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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음이 서툰 남자가 남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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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로 승부하는 영화의 구조
못된 캐릭터가 변하여 선한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 되는 이야기는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형식으로 자리 잡으며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죄와 은혜라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과 구원관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르는 밉상의 행동과 성격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나 이웃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죄에 대한 징벌로서 심판을 받는 캐릭터의 모습이다. 못된 성격에다 이상한 짓을 한 사람은 그에 대한 대가로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가 여기에는 깔려있다. 다른 하나는 은혜라 말할 수 있는, 예상치 않는 누군가의 도움과 친절로 인해 밉상이던 캐릭터가 선한 이미지로 변하게 되는 일이다.
예수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 이야기(눅19:1-10)는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감동을 주는 이야기의 원형적 성격을 보여준다. 삭개오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 자기 백성의 돈을 뜯어다가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까닭에 대중들의 비난을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작은 키가 주는 외모 등은 그가 부정적 이미지가 잔뜩 묻어나는 캐릭터의 소유자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눅19:8)는 폭탄 발언을 하는 등의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선한 캐릭터로 변신한다.
이것은 교훈과 재미가 공존하는 이야기의 본래적 성격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요2:1-10)처럼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과 변화된 인간이 보여주는 선한 삶의 가치는 대중이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적 가치를 품은 행복한 이야기인 셈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이 만들고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는 전형적인 꼰대 기질의 남성이 같은 주거 단지에 이사 온 멕시코 출신의 가족과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인생 변화를 그리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삶의 의욕도 잃어버린 채 신경질만 살아있는 오토(톰 행크스)는 자신의 앞집으로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과 그의 남편 토미(마누엘 가르시아롤포)네 가족을 귀찮은 사람들로 여기기 시작한다. 주차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사다리며 공구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등 조용하기만 했던 오토의 일상은 이사 온 사람들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만 마리솔이 감사의 뜻으로 놓고 간 음식들이 오토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바람에 그나마 굳어 있던 마음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비록 남의 집에 세 들어 이사를 왔지만 자녀가 있는 시끌벅적한 마리솔 가족이 오토의 고독한 인생에 큰 변화를 주게 될 것이란 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누가 죽음을 멈추는가?
임신한 아내가 교통사고로 인해 유산의 아픔을 경험하고, 장애를 갖게 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 뒤 외로운 오토의 선택은 아내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오토는 전기도 전화도 끊으며 죽음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오토가 기획하는 네 번의 죽음을 보여준다. 첫째는 밧줄에 목을 매는 방법, 둘째는 엽총을 이용하기, 셋째는 차고에서 자동차의 배기가스를 자동차 안으로 유입시켜서 질식사를 도모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철길 위로 뛰어 내려 달려오는 기차와 마주치는 방법 등이다. 물론 네 번의 서로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는 것은 앞의 방법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네 번째 자살시도를 제외한 나머지 방법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마리솔과 이웃들의 등장 때문이란 사실이다. 주택단지를 매일 순찰하며 분리 수거로부터 주차 문제까지 속속들이 간섭을 해온 오토는 이웃주민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공받을 수 있는 해결사였던 것. 성격은 까칠해 보여도 도와달라는 이웃의 청을 거절 못하는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가 바로 오토라는 남자라는 사실은 이웃들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오토의 자살 시도가 이웃에 의해 거듭 실패하게 되는 일은 OECD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행복지수가 59위(2022 세계행복보고서)에 불과한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눈여겨볼 만한 시사점이 있다.
첫째는 이웃과의 소통이 죽음을 중지시킬 수 있으며, 둘째는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죽고 싶을 만큼 외로운 상황이란 아무도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의 상실에서 오는 진공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마리솔은 남편이 다치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자 오토를 찾아가 차로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한다. 그것도 모자라 운전연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남편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봐 달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툴툴거리고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오토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죽음을 내쫓는 중이다. 인간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주어질 때 숨쉬기를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고독한 죽음의 현장과 유품정리사
마리솔은 어느 겨울 아침, 오토의 집 앞에 눈이 치워지지 않은 채로 덮여있는 것을 보고는 오토의 집을 향해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간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의 오토가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메시지인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토는 침대 속에서 영면한 채 발견되고 마리솔 가족을 위한 유서를 남겨 놓는다.
한국 같았으면 또 하나의 고독사(孤獨死)로 남을 뻔했다는 생각에 따뜻했던 영화는 어느새 마음을 얼리고 만다. 죽은 후 몇 달이 지난 뒤 백골 상태로 발견된 독거노인의 주검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최근 사회적 고립도 조사에 따르면 전국민의 1/3은 사회적 고립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회적 고립도는 인적·경제적·정신적 도움을 구할 곳이 없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 나타내는 지표로서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고독사의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고독사는 유품정리사라는 신종 전문가들을 매스미디어 안으로 소환시키기 시작했다. 유품정리사는 한국사회가 겪는 비극이라 할 수 있는 고독사가 낳은 신종 직업이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생률,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르는 가족공동체의 붕괴,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한 독거노인의 증가 등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심각한 사회현상들은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남긴 흔적을 지울 사람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고독사는 가족이나 주변인들과 단절된 채 아무도 모르게 홀로 생을 마감한 후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발견되는 죽음을 의미한다. 보통 좁은 방안에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와 배달된 음식물들 찌꺼기들이 썩어 있고, 술병들이 널부러져 있는 경우는 고독사 현장의 공통된 풍경이기도 하다.
2021년 5월에 공개된 넷플릭스의 10부작 드라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는 유품정리사의 모습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유품정리사 그루(탕준상)와 그의 후견인 상구(이제훈)가 그루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 이사를 도우며 그들이 유품을 통해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남은 이들에게 대신 전달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무브 투 헤븐>은 주요 국가에서 넷플릭스 인기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는가 하면, 2021 아시안 아카데미 크레이에티브 어워즈(Asian Academy Creative Awards, AACA)에서 각각 최고의 드라마 시리즈상과 남우주연상(이제훈)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품정리사 김새별이 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속에는 고독사를 방지할 수 있는 조언이 담겨있다. 귀를 기울이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내 가족, 내 이웃에 대한 작은 관심만 있다면.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른다. 포기하려던 삶을 부여잡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거창한 도움이 아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작은 배려와 친절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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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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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중근의 신앙이 빛난 영화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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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수난과 기독교 영화의 시작
레아르(Léar)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알버트 키르히너(Albert Kirchner,1860-1902)는 1897년 최초의 기독교 영화라 할 수 있는 예수의 고난을 묘사한 5분짜리 영화 <수난>(La Passion)을 발표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 카페에서 상영했던 영화를 현대영화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불과 1년여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수난>은 현재 필름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의 탄생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생애의 주요 사건을 다룬 12장면으로 이루어졌다. 연극배우들이 동원되었고 파리에서 촬영되었지만 키르히너가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동안 촬영된 영상물 <Scenes de la vie du Christ>의 장면 일부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난>을 관람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가 도발적으로 묘사되었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영화 제작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뤼메에르 형제조차도 그다음 해인 1898년 11분 분량의 영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La vie et la passion de Jésus-Christ)을 내놓았을 만큼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영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키르히너가 만든 첫 기독교영화는 파리에 있는 가톨릭 출판사인 파리의 본느 프레스(Bonne Presse)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가톨릭의 교세가 강한 프랑스의 지역적 특성과 가톨릭 교회가 영화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는 물론 한국기독교 영화사를 논할 때 가톨릭 교회의 역할과 영향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의 영화 이전에 빛을 렌즈에 투과시켜 생성된 이미지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친 환등의 기술을 개발한 사람도 예수회의 사제이자 기술자였던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1-1680)였다.
