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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세기적 전도자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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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 기독교 국가 만들기 위해
부전공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건국대통령이자 최초의 기독교 통치자이다. 그는 청년 시절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을 졸업한 다음 과격한 체제개혁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여 경무청 감방에 구치되었을 때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조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수감생활 중 죄수와 옥리들에게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그 결과 그는 감금 기간에 40여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괄목할 만한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나중에 대통령)로 추대된 그는 자기의 소망은 조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하와이를 망명지로 삼고 그 곳에서 역시 약 5,000명의 한인교포를 상대로 기독교 전도와 교육사업을 벌였다.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이를 통해 한인교포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인기독학원’이라는 기독교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포들을 가르치고 또 ‘한인기독교회’라는 교회를 창립하여 그 교회 선교부장으로서 사실상 목회자 역할까지 담당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애국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드는데 초점을 둔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6일 33년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정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 때에 서울 동대문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때 그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오늘 대한민국 국회가 열리게 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윤영 의원님(목사) 기도를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일동이 기도한 후 회무를 진행했다. 곧 의장으로 당선된 후 한번 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했다.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 8월 15일 정부수립식에서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취임사를 낭독했다.
그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기독교 교세 신장에 도움이 되는 각종 특혜조치를 취했었다. 예를 들면 그는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성탄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군대에 군종제도와 형무소에 형목제도를 도입하였다.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을 세기적 전도자라고 칭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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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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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마지막 남은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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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그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사형통의 삶이란 없는 법이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에게는 길거리에 버려진 빵 한 조각도 소중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암 환자에게는 어떤 환경이든, 어떤 상황이든 살아있는 사람이 더 없는 축복임을 뼛속까지 느낀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다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형제간에 재산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 거부의 뉴스를 보는 역전 앞 걸인에게는 길손님이 건네주는 컵라면 하나가 더 없는 행복이다. 남달리 축복받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데 반해 부잣집의 개집만도 못하여 쓰러질 것 같은 판잣집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들려나오는 웃음소리는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준다. 그런데 이 모든 인간사의 확실한 것 하나는 나름대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줄 하나쯤은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권력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돈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쾌락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학문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예술이기도 하다. 그렇게 인간은 그 줄을 놓으면 죽는 줄 알고 그 줄을 붙잡고 살아간다.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 ‘파가니니’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준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줄 하나가 툭 끊어지고 말았다. 청중들은 깜짝 놀라 숨을 몰아쉬었으나 파가니니는 나머지 3줄로만 조용히 연주를 계속 했다. 그런데 갑자기 줄 하나가 또 툭 끊어졌다. 그래도 파가니니는 거침없이 연주를 계속했다. 신들린 듯 연주를 하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줄이 또 하나 툭 하고 끊어졌을 때 청중들은 두려운 마음마저 가지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파가니니는 멈칫하더니 그의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높이 들고 “한 줄과 파가니니” 하고 말한 후 한 줄로 연주를 계속 했다. 그의 위대성은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났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보냈다고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듯 우리가 믿고 있던 인생의 여러 줄들이 하나하나 툭툭 소리를 내면서 끊어져 버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절망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더 이상 세상에 의지할 데 없다고, 믿을 데 없다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삶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도, 정몽헌 회장도, 최진실 탤런트도 내로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줄이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강하게 붙어있는 줄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줄 하나만 있으면 어떤 경우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다. 