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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7 -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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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는 역사를 세 종류로 정리한 바 있다. 과거에 매달리는 ‘골동품적인 역사’, 미래의 비전을 정치적으로 고취시키는 ‘기념비적인 역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명을 사랑(Amor Fati)’하는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비판적인 역사’이다. 여기서 니체는 골동품적 역사를 비판하는데, 그것은 과거의 회상에만 매달려 지금 살아 있는 삶, 뛰는 심장과 흐르는 피, 대지와 자연에 맞서는, 거친 살결 속에 있는 주름의 의미를 가진, 현재 우리 인간의 주체적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 디멘티아(치매), 마음이 없는 상태
모든 사람은 늙는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퇴화 과정인 노망(老妄)은 노망(老忘)이다. 곧 늙어가면서 ‘잊는 것’이다. 사실 노인성 치매(dementia)의 라틴어 어원은 ‘마음이 없는 상태, de(without)+mens(mind)이다. 나이들어 늙으면 아기가 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늙어가면서 기억의 망각과 신체 기능의 퇴화를 필연적 현상이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치매는 질병의 하나로 생각되었다. 곧, 노망은 ‘과정과 현상’에 대한 표현이나, 치매는 ‘비정상과 치료’의 대상으로, 의학적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변했다. 한국 사회가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족 해체의 시대에 노망든 노인을 더 이상 가족이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기에 이제 ‘자연스러운 노망의 단계(기억의 망각 현상과 퇴화 현상)’를 ‘치료의 과정인 치매(공포를 동반하는 질병 현상)’로 호명하여,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은 그 말년이 상품화, 물화 되어버렸다. 노망과 망령든 노인은, 가족에게 귀찮고 돌보기 힘든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병리적 존재인 환자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 잊는 것을 잊어버린 이들이 있다.
2.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19대 대선의 투표 결과로도 알 수 있지만 대한민국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곧 보수와 진보 두 진영으로 확연하게 나뉘어져 있다. 이것은 정치적 분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철학적, 나아가 신학적(신앙적) 대립을 내포한다. 삶에 임하는 자세,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 신과 종교의 의미 등 모든 면에서 두 진영은 서로 다르다.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 (돌베개, 2014)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으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데, 사실 이 두 진영은 지금 역사 전쟁을 벌인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이 바로 그 최전선이다. 5·16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화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한 채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다. 거대 재벌, 대기업 경영자와 임원들, 저마다 종편방송을 거느린 거대신문 사주와 고위 간부들, 법원과 검찰,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국가폭력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권력기관의 고위인사들, 그 신문과 방송에 출연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식인들, 그리고 그 모두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새누리당이다(지금은 자유한국당). 그들은 자신들을 ‘근대화세력’, ‘산업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으로 자처하지만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는 ‘유신잔당’, ‘5공 잔재세력’, ‘특권세력’, ‘냉전세력’, 또는 ‘수구꼴통’이라고 부른다. 종교적으로는 강남기독교, 영남불교,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행사해왔다.
반면, 4·19와 5·18, 6월 항쟁을 잇는 이들을 민주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민주화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좌경용공’, ‘종북좌파’라고 불려지는 이 세력은 한국 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노동조합,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를 포함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다. 그들은 주로 온라인에서 소통하며 가끔 오프라인에서도 대규모로 결집해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낸다. 그들 중에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없다. 지속적으로 연대하거나 물질적 이익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네들끼리 심하게 다툰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화 세력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딱 10년 동안 정치권력 하나만을 장악한 적이 있다. 바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이다. 그러나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아무튼 한국 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는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이 있었고, 이번 대선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직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유시민 작가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우리의 현대사가 ‘영광과 승리의 역사’라는 보수의 주장과 ‘불의와 오욕의 역사’라는 진보의 주장은 둘 다 옳다. 하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분열된 것 자체가 가슴 아프지만, 이것도 교회의 역사이고, 때로는 하나 되기 위해 힘썼는데, 이것도 교회의 역사이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 ‘부끄러움과 분노, 긍지와 설렘’처럼 상충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역사도 마찬가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둘 모두를 가진 존재이기에,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칭찬해야할 할 빛이 있고, 그 빛으로 인해 차츰 사라져갈 어둠이 있기에, 민족의 역사도 우리들의 인생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아벨과 가인을 모두 가진 모습,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루터의 고백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모순된 존재에 대한 인식과 사랑, 그리고 모순된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불완전한 사회와 세상을 정말 고민하며 읽어내고 대화와 소통으로 펼쳐나가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그런 세상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시지푸스가 다시 무의미한 바위를 굴려 올리기 위해 저 언덕 아래로 내려가며 신발끈을 조여 매듯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인내일 것이다.
3. 노인+애국자=태극기 부대?
마크 트웨인은 ‘애국자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장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 역시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라고 말한다. 18세기의 문필가인 사무엘 존슨은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말하며 미국의 문필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에드워드 애비는 “애국자는 정부에 맞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지난 몇 달 간, 국민이 정부로부터 나라를 걱정하며 지켜야했던 이 대한민국에서 애국심과 애국자라는 기표가 태극기를 타고,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유령의 실체는 노인들, 곧 어르신들이었다.
▲ 3월 1일 종로 도심을 메웠던 태극기집회 모습
태극기 부대의 어르신들, 그들에게 박정희 시대야말로 그들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공장 미싱 앞에서, 그리고 뜨거운 아랍의 사막에서, 독일의 탄광에서 자신들의 청춘을 다 보냈지만, 적어도 그때는 자신들이 사회의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청춘을, 나아가 자신들의 모든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성서에서 가장 비열하고 권력욕에 찬 인물이 다윗일진대(물론 그의 아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 못지않게 탐욕과 정치적 술수에 능한 인물이었지만), 그런데 왜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도 그리워하는가? 하다못해 메시야도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와야 하는가? 이런 뜻은 아닐까? 적어도 다윗, 솔로몬 시대에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 좀 썼다”, “너희들 까불지 마라.” 이런 뜻? 따라서 태극기 어르신들에게 실질적인 팩트를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을 ‘산업역군’으로 불러준 지도자와 함께, 대한민국의 고도성장 시대를 이끌었다는 자부심, 혹은 환타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어르신들은 지금 세대의 새로운 생각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네가 뭘 아냐? 까불지 마라”라는 것이다.
10·26을 생각하면 우는 어르신들이 있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슬퍼서만은 아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 정말 고생 많았다.”라는 것이다. 자신과 박정희 대통령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에 가장 고생한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고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을 못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당연 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한 과거의 기억에만 매달리는 골동품적인 역사의 산증거가 바로 태극기 어른신들이다. 따라서 기억에만 매달리면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그 유명한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곧, ‘기억의 뿌리’, 혹은 ‘회상의 원인’이 되는 저 초월적인 모든 것(가령, 이데아적인 것)의 죽음이 바로 신은 죽었다는 명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은 ‘박정희는 죽었다. 박근혜는 탄핵되었다’라는 말과 의미에 있어서 같은 것은 아닐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신앙이, 일생이 모두 부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곧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적인 인간을 ‘역사적 인간’이라 부르고, 이러한 역사적 인간들이야말로 이 대지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4. 탈진실과 탈사실의 시대, 아모르 파티!
‘노인은 꿈을 꾸고 젊은이는 비전을 볼 것(요엘 3:28)’이라는 구약성서의 예언은 경제적으로 넉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과 젊은이가 기댈 수 있는 나라, 인생의 경륜자로서 노인의 꿈이 존중받고 새 세상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비전이 펼쳐지는 세상을 뜻한다.
지금 세계는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¹. 이러한 욕망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그 욕망의 헛된 전망을 정당화시킨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2016년의 독일어로 뽑았다. 바야흐로 세계는 탈진실의 사회와 동시에 ‘거짓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와 ‘다원주의(Pluralism)’가 여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하였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 기술이 열어놓은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을 만들어냈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자신들만의 마이크로 공론장을 형성한 태극기 부대의 어르신들, 따라서 만일 어르신들이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과거를 ‘망각’하고 현재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망각한다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와 아직 없는 미래를 뜻하며, 사랑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삶이다.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6).”로 말씀하셨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도 “까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노인들이여, 마음은 없어도 사랑은 넘쳐나기를!
(각주)
1 : 프랑스에서는 인종주의와 우파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이, 독일은 유로존 해체와 이민자 유입을 반대하며 유럽 통합의 진행을 반대하는 대안독일당(the Alternatives of Germany)의 위세가, 이탈리아에서는 유럽회의주의 성향을 보여 온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이, 스페인에서는 반긴축 정책을 선도하며 온라인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해온 포데모스(Podemos)가, 네덜란드에서는 우익 대중주의, 반지구화, 반이슬람주의를 기치로 내건 자유당이, 노르웨이에서는 이민자 축소와 이슬람교 반대 등을 공약한 진보당이 힘을 얻고 있으며, 핀란드에서는 국수주의(nationalism)와 유럽회의주의를 주창하는 핀란드당이 세를 확장하고, 덴마크에서는 반이민 정책과 노인복지 확충을 내건 덴마크국민당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욕망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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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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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6 -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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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
500여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 하나. 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인 에스파뇰라 섬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아투에이(Hatuey) 추장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했고 아투에이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투에이 추장은 부족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내 손의 금은보화, 이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그들의 신입니다. 이것들을 위해 그들은 전쟁을 벌이고 우리를 죽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물리치고 바다에 처넣어야 합니다. 멀리서 온 이 야만족들은 자신들이 평화와 평등의 신을 믿는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땅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우리를 그들의 노예로 삼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혼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신의 상급과 징벌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소유물을 강탈하고 훔쳐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고 죽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월등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무기로써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강철로 만든 갑옷으로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아투에이 추장의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는 이렇게 물었다.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이냐?” 그러자 아투에이 추장이 물었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 “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 그러자 아투에이가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고 하며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후 이 지역을 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본격적인 정복전쟁은 1500~1650년 까지 150년에 걸쳐 완료됐다. 이 기간 동안 중남미 대륙의 토착민은 6,500만 명이었으며 정복전쟁 이후는 500만 명 이었다. 약 6,0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2. 고난과 부활
‘하나님의 이름을 정의’로 규정하는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능력의 원칙과 향유의 원칙하에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고통과 죽음을 개인화시키고 공공의 사회로부터 추방시켜 버렸다.”라고 한다. 이 말을 이 땅 대한민국의 지난 9년에 적용시켜보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자행되는 온갖 구조적 불의에 대한 종교적 발언과 비판은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 공적 차원에 반영되지 못한 채(지난 3년간 세월호에 대한 함구를 보라), 국가권력의 구조적 폭력은 합법성과 정당성으로 합리화 되었으며(세월호에 관한 언론과 정치의 행태를 보라), 이에 대한 저항과 항거는 불법적이고 위법적인 차별과 함께 반정부적이고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따라서 지금 불의한 정치에 합법성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이들과 신앙을 개인화 하는 사제들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본과 권력의 ‘능력의 원칙’과 ‘향유의 원칙’에서 배제된 이름 없는 하나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모두 죽음, 혹은 죽임에 관계가 된다. 정신분석학의 명제에 의하면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한번은 생명체로서 죽고, 또 한 번은 상징적으로 죽는다.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적 상징체계 안에서 적합한 자리에 안착하는 것을 상징적 죽음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충분한 애도와 장례의 절차를 통해 죽은 자에 대한 타당한 의미 부여를 한 이후에,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적 생명체가 먼저 죽고 상징적인 죽음이 뒤따른다. 한 사람이 죽은 후 그 장례 절차를 통해 우리는 육신적인 죽음과 상징적인 죽음의 순서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죽음이 먼저 있고 생명체가 나중에 죽는 죽음도 있다(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우리 사회에 ‘박정희 체제’가 해체되는 상징적인 죽음이 그러하다). 반면 생명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나, 상징적으로 죽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의 경우를 통해 지속성을 획득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부활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말기에 이르러 생성이 되었다. 물론 페르시아나 바벨론, 그리스 등의 주변 종교들의 영혼불멸이나 윤회 같은 영향이 있었겠지만, 유대교는 부활을 ‘메시아적 기대’라는 틀로 ‘기억 투쟁’과 연결시킨다. 전 감신대 교수였던 이정배 교수에 의하면 ‘자신들의 역사를 빼앗겨 잊혀진 존재들을 새롭게 역사의 주체로 불러내는 것, 메시아를 통한 정치적 사건, 이것이 유대교의 부활 이해’이다. 힘들고 어려운, 또한 고통스러운 바벨론 포로기를 살면서 정치적 독립과 종교의 자유, 해방을 위해 힘껏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선한 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부활 사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 속을 살면서 세상 밖을 꿈꿨기에 고난당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런 체제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 유대교의 부활의 의미이다.
