내버려 두세요. 내 맘대로 할거예요”라는 반항은 “저 좀 관심가져주세요”라는 애교로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정말 죽고 싶어요”라는 말이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로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사느냐 죽느냐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괜찮니?”라고 물을 수 있는 어른들이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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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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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교육부서 예배와 공과순서를 체인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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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교회는 주일 예배와 공과 공부 시간을 체인지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저희 교회가 돈 안 들이고 한 제일 좋은 일이었습니다. 저희 교회 다음 세대 스케줄은 모든 부서가 동일합니다. 주일아침 10시 반에 교사 경건회를 하면서 분홍 목사 미팅을 합니다. 그리고 11시에는 반별 소그룹 공과 공부를 하고요. 11시 반에는 부서별 대그룹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혹시 여러분의 교회는 같은가요, 다른가요? 아마 다를 겁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먼저 드립니다. 그리고 공과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었으니까, 다 그렇게 하니까 이유도 모르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그 발상을 깰 필요가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은 문제가 상당히 많습니다. 첫 번째, 예배에 지각하는 교사나 학생이 많다는 겁니다. 교사도 학생도 아무 가책 없이 늦게 옵니다. 이렇게 많이 들을 때 중간에 들어오는 거 하나도 창피해하지 않습니다. 찬양할 때 오고, 설교할 때 오고, 광고할 때 오고, 축도할 때 옵니다. 결국 다 오는 건 언제냐면 예배 끝나면 다 옵니다. 예배지각의 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두 번째는 공과 학습 시간과 내용의 편차가 심하다는 겁니다. 예배가 끝났으니까 공과시간에 선생님들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야! 떡볶이 먹으러 가자! 야! 팥빙수 먹으러 가자!” 다 가고 나면 남은 애들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선생님! 우리는 왜 안 나가나요? 우리는 뭘 잘못했나요?” 남은 반이 이상해지는 풍경이 발생합니다. 밖으로 나가는 반은 되게 쿨한 반이고, 남아 공과하는 반은 이상한 선생님이 돼버립니다. 세 번째, 교사가 예배 시간에 공과 공부 준비하느라 예배에 집중을 못 하고 학생들을 못 챙깁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실 겁니다. 선생님들이 요즘 정말 바쁘세요. 그래서 공과 준비를 못 해요. 언제 하느냐면 교회 오는 버스 안에서 합니다. 교회 오는 지하철 안에서 합니다. 그래도 못하면 언제 예배 시간에 합니다. 예배드리고 있는데 교사들이 뒤에 앉아서. 오리고 붙이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애들이 볼까요, 안 볼까요? 다 봅니다. 그럼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네 번째, 예배 시간에 드나드는 인원이 많습니다. 애들이 예배 중간에 계속 들어오니까 선생님들이 들어오는 아이들 챙기다보면 벌써 예배 끝났어요. 선생님들이 예배 못 드립니다. 끝으로 다섯 번째, 제일 중요한 거 설교 말씀을 다 잊어버린 채 돌아가게 됩니다. 예배 끝나고 나서 공과랍시고 이런저런 떡볶이 먹다가 팥빙수 먹다가 떠들다가 뒤돌아서 가면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이런 순서를 바꿨습니다. 저희는 공과를 먼저 합니다. 그다음에 주일 예배를 드려요. 그렇게 하니까 여러분, 분위기가 정말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나? 첫 번째는 지각하는 교사와 학생이 줄어들어요. 일단 교사가 제 시간에 안 오면 그 반은 고아가 됩니다. 공과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안 올 수가 없죠. 그리고 학생들도 수십 명 앉은 데 들어오는 데 괜찮지만 서너 명 앉은 공과를 늦으면 티가 납니다. 그래서 애들이 창피해서 일찍 옵니다. 두 번째, 공과 학습 시간 내용이 일정해집니다. 어떻게든 다른 반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게 됩니다. 어떻게든 옆에 반 눈치를 보면서 해야 하니까 그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공과가 아주 알차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 교사도 학생도 모두가 예배에 집중합니다. 공과가 끝났으니까요. 여러분, 공과가 얼마나 부담 없냐면 공과 시간에 애들이 질문하면 “그거 예배시간에 전도사님께 질문하렴.” 하면 되요. 뒤에 예배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은 애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거예요. 저희 교회는 공과를 이렇게 합니다. A4 용지에 그 요절 말씀 하나 뽑아 와서 요절 말씀 같이 읽고 혹시 아이들이 모르는 단어 설명해 주고 끝입니다. 그리고 애들과 관계 나누고 기도해 주고 나머지는 설교 시간에 들으라고 넘깁니다. 이게 진정한 원포인트 교육입니다. 근데 지금 기존의 방식은 설교 시간에 내용 다 듣고 나서 공과를 또 합니다. 그러니까 공과시간에 교사들이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똑같은 말을 하자니 지겹게 되고, 다른 말을 하자니 안 되고 그러니까 할 말 없으니까 “에이! 그냥 떡볶이 먹으러 가자!” 이렇게 나가는 거죠. 공과가 안 되는 거예요. 네 번째, 예배 분위기가 잡히고 드나들지 않습니다. 이미 아이들이 다 온 상태에서 예배를 시작하니까 예배 시간이 너무 좋고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다섯 번째, 제일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선포된 말씀을 품고 한 주간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말씀이 움직이는 삶이 됩니다. 말씀 붙들고 바로 끝나고 집에 가니까 엄마 아빠한테 그 말씀 얘기를 하는 겁니다. 밥 먹으면서 “엄마, 엄마 오늘 말씀 들었는데...” 이렇게 애들이 달라지니까 엄마 아빠들이 “목사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하십니다. 그런데 이건 아이가 달라진 게 아니고요, 교회가 달라진 겁니다. 부서가 달라진 겁니다.