안중근 의사의 열정을 담은 영화사
2022년도가 지나가기 전 한국의 가톨릭 교인들은 가슴 뿌듯한 영화 두 편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 편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2022.11.30. 개봉)이었고, 다른 한 편은 안중근 열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실화를 다룬 <영웅>(2022.12.21. 개봉)이었다. <탄생>과 <영웅>은 모두 고난의 역사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인공의 가톨릭 신앙이 주는 의미와 역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탄생>이 가톨릭 교회 내부의 지원에 힘입어 제작될 수 있었다면, <영웅>은 2009년도에 막을 올린 동명의 뮤지컬의 인기에 힘입어 같은 내용을 스크린에 옮긴 상업영화란 점에서 제작 목적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가톨릭 교회에서 <탄생>을 추천할 때는 김대건 신부의 신앙과 순교를 강조하기 보다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조선 근대화의 길을 연 청년의 모험담이라는 역사성을 강조한 반면, <영웅>의 경우는 일반영화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와 어머니 조마리아의 신앙에 나름 무게를 두며 관람을 권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영화의 특성이 강한 <탄생>의 경우는 일반인들의 관람을 권장하고 싶은 한편으로 일반영화로 분류되는 <영웅>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가톨릭 신앙이 안중근 의사에게 끼친 영향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가톨릭 교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흥행 결과는 영화에 대한 제작 의도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탄생>은 공식기록으로 344,71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50억 원의 개인 후원을 받아 제작비에 투입하고 교황청 시사회를 비롯하여 감상문 공모전 1등에게는 성지순례 티켓을 수여하는 등의 각종 이벤트를 생각할 때는 기대에 못 미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대중의 관심이 크지 않은 종교영화라는 장르를 생각할 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스코어이다. 어차피 각 교구와 성당별로 별도의 관람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실제 관람객은 늘어날 것이고 가톨릭 신앙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영웅>의 스코어는 3,266,045명(2023.03.26. 기준)으로 손익분기점에는 약간 못 미치는 기록이지만 주인공 안중근 의사로부터 신앙의 면모를 기억할 수 있는 관객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는 의미있는 스코어라 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최고 인기 콘텐츠 ‘안중근’
안중근 의사는 한국영화가 사랑한 최고의 소재이다. 한국영화사에 가장 많이 제작된 영화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서 을사늑약의 중심인물이자 초대 총독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일은 민족의 원한을 푸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고, 이토의 격살이 단순히 민족적 감정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큰 그림 가운데 일어난 일이란 점은 그가 감옥 있을 때 쓴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과 더불어 그가 행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었다. 또한 어머니 조마리아와의 친밀한 모자지간의 애정과 고난을 이기도록 만든 그의 가톨릭 신앙 등 그의 삶 요소요소에 박혀있는 격정적이며 애잔한 페이소스는 대중들이 좋아하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영화사에 안중근 의사가 등장한 일은 해방 직후인 1946년 부터다. 영화가 민족의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과 그에 따른 상업적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함께 하는 것은 해방 이후의 영화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즉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야 한다는 영화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뮤지컬 영화 ‘영웅’과 역사물을 통해서 그리는 신앙
영화 <명량>이나 <한산>이 그러하듯이 한일관계의 현실적인 이해 속에서 일본과의 역사를 다룬 영화들은 새롭게 읽히며 흥행에도 영향을 받는다.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특유의 유머 감각까지 동원하며 만든 <영웅>이 손익분기점에도 못미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어쩌면 지금의 대일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오리지널 뮤지컬로 100만 명이나 본 유명한 극을 영화화한 까닭에 익숙함이 영화관으로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을 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혹자는 코로나 이후 비싸진 영화관람료를 원인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은 주인공의 종교적 성격을 일반 대중들에게 거부감없이 어떻게 다가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영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안중근은 세례명이 ‘도마’로 알려져 있듯이 영화는 그의 행적 곳곳에 가톨릭 신앙의 면모를 심어 놓았다. 안중근 의사(정성화)가 집을 떠나기 전 어머니 ‘조 마리아’(나문희)가 묵주를 건네고 힘들 땐 언제나 주님께 의지하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안 의사가 이토를 격살하기에 앞서 용기를 달라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 오랜 친구 마두식(조우진)의 장례를 성당에서 치른 후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을 보며 조국이 우리에게 무엇이냐고 울부짖는 장면 등은 거부감없이 주인공의 신앙이 어떠하며 그것이 민족의 거사를 앞두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일반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결사의 비장감이 휘몰아치는 장면에서 아무리 세속적인 사람일지라도 신앙의 가치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영화에 등장한 안중근 의사의 법정에서의 마지막 변론은 신앙적 가치와 애국적 행동 사에서 갈등이 어떻게 중재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토를 살해한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사죄드리오. 하지만 개인이 아닌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를 밝히고 싶소.”
당시 로마의 대주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 살해했다는 이유를 들어 가톨릭 신자 자격을 박탈했었다. 안 의사에 신자 자격이 복원된 것은 2010년에 와서였다. 가톨릭 교회가 적극적으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고 미디어를 통해 그의 신앙의 됨됨이가 의거에 미친 영향을 알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훌륭한 역사의 인물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마음에는 그 인물이 가진 신앙적 면모에 대한 거부감은 줄어드는 반면, 수난을 이기는 힘으로서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영웅>으로부터 기독교 영화인들이 가장 크게 배우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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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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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할리우드의 삼위일체를 체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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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영화다운 영화
보는 즐거움과 실감나는 소리, 몸으로 느끼는 영화 속 움직임, 그리고 머리에 각인되는 메시지 등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영화 <아바타:물의 길>은 진짜 영화다운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3D와 4D로 체험하는 입체영상과 흔들리는 의자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따로 놀지 않도록 잘 결합시켜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며 192분 동안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세계의 영화팬들이 <아바타> 이후 13년 동안 기다려 온 바로 그 영화라 할 수 있다.
특히 넷플릭스나 애플tv, 디즈니플러스 등 휴대폰과 노트북으로 볼 수 있는 OTT서비스가 보편화 되어 있고,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영화관 나들이가 제한되어 있었던 세상을 향해 <아바타2>는 진짜 영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영화관의 가치를 새삼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할리우드 영화를 빛나게 만든 세 가지 실체
<아바타2>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온 세상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제작의 원리로써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이 완벽하게 하나로 결헙된 영화다. 이것을 우리는 ‘할리우드의 삼위일체’라고 부를 수 있다.
첫째는 자본이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 영화를 움직인 실체는 돈이다. 영화는 자본을 확충하는 도구이며, 모은 돈은 또 다시 영화에 재투자하여 더 많은 자본을 모으는 데 사용된다. 1975년도만 하더라도 할리우드의 평균영화제작비는 광고비를 포함 31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소리 없이 제작비는 상승하면서 1984년도에는 1440만달러에 달하더니 1996년도에는 3980만달러, 2003년에는 6380만달러까지 치솟았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은 할리우드의 제작비 상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1991년 <터미네이터2>를 만들면서 최초로 제작비 1억 달러를 돌파했는가 하면, 1997년 작품인 <타이타닉>은 제작비 2억 달러를 기록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천문학적인 제작비 상승의 흐름은 <아바타>로 이어졌다. <아바타>(2009)의 추정 제작비는 약 2억3700만 달러지만 <아바타: 물의 길>의 경우 제작비로 추정되는 금액은 3억5000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요즘 환율로 치자면 한화로 약 4592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를 잘 아는 전문가들 가운데는 4억 달러(약 5244억 원) 이상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대급으로 들어간 제작비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전편 <아바타>는 지난 13년 동안 동안 전 세계에서 약 29억 달러(약 3조8000억 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영화사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영화 1위에 올랐다.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자신이 있다면 투자한 금액의 규모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할리우드 제작사들의 경영철학인 셈이다.
둘째는 기술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가능하게 만드는 할리우드의 프로그램 기술은 성령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화가 완성된 후 관객들은그 기술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다. <아바타2>는 전편 보다 더욱 발전된 기술을 적용하여 미래형 영화를 만들었다. 3D영화는 인간의 눈을 대신하는 카메라를 두 대를 놓고 찍어서 특수렌즈로 상영하고 또한 관객들은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특수안경을 착용하고 관람하는 영화를 말한다. 제작은 쉬워 보이지만 눈을 피로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생생한 사실감을 살리는 일이 기술의 관건이다. 아이디어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평면적인 2D영화와는 전혀 다른 경험의 세계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움직이는 의자에 앉아 마치 놀이동산에 온 듯한 느낌을 제공하는 4D는 젊은 관객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4D영화는 궁극적으로 입체적 영상이 체험으로 발전할 때 미래의 영화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에 설수 있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하다.
2D와 3D는 체험의 질과 느낌 자체가 다르다. 신앙인들 가운데 성령체험을 사모하는 이들이 있듯이 할리우드의 열렬한 성도(광팬)들 가운데 상당수는 2D로 된 <아바타2>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3D로 다시 보기 위해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은 할리우드 영화를 눈앞에서 현실화시키는 궁극적 실재다. 또한 스크린에 나타난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은 상상력을 통해 나타나며 관객과 만나는 접점이란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놀라운 이적을 펼쳐 보인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영화를 만들었을 때 충격을 받은 것처럼, 불과 50년전 사람들이 <아바타2>를 봤다면 기적이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의 세계 판도라 행성을 보여주고 그 속에 살고 있는 네비족과 인간의 유전자로 합성된 인간의 분신 아바타를 실제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은 자본과 기술이 낳은 상상력의 결과다.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 가운데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들은 항상 함께하며 할리우드를 움직인다. ‘할리우드의 삼위일체’는 그래서 놀랍고 경이로우며 한편으로 두렵기까지 하다. 앞으로 적어도 한 세기 동안 할리우드에 맞설 만한 영화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할리우드가 세계의 영화를 지배할 것이란 전망은 <아바타2>를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환경문제와 원시종교의 세계관
그러나 희망은 있다.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을 그 자체가 동력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지성과 영혼이 있는 사람이 그 쓰임새를 결정하며 그 배후에는 세계관이 존재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즉 세계관의 변화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상상력이 일으킨 감동이 선하고 가치있는 삶으로 연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바타2>의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는 다르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아바타2>는 전작의 인물을 소환하여 가족과 환경보호 그리고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1편의 주인공이자 해병대 출신의 백인으로 나비족의 몸을 얻게 된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는 나비족 추장의 딸 네이티리(조 샐다나)와의 사랑 끝에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며 가족을 이루고 숲속 나비족의 리더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판도라 행성에서 철수했던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 불리는 인간들은 지구가 더이상 살 수 없는 폐기처분의 상태에 이르자 판도라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한 건설작업을 펼치게 된다.