3.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
그러나 기독교, 혹은 개신교로 오게 되면 팔레스틴 유대교의 지평이 헬레니즘 철학의 지평과 만나 조금 더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이 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인간 존재의 종극적 운명(혹은 사후의 운명)에 관해 ‘영혼 불멸’과 ‘몸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고 말하며 “전자는 그리스적인 상징이고, 후자는 히브리적인 상징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두 가지를 아울러 가졌다. 영혼 불멸의 상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때그때 단독적으로 불멸의 영으로 되지만, 몸의 부활의 상징에 의하면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부활한다.”라고 말한다(이하 서남동, 「우리의 부활과 4월 혁명」 참조). 인간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개인적 상징과 인간존재의 사회적 운명에 관한 사회적 상징의 대조이다.
서남동 교수는 사후의 ‘불멸의 영혼’은 영원한, 말하자면 신국에 개인적으로 입장하게 되는데, ‘부활’의 경우에는 역사적인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 단체로 입장하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연결되는 부활이라고 한다. 유대교의 부활의 맥락에 공동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타계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지금 억눌린 자들이 상속 받고 그 주인공이 될 약속의 새 시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적 풍토에 들어가 순수이념(이데아)의 초월계와 비실재적인 그림자의 현실계라는 이층구조 속에 편입되었으며 로마 콘스탄틴의 왕권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의 신국은 타계적인 피안이 되었다. 따라서 시간적 미래와 역사적 지평을 자신의 삶의 자리로 삼고 있는 히브리적 전통을 상실하고 말았다.
서남동 교수는 “역사적 기독교는 두 가지 상징(그리스적이고 히브리적인 상징)을 아울러 물려받았다. 개인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신앙, 곧 개인 영혼의 절대적 가치가 보장되는 상징과 이 사회가 낡아지면서 새 사회가 와야 한다는 사회 갱신에 대한 보장이 병립공존(竝立共存)되어서 상호 견제되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하고 바람직하다. 신국 상징이 메시아 왕국 상징에 의해 삼켜진다면, 사회개혁을 위해서 개인 영혼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생각과 결말이 나올 것이고,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에 의해서 삼켜져 버린다면, 지상 역사의 미래와는 상관이 없는 타계적 신앙이 되고 말 것이다. 양자택일이 얼마나 잘못된 길이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도 아니라는 것에 관해서는 다시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의 경우 메시아 왕국 상징이 신국 상징 속에 먹혀버렸다. 사실, 지배자와 가진 자들은 천년왕국,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원하지 않고 도리어 무서워한다. 그것은 자기네들의 소유와 지위에 대한 위협과 그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눌린 자, 가난한 자들에게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가 절실한 갈망이다. 따라서 강자와 부자들은 메시아 왕국을 이단시하고 불법화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기독교의 발자취가 아닌가? 한국 개신교의 행태를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부활을 ‘메시아 왕국의 도래’요,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곧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의 획득’이라고 말하는 서남동 교수는 “몸의 부활은 메시아 왕국에 결부된 역사적, 사회적 신앙의 상징이다. 몸의 부활은 천국으로 왕생한다는 약속이 아니라 이 세계의 불의와 억압에 항거하여 역사의 새 시대에 다시 부활 하생한다는 민중의 의지이며 그 갈망이다. 영혼 불멸과 신국이 지배자의 유혹으로 쓰여지는데 대해서,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서의 몸의 부활은 눌린 자의 갈망을 그대로 말하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갈망이다.”라고 말한다.
구약성서학자 폰 라트(G. von Rad)도 말한바, ‘출애굽 사건은 창조신앙에 선행’한다.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표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킨 역사적 해방 행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처럼 존재 철학적 관점이 아니었다. 애굽에서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던 보잘 것 없던 백성 합비루(habiru)들이 하나님의 해방 행위를 통해 그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뿌리 경험’이며 억눌린 모든 집단을 위한 정의의 모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가 성경에 가장 먼저 나와 있기에 ‘신의 천지창조’를 신앙에 강요하지 말고, 그 다음 나오는 출애굽기의 ‘출애굽 정신’을 따를 것인지를 묻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난과 부활의 참의미는 창조신앙에서 출애굽 정신으로 변화될 때 가능할 것이다.
4. 부활절의 참의미
도대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참의미는 무엇인가?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한국의 종교가 죽음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서, 유교는 ‘주검’에 관심이 있고, 불교는 ‘죽음’에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교는 ‘죽임’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사형틀이다. 안병문 박사가 보기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임사건은 철저히 집단적이다. 예수 한 개인이 아닌, 인류에게 일어난 집단적 사건이다. 그 집단적 죽임사건은 예수 개인이 죽었으나, 그것으로 묶어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긴긴 인류역사 속에서 계속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연속되었는데 예수의 죽임만이 이토록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것은 죽임을 죽임으로 맞서지 않고 죽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맞선 성서의 민중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예수 당시 젤롯당처럼 죽임을 죽임으로 맞서는 방법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운동방식인 죽임을 증거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증거 하는 일, 그것이 죽임의 세력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우리들의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세월호의 죽임과 그 죽임을 증거한 기억저장소, 그리고 마침내 비폭력적인 집회와 민주적 절차에 따른 거대 권력의 탄핵! 따라서 세월호 3주기가 부활절과 같은 날(2017.4.16.)인 것은 너무나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마르크스의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 이 땅에 역사는 수십번 비극으로 반복이 되었다. 결코 희극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한국말년사』 (덕흥서림, 1945)에서 저자 장도빈은 “1884년 갑신 이후로 1894년 갑오에 이르는 10년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000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게 됐다. 삶이 위태한 민중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의 추세였다.”라고 한다. 지금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2000년 전 갈릴리 예수의 정신과 눈물로, 동학의 정신으로, 그리고 4월과 5월, 6월의 함성(419, 518, 6월 항쟁)으로, 마침내 그것은 이제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 촛불의 힘으로, 새 봄의 역사로, 소중한 한 표의 힘으로!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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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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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5 - 권력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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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새로운 다중을 창조한다.”(질 들뢰즈) 질 들뢰즈에 의하면 걸작의 참된 의미는 대중의 주어진 감수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중’(다중)을 창조하는 것, 대중이 듣기 원하는 입에 발린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감수성을 창조하고, 현실 안에 잠재된 어떤 힘을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는 “문제의 해법에만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고 한다. 옳지 않은 문제에 옳지 않는 답도 문제지만, 옳지 않은 문제에 옳은 대답은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이론과 실천은 두 다리와 같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 왼발이 따라가고,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 오른발이 따라간다.” 지금 대한민국이 그러하다. 대중이 한발 나가니, 헌법기관이 한발 따라온다. 그렇다면 헌법기관이 한발 나아가면 정치가 한발 따라갈까? 목하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중을 창조하는 걸작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리고 걸작을 창조하는 새로운 지식인이 필요하다.
1. 지식인: 자퀴즈!
20세기 ‘지식인들의 지식인’이었던 장 폴 싸르트르(J. P. Sartre)는 지식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계몽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첨가하면 참다운 지식인은 세 종류가 된다. 첫째, ‘참견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쌓아올린 명성, 곧 상징자본을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지식인이다. 가령,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에밀 졸라(É. F. Zola)가 소설 쓰기를 제쳐두고 “자퀴즈!”(J’accuse!) 곧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치고 나섰을 때, 반드레퓌스 우익세력이 한목소리로 작가가 왜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드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쏘는 순간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탄생했다. 둘째, ‘계몽적 지식인’은 소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스스로 철학자라고 불렀던 지식인들, 곧 (프랑스로 한정하여)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18세기를 계몽주의 시대로 만들었다. 중세의 타락한 가톨릭 교회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끌어들였던 참 계몽적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유기적 지식인’은 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가 말했던 바, ‘사회 계급의 신경 노릇을 하는 지식인’이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야말로 그람시적 지식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부류의 지식인은 당대 피억압자를 대신해 그들의 대표자, 대변자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지식인, 곧 대중 위에서 대중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지식인은 죽었다. 대중이 스스로 지식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지식인이 퇴장한 것일까? 아니면, 침묵 속에 짓눌려 익사당한 것일까?¹ 지금 대한민국은 후자에서 전자로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그 지식과 대중은 정치적 권력을 차지할 것인가?
2.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대통령의 국정농단)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대통령 탄핵)이기도 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스티븐 룩스(S. Lukes)는 『3차원적 권력론』 (나남, 1992)에서 “권력은 1, 2, 3차원으로 분류되는데, ‘직접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권력’인 1차원적 권력과 ‘법이라는 간접적 힘’으로 통치하는 2차원적 권력, 그리고 ‘설득과 영향력으로 부지불식간에 작용’하는 3차원적 권력”이 있다고 한다.
가령,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 담임목사가 자장면을 시켜 먹자고 하면 부목사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 담임목사가 가진 힘을 1차적 권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1차원적 권력은 권력의 일반적인 정의로 국가의 국민에 대한 공권력 행사, 사회적 강자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력 행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행태적(behavioral)’권력이라고도 한다. 2차원적 권력이란 ‘구조적(structural)’ 권력으로, 어떠한 문제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표면 위로 올릴 수 있는 혹은 올리지 않는 권력을 뜻한다. 교회 내적 문제에 관하여 당회가 막강한 권력으로 사안을 결정하여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조적 강자가 소수자의 의견을 아예 제도적, 혹은 원천적으로 막아서 그들의 의견이 수면위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권력을 뜻한다. 3차원적 권력은 ‘구성적(constitutive)’ 권력으로,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권력을 말한다. 그러나 보통 언론이나 매체의 권력을 뜻하기도 한다. 가령, 조선일보가 노조에 대해 ‘귀족노조’식으로 폄하하여 기사를 쓴다면(교회적으로는 여론을 형성하는 대형교회가 담론을 형성하면) 사람들의 생각도 노조를 ‘귀족노조’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권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독일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구성적 권력의 힘이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국민 여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괴벨스는 선전 수단으로 라디오에 주목했다. 그는 국가 보조금을 풀어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급여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 7시 라디오 뉴스에 ‘오늘의 목소리’라는 코너를 만들어 총리 관저를 르포(reportage)하도록 했다. 나치스 지지 군중대회도 실황으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이러한 괴벨스의 정치 연출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성은 필요 없다. 대중의 감정과 본능을 자극하라.”라는 것이었다. 반면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괴벨스에서 링컨으로 넘어가고 있다.
1, 2차원적 권력이 구체적으로 권력을 실천하는 것이 폭력이다. 대한민국은 촛불혁명과 헌법제판소의 일련의 절차를 통하여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비폭력과 민주적 혁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권력과 폭력의 고고학은 어떨까?
