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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새롭게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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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달라 마리아'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를 왜곡시킨 역사와 영화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막달라 마리아-부활 의 증 인 >(Mary Magdalene, 2017)이 개봉예정이다. 영화 <라이언>(Lion, 2016)을 통해 인도출신 입양아가 동생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미국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한 가스 데이비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작품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다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 역에 연기파 배우인 루니 마라, 예수 역에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역을 맡아 유명해진 호아킨 피닉스를 등용시켜서 잔뜩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의 조합이 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TV가아닌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된 성서영화(Bible Cinema, 기독교신앙의 증진이나 전파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된 성서영화들은 모세의 출애굽사건(엑소더스:신들과 왕들, 2014)이나 노아의 홍수 사건(노아, 2014)과 같이 일반대중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건들을 다루거나, 예수의 극적인 삶을(부활, 2016) 보여준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과거 성서영화의 전통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일로서 무성영화 시대에 할리우드를 주도했던 세신 데 밀(CecilB. DeMille) 감독의 영화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즉 성서영화의 세계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지금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핵심문제는 사실 소외에 있지 않고 왜곡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성경과 다른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이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영화는 잘 못 반영했거나, 교회가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영화는 그대로 실어 날랐다고 볼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과는 다른 세 가지의 모습으로 비춰졌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등장시킨 잘못을 저질렀다.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감독이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성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나 ‘죄인’으로 언급된 일은 없다. 누가복음 8장 2절과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단지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 내준여성’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되게 한결정적 원인은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40~604)의 실언 때문이다. 그는 591년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무명의 죄 많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고 동시에 그녀를 창녀로 설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가톨릭은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이르기 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하게 되었다. 1969년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다.
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은 여성과(마26:6-7) 동일시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그레고리우스1세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은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이를 참회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현재 한국의 개신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에서 조차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연인 혹은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론 하워드 감독의 <다빈치 코드>(2006)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속에서 예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제자로 해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와 결혼한 후 낳은 자녀의 후손이 프랑스로 건너가 메로빙거왕조를 이루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쏟아냈었다.기독교 역사와 현대문화 할 것 없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교회 안팎으로 늘 있어왔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제자의 위치로 복권시킨 영화<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증인>은 성경에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세 가지의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첫째는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 배경과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주는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에 인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미혼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눅8:2)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정혼을 거부한 가운데 미친 상태에 놓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에는 일곱 귀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들렸는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일곱 귀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 정황으로 봤을 때 딸이 부모의 정혼을 거부하는 일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인식될 가능성은 없지 않다는 점에서 감독의 묘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혀 근거없는 연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 및 열두 제자들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던 유일한 여성이 아니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했고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눅8:3)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남성 제자들과 대비시키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견제하며, 남성 제자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혁명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거듭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비록 여성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와 달리 진정한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일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셋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이며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본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킨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발견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친밀성이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무덤에 온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된 반면에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단독으로 만난 여성제자로서의 면모는 매우 강조된다. 그것은 주변에 발각될 경우 큰 화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제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를 강조하다 일으킨 실수
복음주의 기독교권에서 성서영화는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곤했다. 하나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를 보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상상력의 개입여부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면서 비성경적이거나 반성경적인 묘사나 언급은 아무리 뛰어난 주제의식과 연출력을 보여주더라도 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구를 단지 시각적으로만 펼치는 태도 역시 기독교문화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기독교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여기서 드러난다. 성경과도 부합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시각적 연출력을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연출은 마치 한편의 시를 쓰듯 축약과 상징을 쓰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핵심적인 대사와 장면을 통해 참사랑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고통 앞에 선 인간의 면모를 잘 묘사하고 있다.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이다. 이 성만찬은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한 자리로서(마26:20) 그 인원이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성찬식 장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인원구성을 감독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막달라 마리아를 성찬식 장면에 집어넣은 것은 결국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여성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시각에 달려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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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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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즈니, 내세를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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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코' 포스터