파가니니처럼 한 줄로 연주를 끝내고 기립박수를 받는 것처럼 그 줄 하나로 인생을 연주하고 삶을 마무리할 때 천군천사가 기립박수를 쳐 주는 것이다. 내 나이 20세 때 폐결핵 3기의 중환자로 사형선고를 받아 나의 인생이라는 줄 하나가 끊어진 것으로 절망했었다. 궁핍 가운데 지쳐 3개월 간 걸식의 생활을 할 때도 나는 또 하나의 나의 인생 줄이 끊어짐을 체험하면서 살 소망마저 잃기도 했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배움의 장에서 희망차게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에 혼자 독학을 하는 고통가운데서 나는 또 하나의 인생 줄이 끊어지는 슬픔과 저림과 아픔으로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내가 붙들고 있던 줄들이 끊어져 나갈 때 나의 인생이란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어 35년을 한결같이 목양하고 은퇴를 하고 난 지금 내 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지고 낯선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토록 절절했던 사랑의 인간관계의 줄들이 하나하나 끊어져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괴감에 유구무언으로 스스로를 아파하며 일어설 기력조차 없음을 느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 줄이 다 끊어졌을 때 나에게 남아있는 한 줄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고, 그 한 줄의 위력은 그때서야 더 큰 소망과 생명으로 체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 한 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줄이다. 나의 힘은 건강도, 돈도, 학벌도, 명예도,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세상 줄이 끊어져 나갈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능력으로 나에게 한 줄의 위력을 체험하게 하신다. 바로 그 한 줄, 예수 그리스도의 줄이 나로 하여금 건강과 학벌과 부요와 재물과 세상 모든 것을 다 갖고도 남을 축복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 아무리 가난하고 병약하다 할지라도, 외롭고 삶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줄이 남아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끊어진 세상 줄 보다 더 힘 있고, 가치 있고, 위력 있는 줄이다. P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할 때 내 품에 안겨 목회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흐느낀 K 목사님, 그리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도 치료되지 않아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부흥사경회 참석하여 안수 기도를 받고 일어설 줄 모르고 울던 J권사님,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고 행복하게 가정을 설계하던 중 헤어짐의 아픔으로 삶을 포기하려다가 말씀을 듣고 웃음을 찾은 Y 청년. 나는 그들에게 파가니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 또한 지난 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하나하나 삶의 줄이 끊어지는 아픔과 절박함을 경험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한 줄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깨우쳐 주었을 때 그들은 환한 미소로 목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우리 인생에 마지막 남은 한 줄, 예수 그리스도! 그 줄은 세상 모든 줄보다 강하고 위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명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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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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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인생 최후의 보배(히브리서 8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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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덧셈에서 시작하여 뺄셈으로 끝나는 수학 계산과 같습니다. 갓난아기일 때는 0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날마다 덧셈이 이루어집니다. 물건이 더해지고, 지식이 더해지고, 사람이 더해집니다. 30,40대가 되어 급속히 늘던 인생의 자산들은 50대쯤에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50후반부가 되면 서서히 뺄셈이 진행되어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집니다.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알던 지식도 사라지고, 몸이 약해지면서 만남도 줄어들고, 알던 이들이 한 명씩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덧셈은 대개 기쁨을 가져오지만, 뺄셈은 매우 큰 아픔을 가져옵니다. 80세가 넘어가면 남은 게 별로 없게 됩니다. 요양병원에 가보면 어르신들에게 남은 것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약간의 음료수, 화장지, 기저귀, 최소한의 몇 가지 물품뿐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점점 줄어듭니다. 이러다 보니 인생의 마지막까지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릅니다. 며칠 전 한 요양병원에 계신 올해 91세의 어르신을 찾아뵈었습니다. 한 동안 뵙지 못했기에 그 동안 많이 악화되신 것은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만면에 화색이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매일 똑같지요!”라고 하시면서 일상을 설명하셨습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셔서 한 시간 기도부터 드리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엔 병실 옥상에 있는 정원에 가셔서 찬송가를 스무 곡 남짓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그 찬송가들의 가사가 다 기억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시는데, 팔굽혀펴기를 15회 정도 하시고, 산책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외엔 찾아오는 가족들을 만나시는 일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그 분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분은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남기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 따위는 다 버리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기도하는 마음,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몇 가지 노력들이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추한 것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뺄셈이 성공적이었습니다. 