<아바타>가 보여준 세계관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아바타2>는 현실에 대한 은유가 살아있는 SF영화다. 미래 세계에 인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판도라 행성에 오게 된다. 1편이 자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냈다면, 2편에서는 영생의 물질을 찾기 위해 해양생물을 포획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 과정에서 나비족이 원시적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며 환경보호를 위한 대안도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마치 과거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지녔던 토테미즘(Totemism)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 속 나비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거대한 ‘영혼의 나무’는 바닷 속에서도 발견된다. 나비족은 이 나무를 숭상하고 그 앞에서 행하는 제의와 여주인공인 네이티리의 어머니가 주술적 치료를 행하는 샤먼(무당)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나바호족의 문화뿐만 아니라 토테미즘적 세계관까지도 차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나바호족의 선조들이라 볼 수 있는 캐나다 인디언들은 지금도 거대한 나무로 만든 토템폴을 숭배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과의 교감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나비족들이 머리끝에 달린 촉수로 자연과 교감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는 사실은 자연과의 일치를 강조한 인디언들의 생각과 동일하다.
엄청난 돈과 최첨단 기술의 결합이 낳은 이 원시적 세계관의 등장은 현대사회의 문제 해결을 토템과 샤먼 같은 탈기독교적이며 신비주의에 의지하려는 감독을 포함한 미래를 꿈꾸는 현대인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대 기계문명이 일으킨 파괴적인 행동에 인류의 미래를 맡기기보다는 비록 원시적이지만 기독교 문명 이전의 세계관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서부시대에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몰아냈지만, 이제는 뜻밖에도 인디언들의 사고가 백인들을 지배하는 형국으로 변모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아바타2>는 분명 서구사회가 과거 역사에서 저지른 강대국의 팽창주의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인 환경파괴 비판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전세계 사람들 누구나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다.
환경보호는 우리 시대의 절박한 필요이며, 나비족의 세계관이 환경보호에는 일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환경보호 자체가 인간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대해서 수동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올바른 삶도 아니다.
우리는 문화명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창세기 1장 28절에 언급된 ‘다스림’과 창세기 2장 15절에 언급된 ‘다스림’과 ‘지킴’을 청지기적 사명으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아바타2>의 상상력을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 ‘다스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abad)의 뜻은 ‘섬기다’(serve)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상용어이며, 목적어로 사용시에는 ‘경작하다’의 뜻을 갖게 된다. ‘지키다’라는 히브리어 '샤마르'(shamar)도 문맥상 창조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수반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환경을 가꾸고 지키는 일은 환경자체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한 의도를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 되는 것이다. 자연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진정한 삶의 목적으로 여길 때 환경문제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아바타>를 보며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에 심취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내야만 한다. 그 출발점은 당연히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교회의 등장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세상 사람들보다 덜 쓰고 아끼고 나누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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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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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바울’이라 불렸던 사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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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신문 2022. 11월 둘째주
기독교 역사를 교육하는 새로운 방법
권혁만 감독이 기독교 영화콘텐츠의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감독도 시도하지 않았던 뮤지컬 장르를 통해 한국 기독교 역사의 태동기를 담았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공영방송의 TV 연출자로서 쌓은 경력과 방송세계에서 얻은 경험들이 고스란히 기독교 영화콘텐츠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역량으로 축적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무엇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진보하고 있으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 영화의 세계에서 권감독은 보배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 들어 한국 기독교 영화를 지배했던 장르는 다큐멘터리였지만 권혁만 감독은 그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드라마를 요소요소에 삽입시킨 ‘팩션 드라마’를 선보였다. 손양원 목사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2014)이나 주기철 목사의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담은 <일사각오>(2016)는 모두 사실에 가깝게 제작된 드라마란 뜻으로 ‘팩션 드라마’에 해당한다. 사실(Fact)에 충실하면서도 드라마적 감동을 주기 위한 소설적 상상력(Fiction)을 사용한 장르를 ‘팩션(Faction)'라 부른다면 지금까지 그의 영화들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KBS PD로 성탄절 특집프로그램을 통해 기독교 역사와 사상을 전해 온 권혁만 감독이 이번에는 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의 신앙과 삶을 뮤지컬 형식에 담아서 돌아왔다. 2021년 12월 성탄 특집으로 방영된 콘텐츠를 극장용으로 재편하여 더욱 넓어진 감동과 역사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하고 있다.
1888년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해서 삶아 먹는다는 괴소문에 격분한 김창식은 직접 증거를 찾기 위해 서울 정동에 있는 올링거(Franklin Ohlinger) 선교사 집에 하인으로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올링거 선교사 부부의 친철함에 감동을 받는 한편 산상수훈을 읽고 기도하다 거듭남을 체험하며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1894년 5월에 있었던 평양박해의 순간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홀 선교사(William James Hall)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별명을 얻은 김창식의 뜨거운 삶을 영화는 뮤지컬로 보여준다.
특히 홀 선교사 부부를 비롯하여 그에게 세례를 준 아펜셀러 선교사, 김창식의 아들 김영진과 홀 선교사의 아들 셔우드 홀이 해주 구세주 병원에서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는 등 한국선교 초기의 역사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 일은 기독교 역사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초대 한국교회사의 한 장을 읽는 느낌이다.
<머슴 바울>의 제작사도 이를 충분이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교회의 적극적인 관람만을 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음세대들에게 영화관람후 한국교회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토론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며 일반 영화와도 차별화되고 기독교 영화의 활용가치를 높이는 일로서 교회의 관심을 적극적으류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공영방송의 성탄특집을 바꾸다
한국교회는 미디어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의 도래에 발맞춰 신문과 라디오 케이블TV 등 신 ·구미디어 양쪽에서 나름대로 선교적 소명을 감당해왔다고 자부해왔지만, 유독 공중파 TV와 공영방송 안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종교 간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직접 노출되는 방송은 제작되기도 어려웠고 좋은 콘텐츠를 외부에서 가져다 방영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기독교 콘텐츠가 마음껏 방송을 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성탄절밖에 없었다. 석가탄신일에 불교 영화를 내 보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없듯이 성탄절만큼은 기독교 관련 영상물들이 ‘성탄특집’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방송의 모든 프로그램에는 제작비가 필요하고 제작비는 사회의 관심 혹은 시청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방송제작자들은 안정된 시청률을 얻을 수 있고 사회적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를 찾기 마련이다. 특히 공영방송의 경우는 준세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방송수신료로 운용되는 까닭에 시청률과 상관없이 국가나 국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콘텐츠는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관심도 없고 기독교방송콘텐츠를 제작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타종교의 비판이 두려워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성탄특집을 담당한 사람들은 기독교 시청자들의 존재와 기독교 콘텐츠가 국가와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은 미처 하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하는 성탄 특집물은 212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때문에 평소에는 방송국에서 틀지 않았던 영화 <벤허>와 같이 할리우드의 고전 성서영화를 질리도록 보는 것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21세기 들어 일어난 성탄 특집물의 변화는 2011년 12월 23일, 성탄특집으로 방영한 <KBS스페셜-울지마 톤즈>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수단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교육과 봉사를 하다 대장암으로 숨진 이태석 신부의 사역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면서 성탄특집의 외형과 작품성은 급격히 향상되기 시작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계획을 하는 한편으로 해외촬영과 공들인 편집은 소재 중심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감동을 배가시키면서 극장판으로 제작되는 데 성공했다.