3. 폭력의 고고학: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적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알베르 카뮈)
관용(tolerance)이란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과 행위 양식을 존중하고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이러한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그 존재 안에서도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근거한다. 그러나 관용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2006)에서 전체주의 정치체제를 ‘열린사회’와 ‘닫힌사회’의 비유로 통렬하게 비판한 칼 포퍼(K. R. Popper)는 이것을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불러온다. 우리가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불관용의 습격에서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회와 관용 정신 그 자체가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한다.” 열린사회(the open society)는 전체주의와 대립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사회 전체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차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 사회이다. 반면 닫힌사회(the closed society)는 불변적인 금기와 마술 속에 살아가는 원시적 종족 사회로서 국가가 시민생활 전체를 규명하며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되는 사회이다. 지금 지금 대한민국은 열린사회 안에 작은 닫힌사회가 있다. 이 닫힌사회 속에 갇힌 어르신들을 사랑해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관용의 역설에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해야 할까? 폭력의 고고학을 소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에 관한 고고학’의 첫째 이론가인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에세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 (1920)에서 “폭력에는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 있다. 신화적 폭력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가리키고, 신적 폭력의 ‘신’은 유대교의 신, 곧 야훼를 가리킨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의 ‘니오베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일곱명과 딸 일곱명을 두었는데, 그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니오베는 불경죄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냈던 것이다. 레토에게는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명씩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가 난 레토는 아폴론으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들을 죽이게 하고, 아르테미스는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이다. 반면, 벤야민이 든 신적 폭력의 사례는 구약 민수기의 ‘고라의 반역’이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었으나,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모세가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것이 반기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같은 레위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모세에 대한 반역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야훼에 대한 반역이다. 따라서 모세가 야훼의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 고라의 무리는 한꺼번에 소멸 당했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이르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민수기 16:32-35).”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 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라고 말한다. 곧, 신화적 폭력이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폭력, 다시 말해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 신적 폭력을 ‘순수한 폭력’이라고 옹호하였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약간의 신학적 무리수가 있긴 하지만, ‘레토(신)-니오베(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모세)-인간(고라)의 관계’에 ‘신이 폭력으로 편들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신화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이 되지만, 신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한쪽을 편들어 주는 것이다(물론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한쪽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벤야민이 쓰는 ‘폭력’의 의미란 무엇인가? 독일어 ‘Gewalt’는 ‘힘ㆍ폭력ㆍ권력ㆍ권능ㆍ무력’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벤야민이 다루는 폭력은 ‘윤리적 상황’과 관련된 폭력을 뜻한다. 가령, 화산폭발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으로서의 폭력은 고찰대상에서 배제한다. 따라서 폭력이 윤리적 현상으로 파악된다면, 그때 폭력은 법과 정의와 관련된다. 곧, 벤야민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법적 폭력’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폭력은 이성의 한계에서, 법은 이성의 정당한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폭력은 정치의 근원이자 토대이고, 법은 정치의 종점”이라고 한다. 곧, 세상의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궁극적이고 내재적인 목적이 폭력 내지 권력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에 준거하는 것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을 파괴한다. 전자가 경계를 설정한다면 후자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죄를 만들고 속죄하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죄를 제거한다. 전자가 협박적이라면 후자는 충격적이고, 전자가 피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피의 냄새가 없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두 번째 이론가인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법의 힘』 (1994)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은 … (하나의) 유혹이다. 어떤 유혹 말인가? 대학살을 신적 폭력의 해석 불가능한 발현의 하나로 사고하려는 유혹”이라고 비판 한다. 사실 데리다와 달리 벤야민은 파쇼의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신적 폭력으로서 메시아를 요청’하는 벤야민을 데리다는 이해하기는 하나, 이러한 벤야민의 폭력론은 좌파와 우파가 뚜렷하게 구분되기 이전의 ‘혼란스러운 근친성’ 속에서 저술된 것이며, 그런 만큼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베냐민의 신적 폭력, 곧 피도 흘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리치며 휩쓸어버리는 신의 폭력이 ‘최종 해결’이라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혀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대학살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만약 모세를 나치로, 고라를 유대인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비판은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세 번째 이론가인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은 『호모 사케르』(1995)에서 “신적 폭력을 ‘최종 해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데리다의 주장은 정말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오해이다.”라고 비판한다. 또한 ‘폭력에 관한 고고학’ 그 네 번째 이론가인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 Zizek)은 아감벤과 같이 데리다의 ‘오해’를 비판하고, 베냐민의 ‘신적 폭력’을 옹호한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에서 “신적 폭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벤야민의 신적 폭력의 구체적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의 자코뱅(Jacobins, Jacobin Club) 공포정치², 그리고 1919년 러시아 내전 때 붉은 군대의 ‘테러리즘’을 거론한다. 아무튼,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신적 폭력이라는 이름의 ‘순수한 혁명적 폭력’을 변호한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신적 폭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저지르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대항 폭력이며 이러한 신적 폭력은 그 내부에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고라를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본다는 말일 것이다.) 체 게바라도 “진정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이끌린다.”고 했다. 곧 사랑이 없으면 혁명도 없는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I. Kant)의 명제를 비틀어 지젝은 “잔혹함이 없는 사랑은 무력하며, 사랑이 없는 잔혹함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혁명은 잔혹, 곧 폭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결론이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기쁨이 없다는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역설적으로 폭력의 역사를 통해 메시아의 신적 폭력의 그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을 국가로 확장하면 성 어거스틴(A. Augustinus)의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을 살펴볼 수가 있다. 어거스틴은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지되나 살해인 경우,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실천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이러한 살인에 대한 부분적 허용이 ‘정당한 전쟁론’으로 발전했는데, 그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8개의 기본원칙은 “첫째 하나님의 공의를 침해하는 경우, 둘째 전쟁의 악함이 현저하다고 도덕적으로 판단될 때, 셋째 폭력의 사용을 위한 정당성이 인정될 때, 넷째 국가의 영적인 상태가 심각히 위협을 받을 때, 다섯째 신앙생활에서 복음적 기준의 해석들이 위협을 받을 때, 여섯째 불의한 사회적 변화에 더 이상 수동적 태도만으로 일관할 수 없을 때, 일곱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성서에 비추어보았을 때도 적절했을 때, 여덟째 평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라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폭력의 고고학은 미래 권력을 향하여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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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사실 ‘지식인의 고향’, ‘지식인의 태반’이었던 대학이 대기업과 대자본의 하청업체가 되어 버렸다. 대학은 ‘죽은 지식인들의 묘지’가 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더 극심해질 이러한 세상에 싸르트르적 지식인의 ‘불온한 기운’이 부활해야 할 것이다. 계몽적 지식인이 권력에 맞서 미몽의 세상에 빛을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 이 땅의 수많은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불의에 대한 저항’의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2) 자코뱅파는 프랑스 혁명기에 생긴 정당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였다.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혁명을 추진하였다. 국민 공회에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좌익’의 어원이 되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높이 평가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라 할 수 있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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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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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4 : 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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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
1. 앙시앵 레짐: 적의 계보학과 꼰대의 등장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 Lacan)의 상징계(the Symbolic)처럼 우리는 태어나면서 언어와 사회 질서, 혹은 체제(regime)에 속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인 것이다. 불교 문화권에 태어난 사람은 불교 문화를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유교 문화를 상징계로 접한 사람은 유교의 이상을 자연스럽게 그의 가치관이나 사상에 반영할 것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팔레스틴 땅, 식민지 이스라엘과 주변 강대국의 문화와 영향은 예수의 말씀에 녹녹히 녹아있다. 예수의 비유가 그러하며 그의 날선 생명의 말씀이 그러하다.
이토록 레짐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본질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 레짐은 완결되지 않았고 완전하지도 않다. 보수는 기존 체제를 지키려 하고 진보는 그 체제를 변화시키려 한다. 여기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적의 개념을 상정하고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과 ‘누보 레짐(nouveau regime, 혁명 이후의 신체제)’이 체제수호와 변화의 변증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림
가상의 복제물이 실체를 가리고 대신한다고 말하는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적의 계보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敵)은 최초 단계에서 ‘늑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음 단계에는 ‘쥐’(제발, 특정인을 연상하지 마시라!)의 형태, 그리고 ‘기생충’의 모습으로 다가오다가 마지막에는 ‘바이러스’의 형태로 나타난다.” 늑대는 울타리 밖에 선명한 적으로 존재하니, 비록 그 공포와 폭력의 서슬은 시퍼렇되, 전선이 분명한 만큼 대적하기도 단순하고 쉽다고 한다. 그러나 쥐는 야음을 틈타 은밀히 우리를 갉아먹는다. 지하벙커 같은 음습한 어둠을 좋아하며, 울타리를 아무리 견고하게 둘러쳐도 끈질기게 집안 깊숙이 들어온다. 따라서 우리들의 허술하고 지저분한 비위생성이야말로 쥐에겐 좋은 서식처가 된다.
쥐의 단계를 넘어선 적은 이제 기생충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부지불식간에 내 몸 안에 들어와 기생과 숙주의 관계로 진화한다. 숙주로 하여금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게 하거나,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긴다. 따라서 내 몸속의 적은 나의 탐욕을 조장하여 나 자신을 살찌운다. 숙주인 나는 날로 허허로워 치열하게 탐욕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생충만 살찌울 뿐이다. 그러나 이 단계까지 적은 나와 구별되는 타자성을 극복하지 못한고 있다. 따라서 그만큼 대적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 적이 바이러스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어진다. 적이 나인지, 내가 적인지 헷갈린다. 적의 낯선 타자성이 사라지고 어느덧 내 안에 내재화된다. 심지어 적은 나로 하여금 나를 타자화하여 주체를 전복시킨다. 소외와 일탈이라는 비정상성이 일상화되어 정상성으로 둔갑한다. 일종의 착란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실 2017년 2월의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와 사람 모두 착란상태에 빠져있다.
상징계의 이러한 착란상태에 항상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 타자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허구적인 주체의 단계)로 퇴보하며 상징계를 뒤덮는 꼰대가 등장한다. 꼰대는 기성세대나 선생님을 뜻하는 은어로도 쓰였던 말인데, 프랑스 단어 ‘콩테(comte, 백작)’에서 유래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부터 백작, 공작, 후작 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스스로를 콩테라고 자랑하고 다녔는데, 이를 비웃던 백성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꼰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꼰대는 심리학적으로 ‘자기만 옳다고 느끼는 경향(sense of self rightness)’, ‘스스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경향(sense of self entitlement)’을 말한다. 기본적인 상식과 통념을 부정하면서 전문가의 권위만을 내세운다. 자기만 옳고 똑똑하며, 돈과 명예까지 가졌으니 대접받아야 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주변에 이러한 꼰대는 널려있다. 나이, 성별과 무관하게 계급장을 내세우고, 대접받고 싶어 한다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가장 대표적인 꼰대인 굉꼰(굉장한 꼰대), 젊꼰(젊은 꼰대). 여꼰(여자 꼰대) 등.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대화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면 꼰대가 되어간다는 위험신호라고 할 수 있다.¹ 그러나 문제는 이 꼰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로, 곧 레짐으로 확장될 때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분열증적 자본주의의 폭력 사회 체제 속에서 우리는 개인의 ‘힐링(마음 치유)’을 넘어 ‘권력의 미시적 짜임’을 날카롭게 들춰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2. 분열증 자본주의와 디스토피아 들뢰즈/가타리(G. Deleuze/F. Gautari)는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에서 “초점은 장군이 아니라 하급 장교들, 하사관들, 내 안에 있는 병사, 심술궂은 자이며, 이들 각각은 나름대로 성향들, 극들, 갈등들, 힘의 관계를 갖고 있다 …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의 체계 속에서 항상 능동적인 자리를 취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라 바로 이 미시적 짜임이다.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독재자들의 무장, 대기 오염에 능동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좀-나무, 탈영토화-재영토화, 무리-군중, 사본-지도, 분자-그램분자, 소수-다수, 유목성-정주성, 전쟁 기계-국가 장치, 매끈한 판-홈이 팬 판’과 같은 무수한 이항 대립의 쌍을 변주하며, 사유의 방식, 기능, 양태들에 대해 설명하는(여기에는 무수한 자의적 개념이 춤추고 있다. 가령 리좀, 동물-되기, 소수-되기, 영토화와 탈영토화, 포획, 탈주선, 지층과 지층화, 기관 없는 신체, 얼굴성, 추상기계, 배치,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팬 공간, 공리계의 접합접속 등등) 들뢰즈&가타리는 ‘차이의 철학’, 혹은 ‘욕망의 미시정치학’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물학과 언어학과 음악학과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로지르며 다양체가 의식과 무의식, 자연과 역사,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그 본질에서 분열증 자체이다. 주기적으로 위기는 돌아오고 증식하고 소멸하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환투기와 주식 투매의 미친 바람이 불고, 자본은 이익이 있는 곳으로 순간 휘몰아쳤다가 자양분을 빨아먹고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자본의 유동적 흐름은 포식자처럼 취약한 외환시장과 주식 거래를 삼켜버린 뒤 소화할 수 없는 뼈들만 뱉어낸다. 전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라는 정글에 방목된 사자들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운용되는 토끼들을 사냥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사자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서두에 인용했듯이 ‘지옥에 가는 길을 숙지’하면 되는 것인가?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점유하고, 거주하며, 보존하는 영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라! 늑대 한 마리가 아니라 늑대 무리로 달아나라! 무리로 달아나야만 하나의 도주로가 아니라 천 개의 도주로를 만들 수 있다. 하나는 붙잡히지만 천 개는 붙잡히지 않는다. 경로를 따르지 말고 그것을 자주 이탈하라! 내가 어디로 움직일지 그들이 알 수 없게 하라! 정주민들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라!” 머리둘 곳 없는 방랑자 예수와 그와 함께한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따라서 『천 개의 고원』은 화폐와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기계’의 포획에서 도망가도록 부추긴다. 국가-기계는 수많은 금기의 거미줄을 만든다. 제도들과 정책, 법과 치안의 그물로 국민을 포획하고 국가라는 지층에 편입시킨다. 따라서 조세와 병역 의무를 지우는 국가의 다양한 포획 장치로부터, 자본주의의 기계들(이를테면 정부, 한국은행, 군대, 나아가 학교, 종교단체 등)로부터 도망가라. 그때 구원의 문이 열릴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마태 2:3)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므로,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었는데, 이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에 더 급진적 디스토피아로 전락했다.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되어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개신교는 물론 대한민국은 지금 ‘체제 디스토피아’의 최전성기가 무너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과 이후 해경·청와대·경찰·검찰·정치권 등 각 체제가 보여준 모습은 ‘체제 디스토피아의 완결판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김기춘-황교안-우병우 라인은 그 마지막 보루이다. 또한 ‘인간 디스토피아’는 그 정점을 찍었다. 청문회에 등장한 기득권층 인사와 고위 관료 등의 일그러진 모습을 통해 더 이상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긍정 할 수 있는 인간 유토피아를 상실했다. 다만, ‘문명 디스토피아’를 통해 다중들이 조용히 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과 시의 세상을 누보 레짐으로 열 것이다.