종종 추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움켜쥔 이들과 대조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끄트머리에도 놓지 않고 붙잡고자 하시는 보화는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8장 1절은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빼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최후까지 남긴다고 할 때,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있어야 할 분은 이러한 대제사장,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애 마지막에 우리에게 계셔야 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다른 것을 다 빼더라도 절대 예수님을 빼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 촤후의 보배로 삼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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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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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EBE 그리고 케플러-45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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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훈택 교수가 신약 수업 시간에 외계생명체가 있는지 성경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는 가운데 교수님의 답변은 만일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도 선교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손 들까 망설였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고 내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미확인비행물체’라는 뜻의 ‘유에프오’(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 미국입니다. 미 공군 조사단장인 에드워드 J. 러펠트(Edward J. Ruppelt)가 그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47년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웰(Roswell)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추락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히 그 속에 타고 있었다는 외계의 생명체에 쏠렸습니다.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이티’(E.T., Extra Terrestrial)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외계의 지적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10년 후인 1993년 미국 폭스 TV는 야심찬 기획물 ‘엑스 파일’(X-files)을 내보냅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과학지식에 의해 쭈글쭈글하고 못생겼던 E.T.는 외계의 생물학적 존재 ‘EBE’(Extraterrestrial Biological Entity)로 명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낯선 방문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아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천체가 지구 외에 또 존재할까 하는 궁금증으로 발전합니다. 이번에도 영화가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2012년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2014년 ‘인터스텔라(Inter-stella)’가 그러합니다. 전자는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Where are they from)를, 후자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to?)라는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론적인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2011년 2월 19일 미국항공우주국(NASA) 케플러 우주망원경 프로젝트 책임자인 윌리엄 보루키(William Borucki) 박사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회의에서 은하계에 500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며, 이 중 최소 5억 개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골디록스 존(Goldilocks Zone)’에 해당한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15년 7월 23일 역시 같은 연구팀은 지구로부터 1,400광년 떨어진 항성 ‘케플러-452’와 그 주변을 공전하는 ‘케플러-452b’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항성(恒星) 케플러-452는 태양과 비슷한 온도에 10% 더 길고 20% 더 밝으며, 행성(行星) 케플러-452b는 지구보다 1.6배 길지만 공전주기는 368일로 거의 같고 무엇보다도 지구-태양 간 거리와 비슷하게 공전하고 있다 합니다. 문제는 현재 과학기술 수준으로 이 별까지 가는데 2,580만 년이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별들을 너무나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욥기와 아모스가 거론하는(욥 9:9, 38:31; 암 5:8) 묘성(昴星)과 삼성(三星)이 그러합니다. 겨울철 남쪽 하늘 황소자리에서 관측되는 7개의 별을 일찍부터 ‘묘성’으로, 역시 겨울철 별자리인 오리온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쌍둥이 같은 별을 ‘삼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묘성은 실은 수천 개의 별들이 뭉쳐 있는 성단(星團)이요, 삼성은 실은 서로 일직선상에 없는 전혀 무관한 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라고 표현합니다. 현대과학을 앞서가는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알면 알수록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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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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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절반의 감사 (합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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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유태인들이 강한 이유는 절기를 잘 지켜서 그렇다고 봅니다. 절기라고 하는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그때에 가정교육이 이루어지고 만남과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설날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다 모이고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명절, 절기를 지키면서 문화가 만들어지고 가정의 대화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절기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갑니다. 