권혁만 PD의 신앙과 직업에 큰 도전을 준 것도 <울지마 톤즈>였다. <울지마 톤즈>는 명화히 가톨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동이 극장용 영화로 제작되는 데 까지 이르도록 우리 사회에 미친 선한 파장은 매우 컸다. 그런데 <울지마 톤즈>를 만든 구수환 PD 본인은 신앙이 없는 무신론자였다. 기독교 신앙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감동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정작 신앙이 있는 자신이 신앙적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은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영화감독으로 권혁만을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탄특집 다큐멘터리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이나 <일사각오>도 <울지마 톤즈>의 전례를 따랐다. 드라마형식을 일부 도입하여 세미 다큐 형식으로 과거를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역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관계자와 현장을 일일이 만나고 답사한 결과 수준 높은 기독교 다큐멘터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울지마 톤즈>가 극장판으로 재편집되어 적지 않은 관객을 만났듯이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은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이란 제목의 극장용으로 만들어져 한국교회와 사회에 의미있는 영향을 끼쳤다. 반목과 대립의 사회에서 손양원 목사가 보여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우리의 눈과 귀를 모으기에 충분했던 까닭이다.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은 공영방송의 PD가 극장용 기독교 영화 감독으로서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독교 최초의 뮤지컬 영화
<머슴 바울>이 취한 형식은 뮤지컬이다. 한국 기독교 영화에서 뮤지컬 장르를 택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무대에서 기독교 뮤지컬은 인기 있는 기독교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 뮤지컬 영화의 출현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교회는 뮤지컬을 제작하는데 최적의 인프라를 가진 까닭에 대중적으로 활성화된 기독교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예배당에서 강대상을 치우고 할 수 있는 단막극 형태로부터 천 석이 넘는 대형 공연장에 어울리는 대형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규모에 맞게 다양한 기독교 뮤지컬들이 그동안 펼쳐져 왔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음악과 친숙한 문화를 갖고 있으며, 춤과 노래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능숙한 인력을 찾기가 쉽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점은 기독교 뮤지컬이 앞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머슴 바울>은 뮤지컬이 가진 대중적 특징과 교회가 그동안 축적해 온 음악과 이야기의 장점들을 모아 새로운 기독교 영화의 형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MZ세대와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뮤지컬 장르의 장점들을 기독교 신앙과 역사 교육에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는 일반 드라마에 비해서 관객의 이해력과 집중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이며 극적인 표현을 노래로 대치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어서 다양한 연령층이 포함된 가족영화로 만들기에 매우 적합하다. 예를들어 주인공 김창식이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장면에서 그가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을 극으로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질을 당하는 김창식이나 매를 든 포졸의 때리고 맞는 연기가 필요하고 이에 따른 특수분장도 해야 한다. 매질을 당하면서도 배교의 유혹을 이기는 장면은 내면의 연기가 필요하다. 이것 또한 연기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을 뮤지컬은 한 곡의 노래로 대체할 수 있다. 노래에 이야기를 담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신앙을 곡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가 갖는 특징은 서로 다른 평가를 받기 쉽다. 고도의 연출력을 필요로 하는 장면을 너무 쉽게 간다는 점에서는 뮤지컬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락성을 갖춘 표현력 때문에 대중에 대한 친화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머슴 바울>이 지금까지 권혁만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가운데서 가장 재미있고 모든 연령층을 수용할 수 있는 대중성이 높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그가 뮤지컬 장르를 택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는 역사적 사실감을 높이고 드라마를 통해서는 관객의 감정을 사로잡고 음악을 통해서는 즐거운 몰입에 이르게 하는 영화 <머슴 바울>은 기독교 영화콘텐츠의 지평을 넓혔다는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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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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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편의 시대가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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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이 지배하는 한국영화
코로나 엔데믹 시기를 맞으며 한국의 극장가는 코로나 이전의 부흥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인 2019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2억 2천6백6십8만여 명에 달함으로써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가 4.37회에 달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실시되고 음식물 섭취가 제한된 데다 외출을 극도로 회피하기 시작하자 영화관은 관객의 발걸음이 끊긴 적막한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영화관을 직접 찾아간 관객의 수는 6천5십3만여 명에 불과했다. 1인당 연평균 관람 횟수도 1.17회로 뚝 떨어졌다. 그야말로 국내 영화관들이 아사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계에 희망을 전해준 영화는 2017년 추석에 개봉한 이상용 감독의 <범죄도시>의 속편인 <범죄도시2>였다. 괴력의 형사 마석도(마동석)를 앞세워 무려 1천2백6십9만여 명의 관객을 모아 천만 관객 돌파라는 한국 영화계가 그토록 열망하던 부흥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편에서 중국교포들이 모여 사는 가리봉동 일대를 순식간에 장악했던 하얼빈 출신의 신흥 조폭 장첸(윤계상)의 악랄한 행위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마석도 형사의 불주먹에 당시 열광했던 관객의 수는 6백8십8만여 명이었다. 결코 적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이미 예고되기 시작했었다. 왜냐하면 극장 개봉이 끝난 후에도 <범죄도시>는 공중파 TV를 통해 해마다 명절용 영화로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전용 케이블 TV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재방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인기를 받아왔던 까닭에 제작자나 관객 모두 속편에 기대감이 높은 상태였다.
<범죄도시2>의 천만 관객 돌파는 <마녀 Part2. The Other One>과 <탑건: 매버릭>, 그리고 여름방학 특수용으로 제작된 <한산: 용의 출현>과 추석용 가족영화 <공조2: 인터내셔널> 등의 속편 영화들의 연이은 개봉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들은 이미 전편을 통해 대중성을 검증받은 영화들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개봉을 늦춰왔던 대형영화들이 한꺼번에 영화관에 걸리는 바람에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어서 좋아 보였지만 적지 않은 수의 영화들이 속편의 성격을 띠고 개봉한 점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속편의 흥행 이유
속편 영화가 나오는 이유는 전편의 흥행에 대한 기대심리가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각색을 거친 후 리메이크하는 경우는 있어도 주인공과 이야기를 연장하면서 속편을 만드는 일은 흔하지 않다.
속편 영화는 기존의 캐릭터와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독창성의 면모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흥행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사가 제작하기도 쉽고 투자받기도 훨씬 수월하다. 전편을 본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이미 어떤 성격의 영화인지를 알 수 있어서 새로운 영화를 보고 난 후 실망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고 속편을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기대감을 상승시킬 수 있으니 선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상승한 영화관람비에 대한 부담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선택에 더욱 신중한 자세를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속편은 매우 안정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금년 4월 주요 영화관들은 모두 영화관람료를 1천 원씩 인상하는 바람에 주말 티켓값은 1만 5천 원이 되었다. 주말에 4인 가족이 극장에서 팝콘세트를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면 10만 원 정도의 지출은 예상해야 한다. 평일 조조할인조차 1만 원에 이르는 등 할인을 받지 못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선택에 있어서 안전성과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재미가 없다면 지출에 따른 실망감이 큰 만큼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고 관객들은 믿고 있다.
또한 넷플릭스나 왓차, 웨이브 같은 OTT 서비스의 범람은 MZ세대들로 하여금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최신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점은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는 이유를 꼼꼼이 따지도록 만들어 속편의 선호도를 높이는 이유로 볼 수 있다. 대형영화가 속편으로 만들어 질 때 관객들은 앞서 본 영화의 스케일에 대한 만족감을 다시 얻기 위해서라도 극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빌런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속편의 한계
금년에 주목받은 한국영화의 속편들은 범죄와 액션 그리고 코미디 장르라는 대중성이 강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미 관객들은 영화의 구조나 성격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범죄도시2>나 <공조2: 인터내셔널>과 같은 한국의 속편 영화들은 두 가지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첫째는 외형의 확장세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범죄도시2>는 배경을 베트남으로 옮겨 동남아시아로 확대하는 새로운 범죄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다. <공조2: 인터내셔널> 또한 남북공조에서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의 CIA를 결합시켜서 외연이 확장되었다. 비록 셋트와 그래픽을 이용했지만 뉴욕시에서의 액션 촬영 장면 등 해외풍경을 배경 삼아 다채로운 볼거리도 제공했다.
둘째는 악역의 교체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범죄도시2> 악역은 장첸(윤계상)에서 강해상(손석구)로 바뀌었고, <공조2: 인터내셔널>의 경우 북한에서 위조지폐 동판을 가져와 거래를 하려던 1편의 차기성(김주혁)에서 글로벌 범죄조직의 장명준(진선규)으로 교체했다. 범죄의 유형과 범죄인의 캐릭터에 변화를 줌으로써 기존의 주인공들을 다시 보는 익숙함에서 오는 재미와 더불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만드는 바람에 전형적인 장르의 장점을 살리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액션이나 범죄영화에 있어서 주인공의 변화가 아닌 악역의 변화를 통해 속편을 전개시키는 점은 자칫 과도한 폭력성과 선정성의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범죄도시2>가 속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마동석 배우가 마블 영화 <이터널스>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형사를 상대하는 악당의 잔혹한 연기가 주목을 끌었던 까닭에도 있다. 흔히 빌런(villain)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주인공 못지않은 개성을 보여주며 흥행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최근 범죄영화나 액션 영화와 같은 대중성 높은 장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매우 중요한 흐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악당은 단순히 정의로운 주인공에 의해서 제압당하기 위한 존재로 출연하는 보조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충분한 개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과거와는 다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빌런의 개성이 폭력의 잔혹성이나 기발한 범죄유형을 통해 전개되는 점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범죄도시2>가 받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 또한 천만 관객 돌파의 이유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관람 연령이 낮을수록 관람대상의 폭은 넓어질 수 있어서 제작자의 1차적 관심은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될 수 있으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지 않는 데 있다. <범죄도시> 1편의 등급은 청소년 관람 불가였다. 18세 미만이거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은 관람할 수 없다. 그러나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은 보호자가 동반하는 경우 그보다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다. 즉 가족이 함께한다면 어린 학생들도 결코 적지 않은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비해 한국영화에서 마약이나 폭력의 수위는 결코 낮아지고 있지 않지만, 등급은 하양 추세로 가고 있음을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탑건: 매버릭>, 영화의 품위를 말하다
36년을 기다려 온 영화 <탑건: 매버릭>은 전편 <탑건>(1986)의 인기를 바탕으로 만든 속편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 완벽한 영화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전편의 힘을 빌려 흥행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영화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전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출발점으로 작용하며 관객이 듣고 싶고 보고 싶어하는 새로운 이야기와 장면에 대한 기대에 부응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명예와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 다는 점에서 영화의 품위를 보여준다.
주인공 매버릭(톰 크루즈)은 교관 신분으로 과거 자신과 함께 비행하다 사고로 숨진 동료 조종사 구스(안소니 에드워즈)의 아들 루스터(마일스 텔러)를 가르치게 되고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영화는 신구세대 간의 충돌과 연합을 뛰어넘어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연령층이 함께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를 지켜주고 키워주려는 책임감과 사명이 부각되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자긍심과 명예는 악당을 중심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다른 속편들과는 매우 다른 차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핵시설을 건설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다만 ‘적’으로 묘사될 뿐이다. 악당을 통해 관심을 고조시키기 보다는 주인공의 가치에 초점을 둔 영화의 전략을 읽을 수 있다.