3. 누보 레짐: 음악과 시의 시대로
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음악의 음들에 관해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음악의 음들은 저마다 우주, 혹은 천문학적 공간 속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어떤 것과 상응한다.”라고 말한다. 가령 레는 ‘레지나 아스트리스(별들의 여왕인 달)’, 미는 ‘믹스투스 오르비스(선과 악이 섞여 있는 장소인 지구)’, 파는 ‘파툼(운명)’, 솔은 ‘솔라리스(태앙)’, 라는 ‘락테우스 오르비스(은하수)’, 시는 ‘시데루에스 오르비스(별이 총총한 하늘)’, 도는 ‘도미누스(신)’. 따라서 ‘달-지구-운명-태양-은하수-하늘-신’의 단계로 상승하는 음계를 통해 영적 지식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달과 지구에 국한된 인간의 운명은 태양과 은하수, 하늘에 속한 신의 레짐으로 귀속될 때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은 그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시 해설집 『홀림 떨림 울림』 (나남, 2013)에서 이영광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 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은 ‘홀림-떨림-울림’으로 진행된다.” 시도 그렇지만, 2017년은 타자의 아픔에 홀려 가슴이 떨리고, 몸 전체에 큰 울림으로 남아 울림이 홀림이 되어 더 큰 떨림이 되기를 바란다. 이영광 시인도 “지상의 영화를 찬양하는 종교가 없듯이 현세의 복락을 지지하는 시도 근본적으로는 없고, … 어떤 종교는 고통 그것도 허망이라고 가르치지만, 모든 시는 허망을 고통이라 느끼는 곳에서부터 말을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결국 타자의 아픔에 홀려, 자신을 그 고통 가운데 내어주었고, 그 숭고한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떨림을 주었고, 이제 시대를 넘어 큰 울림으로 변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홀림은 계이름 ‘레’로부터 시작하여 ‘도’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목하, 음악과 시의 시대가 이 앙시앵 레짐의 시대, 곧 적의 계보학과 꼰대들의 시대에 새 희망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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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지침’ 5가지에 관해 북키닷컴 개발자인 이준행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나이를 먼저 묻지 마라.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나이를 묻는 것은 상대방과 위아래를 겨루자는 의미이다. 자신이 나이가 더 많음을 상대에게 주지시키고,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둘째, 함부로 호구조사를 하거나 삶에 참견하지 마라. 차라리 좋아하는 음식이나 동물을 물어보라. 셋째, 자랑을 늘어놓지 마라. 당신의 인생 자랑은 ‘노잼’이다. 당신이 살아온 시절에 대한 자랑은 당신에게만 유효하다. 당신의 인맥 자랑은 당신에게 잘 보이라는 알량한 호소임을 상대방은 너무나도 잘 알아챈다. 어느 것으로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 넷째, ‘딸 같아서 조언하는데’ 같은 수사는 붙이지 마라. 인생 선배로서 조언한다는 이야기도 먼저 꺼내지 마라. 당신이 걸어온 길이 매력적이라면 상대가 알아서 물어올 것이다. 다섯째, 나이나 지위로 대우받으려 하지 마라. 나이나 지위가 없어도 타인에게 대우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 스스로가 언제든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라. 나이로 서열을 매기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꼰대성이란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쉽게 꺼내는 내 안의 괴물과도 같다. 그 괴물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꼰대 탈출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상대와 내가 살아온 시간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괴물을 늘 경계하라. 그러면 당신은 꼰대가 아닌 어른에 가까워질 것이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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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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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3 : 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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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KBS 연기대상에 베스트커플 상을 받은 뒤 연예인 차인표씨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50년을 살면서 깨달은 것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둘째, 거짓은 결코 참을 이길 수 없다. 셋째, 남편은 결코 부인을 이길 수 없다.’ 저는 여기에 넷째를 하나 더하고자 합니다. ‘목사와 장로는 결코 교회와 교인을 이길 수 없다.’” (최병학 목사)
“2017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은 ‘CHICKEN RUN’”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7』)
1. 정유년, 군주민수에서 사필귀정으로
지난해 연말 <교수신문>은 2016년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4년간 선정된 <교수신문>의 올해의 사자성어를 보면, 그리고 그 당시 정치권을 강타한 사건들을 곁들여 보면 이렇다. 2013년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공약철회, 국정원 댓글 사건, 2014년 지록위마(指鹿爲馬, 거짓이 진실을 가린다)-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파동, 2015년 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어지럽고 무도하다)-메르스 대응 무능, 배신의 정치 찍어내기, 2016년 군주민수-촛불집회, 탄핵 등. 2017년 새해를 맞이하며 2017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누구나 흔히 아는 사자성어인 ‘사필귀정(事必歸正) 곧, “모든 일이 반드시 옳은 길로 돌아가는” 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2. 정유년 각자 도생의 시대, ‘CHICKEN RUN’
해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주요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한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매년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2017년에는 어떤 트렌드가 한국 사회를 주도할 것인가? 『트렌드 코리아 2017』 (미래의 창)은 2017년의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CHICKEN RUN’으로 선정하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비상의 날개를 펴고 극적으로 울타리를 탈출한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런>(2000)의 주인공들처럼 철조망 울타리에 갇힌 것같이 정체와 혼돈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2017년에는 새롭게 비상하길 기원한 것이다. ¹
1) C’mon, YOLO! 지금 이 순간, ‘욜로 라이프’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는 의미이다. 카르페 디엄(carpe Diem)이 삶의 태도라면 욜로는 태도이다. 자기지향적이고 현재지향적인 삶의 스타일로 후회없이 즐기고 사랑하고 배우라는 삶의 철학이자 이상향을 향한 실천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미래를 향한 기대를 접은 젊은이들이 부르짖는 절망의 외침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은 희망의 외침이기도 하다.
2) Heading to ‘B+ Premium’ 새로운 ‘B+ 프리미엄’
가격 대비 성능이 구매의 핵심 고려요인이 된 가성비의 시대의 상징으로 단순히 가격을 낮춰 가성비를 확보하기보다는 좀 더 프리미엄한 가치를 제공하고 제 각격을 받는 방향으로 가성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불황의 벽을 넘는 사다리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3) I Am the ‘Pick-me’ Generation 나는 ‘픽미세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췄지만 순위대로 피라미드의 자리가 주어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선택(pick-me)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고단한 세대를 잘 말해주고 있다.
4) ‘Calm-Tech’, Felt but not Seen 보이지 않는 배려 기술, ‘캄테크’
공기가 언제 어디서나 사람과 함께 공존하듯이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지원하는 기기들을 통해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조용한 기술을 말한다. 캄테크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과 사람 사이에 인터랙션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고 조용한 만큼 그 가능성과 파급력 또한 가늠하기 힘든 이 신기술은 얼마나 인간지향적인 형태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5) Key to Success: Sales 영업의 시대가 온다
인정과 막무가내식 설득에 호소하는 주먹구구식 관계의 영업을 넘어 다양한 매체, 접점, 채널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영업의 과학화가 기업의 핵심역량으로 다가오고 있다.
6) Era of ‘Aloners’ 내멋대로 ‘1코노미’
철저히 혼자만을 위하면서도 때로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들로, 1인과 이코노미(economy)의 조합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발적으로 혼자인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얼로너(aloners)’라고 한다.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혼자 밥을 먹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SNS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7) No Give Up, No Live Up 버려야 산다, 바이바이 센세이션
장기불황과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 일본에서는 ‘사토리족’의 버리는 삶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고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소유보다는 향유, 공유의 가치를 전파한다. 한국의 젊은 유목민적 물질주의자들이 이 버리는 삶에 동참하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자기 집에 비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나 대여를 통해 그때그때 꺼내쓰는 ‘삶의 클라우드’현상을 만들고 있다.
8) Rebuilding Consumertopia 소비자가 만드는 수요중심시장
소비자가 시장의 권력으로 이동하여 실시간으로 소비자의 수요를 반영한 제품과 서비스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타났다.
9) User Experience Matters 경험 is 뭔들
포켓몬GO 게임을 위해 미국인들이 걸어 다닌 총량이 1,440억 걸음(지구와 달 사이를 143회 왕복하는 길이)으로 집계됐다.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비결은 바로 경험과 재미이다. 물건을 파는 것에서 이제 경험을 파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었다.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여 체험하거나 오감을 자극하는 경험을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10) No One Backs You Up 각자도생의 시대
전에 없던 심각한 자연재해와 경기침체에 대한 불안은 깊어 가는데, 정부의 문제해결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국민들은 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혼자 모색하고 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은 말 그대로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도모해야한다.”는 뜻이다. “나는 억울하다”는 승복부재의 감정과 “나는 네가 싫다”는 타자혐오가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는 ‘욜로 라이프’와 ‘각자도생’이다. 어쩌면 이 두 키워드는 동일한 현실 자각을 기반으로 한 트렌드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을 건 나밖에 없는 세상, 국가도 사회도 가족도 나를 보호해줄 수 없고,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절박한 심정이 지극히 현재지향적인 소비의 모습으로 ‘욜로 라이프’로 나타난 것이다.
3. 촛불의 미학
시인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촛불의 미학』(문예출판사, 2001)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꽃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생성을 향해 긴장되어 있는 세계이다. 몽상가는 거기에서 그 자신의 존재와 그 자신의 생성을 보는 것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불의 생성은 모든 생성 가운데 가장 극적이며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불에서 그것을 상상한다면 세계의 걸음은 빠르다. 그리하여 철학자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는 모든 것을-폭력이나 평화까지도-꿈꿀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의 결합을 시로 메꾸고 시의 결함을 과학으로 메꾸려는 바슐라르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불꽃은 우리들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 불꽃 앞에서 꿈꿀 때, 사람이 상상한 것에 견주어 본다면 사람이 인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꽃은 그 은유와 이마쥬의 가치를 매우 다양한 명상의 영역 안에 두고 있다. 어느 것이라도 삶을 나타내는 동사의 주어로서 불꽃을 취해보라. 촛불은 그 동사에 한층 생기를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은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사실 18세기 말엽 어떤 불꽃의 물리학자가 두 개의 촛불의 불꽃을 합치시키려고 헛되이 시도한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에 심지를 맞대고 촛불을 켰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고독한 불꽃은 다만 더 커지고 상승하는 일에만 취하여 합일되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각각 그 뾰족함의 미묘함을 그 꼭대기에 지키면서 수직성의 에네르기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 물리학자의 실험 속에서 볼 수 있는 서로 힘을 합쳐 불태우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두 개의 정열적인 마음은 얼마나 불행한 상징인가! 적어도 불꽃은 몽상가에 있어서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존재의 상징인 것이다! 불꽃은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생성이다.
바슐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급속도로 진보하고, 시대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제 희미한 빛이나 타다 남은 촛불의 시대는 지났다. 쓰이게 되지 않게 된 사물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꿈일 뿐이다. (……) 전등은,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우리들에게 결코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관리를 받는 빛의 시대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유일한 역할은 전등의 스위치를 돌리는 일뿐이다. 우리들은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인 주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정당한 긍지를 가지고 점화한다는 동사의 주어가 되기 위하여 그 행위를 이롭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바슐라르여, 걱정 마시라. 대한민국에 다시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생성으로서의 존재가 존재로서의 생성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을 꿀 것이고, 그 촛불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될 것이다.
4.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러시아가 낳은 최대의 영상 시인이자 현대 러시아의 가장 역량 있는 감독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비어 있는 세계의 지붕 밑에 고독하게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 수많은 끈으로 이어진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세계와 인류의 운명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촛불의 상징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타르코프스키는 “전쟁과 사회적 궁핍, 갖가지 잔인한 고통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서로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광화문과 서면 광장에서 촛불을 통해 만난 서로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론』에서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문명의 본질은 여가시간이다. 자본주의적 야만은 이 여가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바꾼 것(잉여가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야만을 문명의 길로 돌리는 첫걸음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헬조선, 피로사회, 경제적 절망, 양극화 모두는 여가시간의 부족에서 나왔다. 노동시간이 길수록 경제적 절망도 깊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790시간이며 독일은 1,371시간(2015년 기준)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으로 2,100시간이라고 한다.
반기문 전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일등이 되어라, 이등은 패배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돌진 때 젊은 시절을 보낸 한국의 노인들이 자식, 순주한테 흔히 하는 조언과 닮았다. ‘앞만 보고 뛰어라’와 ‘여가가 있는 삶’은 늘 항상 대립된다. 그러나 지금 대한한국에 필요한 건 야간 노동과 밤잠을 줄이는 학습인가? 혹은 법이 정한 노동과 적절한 휴식, 짧지만 경쟁적이지 않고 협동을 기르는 창의적 학습 분위기인가?
탄핵 이후의 국면은 대통령 선거로 이어질 것이다. 촛불의 명예혁명이 문명으로 나갈지 야만으로 다시 뒷걸음질 칠지는 시대의식을 올바로 읽는 후보를 국민들이 제대로 뽑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마르크스 다음의 말은 의미있는 말이다. “이론이 민중에게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는 오로지 이들 민중이 자신들의 필요를 실현시키는 정도에 달려 있다.” 2016년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80인 켄 로치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렇다. 이명박근혜 시대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정유년, 붉은 닭들이여, CHICKEN RUN!