유태인들의 절기는 특별히 ‘맥추절이다’ ‘유월절이다’ 할 때 그 절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곡식을 추수해서 감사하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역사적인 사건을, 위기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최고의 감사가 있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예표를, 미리 앞서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상징하는 것이 절기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 하박국서를 통해서 이 맥추절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주제가 간단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것들이 득세하고, 왜 세상의 불법이 판을 치고 정의로운 사람, 공의로운 사람은 늘 고난을 당하느냐?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대적들이 흥왕하는 것을 이렇게 허락하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할 때 이유 없는 환란 때문에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나쁜 사람들은 잘 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도전 하는 것이 하박국서입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결론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에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그런 환난의 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게 아니고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합3:17) 없으며, 못하며가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무에 열매는 없고, 외양간에 소는 없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18절에 가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절「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오늘 절대감사, 선불감사, 평생감사, 무조건감사, 감사할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은 조건적인 사람이고 그리 아니해도 일단감사, 평생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happy day로 흘러갈 것입니다. 조건 따지고 상황 따져서 하는 사람은 늘 일희일비하고, 마음의 조울증을 겪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의 원천이고 내 최고의 백그라운드, 내 최고의 후원처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같은 시험을 지나고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헤쳐 나가면서 비로소 노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민거리가, 기도제목이, 근심거리가, 간증거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반의 타작도 안 되는, 건더기가 없는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할 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감당을 하고, 감수하기 때문에 그 삶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님 밑에 있는 자녀들은 행복한 것이고, 이 시대의 고난을 돌파하고 pass of 해서 절반의 감사일지라도 오히려 그때야 말로 내게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오는 때입니다. 느낌을 아니까, 고통의 맛을 아니까, 쓴맛을 겪어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맥추절에 일 년의 절반을 지나면서, 성도들의 마인드가, 성도들의 스피릿이, 성도들의 스타일이 새로워져서, 불평과 원망과 짜증의 삶을 청산하고, 환난과 빚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것들을 통과한 후 승승장구해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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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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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총회 유령 위원회가 노회에 하달한 유령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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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최근 합동 교단 내 언론지인 크리스천포커스 38호 8면에 총회로부터 황해노회장 앞으로 “황해노회 동산교회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기상천외한 공문이 하달되었다는 특집 기사를 보았습니다. 게재된 공문의 내용을 보내드리오니 검토하시고 법적으로 합당한 공문인지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S노회 K장로)(합동 S노회 K장로)
[답] 필자에게 알려온 공문의 내용을 검토한 후 총회장과 총회 서기에게 전화상으로 확인한바 권원 없는 유령 위원회가 유령 공문을 노회에 하달한 것 같아 보인다. 공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서번호 본부 제99-1167호(2015.7.9.) 수신 : 황해노회장, 제목: 황해노회 동산교회에 관한 건, 내용: 제99회 총회 특별재판국 보고는 잠재하고 제98회 재판국 판결문 보고대로 처리하기로 결의하였기에 통보하오니 이행하여 주시고 그 결과를 2015년 8월 17일까지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첨 : 제98회 총회재판국 판결문 사본 1부 끝. 하단 발신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관인) 총회장 백남선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 위원장 박무용”으로 하여 실인은 없고 총회 관인만 찍힌 공문이 황해노회 노회장에게 하달되었다고 한다. 이에 필자는 공문에 기록된 결의 내용과 위원회 조직에 대하여 총회장과 총회 서기에게 직접 전화로 확인한바 총회장 명의로 하달된 결의내용에 대하여 총회장은 “결의한 사실을 모른다”라고 답하였고, 총회 서기는 “그런 위원회를 조직한 일이 없다”는 답을 받고 보니 유령 위원회가 유령 공문을 총회장의 명의를 도용하여 총회 산하의 노회에 하달한 것으로 대명천지에 이런 날벼락과 같은 사건이 또 어디 있겠는가? 1. 유령 위원회의 허상(虛想) 총회 규칙 제27조 단항에 “당석에서 제안하는 안건은 … 개회 후 48시간 내에 제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총회 서기가 작년 제99회 총회 회기 중 “긴급동의안은 법정기한인 수요일 오후 2시까지 제출해 달라”는 광고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동산교회 관련건의 긴급동의안은 법정기한이 이미 지나버린 수요일 오후 4시 20분에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회 마지막 날 파회를 목전에 두고 서기가 “긴급 동의안이 있습니다!”라고 총회장에게 여러 번 제의하였고, 총대 석에서도 “긴급 동의안이요!”라고 항의가 있었으나 회장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서기가 8건의 긴급동의안 서류를 사회하는 총회장에게 올렸는데도 회장은 그 서류를 총회에 상정하지 않고 밀쳐 버림으로 모든 긴급 동의안은 자동으로 폐기된 서류라고 서기는 말했다. 문제는 총회 임원회가 총회를 파회한 후에 법리상으로 총회 회기 중에 이미 폐기된 긴급동의안을 임원회가 위임받은 잔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 법정시간 내에 접수된 “H목사 조사처리의 건”은 기각 결의하고, ? 