<탑건>(1986)을 처음 봤을 때는 겉멋만 잔뜩 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탑건: 매버릭>은 주인공이나 영화 속 이야기 모두 성장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속편을 만들 때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며 덕을 세울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빌:8) <탑건: 매버릭>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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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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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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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배우는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그린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인 <한산:용의 출현>(이하 <한산>)이 뜨거운 여름의 극장가를 점령했다. 이미 <명량>(2014)을 통해 1,76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아 한국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 수 1위에 오른 일이 있어서 <한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외부 환경도 좋은 편이다. 코로나 엔데믹으로 인해 거리 두기가 없어졌고 극장에서 콜라와 팝콘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한여름 피서지로서 영화관을 찾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명량>의 흥행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일본 정치인들의 군국주의 망언에 따른 반일 정서 또한 계속되는 중이다. 최근에는 일본 자민당 거물 정치인인 에토 세이시로 중의원 의원이 일본을 한국의 “형님 뻘”이라고 주장하여 크게 반발을 샀고, 일본의 적지 않은 정치인들은 여전히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화의 수치스러운 자국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영화 <한산>은 역사물로서 현실의 대일관계에서 오는 화 나고 답답한 현실을 속 시원하게 뚫어주는 사이다 역할을 한다. 1592년 5월 23일 시작된 일본의 조선 침략은 채 두 달도 못 돼서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켰다. 선조는 평양성을 떠나 의주로 피난을 떠났고 왜군은 육지의 기세를 몰아 조선의 마지막 남은 수군을 격파하고 명나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전쟁영화는 모름지기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영웅도 탄생하고 비책이 빛을 발하듯이 <한산>은 전세의 전환점이 될 8월 14일의 한산도 앞바다를 비춰주고 있다. 결과는 물론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승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한산대첩을 영화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 기록물을 넘나들며 역사적 사실과 재해석 사이를 오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다. 김한민 감독의 오랜 연구와 기획 그리고 <명량>에서 쌓은 노하우는 무난한 결과를 가져왔다. 관객들은 이미 <명량>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CG로 입혀진 50분간의 해전 장면에 만족했고, IMAX로 다시 한번 보는 재차 관람을 권유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역사적 고증도 비교적 잘 되어 역사가들의 판단 또한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왜군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으로 투입된 배의 숫자가 영화에서는 3척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5~6척에 이르며, 한산대첩에서 연을 통신 수단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왜군의 움직임에 대한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여 승리를 이끈 핵심인물로 조선의 민초였던 당포 목동 김천손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부분 등 팩트 체크를 하자면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산>은 한마디로 이순신의 전략이 빛나는 역사현장을 목격하는 재미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전략가 이순신을 만나다
<명량>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위대한 영웅의 이미지로서 이순신을 그려냈다면 <한산>은 지략가 혹은 전술가로서의 이순신(박해일)의 면모가 빛나고 있다. 특히 <명량>과 다르게 이순신과 일본의 장수 와카자키 야스하루(脇坂安治, 변요한)와의 전술 대결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점은 <한산>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은 용인술(用人術)에서 빛났다. 학익진(鶴翼陣)은 각각의 함선을 이끌 장수들의 이름을 전술도(戰術圖)에 적어 넣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계획은 마치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들의 포지션을 정하는 감독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羅大用, 박지환)을 옆에 둔 일과 거북선에만 의지하지 않고 전 병력을 고르게 활용한 전략도 이순신 장군의 높은 지략을 엿보게 한다. 사천해전에서 1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 시켰던 주역이 바로 거북선이었고, 거북선의 무서운 맛을 본 왜군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든 거북선의 약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집중공격하고자 하는 것이 와카자키 전술의 핵심이었다. 그만큼 거북선은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전함이었던 셈이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중심으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이려고 하는 전투계획을 세울 만도 하지만, 막상 일본의 첩자가 거북선의 설계도를 훔쳐 도주해버리자 거북선을 출전시키지 않기로 한다. 이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적에게 이미 약점이 노출된 것을 알았을 때 빨리 전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지장(智將)의 면모다. 과거의 승리에 도취해서 변화하기를 주저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한산>에는 세 척의 거북선이 출전한다. 모두 약점이 보완된 거북선들로서 이는 나대용이란 뛰어난 제작자를 옆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고 이 소식을 들은 나대용은 사촌 동생인 나치용과 함께 여수로 건너가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 건조를 건의하였다. 거북선 설계도를 검토한 이순신은 나대용을 전라좌수영의 전선(戰船)을 건조하고 군병의 출납을 감독하는 ‘감조전선 출납 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에 임명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4월 초에 실전 배치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순신은 다 계획이 있었다.
이순신보다 13살이나 많았던 노장(老將) 어영담(魚泳潭, 안성기)이 위험을 무릅쓰고 왜군의 유인책에 앞장선 것도 이순신이 용인술을 돋보이게 하는 장면이었다. 광양 현감으로 이순신과 함께 출전한 어영담은 경상도 앞바다를 한눈에 꿰고 있을 만큼 수로를 읽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순신의 승리 때마다 그의 공적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적이 이미 아군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획대로 기다리는 자와 참지 못하고 조급히 서두르는 자의 결말이 어떻게 다른지는 어영담의 노련함을 통해 드러난다.
이순신의 전쟁관에서 배우다
<한산>을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단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이순신에게 총상을 입혔던 왜군 준사(김성규)가 포로로 잡혀와 이순신에게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전쟁은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다.”
임진왜란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정의 내린 이순신의 확고한 생각은 군사들에게는 왜 백성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백성들에게는 왜 나라를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의병(義兵)은 이순신의 전쟁관을 실행하는 가장 독보적인 존재들이다. 조선의 의병은 서양처럼 민간에서 전쟁에 차출된 단순한 민병대가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나타난 의병은 불의에 저항하는 도덕적 심판자이며 보편적 가치의 준행자였다. 일제강점기에 국권 상실을 목격하며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쓴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뛰어난 우수성(國粹)이며 우리나라의 본연의 성향(國性)’으로 보았다.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병자호란과 구한말의 의병, 그리고 항일투쟁의 독립운동가들이 보여주는 역사는 한민족이 침략자들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굴복하거나 동화되는 일이 없었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드러낸다.
전쟁을 의와 불의로 판단하는 이순신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논어(論語)였을 것이다. 논어 이인(里仁)편의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말이나, 양화(陽貨)편의 ‘군자는 의로움을 첫째로 여긴다. 군자에게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다면 난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맹하고 의로움이 없다면 도둑질을 하게 된다(君子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 爲亂 小人有勇而無義 爲盜)’는 말은 이순신의 전쟁관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군자 같은 이미지로 나온 연유로 파악될 수 있다. 군자는 유교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군자의 으뜸가는 특징은 의에 있으며, 불의를 보고 물러서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순신의 의(義)로 기준을 삼는 전쟁관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를 악을 미워하고 의로움을 좋아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5-7)
그리스도인이 전쟁터에 나가서 적에게 총을 쏘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의와 불의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왜선의 십자가가 남긴 숙제
영화 <한산>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을 때 왜선의 커다란 돛에 그려진 십자가가 나오는 장면에서 혹시 당황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약간의 역사 기술이 필요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으로 20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가톨릭 교인이었다. 나가사키를 포함한 일본 남부 규슈지방의 영주들 가운데는 가톨릭 교인들이 제법 있었고 그들의 부하들 또한 가톨릭 교인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을 포르투갈어인 크리스탕(Cristão)의 일본식 표현인 ‘기리시탄(キリシタン)’으로 불렀다.
기리시탄 영주들은 일본에 와있던 가톨릭 신부를 종군신부로 참가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스페인 출신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로 1593년 12월부터 약 1년 반을 조선에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기리시탄 왜병들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기리시탄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른 왜병과 다른 점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양민을 학살하고 귀와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챙겨갔다.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십자가 깃발을 들고 가는 왜병들의 모습이 비춰진다면 그것은 연출자의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송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임진왜란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앞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진해 웅천동에 있는 우리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세스페데스 공원’이 과연 역사적으로 의(義)로운 일에 해당하는지 시급히 판단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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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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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K-칸’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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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를 추앙(?)하는 칸영화제
대한민국이 영화를 잘 만들고 대한민국 영화가 재미있다는 얘기는 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지난 5월 17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을 연출한 박찬욱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고, 영화 <브로커>(Broker)에서 주연을 맡은 송강호 배우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100년의 영화 역사상 칸국제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두 개를 받은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칸국제영화제는 같은 작품에 두 개의 상을 주는 일이 없는 까닭에 어떤 상이든 받기만 한다면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만 가지고도 대단한 영화라는 인정을 받는다. 왜냐하면 칸영화제는 전세계에서 출품한 2천 편이 넘는 영화 가운데서 단지 20편 내외의 작품을 선정하여 경쟁부문에 올리고 거기서 상 받을 영화와 배우들을 뽑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3대 영화제를 거론하며 다른 국제영화제들도 많은데 굳이 칸영화제에서 상 받은 것을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니냐 하며 겸손하라는 뜻을 비추기도 한다. 현대의 영화들이 다국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한국 영화가 발전하기까지 영화 선진국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세계 최고라는 교만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칸영화제가 바라보는 한국 영화의 위상이 예전과 다르게 ‘추앙’하는 현실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칸영화제가 보수적이라는 비판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 위상만큼은 가히 절대적이다. 세계에는 칸영화제 말고도 베를린영화제나 베니스 영화제 같은 유명영화제들이 더 있다. 그러나 규모나 작품의 숫자, 세계영화계에 주는 영향력을 비교한다면 칸영화제에 견줄만한 영화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마치 영화계의 노벨상 같다고나 할까.