각주1)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악독한 트위디 아줌마가 운영하는 영국의 어느 양계장. 여기 사는 닭들은 언제 트위디의 밥상에 오를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다. 이중 가장 영리한 암탉 진저는 호시탐탐 동료들을 이끌고 탈출할 기회를 엿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고초를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달걀 판 돈으로는 성에 차지 않던 트위디는 거대한 치킨 파이 기계를 들여놓고 닭들을 대량 학살할 음모를 꾸민다. 치킨 파이 기계에 휩쓸려 죽을 뻔한 진저는 탈출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수탉 록키와 함께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탈주 계획을 세운다는 이야기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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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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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2 :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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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츠해방전쟁’ 10주년을 기념하는 고객 행사를 지난 2014년 5월 20일 NCSOFT 판교R&D 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바츠해방전쟁’에 직접 참여한 유저들과 미디어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으며, 특히 ‘바츠해방전쟁’ DK혈맹 총군주인 ‘아키러스’가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1. 신화와 반복
신화(Myth)를 뜻하는 그리스어 ‘미토스(mythos)’는 이야기를 뜻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mythology(신화학)’를 만들었을 때 그 의미는 ‘가공의 인물을 다룬 이야기’를 뜻했다. 이 말은 신화가 진실을 표현할지라도 정교한 픽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신화가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비난했으며 『국가』(Republic)에서 이상적인 폴리스는 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추방한다고 했던 것이다. 반면 플라톤은 비유(allegory, 어떤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는 가르침의 도구로 생각했다. 그의 이상향인 ‘아틀란티스 이야기’나 ‘동굴의 비유’는 알레고리로 보편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가르침에 있어서 유용한 방식으로 본 것이다.플라톤의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시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두꺼비를 보면서 항아 이야기를, 까치를 보면서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호랑이를 보면서 곶감 이야기 등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신화는 그들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에 나타난 무수한 상상력이 암호처럼 현대 문화와 사상에 녹아들어 있다. 아니 우리 삶의 곳곳에 신화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사실 서양 언어권에서 요일과 달의 이름은, 곧 달력에서부터 태양계 행성 이름(지구를 제외한 모든 행성은 로마의 신 이름에서 가져왔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리스나 로마, 북유럽 신화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프로이트(S. Freud)가 신화를 인간 무의식의 일부로, 곧 인간 내부에 깊이 뿌리박힌 심리적 갈등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공유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이나, 융(C. G. Jung)처럼 신화를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는 것 역시 이러한 신화의 반복이 그저 한 순간의 흐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J. Campbell)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종교와 철학, 예술,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에 존재한 인류의 사회 형태, 과학과 기술의 주요 발견, 잠에서 생겨나는 바로 그 꿈들은 신화라고 하는 원형적인 마술 반지에서 끓어오른다.”라는 말은 신화의 반복, 그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2. 신화와 게임; 서사학에서 게임학으로
오늘날에는 이러한 신화의 반복이 온라인 게임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화적인 서사학(narratology)이 게임 자체의 게임학(ludology)으로 패러다임 전환한 것이다. 또한 매체 중의 매체라고 하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삶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인터랙티브 인간’(interactivity human)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로 표시되던 종래의 ‘지혜로운 인간’에서 ‘상호작용성’을 통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컴퓨터 게임이 그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게임은 언제나 현실을 모방해왔고, 현실을 비틀고 재창조하면서 스스로의 영역을 확대해왔다. 현실과 가장 관련이 먼 것처럼 보이는 SF 소재의 게임이나 중세 판타지 풍의 MMORPG(Massive Multi-user Online Role Playing Game, 대규모 다중접속 온라인 역할놀이 게임, RPG는 각 유저가 역할을 분담해 게임을 하는 방식이다. RPG 중에서도 MMORPG는 온라인 상에서 여러 명이 RPG를 할 수 있도록 만든 게임이다.)도 현실을 은유적인 형태로 재해석해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게임은 단순히 현실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게임 속 리얼리티가 극대화되는 순간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리니지2>에서 발생한 바츠해방 전쟁은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가상공간에서 얼마나 강렬한 형태로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3. 바츠해방 전쟁
바츠해방 전쟁은 2004년 6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약 4년간 <리니지2>의 바츠 서버에서 발생한 인터넷 전쟁을 말한다. (독재자로 유비되는) 드래곤 나이츠(Dragon Knights: 일명 DK) 혈맹의 철권통치로 사냥터라는 생존의 터전을 봉쇄당하고 척살의 공포에 떨던 피지배계급 민중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전투력이 낮은 저레벨의 민중들은 ‘바츠 연합군’을 형성하여 DK 혈맹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 동맹군의 화살받이가 되어 무수히 죽어가면서 유일한 대응 방법인 인해전술로 싸웠다. 이 전쟁에 참여한 사용자는 연인원 20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마치 『일리아드』나 『삼국지』, 혹은 성경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보는 듯, 바츠해방 전쟁 안에는 현실세계가 그대로 옮겨져 있다. 신분 차별과 권력의 횡포, 혁명과 좌절, 전쟁과 독재, 사랑과 죽음, 기만과 배신, 전술과 희생, 정의와 자유, 영웅의 탄생과 죽음, 숭고한 희생과 가치, 그리고 동지애와 감격의 눈물 등 수많은 참여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한 편의 웅대한 서사시이다.
비록 현실에서의 움직임은 아니지만 그 처절하고 절박한 감정적 경험들은 사용자가 만나는 일생일대의 체험이 된다. <리니지2>의 내복단(저레벨 캐릭터로 내복만 겨우 걸치고 값싼 뼈 단검 하나만을 장비한 이들을 프랑스 혁명의 상퀼로드, 즉 ‘긴바지를 입는 빈민층’ 집단에 비유해 ‘내복단’ 혹은 ‘뼈단’이라 부른다. 내복단의 주류는 하루 이틀 정도 육성한 레벨 10 전후의 캐릭터이다. 이들의 공격력은 5-10 포인트-한번 공격할 때 상대가 입는 데미지-이다.)으로 가상현실을 현실의 시공간적인 제약을 넘어 ‘정의와 자유, 그리고 동지애’라는 고귀한 가치에 연대하는, 현실보다 더 숭고하고 더 인간화된 공간으로 변모시킬 수 있음을 깨달은 다음의 내복단의 글은 감동스럽다.
“바츠 서버의 이 전쟁은 일반 유저들의 힘을 이끌어 내지 못하면 바츠 연합군이 패배할 것입니다. 단 1렙 짜리 캐릭이라도 수십 명이 모여서 DK혈맹에게 공격을 가하면 물리적으로만이 아닌 심리적으로도 큰 위축을 가져올 것입니다. (중략) 이번 전쟁은 바츠 서버만이 아닌, 전 서버가 그 결과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대 혈에 억눌려 있는 많은 저주서버 유저들이 함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어야 합니다. 다시는 어떤 서버에서도 이러한 독재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전 지금 이 순간 바로 바츠 서버에 캐릭을 만들어 내복단에 합류할 것입니다. 제 가슴 속에 끓어오른 피를 주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겁니다. 그 거대했던 바츠 서버 해방 전쟁에 내복단의 일원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노라고” (겸댕이대왕, ‘호소문-전 서버 유저들이여 궐기하라’, <리니지2> 게임 자유게시판 2004년 6월 16일.)
물론 게임의 데이터베이스 위를 이동하는 사용자들의 움직임은 가상적이며 그가 꿈꾸는 혁명은 다운받은 프로그램 속의 상상이다. 그러나 현실 공간의 체험이 사용자의 인생이듯 가상공간의 체험도 사용자의 인생이 된다. 비록 현실에서의 움직임은 아니지만 그 처절하고 절박한 감정의 경험들은 사용자가 만나는 일생일대의 체험이 된다. <리니지>에서 작은 혈의 군주로 있다 사소한 문제로 거대혈의 공격을 받게 되어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고 정식 혈전을 요청한 후 처절하게 전사한 경험이 있는 한 내복단은 이렇게 말한다.
“혹자는 그럽니다. 이건 게임일 뿐이라고 현실과 착각하지 말라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유저들이 이렇게까지 그러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면 딱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온라인 게임은 가상현실의 세계입니다. (중략) 전 아직도 그때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립습니다. 정의를 위해 질 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싸우다 죽어간 혈원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행동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바츠 해방 전쟁에서도 그렇게 자랑스럽게 싸울 것입니다. 비록 제 자신 한 명은 큰 힘이 되지 못할지라도 작은 힘이 모이면 어떠한 것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겠습니다.”
결국 바츠 연합군이 <리니지2>의 중추인 DK혈맹의 아덴성을 집단 지성과 공성전을 통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바츠해방 전선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혁명 성공 후 바츠 연합군이 이익을 가지고 서로 분열하면서 결국은 DK혈맹이 한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벌이게 되고, 그 틈을 타 DK혈맹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아쉬운 전쟁이었다. 4. 게임, 기만인가? 혹은 해방의 도구인가?
이 시대는 발터 벤야민(W. Benjamin, 1892~1940)과 테오도르 아도르노(T. Adorno, 1903~1969)가 여전히 유효한 시대이다. 암울했던 20세기 초 대중문화와 상업주의가 결합한 문화산업의 근원을 추적하고, 통렬한 비판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대중문화가 자유를 향한 출구인가, 억압과 기만의 도구인가?’,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대중매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처럼 동일한 것이 무한 반복되는 현대 사회의 대중문화는 현대 인물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기술적 복제로 현대인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대중예술은 예술의 민주화를 가져온 이 시대 예술의 희망인가, 대중을 기만하는 수단인가?’를 묻고 있다.
대중문화를 기만적이며 억압적이라 보는 아도르노와 대중문화의 발달된 기술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보는 베냐민의 관점은 각을 세운다. 『계몽의 변증법』(1944)에서 라디오와 영화, 재즈 등에 대해 분석하며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문화산업은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허위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지배의 도구가 되었다. … 대중문화가 주는 즐거움이란 결국은 도피에 불과하며 즐김이 주는 도피는 사실상 현실의 억압과 모순에 대한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중문화에 대한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영화 ‘몽타주 효과’를 통해 대중에게 충격과 각성을 선사하는 해방의 가능성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기술에 잠재된 혁명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 아도르노가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면, 베냐민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것이다. 곧, 벤야민에게서는 ‘해방’인 대중문화가 아도르노에게서는 ‘기만’이 되어버렸다. 동일한 맥락에서 게임은 해방일까?, 기만일까?
<리니지2>처럼 온라인 상에서 혁명은 불가능했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의 원죄(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 때문이 아닐까? 성서는 그것을 정확히 지적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세기 3: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가 ‘바츠’(로 은유되는 이 대한민국)가 해방될 날이 올 것을 믿는다. 메시야인 평화의 왕,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믿음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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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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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1 : 종교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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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국제 문제에 대한 대처법으로 무엇보다 먼저 종교와 전쟁이 이용되었다. 잉글랜드와 그 후의 영국연방, 그리고 미국의 내셔널리즘 성립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6세기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생겨난 이후,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들은 다른 서양의 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자기 나라가 ‘신의 나라’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 영국인은 새로운 ‘선택된 민족’이었다. 그리고 18세기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은, 보스턴의 설교자에서 버지니아의 담배 농장주에 이르기까지 자신감에 넘쳐 이렇게 예언했다. 우리들의 ‘새로운 이스라엘’은 미시시피 강까지, 그리고 그 너머 태평양까지 넓혀질 것이라고.” (케빈 필립스, 『사촌들의 전쟁』에서)
1.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과 루터의 두 왕국론
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필연적인 것(반드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역사는 현실적인 것(이미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극시(劇詩)는 개연적인 것(일어날 법한 일)을 모방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이 ‘어순실한’ 정황 속에서 철학은 난무하지만, 역사는 지워지고, 극시가 코미디로 판을 깔고 있다. 이는 정치의 문제로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국가와의 관계, 종교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지닐 네 가지 기본적인 관계에 관해 말한 이후(하나님-자기 자신-서로-원수), 13장에서는 ‘국가-율법-시대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특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공동번역 로마서 13:1-2).” 정말 그럴까?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410년 8월 24일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하자 이방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자는 뜻으로 『신의 도성(De civitas Dei)』을 저술한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과 세상도성(civitas terrena)은 인간 역사상 언제나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불신자는 인간들의 방법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며 살도록 예정되었으며 이 두 세력이 두 도성으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세상 왕국의 할 일은 땅의 평화(Pax terrena)를 실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자들은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행동양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도성(나라)은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 차이점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세상에 대한 사랑, 자기를 경멸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영을 사랑하는 것’, 즉 두 도성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전자는 의로운 자의 나라요, 후자는 악한 자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따라서 인간들 가운데 확립된 이 두 도성은 마지막 심판 때에는 서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는 선한 천사들과 연합하여 그 왕과 함께 영생을 향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한 천사들과 함께 연합하여 그 왕과 함께 영벌에 던져질 것이다.
두 도성론은 그 본질상 신비적이며 초자연적인데, 전자는 ‘진리-선-질서-평화의 나라’이며 참된 사회이고, 후자는 전자를 거부하는 사회로 ‘오류-악-무질서-혼란’의 나라인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영향 하에 영적 왕국과 세속적 왕국을 구별하며(분리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 권력(1522년)’이라는 설교에서 ‘세상 왕국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에 관해 마르틴 루터는 (선별하고 축약하여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한다.