법정시간이 지나서야 접수된 황해노회 동산교회 관련 건인 “특별재판국 설치 조사처리의 건”은 상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 서기는 “긴급동의안은 폐기된 것이니 취급할 수 없다”고 강력히 항의했으나 총회장과 부총회장이 중심이 되어 밀어붙이기 식으로 상정하여 결국은 “3인을 보내어 화해를 한번 권면해 보라”고 결의한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에는 “화해조정위원회”(위원장: 부총회장 박무용 목사, 위원: 부총회장 이호영 장로, 회계 서병호 장로)라는 이름으로 3인 모두가 위원장 서기 회계의 위원회 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 총회 서기의 답변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야말로 가히 유령 위원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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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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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영원한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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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삼백 번 가까이 나오고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도 많이 나온다. 이 언약은 구원 즉 하나님과 결합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결합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 가족, 공동체, 하나 됨, 평화로운 사회, 함께 있고 싶다, 좋은 관계 등의 말은 모두가 결합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건물을 지은 후 수 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튼튼하다는 말은 그만큼 결합이 잘 되었다는 말이다. 찬사 중의 찬사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나 건물과의 관계나 그 결합이 오랫동안 혹은 영원하기 위해서는 결합할 수 있는 접착제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혈연 혹은 종교적 신념으로, 돈으로, 학연, 지연으로 결속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결합이 될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특히 가정에서 자기애, 자기 지배욕, 자기 우선, 걱정, 근심, 분노, 짜증, 무시, 큰 소리, 욕, 도박, 술, 여자, 자기 욕심,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부나 가정의 결합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돈이나 권력, 성공을 추구하는 것도 잠깐 접착력이 있을 뿐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옳지 않는 일이나 악을 행하면 거짓과 악은 접착제가 아니기에 결국은 깨어지는 것이다.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면 영원한 접착제인 사랑과 진리와 선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부부가 결혼 할 때 상대방의 조건에 끌려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본가 편을 들고 매일 늦게 들어오고 일과 관련된 행사는 다 참여했다. 쉬는 날은 피곤해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자기 취미 생활만 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편이 아닌 것이 불만이었지만 가정 일만 많이 했고 존중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재미를 느껴서 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렇게 25년을 보내다 보니 각 방을 사용한 세월도 오래되고 이 부부 사이에 접착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혼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접착력이 없어 함께 살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 부부가 다시 함께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부부가 결합할 수 있는 접착제가 있어야 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하자. 그럼 이 사람들이 결합한 것일까? 아니다. 이 권력자에게 모여들어서 무언가 얻으려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자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결합이라고 할 수 없다. 내 목표와 돈과 권력을 원하고 있는 한 이들이 결합하는 것은 잠시 동안인 것이다. 부자가 돈과 권력이 없어지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을 때는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은 접착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사람을 만나는데 돈보고 만나거나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만난다면 나는 이미 하나님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접착제는 사랑과 진리와 선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며, 진리는 사랑과 선을 이루기 위한 길이며, 선은 상대방에게 실제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해주고 유익을 주긴 하는데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닌 상대를 이용하는 자기사랑이기에 언젠가는 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먹을 것과 돈을 주면서 진리 없이 사람들을 이용해 조직을 만들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 섞인 충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가르침은 그 속에 선함이 없는 진리이기에 언젠가는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 시작점이다. 이 사랑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방법, 노하우, 사상, 진리가 나오고 사랑과 선을 증명하는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매 순간의 삶을 살면서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어야 하며, 방법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나의 행동은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이며 진정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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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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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아내와 주방! 쿵짝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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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경쾌한 리듬의 레게 음악. 저 멀리 자메이카의 전통음악이 대중음악으로 정착하면서 중요한 음악 장르가 된 레게는 뜨거운 햇빛 아래 총총 땋은 헤어스타일, 알록달록 패션까지 갖춘 이들이 쿵짝 쿵짝 리듬에 맞춰 노래하여 경쾌함을 준다. 그래서 레게를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라고 하나 보다. 이 레게 리듬이 경쾌한 이유는 2박자 계열이기 때문에 쿵짝 쿵짝 리듬과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가나 쿵짝이 잘 맞아야 하나보다. 주부들의 전용 공간인 주방에서도 이 쿵짝이 필요하다. 주부들 사이에서 영식님, 일식씨, 이식군, 삼식세끼 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밖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남편에게는 영식님이라는 존칭을 써주고, 하루 한 끼 먹는 남편에겐 일식씨, 두 끼를 먹을 땐 이식군, 하루 세 끼 집에서 다 챙겨먹는 남편을 향해 삼식 새끼(?)