이번 칸영화제는 경쟁 부문 뿐만 아니라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한국 영화들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배우로서 활동해오던 이정재 배우가 첫 연출을 맡은 감독 데뷔작 <헌트>(Hunt)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박수갈채를 받으며 시사에 성공했다. 칸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이자 가장 많은 객석인 3천 석을 보유한 뤼미에르 극장을 배당받은 <헌트>는 전회 매진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감독들의 약진 또한 대단했다. 정주리 감독은 신작 <다음 소희>로 국제비평가주간 폐막작 상영의 영광을 안았고, 문수진 감독의 <각질>은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한 9개 영화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칸영화제 극장 밖의 한국 영화 열풍은 더욱 뜨거웠다.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들을 포함하여 각국의 유명 영화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들고나와서 팔고, 또 영화 수입업자들 또한 흥행이 예상될만한 영화들을 찾아 촉각을 세우며 거래하는 영화시장이 서는 데 여기서도 한국 영화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외에도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과 신연식 감독의 <카시오페아>를 포함하여 16개 작품이 마켓에서 주목할 만한 한국 영화로 현지 언론들은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올해 칸영화제에선 어디를 가도 한국 영화가 있었다. 이것을 현지 언론들은 ‘K-칸’(Korea-Cannes)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켜 본 한국영화 발전의 역설
칸영화제와 한국인들이 유달리 사랑하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의 가족영화 <브로커>(Booker)가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일은 새로운 영화의 트렌드 속에서 한국 영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즉 한국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이면서 세계화된 속성을 영화 <브로커>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국경을 초월하는 현대 영화 제작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감독은 일본 사람이지만 배우들과 제작사는 모두 한국 국적이다.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송강호를 비롯하여 강동원, 배두나, 아이유(이지은) 등의 주연급 뿐만아니라 송새벽, 김선영, 이동휘, 박해준 등 한국영화계의 명품 배우들이 단역을 마다하지 않고 총출동하여 보는 즐거움과 작품의 질을 높였다. 이는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라고 하는 세계적인 연출가와 함께 한다는 의미도 개인적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제작과 배급은 한국 최고의 영화투자사 CJ ENM이 맡았다.
둘째는 국경을 초월한 최고의 조합을 보여주었다. <브로커>의 장르는 가족영화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영화를 통해서만 칸영화제에서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 2013)로 6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데 이어서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2018)은 제71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송강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통해 소시민적인 아버지 연기의 달인으로 평가받은 명배우다. 거기다 입양 사기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가족영화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점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영화계의 흐름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셋째는 국경을 초월하여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빚어지는 인간애라는 주제가 통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손에서 버려지는 영아들과 갓난아기를 해외에 입양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한국사회의 불행과 고난의 역사를 담고 있다. 6.25 전쟁고아들을 해외로 입양시켜야 하는 빈곤의 상황은 한국 역사가 낳은 비극이지만 영화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버려지는 아기들이 있고, 이들의 생명을 어떻게든 구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키려는 교회와 기관의 존재는 급속한 사회변화를 겪는 한국 사회의 난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적으로는 흥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의 고난과 불행의 역사와 사회상은 한국 영화를 발전시키는 또 다른 원동력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영화 <브로커>는 채무에 시달리는 상현(송강호)과 보육원 출신으로 교회의 베이비 박스 시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수(강동원)가 몰래 협작하여 유기된 아기들을 양부모에게 연결시켜주고 돈을 받는 입양 브로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브로커의 실상을 알아버린 아이의 엄마 소영(아이유)이 나타나고 이들을 뒤쫓는 형사들(배두나, 이주영)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얽히고설키기 시작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여느 가족영화에 비해서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 역시 범죄자를 쫓는 형사물의 특성을 결합시킨 까닭이다.
영화는 진정한 가족애를 인식시키기 위해 ‘동시 대조 효과(The Effect of Simultaneous Contrast)’를 활용한다. ‘동시 대조 효과’란 사람들이 색을 인식할 때 비슷한 색보다는 다른 색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그 경계 부분에서 가장 크게 인식한다는 이론이다. <브로커>는 객관적으로 보자면 불법입양 범죄자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가족애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건강하고 이상적인 가족 안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색깔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가족의 중요한 가치인 생명성은 단연 빛나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대신에 ‘무엇이 가족인지’를 새롭게 인식시켜 온 감독의 주제의식은 <브로커>에서도 여지 없이 들어난다. 가족의 가치에 대한 뻔한 대답이 아니라 의식의 전환을 통해 가족의 본질을 물으려는 감독의 의도는 이번 영화에도 계속된다.
브로커들과 소영은 아이를 불법 입양시키는 과정에서 함께 차를 타고 움직이며 마치 가족처럼 행세한다. 아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가족애를 느끼며 생명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들이 가족에 대해 깨달은 것은 바로 생명성이었다.
<브로커>에서 불법 입양 조직을 뒤쫓는 형사 수진(배두나)은 처음에는 아이를 버리는 엄마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도대체 아이는 왜 낳는 거야!” 어찌 보면 아이를 돌볼 형편이 안되는 미혼모를 포함한 영아유기의 현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영(아이유)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낳기 전에 죽이는 게,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죄가 가벼워?” 정말 뼈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낙태 합법화에 따른 논쟁이 여전히 사회문제로 남아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 영화는 정말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출산과 입양은 기본적으로 생명성에 대한 존중의 가치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형편이 어렵지만 아이를 낳는 엄마의 마음에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마음 속 깊이 배어있다. 영화 속에서 불법적인 입앙 행위를 일삼는 브로커지만 그들에게 생명은 가족을 연계시키는 의미있는 가치로 와닿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이유 역시 생명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모두 불법자들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살아줘서 고마워!”
적어도 가족은 살아서 함께 있다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이 절대적 가치를 지녀야 함을 우리는 잊고 산 것이 아닐까? 생명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야 함(잠9:6)은 성경에 바탕을 둔 절대적 가치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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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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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차산업혁명 시대에 부활한 김용기 장로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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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亂世)에 김용기를 소환한 이유
가수 진성이 부른 노래 ‘보릿고개’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가사는 가수 본인의 어머니가 경험했다는 가난했던 시절을 노래하고 있다. 지난해 추수한 쌀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에서 보리를 거둬들이려면 아직 멀었던 난감했던 시기를 보내는 방법은 물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어디 어린 진성의 어머니뿐이었겠는가! 그 시절 대한민국의 국민은 가난을 운명이라 여기며 원 없이 배 터지도록 먹는 소원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며 살아야 했다.
지난 4월, 국제통화기금 IMF는 2021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1조 8천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4,800달러라고 공식 확정 발표했다. 전세계 순위로는 캐나다에 이어서 10위에 올랐다. 이미 작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분류하였듯이 한국은 이제 가난과는 거리가 먼 경제선진국으로 발전한 나라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기보다는 두툼한 지방으로 채워진 뱃살을 걱정해야 하는 국민으로 바뀌었다.
김상철 감독은 과감히 김용기 장로를 영화를 통해 소환시켰다. 이것은 감독이 가진 영화 철학에 기인한 것으로 한국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열망을 드러내는 일에 다름아니다. 즉 그는 영화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한국 교회가 김상철 감독을 기억하게 만든 영화는 <제자 옥한흠>(2014)이었다. 한국 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 <제자 옥한흠>은 그 문제점의 원인을 목회자의 책임에 두고 목회자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가득차 있었다. 김상철 감독이 이를 위해 소환한 인물이 바로 사랑의교회를 일구며 교계에서 존경받았던 옥한흠 목사였다. 영화는 옥한흠 목사의 생전 기록 영상들을 빌려서 그가 한국 교회의 현실을 걱정하고 미래를 안타까워하면서 남긴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교회를 살리는 방법은 목회자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 교회에는 <제자 옥한흠>을 볼 수 있는 교회와 볼 수 없는 교회로 나눌 수 있다는 교계 내부의 반성과 쓴소리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제 김상철 감독은 김용기 장로를 소환했다.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난세론’으로 시작한다. 말세라 하지 않고 난세라고 한 것은 ‘아직 희망이 있어 어려움과 환란 속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좋은 세상, 좋은 사회를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는 김용기 장로의 말로 영화는 시작한다.
디지털 세대에게도 가나안 정신은 통할까?
경제발전과 4차산업혁명의 시기를 사는 현대 한국인과 한국 교회는 난세를 개척한 숨은 영웅 김용기 장로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나마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농촌사회의 계몽운동가 정도로 여길 뿐이다. 그가 세운 가나안 농군학교는 산업화 사회 이전의 농촌사회에서나 필요한 운동일 뿐 디지털 혁명이 거세게 부는 오늘날 과연 그를 기억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는 사람도 있다.
영화 <가나안 김용기>는 두 가지의 논리로 그가 이 시대에도 김용기와 가나안 농군학교의 정신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첫째는 전국민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스승과 어른의 필요성이다. MZ세대를 포함해서 모든 세대에게 어른은 꼰대와 잔소리꾼으로 읽히기 쉽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듣는 사람의 문제이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즉 기성세대가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존경받았다면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기 장로는 행동으로서 자신의 신앙과 철학을 보여주었고, 그 행동은 빈곤으로 가득 찬 난세를 개척하는 디딤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감독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문구는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로부터 가져온 말이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김용기 장로는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이 정신 개혁 운동을 한국 사회에 퍼뜨렸다. 기독교 정신으로 시작한 가나안 농군학교는 교회와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승려나 수녀들도 훈련을 받았고, 농촌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산업계에 종사하는 근로자와 사업가들 모두가 참여하는 생활 혁명으로 이어졌다.