“첫째, 이 세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통치방법(세상적, 영적)을 쓰시는데, 세상권력은 세상을 통치하는 군주들의 몫이다. 둘째, 세상통치권이 존재하는 이유는 악을 징벌하고 경건한 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즉 검을 지닌다는 말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타인을 지키고 섬기는데 만 검을 사용한다. 셋째,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세상 통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롬13장).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그 권세를 통하여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군주는 또한 신실한 보좌관을 선택해야 하며, 악인과 선인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백성의 실수를 눈감아 줄줄 모르는 군주는 다스릴 자격이 없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루터(M. Luther)의 두 왕국론은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나라-하늘의 나라-영적 정부’이며 세상의 왕국은 ‘시간의 나라-잠정적인 나라-지상의 정부’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복음과 말씀, 사랑으로 내면적인 영역을 다스린다면, 세상 왕국은 율법과 강제력으로 외면적 영역을 통치한다.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구원을 목표로 하고, 세상 왕국은 유지와 보존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왕국론을 이해하는 근간이 되는 ‘세상권세에 대하여, 세상 권세에 어디까지 복종해야하는가?(1523년)’라는 글을 통해 마르틴 루터는 “첫째, 세상 인간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자와 세상 왕국에 속한 자로 구별할 수 있는데, 만약 모든 세상 사람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만 있으면 검이나 권력 따위는 필요치 않다. 따라서 의로운 자들을 다스리려고 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듯이 율법 아래에서는 죄가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세상 권세는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세워졌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속 권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루터는 “세속 권력이 다스리는 영역은 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영역의 문제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의 통제만 받는다. 따라서 비록 로마서 13장에서 세상 권세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의 외적 질서에 해당되는 말씀이지 이것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신앙 문제에까지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군주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시에 군주로서의 책임을 완수해야하는가? 루터는 “하나님을 향하여는 올바른 신뢰와 진심으로 기도해야 하고 백성들에게는 사랑과 그리스도적인 다스림으로 대해야 하며 신하에게는 이성적으로 맹신하지 않는 이해심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불의에 대하여는 날카로운 엄격함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세속 왕국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검을 사용하여 악을 벌하고 경건한 이들을 보호하며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야할 목표를 지니지만, 하나님의 영적 왕국은 말씀으로 통치하여 경건한 자들을 종말적인 구원을 향하여 이끈다는 것이다. 나아가 세속 왕국은 성경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지만(롬13:1, 벧전2:13), 결코 영적인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는 “세속 왕국과 영적인 왕국, 이 두 가지의 통치영역은 절대로 혼합되어서도 안되고 완전히 따로 떼어서도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통치영역의 지배를 받는 시민이다. 그들이 군주든 소시민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권력이 있다 해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고난당함으로 대처해야 한다. 세상 권력은 오직 이웃의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이웃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랑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임을 가르치려했던 루터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2. 국가와 교회의 4가지 모델
두 왕국론의 시작은 이러했으나, 그 결과는 근대국가의 군주적 통치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오용된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념의 순수성이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서 잘못 왜곡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근대 들어 종교개혁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선한 복음적 의도를 넘어 선 강력한 군주들의 교회 개입에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가령 예를 들면, 루터의 서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1520)에서 교권분립의 대전제가 유사시에는 유보될 수 있다고 명시한다. 따라서 ‘비상주교(Notbischof)’론이 선포되었다.)는 그들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현실적 고려였다.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세속군주들에게 맞서 개혁운동을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 대안은 개혁교회를 지지하는 정치권과의 결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교권 장악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군주들의 욕구를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파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회의가 채택한 으뜸 원리는 ‘한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의 통치자가 결정(cuius regio, eius religio)’한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가들에 따르면 군주의 직위와 권한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늘이 제정한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므로 군주에 대한 복종은 민중의 당연한 의무라는 ‘왕권신수설’에 대한 당연한 보증이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국가의 교회장악을 가속시키는 기제로 작동하였고 통치자에 대한 민중의 순응을 강조함으로써 곧이어 유럽사회에 등장하게 되는 절대주의 체제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엥겔스(F. Engels)의 “루터는 절대군주정의 대단한 아첨꾼”이나, 휘기스(J. N. Figgis)의 “만일 루터파가 없었다면 루이 14세도 없었을 것”, 혹은 윌리엄 맥거번(W. McGovern)의 말처럼, “나치의 뿌리가 루터의 정치사상에 있다.”는 말에 쉽게 동조하기는 어렵더라도 일면 역사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루터가 폭군에 대해 민중이 취할 수 있는 대항은 고난을 감수하고 탄압을 인내하는 소극적 저항뿐이며, 불의한 군주는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인내의 대상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그의 시대적 한계(혹은 어거스틴을 이어 이후 실존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에 이르는 서구신학의 실존적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아무튼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존 스토트(John Stott)에 의하면 4가지 모델로 정리할 수 있다. 곧 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국가 만능론’, 교회가 국가를 통제한다는 ‘신정’, 국가가 교회에게 호의를 베풀고 교회는 그 호의를 계속 받기 위해 국가의 편의를 도모해 주는 타협안인 ‘콘스탄틴 주의’,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건설적인 협력 정신으로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독특한 책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 관계’가 그것이다.
존 스토트는 로마서 13장 주석을 통해 “우리는 국가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유발하기 전까지만 굴복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명하거나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금하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명백한 의무는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것, 곧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국가에 불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국가의 법이 하나님의 율법과 반대되어 제정될 때마다 ‘시민 불복종’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는 것이다. 바로가 히브리인 산파들에게 갓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했을 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출 1:17), 느부갓네살 왕이 모든 신하에게 금신상에 엎드려 절하라는 포고를 내렸을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순종하기를 거부했으며(단 3장), 다리오 왕이 삼십 일 동안 아무도 자기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내렸을 때, 다니엘도 순종하기를 거부했다(단 장6).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핍박하는 국가(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으로 묘사된)는 자신의 권세를 마귀(붉은 용으로 묘사된)에게 준 사탄의 동맹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존 스토트는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국가의 권위에 굴복해야 한다. 하지만 그 권위는 특별한 목적 그리고 전체주의적이지 않은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복음은 폭군과 무정부주의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대적이다.’”
사무엘서는 왕을 세움으로 백성들이 입게 되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열거한다.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에게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낱낱이 일러주었다. 사무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좋은 것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 자기의 내시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 날에 야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공동번역 사무엘상 8:10-18)”
오늘날, 고대의 왕과 민주정의 대통령(president)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대통령은 라틴어 ‘주재하다(praesidere)’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그의 지위가 ‘법 위’인지, ‘법 아래’인지를 통해 왕인지, 대통령인지를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10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시국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직 왕정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게 된다. 120여년 전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되면 못 가리”라는 민요가 유행했었다. 갑오년(1894년)에 제대로 개혁을 하지 못하면, 을미년(1895년)에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병신년(1896년)이 되면 결국 나라와 백성이 큰일을 당한다는 뜻이다. 2014년 개혁의 실패로 2015년 을미적 거렸고, 2016년은 120년 전 병신년과 같이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문 왕(王)자에 관해 중국 전한 시대의 유학자 동중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 개의 가로획은 하늘, 땅, 사람을 뜻하며,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것이 왕이다.” 애초에 왕은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였다. 너무 무서워서 신성한 존재였다. 무력의 독점과 잘 조직된 감시기구, 역모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왕권에 대한 도전의 싹을 자른다.
중세시대는 교황권이 황제의 권력보다 더 거대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카노사의 굴욕을 안겼던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은 성령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바 있다. 이른바 ‘교황 무오류설’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동양 역시 중국 왕조시대에 황제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것은, 황제는 하늘이 내린다고 봤기 때문이다. 고대 왕들의 ‘무오류에 대한 자기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오늘 세계를, 아니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 『한비자』는 역린(逆鱗)에 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용은 사람이 길들여 능히 올라탈 수도 있지만, 목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를 죽인다.” 용이 ‘이명박근혜라는 권력’인지? ‘대한민국 국민’인지? 2016년이 다 가기 전에 결정될 것이다.
3. 인터레그넘 시대의 교회의 역할
현재를 가리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은 “지금 세계화 시대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라고 한다. 로마법에서 사용된 용어로 일종의 권력 이양기로 ‘지금까지 통치하던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기간’을 의미한다. 사실 세계화는 영토, 국민, 주권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중심의 질서를 해체했다. 따라서 세계시장과 자본권력이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와 국민의 주권적 힘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터레그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렇다.
따라서 바우만은 “권력을 잃은 국가의 대안으로 도시를 제안”한다. 국가는 애초에 영토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성립된 단위이므로 국가보다 빠르고 쉽게 대처할 수 있는 작은 정치단위인 도시가 대안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럽은 도시를 기반으로 한 사회 운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가능하나, 오랫동안 국가 중심의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가령, 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국가대항 경기에 관심이 많은 반면, 유럽은 도시 단위의 클럽 경기에 열광한다.
어쨌든 국가의 신용이 무너진 이때, 지역이나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살리려는 노력들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시국에 대한 촛불집회가 수도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되었지만, 지역별 촛불로 분화되어 지역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그 지역 마을 공동체의 음성을 듣고 그 마을을 살리는 일에 헌신할 때,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교회가 제 기능을 할 것이며, 인터레그넘 시대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V. Woolf)는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말한바 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K. Marx)와 엥겔스도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에게는 조국은 있을까?’라는 국가와 종교에 관한 4차 방정식에 지역 공동체가 ‘정답 아닌 대답’이라고 말해도 될는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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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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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20 :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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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고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장 고민하셨던 부위는 인간의 뇌가 아닐까? 너무 완벽하게 만들면 하나님을 넘어설 것이고, 너무 뒤쳐지게 만들면 인간 종이 멸종당할 터, 그래서 뇌라는 복잡한 것을 만들어 그 뇌의 기능을 다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는데, 이제 뇌의 기능을 확장시킨 인간들은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들 인간만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 우리 문명사가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의 소설『뇌』에서 인간의 뇌에는 파충류의 뇌와 관련된 동기유발 부분과 포유류의 뇌와 관련된 동기유발 부분,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최후의 비밀(소설의 원제가 L’Ultime Secret, 최후의 비밀)’이라는 부분을 통해서 미래의 인간이 도달하게 될 뇌의 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자아의 확장,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개별자아의 확장이 인류가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역설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뇌는 각각의 부위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합하고 조합하여 사고라는 과정을 만들어내는 부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마치 호수에 물이 여기저기서 파동을 만들어 내는 것은 확인되나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조합이 되어 (사고라는) 큰 그림을 역어내는 부분은 찾지 못한 것과 같다.
2. 뇌의 고민: 스키마, 선입견과 고정관념
“니 아버지 뭐하시노?”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Friend, 2001)>에서 선생님이 동수(장동건 분)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 뇌가 고정관념이라는 편리한 판단기준을 통해 사람을 미리 재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다. 성별, 인종, 출신 지역, 가정환경 등을 통해 쉽게 대상을 일반화하려는 것이다. 뇌작용의 이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스키마(Schema)’라고 한다.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들을 토대로 새로운 경험을 친숙하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뇌가 정보를 여러 범주로 조직화할 때 이용하는 기록체계의 일종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들 속에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실 정글에서 생활하는 원시인들은 사람의 얼굴을 판단하는 데 그들의 뇌에 필요한 시간은 약 0.4~0.6초이다. 또한 그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0.2초이다. 원시시대에 유용한 이러한 스키마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종종 잘못된 판단을 야기하기도 한다. 뇌의 태생적 고민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우리의 뇌는 ‘여성은 모성적이고, 흑인 남성은 공격적이며, 유대인은 지갑을 절대 열지 않을 것’이라는 성적,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아줌마는 억척스럽고 아저씨는 뻔뻔하며 요즘 애들은 버릇없고 나이든 노인은 성욕을 잘 다스린다’는 선입견도 갖고 있다. 직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가는 섬세하고, 정치가는 권모술수가 능하며, 교수는 논리적으로 따지고, 사업가는 통이 크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 뇌는 이런 고정 관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성격의 문제를 넘어 뇌의 문제로 뇌의 고민인 것이다.
3. 중년의 고민: : 절정의 뇌
젊은 시절 약 2만종의 맛을 구별하던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중년이 되면) 1만종의 맛을 구별하기도 버거워진다. 중년의 기억력 감퇴는 제일 먼저 이름과 얼굴을 잊어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신경과학자들이 정의한 ‘인생의 중년’은 나이 45살부터 68살까지인데, 중년의 뇌는 어떨까? 중년의 고민으로 남을 것인가? 최근 경영학과 신경과학이 융합된 ‘뉴로리더십(Neuroleadership)’이라는 분야는 리더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뇌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려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시애틀 세로연구소의 ‘뇌 인지능력 검사’ 결과는 중년의 뇌에 대한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어휘능력, 언어기억능력, 계산능력, 공간지각능력(공간 정향 능력), 반응속도, 귀납적 추리 능력 등 6가지 능력이 가장 초절정의 성과를 내는 나이대가 45~53살 사이의 중년의 뇌로 나왔다는 것이다. 중년의 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순발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복잡한 상황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 글을 읽고 주제를 파악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며,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 또한 우수하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단기 기억력은 떨어지지만,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장기 기억 능력이 오히려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나이가 들수록 더 지혜롭고 현명해진다는 말은 뇌과학적으로 사실인 것이다!).