라고 부른다는 것. 그만큼 가사의 부담감을 표현한 이야기일터, 예전의 우리 어머니께서 어찌 된 게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넋두리와도 통한다. 주부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따져보면 40대 주부들의 경우 하루 평균 12시간 16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루의 반 이상을 집안일에 사용한다고 했을 때 수면, 식사 시간 등을 빼면 자신만의 시간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뿐인가. 잠을 자면서도 가족들의 출입에 늘 신경을 써야 하고 잠깐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가족들의 호출에 정신이 분산된다. 말하자면 24시간 대기조다. 바로 이런 과도한 가사 노동에 쿵짝이 필요하다. 레게 리듬에서 쿵과 짝은 액센트가 다르다. 쿵을 여리게, 짝을 세게 하는 엇박자가 더욱 리드미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부들의 가사 노동에 있어서도 집중적으로 노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쿵이 있다면, 노동에서 해방되는 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들에게도 출퇴근 시간이 필요하다. 출퇴근은 여러모로 가정을 리드미컬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우선 과도한 가사노동시간을 적정한 선으로 유지할 수 있으며, 출퇴근의 개념을 통해 아내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가사노동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좋지 않은 감정들의 노출을 줄여줄 수 있다. 당연히 가정도 좋아질 것이다. 실제 어떤 주부는 본인 스스로가 출퇴근 시간을 정해서 가족에게 당당하게 동의를 구하고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지만 아내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독한 마음으로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아침에 출근해서 보면 밤새 폭탄을 맞을 것 같이 되어있어 울화통이 치민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출퇴근 시간을 지켜가다보니 오히려 근무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등 즐기면서 일할 수 있었고, 퇴근 후 개인 시간에는 취미생활도 시작하여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가장 기분 좋은 변화는 자녀들이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닮고 싶어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내에게 출퇴근 시간을 준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훌륭한 직장을 선물하는 것과도 같다. 그로 인해 주부의 공간이 리드미컬한 경쾌한 작업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나라 남편들이 선진국 남편들에 비하면 주방일을 도와주는 게 턱도 없이 모자라다는 기사에 고개만 끄덕일 것이 아니라, 우울하게만 바뀌어가는 부엌에 새로운 리듬, 경쾌한 리듬을 불어넣을 선물이 필요하다. 주부에게 가정은 직장이다. 직장에는 근무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환경이 열악할수록 자신의 일에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직장 내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방에서 아내가 마음껏 일하며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주방서재를 마련해 주는 것은 주부를 놀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주방은 정말 다양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식탁을 조금 밀어내고 아담한 책장을 들여놓으면 될 일이다. 식탁은 책상 대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또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오디오가 있으면 예술과 문학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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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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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교회가 희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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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가 희망이다! 라는 말을 기독교 방송에서 많이 듣는다. 교회가 희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교회가 희망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 힘겹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희망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는 선한 양심의 전당이요, 가난하고 억울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찾아가면 희망 있고 기대어 설 곳이 있고 한줄기 소망의 빛이 보였기에 스스로 찾아왔던 영혼의 쉼터였는데! 급기야 세상을 바라보며 교회인 내가 세상의 희망이니 찾아오라는 멘토는 어쩌면 듣는 이들에게 애절함마저 느껴져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교회는 분명 이 땅의 희망이다! 아니 당연히 희망이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희망이라면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교회는 사람이 아니고 예배당 건물로 알고 있다. 그것은 택함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교회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요 거룩한 성도들이니 교회가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이 시대에 희망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인정을 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꼬여 왔는지 모르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희망이라고 당신의 희망을 교회에서 찾아보시오 라고 말을 한다면 과연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말을 던질 것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막연하게 교회가 희망이라고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는 증거를 보여줄 때 세상은 그래! 너 교회는 희망이야! 나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어! 네 말이 맞아! 나도 교회에 다니고 싶어 그리고 그곳에서 희망을 찾고 싶어! 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기에 미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예를 들어 고향 교회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찬바람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 전도사님 한분이 담임으로 오셨다 키가 크고 몸이 야윈 분이셨다. 성함은 이장섭 전도사 그분이 오실 때 마을120여 가구 중 예수 믿는 가정은 60여 가구 정도였으니 절반은 불신가정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화투놀음 윷놀이로 마을은 어수선했고 돈 잃고 가산을 탕진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던 어두운 마을에 이장섭 전도사는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다. 