성경이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듯이, 김용기라는 어른이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가나안 정신은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둘째는 가나안 농군학교가 정신적인 면에서 한류열풍의 콘텐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졸업하고 아프리카에서 가나안 정신을 심고 있는 활동가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장면은 영화 구성의 단조로움을 깨며 MZ세대가 좋아하는 ‘국뽕’을 제공하여 영화의 흥행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즉 한국이 스마트폰을 잘 만들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정신세계에도 영향을 주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소재였다. 그러나 영화는 메시지의 진중함에 너무 몰두해 있어서 <울지마 톤즈>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지 아쉬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도 가나안 농군학교가 수출이 되어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사단법인 세계가나안운동본부를 설립하여 현재 세계 12개국에 15개의 가나안농군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우리의 옛 모습처럼 가난이 가져온 곤란한 처지에 있는 나라들이다. 지구촌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나안 농군학교가 근로, 봉사, 희생정신을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류문화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한국이 유엔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남의 나라를 돕는 위치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경제원조를 포함해서 정신적인 도움을 제공한다는 점 또한 유일무이하다.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빈곤의 해결방법이 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고, 유럽의 선진국들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엄청난 돈으로 배상해왔다. 그러나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는 빈곤의 악순환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빈곤한 상황을 고치는 방법은 돈보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정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영화는 전하고 있다.
고무신과 박정희를 넘어서
영화 <가나안 김용기>는 민족과 역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 밑바탕에 기독교 신앙이 흐르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대한독립을 넘어서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도 가슴에 품고 싶었던 풍운아 김용기가 어떻게 농촌운동가로 변신했는지를 영화는 매우 의미있게 설명한다. 사회와 민족의 변화가 가정과 생활 개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가나안 정신은 김용기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김용기는 고무신과 박정희 전대통령과의 일화에 맞춰져 있다. 흰 두루마리에 하얀 고무신은 1966년 막사이사이상 받기 위해 필리핀 마닐라의 시상식에 선 김용기 장로의 행색이다. 해외 기자들은 번쩍이는 구두가 아닌 흰 고무신에 주목했고, 김용기 장로는 한국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고무신을 벗지 않겠다는 연설을 통하여 기립박수를 받는다. 가난이 자랑이 될 수는 없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의지와 정신의 소유자가 얼마나 민족의 자랑이 될 수 있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요즘 MZ세대들은 고무신에 색깔과 모양을 입혀서 신고다니는 것이 유행이라 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또 한가지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한 일이다. 김용기 장로는 삶은 감자와 빵으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에게 여기에서는 누구나 먹기 전에 식사기도를 드려야 한다며 식사기도를 한 일화를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10분이 넘는 기도가 이어지자 경호원이 와서 빨리 끝내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장면이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새마을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고무신과 박정희로 상징되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대한 생각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며 미래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두고 온 세상을 향한 한국의 정신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지 심는대로 거두는’(갈 6:7) 농부의 믿음은 성경적이면서 세계에 통하는 사상이 아닌가!
영화 <가나안 김용기>가 과연 난세의 한국교회와 사회에 가나안 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 그 답은 영화를 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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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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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구속과 은혜에 대한 은유가 빛나는 단편영화 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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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콘트라팍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You raise me up>이 있다. ‘내 마음이 우울하고, 나의 영혼이 많이 지칠 때(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로 시작하는 가사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들어 산정상에 세우시며 폭풍이 치는 바다 위를 걷게 해주신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교회 안에서도 즐겨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출처를 보면 누군가의 신앙고백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나 복음송이 아닌 팝송이란 사실에서 다소 놀랄 수 있을지 모른다. 리듬과 멜로디가 그리스도인의 정서에 맞고 신앙적인 해석이 가능한 가사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You raise me up>은 북아일랜드 민요인 ‘Londondery Air(아, 목동아)’를 기반으로 한 노래로 2002년에 출시된 시크린 가든의 앨범 <Once in a red moon>의 수록곡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쉬 그로반(Josh Groban), 웨스트 라이프(Westlife), 일 디보(Il Divo)등 수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노래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소향과 소울 등 CCM 가수들이 즐겨 불렀고 어느덧 교회 행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기곡으로 자리 잡았다.
<You raise me up>의 출발점이 팝송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에 결코 실망할 필요는 없다. 교회음악의 역사에는 <애니 로리(Annie Laurie, 찬송가 493장)>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찬송가 280장)>과 같은 민요 선율이나 세속적인 음악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사용한 예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세속적인 리듬이나 멜로디에 기독교적인 가사를 붙여서 사용한 교회음악을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 부른다.
기독교 영화에도 ‘콘트라팍툼’이 있다. 세속적인 영화지만 그 메시지가 매우 성경적이고 기독교 신앙을 북돋우는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마치 처음부터 기독교 영화로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는 영화를 말한다. 바로 체코의 단편영화 모스트(MOST, 2003)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터넷에서 떠돌던 편집 영상을 통해서 감동을 받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름아름 교회에서 사용해왔지만 정작 완편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최근 일이었다. 김상철 감독의 기독교 영화사인 ‘파이어니어21’이 정식으로 수입하여 DVD로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가 체코의 보비 가라베디안(Bobby Garabedian) 감독이 만들었고 2003년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후보에도 오른 일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영화 ‘모스트’
<모스트>가 한국교회에서 주목을 끌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속의 메시지를 쉽게 읽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에 배가 지날 때마다 철교를 들어 올리는 도개교(跳開橋) 관리인과 그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읽힌다. 도개교가 들려있는 상황에서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본 아들이 많은 사람이 위험에 빠진 것을 직감하자 도개교를 내리는 레버를 조작하다 그만 기계장치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를 본 아버지는 중요하고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아들을 살리려면 기차가 강으로 추락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내리면 아들은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모스트>에 나타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는 구속의 메시지는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대속의 은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체코의 고풍스런 도시 분위기와 기차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묻어나서 서정적이며 주연 배우들의 인간미를 물씬 풍기는 연기는 이 영화의 예술적 가치가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모스트 이전에 ‘대속’이 있었다
체코 영화 <모스트> 이전에 한국 영화 <대속>(代贖, 1998)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속>을 만든 오풍원 감독은 미국 기독교 명문 대학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후 한국에 돌아와 서울 강남의 사랑의 교회에 방송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서 문화의 영향력을 새롭게 인식하던 시기였고, 교회 또한 예배와 교육, 선교 등에서 영상의 활용가치가 높아지던 때였다. 오풍원 감독은 새로운 세대들의 눈높이 맞춰 신앙적으로 ‘좋고’ 또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상작품을 만든다는 취지에서 ‘조코재미’라는 제작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고 <대속>은 그 첫 작품이었다.
사랑의 교회 중등부가 친구초청잔치를 통해 전도의 목적으로 상영한 <대속>은 초신자나 비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를 통해 구원받은 사건을 조명하는데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 해 문화선교단체인 ‘낮은 울타리 문화선교회’가 연세대 총학생회와 함께 벌인 ‘신촌 문화축제’에서도 상영될 만큼 <대속>은 비기독교인에게 그들의 눈높이 맞춰 기독교의 구속 사상을 전파하는데 매우 설득력 높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때는 CCM 가수인 홍순관의 ‘천국의 춤’을 사용했고 슈베르트의 ‘숭어’와 우리 가곡 ‘비가(悲歌)’를 영화에 입혀서 친근감을 더하기도 했다.
휴일을 맞아 간이역에서 근무하는 철도원인 아버지를 따라나선 아들은 철로를 변경하는 제어장치가 고장나는 바람에 직접 현장으로 나가 철로를 변경하다 기차에 치여 죽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다. 만일 아들이 철로를 변경하지 않았다면 기차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통곡과 아들을 잃은 슬픔이 영화의 전면에 흐르지만, 열차의 승객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 채 세속적 즐거움에 살아갈 뿐이었다.
주인공이 철도원과 그 아들의 등장, 그리고 달려오는 기차 속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아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정작 구원을 받은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 등은 <모스트>를 빼닮았다. 오풍원 감독은 이 기가 막힌 구속의 모티프를 어떻게 생각해 낸 걸까? <모스트>의 보비 가라베디안 감독은 오감독의 <대속>을 봤을까? 기회가 생기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교회 청년들이 만든 영화 <버스>
영화예배로 유명한 ‘꿈이있는교회’ 담임목회자인 하정완 목사는 청년들의 삶에 미치는 영화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또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영화를 사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남이 만든 영화를 활용하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영화제작에도 나섰다.
꿈이있는교회는 교회 소속의 영화사 ‘아이즈 필름’을 창설하고 2010년 5월 20일 대학로 풀빛극장에서 첫 작품으로 <버스> 시사회를 개최했다. <버스>는 십계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데칼로그(Decalog) 시리즈의 첫 영화였다.