디즈니가 말하는 ‘좋은 죽음’
디즈니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자회사인 픽사(Pixar Animation Studio)가 만든 애니메이션 <코코>(Coco)는 뮤지션을 꿈꾸는 어린 소년 미구엘이 죽음의 세계에서 조상(고조할아버지)을 만나 음악을 금지한 가족의 내력을 파헤치는 낭만적 모험을 그리고 있다. 온 가족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디즈니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증명되기라도 하듯 <코코>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밝고 부드러우며 노래와 춤이 있는 흥겨운 축제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코>가 묘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배경은 멕시코의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로부터 가져왔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망자의 날’은 매년 10월 31일에서 11월 2일 까지 벌어지는 멕시코의 국민축제의 날로써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그들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를 벌인다. ‘망자의 날’은 고대 아즈텍문명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식과 결합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망자의 날’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나올 만큼 대중화된 데에는 죽은 자들이 ‘망자의 날’에는 저승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의 무덤을 방문한다는 생각과 할로윈 데이를 즐기는 대중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는 가톨릭이 지키는 모든 성인 대축일(Sollemnitas Omnium Sanctorum) 전날로 가톨릭의 중요한 기념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며,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지켜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할로윈 데이와 ‘망자의 날’이 연계되면서 국가적 축제일로 변화한 것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인 멕시코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묘사한 <코코>의 장점은 죽음을 가족의 사랑과 연계시킴으로써 ‘좋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지낸 최준식 교수가 언급했듯이 한국에서 죽음은 외면되고 있고 부정적이며 회피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며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놀라운 것은 부활과 천국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현실에서 <코코>는 가족의 사랑을 연계시키면서 죽음을 삶 가까이 끌어들인다. 특히 가족이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어야 저승으로부터 죽은 영혼이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가족의 가치가 점점 퇴색해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코코>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멕시코인들의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죽은 조상과 현실 세계의 가족과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통해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기억하는 한국의 유교전통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 보는 만화영화 치고는 달리 죽음과 내세를 묘사하는 심도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는 한국에서 277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코코>를 의미있게 바라보는 관객이 발견한 것은 ‘좋은 죽음’이다. ‘좋은 죽음’은 살아있을 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 ‘좋은 죽음’일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디즈니의 내세관에 딴지를 걸다
가족과의 사랑이란 보편적 주제를 죽음을 통해 언급한 <코코>의 놀라운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세관은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 오락영화인 까닭에 굳이 기독교의 세계관을 대입하는 일이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만큼 허구와 진실을 분별하지 않은 채 영화관 밖을 나선다면 영화가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코코>는 기독교의 내세관이 갖고 있는 핵심 사항인 심판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회피하고 있다. <코코>가 보여주는 죽음의 세계는 해골 모양을 한 영혼들이 세상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를 독살한 음악가조차도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도록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존재도 그리고 최소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따른 심판도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히9:27)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심판과 형벌에 따른 지옥에 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보다 즐겁고 화려한 축제만이 있는 곳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 책임을 일차적으로는 영화 제작에게 물을 수 있지만, 아울러 교회에도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부드러우며 교양이 넘치는 설교는 현대 설교자의 덕목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시키기 쉬울 뿐이며 전도가 중요한 현대교회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죽음과 내세에 대해 올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현대인들은 <코코>가 보여주는 내세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이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40-1742) 기간 중 신명기 32장 35절을 가지고 엔필드지역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함으로써 회개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제목의 이 설교로 인해 당시 청중들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울부짖으며 회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지옥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가 그리는 지옥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마가복음 9장 44-45절에서 사용된 지옥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위태로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성경적 열심히 낳은 모습이었다.
디즈니의 위력을 경계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이 한창이었던 1959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당제1서기장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흐루시초프가 이 초청을 받아들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측 인사에게 디즈니랜드 관광을 시켜줄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 국무성은 경호상의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떠나면서 무엇을 가져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디즈니랜드라고 말할 만큼 그의 마음은 미국 방문 내내 디즈니랜드에 꽂혀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디즈니랜드에 마음을 둔 것은 디즈니의 만화 때문이었다. 레닌에 이은 스탈린의 강권통치 시절 소련은 자국 내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인 할리우드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다. 미국의 어떤 문화들도 소련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었다. 그런데 단 예외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디즈니의 만화영화였다. 코흘리개 애들이나 보는 만화에는 미국 자본의주의 이념적 내용이나 색깔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고, 단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반적인 내용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디즈니는 지난 해 12월, 524억 달러(약 57조원)를 들여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하나인 21세기폭스사의 핵심 사업을 인수하는 매머드급 ‘빅딜’을 체결했다. 1996년 ABC 방송을 2백억 달러에 인수한데 이어서 2006년에는 픽사 스튜디오를 그리고 2009년에는 미국의 양대 만화제작사 가운데 하나인 마블을 합병했다. 2012년에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효과 제작사인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일은 이미 예상된 바였다. 디즈니가 세상의 문화를 지배할 날이 다가온 듯하다. 만화영화 <코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이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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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