4. 신은 뇌 속에?
신을 영접하는 순간(혹은 명상을 하는 동안)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학자와 철학자, 종교학자가 질문한 신의 문제에 물리학자, 심리학자들이 가세한 이후 이제 신경과학자들이 합류하여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왜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더 큰 어떤 존재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개입하였다. 그리고 신경과학자들의 결론은 ‘인간의 뇌는 종교를 추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종교적 체험을 하는 동안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며, 종교적 체험이 우리의 뇌에 유익하기 때문에 인간이 종교활동을 영위한다’고 결론짓는다(뇌의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이 존재하지 않은 신을 만들어냈을까?, 아니면 신이 자신을 숭배하도록 인간들의 뇌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20세기 말 펜실베니아 대학의 핵의학과 앤드루 뉴버그(A. Newberg) 교수는 종교적 체험을 하는 동안 인간의 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해 6년간 실험을 반복했다. 종교인들이 종교적 체험을 하는 동안 뇌활동에는 비정상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자신들의 초월적인 종교적 경험을 아주 생생한 현실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실제로 현실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한 각성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적으로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전두엽(Frontal lobe)과 사고 기능을 조절하는 하두정엽(inferior parietal lobe)이 나란히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관계없이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의 뇌활동 상태는 거의 비슷한 변화를 보였다. 따라서 뉴버그는 2001년, “신은 인간의 뇌 속에 들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뉴버그 교수가 기독교인이 영어로 기도할 때와 방언으로 기도할 때의 뇌 스캔을 통하여 어떤 차이가 나는지도 실험한 것이다. 영어로 기도할 때는 언어를 관장하는 전두엽의 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났지만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활동이 감소되고 조용했다.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개신교적으로는 ‘성령’)가 나의 기도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수도승이 명상할 때와 프란체스코회 수녀가 기도할 때는 전두엽이 활발하게 작용했지만 개신교인이 방언을 말할 때는 전두엽 활동이 감소되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즉 방언기도 할 때는 나의 생각이 아닌 나의 영이 직접 기도하기 때문에 두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신은 전두엽과 하두정엽에 있을까? 뇌에 전기자극을 가함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원형적인 종교적 기억들은 미리 실현된 전기자극인가?
5. 엔그램: 기억의 장소
기억은 뇌 신경세포와 시냅스에 저장된다. 뇌에는 엄청나게 많은 신경세포(뉴런)가 있다. 대략 860억개 정도인데, 다른 체세포와 달리 신경세포에는 많은 가지(축삭과 가지돌기)들이 뻗어 나와 서로 연결되는데, 신경세포 하나에 무려 수천, 수만이나 된다. 신경세포들의 가지와 가지를 이어주어 신호를 주고받는 부위가 바로 시냅스이다. 사람의 뇌에는 무려 수십조 내지 100조개의 시냅스가 존재한다. 현대 뇌과학은 신경세포와 세포들 사이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만들어진 시공간적 패턴을 통해 기억이 만들어지고 저장된다고 가설한다. 따라서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패턴을 지우거나 방해하면 기억을 지울 수 있고, 패턴을 재생하면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억의 메커니즘은 이런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신경세포들은 기본적으로 전기적 방법으로 소통하지만, 세포들끼리의 신호 전달은 시냅스에서 물질을 교환해서 이뤄진다.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민산염, 도파민, 세로토닌 물질이 신경세포의 활성을 ‘흥분시키거나 억제(스위치를 켜고(+, 흥분성), 끄는(-, 억제성)’시킨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메커니즘이다.
곧 기억의 메커니즘은 신경세포와 시냅스의 작용을 통해 일어나는데, 그것은 신경세포와 시냅스 분자들에 나타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또한 세포간 연결 패턴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억이란 어떤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말해주는 단 하나의 답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한다. 기억이 저장된 분자, 세포, 연결망 수준의 흔적, 즉 ‘기억 흔적’ 또는 ‘기억 장소’를 일컬어 과학자들은 엔그램(engram)이라고 부른다. 기억의 장소인 엔그램이야말로 신이 창조했거나, 혹은 신이 깃들어 있는 장소가 아닐까?
6. 고향
뇌과학적으로 고향이 편한 이유는 어릴 적 경험한 음식, 소리, 얼굴과 풍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바로 그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를 만든 고향, 그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나란 존재의 원인과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
1000억개 신경세포들 간의 수많은 시냅스(연결고리)들의 위치와 구조를 유전적으로 물려받기는 불가능하기에 뇌는 미완성 상태로 태어난다. 대신 뇌는 약 10년간의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는 것을 갖고 있다. 결정적 시기 동안 자주 쓰이는 시냅스들은 살아남고 사용되지 않는 시냅스들은 사라진다. 따라서 결정적 시기의 뇌는 찰흙같이 주변 환경에 의해 주물러지고 모양이 바뀔 수 있다. 어쩌면 조기 인성 교육이 조기 어학 공부 및 선행 학습보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문학적으로(아니 신학적, 종교적으로까지!) 우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출애굽한 이스라엘, 혹은 오디세우스의 후손들이다. 키르케 섬에서 탈출한 오디세우스는 지옥 하데스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서 그에게 물어본다.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그러자 예언자는 말한다. “그래, 오디세우스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넌 결국 이타카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안을 것이고, 멋진 청년으로 자란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야,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네가 아는 고향에 도착한 넌 다시 네가 아는 고향을 떠나야만 너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하늘나라이기에 이 땅에서의 고향은 잠시 머무는 것임을 호메로스도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고향은 뇌가 형성된 어린시절, 혹은 창조의 때인가? 기억의 장소인 엔그램은 이 땅에 진정한 고향이 없음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준다.
7. 영화 <루시>: ‘신화적 예수’의 ‘과학적 구현’?
뤽 베송(Luc Besson) 감독이 오랜만에 복귀하여 만든 액션 영화 <루시 (Lucy, 2014)>에서 주인공 루시(스칼렛 요한슨 분)는 평범한 삶을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두뇌와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지하세계의 절대 악 미스터 장(최민식 분)과 만나게 되었다가 결국 신종약물(C.P.H.4로 임산부가 임신 중 자신의 신체에서 만드는 것으로 아기의 뼈 구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주며, 힘을 갖게 만드는 물질)을 다른 나라로 운반해야 되는 전달자로 이용당하게 된다. 하지만 루시를 겁탈하려는 부하의 폭력에 의해 뱃속에 든 약물이 루시의 몸 안에서 퍼지게 되고, 이로 인해 몸 속의 모든 세포와 감각이 깨어나게 된다. 이후 뇌의 활용도가 점점 높아져 가는 루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간의 역사를 경험하고, 최초의 인류인 루시를 만나기도 한다.
루시는 자신의 뇌 기능을 100%까지 사용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신체성을 벗어버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ubiquitous)’ 신적 존재로 변화된다. 그리고 루시는 노먼 박사에게 자신의 모든 지식을 USB에 담아 전달해 준다. 인간의 신체성을 벗어버리고, 인류의 시작(원시인 루시)과 현재(노먼 박사)에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 지식은 인류의 기원과 미래의 비밀이 담긴 지식으로 인류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태초에 계셨으며, 마지막에도 계실 분,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시간의 처음과 나중이며, 시간을 넘어서 계신 분! 우리는 루시에게서 ‘신화적 예수’의 ‘과학적 구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의 뇌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뇌관련 정보와 예시는 정재승 교수의 ‘영혼공작소’ 및, 정재승, 김대식 교수의 저서와 번역된 앤드류 뉴버그 교수의 저서 등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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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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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9 : 깡통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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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읽고 그 속에 감춰진 신학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펼치다 보니, 안목과 시선이 날로 새롭게 변해가기도 하지만 기발하거나/엉뚱해지기도 한다. 여기 엉뚱한 깡통 철학이자 깡통 신학 몇 가지를 소개해보니 독자들은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1. 곡선의 신학
▲ 곡선과 직선
2016년을 10년 정도의 근시적인 눈으로 보면 ‘사드’라든지, ‘경주 지진’이라든지 ‘최순실과 K스포츠, 미르재단’이라든지 하는 것으로 역사에 남겠지만, 100년 정도의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에서 인간이 4대 1로 졌다’는 것과 또한 ‘포켓몬고 열풍’을 들 수 있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2016년 국민미래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1등만 살아남습니다.”라고 말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등의 신산업이 주도할 미래는 가장 빨리 관련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나 국가가 계속 시장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자동화, 융합화, 연결화’가 바로 그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자동화는 가속화될 것이고, 개별적으로 발달한 다양한 정보기술은 융합되어 연결될 것이며 생각지도 못한 변화와 혁신이 일상화되는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아날로그의 여유로운 곡선’을 ‘디지털의 빠른 직선’으로 만든 것이다. 디지털의 직선은 자동화와 가속화를 상징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은 시공간의 4차원을 가지고 있지만, 디지털화를 통해 차츰 4차원에서 움직이는 입체는 조각품의 세계(시간 없는 입체)→ 그림의 세계(깊이 없는 평면)→ 텍스트의 세계(평면 없는 선)→ 컴퓨터화 된 세계(선 없는 점들)로 요약되는 자동화와 가속화, 그리고 디지털화의 추상게임을 시작한다. 이렇게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변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양적 성장은 당연하고, 더 많은 양을 획득하려면 더 빨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속도를 내야 한다. 이처럼 속도와 양적 성장과 목표지향적인 직선의 가치관이 오늘 화살처럼 창처럼 사회와 세상과 교회와 교인들, 특히 목회자들에게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본래 곡선이었다. 곡선인 자연을 인간이 직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직선의 마음은 급하게 지식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며 획일적이다. 하지만 곡선의 마음은 때를 기다리며 곰탕과 같이 우려내어 지혜를 잉태시킨다. 따라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o Gaudi)는 이렇게 말한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F. R. D. Hundertwasser)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면서 “직선은 신의 부재”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곡선을 인간이 직선으로 만든 사건들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직선과 같은) 인간의 교만과 탐욕은 속도와 성장의 다른 이름으로 (신(神)인) 곡선을 지워버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직선의 획일성과 가속성에 곡선으로 튕겨져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만하고 강팍한 직선들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시금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2. 거미 신앙
“스피노자가 기거하는 방에는 거미 한 마리가 왕으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내 스피노자가 길거리에서 동종의 거미를 구해와 그만의 세계에 개입시킨다.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와의 충돌이 일어나고 하나의 세상에서 ‘왕’이 되기 위해 그들은 싸움을 벌인다. 스피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 한 마리를 거미줄의 세계에 집어 던진다. 그 거미들은 파리를 잡아먹고 다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 긴호랑거미
종교적 박해와 빈곤 그리고 불치의 질환과 항상 싸워야 했던 고독한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그 불행한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화와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평범한 실천 속에서 조용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거미가 집을 짓는 과정을 바라보며(혹은 거미들의 싸움을 보면서) 기뻐하곤 했는데, 거미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엮어가는 큰 보람과 기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인간은 거미처럼 자유의지로 자신의 세상(비록 거미줄 위의 세상이긴 하지만)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떤 ‘의지’(위 인용구에 의하면 스피노자를 통한 동종 거미같은 것이긴 하지만, 인간 세상의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기도 하다.)와 대립하며 충돌하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거미의 자유의지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철학적 동물은 올빼미가 아니라 거미이다.”
사실 거미는 빛을 보지 못한다. 어떠한 빛의 형상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미는 자신의 다리로 세상과 소통한다. 촉각으로 전해오는 미세한 파장에 반응해서 소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거미의 집짓는 과정이나 동종간의 싸움 등에 흥미를 느낀 스피노자와는 달리 거미의 타고난 비자발적 신체구조에 흥미를 느낀다. 들뢰즈의 말을 들어보자.
“거미는 거미줄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강도 높은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 이 거미는 오직 기호에 대해서만 응답한다. 그리고 미소한 기호들은 거미에게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 기호들은 파장처럼 거미의 신체를 관통하고 그로 하여금 먹이에게로 덤벼들게 만든다. (…) 거미줄과 거미, 거미줄과 신체는 하나로 접속된 기계이다. (…) 비자발적인 감수성, 비자발적인 기억력, 비자발적인 사유는 (…) 매순간 강렬한 전체적 반응들 같은 것이다(『프루스트와 기호들』277-278).”