<버스>는 총제작을 담당한 하정완 목사가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처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버스에 탄 생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치어 죽여야 했던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의지와 결단을 통해 하나님과 아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재가 기차에서 버스로 바뀌었을 뿐 <모스트>나 <대속>의 구조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버스는 기차와 같이 세상을 상징한다. 죽음의 위기로 내몰리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관심이 없는 것이 세상이다. 버스 안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청년들은 브레이크가 고장나는 바람에 내리막길을 치닫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을지를 걱정할 뿐이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먹먹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승객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죽인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아버지란 말인가!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2010년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단편영화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음으로서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광을 누렸는가 하면, 그해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서울기독교영화제에서 기독교인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버스>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에서 제작한 영화라는 점에 있다. 꿈이있는교회의 청년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니었으면 꿈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과 21분짜리 단편 드라마에 불과하지만 2천만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갔고, 감독부터 엑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돋보인 영화였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배우 가운데 주연인 버스 기사 역의 이상직을 제외한 30여 명의 출연자들 대부분이 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출을 담당한 장재현 성도는 이후에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의 감독이 되어 한국영화계가 주목하는 흥행의 귀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모스트>와 <대속> 그리고 <버스>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들 영화의 메시지가 성경의 구속사건을 비유적으로 묘사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기차나 버스에 탄 사람들이 한 생명의 희생으로 인해 살게 되었음을 세상의 언어로는 ‘이타적 죽음’이라 말한다. ‘이타적 죽음’은 사회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분열된 사회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는다. 2001년 도쿄 지하철 역에서 일본 취객을 구하다 숨진 이수현 청년의 희생이 한일 양국의 냉각 관계 속에서도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단단히 잇는 끈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다른 모든 ‘이타적 죽음’의 원형의 역할을 한다.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세상의 어떠한 이타적 죽음도 예수의 죽음보다 더할 수는 없다. 이것은 <모스트>와 <대속> 그리고 <버스>가 세상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선한 작품이지만, 관객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 사건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어지는 적절한 해설이 뒤따른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이보다 훌륭한 영화선교는 없을 것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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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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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독교 멜로드라마는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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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랑은 언제나 간절하다
연애와 결혼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건 교회 안의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연애·결혼·출산·내 집 마련·인간관계 등 5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5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가 출현했다고는 하지만 이성으로부터 사랑받고 또한 사랑하고 싶은 뜨거운 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 사이에 한 몸을 이루게 하신(창2:24)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치고 연애와 결혼이 성경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교회 예배에만 국한되어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온 삶의 영역에서 실천되는 것이라면 오히려 성경적인 연애와 결혼을 이루고 싶은 것이 요즘의 똑똑한 크리스천 청춘들이다. <아이 스틸 빌리브>(I Still Believe, 2020)는 대충 교회에 다니며 신앙보다는 연애에 관심을 둔 청년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신앙에 중심을 둔 청춘 남녀가 연애와 결혼 그리고 고통을 넘어선 사랑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 크리스천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유명 크리스천 보컬인 바트 밀라드(Bart Millard)의 삶과 신앙을 다룬 영화 <아이 캔 온리 이매진>(I can only imagine, 2018)을 만들어 유명해진 어윈 형제(Andrew Erwin/Jon Erwin)감독이 이번에는 세계적인 CCM 팝 가수 제레미 캠프(Jeremy Camp)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 역시 미국 CCM계의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인 ‘도브 어워즈’ 5회 수상에 빛나는 유명 크리스천 뮤지션이지만, 그의 사랑과 결혼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그의 감동적인 노래는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져서 암 투병을 해야 하는 여성과 결혼을 하고, 치유라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천국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이 그의 노래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중들로 가득 찬 공연장에서의 사랑 고백과 사랑하는 여인의 회복을 위해서 관중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모습은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빼앗고도 남을 만한 장면이기도 하다.
장르로서의 기독교 멜로드라마
기독교 영화 안에서 멜로드라마는 통속적인 멜로물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지만, 신앙 안에서 혹은 신앙을 위해서 연애감정을 넘어서려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구하는데 내적인 갈등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김훈순과 동료 교수들이 함께 쓴 <영상콘텐츠연구>의 이론을 빌리자면 <아이 스틸 빌리브>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나 스타일이 이 영화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1)일반적인 유형의 인물을 설정하고 (2)남녀 간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지며 (3)가족이나 직장 등 사적인 배경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고 (4)비극적 사건의 전개로 인한 파국의 위기와 (5)비극적 정서를 강조하는 데서 일어나는 정서의 과잉 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장르란 영화의 비슷비슷한 소재나, 주제, 형식 혹은 구성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영화를 구분하는 분류법이다.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다는 점도 장르영화를 이해할 때 항상 기억할 점이다. 즉 장르 영화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의 반복성이 매우 중요하지만, 식상하지 않아야 하며 감독 고유의 성향도 드러나야 하는 까닭에 조금은 다른 변이성이 반드시 들어가야 좋은 장르 영화로 평가받는다. ‘비슷하지만 다르다’라는 평가는 성공적인 장르 영화의 핵심 사항인 셈이다.
<아이 스틸 빌리브>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 (1)평범한 기독교 가정에서 음악에 대한 꿈을 갖고 대학으로 떠나는 신입생인 제레미 캠프(K.J.아파)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 본 아버지(게리 시니즈)는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고급 기타를 선물하는 애정을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음악은 취미였지만 아들에게는 전문가적 소양이 있다고 본 아버지의 판단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옳은 것으로 판명난다. (2)CCM 콘서트 현장에서 신입생 제레미는 우연히 멜리사 헤닝(브릿 로버트슨)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3)멜리사의 전 남자 친구 때문에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감정들을 분출하지만 이들은 다시 결합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4)그러나 멜리사는 암으로 인해 고통받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기도를 하고 아내 멜리사가 입원한 병실에서 노래를 불러주지만 아내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다. (5)제레미는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기타를 부수는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다룬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나타나는 장면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 만큼은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기적을 바라지만 기대가 절망으로 바뀔 때 절망은 분노로 변하기 쉽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의미를 잃고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드라마로서 <아이 스틸 빌리브>는 일반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특징을 따르지만 분명 다른 면모도 갖추고 있다.
기독교 멜로드라마는 분명 다른 데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청춘들의 연애와 사랑은 일반적인 젊은이들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달라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개입시키자면 죄인 된 속성을 가지고 남녀가 만나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혜 가운데서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첫째, 위기에서 신앙의 개입은 기독교 멜로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제레미는 멜리사에게 한눈에 반해서 사귀기를 청하지만 멜리사는 하나님과 언니에게 올해는 딴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며 일단 거절한다. 제레미는 멜리사가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를 언급하며 그 때문인지를 묻는 바람에 멜리사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자신의 성급한 처사로 미숙한 처신과 오해로 인해 헤어지자는 그는 멜리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님도 우리 사랑을 응원하신다면? 놓치면 안되는 사랑인 거지?”
정말 교회 다니는 청년이 이성을 유혹(?)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고단수의 작업 멘트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무 데나 개입시키는 일은 옳지 않지만, 인생의 중대한 일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것은 바른 신앙이라 볼 수 없다. 청춘의 삶에서 이성을 사랑하고 연애를 하는 일은 직장을 구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는 일 만큼 중요하다. 특히 결혼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어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통속적 멜로드라마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남녀관계에서 왜 하나님을 개입시키는지 세상 사람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크리스천 청춘이라면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운명은 그저 우주의 운행과 우연이 맺어준 인연으로 여기지만, 이 운명을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운명(運命)’이란 용어는 자칫 운명론과 연계될 수 있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 우연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우주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안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까닭에 연애와 결혼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일은 당연하다.
둘째, 연애의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개입은 기독교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통속적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은 끓어오르는 감정의 분출과 육체적 욕망을 통해 드러난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개방된 연애관이 보여주는 현실일 수 있다. 그런데 <아이 스틸 빌리브>의 연인들은 하늘의 별을 보며 주님의 무한하심을 얘기한다. 수십억 개의 별 하나하나를 수 놓으신 하나님의 창조성에 감탄할 뿐이다. 마치 시편 8편에서 별을 보며 다윗이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생각하는 것과 닮았다. 다만 수명을 다하는 별이 가장 빛난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여주인공의 비극을 예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셋째,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서 이 영화는 명확히 기독교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아내를 떠나보내는 젊은 남편의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가 있으랴마는, 고통에 대한 신앙적 질문과 해석 그리고 그것이 창조적인 발전으로 이어져서 성공하는 크리스천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분명 일반 영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들에겐 아버지의 위로가 중요하다
아내를 잃고 병실에 쓰러져버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프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제레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아버지에게 묻는다. 제레미의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아내를 떠나 보낸 아들을 위로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왜 하필 멜리사였는지 묻는 거라면 글쎄, 모르겠다 정말로. 미안하다. 솔직히 지난번에는 결혼한다는 널 이해하지 못했다. 멜리사와 함께 고난의 길을 택했잖니.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기로. 그런데 가족을 위해서라면 나도 너처럼 행동할 것 같다. 그게 사랑이니까. 우리 아들은 정말 사랑을 했더구나. 그런 사랑은 흔치 않는 기회거든. 네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겠지만 이건 알겠어. 실망과 낙담으로 얼룩진 인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충만한 삶이란 걸.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버지는 아들을 인정함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러한 아버지는 기독교 영화에서 중요하다. 흔히 멜로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기독교 드라마에서 아버지는 자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수용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인생의 어려움에 대한 조언자 역할을 한다.
교회 청년회가 영화관에서 다시 봐야 하는 영화
<아이 스틸 빌리브>는 2022년도를 시작하는 첫 기독교 영화가 되었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은 현실에서 기독교 영화를 극장에 거는 일은 큰 모험에 가깝다. <아이 스틸 빌리브>는 보기 드문 청춘 멜로드라마로서 영화관의 주 고객층인 젊은이들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개봉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서울의 ‘필름포럼’ 같은 기독교 전문 영화 상영관에서는 계속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교회 홍보의 어려움을 겪는 현실에서 관객을 모으는 데는 어려운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극장에 관객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영화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꼭 극장이 아니더라도 IPTV든 OTT 서비스를 이용하든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면 인생에 보탬이 되는 영화한 사실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음악영화로서 오락적 가치도 충분하고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성경적이어서 좋다. 음향시스템이 잘 갖춰진 영화관에서 다시 한번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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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4