주일 예배와 공과시간 순서만 바꿨는데 부서도 교회도 달라졌습니다. 저는 모든 교회가 이런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분위기의 교회학교를 경험하시게 되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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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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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선한 삶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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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미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가 암살범의 총에 의해 피격을 당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의 기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국민 약 1천 200명이 사망했다. 그날 이후,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팔레스타인 국민 3만 5000명이 사망했고, 8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충격과 아픔 그리고 슬픔과 분노의 현장들이다.
1916년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코파 아메리카 2024 대회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 1960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UEFA 유러피언 풋볼 챔피언십 2024 대회에서 스페인이 우승했다. 1877년 영국에서 시작된 2024년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바르보라 크레이치코바가 남녀 단식경기에서 우승했다. 기쁨과 환희 그리고 감격과 감동의 현장들이다.
슬픔과 분노의 현장이든지 기쁨과 환희의 현장이든지 그곳에는 항상 그 현장을 목도하고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또한 여러 가지의 매체들을 통해서 그 현장의 소식들을 전해 듣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일들이 일어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과 현장에서 일어난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의 정서적 충격 여파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목격하고 경험해야 하는 삶의 현장이 후자여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1. 선한 삶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심상사상(心想事成),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 했다. 지성이면 감천과 유사한 의미다. 세상과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자가 얻게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부귀와 영화, 출세와 성공, 건강과 명예, 관계의 회복과 심신의 평안을 통한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에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복권도 구매해야 당첨될 수 있다. 선한 삶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악함을 원하면 삶의 자리로 그러하다.
2. 선한 삶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 선한 삶을 추구하고, 계획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천리의 길도 첫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천자문도 하늘 천(天)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선한 삶의 현장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 월드컵이 진행되고, 축제가 열려도 자신이 그 현장에 없으면 현장이 주는 기쁨은 결코 누릴 수가 없다. 현장의 기쁨과 감격은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열매이며 축복이다.
3. 선한 삶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인생에서 받아야 할 가장 큰 축복이 만남의 복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 했다. 곁에 있으면 물드는 것이 상식이다. 생선을 만지면 비린내가 나고 꽃을 만지면 향기가 난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인격자가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인생을 망친다. 동일한 선상에서 비판적이고 호전적인 사람을 만나면 삶이 거칠어지고,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을 만나면 인생이 어그러지기가 쉽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선한 삶의 자리와 선한 삶을 향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
기독교에 대한 대사회적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으로 채워져 가고 있고, 무신론과 탈종교화 사회로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먼저 선한 삶을 추구하고, 선한 삶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선한 삶의 모델이 되어 주고,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선한 삶의 현장을 접하게 해주는 통로와 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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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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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교육나침반] 온가족성경학교 사역 현장 보고서 (주제: Great Gospel 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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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 수많은 교회가 가정과 함께하는 여름사역을 준비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개발한 복음놀이프로그램인 [느헤미야] 주제로 온가족 성경학교를 진행한 교회의 은혜를 보고드리려 합니다.
이번 [느헤미야] 주제의 복음놀이 프로그램은 향기나무 복음놀이 코디네이터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코디네이터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복음놀이코디네이터들은 2주간의 코디네어과정을 수료한 후에, 본격적인 여름사역을 준비하면서 느헤미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 말씀속에 담긴 복음은 강력했습니다. 특히 가정을 향해 선포되어질 때는 더욱 강력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을 묵상하다보면, 죄악으로 상한 나를 향해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무너지고 불터버린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빛나는 보좌를 떠나 죄악으로 무너진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한 코디네이터들은 [느헤미야] 말씀에 담긴 Great Gospel(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학교 교사와 부모과 함께 느헤미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코디네이터들은 이번 여름사역이 형식적이거나 의무감으로 치뤄지는 연례행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느헤미야 말씀을 매일 한 장씩 필사하거나 묵상하며 뜨겁게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이 개발하여 교육해주신 [느헤미야] 예배 콘텐츠는 우리의 사역을 빈틈없이 뒷받침해 주었고, 기도와 무한 응원으로 지치지 않을 동력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7월 13, 14일이 되기 4주 전부터 말씀의 성벽을 쌓자는 의견을 모았고, 부모와 교사가 한마음이 되어 느헤미야 13장의 말씀을 필사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매일 교사들이 돌아가며 기도를 녹음하고 단톡방에 공유할 때, 온 교사가 함께 아멘으로 화답하며, 릴레이기도를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가정의 부모님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모든 부모님들이 영적인 회복, 무너진 예배의 회복,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 회복, 각 영역의 무너진 부분들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흥덕향상교회 박정은 전도사| 향기나무 복음놀이코디네이터)
이렇게 준비한 성경학교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복음의 능력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은 복음벽돌을 하나, 하나 붙잡으며 서로의 무너진 부분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각 가정의 모습과 기도제목이 담긴 광목천을 십자가로 연결하여, 다른 가정의 아픔과 연약함을 자신의 아픔과 연약함으로 품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가정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했던 가정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잃어버렸던 가정은 다시 말씀과 기도로 생명을 충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의 어둠 가득했던 가정은 다시 하나님 자녀의 권세로 인한 빛이 가득해졌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회복시켜 작은 교회로 세우는 것!
이것을 위해 향기나무교육개발원은 계속 달려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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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