농한기 할 일 없는 겨울 읍내로 나가 백방으로 이 공장 저 공장을 찾아다니며 일감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한겨울 할 일 없는 마을에 일감이 들어오니 사람들은 놀음하고 윷놀이 할 시간이 없어졌다. 가정에 돈이 들어오니 마을 사람들은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고 전도사님의 헌신적인 노력 앞에 감사한 나머지 교회에 나오라고 하지 않아도 주일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교회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농번기가 되면 전도사님은 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모내기를 도왔다. 농번기 한 달 여 동안 동네 모든 집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바쁜 일손을 도왔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누구보다 쉬지 않고 앞장서 무보수로 성실하게 마을 사람들을 머슴처럼 섬겼다. 이것이 감동이 되었던가? 전도사님이 오신지 3년이 지나지 않아 고향마을은100% 예수 믿는 마을로 변해버렸다. 절망의 마을 한숨이 가득 찬 마을 때지어 싸움이나 하던 젊은이들 밤이면 이 거리 저 거리 돌아다니며 소리 지르고 노래나 하던 청년들이 우리도 예수 믿고 희망을 갖자하여 교회로 교회로 달려 나왔던 것이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다. 예수꾼 한사람 잘 들어오니 소망 없던 마을에 희망의 등불이 환하게 켜졌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돌이켜 보면 암울한 이 시대나 어두웠던 과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문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뿐 먹고 입고 사는 일 같은 것 아니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들이 다투고 시기하고 당을 짓고 불신으로 가득한 교회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요란한 교회가 있다면 이제 그만 회개하고 돌아서자! 진정 교회가 희망이라면 소외되고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나누어주고 베푸는 그런 모습 “진짜 행동”으로 보여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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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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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덕 목사] 마이가 섬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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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네오 섬 동부지역에는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작은 섬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마이가 섬(Pulau Maiga)이다. 이 작은 섬에는 언덕하나 없는 평지에 야자수와 수상가옥 이십여 채 뿐이다. 여기에 바자우 족 70명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그 중에 아이들이 50여명이다.십여 년 전, 한국인 젊은이가 이 작은 섬에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현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엔가 끌려가듯 찾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무슬림인데다가 오랜 세월동안 국적도 없이 육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매우 경계하는 습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젊은이는 그 섬에서는 접할 수 없는 음료와 사탕 등을 사서 보트에 싣고 섬으로 향했다. 늘 사람이 그리운 아이들이 멀리서 보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해변으로 달려왔다. 가난한 부모들은 구호품을 가지고 이따금 찾아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경계할 뿐이다. 생존에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일 것이다.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이 낯선 곳을 찾은 젊은이는 보트에 싣고 온 음료와 사탕을 모여 든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섬에 사는 모든 아이들이 모여든 듯 했다. 신발은 고사하고 벌거벗은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망울은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맑았다. 그런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에 고개 숙인 한 소녀가 보였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표정도 어두워 보였다. 모여든 아이들을 흩어 보내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젊은이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젊은이는 익숙하지 않은 바자우 족의 말로 더듬거리며 소녀에게 물었다.“얘야,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니?”그때서야 소녀는 당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아저씨, 콜라도 좋고 사탕도 좋은데요.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도 가져오고 우리 아빠도 사 줄 수 있어요. 나는 지금 열 살인데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몰라요. 이 섬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에요. 글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한국인 젊은이는 소녀의 말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생각이 짧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곳으로 이끄신 뜻을 이내 알아차렸다. 사랑으로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어디 물질적인 필요만 있겠는가? 그 후 한국인 젊은이는 지난 수년간 이 섬의 아이들을 품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소녀의 꿈을 실현시켜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녀의 간절함과 젊은이의 절실함이 이 일을 시작하신 그분에게 닿았던 모양이다. 우리를 만나게 하신 걸 보면.지난 7월 19-28일까지 샘터교육문화원과 부산YMCA 국제청소년리더십센터는 청소년 15명과 함께 ‘2015 희망아시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바자우족 어린이를 위한 학교세우기’로 마이가 섬과 깔라뿌안 섬에 각각 목조수상학교를 지어 기증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150여명의 아름다운 후원자들이 함께 했다. 이렇게 마이가 섬의 한 소녀가 품은 꿈이 기적같이 이루진 것이다.사람은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에 품은 것이 있어야 ‘절실함’과 ‘간절함’이 나온다. ‘절실함’은 꿈을 향한 성실한 자세를 만들어 주고 ‘간절함’은 때를 만나 현실이 된다.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고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 결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올 여름, 마이가 섬의 한 소녀가 가르쳐 준 고귀한 삶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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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