스피노자의 인간 세상의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기도 한 타자의 의지, 혹은 신의 의지는 들뢰즈의 말로는 ‘홈이 패인 공간, 정주적 공간,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인 것이다. 이에 대립되는 것으로 들뢰즈는 ‘매끈한 공간, 유목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을 언급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고정 불변의 이상향(이데아나 천국)을 향해 뻗어 있는 홈-패인 길(이것은 직선일 것이다.)을 건설하는 철학을 비판하며 올빼미로 상징되는 전통의 철학서와는 다른 글쓰기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들뢰즈의 거미의 철학은 비자발적 노출에 놓여진 감각을 중시하고 따라서 매순간 생동하는 시간을 살아가는 거미의 차이 생성을 찬양한다. 그것은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매끄러운 공간으로 미끄러져 가는 공간, 유목적 사유, 노마디즘인 것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둘!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율법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홈 패인 직선의 공간 속에서 그것을 가로질러 미끄러져간 사유와 실천의 기록이 아닐까? 따라서 예수님의 신앙을 거미의 신앙이다. 홈 패인 직선의 획일성과 고정 불변한 이념을 곡선으로 미끄러져 튕겨져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주적이며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된 이 폭압적인 자본주의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 다시금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3. 색깔 목회
우리말 가운데 ‘새빨간 거짓말’은 흰 것을 오염시키는 색깔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표현이다. 서양은 ‘하얀 거짓말(white lie)’을 선의의 거짓말로 표현한다. 기색(氣色), 본색(本色), 생색(生色), 특색(特色), 정색(正色), 이색적(異色的)이라는 말도 색깔을 통한 정서를 보여준다. 조선의 선비들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남성을 양(陽)으로 여성을 음(陰)의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육체적 본능을 천시하였는데, 여색(女色)을 밝힌다거나 주색잡기(酒色雜技), 곧 술과 여자와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한 사람을 천한 인간으로 여겼다. 반면 재색(才色)을 겸비한 미인과 같이 긍정적인 표현들도 동시에 존재한다. 푸른색에 관련하여 독야청청(獨也靑靑), 청춘(靑春), 청상과부(靑孀寡婦),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산유수(靑山流水)라는 말들은 색깔이 주는 상징이 문화의 경험을 통해 맺어진 정신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이하 성기혁,『색의 인문학: 색으로 엿보는 문화와 심리산책』(교학사, 2016) 참조).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같이 색을 보는 포유류는 원숭이 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강아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빨강 옷을 입힌다거나 노랑 밥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주인의 만족이지 강아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제 색깔의 의미를 살펴보자.
자동차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색은 노랑이다(따라서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의 색이 노랑색). 유아나 어린이가 탑승하는 자동차를 노랑으로 정해 놓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데, 노랑은 가장 밝게 느껴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색이기 때문이다.
진찰실에서 진료하는 의사들은 흰색 가운을 입지만 수술실에 들어갈 땐 초록색 수술복을 입는다. 수술복이 흰색이라면 옷에 묻은 선명한 피가 의사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나 초록 수술복에 피가 묻으면 갈색으로 보인다. 초록은 빨강의 보색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초록은 피로를 회복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사실 눈의 피로와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초록은 자외선과 적외선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눈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색이기도 한다.
남(藍)색이라고 부르는 쪽빛은 파랑의 백미이다. 영원한 하늘의 색이고 그리움의 색이다. 동시에 쪽빛은 청결, 심원, 성실, 창조,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파랑은 지성과 연결된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내세우는 색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이상이자 젊은 대통령의 상징인 케네디가 짙은 파랑 정장차림으로 대중 연설을 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첨단 기술을 내세우는 회사나 통신회사, 신용을 생명으로 여기는 은행들은 파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파랑은 식욕을 억제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색으로 요리한 음식을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음식의 배경색으로는 아주 좋은 색이 바로 파랑이다.
파랑의 심리적 반대색인 빨강은 자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의지력을 특징으로 삼는 색이다. 빛의 스펙트럼(빨주노초파남보)의 첫 번째에 위치하는 빨강은 애정과 흥분, 진취적 기상, 신체적인 힘, 강인함과 연결된다.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과 욕망도 빨강이 지닌 독특한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빨강은 귀신을 물리치는 색으로도 최고라는 것이다. 동짓날 문설주에 팥죽을 뿌리거나 장을 담글 때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띄우는 것 또한 빨강의 적극인 에너지로 귀신을 물리치겠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귀신은 어둡고 습하고, 죽음과 음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빨강은 양기가 왕성한 색으로 태양과 밝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남쪽을 뜻하는 양의 색인 빨강을 귀신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10번째 재앙인 장자 죽음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어린양의 빨간 피가 아닌가!
회색은 빛의 강약에 의해서 생긴다. 어두움과 밝음의 중간에 서는 회색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성향을 보여준다. 단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색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삼독(三毒), 곧 탐진치(貪瞋痴, ‘탐욕’과 ‘분노/노여움’과 ‘어리석음’)를 경계하기 위한 승려의 옷은 회색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셋! 색깔 신학은 예수님께 옷 한 벌 맞춰드린다. 노란 목도리에 회색 옷을 입혀드리고, 그 위를 파란색과 빨간색을 연결한 태극 모양의 겉옷을 걸친 패션인데, 서 계신 배경은 초록 들판이다. 이렇게 옷을 입으신 예수께서 거미와 더불어 매끄러운 곡선의 길을 가시며 우리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색깔 목회가 아닐까?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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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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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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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비 영화와 좀비의 실체
좀비가 출몰하고 있다. 마니아층을 넘어 국내외 게임, 소설, 영화의 인기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공포영화나 문학의 하위 장르 주인공으로 여겨지던 좀비가 극장의 은막과 TV 채널, 서점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영화 <부산행>(2016)을 통해 이제 서울과 대전을 점령하고 부산을 향한다.
좀비 영화 장르를 처음 정립한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데뷔작이자 ‘시체 3부작’의 첫 영화 인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 나오는 좀비들은 혐오감을 주는 외형과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부러져도 멈추지 않고 사람들을 물어뜯어먹기 위해서 다가오는 것으로 당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비록 최근의 좀비처럼(2013년 작 <월드 워Z>와 <부산행>) 속도감은 없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이 흑백 영화의 좀비는 마냥 허구 속의 살아있는 시체가 아니었다. 미국은 외부적으로 소련과 냉전 중이었고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는 등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흑인 민권운동과 인종차별 반대, 전쟁 반대 시위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따라서 좀비들은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미국 사회를 습격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좀비 영화는 영화 내적으로는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현실을 투영하고 비판하는 고도의 우화장치들을 보여줌으로 호러물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1)
로메로 감독의 두 번째 시체 3부작인 <시체들의 새벽>(1979)은 좀비 영화의 전설이다. 2)
첫 번째 흑백 영화와는 달리 두 번째 영화에서는 총천연색과 환한 조명을 통하여 도심 한가운데 대형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은 흡사 백화점을 쇼핑하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 체제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읽을 수 있는 역작이다. 좀비를 통해 점점 더 난폭해지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공포스러운 속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3번째 시체 3부작인 <시체들의 낮>(1985)은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렬하고 복잡한 휴먼 드라마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캐리커처와 욕설, 살육만이 남았지만(가장 고어씬이 강한 작품), 좀비들을 학습시키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가령, ‘정중한 행동을 하면 보상을 받는다’라는). 사실 좀비는 주요 장기들을 다 제거했는데도(위가 없는데도) 먹을 것을 갈망한다. 따라서 문제는 뇌와 원초적인 본능인 것이다. 아무튼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가 잔혹한 취향의 공포 장르였다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와 <28일 후>(2002), <월드워 Z> 등 최근 좀비 영화는 인류의 종말과 연결되는 바이러스 재앙 영화로 진화해 버렸다. 3)
한국의 좀비 영화라면 2010년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이웃집 좀비>(오영두 감독 등)를 뺄 수 없다.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퍼진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 전역에서 발생하자 좀비 색출을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정부와 ‘감염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서민들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부산행>처럼 좀비를 폭력의 대상으로, 마동석의 ‘슈퍼파워~ㄹ!’로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4)). 따라서 기존 헐리우드의 좀비처럼 무참히 찢겨지고, 총알받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긴 건 달라도 이웃사촌인 이웃집 좀비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맘몬숭배 시대에 대형정당(새누리, 더민주), 대형마트, 대형교회, 대형기업(재벌)이라는 골리앗이 존재하는 이때 좀비는 허구의 괴물이 아닌 실체를 가진 작은정당, 구멍가게, 미자립교회, 중소기업의 이름으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호모 사케르’이다.
2. 자본주의 좀비서사 : 호모 사케르
헤겔과 하이데거, 데리다로 부터 언어와 존재에 관해, 그리고 벤야민과 슈미트를 통해 역사와 법, 정치 신학을 수용하고, 아렌트와 푸코를 통해 전체주의와 생명정치를 사유한 조르지오 아감벤(G. Agamben)은 유기(遺棄)된 채로 존재를 드러내는 인간, 곧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이야기 한다. 호모 사케르는 말 그대로의 성스런 인간(sacred man)이 아닌, 벌거벗겨진 생명(bare life)으로 살해는 가능해도 희생제로는 드릴 수 없는 것, 가령 소, 양과 달리 지렁이와 벌레 등을 뜻한다. 죽여버릴 수는 있어도 희생으로 쓸 수 없는 것.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물론 아감벤은 이 용어를 무젤만(Muselmann, 무슬림)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가령 용산에서 불에 타 죽은 존재들로부터 시작하여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세월호에 갇혀 죽어간 아이들, 지하철 역 안의 노숙자들, 취업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재래시장 상인들, 지체 장애우 등으로 확장된다. 자본주의가 창출한 좀비들이며, 예수께서 친구로 부르며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생명의 동지들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칼 슈미트의 구분처럼)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zoe)-비오스(bios) 5),‘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따라서 서양 정치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 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배제함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인간이 좀비를 배제하듯 자본주의가 창출한 좀비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은 대형 골리앗들(대형정당, 대형마트, 대형교회와 대형기업)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 그들에게 좀비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될 대상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좀비가 노동자 계급출신으로 묘사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면서도 사물로 변해버린 노동자의 형상은 좀비와 닮았기 때문이다.
3. 사라지는 매개자
영화 <이웃집 좀비>는 2010년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로 초토화된 서울을 그리고 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좀비 감염자를 찾아가 제거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감염될 위험도 무릅쓰고, 가족이었던 좀비들을 숨겨주고, 먹여주며, 오직 함께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모은다. 가령 두 번째 에피소드 인 ‘도망가자’에서는 좀비가 되어가는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을 보여주고 있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는 여자가 떠나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다. 좀비가 되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안타까움과 차라리 그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고결한 사랑을 보여준다. “Love Conquers All”
세 번째 에피소드인 ‘뼈를 깎는 사랑’에서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좀비가 되자 신고하지 않고 집에 가두어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여(특히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장면을 보라) 어머니의 생명을 부지하는 딸의 사랑을 보여준다. 피를 먹어야 하는 좀비가 되었지만, 딸에게는 그 좀비는 어머니였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국 <이웃집 좀비>에서 인간들에게 좀비는 제거 대상이기 전에 사랑을 하고, 밥을 주고, 인정도 베풀어야 할 애인이며, 엄마이고, 이웃사촌이었다. 이웃집 좀비는 그렇게 탄생된다. 생긴 건 달라도 이웃사촌인 것이다.
레닌과 헤겔을 부활시키고 싶은 슬라보에 지젝(S. Zizek)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 헤겔의 도움을 받아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개념을 현실 분석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개념을 뜻하는데, 지젝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때의 자코뱅이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코뱅은 구체제(Ancien Regime)를 부수어 새 체제의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석우(공유 분)와 상화(마동석 분)가 그렇지 않은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주인공 벤을 죽임으로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었다면, <부산행>은 석우와 상화의 사라지는 매개 역할을 통해 모성과 순수성이라는 한국적 감성으로 이끌며 관객 천만을 (불행하게도) 돌파한다. 예수의 죽음 역시 그의 부활을 기리는 이들에게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성령의 등장을 이끄는 매개자였다. 대형들이 판치는 세상에 교회가, 교단 총회가, 교계의 어른들이, 소금이 짠맛을 음식에 남겨주고 사라지듯, 아니 상화가 그렇게 좀비가 되어가듯, 이웃집 좀비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 (각주)
1) 가령,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리더십이 있는 데다 잘 생기까지 한 주인공 벤(드웨인 존스 분)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안도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민병대원들에게 사살된다. 그들은 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구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벤을 좀비로 간주하여 사살한다. 왜냐하면 벤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아이와 임산부를 살려줌으로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현실을 순수성과 모성으로 봉합한다.
2)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4년 작 <새벽의 저주>는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며, 같은 해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도 이 작품의 오마주 영화이다.
3) 반면 좀비 영화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브를 담아낸 영화로 1993년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리빙 데드 3>가 있다. 공포와 멜로 장르를 결합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여성 좀비와 인간 남성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고어 영화의 잔혹함에 슬픈 로맨스를 결합하였다. 잔혹하고 노골적인 고어 취향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 대신 컬트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웜 바디스>(2012)가 있다.
4) <부산행>이 재미있는 3가지 이유에 관해 김세윤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첫째 마동석, 둘째 기차, 셋째 우리가 부산행 KTX를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동석은 관객의 한 줄 평, “<부산행>은 좀비가 마동석을 피해 부산으로 도망가는 영화”라는 말처럼 ‘정의로운 근육’이었다.
5) 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생명을 뜻한다. 곧 생체활동을 통해 발현되는 생명이며 비오스는 한 사회 내에서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위치 혹은 태도를 통해 발현되는 생명을 말한다. 사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생명은 비오스로서 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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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